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에 머물지만 형체를 규정할 수 없는 상처를 다룬 전작 < Paingreen >은 초연했다. 거대한 우울을 거부하지 않고 곧이곧대로 받아내 부서진 아티스트의 마음은 초현실적인 형태로 재탄생했고 무겁고도 진중하게 다가섰다. 동시에 불안정했다. 불투명한 고통은 치유란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불안이 되었고, 어느새 짙은 안개로 퍼져 그를 심연으로 가라앉게 했다. 우린 지금 숨 쉬는 ‘생명’이기에 안식은 죽음이란 추상적 해결에서 오지 않았다.
멈추지 않고 흘러내리는 가학의 폭포에서 살기 위해 발버둥 친 표류자는 그렇게 부표를 찾는다. 스스로 새긴 흉터를 숨기고자 억지로 덧댄 누더기는 사실 외부에서 주어온 그럴듯한 변명의 수단이었기에 에이트레인은 외투를 벗어 던지고 본연과 마주하기로 결심한다. 삶에 덕지덕지 붙여냈던 불쾌한 녹색 딱지를 뜯어내며 생긴 분홍 생채기, 두 번째 정규 < Private Pink >이다.
흐릿한 사운드스케이프로 청자를 잠식했던 지난 앨범과 다르게 < Priviate Pink >는 지독하게 개인을 해체하며 명백하게 나뉜 부위를 대중에게 전시한다. ‘나’를 중심으로 세 개의 주제로 구성된 독백 극은 얼터너티브 알앤비와 포크, 일렉트로닉 등 다양한 장르로 뚜렷한 기승전결을 드러낸다.
‘Scarberry’로 시작되는 1부의 한껏 과장된 편안한 기조 속 심어놓은 반전이 돋보인다. 길게 늘어뜨리는 창법과 따스한 피아노로 형성된 느슨한 분위기가 곧 의도한 불협으로 기괴하게 전환된다. 노이즈를 지나 어쿠스틱 기타가 매력적인 ‘안 괜찮아’ 역시 오소영의 담담한 목소리 뒤로 절규와 같은 코러스를 통해 또 다른 전개를 암시한다.
자학은 가족 등 타인에게로 향하고 기어코 열등으로 번진다. 성가 ‘식물’과 우스꽝스러운 소리로 자조하는 재즈 ‘가정통신문’에서 이어지는 ‘줘도 안 가질 보물’은 기억의 굴삭 후 발견한 추억에 대한 찬사이자 과거를 아름답게 치장하면 할수록 반대로 추악해지는 본인을 그린다. 초록색 대문이 부끄러워 나가지 못한 어린아이는 아직도 커야 한다.
이혜지의 첼로 연주를 비롯해 퍼커션을 활용한 편곡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감정선에 따라 변화하는 주법과 소스의 배치로 서사를 관통하며 카코포니, 최엘비 등 적재적소에 맞춰 사용한 피처링 또한 빈틈없이 이야기를 설계하는 치밀한 공법이다. 확고한 문학적 목표를 가지고 결집한 여러 질감이 어긋나지 않고 일관된 흔적을 남긴다.
‘이름을 바꿨다’로 이름까지 바꿔가며 운명이란 핑계를 쫓는 자신을 날카롭게 난도질하던 심경은 ‘잘라도 내가 잘라야지’로 차분히 내려앉는다. 되감기 효과로 하이라이트에 진입하는 곡에서 회상을 마친 그는 첫 번째 트랙부터 겹겹이 쌓인 악기의 층에 기대어 울부짖는다. 어쩌면 오만했던, 타의로 떠넘긴 거짓된 위안에 결국 자기혐오로 추락한 모습을 반성하듯.
무릇 깊게 팬 틈이라도 언젠간 새살이 돋기 마련이다. 직접 묻은 슬픔의 찌꺼기를 건저내기 위해 치부를 파헤친 에이트레인의 손끝은 어느 때보다 너덜너덜하지만, 내면에 자라난 ‘나’란 증오가 마침내 용서를 양분 삼아 포근한 위로의 새싹을 품어낸다. 이윽고 바닥을 뚫고 성장한 자생의 줄기가 < Private Pink >란 환한 핑크색 열매를 맺는다.
