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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이오공) 인터뷰

뽕, 가까우면서도 멀게 느껴지는 한 글자에 대한 탐구는 몇 년 전만 해도 분명 유행에 반하는 흐름이었다. 하지만 이 미지의 기운은 대한민국 가요계 역사에서 틈틈이 한자리씩 차지하며 시대 전체를 관통했다. 뽕짝 또는 트로트라는 이름만으로, 통속적인 멜로디나 구성진 창법이란 특징만으로 ‘뽕’을 정의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시 돌고 돌아 뽕은 무엇인가? 2017년 돌연 뽕을 찾아 떠나겠다고 선언한 댄스 음악 프로듀서 250(이오공) 역시 그에 대한 해답을 바로 내리지 못했다. 물론 초조해하지도 않았다. 충분히 시간을 두고 이박사를 비롯한 뽕짝 음악의 전설들에게 조언을 구하며 특유의 분위기를 체화했고 지난 3월 드디어 세상을 향해 문제작 < 뽕 >을 내던졌다. 기나긴 고민과 노력 끝에 나름의 결론을 도출하기까지 5년, 그간의 발자취를 되짚어 보며 한국적인 사운드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을 나눴다.

생소할 법한 ‘뽕’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예전부터 전형적인 EDM 공식에 맞춘 음악들을 즐겨 들었고 그런 사운드를 만들고 싶어 했다. 특히 직접 녹음한 목소리보다 전혀 관계없는 장르의 기존 보컬 소스들을 미디 프로그램으로 편집해서 만드는 샘플링 방식이 멋있어 보였다. 그러던 중에 어디에서 소재를 가져올지 찾아보게 되었고 탐색 끝에 내린 결론이 ‘뽕짝’이었다. 뽕짝을 원재료로 한 노래는 들어본 적도 없었고 아카이브 자체가 무궁무진해서 그야말로 노다지에 가까운 분야였다.

가끔씩이라도 듣던 음악이긴 했는지.

일부러 찾아 들은 적은 없었다. 작업을 위해 고른 뽕짝이 막상 음악적으로 어떤 요소가 있는지 하나도 몰라서 한 2년 정도는 진지하게 뽕짝만 들으면서 지냈다. 그래서 당시에 사운드클라우드도 완전히 끊었다. 플랫폼을 사용하다 보면 실시간으로 최신 노래들이 뜨는데 어느 순간 그런 것들에 쫓기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당장은 세련되고 멋있는 소리지만 한편으로는 잠시 스쳐 지나가는 스타일일 수 있다. 유행어처럼 짧게 소비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참고 견뎠다.

음악을 제대로 시작한 이후부터 스티비 원더나 마이클 잭슨처럼 의식적으로 찾아 들어야 하는 음악들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정립한 나만의 기준이 있었는데 그것들을 전부 걷어내고 그 이전의 기억으로 돌아가서 뽕을 만드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 뽕 >을 제작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주변 반응은 어땠는지.

일단 회사 사람들 외에는 음악적인 피드백을 주고받는 사람이 거의 없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만들었고 회사도 그걸 존중해 주었기 때문에 작업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별다른 접점이 없었다.

하지만 실제 공연에서 믹스셋을 틀었을 때는 반응이 달랐다. 전에 클럽 케이크샵에서 요즘 떠오르는 힙합 뮤지션들을 모아서 하는 힙합 파티가 있었다. 내가 선곡한 음악들이 행사 분위기와 맞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힙합만 틀기는 싫었기 때문에 순수하게 뽕짝으로만 1시간을 채웠다. 웬만하면 나를 앞으로 이런 애매한 환경에 놓이지 않게 하기 위한 결단이었다. 결과는 예상한 대로다. 그때 카메라가 나를 향해 있어서 영상에 담기지 않았지만 관객들이 한 명도 안 빠지고 다 나갔었다.

음악도 음악이지만 단어 자체가 주는 은근한 반감도 무시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

실제로 앨범 제목이 마음에 안 들어서 섭외에 응해주지 않은 분도 계셨다. 꼭 해주셨으면 하는 분이었어서 편지를 써서 설득해 보려 했는데 막상 쓰려고 하니까 뭐라 말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어떤 의미에서 < 뽕 >이라는 제목을 싫어하는지 알겠는데 그렇다고 내가 지금 하려는 뽕은 그렇게 뻔하고 통속적인 뽕짝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이상했다. 아쉽지만 어설프게 설명하려다 앞뒤가 안 맞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포기했다. 뽕이라고 하는 단어에 누군가는 거부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까진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앨범을 제작하면서 참고한 작품이나 아티스트가 있다면.

앨범 전체의 레퍼런스 같은 곡이 이은하의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이다. 개인적으로 한국에서 레코딩된 노래 중 가장 좋아하는 곡이기도 하지만 음악적으로 분석하면서 들었을 때 시대와 관계없이 너무 완벽한 노래다. 진보적이면서도 세련된 사운드, 애절함이 느껴지는 가사, 중간에 기술적인 부분을 과시할 수 있는 구간까지 모든 요소가 적절히 녹아 있는 곡이라서 그 노래 같은 앨범을 만들고 싶은 게 내 바람이었다.

레퍼런스가 뽕짝이 아니라는 점은 의외다.

이은하 씨가 원래 절창인데다가 꼬아가면서 부르는 편인데 그 곡에선 확 튀는 순간 없이 차분하게 눌러서 절제한다. 알고 보니 이 곡의 작곡 겸 프로듀싱을 맡은 장덕 씨가 주문한 방식이었다고 한다. 노래를 잘하는 것과 별개로 오히려 참고 부르면 더 슬프게 들릴 거라고 디렉팅을 해서 그런 노래가 나왔다고 한다. 항상 능력을 최대치로 쏟아내는 게 아니라 필요한 순간에만 그 감정을 정제해서 표현하는 느낌, 이런 부분이 여러모로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했다.

뽕짝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음악적 요소는 무엇인지.

반주의 메커니즘 자체가 매우 개인적이다. 연주자 한 명이 키보드 한 대로 모든 걸 해결한다. 자동 반주 기능을 켜고 왼손으로 베이스, 오른손으로 코드를 연주하면서 바탕을 먼저 쌓아두고 후에 여기저기서 리드 악기를 덧붙이며 멜로디를 쌓아가는 방식이다. ‘사랑 이야기’만 봐도 이박사님이 불렀던 멜로디를 찢어지는 신스 사운드로 바꾸고 거기에 모듈레이션을 걸었다. 뽕짝 연주자들이 현장에서 손으로 직접 하는 걸 나는 마우스로 하나하나 조절했다. 절대 밴드 음악은 아니다.

실제로 사운드에 엄청난 공을 들였다. 현존하는 뽕짝 음악 중에서는 최고의 소리를 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음악적으로 촌스러워자는 건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과거의 질료를 들여와 만든 작업물인 만큼 기본적으로 사운드만큼은 타협할 수 없었다. 그리고 감정적인 공감으로 호평을 듣는 것도 좋겠지만 나에겐 사운드가 좋다는 말만 한 칭찬이 없는 것 같다.

음원 사이트에는 다프트 펑크 앨범 작업을 맡았던 프랑스의 CHAB가, 한정반으로 발매한 CD에는 류이치 사카모토와 협업했던 코테츠 토루가 마스터링에 참여했다. 두 가지 버전으로 공개한 이유는.

둘 중에 어느 하나를 꼽을 수 없을 정도로 각각의 개성도 느껴졌고 차이도 컸다. 아마 들어보면 확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오죽하면 마스터링 때문에 스피커를 하나 새로 장만했다. (웃음)

앨범에 실린 11개의 곡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곡은.

< 뽕 >의 전반적인 흐름을 고려했을 땐 ‘모든 것이 꿈이었네’다. 이박사님과 함께 김수일 선생님을 만나 뵈었을 때 불러주신 곡 중 하나인데 당시 현장에 있던 모두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느끼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날 바로 투트랙으로 반주랑 가창을 녹음 받아서 어떻게 활용할지 많이 고민했었는데 그 순간의 감동을 담는 게 더 의미 있는 작업이 되지 않을까 싶어 처음 부른 파일 그대로 실었다.

앨범을 완성하고 1~2달 정도 안 듣고 있다가 마스터도 맡기고 믹스도 최종 수정을 해야 해서 ‘모든 것이 꿈이었네’를 오랜만에 들었는데 덜컥 내가 죽기 전까지 이거보다 좋은 노래를 만들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이박사와 김수일, 두 콤비와의 작업기는 다큐멘터리 < 뽕을 찾아서 >를 통해 공개되기도 했다. 어떻게 기획하게 된 영상 콘텐츠인지.

온전히 회사의 아이디어다. 나는 그냥 앨범을 빨리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는데 회사에서 먼저 앨범 만드는 과정을 영상으로 남겨보자고 제안을 했다.

사실 비트메이커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뒤에서 어떤 면으로는 아티스트보다 더 큰 존재로 활동하는 모습을 상상했기 때문에 매체에 내 얼굴을 드러낸다는 그림이 없었다. 단지 내 음악을 듣고 누가 만든 건지 찾아봐주고 알아줄 때, 프로듀서와 리스너 사이에 이상적인 관계가 성립된다고 생각하고 지냈었다. 그런데 이번 앨범을 통해 그 고정관념이 많이 사라졌다.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앞서 언급했던 두 분과의 만남 당시 직접 사용하시는 악기도 보여주실 수 있는지 정중히 여쭤봤고 흔쾌히 수락해 주셨다. 그때 들고 나오신 악기는 평생 사용하신 장비였는데 플로피 디스크를 꽂아서 저장해 둔 데이터를 로딩하는 방식이었다. 그 속엔 ‘YMCA’나 ‘몽키 매직’ 같은 옛날 노래들이 원본으로 담겨 있었고 재생 버튼을 누르는 순간 키보드 자체에서 소리가 웅장하게 뿜어져 나왔다.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스피커나 이어폰으로 듣던 음악들이 내 눈앞에 있는 악기, 연주자, 즉석 시퀀싱에 의해 물리적으로 실존할 수 있다는 걸 느꼈고 음악을 듣는다는 기준 개념 자체가 흔들렸다. 음악을 시작한 이래로 가장 임팩트가 센 순간이었다. 어차피 혼자 집에서 마우스로 비트를 만들던 사람이니까 다큐멘터리를 찍는 게 큰 의미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날 서울로 돌아올 때 내가 찍는 영상이 어쩌면 의미가 있는 기록물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뱅버스’의 뮤직비디오도 화제가 많이 됐다.

