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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영 인터뷰

서귀포의 해안가를 달리는 길, 직접 선곡한 ‘다시 시작해’는 깐깐한 음악 취향의 여동생을 사로잡았다. 곡에 푹 빠진 동생은 숙소로 돌아오는 길 내내 차에서 ‘다시 시작해’를 재생했고, 저녁놀 물들어가는 해안선을 바라보며 각자의 정취에 빠져들었다. 음악이 펼친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김광민, 한충완, 한상원과 함께 버클리 음대에서 수학한 유학 1세대 싱어송라이터 정원영은 ‘가버린 날들’과 ‘다시 시작해’, ‘그냥’처럼 세련된 ‘웰메이드 가요’로 마니아를 모았다. 쉼과 석기시대, 사랑과 평화 등 다양한 밴드에서의 경험과 미국 유학의 합작품이었다. 이적, 정재일, 한상원과 함께한 슈퍼그룹 긱스에서 펑키(Funky)한 연주를 들려줬고, 피아노 중심의 솔로 앨범과 정원영 밴드의 풍성한 사운드를 함께 꾸려가고 있다.

최근 정규 2집 < Mr. Moonlight >를 엘피로 발매한 그는 1집 < 가버린 날들 >의 엘피 리이슈와 30주년 기념 공연을 준비 중이다. 오랜 시간 교육자로서 후배 뮤지션을 양성하고 그들과 함께 음악 활동을 펼쳐나가는 정원영은 ‘훌륭한 제자들을 만나 음악 인생이 달라졌다’라며 행복감을 표했다.

근황은 어떠한가?
호원대 실용음악 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CJ문화재단의 뮤지션 지원 프로그램인 ‘튠업’도 준비하고 있다. 2022년 1월 1일에 ‘당분간 음악을 하지 말자’고 결심했지만, 이런저런 음악 관련 일이 생겨나 음악 안식년이 불가피하게 틀어졌다.

음악을 접한 계기는?
어릴 때부터 음악을 좋아했다. 냇 킹 콜과 앤디 윌리엄스 같은 아버지 취향의 음반과 어머니가 좋아하셨던 클래시컬 뮤직 음반을 자연스레 접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직접 음반을 구매하기도 했고 가끔 영화에서 나오는 노래를 피아노로 치며 놀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3년간 배운 피아노는 체르니 30번에서 멈췄다. 중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스쿨 밴드를 만들기도 했다.

송홍섭, 배수연과 함께 밴드 석기시대로 활동했다. 석기시대로 음반도 발매했는가?
그렇지 않다. 원래 석기시대는 송창식 선배가 백업밴드로 조직한 거로 알고 있다. 건반 이호준, 드럼 배수연이 있었고 고3 때 이장희 선배가 스카우트한 나도 이 멤버들과 함께 연주했지만, 음반을 발매한 건 아니다.

쉼의 1980년 작 < 어디서든 >은 컬트 명작으로 꼽힌다.
음악을 취미 이상으로 여기지 않았지만, 이장희 선배를 만나고 나서부터 작곡을 시작했다. 코드나 화성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각종 신시사이저 층위를 분리하는 현 체계와 달리 모든 건반 사운드를 한 번에 녹음했다. 키보드 솔로도 어부지리로 했고 경험 없는 보컬까지 맡았다. 여러 측면에서 아마추어리즘이 많이 묻어나온 음반이다.

쉼의 기타리스트 김양일과의 만남은?
김양일은 내가 조우한 ‘첫 번째 천재’다. 당시 녹음하던 스튜디오에 서울대학교 밴드가 왔고 김양일 혼자 딥 퍼플의 ‘Burn’의 기타와 건반 드럼을 연주했다. 경악 그 자체였고 이장희가 음반 제안을 했을 때 바로 김양일을 떠올렸다. 그와 동갑인 들국화 최성원과 전인권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당시 이장희는 쉼과 사랑과 평화 두 팀을 제작했다. 이장희와의 대화 끝에 사랑과 평화의 스카우트 제의를 수락했다. 쉼은 자연스레 해산했다. 베이시스트 배희수는 ‘연안부두’와 ‘그대와 안녕히’의 김트리오로 갔고 김양일은 김태화와 김현식의 세션 연주를 했다.

사랑과 평화의 음반 크레딧에서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당시 사랑과 평화에 내부 문제가 생겨 팀이 깨졌다. 기존 멤버들이 나간 상태에서 리더 최이철 선배의 제안으로 밴드에 가입해 1년 정도 활동했다. 앨범 녹음엔 참여하지 않았지만 1982년 사랑과평화 < 넋나래 > 음반에 쉼 시절 ‘그대 두손 잡아주’가 최이철 선배 편곡으로 수록되어 있다.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과의 인연은?
제대하고 조용필 선배가 전국투어 세션으로 참여할 것을 제안하셨다. 당시 유학 준비 중이라 활동이 길진 않았다. 대전 공연 종료 후 미국 간다고 말씀드렸다. 1983년 무렵이다.

1989년 한경애 < 눈물 속에 피는 꽃 > 사이드 B에서 김양일과 정원영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1984년에 미국으로 떠났고 1990년 귀국했다. 7년간 한 번도 한국에 온 적이 없다. 따라서 그 음반을 알 수 없다. 나중에 음반의 존재에 대해 어렴풋이 들었으나 당시엔 아무것도 들은 바 없다.

1, 2집에서 ‘가버린 날들’, ‘다시 시작해’ 같은 곡들이 사랑받았다. 당시 음악적 방향성이 궁금하다.
송홍섭 선배가 자신의 음반에 곡을 써주겠냐고 물어왔다. 그 덕에 유학 후 한동안 멈췄던 음악을 재개했다. 박정운과 한영애 선배에게 곡을 줬고 세션으로도 참여했다. 자연스레 독집 제작에도 착수했고 1년 정도 ‘이런 곡 스타일이면 한국에서 발매할 수 있겠지.’라는 마음으로 만든 게 정규 1집 < 가버린 날들 >이다.’ 버클리 유학 때 만들었던 연주곡들이 한국 가요계 실정과 맞지 않다고 여겨졌다.

왜 가요계 실정과 맞지 않다고 여겼는가?
당시 가요계에 서태지와 신승훈, 김건모가 인기 있었다. 그들과 경쟁하는 게 쉽지 않다고 느꼈지만, 기획 및 준비 단계를 마친 상황이었기에 그대로 1집을 발매했다. 2집과 3집은 개인적 음악 성향과 대중성을 조율했다. 타협점에 대한 부담감을 내려놓은 게 2003년에 발표한 4집 < Are You Happy? >이며 개인적으론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다.

버클리 시절 만든 곡은 차후에도 발매되지 않은 건가?
딱 1곡 발매되었다. 정규 3집 < 영미Robinson >의 수록곡 ‘검은 입 속에서 하루’다. 버클리에서 만든 펑키(Funky)하고 리드미컬한 퓨전 재즈풍 곡을 국내 발매를 시대착오로 여겼다. 직접 랩을 한 곡도 있었다.

< 영미Robinson >에서 봄여름가을겨울 김종진과 더불어 이적의 코러스가 있다. 긱스 이전 1997년~1998년부터 교류가 있던 것인가?
삐삐밴드 공연에서 처음 만났다. 그 이후로 음악과 문학(프란츠 카프카) 등 다양한 취향을 공유했다. 서로에게 긍정적 영향을 줬다.

강호정, 이상민, 정재일과 한상원에 이적까지. 긱스는 당대 슈퍼밴드로 유명했다. 어떻게 결성된 것인가?
이상민과 정재일은 이미 서울재즈아카데미에서 신동으로 알려져 있었다. 서울예대에서 강의를 시작한 강호정과 막 2집 < Funky Station >(1998)이 나온 한상원이 두 신동과 연습 중이었다. 마지막 자리에 내가 들어갔다. 원래는 보컬이 세 명이었지만 종래에 이적 단독 보컬로 변경되었다.