– 수록곡 – 1. Scarberry (Feat. 서보경) 2. 안 괜찮아 (Feat. 오소영, Dey Kim) 3. 사실 나는 꽤나 괜찮은 사람일지도 (Feat. 이랑, 이혜지) 4. 나도 좀 알았으면 좋겠다 (Feat. 이혜지) 5. Something beautiful (Feat. 김뜻돌, 시문, 서보경) 6. 그런 날이 있어 (Feat. 카코포니) 7. 식물 (Feat. 시문) 8. 초록대문 9. 가정통신문 (Feat. 이혜지, 서보경) 10. 줘도 안 가질 보물 (Feat. 이혜지) 11. 커야 돼 (Feat. 최엘비, 이혜지) 12. 이름을 바꿨다 (Feat. NUNACRIS) 13. 잘라도 내가 잘라야지 (Feat. 이혜지) 14. F, A and F again (Feat. 이혜지) 15. 한림대병원
질긴 가사는 벅벅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다. 연일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버둥을 만난 뒤 적은 글귀다. 작은 체구에 연일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달고 있는 이 작은 아티스트는 도대체 어떤 생각과 고민을 안고 있는 것일까? 스스로 인정했듯 그의 많은 고민의 결들은 작고 잘게 뭉쳐져 버둥 음악의 자양분이 된다. 그래서 한때 아주 많이 날카로웠고 때때로 분노에 차 있었다.
그 시기를 거쳐 얼마 전 정규 1집 < 지지 않는 곳으로 가자 >를 발매했다. 한결 가벼워진 시선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그는 이번 음반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위해” 썼다고 했다. 처음으로 내가 아닌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음악을 쓴 버둥. 나에게서 타인에게로 눈길이 이동하는 동안 어떤 것을 잃고 얻으며 무엇을 읽어 냈을까. 모든 답은 음악 속에 있다. 버둥이 말하는 ‘지지 않는 곳’의 첫 막이 이제 막 먼지를 털고 마이크의 볼륨을 키웠다.
#1. 우리 함께 ‘지지’ 않는 곳으로.
첫 정규 음반 < 지지 않는 곳으로 가자 >의 발매를 축하한다. 기분이 어떤가? 앨범 작업을 할 때마다 이번에 내야겠다는 확실한 ‘계기’가 있다. 계기가 있다는 건 발매할 이유도 확실해진다는 것이지만 반대로 지금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마음먹었다고 작품을 완성하는 건 아니니까 뜻했던 시기에 음반을 묶을 수 있어 감사하다. 아직 음반 활동이 마무리된 게 아니기 때문에 돌아보기보다는 앞을 보고 있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알리고 기다려준 팬들에게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다.
확실한 ‘계기’가 있다고? 어느 순간 늘 이어오던 고민의 답이 찾아지는 경우가 있다. 내가 지금까지 했던 고민들이 이 결론을 위한 것이구나 싶다고나 할까? 나는 음악 활동을 시작한 18살 때보다 항상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럼 뭘 고쳐야 할까?’ 늘 생각했다. 그러다 올해 완벽하지 않아도 내 모습을 누군가 좋아하고 믿어주면 그걸 기반으로 나아갈 수 있구나 하는 걸 느꼈다. 고민을 맺을 수 있는 답을 찾았고 그게 이번 정규 음반의 ‘계기’가 됐다.