뮤직비디오 역시 아이디어를 제공해 줬을 때 가볍게 의견 정도만 첨언하는 식이고 크게 물어보지 않는다. 기왕이면 나도 완성본이 떴을 때 직접 클릭해서 보고 싶다. 결과물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스태프분께서 현장 사진을 찍어서 보내줬는데 난데없이 모텔 벽에 어떤 사람이 매달려 있었다. 마치 스파이더맨 촬영장을 보는 것 같았다. 뽕에서 시작했는데 긴 와이어를 달고 액션을 펼치는 스턴트맨이 나올 줄 누가 알았을까. 그 사진 보고 엄청 웃었다.

근 5년이란 작업 기간을 가졌다. 앨범 공개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 이유는.

코로나 때문에 1년 정도 지연된 것도 있지만 그 사이에 ‘휘날레’와 ‘춤을 추어요’가 추가되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밀렸다기보단 앨범이 완성되지 않았었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애초에 이런 결과물을 만드는 데 이 정도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긴 시간 끝에 체득한 ‘뽕’은 도대체 무엇인가.

누군가는 뽕짝을 생각하고 어떤 이는 트로트를 떠올린다. 누구나 자조적인 해석으로 한 마디씩 거들 수 있는 건 맞지만 ‘뽕’이라는 한 글자에 기본적으로 ‘촌스러움’이란 공통분모가 내재되어 있다. 나는 그걸 인정하고 시작했다. “나는 촌스러워. 난 촌스러운 게 좋아” 하면서 말이다. 물론 음악을 만들면서 너무 올드한 감성으로 가고 있는 건 아닌가 고민하기도 했는데 세련돼 보이기 위해서 억지로 꾸며대는 것이야말로 제일 촌스러운 행동 같았다. 차라리 이 촌스러움을 정말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때부터는 이유 있는 촌스러움, 즉 나의 온전한 취향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 트랙 ‘휘날레’가 유독 튀는 것도 비슷한 이유일지.

그렇다. 사운드 자체만 볼 때 뽕짝이라고 할 이유는 없지만 나를 슬프게 만들고 향수를 자극하는 소리야말로 나에겐 뽕이었다. 그런 점에서 1990년대 만화 주제가는 나에게 노스탤지어 그 자체였다. 특히 < 아기공룡 둘리 >는 엄마를 찾아 떠돌아다니는 아이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유독 아련하게 남아있다. 계속 슬프게 기억되는 어린 시절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에 앨범 마지막에 ‘휘날레’라는 곡을 넣게 되었고 이왕이면 원곡을 부른 오승원 씨가 서사를 아름답게 마무리 지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유튜브에서 오승원 씨가 비교적 최근에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신 영상을 봤다.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비현실적이고 동화적인 음색엔 변함이 없었고 동심으로 돌아간 관객들은 모두 탄성을 자아내며 무대에 깊이 빠져 있었다. 댓글들도 다 똑같은 얘기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게 그대로인데 그 사이에 흘러버린 시간을 체감하면서 복잡함 감정을 느낀 게 아니었을까 싶다.

음원 사이트에서는 누락된 ‘춤을 추어요’는 어떤 곡인가.

원곡 자체는 장은숙의 ‘춤을 추어요’지만 사실 故 신해철의 기일에 맞춰 사운드클라우드에 올리려고 했던 일종의 헌정곡이다. 앞부분에 나오는 드럼은 넥스트 ‘인형의 기사 Part Ⅱ’에 나오는 드럼을 샘플링했고 중간중간 허밍이나 보컬 소스들도 조금씩 넣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구매한 앨범이 신해철 2집인 만큼 신해철은 나에게 각별한 뮤지션이다. 여러 이유로 앨범에 실리진 못했다.

특별한 사명감을 가지고 만든 앨범은 아니지만 듣는 입장에선 이날치처럼 우리나라 고유의 정서를 이식하는 작업으로 느껴져 의미 부여를 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분명 있었어야 하는 시도인 건 맞지만 < 뽕 > 은 어디까지나 나 250의 사운드를 담은 작품일 뿐이다. 나는 태어나서 외국을 나가본 적이 한 번도 없다. 평생을 한국에서 먹고 자며 자랐기 때문에 뭘 해도 난 결국 한국인이다. 애초에 정체성을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한국인으로서 내가 가지고 있는 음악적 DNA를 고민해 본다면 그 답이 결코 국악이 될 수는 없었다. ‘국악’이라고 하면 가끔 TV에서 보여주는 민요 공연이나 국립국악원 정도의 이미지만 떠오른다. 내 삶과는 조금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 사운드 자체에서 뭔가가 느껴지진 않았다.

그에 비해 뽕짝은 왠지 모르게 친숙하고 서글프다. 다들 뽕짝 음악을 어디서 맨 처음으로 들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냥 어렸을 때 고속도로 위를 운전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 화장실 가려고 잠깐 들린 휴게소에서 우연히 듣게 된 소리, 언제 들었는지 알 수 없는 그런 음악이다. 의식하고 들은 것이 아니라 살아가다 보니 우리 삶의 배경 속에 슬그머니 스며들어 있던 음악이었고 내 음악에도 이런 정체성을 억지로 어필하기 보다 자연스럽게 녹여내기 위해 노력했다.

해외 매체에서도 이런 한국적인 질감에 신선함을 느껴 주목하는 분위기다.

뽕이라는 화두가 있어서 다뤄준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외국인들에게도 전혀 진입 장벽이 없이 신선하고 재미있는 사운드로 느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앞으로도 비슷한 맥락으로 밀어붙일 생각인지.

무슨 대단한 업적을 세운 것처럼 그다음에 뭔가를 하려는 것도 좀 그렇고, 이미 한 번 했다고 똑같은 거 두 번 안 한다는 것도 이상한 것 같다. 이번 앨범을 만들 때도 전부 내 마음대로 했듯이 그때그때의 내 감정에 충실하면서 적당한 그릇에 담으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래서 당장은 큰 변화 없이 똑같이 가려고 하고 있다.

힙합 인스트루멘탈 앨범을 제작할 계획은 없는지.

사실 힙합 앨범도 생각은 하고 있다. 살면서 가장 좋아했던 음악 중 하나인데 그걸 한 번도 안 하는 것도 이상하고 맨날 노스탤지어만 뒤지고 다니면서 음악을 하는 것도 아니니까 언젠가는 꼭 만들 생각이다. 다만 지금 시점에 힙합을 한다고 하면 어떤 사운드를 해야 할지 혼란스러울 것 같아 구체화된 건 없다.

향후 공연 계획도 궁금하다.

최대한 많은 곳에서 이 곡들을 라이브로 들려드릴 수 있게끔 준비하고 있다. 일반 힙합 클럽에서 공연하기 위해서 다른 음악들과 뽕짝 음악의 접점을 찾아야 하고, 어떤 식으로 섞어서 틀지에 대한 고민을 본격적으로 해야 하는 단계다.

답사 차원으로 다녀온 콜라텍 같은 무대에서 공연할 생각도 있는지.

물론이다. 콜라텍이 생각보다 놀기 좋은 공간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는 클럽들이랑 차원이 다르다. 사운드도 빵빵하고 반짝이 같은 조명도 막상 켜놓으면 은은하게 분위기가 산다. 술 마시고 춤추면서 논다고 볼 때 웬만한 클럽보다 쾌적함이 훨씬 높은 것 같다.

진행: 장준환, 임동엽, 정다열
사진: BANA 제공
정리: 정다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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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엘비 인터뷰

‘영혼 없는 힘내라는 말이 더 힘든 걸 알아
또 고작 그거 가지고 그렇게까지 힘들어하냐고’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中)

청춘은 왜 아파야만 하고, 고통을 감내해야만 하는가. 이해와 공감이 결여된 사회는 많은 사회 초년생들을 점점 구석으로 내몰고 있다. 빛나는 힙합 스타들의 주변을 맴돌던 래퍼 최엘비 역시 여러 아픔을 겪으며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다. 하지만 그는 귀를 막고 밴드 브로콜리너마저의 음악을 택했다. 세상의 어떤 말보다 노래 가사 한 줄이 주는 울림을 몸소 깨달았고 누군가에게 자신의 음악도 위로가 될 수 있기를 꿈꿨다.

그 염원은 작년 11월 정규 3집 < 독립음악 >으로 결실을 맺었다. 열등감으로 물들어 일그러진 과거는 물론 냉혹한 현실에 수긍하며 살아가는 조연들의 모습을 낱낱이 기록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이끌어 냈다. ‘죽음까지 막는 음악가’의 의지를 이어받은 최엘비는 더 이상 엑스트라가 아닌 주인공으로 우뚝 서있었다. 2021년의 끝자락, 어느 때보다 행복한 연말을 보내고 있던 최엘비와 함께 그의 마지막 20대를 정리해 봤다.

최근 발매한 정규 3집 < 독립음악 >의 반응이 상당히 뜨겁다. 인기를 실감하는지.

여태까지 냈던 것들과 확실히 다르다. 음원 사이트에 댓글도 많이 달리고 SNS 개인 메시지로 장문의 감상평을 보내주시기도 한다. 지극히 개인의 경험과 생각을 녹인 자전적 앨범이지만 세상의 수많은 조연들, 즉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으려 노력했기 때문에 많은 공감을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커뮤니티나 평론 사이트에서도 언급을 많이 해줘서 사람들이 내 음악을 자연스럽게 많이 접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변화를 하루빨리 무대 위에서 체감하고 싶을 뿐이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주요 장치로 극적인 요소들이 자주 등장한다. 영화적 연출의 배경이 궁금하다.

처음부터 독립영화를 생각하고 작업했다. ‘최엘비’라는 배우가 오디션장에서 주인공 배역을 따내려는 장면을 상상했고 그렇게 처음 탄생한 곡이 ‘아는 사람 얘기’다. < 독립음악 >의 시작은 무조건 내가 오디션 보는 걸로, 대본을 읽는 걸로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중간중간 감독이 하는 평가는 따로 정해둔 것 없이 프리스타일로 녹음을 했다. 큰 틀만 정해두고 그냥 생각나는 대로 자유롭게 진행했다.

