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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리 인터뷰

누구에게나 처음은 떨리는 순간이다. 하지만 열아홉 소녀의 시작엔 현재에 대한 걱정보다 미래를 향한 기대만이 가득하다. 어린 시절 듣던 노래에 이끌려 가수의 꿈을 키워온 규리는 2022년 11월 첫 EP < Open The Door >를 발표하며 어엿한 싱어송라이터로 성장해 나갈 것을 알렸다. 조심스레 음악계의 문을 열어젖힌 만큼 앳된 느낌이 묻어나는 소곡집이지만 그간의 이력과 구석구석 닿아있는 노력의 흔적을 보고 그가 갑작스레 튀어나온 신인이 아님을 직감할 수 있었다.

2023년이 코앞에 다가왔던 12월의 어느 밤, 한창 10대를 마무리하느라 바쁠 규리가 이즘과의 인터뷰를 위해 소중한 시간을 내어 주었다. 한 시간가량 이어진 대화 속에서도 수줍게 머금은 미소를 잃지 않았던 그는 아직은 그저 배우고 싶은 게 너무나도 많다며 내면의 순수한 열정을 차분히 내비쳤다. 새로운 나이대를 앞둔 음악 새내기의 당찬 포부를 공개한다.

첫 미니앨범 < Open The Door >에 대해 간단한 소개 부탁한다.
< Open The Door >, ‘내 음악의 첫 문을 연다’는 콘셉트로 그간 만들어둔 노래들 중에서 풋풋함이 묻어나는 곡 위주로 구성한 앨범이다. 지금만 남길 수 있는 기록을 온전히 내 힘으로 완성하고 싶어서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음에도 대부분의 작업을 혼자 해내고자 했다. 나중에 더 커서 19살 규리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돌아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발표한 노래가 많지 않음에도 곡마다 다채로운 음색이 흐르고 있다.
타이틀곡 ‘Open the door’는 조심스럽고 설레는 감정을 담아내기 위해 박자감을 살려 노래했고, 반면 ‘고양이’의 경우엔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일부러 귀엽고 상큼하게 불러 보려고 노력했다. 내 목소리에 가장 가까운 곡은 이번 앨범에 실리진 않았지만 기타 하나에 의지해 써 내려간 ‘사막’이 아닐까 싶다.

얼마 전 ‘사막’이란 곡으로 < 제33회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에서 금상을 수상했다. 어린 소녀가 노래하는 ‘사막’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는지.
‘사막’은 2021년에 기타 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쓴 노래다. 나는 고등학생이 되던 2020년부터 코로나가 퍼져서 축제나 체험학습처럼 소중한 추억들을 남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 막막한 현실을 사막에 빗대었고 바다를 향해 가겠다는 이야기로 풀어내 지금보다는 나아질 상황 속에서 진정한 나 자신을 찾겠다는 의지를 가사에 녹여냈다.

보통 기획사 오디션이나 TV 프로그램을 통해 음악계에 데뷔하는 편인데, 규리는 그 첫걸음으로 <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를 택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유재하라는 가수는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이런 경연에 참가하겠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 그런데 부모님께서 내가 만들었던 노래들을 들어보시고 나가보면 좋을 것 같다고 추천해 주신 덕분에 경험 삼아 참가하게 됐다. 전년도에도 출전해서 예선 탈락을 했었던 탓에 큰 기대는 없었는데 2022년엔 생각지도 못한 값진 성과를 거두게 되어 그야말로 감사할 따름이다.

2015년 12살의 나이에 대선배인 양희은과 ‘엄마가 딸에게’라는 노래를 함께 부른 적이 있다. 어떤 계기로 연이 닿은 건가.
사실 아버지께서도 음악계에 몸담고 계시다. 안치환 선생님의 ‘내가 만일’을 작사, 작곡하셨고, 양희은 선생님과도 몇십 년간 친한 선후배 사이로 지내며 ‘내 나이 마흔 살에는’을 비롯한 많은 곡들을 함께 작업하셨다. (김영국, 과거 활동명 김범수) 두 분께서 워낙 친분이 두터우시다 보니 나도 유년 시절부터 자연스레 양희은 선생님과 사석에서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엄마가 딸에게’는 아버지께서 프로듀싱을 맡은 양희은 선생님의 싱글 프로젝트 < 뜻밖의 만남 >을 통해 참여하게 된 곡이다. 당시에 어린아이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하셔서 한번 녹음을 했었는데 선생님께서도 내 목소리로 가는 게 좋겠다고 해주셨다. 그 일을 계기로 최근까지도 선생님 콘서트에 따라다니면서 ‘엄마가 딸에게’를 함께 부르곤 한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영광스러운 일이다.

양희은 선배에게 들었던 조언이나 배운 점이 있다면.
공연이 끝난 후에 가끔씩 손 편지를 써 주시곤 했는데 그중에서도 ‘뭔가를 기록으로 남기는 습관을 가지면 좋다’는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이번 <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 본선 직전에도 기회가 생겨 선생님을 찾아뵈었는데 그때 대기실에서 즉석으로 ‘사막’을 들려드렸다. 내가 기타 치면서 노래 부르는 걸 선생님도 처음 보셨는데 기타처럼 몸에 착 달라붙는 악기들이 좋으니 하모니카나 오카리나 같은 악기들도 다양하게 배워보라고 알려주셨다. 최근에 있었던 12월 공연에도 찾아와주셨는데 무대 매너를 비롯한 현실적인 부분들을 세심하게 신경 써주셔서 감사했다.

음악에 흥미를 붙이게 만들어 준 가수나 노래가 있다면.
초등학교 4학년 때 테일러 스위프트의 4집 < Red >에 수록된 ’22’라는 곡을 처음 들었는데 막연하게 밝고 신나는 분위기가 좋아서 계속 반복하며 따라 부르곤 했었다. 그렇게 관심이 생겨 찾아보니 직접 작곡한 노래에 본인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가수였고 혼자서도 무대 위를 꽉 채우는 모습을 보며 나 역시 싱어송라이터를 꿈꾸게 되었다. 훗날 한국의 테일러 스위프트가 되고 싶고 그렇게 유명해진다면 꼭 듀엣을 해보고 싶다.

테일러 스위프트 말고도 즐겨 듣는 아티스트가 있는지.
특별히 가리지 않고 넓게 접하는 편이지만 기본적으로 팝을 많이 듣는다. 혼네(HONNE)는 플레이리스트를 따로 만들어서 들을 정도로 정말 좋아하고 비슷한 나이 또래인 빌리 아일리시도 자기만의 색깔이 확고해서 자주 찾게 된다.

국내에서는 악뮤를 좋아한다. 특히 < 항해 >라는 앨범을 자주 듣는데 가사나 스토리 라인이 잘 짜여 있어서 그런지 둘의 하모니가 더욱 아름답게 다가왔다. 그리고 작사, 작곡, 편곡 어디 하나 빠지지 않고 팀의 모든 노래를 책임지고 있는 이찬혁처럼 멋진 엔터테이너가 되고 싶다.

크레디트 곳곳에 이름을 올린 것만 봐도 이미 다재다능한 것 같다. 이른 나이부터 음악 제작에 뜻이 있었는지.
어릴 땐 피아노랑 드럼을 배웠었고 중3 때는 미디까지 익히면서 직접 내 노래를 만들 수 있게 됐다. 전문적으로 장기간 교육을 받은 것은 아니다. 지금도 작곡할 때 기타 코드를 모르는 게 아님에도 특별히 코드를 인지하지 않고 귀로 들었을 때 좋은 쪽을 찾아가는 편이다. 예전부터 계속 음악을 즐겨 들었고 노래하는 걸 좋아하다 보니까 자연스레 방향이 정해진 것 같다. 부모님께서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셨는지 항상 내 선택을 존중해 주면서 묵묵히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직접 곡을 쓰다 보면 분명 창작의 고통을 느낄 텐데 어떤 점이 가장 힘든가.
의외로 힘들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오히려 공부하다가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수단이 음악 작업이었다. 그래서 뭔가 힘들다는 인식보다는 재미있는 놀이라는 개념이 더욱 강하다. 앞으로 더 깊이 배워가면서 난관을 마주칠 수 있겠지만 되도록 즐긴다는 생각으로 작업을 이어갈 생각이다.

