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왜 십센치의 작은 이야기에 감응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는지 다시금 깨닫는다. 어쿠스틱 선율에 솔직한 경험담을 읊는 청춘 보컬의 합작, ‘부동의 첫사랑’은 공감이라는 팀의 근간에 집중했다. 핵심은 단연 담백한 노랫말로, 가장 소중하고 부끄러웠던 순간을 파고드는 낱말이 누구나 마음 한구석에 간직하고 있는 추억에 호소한 덕분이다. 특별한 이유 없이도 변하지 않는, 아무리 애를 써도 상대방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중의적 의미에서 부동(不動)도 맞춤형 수식어다.
절절하거나, 새벽 감성으로 침전하거나, 혹은 개성이 과하든가 하는 최근 인디 신 흐름 속 산뜻한 틈새다. 스쿨 밴드의 연습 장면이 자연스레 연상되는 반주도 걸리는 부분 없이 깔끔하고, 권정열의 목소리도 늦깎이 봄을 수놓기 충분하다. 발매일에 맞춰 악기를 든 수많은 군중과 꾸린 합주 플래시몹도 이 공감대를 파고들며 곡 자체가 새롭거나 특징이 없어도 이러한 요소들이 4분이 넘는 러닝타임도 선선하게 채운다. 십센치 톤으로, 최근 자취를 감춘 첫사랑에 대해 영리하게 접근했다.
처절한 고독을 울부짖었던 ‘Paranoid’부터 잔망스러운 리듬으로 풋풋한 청춘을 그려낸 ‘멜로디’까지, 한 꺼풀씩 어린 시절의 아픔과 고독의 그림자를 벗겨온 애쉬 아일랜드는 순차적인 자기 치유를 이뤄냈다. 이에 발맞추어 편집증이나 악몽을 외치던 음울한 힙합은 옅은 무채색의 틀만 남겼고, 사랑과 이별을 읊는 팝으로 영역을 넓혔다. 힘이 강한 멜로디와 일반적인 주제로 꾸며진 < Rose > 역시 이러한 접근성을 더 높여 다가간다.
단짝 프로듀서 토일 대신 지휘봉을 잡은 보이 콜드는 특유의 친화력과 수용성으로 아티스트의 확장을 꾀한다. 팝과 힙합을 넘나드는 중심부는 일견 비슷해 보여도, 선이 굵은 기타 스트로크나 짙은 서정성의 난립은 분명 낯설다. 애쉬 아일랜드는 거친 야성은 감추고 목소리의 강약을 조절하며 이에 대응했다. 밴드 사운드를 비롯해 기존 기조는 유지하되 약간의 세련미를 더한 우회로, 여리여리한 목소리를 강조한 ‘Rose in the heart’와 ‘시간은 왜 앞으로만 가’가 신보의 이러한 변화를 대표적으로 상징한다.
그리하여 그가 도달한 이상향은 팝도, 록도, 힙합도 아니다. 물론 장기인 캐치한 후렴구를 삽입하기에는 적합한 환경으로, 감성적인 선율과 쉬운 글감으로 귀결된 이 종착지에 어느 정도 수긍은 간다. ‘작별인사’와 ‘Wonder’에서 그는 록 밴드의 프론트 맨으로 귀에 쉬이 남을 만한 멜로디를 쏟아내고, ‘Drop top’과 ‘Trapped’에서는 표류하는 이모(Emo)와 트랩의 흔적을 찾으며 충실히 노래한다. 과감한 결단이었다. 래퍼로 업을 시작한 그가 랩은 최대한 요약한 채 보컬만으로 승부를 본 것이다.
이 지점에서 단순히 정체성의 문제만이 아닌 근본적인 논점이 발화한다. 본질은 곡 하나하나가 단일로는 적당한 만족감을 주지만, 꿰어진 상태로는 소구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U know it’ 등 몇몇 수록곡에서는 촘촘한 음계가 눈에 띄나 벌스로 갈수록 그 힘은 떨어지고, 청취 시간을 흥미롭게 채워 넣기에는 대부분의 트랙 분위기가 비슷하다. 칠린 호미의 타이트한 랩이나 루이의 공격적인 피쳐링이 유일한 탈출구라는 사실은 앨범의 단조로운 흐름을 더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럼에도 ‘작별인사’의 기세는 오래도록 뜨거울 테니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너른 장르 수용에 기반한 일반화는 그가 지닌 차별점을 뭉툭하게 다듬었고, 동시에 범용성까지 넓혀 왔으니 말이다. 어찌 보면 일찍이 팝 지향성을 선포했던 < Island >부터 예견된 결과물이다. 그러나 일관된 방향과는 별개로 설득력 있는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 < Rose >라는 낭만적인 도전장을 팝에 전하는 데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애쉬 아일랜드 장르 자체의 정당성에는 의문을 남겼다.
