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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 인터뷰

13년이라는 음악 활동 공백기를 깨고 2019년 정규 10집 < 돛 >으로 돌아왔을 때 김현철을 소환한 건 시티팝 붐이었다. 갑자기 시티팝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젊은 세대는 퓨전 재즈를 기반으로 도시의 감성이 부르는 1980년대 김현철의 고감도 음악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그는 ‘한국의 시티팝 대부’라는 거창한 수식을 떠안으면서 뉴트로를 넘어 ‘오래된 미래’임을 증명했다.  

세련된 편곡과 부드러운 음색으로 본인만의 색깔을 확립해 온 그는 막 내놓은 신보 < City Breeze & Love Song >에서도 도시, 바람, 햇살을 포함한 긍정적인 가사로 도시 속 바쁜 일상에 지친 우리에게 활력을 선사한다. 이즘은 2015년 진행했던 인터뷰 이후 6년 만에 김현철을 다시 만났다. 그는 무엇보다 이번 앨범을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주기를 주문했다.

2017년 시티팝 붐이 일면서 13년 만에 정규 10집 < 돛 >을 발매하셨는데, 이후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팬들은 빠른 복귀를 기다렸을 텐데 왜 이리 신보가 오래 걸린 건가요? 코로나의 영향도 있었나요?
우리 나이대의 가수들은 앨범이 올해 나왔으면 몇 년 후 꼭 내야 한다고 생각을 하지 않아서 13년간 작업을 쉬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은 자신을 피곤하게 만든다. 코로나의 영향은 없었다. 정규 음반은 2년이 걸린 게 맞지만 그동안에 폴킴과 작업을 했고 < Brush >라는 EP를 발매했었다.

폴킴, 쏠, 죠지 등 젊은 인디 뮤지션과 협업하셨는데 이유가 있나요?
그들과는 모두 내 음악을 함께 작업했었다. 선배님들과 < Brush >앨범을 함께 하면서 느꼈는데 만약 후배들이 본인의 앨범을 작업하자고 요청한다면 나는 흔쾌히 참여할 것이다. 내가 선배님들께 받은 것들을 다시 돌려드리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그걸 후배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도 좋을 듯하다.

중간에 진행했던 < Brush > EP나, 폴킴과 함께 한 ‘선’ 등의 작업은 어땠나요?
재밌게 작업을 했다. 폴킴과의 작업뿐만 아니라 ‘오랜만에’라는 노래가 맥심커피 광고 음악에 깔리게 돼서 광고 버전의 음악을 따로 녹음하기도 했다. 특히 선배님들을 모시고 < Brush >음반을 재작할 때 매우 재밌었다. 주현미, 최백호, 정미조 선생님 나름대로 다들 너무 잘해 주셨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만약 후배가 나에게 함께 작업하자고 한다면 언제든 같이할 의향이 있다.  

과거 2015년 이즘과의 인터뷰에서 “정규 1집부터 10집까지 한 각론으로 묶어서 빨리 보관해두고 싶은 마음도 있고요. 사실 곡은 이미 넘치고, 콘셉트 걱정도 제가 해왔던 대로 하면 되니 큰 고민은 없어요.”라고 하신 적이 있는데 쌓아둔 곡을 원하는 콘셉트로 해서 < 돛 >을 낸 건가요?
두 장짜리로 낼 생각은 없었는데 하다 보니까 22곡이 되었다. 그래서 이걸 나눠서 낼까 하다가 ‘내가 적극적으로 음악 할 시기가 기껏해야 20년인데 많이 소구하고 안 하고를 떠나서 ‘오늘 생각나는 노래를 내일 풀지 않으면 죽을 때 아깝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LP를 생각하고 제작했다. 제일 음질이 높기로는 20분에서 22분인데 LP는 한정돼 있어서 두 장으로 냈다. 요즘 앨범을 내 인생에 있어 기록 점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음악을 아끼지 않고 앨범으로 인생의 기록 점을 찍어 가고 있다.