지난 EP < 조용한 폭력 속에서 >(2018), < 잡아봐! >(2020)가 개인적이고 날카로웠다면 이번 음반은 훨씬 대중적이다. 이전 EP는 나를 돌아보며 내 고민과 이야기를 담았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방향으로 작업을 많이 했다. 반면 이번 정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다. 그들로 인해 내가 어떻게 변했는지, 그들로 인해 내가 어떤 생각을 품었는지를 썼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걸 담았고 그래서 사람들이 원하는 것들을 되도록 맞추려고 했다. 많이 듣고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웅크리고 있는 버둥을 담은 핑크빛 음반 커버도 강렬하다. 커버를 두 번 갈아엎었다. 먼저 컨택 했던 분이 있었는데 편곡을 진행할수록 사진과 내 작품의 색이 점점 달라졌다. 정말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수가 없어 직접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 우연히 지금 커버를 찍어준 김무무 님의 사진 작업에 참여하게 됐다. 무무님을 만나 내가 작업한 커버를 보여드렸는데 표정에 걱정이 가득하셨다. (웃음) 무무님이 자신이 찍은 사진을 써보는 건 어떻겠냐고 먼저 제안해줬다.
무무의 사진이 이번 작품의 메시지를 잘 담고 있던 건가? 그것보단 무무 작가님이 나를 많이 아껴준다. 나를 아끼는 사람이 보는 시선을 쓰고 싶었다. 그가 보기에 가장 버둥 같고, 담고 싶던 버둥의 모습을 찍어준 거니까. 그런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시선이면 음악과도 당연히 연결되지 않을까?
붉은빛, 핑크빛이 도는 사진을 선택한 건 여러 색을 시도해봤지만 이 색이 나와 제일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다른 여러 예술도 비슷할 것이라고 보는데 의도를 가지고 모든 걸 다 끼워 맞추기보다는 어떤 우연성을 믿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음악을 듣고 붉은빛의 커버를 보면서 의미를 각자가 유추하고 찾게 되는 식으로.
눈에 띄는 버둥의 강점이 있다. 바로 작명 센스. 캐치한 제목을 정말 잘 뽑는다. 그중 ‘씬이 버린 아이들’이란 곡명을 보고 크게 감탄했다. 나는 이러다가 신에서 진짜 버려지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 제목이 자극적이기까지 하니까… (웃음) 근데 그게 내가 활동하면서 실제로 느낀 감정이다. 어딘가에 선택받지 않는 건 정말 슬픈 일이다. 심지어 불합격은 연락도 잘 받을 수 없지 않나. 어느 순간 그게 내가 더 잘나고 모자라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1년 전에는 쳐다도 안 보던 작업물을 다시 갖다줬을 때 너무 좋다고 하는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처럼 이제 막 작업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분명 이런 상황을 종종 겪을 거다. 그럴 때 힘들어하기보다는 ‘어쩌란 말이냐 트위스트 추면서’의 자세를 갖자고 말하고 싶었다. 곡을 쓰고 공연하면서 내가 갖는 마인드다. 아이러니하고 웃긴 상황을 우리가 바꿀 수는 없으니 유쾌하게 돌파하자.
그래서일까? 음반 타이틀이 < 지지 않는 곳으로 가자 >인 것이 버려지지 말고 차라리 지지 않는 곳으로 가자는 일종의 선언처럼 읽힌다. 내 곁에서 나를 사랑해주는 이들이 참 많다. 이 순간이 계속 지속 됐으면 좋겠다. 내가 더 많이 알려지면 그만큼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생기게 될 거다. 친구들 또한 몇몇이 이사라도 가면 현재처럼 가까이 지낼 수 없을 거고. 그걸 지금 고민할 필요는 없지만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거니까 이 순간이 계속 지속되길 바랐다. 무슨 바보 같은 짓을 해서라도.
소설 < 어린 왕자 >를 보면 어린 왕자가 행성에서 노을을 보려 의자를 당기는 신이 있다. 그걸 읽으며 ‘해가 지지 않는 곳으로 가자’라는 타이틀을 떠올렸다. 그러다 우리가 실제로 버려지고, 지더라도 서로 얘기 나눴을 때 그걸 그냥 재밌게 넘길 수도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 남들은 다 졌다고 하지만 우리끼리는 이겼다고 하는 순간이 계속됐으면 좋겠다. 그곳으로 함께 가자. 하며 중의적인 의미로 제목을 지었다.