첫 곡 ‘아는 사람 얘기’부터 < 쇼미더머니 5 > 예선 탈락처럼 가장 초라했던 시절을 드러내고 스스로를 패배자라고 단정 짓는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래야 후련할 것 같았다. 앨범 작업할 때 보통 그 당시의 나를 데리고 와서 다시 꺼내곤 한다. 이번 앨범에 그때의 모습을 기록해야 이 답답한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을 것 같았고 이왕 하는 거 최대한 솔직하게 다 표현했다.

‘최엘비 얘기를 하는 최엘비를 연기하는 최엘비’가 화자로 나선 것도 같은 이유인지.

정확하다. 자신의 치부를 드러낼 때 내 얘기는 아니라면서 대화를 끌어가서 열등감의 밑바닥을 온전히 드러내고자 했다. 그리고 한 번 더 비꼬아서 들려주면 사람들이 듣기에 몰입감도 있고 재미있는 포인트가 될 거라 판단했다.

열등감과 비교의 중심엔 친구 비와이와 씨잼이 있다. 두 친구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는지.

고등학교 시절 비와이는 같은 반, 씨잼은 옆반이었다. 그 둘은 항상 같이 붙어 다닌 반면 나는 혼자 있는 걸 좋아했다. 내가 쉬는 시간에 앉아서 가사를 쓰고 있으면 둘이 옆으로 다가와 서로 랩도 들려주며 어울렸던 기억이 난다.

학생 때도 그 둘은 잘 했다. 작업량도 상당했지만 무대 위에서의 끼가 장난이 아니었다. 학교 축제 무대에 같이 선 적이 있는데 내가 제스처를 소극적으로 하는데 비해 걔네들은 웃통까지 벗고 난리가 났었다. 얘네는 나중에 진짜 크게 되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속으로 그들과 어느 정도 격차를 두었던 것 같다.

가사에도 나오지만 둘과 음악 취향도 달랐다. 크루를 함께 하면서 의견 차이는 없었는지.

애들이 피프티 센트나 릴 웨인을 들어보라고 했는데 조용한 음악을 좋아하는 나에겐 잘 와닿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내가 어떤 음악을 해야겠다는 구체적인 그림이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타협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냥 랩하는 게 재미있었다. 단체곡을 할 때도 내가 제안한 적은 한 번도 없고 잔잔한 재즈 비트에 내 노래를 따로 만들어 보는 게 전부였다. 사실 섹시 스트릿이란 이름도 맘에는 안 들어서 처음 들어갈 때 고민을 많이 했었다. (웃음)

스스로 그들과 거리를 두고 열등감을 느끼긴 했지만 유명한 친구들 덕분에 이름을 알리기 쉬웠던 것도 사실이다. 최엘비를 항상 ‘누구누구 친구’로 기억하는 세상 속에서 나 자신부터 바뀌어야겠다고 결심한 계기나 사건이 있었는지.

한 번은 행사에 가서 기리보이 형의 백업 더블링을 도와준 적이 있었다. 여럿이서 무대에 오르면 언제나 함성이 가득하다. 나는 그 환호를 즐기면서 랩을 하는데 그날 문득 정신 차리고 관객들을 바라보니까 전부 기리 형을 찍느라 바빴다. 내가 랩을 하고 있는 중에도 다른 사람이 집중 받는 상황을 접한 후에 이건 아니다 싶었다. 내가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스스로 변화의 필요를 느끼고 작업을 결심했다.

기리보이 얘기도 빼놓을 수 없다. 초기 활동명 ‘레이지본즈’에서 지금의 ‘최엘비’로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큰 일조를 한 걸로 알고 있다. 기리보이와 크루 우주비행은 어떤 존재인가.

사실 < 쇼미더머니 5 > 예선 탈락 이후 열등감이 극에 달했던 24살 즈음 음악을 관두려고 했었다. 랩은 그만하고 원래 하던 그림을 그리자고 다짐했을 때 우주비행에 래퍼가 아닌 아트 디렉터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기리 형이 요즘엔 랩 안 하냐고 물어보면서 피처링 한번 해보자고 제안을 했다. 마음은 접어둔 상태였지만 가사 쓰고 서울 가서 같이 녹음도 해보니까 또 재미있었다. 기리 형은 내가 다시 음악을 할 수 있게 만들어준 은인이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기리보이의 열렬한 팬이었다. 개인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소박한 감성을 우리나라 힙합 음악에 가장 처음, 그리고 제일 많이 접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만나서 얘기를 나눠보니까 기리 형도 나처럼 인디밴드를 좋아했다. 심지어 즐겨 듣는 팀까지 많이 겹쳐서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나에게 음악적 아버지이기도 하다.

인디밴드를 좋아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는지.

예전에 아는 교회 집사님께서 mp3에 노래를 넣어주셨는데 따뜻한 분위기의 음악이었다. 인터넷으로 알음알음 검색해 보니까 인디밴드들의 노래에 그런 향취가 묻어있었고 그때부터 유명한 팀들을 하나씩 찾아 들었다. 꼭 인디밴드가 아니더라도 잔잔한 음악들을 많이 들었다. 

주로 어떤 밴드의 음악을 많이 들었는지 궁금하다.

타이틀곡 ‘도망가!’의 피처링을 맡아주신 브로콜리너마저는 나에게 많은 음악적 영감을 안겨준 밴드다. 그리고 내가 추구하는 찌질함의 극치와 맞닿아 있는 팀이 십센치다. 1집의 ‘그게 아니고’가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캐스커, 한희정, 롤러코스터, 디어클라우드, 요조,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 파고, 못처럼 많은 인디 가수들의 노래를 들으며 자랐다.

1년 전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에서도 브로콜리너마저에게 애정을 표한 바 있다. 언제부터 좋아하게 된 건지.

입시 미술을 준비하던 고2 때부터 2년 동안 브로콜리너마저만 계속 들었다. 1집 < 보편적인 노래 >, 특히 ‘속좁은 여학생’이란 노래를 굉장히 좋아했었다. 내가 여학생이 된 것 같은 착각까지 들 정도로 음악이 전하는 이야기가 눈앞에 선명하게 묘사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그 앨범을 들으면 당시 미술 학원의 물감 냄새, 걸레 말리는 냄새까지도 다 떠오른다.

동경하던 밴드를 실제로 만난 건 언제인지.

한 유통사 인터뷰에서 깜짝 이벤트로 덕원 님이랑 전화 연결을 해 주셨고 나중에 콜라보 할 일 있으면 같이 하자고 말씀해 주셨다. 처음엔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어느 날 ‘우리 공연하는데 같이 할 수 있겠냐?’라고 연락을 주셔서 인연을 쌓게 되었다.

사실 잘 알지도 못하는 래퍼가 갑자기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이란 노래를 들고 나와서 찬양하고 있었으니까 혹시나 부담스러워하시면 어쩌나 하고 고민도 했었다. 실제로도 처음에 듣고 살짝 부담스러웠다고 하셨다. (웃음) 그래도 지금은 다 같이 단체 방에서 꾸준히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전작과 동일한 위치에 있는 마지막 곡 ‘도망가!’에서 밴드가 실제로 모습을 드러내며 ‘죽음까지 막는 음악가’의 의지를 그들과 함께 실현했다. 같이 작업한 소감이 남달랐을 것 같다.

거의 10년 넘게 스피커나 이어폰을 통해 듣던 목소리가 내 눈앞에 실존한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직접 만난 것도 믿기지 않았지만 작업 의뢰를 드린 이후도 적잖이 놀랬다. 특별히 내가 주문한 게 없었다. 정해진 멘트 없이 곡 내용만 설명해 드렸는데 단번에 의도를 파악하셔서 녹음도 바로 오케이가 났다. 브로콜리너마저로 출발했던 내 음악에 그들이 도착한 순간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선망하는 아티스트임은 틀림없지만 분명 독립이라는 취지에 맞춰 피처링을 완전히 걷어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협업을 해야겠다고 다짐한 이유가 있을지.

원래 전부 혼자 하려고 했었다. 근데 작업을 하면 할수록 누군가가 마지막에 등장해서 ‘하나 둘 셋 하면 도망가’라고 밀어주는 장면이 계속 떠올랐다. 내가 브로콜리너마저의 음악을 듣고 자랐으니까 내 우상의 격려로 마무리를 지어주는 게 이 앨범의 완성이라고 생각했다.

앨범 전반에 부모님을 향한 존경과 애정도 느껴진다.

‘독립음악’의 노랫말에도 쓰여있지만 나는 특이한 아이였다. 어릴 때부터 행동 강박이란 걸 앓았는데 그것 때문에 내가 상상하는 모든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움직이는 끈을 보고 뱀을 떠올리고, 그 뱀이 똬리를 틀고 있을 때의 포근함까지 연상하는 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학교에서는 애들이 멀리하던 편이었다.

하지만 엄마, 아빠는 믿고 기다려 주셨다. 내가 혼자 빠져있는 그 세계를 즐기도록 놔뒀고 오히려 그 공상을 발전시켜서 그림 같은 걸로 표현하도록 힘을 불어넣어 주셨다. 그때 받은 사랑이 아직까지도 내 음악의 영감이 되고 내 화법으로 자리 잡는데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집중력 있는 행동이 곡 작업할 때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어떤 상황을 볼 때 멀리서 보는 게 아니고 돋보기로 보는 것처럼 최대한 가까이 관찰하려 한다. 상황을 세세하게 묘사하다 보니까 들었을 때 그 장면들이 상상되고 가사, 연주의 색깔과 온도로도 드러난다. 음악을 하게 되면 브로콜리너마저처럼 소박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고 싶었는데 이런 점들이 고스란히 내 노래에 녹아들면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 같다.

가장 도드라지는 곡을 뽑아보자면.

처음 담배 피울 때의 기억을 더듬어 만든 ‘구름구름’이란 노래가 있다. 만화를 그릴 때 속으로 하는 생각을 말풍선에 담곤 하는데 구름처럼 피어나는 담배 연기가 꼭 말풍선 같았다. 그래서 담배 피우는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두고 그 말풍선 속에 표현들을 채워나갔다. 다른 곡들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을 만화처럼 몇 개의 컷으로 구체화하는 편이다.

그림이나 학업에 대한 미련은 없는지.

앨범 커버 작업할 때도 어느 정도 밑그림을 그려서 디자이너에게 전달하기 때문에 큰 미련은 없지만 요즘 내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그림으로 표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부쩍 많이 든다. 사진을 찍든 그림을 그리든 하나하나 내 손을 거쳐서 하나의 아트워크 단편집을 만들어보고 싶다.