수요예술무대 ‘노올자’ 무대를 보면 모든 멤버와 더불어 건반 연주가 화끈하다. 섬세한 이미지와 상반된다.
태생이 밴드다. 어렸을 때부터 레드 제플린 같은 록밴드를 사랑했고 ‘노래한다, 앨범을 낸다’라는 생각보다 ‘밴드를 한다’라는 생각이 더 확고했다. 그렇다 보니 곡을 써도 대부분 밴드 풍이다. 일단 곡을 쓴 후 곡 성향에 따라 정원영 밴드와 독주 중심의 솔로 음반 중 어디에 수록할지 결정한다.

‘짝사랑’과 ‘랄랄라’ 같은 곡들로 사랑받은 긱스 활동은 정규 2집으로 마무리되었다. 긱스에 대한 소회를 공유한다면?
활동 기간에 만족한다. 좋은 친구들과 음반을 두 장이나 냈고 공연도 많이 해 미련이 없다.

1990년대 말인 정통 펑크라기보다는 하이브리드 성향이 강했다. 음악적 아이디는 어떻게 모았나?
곡은 각자 써왔다. 일반적으론 몇 차례 합주를 통해 편곡 방향성이 나왔고, ‘Tripping now…’나 ‘탈주’, ‘새’처럼 프로그래밍을 고민해봐야 하는 곡들은 강호정과 정재일이 미디로 작업했다.

솔로 피아노 연주 음반과 정원영 밴드의 이원화는 계속되는가?
그렇다. 밴드 편성의 공연을 좋아한다. 올해로 1집이 나온 지 30년이 되었고 그에 관련한 공연을 몇 차례 할 것 같다. 그 공연들은 정원영 밴드의 포맷으로 갈 계획이다.

2015년 인터뷰에선 본인의 음악을 록으로 규정했다. 근원적 음악 취향 혹은 태도 측면에서 그러한가?
록, 퓨전 재즈라기보다 그냥 하고 싶은 음악을 한다는 말이 더 적합할 것이다. 버클리에서 수학한 화성학적 요소를 곡에 투영하다 보니 자연스레 재즈적 텍스쳐가 묻어났다. 퓨전 재즈의 이미지가 형성된 것도 거기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취향은 영미권 퓨전 재즈보다 상기한 레드 제플린같은 클래식 록에 가깝다. 허비 핸콕이나 데이비드 보위 같은 거장도 1980년대엔 뉴웨이브 풍 음악을 만들었다. 그러한 시대적 맥락을 이해하지만 신시사이저 기반의 음향을 선호하지 않는다. 영향력이 긴 조류라고 보긴 어렵다.

특히 좋아하는 건반 사운드가 있는가? KBS 가요톱10 무대의 ‘다시 시작해’에서 카시오 키타를 들고 나왔고, ‘Rockit’의 허비 핸콕이 연상되었다.
대부분 좋아한다. 1970~80년대 소울/펑크(Funk) 음악에 요긴하게 쓰였던 클라비넷과 허비 핸콕과 도어즈 레이 만자렉이 즐겨 사용했던 펜더 로즈, 미니무그 등 대부분 좋아한다. 가요톱10 무대에선 음악방송에서 노래하는 것에 익숙치 않아서 악기 하나라도 들고 싶었다. 방송사에 요청해서 받은게 키타였다.

일레인을 비롯해 후배와 협업이 잦다.
계획에 없던 학교에 들어가게 되어 많은 좋은 재능을 만났다. 지금 정원영밴드도 가르쳤던 학생들과 함께하고 있다. 장기하와 이적, 김동률이 세션을 구할 때 제자들을 추천했다. 전문 연주인이 아니다보니 합을 맞추는 데 있어 미숙하지만 일정 시간이 수반된다면 외려 새로운 사운드를 만들 수 있을거라고 설득했다. 호윤, 양시온, 밴드 메이트의 기타리스트 임헌일이 그런 케이스다.

다작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꾸준하게 음악을 했다. 그래서 원래 음악을 계획적으로 하는 편인가?
어렸을 때부터 곡 쓰는걸 참 좋아했고 같이 활동했던 친구들에게 늘 ‘이런 곡을 이런 식으로 해보면 어떨까요?’ 제안했다. 지금도 일정 곡이 모이면 녹음 일정을 잡는다. 밥 먹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실 현시점에서 앨범 제작이 비용적으로 만만치 않지만 그저 음악 작업을 좋아하기에 꾸준히 음반을 내는 것이다.

삼십년간 음악 만드는 과정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 같다.
최근 앨범 작업을 위해 미디를 배웠다. 1990년대에는 송홍섭 선배의 AKAI 마스터 키보드로 작업했고 그 사이 많은 발전을 거쳐 현재의 DAW 프로그램에 이르게 되었다. DAW 중 하나인 로직을 배웠다. 라이브 연주로 녹음하던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 미디로 작업한 리듬 트랙 위에 선율을 얹고 싶었다. 그 전까진 대부분 실제 악기로 편곡했다.

지난 인터뷰에서 스틸리 댄과 에릭 클랩튼, 스티비 원더의 음악을 추천했다. 2023년 시점에서 청년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음악은?
최근에 재즈 피아니스트 브레드 멜다우가 < Your Mother Should Know >라는 음반을 발매했다. 데이비드 보위의 ‘Life on mars?’ 제외하곤 모두 비틀스의 음악을 커버했다. 타이틀 곡을 비롯 ‘Baby’s in black’과 ‘She said she said’ 등 비교적 덜 알려진 고른 점이 흥미로웠다.

개인적으로 멜다우의 커다란 팬은 아니지만 이번 음반과 라디오헤드의 ‘Exit music’과 폴 사이먼의 ‘Still crazy after all the years’ 리메이크가 인상적이었다. 기본적으로 유러피언/클래시컬 뮤직의 어프로치를 가져가지만 인터뷰에서 재즈의 아프리칸 아메리칸 적 뿌리를 인정하는 점도 마음에 든다.

그리고 역시 비틀스다. 브래드 멜다우의 신보를 통해 다시금 비틀스의 위대함을 인식했다. 잡다한 부가 요소를 걷어낸 채 멜로디와 코드의 직관적 아름다움을 품은 곡들 말이다. 음악인들에게 메세지를 주는 음악이라고 생각했다.

비틀스를 깊게 연구한 것 같다.
굉장히 많이 들었다. 이찬영이란 친구가 있는데 그를 만난 게 음악 인생의 전환점이다. 그 친구 덕에 굉장히 다양한 음악을 들었다. 어렸을 적 내가 그보다 음반 구매도 먼저 시작했고 더 다채로운 음악적 지식이 있다고 생각했으나 실상은 그 친구가 한참 위였다. 음악을 접하는 환경이 그 친구 쪽이 훨씬 나았다. 그가 직접 원판을 구해준 적도 많고 비틀스의 명작에서 건반을 연주했던 빌리 프레스턴과 폴 사이먼의 ‘Run that body down’ 같은 좋은 곡들을 녹음해 주었다. 먼저 세상을 떠난 그에게 바치는 곡이 < Table Setters >에 수록된 2018년 곡 ‘친구에게’다.

며칠 전에 정규 2집 < Mr. Moonlight >의 엘피 발매가 이뤄졌다.
아직 실물로 보지 못했다. 음악 평론가 정원석 씨로부터 2집의 엘피 발매 제안이 왔다. 어느 레이블에서 1집 리이슈 제안도 와서 가을쯤 낼 것 같다. 개인적으론 4집 < Are You Happy? >를 엘피로 발매하고 싶다.