얼마 전 목표 금액의 5배를 웃돌며 실물 앨범 제작을 위한 크라우드 펀딩에 성공했다. 앨범을 에세이집 형태로 만들었다고 들었는데. 인쇄비 정도만 모으려 시작했던 프로젝트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분이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했고 또 당황했다. 기대하시는 만큼의 퀄리티로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부담이… 교정을 네 번 이상 보며 최선을 다했다. (웃음)
처음 작업을 할 때 뭘 먼저 해야 할 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나는 운이 좋아 시행착오를 적게 겪었다. 이때 선배들의 짤막한 작업기를 보는 게 큰 도움이 됐다. 마찬가지로 이제 활동을 시작하는 분들 중 내 작업방식이 궁금한 사람들에게 프로세스를 보여드리고 싶었다. 또 내가 워낙 한 노래에 많은 의미를 담는 편이라 팬분들에게 그 내막을 설명해주고도 싶었고.
#2. ‘버둥’을 읽는 방법
기사를 찾아 읽으며 버둥이 늘 ‘여성’에 방점 찍혀 다뤄진다는 생각도 들었다. 2~3시간 구구절절 이야기해도 결국 누군가는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많을 걸 꺼내놔도 꽂히는 부분이 생기기 마련이고 그러면 그게 크게 확대된다. 나에게 관심을 주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시선 쪽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오려 노력하지만 여젼히 실패할 때가 많다.
< 싱어게인 >을 하면서 특히 그랬다. 그때 머리가 지금보다 짧았는데 댓글이 참 재밌었다. ‘머리 짧으니까 페미 아니냐’, ‘페미 아니면 응원한다’ 등등. (웃음) 내가 어떻게 만들어도 사람들이 그렇게만 본다면 아예 모호하게 해볼까 싶기도 했다. 안 듣고 싶은데 계속 입으로 따라 부르게 되는 중독적인 선율로. 또 뭉뚱그린 가사는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으니까 그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궁금하기도 하고. 하하하.
이전 싱글 ‘How much’, ‘칼’ 등에서 이번 음반의 ‘00’, ‘연애’ 등으로 글감이 바뀐 것도 비슷한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을까? 예전에는 분노가 컸다. 다수의 여성이 그렇겠지만 내가 겪는 어떤 신체적, 외모적 차별들이 모두 내 탓인 줄 알고 자랐다. ‘내가 뚱뚱하니까…’ 하는 식의 것들이 있지 않나. 그게 잘못됐던 것임을 알게 되면서 내가 나를 가둔 시기에 대한 분노와 보상심리가 생겼다. 이전 작품이 날카롭다고 느낀다면 내가 그 분노들에 주목했기 때문일 거다.
분노가 지나가면 슬프다. 또 외롭기도 하고. 이제 나는 모든 게 반드시 내 잘못은 아니지만 또 어느 측면에서는 분명 내 잘못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2장의 EP에서 그런 감정을 어떻게 인정하고 넘어가야 하는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답을 내렸다. 전작들을 통해 해소했다. 그랬더니 또 다른 지점에서 새로운 질문들이 찾아왔다. 앞서 말했듯 그걸 이번 정규를 통해 풀었다.
뮤지션 ‘버둥’ 이전의 한 개인으로서 성장 서사가 있다. 점점 나보다 어린 친구들이 많아진다. 그들을 보며 내가 어떤 걸 해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번 음반의 ‘공주이야기’는 아이돌을 보면서 쓴 얘기다. 실제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높은 인기를 누릴 때가 있다. 어른들이나 대중들이 그들을 올렸다가 내렸다가 하는 거니까 실제 그 파도 위에 있는 어린 여성은 어떤 마음일까 상상하며 썼다.
중요한 건 시점이 달라졌다는 거다. 예전에는 ‘그 어린 여성’의 입장에서 글을 썼다면 지금은 그들을 마음대로 ‘다루는 사람’의 시선에서 가사를 쓴다. 그렇다 보니 우스깡스러운 모습을 묘사하게 된다. 대단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 별로야, 우스워하는 뉘앙스가 묻어난달까?