음악으로 입시에 대한 압박을 덜어낸 덕일까 스페인어 과로 대학 진학을 한다고 전해 들었다. 음악이 아닌 쪽으로 전공을 택한 이유는.
그동안 음악을 좋아하긴 했는데 실용음악과를 간다거나 학업을 중단하고 음악에 매진하겠다는 생각까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일단 하던 공부에 집중하여 일반 학과로 진학을 결정했다. 그리고 대학교를 통해 더 많은 걸 다양한 시각으로 듣고 배우고 싶다. 스페인어를 배워두면 나중에 라틴 음악을 비롯한 남미 지역의 문화까지도 잘 흡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여러모로 기대가 된다.

앞으로 시도해 보고 싶은 음악 스타일이 있다면.
알앤비, 발라드, 록으로 나눌 것 없이 장르를 특정하지 않으면서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이것저것 도전해 볼 생각이다. 당장엔 규리만의 스타일이 없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있을 수 있겠지만 많은 시행착오를 거친다면 언젠가 나만의 색깔을 확립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2023년 드디어 20대를 맞이하게 됐다. 청춘의 한 페이지를 어떤 내용으로 써 내려갈 예정인지.
아직 특별히 정해둔 건 없지만 일단 스무 살이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우 벅차다. 그저 멋지게 채워나가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첫 번째 작품에선 마냥 맑고 명랑한 느낌이 강했다면 앞으로는 경험을 쌓아가면서 질적으로 성숙한 음악을 들려드릴 수 있도록 차근차근 발전해 나가고자 한다. 하나씩 하나씩 채워나갈 작은 기록들에 많은 관심 가져주셨으면 정말 감사하겠다.

가요계에 어떤 뮤지션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과거 인터뷰에서도 말한 적이 있지만 나는 모든 사람에게 별빛이고 싶다. 낮에는 밝아서 안 보일 뿐이지 별은 언제나 하늘 위에 떠 있다. 내 음악도 항상 사람들 곁에 머무르면서 그들이 지쳐 어두워졌을 때 옆에서 위로와 용기의 빛을 밝혀줄 수 있는 존재로 성장하고 싶다.

끝으로 규리가 음악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음악 할 때 가장 행복하다. 그리고 이런 감정을 막연한 글이 아니라 멜로디와 노랫말이 어우러진 내 노래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달하고 싶다.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라 아직은 들어주시는 분이 많이 없겠지만 나중에 더 알려졌을 때 내가 그동안 쌓아왔던 이야기를 듣고 같이 공감해 주셨으면 좋겠다.

진행: 소승근, 장준환, 임동엽, 정다열
사진: 임동엽
정리: 정다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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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이(SAAY) 인터뷰

사람이 가장 멋있어 보이는 순간은 언제일까. 쎄이(SAAY)와 대화를 나누며 깨달았다. 그것은 자신이 걸어온 발자취와 빚어낸 결과물에 자부심을 느낄 때라고. 유년 시절 가족의 이야기부터 시작해 20대의 궤적을 담은 정규 2집 < S:INEMA >, 그리고 앞으로의 포부까지 드러내는 그에게서는 하나의 예술가로서 가진 숭고한 열망이 보였다.

스스로 말이 정말 많은 ‘투 머치 토커’라며 시작부터 너스레를 떨었던 쎄이. 유니버설 뮤직 사무실에서 1시간 남짓 이어졌던 인터뷰는 진지한 문답이 오가는 가운데 소탈한 웃음이 함께했던 시간이었다. 추가 질문까지 능청스레 유도할 정도로 음악에 진심인 아티스트를 보며 속으로 연신 감탄을 삼켰다.

신보 < S:INEMA >를 들고 돌아왔다. 어떤 작품인지 소개 부탁한다.
내 20대를 녹여낸 앨범으로 일종의 결산이자 내 20대에게 마무리 인사를 하는 역할이다. 우여곡절이 굉장히 많았는데 크게 무너질 수 있던 상황 속에서도 그 시기를 견뎌준 스스로에게 정말 고마웠다. 그리고 비슷한 상황에 있는 분들에게 나도 그래봤고 그래도 괜찮다는 위로도 해주려 했다. 실제로 소셜 미디어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메시지를 보내는 분들이 많다. 일일이 답을 해드릴 수 없는 만큼 음악으로 대신 ‘너무 자책하지 말라는’ 그런 해답을 드리고자 했다.

앨범 타이틀에도 표했듯 ‘영화’ 콘셉트를 취했다.
이번 작품을 구상할 때 모든 이야기가 모이니 한 편의 영화처럼 보였다. 쎄이의 시네마라는 의미로 ‘Cinema(영화)’의 첫 글자를 ‘S’로 바꿨고, 중간에 있는 두 점(:)은 10대부터 20대까지를 표현하는 상징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20대에는 특히 의지가 넘쳐 불필요한 부분까지 날카로웠던 적이 많았다. 백지 스케치북 같은 나 자신을 너무 다양한 컬러로 물들이려고 애썼는데,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서른이 되어 돌아보니 한 편의 흑백 영화 필름 같아서 뮤직비디오까지 전부 흑백화 시켰다. 경험과 노하우가 많이 쌓였으니 이제는 다른 열린 시각으로 열심히 색을 채워가겠다.

‘Interstellar’, ‘Sin City’, ‘ROCKY’처럼 영화 제목을 딴 곡들이 많다.
< 씬 시티 >의 경우 정말 또 나오기 힘든, 천재적인 작품 같다. 컬러 영화 시대에 일부 포인트만 빼고 전체를 흑백으로 만든 감독은 오늘날의 사회를 미리 본 느낌이다. ‘ROCKY’도 비슷한 맥락에서 록 장르의 스피릿에 영화 < 록키 >를 겹쳤다. 세상의 바닥을 찍고 모두가 나를 향해 칼을 겨눈 듯했을 때 썼던 곡으로, 열 번 쓰러지면 열한 번 일어나는 주인공의 메시지를 결합했다. 안 좋은 기억까지 꺼내 음악으로 빚는 과정이 내가 불쌍하게 보일 정도로 힘들었지만 끝내고 나니 사우나에서 땀을 뺀 듯이 개운했다

< 인터스텔라 >의 경우 할머니께서 말씀해 주신 윤회 사상이 온전히 투영된 영화라 생각한다. ‘그래도 우린 답을 찾을 것이다’라는 메시지가, 어떻게 보면 답은 정해져 있으니 결국 우리 모두 그곳으로 향할 뿐이라는 말이라 해석했다.

인트로 트랙 ‘Everything comes n goes’에 그 메시지가 잘 담겨있는 듯하다.
할머니께선 돌아가시기 한참 전부터 어디 묻거나 하는 대신 아무 곳에나 뿌려 달라고 하셨다. 모든 것은 돌고 도니 모르는 대로 살아가면 되고 한 번에 담아두려 하지 말라는 인생관을 항상 강조하셨다. 임종 후에 1년 가까이 힘들어하다가 < 인터스텔라 >를 여러 번 돌려 보면서 그래도 어딘가 계실 할머니를 떠올리며 슬픔을 아름답게 승화하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초반부의 ‘Everything comes n goes’와 ‘Interstellar’가 신보의 중심을 튼튼하게 지탱하고 있다.

영화적 요소를 들여와서인지 러닝타임도 1시간이 넘는다.
아티스트라면 앨범을 그냥 툭툭 내뱉으면 안 되고 사명감이 뚜렷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정규 앨범을 끝까지 고집하는 이유기도 하다. 자라오는 과정에서 브랜디, 프린스, 마이클 잭슨 등의 정규 앨범을 늘 기다리며 살았다. 확고한 자신만의 정체성을 앨범 전체의 스토리에 풀어내듯 나도 여러 곡에 걸쳐 다양한 경험과 메시지를 담는 앨범 아티스트가 되려 했다.

정규 1집 < CLAASSIC > 발매 이후 3개월 동안 의도적으로 음악과 멀리 떨어져 방전 상태로 지내다, 그 이후 바로 2집을 준비했다. 순수하게 이번 작품을 위해서 70여 곡 정도를 썼다. 원래는 20대를 보내는 앨범이라 딱 스무 곡만 수록하려 했는데, 많이들 좋아하시는 곡이라 ‘Summer In Love’ 솔로 버전을 특별히 보너스 트랙으로 넣었다.