이유 없이 음악이 싫어져서 음악을 쉬었다고 들었는데 다시 음악을 시작하겠다는 계기가 된 건 무엇인가요?
쉬는 동안에도 방송하고 디제이, 교수 일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죠지라는 가수가 리메이크하고 싶다고 허가서를 요청했고 당연히 허락을 해줬다. 리메이크한 노래를 받아 들었는데 좋았고 발매 후 인기도 있었다. 그 후 죠지가 나에게 무대 게스트를 부탁했고 그때 우리는 처음 만났다. 공연당일 타이거 디스코라는 디제이가 디제잉을 하러 왔는데 그날을 계기로 친해져 본인이 일하는 1969라는 클럽에서 공연을 함께하자고 요청했다. 클럽에 갔는데 100명이 넘는 20대 초반의 청년들이 내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어서 신기했다. 요즘 미디움 템포의 음악이 뜬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이를 계기로 자신감이 붙었고 ‘음악을 다시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악기도 사고 음악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앨범 제목 중 City Breeze는 시티팝을 전제하고 붙인 것 같은데 제목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원래 내가 가지고 있는 감성이 그 감성이다. ‘오랜만에’라는 곡도 그 감성을 가지고 있었다. 30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나는 도시와 바람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수록곡 전곡을 시티팝으로 한 이유는 뭐죠?
이 질문을 굉장히 많이 들었는데 (웃음)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요즘 리스너들이 즐겨 듣는 시티팝과 딱 맞아떨어졌다. 이번 앨범 제목이 < City Breeze & Love Song >이라서 사람들이 시티팝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아티스트는 내고 싶은 음악을 내는 거지 이 음악을 냈을 때 어떤 반응일지 염두에 두지는 않는다. 이번 음반을 듣고 어떤 기자분이 “김현철씨 1집의 첫 번째 노래인 ‘오랜만에’가 이런 기분을 담고 있다”라고 말씀해 주셨다. ‘오랜만에’의 가사 중 ‘나의 머리결을 스쳐 가는 바람이 좋은걸’, ‘밤은 벌써 이 도시에’처럼 도시와 바람이 가사에 있다. 30년 전 처음 낸 앨범에 있는 그 감성이 자연스럽게 올 뿐, 요즘 시티팝이 인기 있어서 하는 것은 아니다. ‘오랜만에’란 곡이 영어로 이야기하면 ‘City breeze & love song’인 격. 그 안에 사랑 이야기, 바람, 도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앨범의 현실적 가치가 떨어진 시점에서 앨범을 낸다는 게 조금 맥빠지지 않았나요?
안타깝긴 하지만 세상이 달라지는 건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LP로 내는 것보다 싱글로 내면 훨씬 음질이 좋다. 왜냐하면 적은 양의 정보를 빠르게 내니까 음질이 좋아진다. 그래서 싱글을 낸다.

앨범의 어떤 것에 역점을 두었나요?
그냥 여름에 듣기 좋은 노래. 내가 써 둔 곡이 발라드도 있겠지만 이번에는 정말 여름에 듣기 좋은 노래로 선택했다. 그리고 ‘사랑한다’라는 가사 대신 ‘맘에 든다’, ‘좋아한다’는 가사를 썼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심각하지 않게 들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음악을 하는 기분이 난다. 이번 앨범을 가벼운 마음으로 들었으면 좋겠다. 음악이 가볍다는 게 아니라 가볍게 들을 수 있는 음악.

‘So nice!!’는 어떤 심정으로 만들었나요?
뭐가 제일 So nice 한지 생각해 보다가 남녀가 만나는 첫 단계에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세상이 So nice 하게 보인다는 게 떠올랐다. ‘요즘 어때 괜찮아?’, ‘마음에 드는 사람 있어?’등의 전반적으로 연애 장려 가사다. 그리고 아침에 출근하면서 16비트를 들으면 버겁기 때문에 아침에 대한 내용의 노래를 만들기 위해 8비트로 만들었다.

수록곡 ‘평범함의 위대함’의 가사는 어떻게 생각하게 되었나요?
사람들이 서로 자신이 튀고 싶어 하고 튀어야 한다고 교육을 받아오지만 나는 살아오면서 평범한 게 제일 어렵고 제일 좋다고 느꼈다. 평범하다는 것은 사람이 동글동글하다는 것이고 내가 말하는 튄다는 것은 잘하는 부분이 올라오는 것. 하지만 사람은 모두 같은 함량을 타고났다고 믿는다. 따라서 여기가 튀는 면이면 다른 반대편은 들어가기 마련이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평범하기가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앨범 제작 중 어려웠던 부분은?
앨범 제작을 순조롭게 진행하긴 했지만 쉬워 보이는 마지막 곡 ‘동창’이 가장 어려웠다. 마지막 부분에서 코러스를 넣어야 했는데 전문 코러스를 써서 낼 것인가 동창들을 불러서 할까 고민했는데 후자는 10집에서 해봤으니까 의미가 없을 듯해서 이번에는 상민이, 태윤이형 등 밴드 멤버분들과 함께 했다. 다들 노래를 잘했다. 그때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나머지는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심현보를 작사 파트너로 한 이유는?
제목은 내가 정했고 가사는 현보와 같이 썼다. 현보가 워낙 가사를 잘 쓰니까 내가 빈칸을 제시하면 그 안을 현보가 채워주었다. 내가 쓸 수 있는 가사를 나열해 두면 가사에 대한 데이터가 많은 현보가 낱말 빈칸을 채우듯이 가사 작업을 진행했다.

