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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알피피(TRPP) ‘Here To Stay’ (2022)

평가: 3/5

대중적인 코드와 서브컬쳐 음악 사이에서 탄생한 티알피피(TRPP)는 전형을 거부한다. ‘부캐’와 ‘코리안 슈게이징’을 섞은 이 조합은 유쾌하면서도 독특한 매력으로 인디 신을 교란하기 시작했다. 몽환적인 연주에 흐릿한 목소리를 얹은 < Trpp >의 질주는 이제 1년이 지났을 뿐이지만, 숨 가쁘게 돌아온 < Here To Stay >는 등장의 들뜬 분위기를 잠시 잠재우며 느긋한 발걸음을 옮긴다.

따스한 감성으로 중심을 잡는 싱어송라이터 윤지영, 노엘 갤러거 내한 당시 오프닝 무대를 책임진 밴드 바이바이배드맨의 프론트 맨 정봉길, 유쾌한 밴드 일로와이로의 기타리스트 강원우. 새로운 지붕 아래 모인 인디의 선봉장들은 얼터너티브, 드림 팝 등의 재료들을 편견 없이 배합한다. ‘Clue’에서는 1990년대 다부지고도 처량했던 록의 대표주자 스매싱 펌킨스를 회상하고 ‘Rainbow spell’과 같이 잔잔한 곡에서는 브릿 팝의 서정성을 우리말로 번역하기도 한다.

최종적으로 혼탁한 사운드의 슈게이징이 정갈한 모습으로 자리 잡는다. 첫 만남의 설렘을 풍기던 1집처럼 ‘Lifetime’과 ‘Higher than the sun’등의 트랙에서는 들뜨기도 하지만 다소 잠잠한 흐름이다. 이는 노이즈 록의 아들 격인 이 장르에 드나들 수 있는 편안한 출입문 역할을 하면서도 그 소음이 선사하는 미가공과 날것의 매력을 반감시키며 양날의 검으로 작용한다. 비슷한 부류의 음악과 다르게 안온한 감상을 선사하지만, 반항적인 구간의 결핍 탓으로 무료감에 빠지기도 쉽다.

스산하고 몽롱한 분위기를 풍기는 가운데 그 아래 새겨진 정체성은 데뷔작에 비해 더 확고하다. ‘반사’와 ‘명상’ 등의 노랫말 안에는 티알피피만의 추상적이고 현학적인 색깔이 선명하게 묻어나고, 삶의 윤회를 논하는 ‘Circle’과 ‘Here to stay’는 번역 그대로 이들의 기행이 ‘원’처럼 돌고 돌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질 것’을 선언한다.

엉성한 콘셉트 아래 감춰져 있던 티알피피의 실마리를 풀고 그 뜻을 설득하기 위한 해설서 역할을 충분히 수행했다. 신보를 기점으로 이 기묘한 회합의 출발선을 되짚어보면 과거 음악의 짙은 향수로부터 비롯된 슈게이징의 매력을 다시금 눈치채고 받아들이게 된다. 우연한 만남이 새로운 발견으로 귀결되는 과정, 티알피피는 존재 자체로 흥미로운 세렌디피티(Serendipity)다.

– 수록곡 –

  1. Here to stay
  2. Clue
  3. Play
  4. Lifetime
  5. 반사 (Reflection)
  6. 명상 (Meditation)
  7. Higher than the sun
  8. Little boy / the darkest day
  9. Dodgy
  10. Rainbow spell
  11. Oblivion
  12. Furykawa
  13. Cir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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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인 ‘Spells'(2022)

평가: 3.5/5

공들인 성장, 반짝이는 서사
2011년 즈음 홍대에 발을 들인 이후 줄곧 ‘코스모스 슈퍼스타’로 활동하던 그가 본명인 ‘한정인’으로 첫 번째 정규 음반을 냈다. 앞서 발매한 2개의 싱글 ‘Extra’, ‘슬픔의 맛’을 포함한 총 14개의 수록곡. 음반은 긴 시간 심혈을 기울여 만든 정성을 대변하듯, 많은 곡 수와 꾹꾹 눌러 담은 감정들로 용솟음친다. 한 곡, 한 곡, 탄생 내막을 묻게 하는 노랫말. 매끄럽게, 또 때론 예상 밖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곡 배치도 힘 있다. 한정인이 주도권을 쥐고 듣는 이의 호흡을 이끈다.