싱글 단위 소비가 득세하는 시점에 쉬운 선택은 아니었을 텐데.
정규 앨범을 안 내는 추세도 있지만 회사의 지원 부재 등 여러 여건상 못 내거나 아예 어떻게 만들지 모르는 경우도 있다. 감사하게도 유니버설 사장님은 정규 앨범을 중요하게 여기는 분이다. 음악적으로 열린 분을 만나 정말 행운이다.

나에게는 정규 앨범이 일종의 명함이다. 제작에 엄청난 노력이 들어가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정규 앨범 내는 분들을 정말 존경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특별히 뛰어난 것은 아니다. 나는 삶을 음악으로 잘 포장하는 재능이 있을 뿐이다. 각자 대단한 이야기를 지닌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이다.

견고한 짜임새를 갖추는 중에도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
경험을 진솔하게 드러내려 했다. 한글은 참 예쁜 언어지만, 혹시라도 가사로 풀어낼 때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전달이 될까 봐 익숙한 영어로 많이 쓰게 됐다. 돌려 말하지 않는 만큼 듣는 입장에서도 돌려 받아들이지 않도록 쉬운 단어를 많이 찾는다.

쎄이(SAAY)라는 활동명처럼 들려주고 싶은 말이 정말 많은 것 같다.
음악으로 ‘말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의미를 담은 예명이다. 그룹 활동도 하고, 프로듀서로도 일하다 유니버설 뮤직에 들어와 솔로 아티스트로 전향하면서 조금 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플러스 A’의 의미로 사이에 A를 추가했다. 그리고 AA를 거꾸로 뒤집으면 눈 모양이 되듯이, 그저 ‘들을 수 있는 음악’이 아닌 ‘보여줄 수 있는 음악’을 하려는 포부도 담겨 있다.

그래서인지 시각적인 부분도 무시할 수 없다. 타이틀곡 ‘Talk 2 Me Nice’의 뮤직비디오에서 직접 분한 남성 캐릭터는 마이클 잭슨의 ‘Smooth criminal’이 스쳐가고 여성 캐릭터는 에이미 와인하우스가 떠오른다.
구체적인 레퍼런스를 잡고 작업하는 편은 아닌데 우연히 그런 그림들이 겹친 느낌이다. 남성 인물은 영화 < 씬 시티 >에서 여자 주인공을 끝까지 찾으려 하는 남자 주인공의 정장 이미지를 가져왔고, 여성 인물은 내 머릿속 할리우드의 빈티지 캐릭터였다. 물론 마이클 잭슨과 에이미 와인하우스, 두 사람 모두 내 음악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아티스트임에는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쎄이를 음악가로 이끈 가수 혹은 음반은 무엇인가.
가장 먼저 마이클 잭슨의 < Bad >. 이유가 필요한가. 조금 더 꼽자면, 스티비 원더가 참여했던 라파엘 사딕(Raphael Saadiq)의 < The Way I See It >, 프린스의 < Purple Rain >, 디안젤로의 < Voodoo >도 빼놓을 수가 없다. 어스 윈드 앤 파이어는 모든 앨범이 좋지만 그래도 ‘September’가 있는 < The Best Of Earth, Wind & Fire, Vol. 1 >로 올리고 싶다.

여러 뮤지션들의 양분을 흡수한 쎄이의 음악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가요계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따라붙는 수식어가 많았다. 하지만 나는 원체 휘둘리는 성격이 아니라서 무언가에 맞춰 가기 보다 그냥 가장 ‘쎄이’스러운 음악을 하고 있다. 늘 세상에 존재하면서도 확실한 선을 지닌 수평선 같은 음악을 하고픈 사람이라 스스로를 칭한다. 첫 믹스테이프 < HORIZON : THE MIXTAPE >도 그런 의미였다. 음악을 통해 어디서든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본인 음악의 주체로 자리하면서도 데뷔 때부터 프로듀스 디즈(DEEZ)와 꾸준히 합을 맞추고 있다.
원래는 디즈의 제자로 시작했다. 당시 한 기획사에 작곡가로 들어갔는데, 그의 겸손한 모습을 보고 최연소 작곡가라는 타이틀에 조금은 오만했던 마음을 내려놓고 음악을 다시 배웠다. 특히 물질적인 것을 떠나 인간이 품기에 음악이 얼마나 위대하고 큰 존재인지를 깨달았다. 우리는 그저 음악의 에너지가 왔을 때 이를 잠시 녹여내는 도구라 생각한다. 이런 자세로 디즈에게 오랫동안 트레이닝을 받다 보니 사제 관계에서 점차 파트너까지 올라오게 되었다.

어머니께선 국악 학원을 운영하셨고 형제자매 역시 음악을 했다고 들었다.
음악에 관해선 1부터 100까지 모두 가족 영향을 받은 케이스로, 가장 먼저 국악 학원을 크게 운영했던 어머니의 3~400명 제자 중 하나였다. 아버지도 본업 외에도 통기타를 들고 다니며 작곡, 작사에 시와 사진 작업까지 하셨다. 부모님을 통해 예술적 환경에 가장 첫 번째로 노출이 된 셈이다.

형제자매로는 언니와 오빠가 있는데, 오빠는 내게 메가데스, 엑스재팬 등 하드한 밴드 음악의 영향을 많이 준 사람이다. 언니와는 중학생 때 같은 춤 동아리 출신으로 댄서 생활을 4년 정도 함께 했다. 나는 그렇게 국악부터 어쿠스틱, 메탈, 댄스 등 모든 음악을 계승한 종합체였다.

국악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듣고 싶다.
어머니는 판소리부터 한국무용, 사물놀이까지 국악의 전 분야를 섭렵하신 분으로 김덕수 선생님의 사물놀이패 공연에도 참여하신 적이 있다. 보통 어린아이들에게 첫 음악은 동요이기 마련인데 나는 국악을 가장 먼저 배웠다. 지금 무대 위에서의 손짓 등은 한국무용의 선이, 약간 끓는 듯한 발성에는 판소리가 녹아 있다.

뻗어 나갈 수 있는 갈래가 다양했음에도 대중음악, 특히 알앤비 장르를 택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
부모님이 잭슨 파이브 시절부터 마이클 잭슨을 굉장히 좋아하셨다. 설거지를 할 때에나 업무를 보실 때에도 TV에 관련 영상을 틀어 놓을 정도였다. 자연스럽게 그 음악을 따라 흥얼거리다 보니 팝을 배웠고, 마이클 잭슨을 연구하니 프린스까지 연결되어 알앤비로 기틀이 잡혔다. 가수라는 직업도, 마이클 잭슨처럼 무대 위에서 춤과 노래로 내 메시지를 주고 싶어 꿈꾸게 되었다.

대중음악으로의 전향에 대한 부모님의 생각이 어땠을지 궁금하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판소리를 배우던 중 득음 과정에서 내가 너무 힘들어했다. 목이 상할까 하는 걱정도 크셔서 다른 영역으로 오히려 나를 열어 주셨다. 춤추고 노래하는 사람들에 대한 시각이 좋지 않았을 때였음에도 많이 지원해 주셨고, 나 또한 춤을 추면서도 온갖 반장은 도맡아 하는 모범생으로 살았다.

각기 다른 문화들을 수용하면서 음악적으로 체득한 부분도 분명 있을 것 같다.
부모님이 한국적인 뿌리는 지키되 다양한 요소를 많이 만나보라고 기회를 적극 주셨다. 아버지 지인이 계셨던 뉴욕 윌리엄스버그에 가서 홈스쿨링을 했는데, 당시 아티스트라면 거쳐가야 하는 스타 등용문 같은 도시라 그래피티부터 버스킹까지 예술인의 문화가 잘 잡혀 있었다. 길을 걷다 노래하고 싶으면 그냥 서서 노래하는 그런 환경에 물들었다. 지금도 종종 작업 중에 스트레스를 받으면 음악을 직업이 아닌 삶 속에서 풀어내는 그때 그곳의 문화를 추억하기도 한다.

첫 정규 앨범 < CLAASSIC >에서 인생의 3요소로 시간, 에너지, 그리고 사랑을 꼽았다. 4년이 흐른 지금의 관점은 어떠한가.
지금도 똑같다. 시간이 있고, 견딜 수 있는 에너지가 있고, 함께 안아줄 수 있는 사랑이 있다면 사람이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 같다. 아마 죽을 때까지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 것 같다. 차이점이 있다면 시야가 좀 넓어진 정도다.