세션 분들만 봐도 대단함이 느껴지네요. 녹음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혹은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었다면?
녹음은 저번 10집 앨범과 비슷하게 진행했다. 옛날에는 녹음실에서 녹음하고 그 내용에 대해 믹싱을 하고 논의했는데 10집부터는 내가 집에서 다 만들어서 그 데모를 밴드 세션에 보내주면 그들은 똑같이 따온다. 데모를 들어보면 얼마나 똑같이 연주해오는지 알 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연주한다. 그렇다면 연주자들이 해야 할 게 뭐냐면 손맛이 확실히 달라서 베이스, 기타, 드럼 자체의 질감을 살려낸다.

11집을 준비하면서 들었던 AOR 노래는?
AOR은 옛날부터 꾸준히 좋아해 왔다. 크레이그 런키(Craig Ruhnke), 짐 슈미트(Jim Schmidt), 브루스 히바드(Bruce Hibbard) 등의 노래를 들었다.

공연계획이 따로 있나요?
공연이 쉽지는 않다. 내년쯤 되면 공연장이 풀리지 않을까. 공연 관련 얘기는 계속하는 중이다. 그리고 9월 말이나 10월 초에 시티팝 페스티벌을 기획해 보고 싶다.

빌보드와 BTS 현상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우리 세대 때만 해도 외국 뮤지션을 동경했었는데 이제는 아니다. 우리나라 가수가 전 세계적으로 추앙을 받고 영화 부문에서는 아카데미상을 받는 것들을 보면 우리나라 문화가 다른 나라에 비해 절대 꿀리지 않는다. 예전에는 우리가 외국의 음악 요소를 따라 했었다면 이제는 외국인들이 거꾸로 우리나라 소리를 따라 한다. 즉, 우리나라만의 오리지널리티를 가지게 되었다. 옛날에는 외국 가수들 데리고 작업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안 그래도 된다. 우리나라 얘들이 더 잘 치고 더 잘한다.

신보에 담은 작가의 의도는?
노래는 발표하기 전까지는 내 것이지만 발표한 후는 듣는 사람의 것이다. 듣는 사람이 어떻게 듣던 그건 본인의 마음이다. 작가의 의도야 있기는 하지만 그 곡을 잡고 있을 때까지 인 거고 물 위에 띄워 놓고 나서는 물이 가는 데로 따른다.

어떤 아티스트로 기억되기를 바라는지..
그건 여러분이 정하는 거다. 그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혼자 생각하는 나에 대한 정의는 필요하지 않다. 나의 모든 행동은 내가 하는 것이지만 행동을 평가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다. 예를 들어 내가 베스트드라이브가 되고 싶은 건 둘째 문제고 남이 인정을 해 주는 게 먼저라고 생각한다. 여러분이 내 모습을 보고 ‘어떤 아티스트다’라고 생각하는 것 그게 정답이다.

인터뷰: 임진모 임동엽 이홍현 김성욱 김도연
사진: 김성욱(사진 1, 2, 3), FE 엔터테인먼트 제공(메인, 사진 4)
정리: 김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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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라이브 펑크 인터뷰