더 다양한 면을 비추지 않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는지.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지 않나. 내가 더 많은 작품을 쓰면 지금과는 다른 상징이 생길 수도 있다. 예전엔 내게 붙는 수식어들에 대해 고민했다. 근데 사회가 그렇게 오래 기억하지 않더라. 조금 더 똑똑하게 ‘내가 그걸 가지고 움직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요즘은 그냥 다 보고 있다. 누가 내 노래를 이렇게 저렇게 듣고 얘기하는구나 하면서.
그런 마인드를 가지는 게 쉽지 않을 텐데. 늘 내게 부족한 면만 봐 왔다. 그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며 이만큼의 결과를 만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자주 회사가 있는 게 아니냐는 소리를 들었다. 마케팅이나 비주얼 라이징을 굉장히 신경 쓰는 편인데 그러니까 사람들이 ‘버둥은 회사 필요 없잖아’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사람들이 버둥을 볼 때 고집이 있고 잘하니까 ‘회사가 하자는 쪽으로 안 하겠지’ 지레짐작하는 것 같다. 물론 하자는 대로 다 하겠다라고는 하지 않지만 ‘왜 이렇게 해야 하죠?’ 질문했을 때 납득 가능하고 감당할 수 있다면 나는 늘 시도 하는 편이다. 믿는 사람이 조언하면 설사 그게 손해가 될지라도 일단 한번 해본 뒤에 돌아본다. 충분히 얘기 나누면서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이다.
버둥이 생각하는 뮤지션 버둥은 어떤 존재인가. 이번 정규를 만들면서 내가 결국 작업을 오래 할 사람이구나 깨달았다. 아무도 나를 안 찾아줘도 뮤지션 본인이 하고 싶은 얘기가 끊기면 안 된다. 그런 면에서 난 할 이야기들이 많다. 또 나는 고민이 많다. 그리고 그걸 글, 영상, 말 등을 통해서 정리해야 하는 사람이다. 이제 그걸 인정하고 깨달았다. 어떤 식으로든 예술과 관련된 일을 할 사람. 느리더라도 계속 이 일을 할 버둥. 확신이 생겨 요새는 마음이 좀 느긋하다. (웃음)
< 싱어게인 >, < 슈퍼스타 K7 >, ‘밴드 디스커버리’, ‘오월 창작 가요제’ 등 버둥이 참가한 오디션 프로그램은 한 손의 손가락을 다 접어도 부족하다. 그 싫어하는 경쟁에 직접 참여한 건 그만큼 자신을 알리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기 때문. 실제로 버둥은 나를 알리는 일에 망설임이 없다.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엔 각양각색의 버둥을 만날 수 있는 ‘Q&A’, ‘브이로그’, ‘라이브 스트리밍’ 콘텐츠가 가득하다. 현재 5천여 명의 구독자와 소통 중. 음악 외의 영상, 사진 작업 또한 찰떡같이 제 색을 찾아 잡는다. 다재다능과 선명한 욕심, 그리고 열심을 기반으로 버둥은 부단히 길을 닦고 있었다.
#3. 슈퍼스타가 된 버둥. 전국투어, 노들섬 그리고 고척돔!
고민 많은 버둥. 요즘 삶은 어떤가? 과분한 관심에 감사해하며 지내고 있다. 가끔 어떻게 하면 지금 버둥 정도로 자리를 잡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근데 해줄 수 있는 얘기가 없다. 나는 EBS ‘헬로루키’를 비롯한 경연 덕을 많이 봤다. 지금은 코로나로 경연, 오디션 자체가 줄어 들었으니… 나 또한 1년만 늦었으면 누렸던 많은 기회를 놓쳤을 거다.
정규를 내면서 솔직히 업무량이 꽤 많아졌다. 이걸 내가 다 혼자 처리하면 음악 활동만으로 생활이 가능하지만 노래를 연습하고 창작할 시간이 너무 부족해진다. 같이 일해줄 사람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소속사의 손길이 필요한데 그런 생각을 하면 걱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래도 한 해 한 해 나이가 차니까 조급해지는….