새로 도전하고자 하는 영역이 있다면.
시각적인 부분을 중요하게 여기고 디자인적으로 의미 부여하는 걸 좋아해서 최근 그래픽 디자인을 배우고 있다. 지금도 뮤직비디오 시놉시스나 앨범 커버 등의 작업에 다 참여는 하지만, 조금 더 다채롭게 표현해 보고 싶다는 생각에 시작하게 되었다. 보여주는 음악을 더욱 세련되게 다듬어 이른바 ‘4D 음악’으로 발전시키고자 한다.

과거 국악의 장단을 접목한 팝 넘버 ‘ZGZG’처럼 멋들어진 댄스 곡을 기대해 봐도 될지.
퍼포먼스는 평생 놓지 못한다. 그런 스타일의 곡이 더 있었는데, 정말 아까운 곡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다른 팀에게 보냈다. 원래는 앨범에 수록하려 했으나 백현이 정말 잘 소화해 준 ‘Bambi’를 보고, 어쩌면 내가 끝까지 쥐고 있으려는 고집이 욕심일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가끔씩은 곡을 놓아줄 줄도 알아야겠더라.

최근 재밌게 들었던 앨범은 무엇인가.
국내에서는 카더가든의 < Diamond >가 인상 깊었다. 워낙 좋아하는 분이라 콜라보레이션도 하고 싶은데, 일단 그전에 만나서 대화부터 나누면 좋겠다. 해외에서는 비욘세의 < Renaissance >와 실크 소닉의 < An Evening With Silk Sonic >이 근래 가장 즐겨 듣는 앨범이다. 여담이지만 롤모델인 어셔나 저스틴 팀버레이크와도 나중에 같이 작업을 하고 싶다.

앞으로의 활동 각오를 다진다면.
다가올 12월 15일에 내 이름을 걸고 하는 첫 단독 공연이 있어 열심히 준비 중이다. 그리고 작업 기간이 길었던 만큼 당분간은 국내외를 넘나들며 앨범 활동도 이어 나갈 계획에 있다. 항상 해왔던 것처럼 작사/작곡, 프로듀서로도 열심히 일하면서 쎄이라는 이름을 안 들을 수 없도록 하겠다.

진행: 장준환, 정다열, 정수민, 한성현
정리: 한성현, 장준환, 정다열
사진: 정다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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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35 배드램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서른다섯 번째 주인공은 현대 사회를 음악으로 그려내는 4인조 혼성 밴드 배드램이다.

절대적인 권위에 괜한 반항심이 피어오른 적이 있지 않은가. ‘나쁜 산양(Bad Lamb)’과 ‘난리, 대혼란(Bedlam)’, 중의를 품고 있는 밴드 배드램은 가끔씩 관성처럼 터져 나오는 이 위험한 기질을 억누르지 않는다. ‘거친 사운드를 표방하되 절대 존재를 향한 믿음을 조소하겠다’라고 말하는 이들의 핵심은 어떤 대상에 대한 맹신을 지양하고 나아가 자기 자신이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시대정신을 전파하기 위해 배드램은 오늘도 발걸음을 재촉한다. 정규 앨범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EP < Frightful Waves >(2020)를 시작으로 2년 연속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록 부문 후보에 이름을 올리고 있고, 찬란한 기세를 몰아 올해 10월 말에 정규 1집 < Universal Anxiety >를 발표했다. 물론 이번에도 쉽지 않다. 쌀쌀한 사색에 잠기게 되는 가을의 끝, 현학적 음악 저널리즘을 펼치고 있는 네 명의 현대인과 함께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다각적으로 바라보았다.

▶왼쪽부터 이동원(보컬, 기타), 편지효(기타), 김소연(베이스)

첫 정규작의 주제는 ‘보편적 불안’이다. 앨범 소개글에 ‘고립계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한다’라는 열역학 제2법칙을 적어두기도 했는데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작품인가.
이동원 : 일단 나는 문과다. (웃음) 엔트로피에서 집중한 건 무질서 상태로 돌아가려는 비가역적인 방향성이다. 시간이 지나 무질서에 수렴할 때 결국 마주하게 되는 것을 불안이라 보고, 현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감정을 ‘보편적 불안’이라는 표현으로 축약했다. SNS 아이디로 썼을 정도로 오래도록 구상해 온 개념이다.

곡 작업은 보통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편지효 : 배드램은 동원이 형과 내가 이끌어 가는 듀얼코어 시스템인데 둘의 작업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 동원이 형은 퀄리티가 조금이라도 성에 차지 않으면 일정에 관계없이 멈추는데 나는 스케줄을 연, 월, 주 단위로 짜놓고 기한에 맞춰 최선의 근사치를 만드는 편이다. 서로 다른 관점이 공존하면서 적절히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팀이 유지되고 있다.

이동원 : 누구 하나 톡 튀지 않고 정확히 4분의 1씩 각자의 방향으로 당겨서 아슬아슬한 듯하면서도 팽팽하게 밸런스가 잡혀있다. 그리고 우리 팀은 따로 앨범 기획 회의를 하지 않을 정도로 규칙이나 규율 같은 게 없다. 대부분 체계를 갖춰야 나름의 결과물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밴드 안에서만큼은 그렇지 않다.

현대 사회를 투영하는 가사만큼 이를 전달하는 언어도 눈여겨보게 된다. 대부분 영어로 부르다가도 몇몇 곡에선 한글로 메시지를 전하는데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하다.
이동원 :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은 변함없다. 어떤 음악 내에서 말의 맛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익숙한 질감에 맞춰서 쓴 편이다. 살면서 들어온 음악 대부분이 영미권 쪽이다 보니 아직 한글 특유의 분절되는 느낌을 자연스럽게 끌고 가기가 힘들다. 차차 극복해 나가야 하는 부분이다.

타이틀곡 ‘Love, lies, bleeding’은 6분짜리인데다 전주만 1분 40초다. 길이를 늘려 드라마틱한 구성을 취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이동원 :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 대부분 러닝타임이 2시간 내외인데 만약 1시간밖에 못 즐겼다면 지불한 금액이 매우 아까울 것이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소비자들이 시간을 들여서 곡 하나를 듣는데 아쉬운 감상으로 끝나지 않길 바란다. 보통 그 시간을 3~4분으로 정하겠지만 내 기준엔 5분 정도가 합당하다.

김소연 : 꼭 우리 노래라서가 아니라 배드램 음악을 들으면 5분이 넘는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뒤의 핵심을 위한 예열 과정이 아닐까. 덕분에 후반부에 더욱 폭발적인 울림이 전해진다고 본다.

편지효 : 숏폼 콘텐츠 시대다 보니 몇 초 안에 결판내야 하는 게 너무 많다. 근데 우리의 얘기는 짧게 할 수 없을뿐더러 가능하더라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정리하면 곡이 긴 이유는 하이라이트에 더 설득력을 주기 위함이다. 모든 구간이 맡은 기능을 충실히 이행한다면 6분도 지루하지 않다. 배드램의 음악은 분명 그렇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과거 ‘Blessing of Ganesha’나 이번 ‘Valley of the Pharaohs’처럼 배드램의 음악에선 종종 오리엔탈 풍의 주술 색채가 강하게 드러난다.
편지효 : 주술에 관한 트랙은 내 담당이다. ‘파라오의 협곡’은 강남역 한복판이나 미국 대도시처럼 무너지지 않는 거대 자본의 산물을 비유한 표현이다. 자본주의 관점에서 인간이 두려워하는 절대 존재를 드러내고 싶었고 힘없는 예술가가 무너뜨릴 수 없는 견고한 철옹성을 떠올렸다. 그 과정에서 처음엔 곡 제목을 메트로폴리스라고 지었는데 세련된 느낌으로 한 번 꼬아서 시각화한 것이다.

이동원 : 이런 이색적인 요소를 끌어왔을 때 하는 우리도 즐겁고 듣는 청자도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트랙 순서를 배치할 때 좋은 징검다리 역할을 해줬다. 너무나 이질적인 두 곡 사이를 윤활성 있게 이어주는 식으로 활용했다.

이동원은 앨범 아트 크레디트에 항상 이름을 올리고 있다. 어떤 방식으로 참여하고 있는 건지.
이동원 : 대부분의 인디밴드들처럼 가성비를 추구하다 보니 전문 일러스트레이터를 고용하는 방향보다는 우리끼리 해낼 수 있는 방법을 찾곤 한다. 이번 앨범 아트는 요즘 유행하는 AI가 대신 그려준 그림이다. 우리가 설정한 핵심 키워드들을 입력하면 인공지능이 나름의 계산을 거쳐 결과물을 보여주는데, 그렇게 한 30~40번을 돌려보면서 마음에 드는 조각들을 모아 포토샵으로 아트워크 콜라주를 만들었다.