전자음을 중심으로 어둡고 맑은 신시사이저를 교차하며 선율을 뽑았다. 이는 전작 < Eternity Without Promise >(2019)와 비슷한 구성이나, 그는 신보에서 목소리를 보다 앞으로 끌어온다. 어둡고 몽롱한 꿈속 한 가운데를 헤엄치던 것 같던 과거의 보컬 사용에서 탈피, 선창하듯 제 색을 내는 목소리의 운용은 더 이상 음악 뒤에 숨지 않으려는 뮤지션의 의지로 읽힌다. 이 의지는 외로움, 두려움, 괴로움, 사랑 등의 감정을 적극 드러내는 노래 속에서도 천명한다.

‘네가 원하는 것은 친구가 아닌’ ‘특별한 단 한 사람’이라 말하는 ‘Listen & repeat’. 경계에 서 있는 것만 같은 불안한 삶을 고백하는 ‘Borderline’, 뱉을 수도 삼킬 수도 없는 ‘슬픔의 맛’을 노래하는 ‘슬픔의 맛’ 등 곡 안에서 한정인은 노래와 함께 실컷 나를 풀어낸다. 이 적극적인 고백의 기조가 특히 돋보이는 지점은 타이틀 ‘Wallflower’에서 ‘Badluckballad’를 지나 ‘도시전설’로 이어지는 전반부.

레트로한 댄스팝 ‘Wallflower’는 중무장한 대중 선율로 듣는 이를 댄스 플로어 위로 데려간다. 땀 흘리며 흠뻑 뛴 후 음반의 정체가 이 흥겨움 속에 놓여 있는가 할 때, 무너져 내리는 어두움으로 가격하는 ‘Badluckballad’가 흐르고, 반전되는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새침한 어조의 ‘도시전설’이 재생된다. 종잡을 수 없는 항해가 쫀쫀하고 쫄깃해 음반 단위 청취의 즐거움을 높이 끌어 올린다.

‘인디 음악’으로 통용되는 오늘날 인디씬에 내 색으로 내 음악을 하는 뮤지션들이 살아가고 있다. 긴 시간 공들여 쓴 이 음반으로 한정인은 자신이 독보적으로 맑고 청아한 창법에 뒤통수를 때리는 멜로디로 삶의 양가감정을 노래하는 음악가임을 증명한다. 그 제목도 웅장한 ‘Badluckballad’에서 ‘불행한 미신’에 의해 ‘행운을 불러온다는 미신을 믿는 마음’을 잃게 된 그가 앨범명을 Spells 즉, ‘주문들’로 지은 이 간극을 깨달을 때까지 앨범을 두 손에 꽉 쥐어 보길 추천한다. 그 의미를 깨달았을 때, 무엇을 시작할 수 있는가.

– 수록곡 –
1. Extra (Feat. 이이언)
2. Listen and repeat
3. Wallflower
4. Badluckballad
5. 도시전설
6. 차라리
7. Festival
8. Borderline(Feat. 천미지)
9. The boy named luke and the girl named lily(Feat. 김사월)
10. One second time machine (Prod. Piano Shoegazer)
11. 나나의 졸업식
12. 슬픔의 맛(remastered)
13. 하지
14. 묵시록(Feat. 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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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34 파제(Pa.je)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서른네 번째 주인공은 관성에 갇히지 않고 음악으로 내 이야기를 하는 뮤지션 파제(Pa.je)다.