2020년을 통틀어 가장 충격적인 앨범 한 장을 뽑으라면, 단연 그 주인공은 < Di-Ana >의 몫으로 돌아갈 것이다. ‘가상 악기와 샘플링을 배제하고 모든 소스를 직접 연주’했다는 공격적인 문구 아래, 편리함에 마비되어가는 음악계를 향해 반발감을 당당히 내비친 이 문제적인 작품은 아날로그의 비연속성 색채와 순수한 창작력이라는 통속적인 무기만으로 현존하는 음악 시장에 당당히 도전장을 내민다. 예술가의 뚜렷한 목표 의식이 반영된 < Di-Ana >의 극단적 태도 속에서 우리는 순도 높은 숭고함을, 그리고 본인이 설계한 과업을 멋지게 수행하는 과정에서 보기 드문 성취감을 얻을 수 있다. 어쩌면 이 시대 프로듀서가 갖춰야 할 ‘멋’을 진정 추구할 줄 아는 낭만주의자, 얼라이브 펑크(Alive Funk)를 만나 그의 방대한 음악 세계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IZM을 보는 독자분들에게 간략한 소개 부탁한다.
안녕하세요.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는 얼라이브 펑크(Alive Funk)입니다. 블랙 뮤직의 코어가 되는 알앤비와 디스코, 그리고 힙합 외에도 UK 신스팝 같은 다양한 장르를 계속 연구하고 실험하고 있습니다.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처음 음악을 시작한 건 중학교 때 밴드에서 베이스 기타를 연주하면서부터다. 우선 밴드는 약속이 정말 중요하다. 예를 들어 합주를 해도 시간이나 인원 같은 조건이 맞아야 하고 이에 따른 변수가 많다. 그러던 도중, 문득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작곡에 도전하게 되었고, 어느 순간부터 더 잘해지고 싶어 연구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굉장히 수동적인 내가 딱 하나 누가 시키지 않더라도 능동적으로 하는 게 바로 음악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본격적으로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라이브 펑크의 음악을 논하기 위해서는 빼놓을 수 없는 게 멀티 인스트루멘탈에서 비롯된 넓은 스펙트럼이다. 이 다양한 악기들은 어떻게 익히게 되었나.
물론 베이스 기타를 치긴 했지만, 그 외에도 다른 악기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다. 드럼이나 일렉 기타, 혹은 키보드라던가. 일단 기본적으로 밴드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사실 또래 남학생들은 게임을 하거나 노래방을 많이 가지 않나. 나는 그것보다 악기를 만지고 좋아하는 곡을 카피해 연습하는 게 더 재미있었고, 그 습관이 자연스럽게 몸에 밴 것 같다.

그 당시 주로 듣던 음악이 뭐가 있을지.
내 세대라면 많이 공감할 텐데 밴드 음악을 처음 접하게 된 건 엑스 재팬(X-Japan)이다. 최초로 산 앨범이 그들의 베스트 CD다. 이후 멜로디 메탈에서 스트라토베리우스(Stratovarius) 같은 강력한 스피드 메탈로 넘어가다가, 나중에는 영국 쪽의 라디오헤드나 핑크 플로이드 같은 밴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음악을 따라 하면서 기본적인 믹스나 사운드 구조를 알게 된 것 같다.

그렇다면 힙합 음악은 언제부터 접하게 되었나.
우선 나는 딱히 장르를 정해 놓고 하나만 듣는 편은 아니다. 그 당시 처음으로 접한 가장 흑인 음악에 가까운 음악이 한국에 나온 아소토 유니온의 1집 < Sound Renovates A Structure >다. 처음에는 강력한 헤비메탈이나 일명 멜스메(멜로딕 스피드 메탈)에 비하면 사운드가 다소 심심하기도 하고, 흔히 쓰는 표현인 ‘그루브’가 잘 느껴지지 않더라. 근데 점점 듣다 보니 눈을 뜨게 되고, 아소토 유니온과 함께 작업한 다이나믹 듀오를 거쳐 에픽하이를 듣게 되고, 조금 더 파고들어 소울 컴퍼니와 빅딜 레코즈의 음악을 접하면서 블랙 뮤직에 완전히 반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자메이카 리듬이나 NY 브루클린에서 비롯된 붐뱁 리듬같이 다양한 뿌리가 뻗어 나가면서 서로 연관성을 가진다는 점. 여러 장르가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이고 상관관계가 존재하지만, 그러면서도 다른 캐릭터를 보여준다는 점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정규 1집 < DI-ANA >에 실린 도발적인 앨범 소개가 화제를 끌었다.
예전에 쓴 문구가 비난의 어조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원했던 것은 ‘그 방법을 쓰지 마라’가 아닌 프로듀서의 양심에 대한 토론이었다. 확실히 스플라이스나 프라임 룹스, 룹질라 같은 좋은 사이트가 많이 생겨났고, 그만큼 음악의 접근성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사이트를 이용하다 보면 나조차도 이 곡이 정녕 내가 만든 게 맞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드는데, 이는 그 시점에서 이미 양심의 가책을 어느 정도 느끼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만약 방금 언급한 그런 것만을 가지고 음악을 생산하는 사람이 이것 또한 하나의 방법이고 창작이라 말한다면, 물론 거기에 대해서는 존중을 표할 것이다. 그저 이 주제에 대해 꼭 한번 토론을 해보고 싶었다.