기타리스트 편지효가 사운드 메이킹에서 중점을 두는 부분은.
편지효 : 확신이다. 확신이 없으면 안 치거나 치고 버린다. 확신이 있는 줄 알았는데 실상이 그게 아니었다면 스스로에게도 거짓말을 한 셈이라 화가 난다. 그래서 공연 전에 항상 내 컨디션을 알아야 하고, 그에 따른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하다. 가장 연출하기 쉬운 게 분노다. 내게 상처 줬던 사람이나 기분 나빴던 일을 억지로 생각해가면서 감정을 끌어올릴 때도 꽤 있다.

팀 색깔만 봤을 때 여성 베이시스트 김소연의 존재가 상징적으로 다가온다. 베이스의 매력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김소연 : 주관적이지만 밴드에서 여성이 제일 많은 포지션은 베이스라고 본다. 왠지는 나도 정확히 모르겠지만 톤의 대비가 아닐까 싶다. 발성 음역대가 높은 여자들이 그에 반대되는 저음에 더 끌리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왼쪽부터 이동원(보컬, 기타), 김소연(베이스), 편지효(기타), 최주성(드럼)

아쉽게도 드럼을 맡고 있는 최주성이 본업 때문에 자리에 함께 하지 못했다. 네 명 모두 일과 음악을 겸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일정은 보통 어떤 식으로 조율하는지.
편지효 : 중요한 공연이 있을 때마다 반차 혹은 휴가를 낸다. 보통 낮부터 리허설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까 불가피한 선택이다. 언제 어떤 공연이 잡힐지 몰라서 연차랑 휴가를 아껴놓고만 있다가 연말에 다 못 쓰고 지나갈 때도 있다.

본업과 음악 사이의 균형은 어떻게 잡고 있는지.
이동원 : 모든 뮤지션들이 별도의 직업을 가졌으면 좋겠다. 양질의 창작물을 꾸준히 만들기 위해선 결국 안정적인 일자리가 필요하다. 직장에서 쓰는 에너지를 최대한 아끼고 그 힘을 열심히 모아서 하고 싶은 것에 투자하려고 노력 중이다.

최주성 : 일도 중요하지만 우선 가정에 시간을 맞춰야 밴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어느 정도 금전적으로 안정이 되어야 음악 생활을 하는데 지장이 없다. 물론 지금의 내가 그렇지는 못해서 많은 애로사항이 뒤따른다.

음악적으로 영향을 준 아티스트나 앨범은 무엇인가.
이동원 : 내가 밴드에서 맡고 있는 역할 별로 나눠서 정리한다면 보컬 쪽은 미국 얼터너티브 메탈 밴드 툴의 보컬리스트인 메이너드 제임스 키넌, 그리고 하드 록 그룹 사운드가든과 오디오슬레이브의 보컬 크리스 코넬을 뽑는다. 작·편곡 면에선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라디오헤드가 최고다. 마지막으로 태도에 있어 펄 잼의 에디 베더와 브리더스의 프론트우먼 킴 딜을 음악적 부모로 삼고 있다.

김소연 : 음악 하는 사람으로서 롤 모델은 포 겟 미 어 낫츠(Four Get Me A Nots)라는 일본 밴드의 기타리스트 타카하시 치에다. 얼마 전에 오사카까지 직접 가서 공연도 보고 왔다. 요즘 내 삶의 주제는 무언가를 힘껏 하는 거다. 노래를 못 해도, 춤을 못 춰도 뭐든 최선을 다해 있는 힘껏 하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데 내가 본 사람 중에선 최고로 열심히 하는 분이라 생각한다.

편지효 : 어렸을 때 기타리스트 팻 메시니와 베이시스트 찰리 헤이든이 같이 작업한 < Beyond the Missouri Sky >를 듣고 서사를 풀어가는 화법을 배웠다. 음악은 점이 아닌 선이다. 지나온 지점들을 잇는 순간 여정에 스토리가 생기는데 이 앨범을 통해 그런 방식들을 익혔다. 연주적인 측면에선 밴 헤일런을 굉장히 좋아한다. 서커스 이상의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와중에 호흡이 예술이다. 극한의 테크닉보다 적절한 타이밍에 소리를 꽂아 넣는 게 중요하단 걸 알려준 아티스트다.

최주성 : 엑스 재팬의 기타리스트인 히데와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드러머 채드 스미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동원과 최주성은 인천 출신이다. 인천과 부평에 대한 기억은 어떻게 남아 있는지.
이동원 : 부평구민으로 지낸 지 30년이 넘어가고 있는데 부평의 자랑거리로 매년 열리는 부평 풍물 축제를 빼놓을 수 없다. 락캠프 같은 클럽들이 있는 줄 몰랐던 학창 시절에 내가 라이브 음악을 접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장소였다. 그때 또래 친구들의 공연은 물론이고 페루 출신 뮤지션들의 전통 레퍼토리도 관람할 수 있었다. 여러모로 마음이 따뜻해지는 행사다.

최주성 : 유년 시절엔 음악을 전혀 안 좋아해서 특별히 남아있는 기억은 없다. 대신 밴드 건아들의 객원 드러머였던 선생님께 드럼을 배울 때 인천이 살아있는 음악의 성지라고 말씀해 주신 적이 있고, 인천을 대표하는 드러머인 노호현 님께서도 메탈과 록의 시작점이라고 언급해 주셨다.

인천 지역이 유독 록 음악에 강한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이동원 : 동인천과 주안에서 성장한 밴드들부터 음악 감상실을 통해 퍼진 커뮤니티까지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세대임에도 선배들이 남긴 유산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주한미군이 주둔했던 부평 애스컴이다. 미국에 뉴올리언스와 멤피스가 있다면 한국 대중음악이 태동한 도시로 인천을 빼놓을 수 없다.

편지효 : 항구 도시는 기본적으로 기가 부딪히는 곳이다. 다양한 문물들이 오고 가며 섞이게 되는데 거기서 우수한 것들만 살아남아 발전하게 된다. 미8군을 중심으로 전달된 문화가 우리에게 계속 축적되면서 지금의 한국 음악이 정착할 수 있었다고 본다.

인천 출신이 아닌 김소연과 편지효는 2019 펜타포트 무대를 통해 그 열기를 느낀 적이 있다.
김소연 : 내 인생에서 제일 처음으로 관람했던 공연이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이다. 시골에서 살던 아이가 그렇게 큰 규모의 축제에 가서 즐겼던 것도 신기한데 어쩌다 보니 10년 정도 후 내가 그 무대에 올라가게 됐다. 쨍한 햇빛 아래서 관객분들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참 묘했다.

편지효 : 요즘 탁 트인 공간이 거의 없다. 그런 면에서 인천은 이런 뜻깊은 공간, 문화생활에 돈을 아끼지 않는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리고 이모 댁이 동인천 신포동 쪽이다. 인근 차이나타운을 비롯해서 그 동네엔 아직 개화기의 향기가 남아있다. 오래된 양식의 건물들을 보면서 그때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는 건 인생을 살아가고, 또 음악을 하는데 굉장한 도움이 된다.

2020년 팬데믹으로 인해 근 2년간 공연계가 많이 움츠러들었었다. 한국대중음악상 후보에도 이름을 올리면서 활동을 이어가기 좋은 타이밍이었을 텐데 아쉬움은 없었는지.
이동원 : 아쉬움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고무됐었다. 여태까지 음악 활동을 해오면서 공허함을 느낄 법한 시간들이 있었는데 그걸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우리를 따뜻하게 품어주는 사람들은 음악을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그 관심이 조금씩 모이다 보면 몸집도 자연스레 커져 있을 것이다.

어쨌든 코로나가 비교적 잠잠해지면서 공연계도 활력을 되찾고 있다. 앞으로의 활동 계획은.
이동원 :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내년 1월에 이번 앨범 쇼케이스를 단독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그래서 그 기획에 최대한 중점을 두고 있고 음원에 담긴 느낌 그대로 라이브로 전달해 드리기 위해 열심히 준비 중이다. 연말에 클럽 공연도 많이 준비되어 있고 특히 12월 30일엔 부평아트센터에서 공연을 한다. 내 홈타운에 함께 살고 있는 동네 이웃분들께서 많이 찾아주셨으면 좋겠다.