뮤지션 파제(Pa.je)는 음악가가 어디를 향해 어떻게 움직이는지 묻게 한다. 차 막히는 주말 아침, 홍대 인근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저녁에 있을 공연을 위해 거주지인 인천에서 서울로 막 도착했다고 했다. 카페를 운영하고, 음악을 만들고, 공연을 열고, 무대에 서는 그는 바쁘지만 편안한 인상으로 질의에 답했다.

군 제대 후, 본격적으로 기타를 잡고(그의 기타 실력은 정말 엄청나다!)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는 그에게 ‘음악이란 무엇인가’ 물으니 “결국에는 내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 중간 매개물”이란 답이 돌아왔다. 음악이 목표가 아닌 수단이라는 예상치 못한 답변에서 그만큼 일상에 깊게 침투한 음악의 파워가 느껴지는 듯했다. 음악가는 어디를 향해 어떻게 움직이는가. 파제는 삶 속에서 음악과 함께, 음악을 곁에 두며, 담담하게 걸어 나간다.

2020년 연주곡으로 채워진 정규 음반 < Pa.je Archive >를 발매했고 8월 30일, 오랜만에 EP < 관성의 바깥 >을 발매했다.
작년에 음반을 하나 내긴 했다. (무엇이냐고 물으니) 홍대에서 긴 시간 같이 활동했던 뮤지션 ‘엉망’과 ‘포래스트’라는 팀명으로 < Piece Forest >를 냈다. 엉망이 노래를 부르고 내가 작곡, 편곡, 연주를 했다. 사실 < 관성의 바깥 > 녹음도 작년에 다 끝낸 상태였다. 2022년도에 다른 일이 무조건 많을 것으로 예상했기에 앨범에 대한 방향성을 고민하던 와중 인천문화재단에 좋은 지원사업이 떴고 다행이 지원받게 되어 < 관성의 바깥 >을 발매하게 되었다.

< 관성의 바깥 >과 관련된 공연 혹은 활동 계획이 있다면?
11월 19일에 인천에 있는 카페 겸 문화공간 ‘인천여관X루비살롱’에서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EP 중심의 공연은 아니고 그냥 파제라는 뮤지션이 해오던 지난 활동들의 연장선상으로 봐주면 좋겠다. < 관성의 바깥 >의 후속 공연은 아마 없지 않을까? 이번 음반은 연주자로서, 싱어송라이터로서 파제가 아니라, 마음 가볍게 시간이 날 때마다 만든 곡들을 묶어 발매했다. 작곡부터 그렇게 진행했다 보니 발매 이후의 공연을 염두 하지 않았다. (웃음)

‘관성의 바깥’이라는 음반 명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사람들이 인식하는 뮤지션 파제의 이미지가 있다. 기존 발매했던 ‘제주의 봄’과 같은 따스한 어쿠스틱 사운드의 음악이 있고, 버둥 혹은 다른 뮤지션들과 콜라보한 음반에서처럼 싱어송라이터, 포크 뮤지션으로서의 행보가 있다. 이것 말고 내가 가진 영역, 즉 우주가 상당히 큰데 그걸 보여주기가 사실 쉽지만은 않다. 그런 면에서 < 관성의 바깥 >은 내가 관성처럼 해오던 음악과는 확실히 다르지만 누가 들어도 파제의 노래임을 알 수 있게 만들었다.

앨범을 통해 관성의 바깥에 있는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었다면 이해가 쉬울까? 음반 커버를 보면 동그란 게 막 있는데 그게 나의 태양계다. 우리한테 관성은 태양계이지 않나. 애매한 위치에 모여있는 별들은 ‘관성의 바깥’을 표현한 거다. 태양계 밖에 있는 무언가를 드러내고 싶어, 디자인을 맡아 준 장희문과 상의 끝에 완성했다.