마스터 플랜에서 데뷔한 넋업샨은 인피닛 플로우, 소울다이브를 거치며 한국 힙합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 비트 위 시인과도 같은 존재감으로 이미 신에 자리매김한 래퍼가 마이크를 잡은 지 20년이 훌쩍 넘은 지금에서야 첫 번째 솔로 정규 음반을 발표했다. 걸출한 베테랑이 처음 홀로 이름을 내건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 어머니와 사별 후 실험적이고 새로운 소리를 장송곡 삼아 재차 모친상을 치르기 위함이다.
연출을 맡은 프로듀서 진부터 독특하고 다양한 소리의 군상을 암시한다. 재즈와 연이 깊은 프로듀서 엡마(Aepmah)의 전위적인 사운드 ‘우아한 시체’와 ‘배태’가 다소 위압감 넘치는 개회를 알리면 블루스와 힙합을 넘나드는 김박첼라가 다시금 유연하고 평이한 곡으로 이후 순서를 진행한다. 뒤바뀌는 분위기에 개의치 않고 상주(喪主) 넋업샨은 완숙한 랩이 깃든 ‘탕’, 시구를 읊는듯한 ‘봄’과 ‘주문’을 암송하며 묵묵히 손님을 맞이한다. 음악성이나 문학성, 어느 모로 봐도 평범하지는 않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후 겪는 내면의 요동 때문일까, 난해한 변주가 작 전반에 넘실거리지만 일부 휴식 구간은 무난한 청취로 문상객들을 유도한다. 간병 생활 중 에피소드를 유쾌한 음률로 표현한 ‘아버지의 휴일’은 흐름을 펑키하게 뒤바꾸고, 평이한 후렴구를 앞세운 ‘Desert glow’나 하드 록과 결합한 ‘T.S.B’에서도 마찬가지로 숨을 돌린다. 주제나 노랫말을 떼놓고 음악적으로만 봤을 때 가장 친절하고 대중 친화적인 노래가 가장 실험적인 음반에 담겼다.
잇따른 절차를 거친 후 다다른 ‘순간의 영원’은 전체적인 작품의 정서를 집약한다. 도입부에 인용한 알베르 카뮈의 소설 < 이방인 >처럼 그는 객관적인 관찰자로서 무덤덤하게 죽음을 바라보다가도 익숙한 일상을 깨뜨린 순간에 피어오르는 내면을 있는 그대로 묘사했다. 담담한 래핑과 처연한 어쿠스틱 기타 연주가 극명한 대비로 어머니의 투병 과정과 임종을 그릴 때, 트랙에는 엄숙함만이 감돈다.
오랜 시간 자기 심연으로 파고든 넋업샨은 진중한 언어와 정교하게 갈고닦은 소리를 배합해 수작을 완성했다. 사상과 원칙을 텍스트로 수놓던 래퍼는 XXX나 이현준 등 익스페리멘탈(Experimental) 힙합의 후배들이 이어받은 배턴을 다시금 이어받아 건재함을 증명했고 가장 사적인 경험까지 작품에 녹일 수 있는 아티스트로 진화한다. 혹여 이 예술적인 장례식에 조문을 희망한다면, 자리를 고쳐 앉아 사운드와 텍스트 모두에 집중하기를 권한다.
켈리 클락슨의 정규 10집 < Chemistry >의 발매를 알리는 신호탄이 울려 퍼진다. ‘Mine’과 ‘Me’, ‘나’를 전면에 내세운 선공개 곡의 목적은 뚜렷하다. ‘내 심장을 이용했던’ 이에게 전하는 확실한 이별 선언이자, 관계 사이에서 방치되어 있던 자아의 획득과 치유. 지난한 사투 후에 탄생한 만큼 신곡은 ‘My life would suck without you’처럼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팝도, ‘Because of you’처럼 애절한 발라드도 아니다.
‘Mine’은 켈리 클락슨의 인생이라는 뮤지컬에 가장 장엄한 독백 한 장면으로 연출된다. 풍성한 보컬이 곡의 중심을 잡는 가운데 진중하게 읊조리는 도입부와 가스펠 풍 코러스가 이어지며 절정으로 향해간다. 그렇게 트랙 안에 외롭고 고독하게 자리한 그의 모습을 마주하면 처연한 감정이 온전히 밀려든다. 세월이 지나도 굳건한 가창력, 단단한 마음가짐과 태도를 그 속에 아로새겼다.