최근 십여년간 시티팝 조류가 거셌다. 정원영 솔로 초기작은 일본 시티팝 보단 영미권 퓨전 재즈에 가까워 보이나 누군가 자신의 작품에 시티팝 호칭을 붙인다면?
퓨전 재즈와 시티 팝. 다 이름붙이기 나름인 것 같다. 앞서 말한 것처럼 어렸을 때부터 음악 취향은 록에 가까웠고 퓨전 재즈 곡들은 비교적 나중에 접했다. 따라서 음악을 만들 때 그런 스타일을 염두해두고 만들진 않았을 것이다.

‘Dugout’, < Table Setters >, < 우중간 밀어치기 > 등 야구 내용이 많다. ‘도레미송’에 “내일 선발투수 누구”란 구절도 나온다.
유학할 때 농구랑 소프트 볼을 했다. 보스턴에 있다보니 보스턴 레드삭스와 보스턴 셀틱스를 응원했다. 야구 광팬이다 보니 음악 소재로 자주 쓰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서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재즈 색소포니스트 웨인 쇼터, 조니 미첼, 허비 핸콕과 함께한 사진을 봤다.
버클리 음악대학에서 매년 주는 명예박사학위의 2022년 학위 수여자가 조니 미첼이었다. 그 행사에 초청받았고 조니 미첼 옆에 웨인 쇼터도 있었다. 축하 파티 자리에 에스페란자 스팔딩과 다이앤 리브스도 있었지만, 마음은 온통 웨인 쇼터에게 향했다. “당신은 내가 생각하는 가장 위대한 작곡가예요”라고 말했고 웨인 쇼터도 “고맙다”고 답했다.

웨인 쇼터의 음악엔 무척 어려운 코드와 화성이 있지만 직관적으로 아름답다. 마일즈 데이비스의 1968년 앨범 < Nefertiti > 속 웨인 쇼터의 곡들은 혁명적이다. 마일즈는 ‘너는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고 다니길래 이런 혁신적인 곡을 쓰냐’라고 얘기했었고 녹음실에서 웨인 쇼터의 작곡 노트를 뺏어서 ‘우리 이거 녹음하자’란 식으로 작업하곤 했다고 한다.

조니 미첼 이야기가 나왔으니 2007년 곡 ‘Bad dreams’를 권하고 싶다. 한동안 음악을 안 하다가 내놓은 노래가 맞나 싶을 정도로 멋지다. 인간 문명의 역효과를 다룬 곡으로, 미첼에게 직접 노랫말에 관해 물어봤고 ‘Bad dreams are good in the great plan(나쁜 꿈도 좋아 커다란 계획 아래에서는)’이란 문구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그 방향성이 좋든 나쁘든 간에 어딘가 정상에 오른 사람들의 시각인 것 같아서 인상적이었다.

조니 미첼과 웨인 쇼터의 음악을 조금 더 소개해준다면?
우선 < Nefertiti > 음반의 ‘Fall’을 들고 싶다. 앨범 단위로는 브라질 음악가 밀톤 나시멘토와 함께한 < Native Dancer >(1975)다. ‘Ana maria’는 웨인의 부인 아나 마리아 쇼터에 관한 이야기다. 예전에 존 에프 케네디 공항에서 비행기가 이륙하다 폭발한 사건이 있었고 그 비행기에 아나 마리아가 있었다.

잠시 델로니어스 몽크를 언급했다. 그의 연주를 선호하는 건가?
몽크 음반을 틀어놓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약간 축축한 곰팡내도 나는 것 같고. 마커스 로버츠, 설리번 포트너, 베니 그린도 좋아한다. 허비 핸콕과 키스 자렛의 영향력이야 두말할 나위 없다. 해리 코닉 주니어는 백인임에도 흑인 특유의 스윙감을 지녓다. 리듬앤블루스 피아니스트 제임스 부커와 브랜포드/윈튼 마살리스의 아버지 엘리스 마살리스에게 사사했고 엘비스 프레슬리처럼 흑인과 어울린 덕분이다.

교육자 정원영과 아티스트 정원영은 무엇이 다른가?
학교에 안 갔다면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 것이고 다른 음악을 했을 것이며 생활도 엉망진창이 되었을 확률이 높다. 버클리 유학을 마치고 서울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한국 재즈 거장 정성조 선배로부터 예대 교수 제의가 왔다. 아무 계획에 없던 일이라 처음엔 거절했지만, 부모님의 조언으로 결국 승낙했다. 교육자를 안 했으면 음악은 좀 더 자유로워졌을 것이다. 다만 훌륭한 제자들과 음악을 할 수 있는 건 축복이다.

음악 이외의 취미가 있다면?
초등학생 때부터 7~8년간 피아노를 배웠는데 진도가 지지부진했다. 피아노가 치기 싫어 외려 딴짓을 많이 했다. 극동극장을 비롯한 동네 극장에서 영화를 무척 많이 봤다.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 친구와 영화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정도였으니까.

버클리 유학 시절 보스턴에서도 영화감상이 취미였다. 주말엔 굉장히 개성적인 프로그램들을 편성하곤 했는데 존 워터스의 < 핑크 플라밍고 >(1972)나 틴토 브라스의 < 칼리굴라 >(1991)같은 작품을 봤다. 상영시간표를 꼼꼼히 챙겼고 한국에서 못 봤던 영화들도 비디오 가게에서 대여해 봤다. 김광민이 보스턴에 오자마자 세르지오 레오네의 <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1984)를 보러 갔다.

음악계에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음악을 좋아하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지금도 음악 듣는게 가장 큰 취미며 행복이다.

인터뷰 : 염동교, 임동엽, 장준환, 정다열, 손민현, 김성욱
정리 : 염동교
사진 : 임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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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윤 인터뷰

오랜 무명 가수 생활을 딛고 유명 가수로 탈바꿈한 이승윤에게 < 싱어게인 > 우승은 한 챕터의 끝이 아닌 새로운 출발에 가깝다. 2023년 서울가요대상에서 < 올해의 발견상 >을 거머쥐며 전한 ‘물 들어올 때 노를 젓기보다는 물이 새지 않도록 배를 수리하며 지냈다’는 수상 소감처럼, 그는 자신을 둘러싼 급격한 상황 변화에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자신을 담금질하여 2집 < 꿈의 거처 >와 함께 돌아왔다.

녹진한 삶을 언어에 풀어내는 문장가이자 사회의 단면을 꼬집는 사상가로서 면모는 여전히 탄탄하다. 환희와 절망이 엉킨 삶을 해학적으로 짚어낸 < 폐허가 된다 해도 >처럼 그에게는 깊은 철학과 함께 밝은 유머도 빛나고 있었다. 다소 한산하고 여유로운 월요일 저녁의 홍대 거리와 묘하게 어울리는 이승윤은 어려운 질문에도 능글맞게, 가벼운 물음에는 또 진중하게 화답하며 본인의 뚜렷한 주관과 음악에 대한 묵은 궁금증을 해소해주었다.