EP 수록곡 ‘사천진 걸음마’란 노래를 재밌게 들었다. 얼마 전 유튜브에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 영상을 올리기도 했던데.
친한 동생과 강릉에 놀러 갔었다. 동생이 혼자 컨셉을 잡고 걸어가다가 갑자기 카메라를 보고 인사를 하고, 또 걸어가며 장난을 치더라. 그때 문득 그냥 걸어가는 모습을 찍어보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계속 한 방향으로 씩씩하게 걸어가는 영상을 찍었고, 집에 와서 영상을 붙여보니 그 반복되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영상 클립을 먼저 따고 바로 이런 식의 곡을 만들겠다는 감이 왔다. 귀엽고 발랄하게 사운드를 뽑으려고 장난을 많이 친 노래다.

인천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쭉 음악 활동을 한 건가?
군대 빼고는 늘 인천에서 살았다. 심지어 군대도 용산 쪽이어서 인천을 관통하는 1호선을 타고 다녔다. (웃음)

음악 활동을 하기에 공연장 등 인천의 인프라는 어떤가?
형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록, 메탈이 주였던 1990~2000년대 초에는 구월동 쪽에 연습실도 많고 서울에서 인천 쪽으로 공연을 보러 오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활동하는 시기도 다르다 보니 내게는 너무 오래전 이야기다.

그 당시 음악을 했던 사람들은 이제 클럽을 차리거나 본인의 공간을 가질 수 있을 만한 나이가 됐다. 그러다 보니 인천에 헤비니스 부류의 공연장이 많이 생기는 것 같다. 그런 이유로 인천에 있는 어쿠스틱한 음악을 하는 뮤지션들이 주로 서울에 가서 활동하게 되는 것에 대해 아쉬움이 좀 크다.

인천에서 개인 카페를 운영하고 있고, 또 그곳에서 공연도 열었던 걸로 안다.
동료 뮤지션 단편선, 전유동, 이권형과 함께 공연했었다. 외곽의 넓은 공간에서 음악 하며 놀면 재밌겠다는 이야기를 이전부터 나눴고, 내가 운영하는 카페에서 이를 진행해보겠다는 결심을 한 뒤, 만날 때마다 조금씩 계획을 세웠다. 때마침 공고가 뜬 인천문화재단의 ‘시작공간일부’를 통해 청년 축제 사업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서울에서 관객도 많이 오고, 우리 카페 고객도 꽤 많이 현장을 찾아 즐기고 갔다. 다만, 정기적으로 공연을 제안하시는 분도 있는데 현실적으로 그건 힘들다. 기획 음악 장비 및 인력 구축, 관객 홍보 등 고민할 지점이 많기에 단순히 음악을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무턱대고 진행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인천에서 참여한 공연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 하나를 꼽아준다면?
콜트콜텍 노동자 음악제. (이)권형이 나를 섭외해서 엉망과 인천의 다른 밴드들과 주안역 앞에서 버스킹을 했었다. 그곳이 인구밀도가 높은 곳이긴 하지만 퇴근 시간대여서 아무도 우리 얘기를 안 들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발걸음을 멈췄다. 지나가던 학생들, 어른들까지 말이다.

요즘 아무리 세상이 각박해졌다고 해도 어떤 소리를, 메시지를 던졌을 때 시민들이 들어주는 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적어도 사람들이 진심을 들을 수 있는 시간과 마음의 여력이 있구나 하는 걸 배웠다고나 할까? 관심을 주는 것을 보고 사실 조금 놀라기까지 했다. 세상은 충분히 움직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 했다.