과거 퍼그 모양의 복면을 눌러쓰고 활동했을 만큼 강아지 ‘율무’도 굉장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애완견을 넘어 또 한 명의 가족인 ‘율무’는 어떤 존재인가.

감정이 메말랐을 때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늘 가지고 있었다. 항상 옆에 있길 바라다보니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닌 동물이 되었고 실제로 키우게 된 건 성인이 된 이후다. 씨잼과 행사를 뛰면서 5만원씩 벌었고 그렇게 모은 40만원으로 데리고 온 친구가 강아지 율무다.

퍼그는 얼굴에 주름이 져있어서 기분이 좋을 때도 인상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웃고 있지만 슬픈, 웃픈 모습을 보면 꼭 나를 보는 것 같았고 내 음악도 퍼그와 닮아 있다고 생각해서 데리고 왔다. 처음엔 엄마가 반대도 많이 했지만 지금은 나보다 더 아들처럼 생각하고 있다. 일종의 분신이다.

‘율무’는 물론이고 용궁으로 떠난 물고기 ‘삼칠이’와 현재 키우고 있는 햄스터 ‘콜리’만 봐도 동물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키우기 전에 한 다섯 달 정도는 공부를 한다. 나한테 온 친구들은 최고의 환경에서 살게 하자는 생각이 있어서 애착이 좀 남다르긴 하다. 그 동물의 역사까지 찾아보고 하니까. (웃음) 조만간 내가 키운 동물들의 기억을 모아 하나의 얘기, 하나의 앨범으로 제작하려 한다.

< 독립음악 > 이후에 세워둔 계획이 있는지.

당장 대면 행사로 진행하긴 어렵겠지만 상황이 나아지는 대로 단독 콘서트를 꼭 열고 싶다. < 오리엔테이션 >부터 < CC > 그리고 < 독립음악 >까지 엮어서 하나의 연극으로 만들고 싶다. 짧은 연기 사이사이에 랩을 하는 식으로 스토리가 있는 공연을 구성하고 싶고 코로나가 풀리면 바로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준비 중이다.

그럼 이번 앨범으로 대학교 시리즈가 마무리된 것인가.

내가 계획한 건 4부작이다. 아직 < MT >가 남아있다. < 독립음악 >이 혼자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이었다면, < MT > 즉 멤버십 트레이닝은 전곡 피처링으로 채워 멤버들과 랩으로 여행을 떠날 계획이다. 여태까지의 작업 중에 제일 즐거운 감정으로 임하고 있다. 학교를 다닌 지 하도 오래돼서 나중에 재입학 해서 엠티를 한번 다녀와 볼까도 생각했다. (웃음)

그 전에 앞서 얘기했던 동물들이 커버를 장식하는 앨범을 먼저 발표할 예정이다. 제목은 < 푸른바다38 >이 될 것 같다. 예전에 만들었던 노래들을 상자에 담아 나룻배를 타고 미지의 섬으로 찾아가는 스토리를 기획하고 있는데 결말은 안 정했다. 그걸 두고 올지 아니면 그대로 다시 가지고 나올지는 모르겠다. < 독립음악 >처럼 내 경험을 담아 또 한 편의 서사를 써보려 한다.

최종적으로 < 독립음악 >이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이고 그 대상은 누구인가.

빛나는 주연 뒤엔 현실에 맞춰 조연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당신들이 결코 패배한 게 아니라는 걸 알리고 싶었다. 꿈을 향해 나란히 같이 걷고 있는 모두가 결국엔 각자의 삶에서 주인공이기 때문에 내 노래를 듣고 스스로를 많이 아껴줬으면 좋겠다.

< 똥파리 >라는 영화가 있는데 극의 주인공은 흔히 우리가 피하고 신경도 안 쓰는 그런 사람이다. 근데 그런 사람도 결국 자기 모습을 조명하는 영화 안에선 주인공이 된 거다. 저마다의 스토리가 있는 거고 그래서 나도 조연들의 마음을 대변한다는 생각으로 만든 것 같다.

인간 최재성의 20대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그 이유는.

최근에 보고 있는 웹툰의 제목이기도 한데 내 20대는 ‘찌질의 역사’다. 패배감에 젖어 있고 연인과의 이별에도 힘들어하며 찌질하게 살았는데 이제 그 역사가 끝나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려 한다. 그래도 < 독립음악 >을 통해 열등감으로 물들었던 내 과거를 어느 정도 털어낸 기분이 든다. 실제로 씨잼, 비와이는 알지만 나를 몰랐던 분들도 이제 너도 주인공이라고 말을 많이 해주신다. 사람들이 보내주는 글을 보면서 위안을 얻은 만큼 감사한 마음을 담아 꾸준히 곡 작업을 이어갈 것이다.

눈앞에 다가온 30대, 앞으로의 ‘최엘비 유니버스’는 어떤 모습으로 그려가길 바라는지.

어린 티만 살짝 벗어도 만족이다. < 오리엔테이션 >이든 < CC >든 다 대학생, 젊을 때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나도 이제는 좀 어른의 얘기를 해보고 싶다. 그러니까 앨범 속에 투영하는 ‘나’도 같이 성장하는 느낌으로 가져가고 싶다는 말이다. 서른이 된 만큼 또 말도 안 되는 거 막 시도하고 만들어 볼 예정이다. (웃음)

재차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을 그의 한 마디. 지는 걸 부끄러워하지 말고, 우는 걸 창피해하지 말자. 우리는 이미 각자의 인생에서 주인공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더 아껴주자. 아픈 과거를 드러내면서도 인터뷰 내내 수줍게 미소를 머금은 그의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청춘의 얼굴이 아닐까.

그때그때 떠오르는 ‘내 얘기’를 음악으로 다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선언한 최엘비. 또 어떤 평범한 이야기로 가장 보통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지 기대하며, 그의 선한 영향력이 널리 퍼지길 기원할 뿐이다.

인터뷰: 정다열, 장준환, 김성욱
촬영: 김성욱
정리: 정다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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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19 쟈니 리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열아홉 번째 주인공은 부평의 애스컴(ASCOM)에서 첫 음악활동을 시작한 원로 뮤지션 ‘쟈니 리’다.

“나는 음악으로 살다가 음악으로 죽고 싶어요”
1938년생으로 올해 나이 84세. 원로 가수 쟈니 리는 여전히 음악을 즐긴다고 했다. 일제강점기 때 만주 길림성에서 태어난 그의 인생 회고는 역사를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놀라웠다.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가 한국에 오게 된 계기, 6.25 전쟁을 견디고 미국인 양아버지를 만나게 된 일화, 박정희 정권 시대에 그의 노래 ‘내일은 해가 뜬다’가 금지곡이 될 수밖에 없던 이유 등…

우여곡절 끝에 1957, 8년도에 ‘배를 타고 노래한다’는 뜻의 극단 쇼보트(Showboat)의 일원이 된 그는 이후 1960년대 당시 유행한 극장쇼 무대를 사로잡으며 인기 가수가 된다. 부평에 자리했던 미 군수지원 사령부(애스컴)는 그런 쟈니 리의 시작을 함께했던 공간이다. 아직은 찬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지던 11월 말 종로의 한 라이브 공연장에서 그를 만났다. 전날 있던 지방 공연을 끝내고 서둘러 서울로 올라온 ‘전설’은 어디 하나 흐트러짐 없이 단정한 모습이었다. 몇 달 전 < 복면가왕 >에 출연해 3관왕 거며 쥔 일로 이날의 대화를 시작했다.

얼마 전 < 복면가왕 >에 출연하셔서 3연승을 거두셨습니다.
가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도 출연한다. 2주에 한 번씩 나오는 유튜브 방송(쟈니 리 tv)을 하니까 아마 그걸 보고 연락이 온 것 같다. 3연승을 한 건 어리둥절했다.

섭외 연락이 왔을 때 한 번에 출연 결심을 하셨나요?
사실 고민 좀 했다. 내가 최고 고령자인데 떨어지면 가면을 벗어야 하니까 창피할까 봐. 그래서 처음 가왕이 됐을 때 깜짝 놀랐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노래를 참 잘하지 않나. 가창력도 풍부하고… 그런데 노래가 맛이 없어. 노래라는 건 ‘맛이 있다’는 게 제일 중요하다. 창작력도 풍부해야 하고.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 ‘가까이하기에 너무 먼 당신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대표곡인 ‘뜨거운 안녕’에 그 맛이 담겨 있어 계속 사랑받는 것 같습니다.
1966년도에 < 뜨거운 안녕 >이 나왔다. 그 앨범과 곡을 들어봐라. 지금 들으면 어떻게 이렇게 불렀나 싶다. 그때 대한민국 가수 중에서 노래를 눈물을 흘리며 부른 건 ‘뜨거운 안녕’ 뿐일 거다. 너무 ‘오버 필링’ 하니까 신세기 레코드에서 내지 말자고 했다. 가수들이 전부 노래를 정박자로 하고 깨끗하게 하고 이랬을 때니까. 근데 나는 그 느낌을 ‘표현’한 게 아니다. 어린 나이에 피난 내려왔던 내가 이제 레코딩이라는 걸 하게 되니까 감동스럽고 앞으로 돈도 좀 번다고 생각하니까 눈물도 났던 거다. 그 감정을 음반에 그대로 옮겼다.

활동명을 ‘쟈니 리’라고 지으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외국인 양아버지가 ‘쟈니(Johnny)’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쟈니라는 건 외롭고 귀엽고 뭐 그런 뜻이었다. ‘Johnny is lonely boy(쟈니는 외로운 소년)’라는 말도 있던 것 같고. 쟈니는 외로운 거다. 내가 고아 출신이니까. 거기에 내 성인 ‘이’를 붙여서 쟈니 리가 됐다. 양아버지가 나를 ‘슈플라이’라고도 불렀다. 그 당시에 ‘슈사인(Shoe shine) 보이’가 많았다. 미군들 군화 코만 반짝반짝하게 닦아주는 꼬마들이다. 그곳만 반짝반짝하게 닦으니까 파리가 미끄러진다고 해서 만들어진 ‘슈 플라이’가 내 별명이었다.

양아버지는 어떻게 만나셨나요?
만주 길림성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기생이었는데 당시 기생은 일부종사, 평생 한 남자만 만나야 했다. 기생학교에 다니면서 활도 잘 쏘고, 서예도 잘하고, 노래도 잘 부르고, 장구도 잘 치는 요새 같으면 탤런트 같은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연극배우를 하던 중국 사람인데 금방 집을 떠났다. 어머니가 혼자서 나를 키우셨다. 그러다 1951년도 13살 때 피난 내려와서 1954년에 미국인 양아버지를 만났다. 영어를 귀동냥으로 배우면서 아버지가 피아노를 치시면서 노래하라면 노래도 하고 그랬다.