정규 2집 < 꿈의 거처 >로 돌아왔다. 전작과 비교했을 때 전체적으로 음악이 ‘슬림’해졌다는 인상이 강하다.
태생이 맥시멀리스트인지라 음악적으로 늘 풍부한 소리를 지향한다. 다만 < 폐허가 된다 해도 >는 데드라인이 촉박했기 때문에 소리의 정돈이 다소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사운드가 잘 어우러질 수 있도록 배치하고, 고민할 시간이 충분했던 < 꿈의 거처 >가 더 완성도 높고 정갈한 소리를 들려주기에 그런 감상을 낳는 것 같다.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가려는 측면에서도 ‘슬림’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가사 역시 무게감을 던 느낌인데 이런 의도는 없었는지.
솔직하게 말하면 더 많은 사람에게 들려주기 위해 작품을 만들지는 않고 오히려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내 취향을 녹여내는 데 집중했다. 신보에는 기존에 비축해둔 곡과 최근에 쓴 곡들이 섞여 있다. 이전에 만든 곡들은 좋은 문장이 되도록 오랜 퇴고를 거친 편이지만, 너무 현학적인 가사에 얽매이는 건 아닌가 싶어 새로운 트랙들은 날 것으로, 떠오르는 감정에 집중했다. 그런 이유로 얼마 전에 만든 ‘비싼 숙취’나 ‘야생마’가 더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자기 생각을 온전히 가사에 녹여내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 것 같다. 음악을 구성하는 요소 중 언어를 특히 날카롭게 다듬는 이유가 무엇인가.
원래부터 말에 잘 휘둘리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성장기에 난립했던 캐치프레이즈와 슬로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당시에는 멋진 말을 들으면 무조건 수용했지만, 그 문장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사람들을 배격하는 행태에 어느 순간 괴리감을 느꼈다. 당연히 어떤 문장이 주는 교훈이 있고 행동 지침으로서도 의미가 있겠지만, 모든 사람이 그 뜻에 따라야 한다는 게 굉장히 폭력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2번 트랙인 ‘말로장생’에 이에 대한 반성의 의미를 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승윤의 언어에 영향을 끼친 문학가는 누구인가.
사고 측면에서는 소설가 톨킨의 < 반지의 제왕 >을 인상 깊게 읽었다. 존재하지 않는 3분 내외의 시공간을 만들어내는 음악가의 입장에서 수천 년의 장대한 서사를 만들어낸 < 반지의 제왕 >의 장대한 상상력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날카로운 텍스트에 피로해진 이승윤이 언어를 제거한 연주곡을 발표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상상도 해봤다.
언젠가 이루고 싶은 꿈이다. 가능하다면 47분 정도 길이의 연주곡을 내고 싶다. (웃음)

전작 < 폐허가 된다 해도 >는 이즘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서 굉장한 호평을 받았다. 평단의 반응이나 자기 음악에 대한 평가를 주의 깊게 보는 편인가.
어릴 때 들었던 CD 속에 늘 평론지가 꽂혀 있었기 때문에 비슷한 글들을 자주 읽어왔다. 평론은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처럼 창작물을 해석하여 더 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고 그 의미를 더 빛나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한다. 평단에서 좋은 음악으로 봐주시는 데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특히 삶에 절망하는 인간의 고뇌, 그런데도 희망을 잃지 않는 음악인의 환희를 함께 녹여낸 음반의 독특한 정서가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내 인생관을 소리로 담는다. 늘 삶의 필연과 당위에 대해 들으며 자랐지만 다들 알다시피 이 세계는 모순으로 가득하다. 그럴수록 점차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영역이 많아졌고, 나에게 있어서 음악은 이 뒤죽박죽인 세상을 표현하는 좋은 매개체다. 그렇게 인생의 딜레마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이런저런 질문과 답을 노래 안에 산발적으로 흩어놓았다.

자신과 음악 사이의 끊임없는 감정 교류야말로 진정한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그렇다면 스스로는 < 폐허가 된다 해도 >를 어떻게 정의하는지도 궁금하다.
시궁창 같은 현실에 빈정거리면서도 말할 수 있는 희망을 담아 ‘빈정거리는 희망’으로 정의했다. 소위 ‘사이다 발언’으로 아주 멋진 말을 하면 받는 호응과 지지가 있고 감정을 더 비극적으로 꾸며낼 때 얻는 만족감도 물론 있다. 그러나 멋진 문장만 늘어놓을수록 진정성을 잃어버린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 같았다. ‘코미디여 오소서’가 희극적인 면과 비극적인 면을 번갈아 가며 이야기하듯이 현실적인 이상주의자가 되고 싶었다.

이렇게 깊은 가치관을 음악과 어떻게 연결하는지.
보통 작업은 가사로부터 출발한다. 어떤 한 문장에서 영감을 받기도 하고, 이야기를 듣고 나면 단면과 그 뒷면까지 보고 음악이라는 콘텐츠로 재구성한다. 1집에 수록된 ‘구름 한 점이나’를 예로 들면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다 시킨다’라는 속담을 듣고 화가 나서 그 격언을 비꼬아 노랫말을 지었다. 보통 초안은 거칠게 쓰고 다듬어가며 하나의 곡을 완성해간다.

전개되는 철학뿐만 아니라 ‘코미디여 오소서’, ‘사형선고’, ‘교재를 펼쳐봐’는 음악적 진행도 상당히 독특하다. 후반부 맹폭하는 편곡 스타일이 매력적인데 원래부터 이런 음악을 지향했는가.
이론을 먼저 배운 게 아닌지라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작곡하는 편이다. 물론 혼자서만 만든 음악은 아니다. 보통 밴드 셋을 그려놓고 곡을 만들기 때문에 가까운 연주자 동료의 도움이 꼭 필요하고 그들이 있어야 완성된다. 음악 내외로는 밴드 오아시스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고 6집 < Don’t Believe The Truth >를 가장 좋아한다. 오아시스 곡을 따라 치며 기타 코드를 익혔고 사춘기 시절에는 그분들의 태도에도 매혹되었다.

이야기를 들어볼수록 오디션 프로그램의 퍼포먼스나 경쟁적인 요소와는 어울리는 면이 많지는 않은 것 같다. 어떤 계기로 < 싱어게인 >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방송 오디션은 음악을 그만두기로 결심한 시점까지 남겨둔 선택지였다. 말씀해주신 것처럼 내 음악을 들려주기에 적합한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내키지는 않았지만, 해보지도 않고 후회하기보다는 한번 도전이라도 해보고 장렬히 산화하자는 마음이었다.

막상 하고자 하는 음악을 연장하기 위해 선택한 프로그램에서 좋은 결과를 얻고 나니 다해야 할 책임과 의무도 많았다. 그것들을 다하고 난 후에는 가수로서 현재 위치가 예전에 그렸던 모습과는 달라 허탈하기도 했다. 어떤 목표나 지향점 없이 긴 호흡으로 앨범 작업에 열중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어쨌든 우승 이후에 음반을 내며 본격적으로 산업의 영역 안으로 들어왔다. 음악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경쟁력을 갖춰야 하는 지금, 이승윤만의 강점은 무엇인가.
표준화된 가창력 평가 기준에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노래 잘하는 보컬이 필요한 것처럼, 그냥 자기 노래를 하는 목소리도 중요하다고 보고, 이 관점에서 내가 만든 노래는 내가 가장 잘한다고 생각한다.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셔서 내 음악 안에서는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게 강점인 것 같다.

< 꿈의 거처 >에 직접 쓴 소개 글을 인용하면 ‘삶을 공허에 전부 빼앗기기 전에 선수를 치고’ 결국 살아남았다. 지금도 공허에 맞서 투쟁하고 있을 청년들에게 경험에서 비롯된 조언과 위로 한마디를 부탁한다.
현대 사회엔 분명 공허가 주는 매혹이 있다. 그 유혹에만 머무르지 않고 어떤 것이 되었든 집중하고 몰입하는 경험, 그리고 이를 통해 인생을 논하겠다는 마음가짐도 한번씩은 의미 있지 않을까 싶다. 나 역시 이번 앨범에서 한계까지 쏟아보자는 의지로 달려왔고, 그러다 보니 정말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 생각하며 작업을 마쳤다. 이런 과정에서 얻어지는 힘겨움과 즐거움이 삶을 충만하게 만들어 줄 수도 있다. 물론 이건 철저히 개인적인 사례다.