작품의 제목을 ‘Di-ana’로 택한 것이 ‘Di’와 ‘Ana’에 각각 다이(Die)와 아날로그(Analogue)라는 의미를 가져와, 아날로그를 배척하는 현 음악 신의 흐름을 고발하려는 의도로 알고 있다. 심지어 작업 과정에서 전부 직접 연주했다고 들었는데, 이러한 특수한 제작 방식이 힘들지는 않았나.
기본적으로 가상 악기나 루프를 쓰지 않으려면 구축된 하드웨어 장비로만 작업해야 하는데, 그게 굉장히 제한적인 방법이다. 한 마디로 지금 가진 신시사이저와 기타 이펙터만 가지고 곡을 만들어야 하는 셈이다. 그럼에도 그런 방식을 택한 것은 작품을 만들 때 극한에 한번 놓이고 싶었고, 그런 환경에 닥쳤을 때 어떤 음악이 나올지에 대해서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성장이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작업하다 보면 래퍼마다 요구하는 사운드 어프로치(Approach)가 각각 다를 때가 있다. 트랩이라는 범주 안에서도 UK 드릴과 미국 드릴이 다르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르가 무엇이 되고 어떻게 접근하든 간에 언젠가 작품을 꺼냈을 때 분명 아쉬움이 남을 거라 생각했고, 그럼에도 첫 커리어를 장식하는 앨범인 만큼 최선을 다했다는 상징성을 남기고 싶었다. 예전 유튜브에서 루드윅(Ludwig Göransson)이라는 프로듀서가 차일디쉬 감비노의 ‘Redbone’을 실시간으로 메이킹하는 영상을 본 적 있다. 그 모습을 보고 나 또한 뭔가를 만드는 사람이기에 한번 도전해보고 싶다는 동기부여를 받았다.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섞인 앨범 같다. 오히려 확장성보다 제한된 상황을 만든 것처럼 보인다.
어떤 의미로 보면 맞다. 제한적인 상황에 놓이게 되니 하드웨어 하나를 가지고도 면밀히 연구하게 되더라. 그리고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의 경우에는 증명하는 과정이 늘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일단 내가 그런 능력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가치 있는 뮤지션임을 증명하기 위한 과정이었던 셈이다.

어찌 보면 과거에 사용하던 작법과도 많이 달랐을 텐데.
일단 가상 악기는 편의성이 좋다. 작업 속도가 빨라질 수밖에 없는 구조인 데다, 내가 피아니스트가 아니더라도 피아니스트처럼 보이게 해주는 게 미디(MIDI) 시스템이다. 그래서 오히려 이번 작업을 통해 가상 악기가 얼마나 대단한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날로그 소스는 한번 녹음해서 기록해도, 다음 날 일어나서 프로그램으로 만질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래도 요즘 다시 바이닐 붐이 일어나는 걸 보면 아날로그의 시대가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한다.

그래서인지 유독 < Di-Ana >를 들을 때는 여타 앨범과는 달리, 건조한 기타 리프와 베이스가 가진 잔향, 혹은 신시사이저 루프 하나하나에도 집중하게 된다. 무엇보다 많은 아티스트가 참여했음에도 통일감이 우수하다. 전반적으로 그루비하고 늘어지는 로파이 톤의 사운드가 주축이 된다.
앨범을 구상하는 프로듀서라면 모두 직면하게 될 문제인데, 여러 플레이어와 작업을 하게 되면 사람마다 가진 이미지가 다른 만큼 그들이 쓰는 미장센이나 장치가 다른 경우가 많다. 어쨌든 나는 앨범에 열다섯 곡이 그냥 들어가는 게 아니라 하나의 앨범으로 연결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고, 아무래도 그걸 조금 상쇄할 수 있던 건 모든 곡의 주제와 테마를 내가 직접 정해서 요청한 부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평소 산문집을 좋아하기도 하고, 피처링 의뢰를 하기 전에 에세이를 써서 먼저 드리는 습관이 있다. 이 곡의 내가 생각한 오브제는 이렇고, 이걸 읽고 작업에 임해달라고 부탁한다. 물론 이게 완전히 맞을 때고 있고 아닐 때도 있지만, 전혀 맞지 않더라도 이의는 제기하지 않는 편이다. 어쨌든 기본적인 오브제를 상대에게 제시했을 때, 단어나 내용 같은 부분까지 검열하게 되면 표현의 자유를 막는 거고, 단순 ‘내가 보컬이 아니기 때문에 너에게 부탁하는 것’이라는 의미밖에 더 되나.