말씀은 조용조용하게 하시는데 노래하실 때는 정말 호랑이 같습니다.
자연스럽게 습득한 거다. 옛날부터 리듬 앤 블루스를 좋아했다. 가수들이 박자에 맞춰서 노래해야 되지만 리듬 앤 블루스는 애드리브도 있고 가창력도 있어야 한다. 아주 헤비한 록 보이스도 많이 쓴다. 또 노래가 때로는 재즈에 가까울 만큼 굉장히 쿨하다. 음악 분야에서는 아무나 못 하는 거다. 마음을 울리는 것도 있고.

레이 찰스, 스티비 원더, 조지 벤슨, 마이클 볼튼 같은 사람들은 노래가 거의 애드리브다. 다른 사람 노래를 리메이크해도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다. 음악에 젖어서 노래하다 보면 이성을 잃을 때가 있다. 나도 모르는 가창력이 나오고.

과거에 즐겨 부르셨던 노래도 궁금합니다.
냇 킹 콜, 토니 베넷 같은 스탠더드 노래를 많이 했다. 그런 고운 음악을 부르다가 록 블루스 쪽으로 마음이 가더라. 옛날에 우리가 노래할 때는 ‘극장쇼’라는 게 있었다. 고인이 됐지만 정원이란 가수와 나는 남들이 가만히 서서 노래할 때 우리는 청바지 입고 춤추면서 노래했다. 현재의 아이돌 같은 거였다.

그 시절은 여자들을 대학에 안 보낼 때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바로 공장에 취직해야 했다. 그분들이 거의 다 내 팬클럽이었다. 어른 앞에서 눈도 못 뜨고 그럴 때인데 우리를 소개하면 소리를 지르고 고무신 날라 오고 그랬다. (웃음) 그런 일은 대한민국에서 아마 제일 처음일 거다. 한바탕 난리가 나서 공연이 끝나면 주인 잃은 고무신이 한 가마니가 됐다.

말씀만 들으면 정말 가수가 천직이셨던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가수가 꿈이셨나요?
아니다. 우연히 가수가 됐다. 난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꿔본 적도 없다. 옛날에 부산에 ‘하이야리아 부대’가 있었다. 내 양아버지가 별 세 개 달린 미군 장교였다. 그 부대에서 아버지가 피아노치고 내가 노래하고 그랬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가수가 된 거다.

그러면서 미8군 무대에도 오르신 건가요?
양아버지가 금방 돌아가시고 그 어린 나이에 내가 할 수 있던 게 없어서 미8군부대를 들락거렸다. 일반 단체하고 미8군 가수하고 다른 점이 뭐냐면 8군에서 노래하는 가수는 영어 발음이 좋지만 일반 단체는 영어가 엉터리다. 8군에서 공연하는 밴드들은 오디션을 보고 등급을 나눴기 때문에 이런 평가가 나왔다.

스페셜 A를 받으면 한 달 정도 공연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피나는 노력이 필요했다. 미8군에서 나온 사람들은 사회에서 대접을 좀 해줬다. 등급이 높았던 거다. 난 13살부터 양자로 있었고 나름 언어에 소질도 있었다. 조실부모한 내가 학벌이 있었겠나? 언어부터 노래까지 전부 노력하고 직접 터득했다.

미8군에 활동하셨던 거는 그럼…
1957년이었다. 당시에 현미는 무용을 했고 한명숙 씨는 노래를 할 때다. (당시 얘기를 조금 더 해달라고 부탁드렸더니) 한국 가수들이 8군에 들어가면 치즈 샌드위치, 햄버거를 줬다. 마치 천국에 있는 것처럼 맛있었다. 디저트로 파인애플, 바나나도 줬는데 평생 보지도 못한 과일들이었다. 아이들을 주겠다고 이런 음식을 챙기는 사람들도 많았다. 또 작은 유리병에 담긴 콜라를 그때 누가 먹어봤겠나.

미8군 때 한 캠프에서만 있으셨던 건가요?
오산, 평택. 의정부에도 있었다. 그쪽은 전부 미군 기지니까. 8군 생활할 때는 그쪽을 오갔다.

부평 애스컴에도 자주 들리셨나요?
1957년에 연예계에 입문해서 1959, 1960년쯤에 다녔다. 내가 처음으로 갔던 곳이 애스컴이다. 개인적으로 미8군부 무대에 많이 서진 않았다. 따로 오디션을 보지도 않았고. 양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쟈니? 싱!”하면 내가 노래를 불렀다. 워낙 어릴 때니까 그 사람들의 귀여운 장난감이었다. (웃음)

공연료가 꽤 높으셨을 것 같아요.
몇 푼 안 됐다. 당시에 단장이 지금의 기획사나 다름없다. 그가 모든 걸 주관했고 공연해서 받은 돈을 자기가 거의 다 챙겼다. 얼마 안 줘도 투덜거릴 수 없었다. 얘기하면 그냥 잘리니까. 피곤하고 살기 어려울 때였다. 어디 가서 밥 한 그릇 먹을 수도 없었고 누구나 돈 돈 돈 했다. 딱히 돈을 못 받아도 그저 밥 한 그릇 얻어먹고 그 힘으로 노래 불렀던 시기다. 내가 그렇게 힘들게 가수가 됐다.

1960년대에는 ‘극장쇼의 황제’라고 불릴 만큼 큰 인기를 누리셨다고 들었습니다.
극장에 간판만 붙여놓으면 정말 소동이 났다. 내가 1960년도에 도요타의 빨간색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다. 알랑 드롱처럼. 넝마주이 같이 낡은 청바지 입고 운동화 신고 무대에 올랐다. 핸드마이크가 없을 때라 스탠드 마이크를 썼는데 그걸 그대로 들고 객석 앞까지 나가고 그랬다.

오랜 기간 작자 미상의 민중가요로 알려져 있던 전인권의 ‘사노라면’이 선생님의 노래였습니다. 왜 오리지널 가수라고 밝히지 않으셨나요?
원제는 ‘내일은 해가 뜬다’이다. < 뜨거운 안녕 > 음반에 같이 있다. 1966년 즈음 방송국에서도 많이 틀고 꽤 알려졌던 곡이다. 그런데 갑자기 금지곡이 됐다. 그때는 툭하면 금지곡이 되던 시절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절에 내가 ‘해가 뜬다’고 노래를 하니까 역적모의로 비쳤나 보다. 뭐 밑에 있는 사람들이 다 자기 먹고 살라고 그런 거겠지만. 그렇게 한동안 잊고 있다가 미국에서 돌아오니 민중가요로 불리고 있더라.

공식적으로 오리지널 가수라고 밝힌 게 2000년대 초쯤이었나요?
KBS에서 내 음반 < 뜨거운 안녕 >을 가지고 집에 왔다. 피디가 “여기 ‘내일은 해가 뜬다’라는 노래가 누구 노래예요?”라고 묻길래 전인권 노래가 아니라 내가 1966년에 많이 불렀던 노래라고 말했다. (정확히는 2004년 가요평론가 박성서가 소장해 오던 < 쟈니 리 가요앨범 >을 공개하며 주목받았다. 이 음반에 ‘내일은 해가 뜬다’가 실려 있었고 이 곡의 원작자가 쟈니 리라는 것이 밝혀졌다 -편집자)

인터뷰는 종로 3가에 위치한 ‘청춘극장’에서 이뤄졌다. 쟈니 리는 이곳의 전속 뮤지션이다. 극장쇼를 많이 했던 그가 지인과 직접 머리를 맞대고 5개월 전쯤 이 공간을 차렸다. LP판이 가득했고 음악을 틀 수 있는 디제이 부스도 있었다. 아, 반짝거리는 일명 ‘사이키 조명’이 화려하게 무대를 비추기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공연장에는 말끔하게 차려입은 중장년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형님”, “선생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몇 달 전 ‘바보 사랑’이라는 싱글을 낸 쟈니 리는 여전히 청춘이며 늘 그랬듯 잘 나가는 가수였다.

요즘 한국 가수들이 전 세계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한창 활동하실 때 미국에 진출하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하셨나요?
그때는 미국 가는 게 하늘의 별 따기였다. 미국에서 활동하다 왔다고 하는 사람들의 90%는 뻥이었다. 옛날에 < 삼손과 델릴라 >라는 영화가 있었다. 그 영화 내용을 라스베이거스에서 쇼로 만들어 공연하는데 영화에서처럼 건물이 무너지고 조명도 기가 막혔다. 어떻게 그렇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놀라운 곳이 미국이었으니까 당시에 미국에 진출하는 건 꿈도 못 꾸었다. ‘내 음악에 버터 냄새가 좀 난다’라는 걸로 만족했다.

그럼 현재 방탄소년단이나 블랙핑크 같은 손자뻘 되는 젊은 친구들이 세계적인 관심을 받는 걸 보시면 어떠세요?
대단하다. 인터뷰하는 걸 봤는데 영어도 엄청나게 잘하더라. 자기들이 텔레비전 보고 배운 영어라고 하는 데 정말 천재구나 싶다. 지금 우리나라를 세계적으로 알린 게 아이돌 가수들이다. 방탄소년단이나 다른 아이돌 가수를 통해 대한민국이 세계적으로 홍보가 된 거 아닌가.

부평구문화재단이 진행하는 기획 앨범에서 가수 인순이가 선생님의 ‘뜨거운 안녕’을 리메이크한다고 합니다.
인순이 노래를 좋아한다. 가창도 좋고 무엇보다 소울이 남다르다. 약간 재지하게 리듬도 조금 바꾸고 하면 곡의 맛을 더 잘 살릴 수 있을 것 같다. 음반을 발매하면 내게도 꼭 보내 달라. 인순이에게는 기대한다고 전해주고. (웃음)

60년 이상 노래를 하셨습니다. 선생님께 음악이란 무엇일까요?
음악으로 죽고 음악으로 살고 싶다. 보통 가수들이 은퇴한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나는 생각이 다르다. 왜 하고 싶은 음악을 안 하고 중간에 나이 먹었다고 멈추는지. 조금 더 노력하면 되는데. 나는 평생 노래하고 싶다. 노래한다는 것 자체가 고맙고 즐겁다. 내가 여든이 넘었는데 늙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고? 노래 덕분이다.