언젠가 다시 이즘과 함께 인터뷰하게 될 날이 올 것 같다. 그때를 위해 지금, 이 순간 이승윤은 어떤 사람인지 대답해준다면.
그저 2집 앨범을 발매한 지 3일이 지난 사람이다. 아직 어떤 음악을 한다는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고, 음반 작업 이후에 음악적 정체성을 가다듬으며 계속해서 어떤 음악인으로 살아야 할지 계속해서 고민하고자 한다.

진행 : 임진모, 장준환, 임동엽, 정다열, 손민현, 한성현
정리 : 손민현
사진 : 임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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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OP Single Single

루시(LUCY) ’21세기의 어떤 날’ (2022)

평가: 3/5

2019년 오디션 프로그램 < 슈퍼밴드 >를 통해 결성된 4인조 밴드 루시엔 케이팝 보이그룹의 트렌디함과 실력파의 내공이 공존한다. 2020년부터 싱글 단위로 활동하다 올해 8월 첫번째 정규작 < Childhood >로 경력을 1차 결산한 이들은 데뷔초부터 이목을 끈 앰비언트와 제한선 없는 소리 운용이 특징적이다. 이미 델리스파이스의 ‘항상 엔진을 켜둘게’를 커버한 바 있는 신예 밴드가 국내 인디 록 명곡을 재해석하는 < 리코디드 프로젝트 >에서 2인조 밴드 페퍼톤스의 ’21세기의 어떤 날’을 택했다.

이번 리메이크에서도 루시의 색깔이 확연하다. 리더 신예찬의 바이올린 연주는 밴드의 인장이 되었고 뻔하지 않은 베이스와 기타 연주로 사운드의 중량감을 확보했다. 고음에 탁월한 기타리스트 겸 보컬 최상엽의 가창도 돋보이며 전반적으로 흠잡을데 없는 다이내믹스와 드라마틱한 곡 전개가 멤버들의 실력을 입증한다. 페퍼톤스의 특유의 청량감을 루시만의 방식으로 풀어내며 기존 곡의 재해석에도 강점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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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34 파제(Pa.je)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서른네 번째 주인공은 관성에 갇히지 않고 음악으로 내 이야기를 하는 뮤지션 파제(Pa.je)다.

뮤지션 파제(Pa.je)는 음악가가 어디를 향해 어떻게 움직이는지 묻게 한다. 차 막히는 주말 아침, 홍대 인근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저녁에 있을 공연을 위해 거주지인 인천에서 서울로 막 도착했다고 했다. 카페를 운영하고, 음악을 만들고, 공연을 열고, 무대에 서는 그는 바쁘지만 편안한 인상으로 질의에 답했다.

군 제대 후, 본격적으로 기타를 잡고(그의 기타 실력은 정말 엄청나다!)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는 그에게 ‘음악이란 무엇인가’ 물으니 “결국에는 내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 중간 매개물”이란 답이 돌아왔다. 음악이 목표가 아닌 수단이라는 예상치 못한 답변에서 그만큼 일상에 깊게 침투한 음악의 파워가 느껴지는 듯했다. 음악가는 어디를 향해 어떻게 움직이는가. 파제는 삶 속에서 음악과 함께, 음악을 곁에 두며, 담담하게 걸어 나간다.

2020년 연주곡으로 채워진 정규 음반 < Pa.je Archive >를 발매했고 8월 30일, 오랜만에 EP < 관성의 바깥 >을 발매했다.
작년에 음반을 하나 내긴 했다. (무엇이냐고 물으니) 홍대에서 긴 시간 같이 활동했던 뮤지션 ‘엉망’과 ‘포래스트’라는 팀명으로 < Piece Forest >를 냈다. 엉망이 노래를 부르고 내가 작곡, 편곡, 연주를 했다. 사실 < 관성의 바깥 > 녹음도 작년에 다 끝낸 상태였다. 2022년도에 다른 일이 무조건 많을 것으로 예상했기에 앨범에 대한 방향성을 고민하던 와중 인천문화재단에 좋은 지원사업이 떴고 다행이 지원받게 되어 < 관성의 바깥 >을 발매하게 되었다.

< 관성의 바깥 >과 관련된 공연 혹은 활동 계획이 있다면?
11월 19일에 인천에 있는 카페 겸 문화공간 ‘인천여관X루비살롱’에서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EP 중심의 공연은 아니고 그냥 파제라는 뮤지션이 해오던 지난 활동들의 연장선상으로 봐주면 좋겠다. < 관성의 바깥 >의 후속 공연은 아마 없지 않을까? 이번 음반은 연주자로서, 싱어송라이터로서 파제가 아니라, 마음 가볍게 시간이 날 때마다 만든 곡들을 묶어 발매했다. 작곡부터 그렇게 진행했다 보니 발매 이후의 공연을 염두 하지 않았다. (웃음)

‘관성의 바깥’이라는 음반 명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사람들이 인식하는 뮤지션 파제의 이미지가 있다. 기존 발매했던 ‘제주의 봄’과 같은 따스한 어쿠스틱 사운드의 음악이 있고, 버둥 혹은 다른 뮤지션들과 콜라보한 음반에서처럼 싱어송라이터, 포크 뮤지션으로서의 행보가 있다. 이것 말고 내가 가진 영역, 즉 우주가 상당히 큰데 그걸 보여주기가 사실 쉽지만은 않다. 그런 면에서 < 관성의 바깥 >은 내가 관성처럼 해오던 음악과는 확실히 다르지만 누가 들어도 파제의 노래임을 알 수 있게 만들었다.

앨범을 통해 관성의 바깥에 있는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었다면 이해가 쉬울까? 음반 커버를 보면 동그란 게 막 있는데 그게 나의 태양계다. 우리한테 관성은 태양계이지 않나. 애매한 위치에 모여있는 별들은 ‘관성의 바깥’을 표현한 거다. 태양계 밖에 있는 무언가를 드러내고 싶어, 디자인을 맡아 준 장희문과 상의 끝에 완성했다.

EP 수록곡 ‘사천진 걸음마’란 노래를 재밌게 들었다. 얼마 전 유튜브에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 영상을 올리기도 했던데.
친한 동생과 강릉에 놀러 갔었다. 동생이 혼자 컨셉을 잡고 걸어가다가 갑자기 카메라를 보고 인사를 하고, 또 걸어가며 장난을 치더라. 그때 문득 그냥 걸어가는 모습을 찍어보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계속 한 방향으로 씩씩하게 걸어가는 영상을 찍었고, 집에 와서 영상을 붙여보니 그 반복되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영상 클립을 먼저 따고 바로 이런 식의 곡을 만들겠다는 감이 왔다. 귀엽고 발랄하게 사운드를 뽑으려고 장난을 많이 친 노래다.

인천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쭉 음악 활동을 한 건가?
군대 빼고는 늘 인천에서 살았다. 심지어 군대도 용산 쪽이어서 인천을 관통하는 1호선을 타고 다녔다. (웃음)

음악 활동을 하기에 공연장 등 인천의 인프라는 어떤가?
형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록, 메탈이 주였던 1990~2000년대 초에는 구월동 쪽에 연습실도 많고 서울에서 인천 쪽으로 공연을 보러 오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활동하는 시기도 다르다 보니 내게는 너무 오래전 이야기다.

그 당시 음악을 했던 사람들은 이제 클럽을 차리거나 본인의 공간을 가질 수 있을 만한 나이가 됐다. 그러다 보니 인천에 헤비니스 부류의 공연장이 많이 생기는 것 같다. 그런 이유로 인천에 있는 어쿠스틱한 음악을 하는 뮤지션들이 주로 서울에 가서 활동하게 되는 것에 대해 아쉬움이 좀 크다.