처음부터 ‘파제’란 활동명으로 음악 커리어를 시작한 게 아니라고.
2010년도에 전역하고 친구들이랑 밴드를 만들었다. 기존에 각자 속해있는 또 다른 밴드들이 있었고,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시간 맞추기가 어렵더라. 혼자라도 먼저 해야겠다 싶어 그룹을 나와 음악을 시작했다. 그때는 밴드 음악을 그냥 어쿠스틱 기타로 가져와서 하는 형태이다 보니 우울한 노래들이 많았다. 회색빛의, 회색 톤의 음악을 한다고 해서 ‘그레이톤’이라는 이름을 썼었다. 내 이미지랑 안 맞지 않나. (웃음) 2013년 후반부터 ‘파제’란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파제의 음악에서 기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기타는 언제부터 익힌 것인지.
2006년 11월 수능 끝난 날에 형한테 처음 배웠다. (실력이 뛰어나 어린 시절부터 친 것인 줄 알았다고 하니) 얼마 안 됐다. (웃음) 형은 일찍부터 음악을 하려고 하던 사람인데, 나는 그냥 ‘기타 치면서 데미안 라이스 노래 부르고 싶다’ 정도였다. 군대 막바지에 조금씩 기타를 치기 시작했고, 형을 통해 핑크 플로이드나 오아시스 등을 접하면서 영역을 넓히게 됐던 것 같다. 기타 솔로 같은 것도 따보고 하면서.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한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종류의 악기, 기타를 다루는 등 누구보다 음악 스펙트럼이 넓다.
한국에 플라멩코 단체가 있다. 내가 플라멩코를 좋아하는데 어떻게 하다 그 단체 선생님과 인연이 되어 스페인에 직접 가서 플라멩코를 배웠다. 그때 ‘파두’라는 포르투갈 장르를 알게 됐고, 터키에서는 ‘카눈’이란 악기를 배웠다. 그렇게 다양한 음악에 조금 더 관심을 두게 됐다. 물론 나는 그 소리를 단순히 내 음악에 잘 녹여내고 싶다는 측면에 가까워 적절한 연주법만 익힌 정도다. 프로 연주자만큼의 실력은 절대 아니다. (웃음) 그래도 그런 식으로 하면서 음악에 대한 지평이 넓어지다 보니까 조금 더 수월하게 음악을 만들고 진심을 더 담을 수 있게 된 건 확실하다. 전에는 많은 게 막연했고 음악 카피도 잘 안되고 그랬다.

파제를 대표할 수 있는 음악 혹은 음반을 한 장 뽑아준다면?
무조건 연주 앨범인 정규 1집 < Pa.je Archive >. 그 음반에 오랜 기간 내가 해오던 음악 스타일이 잘 녹아 있다. 곡을 쓰던 때와 현재 시점에서의 생각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과거보다 지금의 내가 더 나쁜 사람이, 더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거다. < Pa.je Archive >에는 당시에 내가 했던 생각과 마음이 온전히 들어있다. 존경도 애정도 때로는 아쉬움도 담기지 않았겠나. 그런 감정들을 나만의 방식으로 솔직하게 음반에 담았다. 

앞으로의 활동 계획도 궁금하다.
연주곡 중심의 음반을 한 2장 정도 발매하려고 생각 중이다. 실제로 곡을 꽤 만들긴 했는데 앨범을 내려면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중이다. 사실 음반 계획은 한 번에 네다섯 개씩 한다. 예를 들어 < Pa.je Archive 2 >가 있을 것이고, 또 다른 스타일의 연주곡 앨범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상황에 맞춰 조금 더 완성되고, 충분히 즐거운 앨범이 뽑힌다면 그때 작업물을 세상에 내놓지 않을까.

진행 : 박수진
정리 : 장준환, 박수진
사진 : 정다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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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트레인(A.Train) ‘Private Pink’ (2022)

평가: 4.5/4

곁에 머물지만 형체를 규정할 수 없는 상처를 다룬 전작 < Paingreen >은 초연했다. 거대한 우울을 거부하지 않고 곧이곧대로 받아내 부서진 아티스트의 마음은 초현실적인 형태로 재탄생했고 무겁고도 진중하게 다가섰다. 동시에 불안정했다. 불투명한 고통은 치유란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불안이 되었고, 어느새 짙은 안개로 퍼져 그를 심연으로 가라앉게 했다. 우린 지금 숨 쉬는 ‘생명’이기에 안식은 죽음이란 추상적 해결에서 오지 않았다.