정규 1집 발매 전후로 체감되는 외부의 반응 차이가 있는지. 차이라기에 예전에는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웃음) 과거엔 그냥 버둥이라는 애가 있더라 정도였다. 정규 1집을 내면서부터 내 음악에 대한 깊은 평가나 이야기들이 생겼고.
반면 버둥의 ‘찐팬’은 활동 초창기부터 있더라. 너무 감사하다. 나를 오랜 시간 좋아해 주는 것을 보면 또 신기하기도 하고. 나는 내가 하는 이야기가 명확하다고 생각한다. 같은 걸 봐도 버둥이 해석하는 틀이 있고 거기에 디테일한 관점을 더하는 편이다. 이런 관점에 갈증을 느끼는 분들이 내 음악을 사랑해주는 것 같다. 팬들을 통해 내 시선을 의심하지 않아도 됨을 느낀다.
자신의 아픈 서사를 드러내고 이를 좋은 선율과 시선으로 녹여내는 건 참 대단한 일이다. 이번 음반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곡이 있다면? 첫 곡 ‘처음’. 모르는 걸 물어봤을 때 잘 챙겨주는 사람이 있는 반면 무시하는 사람도 있다. 지금은 말을 섞어도 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조금 구분할 수 있게 됐지만 첫 EP를 낼 때만 해도 정말 힘들었다. 내가 언제까지 아는 척 해야 하고, 모르는 걸 언제까지 숨겨야 하는지. 얼마나 웃어야, 얼마나 울어야 하는지… 그런 마음들을 가사와 멜로디로 잘 정리한 것 같다.
EP 2개와 이번 정규 음반까지 모두 밴드 줄리아드림의 박준형 PD님과 작업했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준형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웃음) 이번 작품이 보다 대중적이어 진 데는 준형의 의견이 한몫했다. 슈퍼스타가 된 버둥. 준형의 이번 프로듀싱 키워드였다. 녹음 디렉팅을 줄 때 여기가 고척돔이고 4만 명이 있다고 생각하라고 하더라. 상상은 잘 안 됐지만… 하하하.
고척돔? 물론 가능이다. 가사도 너무 좋고, 기획도 너무 잘하고, 음악도 끝내주니까! 1월 말에 노들섬에서 크게 쇼케이스를 진행할 예정이다. 서울을 시작으로 지방 전국 투어도 준비 중이고. 표를 다 팔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다만 현장에서 앞서 제작한 에세이집을 판매할 예정이니까 아직 구매하지 못한 분들은 참고해달라. 투어 일정은 조만간 공개하겠다. (웃음)
버둥을 위로해주고 지탱하게 한 작품이나 뮤지션이 있다면? 이번 앨범에 관련해서 말하자면 이랑의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이다. 관계에 있어 늘 자책했다면 이 음악을 통해 여유를 많이 얻었다. 내 곁에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좋지만 그렇지 않아도 그게 내 탓만은 아니다 하는 깨달음. 많은 위로가 됐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람에게 감사하고 그들로 인해, 그들과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던 데에 랑의 노래가 큰 역할을 했다.
음악 일을 멈출 수 없는 동기 중 하나 역시 이런 뮤지션들 때문이다. 멀리서 즐겨듣던 음악가 곁에 가볼 수 있고 그들의 음악을 때로 ‘미리’, ‘먼저’ 들어볼 수 있는 것은 이 일이 주는 큰 매력이다. 이번 에세이집 아이디어도 랑의 < 신의 놀이 >를 통해 얻었다. 나 역시 꾸준히 다양한 시도를 하며 언젠가 직접 회사도 운영해보고 싶다. (웃음)
하나하나 허투루 넘길 수 없는 비하인드 가득한 대화였다. 벽장 아래 살며 자신의 가치를 모르던 한 캐릭터처럼 버둥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원석인양 빛났다. 자신을 잘 알았고 그걸 잘 꺼낼 줄 알았으며 적절하게 포장까지 할 줄 아는 영리한 아티스트. 지지 않는 곳으로 부단히 발걸음을 옮기는 버둥. 그의 여정을 계속 지켜보고 싶다.