로파이 질감과 그루브한 면은 평소 듣는 음악에 영향을 받지 않았나 예상한다. 스톤 스로우 레코드(Stones Throw Record) 소속의 댐 펑크(Dam-Funk)나 제이 딜라(J Dilla), MF 둠(MF DOOM), 매드립(Madlib) 같은 뮤지션의 음악을 자주 들은 게 믹스 과정에서 작용하지 않았을까. 평소 이런 오버 프레싱 기법을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 대표적으로 우리나라에는 마인드 컴바인드가 있겠다.

사실 < DI-ANA >가 취한 접근법에 비해 앨범 자체의 이슈가 덜된 것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앨범을 만들 때 신경 쓴 부분이 있나.
앨범을 설계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어떤 앨범을 가져오는지’에 대해서였고, 그런 면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인 켄드릭 라마의 < To Pimp a Butterfly >가 도움이 많이 되었다. 이 앨범에는 흑인 음악의 코어가 되는 요소가 모두 담겨 있다. 그의 이전 행보만 보고 당연히 다음 작품도 엄청난 랩으로 가져오리라 생각했는데, 예상이 와장창 무너진 앨범이다. 나 역시 < DI-ANA >를 만들 때 집중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여러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다양한 사운드의 재미를 주고자 했다. 사실 가벼운 앨범은 아니다. 조금 염세적이기도 하고, 신인 아티스트의 에고(Ego)가 나조차도 느껴지니까. 통일성을 주면서 다양한 접근을 시도한 셈이다.

혹시 앨범이 그런 비타협적인 뉘앙스를 풍기게 된 경위가 있을까.
음악뿐만이 아니라, 사람은 무엇이든 간에 성취감을 느끼고 싶어 하지 않나. 앨범을 한창 준비할 당시 점점 그 성취감이라는 원동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비겁하게도 타인에게서 그 이유를 찾았다. 왜 내 음악에 관심이 없을까, 생각해보면 리스너도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권리가 있는 건데 당시에는 신인이나 뉴 제너레이션의 음악에 평가가 박하다고 생각한 거다. 실제로 그런 생각이 드러난 앨범이라 조금은 일기 같은 앨범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밝은 얘기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도 했다. 많은 사람을 만나 작업을 하고 있지만 외로운 에너지를 갖고 있었고, 혼자 작업하는 과정에서 느낀 고립감이 점점 표출되었다.

독특하게도 피처링 진을 구할 때 인맥을 활용하지 않고, 일일이 메일이나 DM을 이용해 직접 연락했다.
보통 젊은 감각을 지닌 분들은 파티나 클럽 같은 사교의 장에서 삶을 즐기고 사람을 사귀는데, 일단 나는 성격 자체가 그렇지 않다. 그러다 보니 앨범을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 정작 아는 분이 하나도 없더라. 참여진 중에 이미 알던 사람은 내가 속한 ‘KeepNews’ 크루 친구들과 부현석, 그리고 오도마 뿐이었다. 그래서 아티스트 섭외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방법인 래퍼의 이메일이나 DM으로 연락하는 방식을 택했다. 일종의 정공법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음악 신에서 누구를 통해 연락하는 행위가 비겁한 것은 아니지만, 조금 더 낭만적인 방법을 시도하고 싶었다. 만약 음악이 충분한 설득력을 지닌다면 수락해 주리라는 믿음이었다.