앞으로 배드램이 들려줄 이야기는 어떤 내용으로 채울 예정인가.
이동원 : 저널리즘의 생명은 시간, 즉 현재에 달려 있다. 물론 우리가 따끈따끈한 특종을 주제로 앨범을 낼 수는 없으니 차기작이 발매될 시점에 우리 눈으로 바라본 세상을 그리게 될 것 같다.

편지효 : 다음 앨범을 언제 발표할지는 우리도 모르기 때문에 사회에서 무슨 일이 발생하는지 지켜보면서 떠오른 단상들을 차곡차곡 모아둘 예정이다.

진행: 정다열, 장준환, 염동교, 손민현
정리: 정다열
사진: 장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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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34 파제(Pa.je)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서른네 번째 주인공은 관성에 갇히지 않고 음악으로 내 이야기를 하는 뮤지션 파제(Pa.je)다.

뮤지션 파제(Pa.je)는 음악가가 어디를 향해 어떻게 움직이는지 묻게 한다. 차 막히는 주말 아침, 홍대 인근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저녁에 있을 공연을 위해 거주지인 인천에서 서울로 막 도착했다고 했다. 카페를 운영하고, 음악을 만들고, 공연을 열고, 무대에 서는 그는 바쁘지만 편안한 인상으로 질의에 답했다.

군 제대 후, 본격적으로 기타를 잡고(그의 기타 실력은 정말 엄청나다!)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는 그에게 ‘음악이란 무엇인가’ 물으니 “결국에는 내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 중간 매개물”이란 답이 돌아왔다. 음악이 목표가 아닌 수단이라는 예상치 못한 답변에서 그만큼 일상에 깊게 침투한 음악의 파워가 느껴지는 듯했다. 음악가는 어디를 향해 어떻게 움직이는가. 파제는 삶 속에서 음악과 함께, 음악을 곁에 두며, 담담하게 걸어 나간다.

2020년 연주곡으로 채워진 정규 음반 < Pa.je Archive >를 발매했고 8월 30일, 오랜만에 EP < 관성의 바깥 >을 발매했다.
작년에 음반을 하나 내긴 했다. (무엇이냐고 물으니) 홍대에서 긴 시간 같이 활동했던 뮤지션 ‘엉망’과 ‘포래스트’라는 팀명으로 < Piece Forest >를 냈다. 엉망이 노래를 부르고 내가 작곡, 편곡, 연주를 했다. 사실 < 관성의 바깥 > 녹음도 작년에 다 끝낸 상태였다. 2022년도에 다른 일이 무조건 많을 것으로 예상했기에 앨범에 대한 방향성을 고민하던 와중 인천문화재단에 좋은 지원사업이 떴고 다행이 지원받게 되어 < 관성의 바깥 >을 발매하게 되었다.

< 관성의 바깥 >과 관련된 공연 혹은 활동 계획이 있다면?
11월 19일에 인천에 있는 카페 겸 문화공간 ‘인천여관X루비살롱’에서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EP 중심의 공연은 아니고 그냥 파제라는 뮤지션이 해오던 지난 활동들의 연장선상으로 봐주면 좋겠다. < 관성의 바깥 >의 후속 공연은 아마 없지 않을까? 이번 음반은 연주자로서, 싱어송라이터로서 파제가 아니라, 마음 가볍게 시간이 날 때마다 만든 곡들을 묶어 발매했다. 작곡부터 그렇게 진행했다 보니 발매 이후의 공연을 염두 하지 않았다. (웃음)

‘관성의 바깥’이라는 음반 명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사람들이 인식하는 뮤지션 파제의 이미지가 있다. 기존 발매했던 ‘제주의 봄’과 같은 따스한 어쿠스틱 사운드의 음악이 있고, 버둥 혹은 다른 뮤지션들과 콜라보한 음반에서처럼 싱어송라이터, 포크 뮤지션으로서의 행보가 있다. 이것 말고 내가 가진 영역, 즉 우주가 상당히 큰데 그걸 보여주기가 사실 쉽지만은 않다. 그런 면에서 < 관성의 바깥 >은 내가 관성처럼 해오던 음악과는 확실히 다르지만 누가 들어도 파제의 노래임을 알 수 있게 만들었다.

앨범을 통해 관성의 바깥에 있는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었다면 이해가 쉬울까? 음반 커버를 보면 동그란 게 막 있는데 그게 나의 태양계다. 우리한테 관성은 태양계이지 않나. 애매한 위치에 모여있는 별들은 ‘관성의 바깥’을 표현한 거다. 태양계 밖에 있는 무언가를 드러내고 싶어, 디자인을 맡아 준 장희문과 상의 끝에 완성했다.

EP 수록곡 ‘사천진 걸음마’란 노래를 재밌게 들었다. 얼마 전 유튜브에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 영상을 올리기도 했던데.
친한 동생과 강릉에 놀러 갔었다. 동생이 혼자 컨셉을 잡고 걸어가다가 갑자기 카메라를 보고 인사를 하고, 또 걸어가며 장난을 치더라. 그때 문득 그냥 걸어가는 모습을 찍어보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계속 한 방향으로 씩씩하게 걸어가는 영상을 찍었고, 집에 와서 영상을 붙여보니 그 반복되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영상 클립을 먼저 따고 바로 이런 식의 곡을 만들겠다는 감이 왔다. 귀엽고 발랄하게 사운드를 뽑으려고 장난을 많이 친 노래다.

인천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쭉 음악 활동을 한 건가?
군대 빼고는 늘 인천에서 살았다. 심지어 군대도 용산 쪽이어서 인천을 관통하는 1호선을 타고 다녔다. (웃음)

음악 활동을 하기에 공연장 등 인천의 인프라는 어떤가?
형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록, 메탈이 주였던 1990~2000년대 초에는 구월동 쪽에 연습실도 많고 서울에서 인천 쪽으로 공연을 보러 오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활동하는 시기도 다르다 보니 내게는 너무 오래전 이야기다.

그 당시 음악을 했던 사람들은 이제 클럽을 차리거나 본인의 공간을 가질 수 있을 만한 나이가 됐다. 그러다 보니 인천에 헤비니스 부류의 공연장이 많이 생기는 것 같다. 그런 이유로 인천에 있는 어쿠스틱한 음악을 하는 뮤지션들이 주로 서울에 가서 활동하게 되는 것에 대해 아쉬움이 좀 크다.

인천에서 개인 카페를 운영하고 있고, 또 그곳에서 공연도 열었던 걸로 안다.
동료 뮤지션 단편선, 전유동, 이권형과 함께 공연했었다. 외곽의 넓은 공간에서 음악 하며 놀면 재밌겠다는 이야기를 이전부터 나눴고, 내가 운영하는 카페에서 이를 진행해보겠다는 결심을 한 뒤, 만날 때마다 조금씩 계획을 세웠다. 때마침 공고가 뜬 인천문화재단의 ‘시작공간일부’를 통해 청년 축제 사업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서울에서 관객도 많이 오고, 우리 카페 고객도 꽤 많이 현장을 찾아 즐기고 갔다. 다만, 정기적으로 공연을 제안하시는 분도 있는데 현실적으로 그건 힘들다. 기획 음악 장비 및 인력 구축, 관객 홍보 등 고민할 지점이 많기에 단순히 음악을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무턱대고 진행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인천에서 참여한 공연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 하나를 꼽아준다면?
콜트콜텍 노동자 음악제. (이)권형이 나를 섭외해서 엉망과 인천의 다른 밴드들과 주안역 앞에서 버스킹을 했었다. 그곳이 인구밀도가 높은 곳이긴 하지만 퇴근 시간대여서 아무도 우리 얘기를 안 들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발걸음을 멈췄다. 지나가던 학생들, 어른들까지 말이다.

요즘 아무리 세상이 각박해졌다고 해도 어떤 소리를, 메시지를 던졌을 때 시민들이 들어주는 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적어도 사람들이 진심을 들을 수 있는 시간과 마음의 여력이 있구나 하는 걸 배웠다고나 할까? 관심을 주는 것을 보고 사실 조금 놀라기까지 했다. 세상은 충분히 움직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 했다.