인천에서 개인 카페를 운영하고 있고, 또 그곳에서 공연도 열었던 걸로 안다.
동료 뮤지션 단편선, 전유동, 이권형과 함께 공연했었다. 외곽의 넓은 공간에서 음악 하며 놀면 재밌겠다는 이야기를 이전부터 나눴고, 내가 운영하는 카페에서 이를 진행해보겠다는 결심을 한 뒤, 만날 때마다 조금씩 계획을 세웠다. 때마침 공고가 뜬 인천문화재단의 ‘시작공간일부’를 통해 청년 축제 사업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서울에서 관객도 많이 오고, 우리 카페 고객도 꽤 많이 현장을 찾아 즐기고 갔다. 다만, 정기적으로 공연을 제안하시는 분도 있는데 현실적으로 그건 힘들다. 기획 음악 장비 및 인력 구축, 관객 홍보 등 고민할 지점이 많기에 단순히 음악을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무턱대고 진행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인천에서 참여한 공연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 하나를 꼽아준다면?
콜트콜텍 노동자 음악제. (이)권형이 나를 섭외해서 엉망과 인천의 다른 밴드들과 주안역 앞에서 버스킹을 했었다. 그곳이 인구밀도가 높은 곳이긴 하지만 퇴근 시간대여서 아무도 우리 얘기를 안 들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발걸음을 멈췄다. 지나가던 학생들, 어른들까지 말이다.

요즘 아무리 세상이 각박해졌다고 해도 어떤 소리를, 메시지를 던졌을 때 시민들이 들어주는 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적어도 사람들이 진심을 들을 수 있는 시간과 마음의 여력이 있구나 하는 걸 배웠다고나 할까? 관심을 주는 것을 보고 사실 조금 놀라기까지 했다. 세상은 충분히 움직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 했다.

처음부터 ‘파제’란 활동명으로 음악 커리어를 시작한 게 아니라고.
2010년도에 전역하고 친구들이랑 밴드를 만들었다. 기존에 각자 속해있는 또 다른 밴드들이 있었고,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시간 맞추기가 어렵더라. 혼자라도 먼저 해야겠다 싶어 그룹을 나와 음악을 시작했다. 그때는 밴드 음악을 그냥 어쿠스틱 기타로 가져와서 하는 형태이다 보니 우울한 노래들이 많았다. 회색빛의, 회색 톤의 음악을 한다고 해서 ‘그레이톤’이라는 이름을 썼었다. 내 이미지랑 안 맞지 않나. (웃음) 2013년 후반부터 ‘파제’란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파제의 음악에서 기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기타는 언제부터 익힌 것인지.
2006년 11월 수능 끝난 날에 형한테 처음 배웠다. (실력이 뛰어나 어린 시절부터 친 것인 줄 알았다고 하니) 얼마 안 됐다. (웃음) 형은 일찍부터 음악을 하려고 하던 사람인데, 나는 그냥 ‘기타 치면서 데미안 라이스 노래 부르고 싶다’ 정도였다. 군대 막바지에 조금씩 기타를 치기 시작했고, 형을 통해 핑크 플로이드나 오아시스 등을 접하면서 영역을 넓히게 됐던 것 같다. 기타 솔로 같은 것도 따보고 하면서.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한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종류의 악기, 기타를 다루는 등 누구보다 음악 스펙트럼이 넓다.
한국에 플라멩코 단체가 있다. 내가 플라멩코를 좋아하는데 어떻게 하다 그 단체 선생님과 인연이 되어 스페인에 직접 가서 플라멩코를 배웠다. 그때 ‘파두’라는 포르투갈 장르를 알게 됐고, 터키에서는 ‘카눈’이란 악기를 배웠다. 그렇게 다양한 음악에 조금 더 관심을 두게 됐다. 물론 나는 그 소리를 단순히 내 음악에 잘 녹여내고 싶다는 측면에 가까워 적절한 연주법만 익힌 정도다. 프로 연주자만큼의 실력은 절대 아니다. (웃음) 그래도 그런 식으로 하면서 음악에 대한 지평이 넓어지다 보니까 조금 더 수월하게 음악을 만들고 진심을 더 담을 수 있게 된 건 확실하다. 전에는 많은 게 막연했고 음악 카피도 잘 안되고 그랬다.

파제를 대표할 수 있는 음악 혹은 음반을 한 장 뽑아준다면?
무조건 연주 앨범인 정규 1집 < Pa.je Archive >. 그 음반에 오랜 기간 내가 해오던 음악 스타일이 잘 녹아 있다. 곡을 쓰던 때와 현재 시점에서의 생각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과거보다 지금의 내가 더 나쁜 사람이, 더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거다. < Pa.je Archive >에는 당시에 내가 했던 생각과 마음이 온전히 들어있다. 존경도 애정도 때로는 아쉬움도 담기지 않았겠나. 그런 감정들을 나만의 방식으로 솔직하게 음반에 담았다. 

앞으로의 활동 계획도 궁금하다.
연주곡 중심의 음반을 한 2장 정도 발매하려고 생각 중이다. 실제로 곡을 꽤 만들긴 했는데 앨범을 내려면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중이다. 사실 음반 계획은 한 번에 네다섯 개씩 한다. 예를 들어 < Pa.je Archive 2 >가 있을 것이고, 또 다른 스타일의 연주곡 앨범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상황에 맞춰 조금 더 완성되고, 충분히 즐거운 앨범이 뽑힌다면 그때 작업물을 세상에 내놓지 않을까.

진행 : 박수진
정리 : 장준환, 박수진
사진 : 정다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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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250(이오공) 인터뷰

뽕, 가까우면서도 멀게 느껴지는 한 글자에 대한 탐구는 몇 년 전만 해도 분명 유행에 반하는 흐름이었다. 하지만 이 미지의 기운은 대한민국 가요계 역사에서 틈틈이 한자리씩 차지하며 시대 전체를 관통했다. 뽕짝 또는 트로트라는 이름만으로, 통속적인 멜로디나 구성진 창법이란 특징만으로 ‘뽕’을 정의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시 돌고 돌아 뽕은 무엇인가? 2017년 돌연 뽕을 찾아 떠나겠다고 선언한 댄스 음악 프로듀서 250(이오공) 역시 그에 대한 해답을 바로 내리지 못했다. 물론 초조해하지도 않았다. 충분히 시간을 두고 이박사를 비롯한 뽕짝 음악의 전설들에게 조언을 구하며 특유의 분위기를 체화했고 지난 3월 드디어 세상을 향해 문제작 < 뽕 >을 내던졌다. 기나긴 고민과 노력 끝에 나름의 결론을 도출하기까지 5년, 그간의 발자취를 되짚어 보며 한국적인 사운드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을 나눴다.

생소할 법한 ‘뽕’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예전부터 전형적인 EDM 공식에 맞춘 음악들을 즐겨 들었고 그런 사운드를 만들고 싶어 했다. 특히 직접 녹음한 목소리보다 전혀 관계없는 장르의 기존 보컬 소스들을 미디 프로그램으로 편집해서 만드는 샘플링 방식이 멋있어 보였다. 그러던 중에 어디에서 소재를 가져올지 찾아보게 되었고 탐색 끝에 내린 결론이 ‘뽕짝’이었다. 뽕짝을 원재료로 한 노래는 들어본 적도 없었고 아카이브 자체가 무궁무진해서 그야말로 노다지에 가까운 분야였다.

가끔씩이라도 듣던 음악이긴 했는지.

일부러 찾아 들은 적은 없었다. 작업을 위해 고른 뽕짝이 막상 음악적으로 어떤 요소가 있는지 하나도 몰라서 한 2년 정도는 진지하게 뽕짝만 들으면서 지냈다. 그래서 당시에 사운드클라우드도 완전히 끊었다. 플랫폼을 사용하다 보면 실시간으로 최신 노래들이 뜨는데 어느 순간 그런 것들에 쫓기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당장은 세련되고 멋있는 소리지만 한편으로는 잠시 스쳐 지나가는 스타일일 수 있다. 유행어처럼 짧게 소비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참고 견뎠다.