우리는 모두 자주 버둥거린다. 애써도 애쓴 만큼 결과물이 따라주지 않는, 날들의 연속. 우연히 버둥의 음악을 만났다. 선홍색의 불빛이 짧은 머리의 웅크리고 있는 여성을 비춘 커버. 어딘가 외롭고 쉽게 그 의중을 찾아낼 수 없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첫 곡 ‘처음’을 재생. 이내 자세를 고쳐 앉고 음반 전체를 꼼꼼히 받아 적었다.
버둥. 나름 열심히 음악을 따라 듣고 있지만 그리 익숙지 않은 이름이었다. 하지만 완숙한 멜로디가 돋보였다. ‘00’, ‘Muse’ 등의 신시사이저로 문을 열고 잘 들리는 선율로 무장한 곡들이 있었고 가사 또한 특별했다. ‘00’은 ‘영영’이라는 단어가 반복되고 곧 ‘1과 2가 지켜보길 / 3과 4가 지나가길’하는 식으로 숫자를 이용해 서사의 흐름을 살렸다. ‘연애’는 ‘날 네 것으로 널 내 것으로 / 만들지는 않을 거야’ 노래하며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하고 확실하게 표현한다.
쉽게 말해 직접 쓴 노랫말은 음악을 통해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선명하게 내뱉고 있었다. 음악적 시선이 뚜렷한 곡. 난해하고 알 수 없는 단어들로 뭉뚱그리지 않고 시적이되 사고를 명징하게 풀어낸 작품은 뮤지션 ‘버둥’을 한정하기보다 오히려 확대했다. 마치 이쪽에서 ‘당신은 어떤 삶을 살아왔나요?’ 묻게 하고 더불어 ‘당신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요.’하게 한달까.
그렇게 2018년에 첫 EP < 조용한 폭력 속에서 >를, 2019년에 < 잡아봐! >를 발매했음을 알게 됐다. 두 개의 짧은 음반과 몇 개의 싱글을 거쳐 당도한 이번 정규 앨범은 오랜 시간 버둥거리며 부단히 노력한 흔적을 보여준다. 우선 대중을 놓치지 않는다. 선율이 전작에 비해 확실히 매끄럽다. 타이틀 ‘씬이 버린 아이들’을 들어보자. 그간의 싱글 중 가장 밝은 기조를 띈 이 노래는 둥둥거리는 베이스와 리듬을 타게 하는 신시사이저가 어우러지며 매력적인 후렴을 만든다.
또한 더 풍성해졌다. 신시사이저의 활용이 단정하고 깔끔하게 적소에서 터진다. ‘공주이야기’와 같은 노래에선 오르간, 브라스 세션 등을 활용해 전에 없던 터치를 담았다. 즉 이 음반은 인디 뮤지션으로서 모든 것을 스스로 해오던 그가 ‘지지 않았음’을 그래서 버둥을 주목해야 함을 증명한다. 제 색을 찾으며 발전한 흔적이 여기 있는 것이다.
버둥거리다. 힘에 겨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쓰다. 버둥이 쓰는 음악은 어떤 순간들을 지나치고 또 어떤 기억들을 묻기 위한 삽처럼 느껴진다. 완전한 것을 노래하지 않고 조금은 불편하고 아프고 답답한 것들을 써 내린 음반. 자주 버둥거리며 살아가는 우리를 비추기 충분하다. 버둥, 버둥. 그의 이야기가 계속 궁금하다.
– 수록곡 – 1. 처음 2. 00 3. 나의 모든 슬픔이 4. 그림 5. 공주이야기 6. Muse 7. 씬이 버린 아이들 8. 파아란 9. 연애 10. 기일
이 음반은 많은 것을 묻게 한다. 무엇 때문에 앨범의 지휘자 이랑은 이런 이야기들을 담게 되었는가. 2012년 첫 정규 < 욘욘슨 >,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포크 노래 부문 수상을 안긴 소포모어 < 신의 놀이 >(2016)에 이어 5년 만에 발매된 세 번째 풀 랭스는 전례 없이 강하고, 세고 어둡다. 늘 그가 손에 쥐고 사용하던 작법들, 어쿠스틱 기타와 첼로를 중심으로 곡을 쌓고 서로 다른 가사를 한 곡에 동시에 넣는 등의 구성은 비슷하지만 그 안에 적힌 메시지의 촉은 어느 때보다 날카롭다. ‘나’를 뚫고 지나 ‘사회’에 닿으려는 듯 갖은 비유를 넣어 목소리를 낸다.