젊은 노장과의 대화는 즐거웠다. 빛이 바랬을 법한 기억들도 연도를 포함해 정확하게 들려줬고 필요할 땐 서슴없이 노래를 불렀다. 단단하고 탄탄한 경험을 간직한 쟈니 리의 이야기에선 꼿꼿한 기세가 느껴졌다. 공연장을 떠나려 하자 몇 번이나 식사 한 끼를 대접하고 싶다던 쟈니 리. 이 따뜻한 말의 건넴을 받으며 이것이 어쩌면 그가 음악을 대하는 태도일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영원한 가수 쟈니 리와의 만남은 뜨겁고도 뜨거웠다.

인터뷰 : 소승근, 박수진, 정다열, 장준환
사진 : 정다열
정리 : 박수진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사업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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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랑 인터뷰

이랑은 어디에나 있다. 인터넷상에는 그가 쓴 많은 글이 넘실거리고 그를 주목한 기사도 한가득하다. 심심찮게 이랑이 그린 그림과 그가 작업한 영상 작업물을 만나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이 나왔다고 해도 다 몰라요.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니까라는 그의 말처럼 어디에나 존재하는 이랑은 때때로 쉽게 가려진다. 솔직한 그의 목소리 때문일 것이다.

궁금한 것을 거침없이 질문하고 옳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에는 가감 없이 목청을 높인다. 동시에 그로 인해 파생되는 두려움, 공포, 부담감을 숨기지 않는다. 다수가 마침표를 찍고 그저 멈춰 있을 때 그는 그 위에 갈고리를 걸어 물음표를 만든다. 정규 3집 < 늑대가 나타났다 >에는 그런 그가 사회를 향해 던진 커다란 의문 부호들이 가득하다. 본명이자 외자인 ‘이랑’ 대신 더 다정하게 ‘랑’으로 불리고 싶어 하는 그를 만났다. 10월 중순 치른 수술 이후 별다른 휴식 없이 연일 일정을 소화했다는 랑에게서 투명한 피로가 스쳐 갔다.

랑이가 나타났다!”

수술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쉴 겨를 없이 복귀한 거 같은데.
이미 10월 일정이 다 차 있는 상태에서 수술할 날짜를 어렵게 뺐다. 소화해야 할 일들이 있으니까… 나도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계속 메일이 온다. SNS 같은 데를 보면 ‘바쁘다고 하더니 다 하네’ 싶기도 할 거다. 그래서인지 연락이 계속 오고 있다. 난감하다.

거절을 잘 못 하는 걸까?
거절도 많이 하는 편이다. 거절한 메일을 따로 모아두는 메일함 폴더가 있을 정도다.

거절의 기준이 있을지.
기준이 있어도 거절을 할 수 있게 된 건 얼마 안 됐다. 나를 알리는 일을 계속해야 하니까 무조건 많이 했다. 길에서 노래도 부르고 공연도 무료로 자주 하고. 지금은 경력이 쌓였으니까 이래저래 해서 못하겠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래도 프리랜서라는 특성상 거절이 굉장히 두렵다. 거절하는 순간 다시는 내게 일을 주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달까.

랑의 음악이 가진 메시지가 때로는 공격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고 본다.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트로피를 경매에 부친 일 등 해석하기에 따라 제도권에 반하는 길을 가는 듯한 인상을 줄 수도 있고.
‘트로피 사건’ 이후로 지금도 욕 댓글이 달린다. 제일 재미있었던 댓글은 ‘이번만 듣고 다시는 안 듣겠다’는 글이다. 싫어하기로 마음을 다잡는 건데 솔직히 좀 귀여웠다. (웃음)

악플에 의연해 보인다.
당연히 상처 입는다. 다만, 익명성을 가지고 공격은 쉽게 하는데 본인의 이름을 내걸고 지지하는 게 어려운 일임을 알고 있다. 어떤 논란으로 인해 공격을 받고 있으면 실명을 드러낸 분들이 개인적으로 연락을 해준다. 문화가 그렇다. 나를 직접 알고 있는 사람들은 시끄러운 상황이 있어도 믿고 지지해준다. ‘프라우드(자긍심)’를 갖게 된다. 특히 트로피 때는 욕을 많이 먹었는데 예정된 일이 하나도 끊기지 않았다. 신뢰를 주고 있음을 느낀다.

앞에서 어떤 목소리를 시원하게 내기도 하고 동시에 내면의 힘듦, 불안함을 솔직하게 보여주기도 한다.인간이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는데 매체에 노출이 되면 쉽게 ‘캐릭터’가 생긴다. 그걸 유지하기 위한 강박에 시달린다. 나아가 캐릭터가 밈으로 소비되기 시작하면 그 외의 수많은 면을 눈치껏 숨기고 자기 조절을 해야 한다.

내 캐릭터는 좀 시끄럽고, 그러니까 말을 자꾸 하고 의견을 내는 사람일 거다. ‘세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냥 말을 하고 싶을 때 할 뿐이다. 그로 인해서 공격받으면 슬프고 무섭고 그런 걸 동시에 다 느낀다. ‘저 사람은 강하고 세니까 상처를 안 받겠지’ 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나?
설리가 죽은 게 큰 충격이었다. 사람들이 부여한 캐릭터 때문에 특히 ‘노브라’를 가지고 정말 많은 얘기가 오갔고 그걸로 그를 괴롭혔다. 사회적 타살이라는 얘기가 많이 나오지 않았나. 그가 얼마나 다양한 면을 혼자 끙끙대면서 감추고 외로웠을지에 대해 깊게 생각했다.

랑이를 너머 사회로, 그러니까 이랑

정규 3집 < 늑대가 나타났다 >는 유독 사회적 메시지를 강하게 소리친다.
사람들이 내 음악을 듣고 있다는 걸 인식하게 됐다. 1집 < 욘욘슨 >(2012)는 기존에 써뒀던 노래가 나왔던 거라 가수라는 직업의식도 없었다. 1집을 만들 때 20여 곡이 있었는데 실물 앨범에 12곡만 담겼다. ‘그냥 있는 노래를 다 넣으면 되는 거 아닌가?’ 할 정도였다.

1집에 안 넣은 곡들과 새로 쓴 노래를 집합해 2집 < 신의 놀이 >(2016)을 만들었다. 그때부터 실물 연주자들과 함께했다. 그런 식으로 경험들이 쌓이고 또 누군가 듣고 반응하고 있음을 느끼면서 책임 의식이 생겼다. 가장 듣는 사람을 고려하며 쓴 게 < 늑대가 나타났다 >다. 아티스트로서의 책임 의식, 프라이드를 반영했다.

영상감독, 작가, 만화가 외에 ‘가수’라는 직업 정체성도 받아드린 걸까?
딱 부여받은 정체성만 보여주소서 하는 분위기를 못 참는다. 공연할 때도 ‘지금 무섭다’, ‘객석이 안 보여서 무섭다’라고 자주 말한다. 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무대 위에서 찬양받는 존재가 되는 걸 못 참는다. 객석에 불을 밝혀서 어떤 사람들이랑 만나고 있는지 알고 들어가면 좀 편안한데 쥐 죽은 듯 고요하고 껌껌한 곳에서 다수가 나만 본다고 생각하면 너무 부담스럽고, 무섭다.

이유는?
실수했을 때 돌이킬 수 없지 않나.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부담이 제일 크다.

지난 2집 < 신의 놀이 >와 달리 이번 음반은 실물 CD를 제작했다.
사실 한국판은 CD 없이 (지난 음반처럼) 다운로드 코드만 있어도 된다. 일본 활동을 하고 있으니까 문화적 차이를 생각했다. 일본은 아직 아날로그를 지향하기 때문에 CD가 없으면 안 사려고 한다. 다운로드 코드만 있는 앨범을 낯설어하고 변화를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노래마다 곡이 쓰인 배경이 확실하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2집처럼 에세이를 포함한 앨범을 기대했고.
따로 책 계약을 해놨다. (웃음) 경향신문에 연재했던 ‘이랑의 가사-말’과 새로 쓴 분량을 합쳐서 책을 만들고 있다. (언제 발매되느냐 물으니) 내년에 내야 하는데 아직 원고를.. 다음 달에 책이 나올 게 있고, 그다음에 또 나올 게 있고 막 이래서…

바쁘다, 쉬고 싶다, 너무 바쁘다는 말을 자주 했지만 올해 이미 5권의 책을 계약했다. 코로나 19란 상상 불가의 팬데믹이 불어 닥치며 일감이 줄어든 탓이다. 2017년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 올라 그는 “1월 수입이 42만 원”이었음을 밝히며 트로피를 즉석에서 팔았다. 한 달 치 월세였던 50만 원을 벌었, 아니 받았다. 그로부터 몇 년의 시간이 흘렀고 랑의 활동은 계속됐다. 나름 이름도 알렸다. 상황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이 가난에 대해 생각해보세요. 이건 곧 당신의 일이 될 거랍니다’ 타이틀 ‘늑대가 나타났다’의 한 가사가 그리 녹록지 않은 현실을 대변해주는 듯하다.

듣고 나누며 계속해서 이야기 하고 싶은 사람

전작보다 목소리를 긁고 강하게 표현하는 식의 창법 변화도 느껴졌다.
목소리가 어떤지에 대한 생각은 안 했었다. 어떻게 부르겠다 의도하지 않았으니까 듣는이가 동요 같이 부른다, 담백하게 부른다고 얘기 해주면 그냥 그렇구나 했다. 점점 무대에 설 기회가 많아지면서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게 되고 그들과 이야기 나누며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누군가는 목소리를 악기처럼 사용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그저 말하고 싶은 게 있으니까 멜로디에 얹어서 부르는 정도였는데… 목소리를 진짜 악기처럼 생각하고 작업하는 분들을 보니까 완전히 접근 방식이 달랐다. 나는 가사가 제일 중요한데 이들은 소리가 가장 중요하고. 아직은 어떻게 접근해야 목소리를 악기로 쓰는 건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여기서는 좀 더 크게 부르고, 더 긁으며 부르고 이런 것을 조금씩 시도 중이다.