캐쉬(Cash)와 머니(Money)의 앞 음절을 딴 카모(CAMO)는 ‘Life is wet’의 상승세를 타고 본격적으로 신에 발을 들였다. 꽤 인지도가 높아졌음에도 고심과 숙고의 시간을 거친 후 발매한 정규 1집은 싱글 단위로 분절되어 있던 음악적 조준점을 선명하게 맞추며 가수로서 변화한 삶에 대한 이야기를 진중하게 선사한다. 작 전반에 확장을 향한 열망이 강렬하고 이를 위해 국내외 걸출한 조력자들을 초대해 보석을 갈고 닦는다.
이름부터 본토 향기를 풍기는 카모의 첫인상은 카디 비나 니키 미나즈의 전형적인 이미지와 겹친다. 단순 외모뿐만 아니라 주무기로 내세우는 몽환적인 트랩, 그리고 거친 베이스와 미니멀한 반복의 매력이 있는 장르 래칫(Latchet)이 함께 어우러진다. 한반도보다는 미국 남부에 가까운 카모의 분위기는 이렇게 형성됐고, 영어 강사로 활동했을 만큼 유창한 영어 실력 역시 음악과 비주얼의 융합에 크게 일조했다.
단순히 외국어를 중심으로 가사를 지을 뿐만 아니라 노랫말과 발음에 어울리는 풍부한 주제 멜로디로 곡의 재미를 더한다. 다채로운 탑 라인을 배치하며 래핑보다 보컬에 치중한 ‘그대에게’, ‘Mona lisa’, ‘Love fades’ 등은 주력 장르의 다소 밋밋한 단점을 해소하는 트랙이다. 분명 카모의 경쟁력이 살아난 구간이지만, 이 강점은 영어를 사용할 때 특히 선명하게 나타난다. 타이틀 ‘Bitchy’ 후렴구에 쓰인 단어들처럼 종종 어색한 한국어를 비추기도 한다.
언어는 음악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일 뿐, 카모는 좋은 사운드에 더 몰입하여 본인의 음악적 지평을 넓힐 소중한 기회를 만들었다. 성장기 타국에서 힙합을 접한 그는 자기 스타일에 가장 적합한 종주국의 비트를 수입했다. 어두운 멈블(Mumble)과 싱잉 랩 대중화에 기여한 프로듀서 808마피아가 지은 ‘Mapsi’는 클래식한 기타 리프가 카모의 음색을 뒷받침하며 독특한 맛을 낸다. 의외로 그라임과 드릴 대표주자 악셀 비츠는 산뜻하고 멜로디컬한 ‘Waiting for you’를 제시하며 후반부를 정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넓은 스펙트럼으로 나아가려는 목적성은 국경 없는 래퍼들과의 협력에서도 유효하다. 오키나와 태생으로 열도에서 비슷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에이위치(Awich)가 도움을 준 ‘Love fades’, 캐나다 출신 토미 제네시스와의 협업 ‘Waterwater’는 국내 힙합 신에서는 드물게 관측되는 국제 교류인데다가 여성 힙합 아티스트 간의 준수한 합작인지라 의미가 더 깊다. 루피나 식케이 등 기존 싱잉 랩 중진들과의 배합에서도 경력의 차이가 무색할만큼 카모는 주인공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위상이 낮아졌다 하더라도 음반과 CD의 의의는 여전히 뚜렷하다. 여러 곡을 집결시켜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고 다음 단계를 기대하게 만들 수 있는지, 풀 렝스 앨범의 제작과 발매 과정은 아티스트의 역량을 점검하며 뽐내는 시간이다. 그 관점에서 카모는 이번 앨범의 목표를 이미 달성했다. < Pressure Makes Diamonds >는 드디어 정식으로 런칭한 카모라는 브랜드의 보증서이자 그가 세공한 빛나는 다이아몬드의 진열장으로 기능한다.
– 수록곡 –
1. 그대에게 (Six Weeks) 2. Pressure (Feat. 식케이 (Sik-K)) 3. Fake hoe 4. 그래도 (Feat. 루피 (Loopy)) 5. Like me 6. Bitchy 7. Waterwater (Feat. Tommy Genesis) 8. Mapsi (맵시) 9. Been givin’ you 10. Love fades (Feat. Awich) 11. Mona Lisa 12. Waiting for you (Feat. 박재범) 13. Fi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