이는 작품과 동명의 타이틀 ‘늑대가 나타났다’부터 선명히 드러난다. ‘이른 아침 가난한 여인이 굶어 죽은 자식의 시체를 안고 / 가난한 사람들의 동네를 울며 지나간다’는 내레이션으로 문을 연 노래는 합창단의 웅장한 코러스와 만나며 어떤 뜨거움을 전한다. ‘내 친구들은 모두 가난합니다 / 이 가난에 대해 생각해보세요’. 여기에는 명백히 개인을 넘어 세상을 향한 소리침이 담겨있다. 쿵쿵 울리는 드럼과 거기에 맞춘 여러 사람의 호흡은 힘을 주어 ‘우린 쓸모없는 사람들이 아니요’라며 분노를 토한다.
좁게 자신 주변의 것들을 다뤘던 데뷔작을 지나 < 신의 놀이 >가 적나라하게 가족과 죽음 등을 소재로 다뤘다면 이번 작품은 그 자체로 사회를 본다. 그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앨범에는 솔직한 분노와 공감할 수밖에 없는 울분이 가득하다. ‘환란의 세대’는 지금껏 발표한 곡 중 가장 굵고 거친 이랑의 보컬이 담겨있다. ‘목도 안 메도 되고, 불에 안 타도 되고, 손목도 안 그어도 되고’란 가사가 연이어 펼쳐지는 와중 몇몇 사람의 얼굴들이 떠오른다. 그러니까 애써 고개 돌린 누군가의 삶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특히나 이 곡은 코러스 버전으로도 실렸는데 노래의 끝, 두텁게 중첩된 기괴한 합창단의 울림이 마치 인생의 고통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또 하나 돋보이는 변화는 독백의 적극 활용. ‘의식적으로 잠을 자야겠다’, ‘어떤 이름을 가졌던 사람의 하루를 상상해본다’ 등에 사용된 감정 없이 내뱉는 독백들은 음반에 가득 채워진 ‘말하고자 하는 욕망’ 혹은 ‘전하고자 하는 욕망’들과 다름없다. 그만큼 앨범은 메시지를 전하려 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는 적확하게 우리에게 온다. 영화감독으로, 에세이 작가로, 또 음악인으로 존재하며 그가 풀어낸 ‘내 얘기’들은 산재한다. 누구든 그를 볼 수 있다. 아니 누구든 그를 ‘온전히’ 볼 수 있다. 이랑의 서사는 언제나 티끌 없이 맑고, 거짓 없이 온전하게 공개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번 앨범의, 나아가 ‘이랑’이란 아티스트의 핵심이다. 끊임없이 토해내는 그의 이야기들은 솔직함을 타고 더할 나위 없이 온전하게 다가온다. 삶에 밀착해 회고하는 친구, 가족, 죽음, 가난, 사랑, 일 따위의 것들이 이랑을 통해 순수하게 투영된다. 끝없이 그의 음악이 환호받는 것은 이 정제되지 않은 고백에서 시작될 것이다. 하나하나 곡이 쓰인 배경을 묻고, 듣고 싶게 한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그래서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음반. 착실하게 두 땅에 발을 붙여 올곧게 ‘나’를 외쳤고 되돌아 울려 퍼지는 메아리는 그렇게 ‘우리의 것’이 된다.
– 수록곡 – 1. 늑대가 나타났다 2. 대화 3. 잘 듣고 있어요 4. 환란의 세대 5. 빵을 먹었어 6. 의식적으로 잠을 자야겠다 7. 그 아무런 길 8. 박강아름 9. 어떤 이름을 가졌던 사람의 하루를 상상해본다 10. 환란의 세대(Choir 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