음반의 시선이 나에게서 사회로보다 넓어졌지만 음악을 채우는 핵심 질료들은 전과 같다. 첼로의 혜지, 코러스의 혜미 등이 특히 각별할 것 같다.
혼자 있는 걸 너무 싫어하는 내게 늘 힘을 주는 조력자들이다. 대학생 때부터 기타 치고 노래를 불렀다. 학교 게시판에 음악 할 사람을 찾는 글을 올렸는데 지금은 영화감독으로 훌륭히 활동하고 있는 이길보라 감독만 답을 줬다. 둘이 한참 공연을 하다가 우연히 혜미가 내 공연을 보러 왔다. 이길보라가 떠났던 차여서 혜미를 막 꼬셨다. 코러스라도 해달라고. 본격적으로 앨범 작업을 하면서 드러머를 만났고 혜지를 만났고 프로듀서인 대봉이도 만났다. 그렇게 꾸려졌다.

‘늑대가 나타났다’, ‘환란의 세대’에 힘을 보탠 합창단 ‘아는 언니들’은 어떤가?
음악을 가르치면서 다 같이 노래하고 소리 지르는 일들이 많았다. 항상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언젠가 이런 합창팀을 꾸리는 게 나의 원대한 목표였다. 그러다 우연히 아는 언니들 쪽에서 워크숍을 진행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사랑스러움이 넘쳤다. 아마추어 합창단이어서 더 매력적이기도 했고. 앨범 작업에 참여해달라고 먼저 제안했다.

합창단을 꿈꿨다고?
초등학교 3, 4학년 정도 때 합창대회에 딱 한 번 나가 봤다. 가난한 축에 속했던 우리 학교만 빼고 모든 팀이 다 옷을 맞춰서, 그것도 화려한 성가대복 같은 가운을 입고 나왔더라. 우리는 각자 알아서 흰색 상의에 빨간 하의를 맞춰 입고 오는 거였다. 진빨강, 핑크에 가까운 빨강, 쿨톤, 웜톤 등 온갖 색이 다 섞인 옷차림으로 무대에 올랐다. 대회장에 도착했을 때 느낀 어떤 부끄러운 감정이 생생하다. 이런 팀이 1등 하면 진짜 멋있는 건데. 우리가 노래를 잘 못 불렀나?

합창대회가 다양성을 포용할 줄 몰랐나 보다.
그래서 이번 ‘뮤즈스(MUZES)’ 영상을 찍을 때 까만색 졸업가운 제일 싼 거를 빌려서 다 같이 입었다. 한 벌에 5천 원 정도 줬다. (기분이 어땠냐 물으니) 하하하. 예전에 옷을 맞추지 못했던 트라우마에서 벗어났다. (웃음)

방금의 일화처럼 아픔을 끌어다가 작품을 만든다. 이런 식의 창작이 자신을 소모하게 하진 않는지.
전혀. 내가 바라는 유일한 것은 내 얘기를 계속 들어주는 것뿐이다. 할 얘기가 너무 많고 살면 살수록 많은 걸 배우고 알게 되니까 어떻게 작품으로 낼지 정리가 안 될 정도다. 언젠가 어떤 이유로 내 이야기를 더 안 듣고 싶어 하면 어쩌지 하는 공포를 느낀다. 어릴 때부터 내가 있는 곳에 누군가가 얘기하러, 얘기 들으러 오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렇게 넓은 작업실을 쓰는 것 역시 지금처럼 이야기를 듣고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뮤지션 이랑으로 활동한 지 이제 10년 정도 됐다.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을까?
너무 어려운 질문인데… ‘늑대가 나타났다’를 만들게 된 계기를 꼽고 싶다. 강남역 살인 사건 관련한 여성 집회에 초대돼서 노래를 부르게 됐다. 공연 의뢰가 왔을 때 엄청 겁이 났다. 집회를 지지하고 응원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당시 개인적인 일로 인해 일절 밖으로 나오지 않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무대에 올라 다수에게 내 얼굴을 보여주면 나중에 나를 도와줄 몇백 명이 생기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사람들이 나를 보호해 줄 수 있겠구나. 그날 기억이 좀 강렬하다. ‘신의 놀이’를 부르러 간 거였는데 그 곡을 따라 부르기 어려우니까 다 같이 부를 수 있는 곡을 만들자고 다짐했다.

노래가 주는 연대의 힘을 느낀 것 같다.
자기 노래를 가지고 어떤 시위나, 집회 혹은 행사에 나와서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인물들이 너무 부러웠다. 나한테는 ‘신의 놀이’ 정도가 전부였을 땐데 그 곡은 한번 듣고 기억하기 어려우니까. 모두 싶게 따라부를 수 있는 노래를 써야겠다 한 거지. 후렴 정도는 따라부를 수 있으니 내게는 큰 성취다. (웃음)

랑은 어디서 쉼과 위로를 얻는지.
나는 쉴 줄 모른다. 그걸 못 배우고 못 해본 사람인 거다. 쉬는 날도 일정이라고 생각하고 친구들과 미리 약속을 잡아 둔다. 조금만 시간이 떠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서 하는 성격이다. 영원히 못 할 것 같은 게 명상일 정도로. 말없이 조용히 생각을 비우고 이런 건 너무 괴롭다. 소용돌이치는 이야기 속에서 그냥, 살고 있다.

힘을 한 번에 모아 태우는 별똥별이 떠오른다.
언니가 맨날 ‘너 일찍 죽을 거 같다’고 한다. (웃음) 내일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다. 자살은 최대한 참으면서… 후회 없이 하려고 노력 중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걸 보고 경험하고 싶은데 또 하고 싶은 건 해야 하니까. 이를테면 담배를 피우고 싶으면 펴야 하니까 피고…

인터뷰 후 곧장 최소한의 정해진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는, 그러니 (거절해도) 양해를 부탁한다는 글이 올라왔다. 아니나 달라, 며칠 뒤 몸 상태가 급격히 안 좋아졌다는 소식이 들렸다. 자신을 태우고 스스로 타고 있는 건 아닐지 흠칫 손끝이 저릿했다. 랑이 만들고 나아가는 길에 사랑과 따뜻함만 놓여있기를 바란다. 상처를 덮고 하하하하 웃으며 해해해해 해야 할 일들을 잠시 미룰 여유를 가질 수 있기를. 별똥별 말고 계속 반짝이는 별이 되기를. 그가 써내는 작품들처럼 랑도 에너지를 잃지 않고 신의 놀이를 이어가기를 염원한다.

인터뷰: 박수진, 장준환, 정다열
정리: 박수진
사진: 정멜멜 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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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룬디마틴 인터뷰

울산 밴드 룬디마틴. 굳이 앞에 지역 명을 붙인 것은 이들의 정체성에 ‘울산’이 큰 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모든 멤버가 울산에서 태어났고 이곳에서 자랐으며 그 기억을 음악에 실어 나른다. 지역의 음악 씬을 넓히기 위해 보컬 민경은 직접 민간 공연장 ‘플러그인’을 만들고 운영 중이라고 했다. “울산의 예술이 발전하려면 이렇게 계속 예술가들을 발굴하고 우리들끼리 연대가 되어야 한다.” 울산을 향한 태생적 발전적 애정이다.

유독 파란 하늘이 짙게 펼쳐진 10월 ‘플러그인’에서 이들과 만났다. 아쉽게도 베이스의 승언은 개인 일정으로 함께하지 못했다. 경쾌한 에너지와 열정을 기반으로 울산 이곳저곳을 누비는 룬디마틴과의 대화는 즐거웠다. 기타·보컬의 민경, 건반의 현규, 드럼의 한결은 결코 작지 않은 울산 인디 음악 씬에 관한 양질의 답변을 이어갔다. 음악에 닻을 둔 울산 예술가들의 꿈, 끈기, 갈등 그리고 자생에 대한 긍지…

▶좌측부터 한결(드럼), 민경(기타·보컬), 현규(건반)

룬디마틴는 무슨 뜻인가?
민경 : 불어로 ‘월요일 아침’이라는 뜻이다. 월요일 아침은 사람들에게 힘든 시간일 수도 있지만 팀이 가진 밝고 희망찬 에너지로 응원하고 싶었다. 우리 노래를 들으면 ‘월요병’도 좀 늦게 올 수 있다는 의미랄까? (웃음)

룬디마틴만의 강점.
한결 : 에너지. 민경이 프런트로서 아주 충분한 역량을 가지고 있다. 에너지 넘치고 밝고, 기분 좋게 들을 수 있는 우리 노래의 색을 잘 살려준다. 특히 무대에서의 활기가 정말 크레이지 하다. (웃음) 울산을 대표하는 팀이란 자긍심이 있다.

코로나 때문에 대면 공연의 제약이 있었겠다.
민경 : 새어보니까 연에 80회 정도 공연을 해왔다. 근데 작년에는 온라인 포함해서 6차례 정도 무대에 섰더라. 대면은 한, 두 번 정도 했었다. 나머지는 다 비대면이었다. 대신 자체 기획으로 < 여행스케치 in 울산 >을 발매했다. 울산 명소를 찾아다니면서 그곳에 얽힌 노래를 만들고 뮤직비디오까지 직접 찍었다.

인터뷰를 하는 공연장 ‘플러그인’에 대해 설명해준다면.
민경 : 내가 운영하고 있다. 나는 원래 서양학과, 즉 미술을 전공했다. 그러다 음악으로 전향한 거다. 울산에 연습실이 없어서 연습실을 찾다가 월세가 조금 싼 지하 공간을 발견했다. 합판을 잘라서 울산대학교 앞의 첫 번째 공간인 공연장 ‘언플러그드 하우스’를 무작정 만들었다. 10년 정도 복합문화공간으로 운영하다가 작년, 이곳 성남동 문화의 거리로 공연장을 옮겨 왔다. 더 많은 사람을 가까이에서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룬디마틴 같은 경우 이곳을 연습실로도 사용하고 회의도 이곳에서 한다.

“공간이 있어야 사람이 모인다는 생각에 번 돈을 공연장에 다 쏟아 부었다!!”

월세가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
민경 : 다른 거로 일해서 버는 돈을 공연장에 다 투자했었다. 공간이 있어야 사람이 모일 수 있다는 생각이 컸었기 때문이다. 울산 내에 이런 민간 소공연장이 거의 없다. 그래서 이걸 지켜내야겠다는 일념으로 다 쏟아 부었다. 이제는 지원 사업이라든지, 국가 보조금들을 알게 되어 전보다는 수월하다.