처음부터 ‘파제’란 활동명으로 음악 커리어를 시작한 게 아니라고.
2010년도에 전역하고 친구들이랑 밴드를 만들었다. 기존에 각자 속해있는 또 다른 밴드들이 있었고,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시간 맞추기가 어렵더라. 혼자라도 먼저 해야겠다 싶어 그룹을 나와 음악을 시작했다. 그때는 밴드 음악을 그냥 어쿠스틱 기타로 가져와서 하는 형태이다 보니 우울한 노래들이 많았다. 회색빛의, 회색 톤의 음악을 한다고 해서 ‘그레이톤’이라는 이름을 썼었다. 내 이미지랑 안 맞지 않나. (웃음) 2013년 후반부터 ‘파제’란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파제의 음악에서 기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기타는 언제부터 익힌 것인지.
2006년 11월 수능 끝난 날에 형한테 처음 배웠다. (실력이 뛰어나 어린 시절부터 친 것인 줄 알았다고 하니) 얼마 안 됐다. (웃음) 형은 일찍부터 음악을 하려고 하던 사람인데, 나는 그냥 ‘기타 치면서 데미안 라이스 노래 부르고 싶다’ 정도였다. 군대 막바지에 조금씩 기타를 치기 시작했고, 형을 통해 핑크 플로이드나 오아시스 등을 접하면서 영역을 넓히게 됐던 것 같다. 기타 솔로 같은 것도 따보고 하면서.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한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종류의 악기, 기타를 다루는 등 누구보다 음악 스펙트럼이 넓다.
한국에 플라멩코 단체가 있다. 내가 플라멩코를 좋아하는데 어떻게 하다 그 단체 선생님과 인연이 되어 스페인에 직접 가서 플라멩코를 배웠다. 그때 ‘파두’라는 포르투갈 장르를 알게 됐고, 터키에서는 ‘카눈’이란 악기를 배웠다. 그렇게 다양한 음악에 조금 더 관심을 두게 됐다. 물론 나는 그 소리를 단순히 내 음악에 잘 녹여내고 싶다는 측면에 가까워 적절한 연주법만 익힌 정도다. 프로 연주자만큼의 실력은 절대 아니다. (웃음) 그래도 그런 식으로 하면서 음악에 대한 지평이 넓어지다 보니까 조금 더 수월하게 음악을 만들고 진심을 더 담을 수 있게 된 건 확실하다. 전에는 많은 게 막연했고 음악 카피도 잘 안되고 그랬다.

파제를 대표할 수 있는 음악 혹은 음반을 한 장 뽑아준다면?
무조건 연주 앨범인 정규 1집 < Pa.je Archive >. 그 음반에 오랜 기간 내가 해오던 음악 스타일이 잘 녹아 있다. 곡을 쓰던 때와 현재 시점에서의 생각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과거보다 지금의 내가 더 나쁜 사람이, 더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거다. < Pa.je Archive >에는 당시에 내가 했던 생각과 마음이 온전히 들어있다. 존경도 애정도 때로는 아쉬움도 담기지 않았겠나. 그런 감정들을 나만의 방식으로 솔직하게 음반에 담았다. 

앞으로의 활동 계획도 궁금하다.
연주곡 중심의 음반을 한 2장 정도 발매하려고 생각 중이다. 실제로 곡을 꽤 만들긴 했는데 앨범을 내려면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중이다. 사실 음반 계획은 한 번에 네다섯 개씩 한다. 예를 들어 < Pa.je Archive 2 >가 있을 것이고, 또 다른 스타일의 연주곡 앨범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상황에 맞춰 조금 더 완성되고, 충분히 즐거운 앨범이 뽑힌다면 그때 작업물을 세상에 내놓지 않을까.

진행 : 박수진
정리 : 장준환, 박수진
사진 : 정다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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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33 이박사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서른 세 번째 주인공은 테크노와 뽕짝을 한국적인 맛으로 버무린 가수 이박사다.

유교 문화의 영향 때문일까, 우리는 신나고 재밌는 음악을 한껏 즐기다가도 한편으로는 경박하다며 곱지 않은 시선을 내비친다. 이박사에 대한 세간의 평가도 비슷했다. ‘몽키매직’을 비롯한 그의 유쾌함을 사랑하는 이들 맞은편에서는 ‘B급 정서’라며 독특한 캐릭터를 폄하하는 시선이 공존했다. 그러나 이박사는 온갖 코멘트에 개의치 않고 자신만의 길을 이어왔고, 이를 따라 이제는 그의 음악도 서서히 재발굴되고 있다.

한낮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번쩍거리는 화려한 의상을 입고 이즘을 만나준 이박사의 아우라는 스타 그 자체였다. 그에게는 모든 곳이 무대였다. 삶과 음악을 묻는 질문에 툭툭 명언을 남기며 시원시원한 말투로 인터뷰를 휘어잡은 거장과의 대화를 공개한다.

1973년도부터 음악을 시작했으니 올해로 거의 50년 째다. 여태까지의 음악 생활에 대한 스스로의 생각이 궁금하다.
음악을 한다는 것은 “일기예보”다. 짜여진 것이 아니라 갑자기 변하곤 하니까. 임기응변이나 기동력, 순발력이 필요하고 나는 처음부터 그렇게 예술을 했다. 원래 내 직업은 디자이너로, 결혼식 신랑 예복을 재단하고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 서로 다른 체형에 맞추고 내 기술도 개발하다 보니 음악도 자연스럽게 공연마다 나를 새롭게 맞췄다.

여태까지 가졌던 직업 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무엇인가.
관광 가이드다. 단풍이 나는 가을 아침 5시에 출발하고 새벽 1시에 돌아온다. 갔다 온 후에도 청소하고 버스에서 자면서 다음날 멘트를 외웠다. 몸도 피곤한데다 짖궃은 손님들도 많아 그런 것이 힘들었다. 그래도 저녁에 서울로 돌아올 때 버스에서 불 끈 채로 나이트 클럽처럼 노래 부르는 재미는 있었다.

당시 관광버스마다 있는 ‘메아리 전자’ 같은 음악 기기가 있었다. 코드만 누르면 그에 맞춰 남성은 마이너, 여성은 메이저 식으로 조성도 자동으로 나오는 형식이었다. 즉 이름만 우리가 몰랐을 뿐이지 테크노가 그때도 존재한 것이다. 이 리듬에 맞춰 내가 멜로디와 추임새를 만들어 넣었다. 같은 메이저 노래끼리 메들리로 엮어 150곡 정도 만들어 부르니 반응이 매우 좋았다.

그때의 경험이 본격적인 테크노로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1989년에 메들리 음반 녹음 당시에 청주 스튜디오에서 하루에 150곡을 모조리 녹음했다. 내 관광 가이드 모습을 본 음반 제작자의 요청에 하루에 10만원을 받고 작업했다. 160 BPM 이상으로 속도도 빠른 곡을 그렇게 빨리 완성하니 엔지니어도 놀랐다.

이박사 하면 떠오르게 되는 독창적인 추임새는 어떻게 체득한 것인가?
그냥 반주만 재생해서는 관광버스에서 재미가 없다. 내가 원체 끼가 있다 보니 음악만 듣고서도 입으로 자동으로 그런 추임새가 흘러나왔다. 이를 듣고 열광한 관광객들이 당시 이름을 붙여줬는데, 그게 바로 ‘신나는 이군’이었다.

가수 생활 초창기 이야기가 궁금하다.
1973년도 5월 KBS < 민속 백일장 >에 나갔다. 경기민요 부문에 출전했지만 우승자로 제주도에서 올라온 피리 연주자 등 다른 쟁쟁한 악기 연주자들에 밀려 그때는 아쉽게 떨어졌다. 그 이후 ‘배뱅이굿’의 대가 이은관 선생을 찾아갔으나 당시 공연으로 바쁘셨던 때라 만나 뵙지는 못했다. 대신 이창배 선생에게 향해 디자이너 생활로 바쁜 와중에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가 국악을 배웠다. 그러다 디자이너 생활에 싫증이 나 밤무대에서 가수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민요를 위해서는 옆에 코러스가 필요했다. 그보다는 혼자 할 수 있는 가요를 배워야겠다 싶어 이번에는 가수 나훈아의 음악을 제작한 임종수 선생을 찾아갔다.