음악을 제대로 시작한 이후부터 스티비 원더나 마이클 잭슨처럼 의식적으로 찾아 들어야 하는 음악들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정립한 나만의 기준이 있었는데 그것들을 전부 걷어내고 그 이전의 기억으로 돌아가서 뽕을 만드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 뽕 >을 제작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주변 반응은 어땠는지.

일단 회사 사람들 외에는 음악적인 피드백을 주고받는 사람이 거의 없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만들었고 회사도 그걸 존중해 주었기 때문에 작업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별다른 접점이 없었다.

하지만 실제 공연에서 믹스셋을 틀었을 때는 반응이 달랐다. 전에 클럽 케이크샵에서 요즘 떠오르는 힙합 뮤지션들을 모아서 하는 힙합 파티가 있었다. 내가 선곡한 음악들이 행사 분위기와 맞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힙합만 틀기는 싫었기 때문에 순수하게 뽕짝으로만 1시간을 채웠다. 웬만하면 나를 앞으로 이런 애매한 환경에 놓이지 않게 하기 위한 결단이었다. 결과는 예상한 대로다. 그때 카메라가 나를 향해 있어서 영상에 담기지 않았지만 관객들이 한 명도 안 빠지고 다 나갔었다.

음악도 음악이지만 단어 자체가 주는 은근한 반감도 무시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

실제로 앨범 제목이 마음에 안 들어서 섭외에 응해주지 않은 분도 계셨다. 꼭 해주셨으면 하는 분이었어서 편지를 써서 설득해 보려 했는데 막상 쓰려고 하니까 뭐라 말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어떤 의미에서 < 뽕 >이라는 제목을 싫어하는지 알겠는데 그렇다고 내가 지금 하려는 뽕은 그렇게 뻔하고 통속적인 뽕짝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이상했다. 아쉽지만 어설프게 설명하려다 앞뒤가 안 맞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포기했다. 뽕이라고 하는 단어에 누군가는 거부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까진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앨범을 제작하면서 참고한 작품이나 아티스트가 있다면.

앨범 전체의 레퍼런스 같은 곡이 이은하의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이다. 개인적으로 한국에서 레코딩된 노래 중 가장 좋아하는 곡이기도 하지만 음악적으로 분석하면서 들었을 때 시대와 관계없이 너무 완벽한 노래다. 진보적이면서도 세련된 사운드, 애절함이 느껴지는 가사, 중간에 기술적인 부분을 과시할 수 있는 구간까지 모든 요소가 적절히 녹아 있는 곡이라서 그 노래 같은 앨범을 만들고 싶은 게 내 바람이었다.

레퍼런스가 뽕짝이 아니라는 점은 의외다.

이은하 씨가 원래 절창인데다가 꼬아가면서 부르는 편인데 그 곡에선 확 튀는 순간 없이 차분하게 눌러서 절제한다. 알고 보니 이 곡의 작곡 겸 프로듀싱을 맡은 장덕 씨가 주문한 방식이었다고 한다. 노래를 잘하는 것과 별개로 오히려 참고 부르면 더 슬프게 들릴 거라고 디렉팅을 해서 그런 노래가 나왔다고 한다. 항상 능력을 최대치로 쏟아내는 게 아니라 필요한 순간에만 그 감정을 정제해서 표현하는 느낌, 이런 부분이 여러모로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했다.

뽕짝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음악적 요소는 무엇인지.

반주의 메커니즘 자체가 매우 개인적이다. 연주자 한 명이 키보드 한 대로 모든 걸 해결한다. 자동 반주 기능을 켜고 왼손으로 베이스, 오른손으로 코드를 연주하면서 바탕을 먼저 쌓아두고 후에 여기저기서 리드 악기를 덧붙이며 멜로디를 쌓아가는 방식이다. ‘사랑 이야기’만 봐도 이박사님이 불렀던 멜로디를 찢어지는 신스 사운드로 바꾸고 거기에 모듈레이션을 걸었다. 뽕짝 연주자들이 현장에서 손으로 직접 하는 걸 나는 마우스로 하나하나 조절했다. 절대 밴드 음악은 아니다.

실제로 사운드에 엄청난 공을 들였다. 현존하는 뽕짝 음악 중에서는 최고의 소리를 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음악적으로 촌스러워자는 건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과거의 질료를 들여와 만든 작업물인 만큼 기본적으로 사운드만큼은 타협할 수 없었다. 그리고 감정적인 공감으로 호평을 듣는 것도 좋겠지만 나에겐 사운드가 좋다는 말만 한 칭찬이 없는 것 같다.

음원 사이트에는 다프트 펑크 앨범 작업을 맡았던 프랑스의 CHAB가, 한정반으로 발매한 CD에는 류이치 사카모토와 협업했던 코테츠 토루가 마스터링에 참여했다. 두 가지 버전으로 공개한 이유는.

둘 중에 어느 하나를 꼽을 수 없을 정도로 각각의 개성도 느껴졌고 차이도 컸다. 아마 들어보면 확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오죽하면 마스터링 때문에 스피커를 하나 새로 장만했다. (웃음)

앨범에 실린 11개의 곡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곡은.

< 뽕 >의 전반적인 흐름을 고려했을 땐 ‘모든 것이 꿈이었네’다. 이박사님과 함께 김수일 선생님을 만나 뵈었을 때 불러주신 곡 중 하나인데 당시 현장에 있던 모두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느끼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날 바로 투트랙으로 반주랑 가창을 녹음 받아서 어떻게 활용할지 많이 고민했었는데 그 순간의 감동을 담는 게 더 의미 있는 작업이 되지 않을까 싶어 처음 부른 파일 그대로 실었다.

앨범을 완성하고 1~2달 정도 안 듣고 있다가 마스터도 맡기고 믹스도 최종 수정을 해야 해서 ‘모든 것이 꿈이었네’를 오랜만에 들었는데 덜컥 내가 죽기 전까지 이거보다 좋은 노래를 만들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이박사와 김수일, 두 콤비와의 작업기는 다큐멘터리 < 뽕을 찾아서 >를 통해 공개되기도 했다. 어떻게 기획하게 된 영상 콘텐츠인지.

온전히 회사의 아이디어다. 나는 그냥 앨범을 빨리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는데 회사에서 먼저 앨범 만드는 과정을 영상으로 남겨보자고 제안을 했다.

사실 비트메이커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뒤에서 어떤 면으로는 아티스트보다 더 큰 존재로 활동하는 모습을 상상했기 때문에 매체에 내 얼굴을 드러낸다는 그림이 없었다. 단지 내 음악을 듣고 누가 만든 건지 찾아봐주고 알아줄 때, 프로듀서와 리스너 사이에 이상적인 관계가 성립된다고 생각하고 지냈었다. 그런데 이번 앨범을 통해 그 고정관념이 많이 사라졌다.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앞서 언급했던 두 분과의 만남 당시 직접 사용하시는 악기도 보여주실 수 있는지 정중히 여쭤봤고 흔쾌히 수락해 주셨다. 그때 들고 나오신 악기는 평생 사용하신 장비였는데 플로피 디스크를 꽂아서 저장해 둔 데이터를 로딩하는 방식이었다. 그 속엔 ‘YMCA’나 ‘몽키 매직’ 같은 옛날 노래들이 원본으로 담겨 있었고 재생 버튼을 누르는 순간 키보드 자체에서 소리가 웅장하게 뿜어져 나왔다.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스피커나 이어폰으로 듣던 음악들이 내 눈앞에 있는 악기, 연주자, 즉석 시퀀싱에 의해 물리적으로 실존할 수 있다는 걸 느꼈고 음악을 듣는다는 기준 개념 자체가 흔들렸다. 음악을 시작한 이래로 가장 임팩트가 센 순간이었다. 어차피 혼자 집에서 마우스로 비트를 만들던 사람이니까 다큐멘터리를 찍는 게 큰 의미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날 서울로 돌아올 때 내가 찍는 영상이 어쩌면 의미가 있는 기록물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뱅버스’의 뮤직비디오도 화제가 많이 됐다.