멈추지 않고 흘러내리는 가학의 폭포에서 살기 위해 발버둥 친 표류자는 그렇게 부표를 찾는다. 스스로 새긴 흉터를 숨기고자 억지로 덧댄 누더기는 사실 외부에서 주어온 그럴듯한 변명의 수단이었기에 에이트레인은 외투를 벗어 던지고 본연과 마주하기로 결심한다. 삶에 덕지덕지 붙여냈던 불쾌한 녹색 딱지를 뜯어내며 생긴 분홍 생채기, 두 번째 정규 < Private Pink >이다.

흐릿한 사운드스케이프로 청자를 잠식했던 지난 앨범과 다르게 < Priviate Pink >는 지독하게 개인을 해체하며 명백하게 나뉜 부위를 대중에게 전시한다. ‘나’를 중심으로 세 개의 주제로 구성된 독백 극은 얼터너티브 알앤비와 포크, 일렉트로닉 등 다양한 장르로 뚜렷한 기승전결을 드러낸다.

‘Scarberry’로 시작되는 1부의 한껏 과장된 편안한 기조 속 심어놓은 반전이 돋보인다. 길게 늘어뜨리는 창법과 따스한 피아노로 형성된 느슨한 분위기가 곧 의도한 불협으로 기괴하게 전환된다. 노이즈를 지나 어쿠스틱 기타가 매력적인 ‘안 괜찮아’ 역시 오소영의 담담한 목소리 뒤로 절규와 같은 코러스를 통해 또 다른 전개를 암시한다.

자학은 가족 등 타인에게로 향하고 기어코 열등으로 번진다. 성가 ‘식물’과 우스꽝스러운 소리로 자조하는 재즈 ‘가정통신문’에서 이어지는 ‘줘도 안 가질 보물’은 기억의 굴삭 후 발견한 추억에 대한 찬사이자 과거를 아름답게 치장하면 할수록 반대로 추악해지는 본인을 그린다. 초록색 대문이 부끄러워 나가지 못한 어린아이는 아직도 커야 한다.

이혜지의 첼로 연주를 비롯해 퍼커션을 활용한 편곡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감정선에 따라 변화하는 주법과 소스의 배치로 서사를 관통하며 카코포니, 최엘비 등 적재적소에 맞춰 사용한 피처링 또한 빈틈없이 이야기를 설계하는 치밀한 공법이다. 확고한 문학적 목표를 가지고 결집한 여러 질감이 어긋나지 않고 일관된 흔적을 남긴다.

‘이름을 바꿨다’로 이름까지 바꿔가며 운명이란 핑계를 쫓는 자신을 날카롭게 난도질하던 심경은 ‘잘라도 내가 잘라야지’로 차분히 내려앉는다. 되감기 효과로 하이라이트에 진입하는 곡에서 회상을 마친 그는 첫 번째 트랙부터 겹겹이 쌓인 악기의 층에 기대어 울부짖는다. 어쩌면 오만했던, 타의로 떠넘긴 거짓된 위안에 결국 자기혐오로 추락한 모습을 반성하듯.

무릇 깊게 팬 틈이라도 언젠간 새살이 돋기 마련이다. 직접 묻은 슬픔의 찌꺼기를 건저내기 위해 치부를 파헤친 에이트레인의 손끝은 어느 때보다 너덜너덜하지만, 내면에 자라난 ‘나’란 증오가 마침내 용서를 양분 삼아 포근한 위로의 새싹을 품어낸다. 이윽고 바닥을 뚫고 성장한 자생의 줄기가 < Private Pink >란 환한 핑크색 열매를 맺는다.

– 수록곡 –
1. Scarberry (Feat. 서보경)
2. 안 괜찮아 (Feat. 오소영, Dey Kim) 
3. 사실 나는 꽤나 괜찮은 사람일지도 (Feat. 이랑, 이혜지)
4. 나도 좀 알았으면 좋겠다 (Feat. 이혜지)
5. Something beautiful (Feat. 김뜻돌, 시문, 서보경) 
6. 그런 날이 있어 (Feat. 카코포니)
7. 식물 (Feat. 시문) 
8. 초록대문
9. 가정통신문 (Feat. 이혜지, 서보경)
10. 줘도 안 가질 보물 (Feat. 이혜지)
11. 커야 돼 (Feat. 최엘비, 이혜지)
12. 이름을 바꿨다 (Feat. NUNACRIS)
13. 잘라도 내가 잘라야지 (Feat. 이혜지)
14. F, A and F again (Feat. 이혜지)
15. 한림대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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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새녘 ‘새빛깔'(2022)