코로나 이전에는 공연이 많이 있었나?
민경 : 이전 공간에서 2015년경부터 1년 반 정도 매주 화요일만 쉬고 기획 공연을 매일 돌렸었다. 미술 작가로서 삶을 아예 포기하고 음악으로 왔을 때 대중적인 것과 행정적인 것을 동시에 챙기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걸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재정적인 부분이 힘들긴 했다. 다행인 건 울산에 기타 치면서 노래하는 포지션이 많이 없어서인지 룬디마틴 공연 외에도 내 개인으로 하는 공연이나 활동들이 많이 들어왔다.

대구의 ‘클럽 헤비’처럼 울산 음악의 중심지가 있다면?
민경 : 22~3년간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로얄 앵커’다. 원래는 음악에 큰 관심이 없는 사장님이 운영하는, 외국인들이 많이 오고 가는 펍(Pub)이었다. 2015년 즈음부터 그곳에 그냥 놓여 있든 허름한 장비를 그냥 썩힐 바에 버스킹을 하자하며 조금씩 버스킹 문화가 형성됐다. 2014, 5년에는 그 금방이 ‘문화의 거리’로 조성되기도 했다.

로얄 앵커와 플러그인. 타지 사람에게는 생소한 이름이다.
민경 : 문화의 거리에 미술, 문학, 음악 등을 하는 예술가들이 많이 포진되어 있다. 로양 앵커와 플러그인 역시 이곳의 한 축이고. 두 공연장이 함께 ‘클럽 데이’도 열었다. 울산의 연주자들이 서로 교류하고 계속 공연할 수 있게 자체적으로 티켓을 팔고 공연을 기획했다. 코로나로 잠시 쉬고 있지만 상황이 괜찮아 지면 다시 진행할 생각이다.

“여기서 살았으니까 우리만 만들 수 있는 음악이 있다는 생각으로 노래한다!”

< 여행스케치 in 울산 >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
민경 : 우리 멤버 전원이 울산 출신이다 보니 추억이 많다. 엄마 손 잡고 태화강 변을 걸을 때도 있었고 내가 어릴 때는 롤러스케이트장이 있어서 거기서 자주 놀았다. 꽃밭도 아주 잘 돼 있고. 우리의 추억이 담긴 곳을 노래로 만들고 싶었다. 여기서 살았으니까 우리만 만들 수 있는 곡이라는 생각으로 노래를 만들고 뮤직비디오를 찍었다.

제작비는 어떻게 충당했나?
민경 : 감사하게도 2020년 울산문화재단의 ‘열린 콘텐츠 지원 사업’의 덕을 봤다.

선정된 이유가 뭘까?
민경 : 우리밖에 할 수 없는 거였다. 울산을 제일 잘 알고 있는 음악가들이 울산을 노래하는 거니까. 사람들이 흔히 울산을 ‘노잼 도시’라고들 한다. 그런데 최근 JTBC 예능프로인 <캠핑클럽>에 울산이 등장하기도 하면서 울산에 대한 관심이 조금 늘었다. 특히 울산12경과 같이 자연경관이 좋은 데도 많다. 울산의 아름다운 곳을 세 군데 선정해 그곳을 중심으로 다뤘다.

구체적으로 어느 장소일지.
민경 : 태화강, 간절곶, 그리고 함월로. 룬디마틴과 남성 듀오 JU와 함께 했다. JU가 함월로를 중심으로, 우리가 태화강을 중심으로 노래를 만들었고 간절곶은 두 팀이 같이 힘을 합쳐 작업했다. 울산의 예술이 발전하려면 이렇게 계속 예술가들을 발굴하고 우리들끼리 연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울산을 활동 기반으로 삼은 예술가들이 많은가?
민경 : 재작년에 ‘울산 음악창작소’가 개소했다. 거기서 신인 음악가를 발굴해 음악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60여 개 팀이 지원했다. 아쉽게 룬디마틴은 선정되지 못했다. 선정팀들을 보니 우리가 알지 못하던 다른 뮤지션들이 많더라. 정말 깜짝 놀랐다.

울산의 음악적 수준이 어떤 거 같은가?
민경 : 문화적인 부분과 실력 부분을 나눠서 얘기해야 할 것 같다. 우선 실력은 울산에 실용음악 학교는 많은데 실용음악과(대학)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중, 고등학생 때 열심히 음악적 기량을 쌓아도 결국 서울이나 다른 지역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런 부분이 아쉽다.

문화적인 건 우리 밴드를 통해 잘 설명할 수 있다. 룬디마틴은 천진난만하고 행복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이게 어디서 오냐면 나는 울산이란 지역 문화적 배경에서 온다고 본다. 물론 내가 서울에 살아보지는 않았지만 서울에는 굉장히 치열하고 어쩌면 개인주의적인 게 이곳보다는 많지 않을까 싶다. 이런 분위기가 울산 음악의 문화적인 걸 만들어주지 않을까?

“울산의 뮤지션들은 서로 구사하는 장르가 달라도 교류를 하면서 시너지를 낸다!!”

다른 멤버들의 생각은.
현규 : 동의한다. 문화적인 측면에서 확실히 잘 섞인다. 울산이 타 지역과 다른 것은 장르 간의 교류가 생기며 시너지가 난다는 거다. 씬 내의 우애가 좋다.

민경 : 나랑 베이스 오빠도 그렇고 우리 팀 모두가 객원 활동을 하고 있다. 그중 국악 쪽이랑 콜라보가 특히 많다. 그래서 퓨전 국악팀도 하고, 클래식 팀, 힙합 팀 등 여러 분야에서 다 교류가 많다. 서울, 대구, 부산 등지에 가면 재즈 하는 사람은 재즈 하는 사람들끼리 알고 인디 음악 하는 사람은 인디 음악 하는 사람들끼리 뭉쳐지는데 우린 예술가 수 자체가 많지 않아서 인지 서로 교류가 많다.

울산 음악의 특징이 ‘퓨전’일 수도 있겠다.
민경 : 울산은 공업 도시이기 때문에 타지에서 오는 사람들이 다 일자리 때문에 오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문화예술 생태계를 구축하는 사람들은 울산을 정말 잘 알고, 이곳을 더 알리려고 하는 울산 태생인 분들이 많다. 울산이 아무래도 무역 도시이다 보니까 염포, 방어진 등 항구를 기점으로 제주도, 일본 등지와 왕래가 잦았다. 그러다 보니 DNA 적으로 울산 사람들이 조금 더 개방적인 게 있고 그게 음악 교류가 활발한 것에 영향을 끼친다고 볼 수도 있다.

지방에서 음악을 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을 것 같다. 활동의 원동력이 있다면.
민경 : 멤버들. 우리는 급할 게 없고 그냥 이렇게 쭉 가면 된다. 밴드 운영비는 돈을 잘 벌어서, 공연이 많아서라기보다 그냥 그런 체제(자급자족하는)를 멤버 전원이 다 인정해서라고 본다. 1집을 제작할 때도, 쇼 케이스를 진행할 때도 무조건 공연비를 다 모아서 진행했다. CD를 찍을 때 현규 작업실을 썼는데 오토바이가 지나가면 멈췄다가 녹음하기를 반복했다. 그런 걸 거친 사람과 거치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크다. 우리 넷은 동시에 그것을 느꼈기에 함께 끈끈하게 갈 수 있다.

발매된 노래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곡은?
한결 : 1집 < Rundi Rise >(2019)의 타이틀 ‘히하’. 그룹에 들어온 지 5~6년쯤 됐다. 관객으로 룬디마틴을 처음 봤을 때 들은 곡이 ‘히하’였다. 밴드를 처음 만나게 했던 곡인데 지금은 내가 연주를 하고 있으니 감회가 새롭다.

민경 : 현규랑 한결이가 직장인이다. 그중 한결의 아이디어로 탄생한 ‘5분만’을 뽑겠다. 딱 5분만 더 자고 싶은데 출근을 해야 하니까 잘 수 없는 일상생활의 애환이 담겨 있다. 멤버 4명이 함께 쓰기도 했고 거의 2, 30분 만에 만족스러운 노래를 완성했다는 점에서 인상 깊다.

“울산 사람들, 울산 청년들 그리고 그 안의 우리 룬디마틴을 게속 얘기하다보면 지구 반대편 누군가와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의 활동 계획.
민경 : 울산에는 고복수, 윤수일 선생님이 있다. 11월 4일부터 열리는 울산 나들이 축제에서 ‘룬디마틴이 울산을 노래하다’라는 콘셉트로 무대에 선다. 우리식으로 고복수의 ‘타향살이’, 윤수일의 ‘아파트’를 해석했다. 또 우리의 시각으로 본 울산의 풍경에 대한 노래도 준비했다. 울산의 사람들, 울산에서 살아가는 청년들 그리고 그 안의 우리 룬디마틴을 계속 이야기하다 보면 지구 반대편의 누군가와 소통할 수 있는 통로가 생기지 않을까? 그런 각오와 다짐이 있다.

울산 뮤지션들을 소개해준다면?
한결 : 온라인으로 음악을 들을 수는 없지만 ‘대보름밴드’와 ‘내드름연희단’을 추천한다. 퓨전 국악을 하는 팀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확실한 다이내믹이 느껴져서 좋다.

민경 : 내가 생각하는 울산의 약점은 밴드 자작곡이 많지 않다는 거다. 자체적으로 싱어송라이터 스터디를 하면서 일반 사람들과 많이 교류하는데 거기서 ‘브루니 센티’를 알게 됐다. 본인은 노래를 잘못한다고 취미로 유튜브를 하고 음악을 하는 거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 이상으로 끌어낼 게 많다. 이외에도 밴드 ‘더 블랭캣’과 가사에서 느껴지는 감성이 훌륭한 ‘피에스(P.S)’를 뽑고 싶다.

현규 : ‘뮤직 팩토리 딜라잇’. 브라질 타악기인 바투카다를 연주하는 그룹인데 경남, 경북을 통틀어서 가장 독보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끝으로 목표.
현규 : 어쿠스틱 팝의 선입견을 깨고 싶다. 원래 룬디마틴은 피아노 사운드를 기반으로 멜로디나 화성이 돋보이는 팀이었다. 4년 전 내가 합류하고 나서는 사운드를 더 풍부하게 채우려고 했다. 피아노 말고 신시사이저 소스를 쓰거나 추가로 스트링을 넣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식으로 피아노를 빼기도 하고 사운드를 뭉개기도 하면서 음악적 실험을 주저하지 않겠다. 그렇게 나아갈 거다. (웃음)

인터뷰 : 임진모, 박수진
정리 : 박수진
사진 : 박수진, 룬디마틴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