뮤직비디오 역시 아이디어를 제공해 줬을 때 가볍게 의견 정도만 첨언하는 식이고 크게 물어보지 않는다. 기왕이면 나도 완성본이 떴을 때 직접 클릭해서 보고 싶다. 결과물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스태프분께서 현장 사진을 찍어서 보내줬는데 난데없이 모텔 벽에 어떤 사람이 매달려 있었다. 마치 스파이더맨 촬영장을 보는 것 같았다. 뽕에서 시작했는데 긴 와이어를 달고 액션을 펼치는 스턴트맨이 나올 줄 누가 알았을까. 그 사진 보고 엄청 웃었다.

근 5년이란 작업 기간을 가졌다. 앨범 공개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 이유는.

코로나 때문에 1년 정도 지연된 것도 있지만 그 사이에 ‘휘날레’와 ‘춤을 추어요’가 추가되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밀렸다기보단 앨범이 완성되지 않았었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애초에 이런 결과물을 만드는 데 이 정도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긴 시간 끝에 체득한 ‘뽕’은 도대체 무엇인가.

누군가는 뽕짝을 생각하고 어떤 이는 트로트를 떠올린다. 누구나 자조적인 해석으로 한 마디씩 거들 수 있는 건 맞지만 ‘뽕’이라는 한 글자에 기본적으로 ‘촌스러움’이란 공통분모가 내재되어 있다. 나는 그걸 인정하고 시작했다. “나는 촌스러워. 난 촌스러운 게 좋아” 하면서 말이다. 물론 음악을 만들면서 너무 올드한 감성으로 가고 있는 건 아닌가 고민하기도 했는데 세련돼 보이기 위해서 억지로 꾸며대는 것이야말로 제일 촌스러운 행동 같았다. 차라리 이 촌스러움을 정말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때부터는 이유 있는 촌스러움, 즉 나의 온전한 취향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 트랙 ‘휘날레’가 유독 튀는 것도 비슷한 이유일지.

그렇다. 사운드 자체만 볼 때 뽕짝이라고 할 이유는 없지만 나를 슬프게 만들고 향수를 자극하는 소리야말로 나에겐 뽕이었다. 그런 점에서 1990년대 만화 주제가는 나에게 노스탤지어 그 자체였다. 특히 < 아기공룡 둘리 >는 엄마를 찾아 떠돌아다니는 아이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유독 아련하게 남아있다. 계속 슬프게 기억되는 어린 시절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에 앨범 마지막에 ‘휘날레’라는 곡을 넣게 되었고 이왕이면 원곡을 부른 오승원 씨가 서사를 아름답게 마무리 지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유튜브에서 오승원 씨가 비교적 최근에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신 영상을 봤다.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비현실적이고 동화적인 음색엔 변함이 없었고 동심으로 돌아간 관객들은 모두 탄성을 자아내며 무대에 깊이 빠져 있었다. 댓글들도 다 똑같은 얘기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게 그대로인데 그 사이에 흘러버린 시간을 체감하면서 복잡함 감정을 느낀 게 아니었을까 싶다.

음원 사이트에서는 누락된 ‘춤을 추어요’는 어떤 곡인가.

원곡 자체는 장은숙의 ‘춤을 추어요’지만 사실 故 신해철의 기일에 맞춰 사운드클라우드에 올리려고 했던 일종의 헌정곡이다. 앞부분에 나오는 드럼은 넥스트 ‘인형의 기사 Part Ⅱ’에 나오는 드럼을 샘플링했고 중간중간 허밍이나 보컬 소스들도 조금씩 넣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구매한 앨범이 신해철 2집인 만큼 신해철은 나에게 각별한 뮤지션이다. 여러 이유로 앨범에 실리진 못했다.

특별한 사명감을 가지고 만든 앨범은 아니지만 듣는 입장에선 이날치처럼 우리나라 고유의 정서를 이식하는 작업으로 느껴져 의미 부여를 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분명 있었어야 하는 시도인 건 맞지만 < 뽕 > 은 어디까지나 나 250의 사운드를 담은 작품일 뿐이다. 나는 태어나서 외국을 나가본 적이 한 번도 없다. 평생을 한국에서 먹고 자며 자랐기 때문에 뭘 해도 난 결국 한국인이다. 애초에 정체성을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한국인으로서 내가 가지고 있는 음악적 DNA를 고민해 본다면 그 답이 결코 국악이 될 수는 없었다. ‘국악’이라고 하면 가끔 TV에서 보여주는 민요 공연이나 국립국악원 정도의 이미지만 떠오른다. 내 삶과는 조금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 사운드 자체에서 뭔가가 느껴지진 않았다.

그에 비해 뽕짝은 왠지 모르게 친숙하고 서글프다. 다들 뽕짝 음악을 어디서 맨 처음으로 들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냥 어렸을 때 고속도로 위를 운전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 화장실 가려고 잠깐 들린 휴게소에서 우연히 듣게 된 소리, 언제 들었는지 알 수 없는 그런 음악이다. 의식하고 들은 것이 아니라 살아가다 보니 우리 삶의 배경 속에 슬그머니 스며들어 있던 음악이었고 내 음악에도 이런 정체성을 억지로 어필하기 보다 자연스럽게 녹여내기 위해 노력했다.

해외 매체에서도 이런 한국적인 질감에 신선함을 느껴 주목하는 분위기다.

뽕이라는 화두가 있어서 다뤄준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외국인들에게도 전혀 진입 장벽이 없이 신선하고 재미있는 사운드로 느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앞으로도 비슷한 맥락으로 밀어붙일 생각인지.

무슨 대단한 업적을 세운 것처럼 그다음에 뭔가를 하려는 것도 좀 그렇고, 이미 한 번 했다고 똑같은 거 두 번 안 한다는 것도 이상한 것 같다. 이번 앨범을 만들 때도 전부 내 마음대로 했듯이 그때그때의 내 감정에 충실하면서 적당한 그릇에 담으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래서 당장은 큰 변화 없이 똑같이 가려고 하고 있다.

힙합 인스트루멘탈 앨범을 제작할 계획은 없는지.

사실 힙합 앨범도 생각은 하고 있다. 살면서 가장 좋아했던 음악 중 하나인데 그걸 한 번도 안 하는 것도 이상하고 맨날 노스탤지어만 뒤지고 다니면서 음악을 하는 것도 아니니까 언젠가는 꼭 만들 생각이다. 다만 지금 시점에 힙합을 한다고 하면 어떤 사운드를 해야 할지 혼란스러울 것 같아 구체화된 건 없다.

향후 공연 계획도 궁금하다.

최대한 많은 곳에서 이 곡들을 라이브로 들려드릴 수 있게끔 준비하고 있다. 일반 힙합 클럽에서 공연하기 위해서 다른 음악들과 뽕짝 음악의 접점을 찾아야 하고, 어떤 식으로 섞어서 틀지에 대한 고민을 본격적으로 해야 하는 단계다.

답사 차원으로 다녀온 콜라텍 같은 무대에서 공연할 생각도 있는지.

물론이다. 콜라텍이 생각보다 놀기 좋은 공간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는 클럽들이랑 차원이 다르다. 사운드도 빵빵하고 반짝이 같은 조명도 막상 켜놓으면 은은하게 분위기가 산다. 술 마시고 춤추면서 논다고 볼 때 웬만한 클럽보다 쾌적함이 훨씬 높은 것 같다.

진행: 장준환, 임동엽, 정다열
사진: BANA 제공
정리: 정다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