평가: 3.5/5

김새녘의 음악을 완성하는 것은 나른한 기타 톤과 빼곡히 써 내려간 가사, 그리고 목소리다. 써놓고 보니 훌륭한 음악이 공통으로 지닌 요소들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그의 첫 번째 음반 < 새빛깔 >은 자꾸만 묻고 싶은 것들을 만든다. 음악과 비슷한 느낌을 가진 ‘새벽’과 활동명 ‘새녘’ 사이 의도한 연결고리가 있는 것인지. 기쁜 사랑보다는 슬픈 사랑을 풀어가는 각 수록곡은 어떤 상황에서 쓰인 것인지 등등. ‘새’로운 ‘빛깔’, 아니 ‘새’녘의 ‘빛’나는 색’깔’을 담은 작품은 이처럼 듣는 쪽에서 질문을 쏟아내게 할 만큼, 좋다.

‘좋다’는 감상은 새로움 속에서 피어나지 않는다. 그의 음악은 독특하거나 새롭지 않다. 이를테면 ‘가느다란 사랑 하자며 / 나를 쫓아 따라오지 말아요 / 나는 줄 수 있는 것이 없어요 / 같은 생각 나눌 수도 없어요’ 인상적인 노랫말로 문을 여는 ‘싫증’은 밴드 쏜애플의 멜랑꼴리함을 닮았고, 힘없는 보컬과 탱탱한 일렉트릭 기타 선율로 곡 흐름의 강약을 조절하는 끝 곡 ‘알람’은 신해경, 검정치마 음악과 같은 선로를 달리는 식이다. 새로움은 없지만 분명 ‘내 것’인 덕에 익숙함과 편안함이란 강점을 가졌다. 또한, 조급함 없이 ‘내 이야기’를 풀어낸 점 역시 완성도를 높인다.

6개의 트랙은 흥분하지 않은 욕심으로 가득 차 있다. 부유하는 일렉트릭 기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드럼 비트로 골격을 다진 비슷한 구성 사이 매 곡이 선명한 힘을 가진다. 특별히 색 강한 사운드 소스를 쓰지 않아 호흡이 늘어질 수도 있었지만, 앨범은 그 인과관계에서 벗어난다. 힘 있는 메시지와 완급조절의 맛이 살아있다. 김새녘표 사이키델릭. 지는 계절 속 슬픈 나를 회상하는 ‘Floor Flower’,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건 너의 이기심이야’ 비난하는 ‘갈증’ 등 앨범에는 꾹꾹 눌러 쓴 기억, 추억, 시간, 순간의 편린이 살아 숨 쉰다.

그를 ‘무드 메이커’라고 칭하고 싶다. < 새빛깔 >은 저마다의 감정 속으로 듣는 이를 떨어뜨린다. 혹자는 그 이유를 음악 앞에 ‘드림팝’이란 수식을 붙여 설명하려 들겠지만, 장르의 구분을 떠나 그저 쉽게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작품이다. ‘나는 / 이런 / 오직 / 이런 / 다툼 / 그만 / 너와 / 하고 싶어’ 노래하는 ‘고집’과 ‘날 버리기 전에 다시금 떠올려봐요’ 붙잡는 ‘의심’ 사이 누군가는 또 어떤 기억을 떠올릴지 궁금하다. 24분의 짧은 러닝타임 동안, 쓰거나 달지 않게 되묻는 사랑 노래가 흐르고 때에 맞춰 각자의 (히)스토리가 퍼져나간다.

– 수록곡 –
1. 고집
2. 싫증 
3. 의심
4. Floor Flower
5. 갈증 
6. 알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