종로에서 학원을 하시는 그분과 만나게 되면서 덩달아 한복남 선생님과 가수 방주연, 통기타 혼성듀오 ‘라나 에 로스포’의 한민 등과도 알게 되었다. 그곳에서 다섯 달 동안 악보 공부를 하고 다시 밤무대로 향해 한 달에 30만원 정도의 수입을 벌었다. 이때 내 소문이 퍼져 찾아온 연예부장이 여러 곳에 꽂아줘 하루에 많게는 열한 곳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그 이후의 행보가 결코 쉽지 않았던 것으로 안다.
‘신바람 이박사’라는 이름으로 방송국에 찾아가 활동을 하려 했지만 메들리 음악이라는 이유로 심의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좌절을 겪었지만 이기범 악단의 도움을 받아 MBC < 내고향 좋을씨고 >에 출연하게 되었다. 90년도부터는 아예 전속으로 활동하며 노래를 받았지만 내 성에 차지 않아 직접 만들었는데 이번에도 심의에서 떨어졌다.

그 다음에 간 TBS의 < 9595쇼 >에서 당시 MC였던 허참, 박세민의 옆에서 5~6개월 간 보조 진행자로 활동했다. 나중에는 허참의 뒤를 이어 MC를 맡을 뻔했으나 윗선에서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이후 한동안 주춤하다 1995년도 일본 소니를 통해 기회가 찾아왔다.

국내에서 가장 큰 호응을 얻은 ‘몽키매직’도 일본 곡으로 알고 있다.
원래 제목은 ‘원숭이 나무에 올라’였다. 95년도 공연 무대를 위해 일본에 갔을 당시 레퍼토리로 받은 150곡 중 하나였다. 그 많은 곡을 일주일만에 다 외워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그 와중에 한국어 가사를 내가 만들어야겠다 싶어서 직접 작사 제안을 했고, 그러면서 ‘몽키매직’이라는 제목이 탄생했다. 판권은 일본에 있다.

일본 노래 중에서는 ‘몽키매직’의 인기가 가장 높지만 코로나19 발발 전에 ‘야야야’라는 곡도 서서히 뜨기 시작했다. 과거와 달리 백댄서 없이 혼자 무대를 하다 보니 그런 모자람을 채우기 위해 즉흥적으로 만든 코러스였다. 지금은 전국적으로 중년 여성들의 품바나 난타 강습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당시 인기가 꽤 많았다. 그런 인기의 비결이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인기가 꽤 많았던 수준이 아니라 최고였다. 더군다나 일본은 음반 로열티가 높게 나오고 CD 구매도 활성화된 덕분에 돈도 많이 벌었다. 그리고 활동이 바쁜 탓에 그 많은 돈을 쓸 시간도 없었다.

일본 음악 특유의 느낌과 다르게 당기는 테크노 리듬으로 빠르게 간 것이 차별화 지점이 되어 인기를 끈 것 같다. 일본 측에서는 풀 밴드 구성을 선호했으나 나는 거부하고 그 대신 오르간 연주자와 함께 듀오를 이뤘다. 한국에서의 익숙한 방식이기도 했고 이목을 나에게 집중시키려는 전략이기도 했다. 이것이 잘 맞아 떨어져 소위 ‘대박’이 났다.

그쪽에서 빨간색으로 의상도 정해줬는데, 디자이너 출신이었던 나는 이것도 내 고집으로 양복을 입고 무대에 섰다. 멜로디는 일본 관객들에게 익숙했지만 박자도 빠르고, 가사도 내가 아는 한국어로 바꿨다. 맘에 들지 않는다면 전속 계약을 관두겠다 하니 결국 일본 측에서 논의를 하다, 그래도 익숙한 멜로디 때문에 충분히 먹힐 것이라며 내 손을 들어줬다.

익숙한 멜로디와 경쾌한 리듬의 적절한 조화가 성공을 이룬 것 같다. ‘재미의 전형’이다.
거기에 입으로 넣는 추임새까지 넣어 무대를 꾸리니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당시 1,500명 정도 되는 젊은 관객들이 비록 가사는 한국말이었어도 자신들이 아는 멜로디를 하니 신나서 꽹과리도 치고 엄청난 호응을 보여줬다. 원래 두 시간 공연을 앵콜 요청 때문에 두 시간 더 해 총 네 시간 동안 할 정도였다.

끝나고 내게 사인을 받으려는 줄도 길게 서있었다. 관객들 대부분은 여자였는데, 그 중에서도 또 절반은 음악을 하는 이들이었다. 내 독창성에 매료된 셈이다. 이후 함께 작업을 하자는 제의도 들어왔지만 언어의 차이도 있는데다, 내지르는 한국 스타일과 달리 맛있고 아기자기하게 부르는 일본 스타일이 맞지 않아 혼자 하겠다고 했다. 어쩌면 이런 생소함이 그들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 후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얻어 ‘한국적 테크노’라며 존경하는 시선도 있었지만 한편으로 언론에서는 ‘B급 문화’ 혹은 ‘엽기’라면서 깎아내리기도 했다.
관광 가이드 생활을 하면서 이미 많이 겪었던 일이었다. 손님들이 수고비도 주지 않으면서 부려먹는 경험도 종종 있었다. 이를 통해 내가 철칙을 하나 얻었다. ‘칭찬을 욕으로 듣고, 욕을 칭찬으로 듣는다.’

인천과의 연관점도 듣고 싶다.
어린 시절 취미가 있어 < TV쇼 진품명품 >에도 나오셨던 ‘장석’ 구서칠 선생님께 간석동에서 서예를 배운 적이 있다. 그렇게 인천에 한번 발을 들이니 장학회도 다니다가 나이트클럽에도 가게 되고 했다.

인천에 대한 이미지는 어떤가.
최고다. 인천에서는 나쁜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이박사는 열심히 사는 사람’, ‘부지런하다’ 같은 좋은 얘기만 들었다. 내가 실제로 남에게 피해주거나 하는 일도 없었지만. 그리고 공연 문화에서도 인천은 다르다. 타 지역에 비해 사람들이 흥이 많아 점잖지 않고 적극적이다. 즉 노는 문화가 강하다.

부평구문화재단과 함께 일한다면 어떤 프로젝트를 하고 싶나.
홍보대사가 하고 싶지만 인천 사람이 아니라 좀 곤란하니, 역시 공연을 하고 싶다. 노인들이 좋아하는 경기 민요부터 해서 정통 오리지널 뽕짝까지. 임창정과 했던 ‘임박사와 함께 춤을’ 처럼 젊은 뮤지션들이 피쳐링하는 그런 그림도 좋다.

국내 후배 중에서 유심히 보는 가수가 있나 궁금하다.
김호중 노래가 좋다. 소위 ‘쇳소리’가 들어간다. 딱 찔러주는 느낌을 좋아하는 한국 취향에 맞게 김호중의 그 유리를 긁는 듯한 목소리에는 카리스마가 있다. 누군가는 약간 답답하게 느낄지 몰라도, 원래 완벽한 느낌 보다는 인간적인 느낌이 사람을 안달나게 하는 법이다.

여러 무대를 서면서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곳은 어디라 생각하는가.
나이트 클럽에 가면 그곳에 맞게, 칠순 잔치 가면 다 특성에 맞게 다 나를 맞춘다. 다른 사람들과 겹치지 않는 개성, 나만의 것을 그때그때 보여준다. 며칠 전 안산 공연에서도 짧은 무대였지만 즉흥적으로 가사를 보여주니 관객들이 놀라더라.

그동안의 음악 작업 중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결과물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경기민요’다. 1989년 메들리 음반 1, 2, 3집 중에서 2집을 경기 민요에 디스코를 섞어 만들었다.

여태까지 온갖 추임새를 다 했다. 그 중에서 최고의 추임새를 선정한다면 어떤 것일까.
“좋아 좋아.” 내가 좋다 하니 보는 사람들도 다 좋아한다. “고래?” 하는 것도 다 내 입에서 나온 추임새다. “앗싸” 등도 반응이 좋다.

가장 큰 영향을 준 음악가는 누구인지.
딥 퍼플이다. 어릴 때 팝송을 들으면서 ‘Highway star’, ‘Black night’ 등을 많이 접했다. 이외에도 산타나의 ‘Black magic woman’이나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도 빼놓을 수가 없다. 대체로 솔로보다는 밴드 음악을 좋아했다.

음악이라는 존재를 이박사 자신에게 있어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예술은 나의 취미요, 음악은 나의 친구요, 노래는 나의 동반자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진행 : 임진모, 임동엽, 정다열, 한성현
정리 : 한성현
사진 : 임동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