딥플로우의 경우에는 DM으로 연락을 보냈더니, 바로 기꺼이 참여하고 싶다는 답장과 함께 핸드폰 번호가 왔다. 성사되어서 너무 기분이 좋았다. 테이크원 같은 경우에는 아무리 흔적을 찾아봐도 도저히 메일 주소를 알아낼 수가 없어서 하프타임 레코즈에 직접 문의를 넣었는데, 그 글을 보고 매니저를 통해 연락이 와서 참여하게 되었다. 나머지 분도 거의 유사하게 곡이 마음에 든다고 흔쾌히 참여해 줬다. 열린 마음으로 들어줘서 정말 감사하다. 그리고 이 방법을 택한 건 어떻게 보면 성취의 문제이기도 하다. 내가 원한 아티스트에게 닿는 것만큼 기쁜 일도 없지 않나. 물론 방식 자체가 필연적으로 피드백이 늦기 때문에 힘들게 기다린 기억이 난다. (웃음)

아날로그 작법을 필두로 한 고전적 접근이나 신인 아티스트의 고집 등 다양한 정의를 내릴 수 있는 앨범이지만, 모두 돌고 돌아 결국 낭만으로 귀결되는 것 같다.
나한테는 그게 굉장히 중요했다. 아까도 말했듯 앨범에 상징성을 담고 싶었고, 적어도 그 과정에서 고군분투했던 모습을 멋지게 기억하고 싶었다. 나중에 돌아보면 분명 미숙한 부분이 보이거나 불안하게 들릴지 몰라도 그 시절의 나는 노력했다는 징표니까. 일종의 로맨스인 셈이다. 내가 생각한 고유의 멋을 지키는 게 중요한 축으로 작용했다.

단연 두드러지는 트랙은 ‘신도시’로, 인스트루멘탈 트랙 ‘Tesla’와 같이 게스트 없이 혼자 주조한 트랙이다. 앨범을 한 편의 영화라고 본다면 직접 캐스팅을 한 뒤 중간에 잠깐 참조 출연한 셈인데, 직접 노래를 쓰고 부른 이유가 있을까.
‘신도시’라는 곡은 이번 앨범에서 가장 밝은 곡 중 하나임에도, 어느 것보다도 컨셔스한 주제를 다루고 역설적인 면을 지닌 트랙이다. 무엇보다 내가 처한 상황에 관해 얘기하고 동시에 가장 솔직해야 하는 곡이었기 때문에 다른 아티스트의 에너지를 끌어오기보다 내가 직접 주는 편이 더 크게 감동이 작용할 거라 생각했다. 곡이 앨범 내에서 어떠한 기능을 하고 순환을 이루는지 집중하며 작업을 했고, ‘신도시’가 그런 곡이었다.

전반적으로 얼라이브 펑크라는 틀 아래 잘 응집된 것 같다. 그럼에도 참여진 가운데 특히 인상적이었던 아티스트나 기억에 남는 곡을 꼽는다면.
우선 참여진으로는 ‘DNCE’의 자메즈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랩을 잘한다는 의미를 넘어 일단 내가 의도한 오브제를 잘 이해한 아티스트였다. < DI-ANA >는 발매 2주 전까지도 타이틀을 못 정한 상황이었는데, 자메즈의 버스가 도착하자마자 이 곡이 타이틀이 되리라는 생각이 스쳤다. 여러 악기를 태깅하듯 펼쳐 놓은 후반 구간에서는 누가 와도 온전하게 표현하기 어려울 거라 예상했는데, 그걸 가뿐히 뛰어넘더라. 굉장히 놀라운 경험이었다.

기억에 남을 만큼 피드백이 많이 오고 호불호가 갈린 트랙은 네버언더스투드(neverunderstood)가 참여한 ‘아류’다. 마지막 트랙인 만큼 어려운 주제를 다루는 데다 무엇보다 사운드 어프로치가 말이 안 되는 곡이다. 여러 FX 소스는 물론 모듈러 신스를 이용해 회로도 직접 만들면서 만든 곡이다. 진짜 힘들었다.

네버언더스투드의 이름이 언급된 김에 본인이 속한 ‘KeepNews’ 크루에 대한 소개를 간략하게 부탁한다.
우선 프로듀서는 얼라이브 펑크가 있고, 플레이어로는 보나조이(Bona Zoe)와 네버언더스투드, 쿠엔틴 파이브(Quentin 5ive), 코지마이(Kojimai), 칼리 킴(Kali Qim), 그리고 오엘프라이스(OL’Price)로 구성된 크루다. 혼자 음악 하는 친구들을 내버려 두기 싫어 결성된 크루다. 그렇다고 해서 모였으니 막연하게 노는 것 역시 불필요한 시간이라 생각하기에 몇 년 전 1집 컴필레이션 앨범 < Radio >를 제작했다. 같이 작업하면서 시너지가 많이 나오고 있고, 최근에도 2집을 만들자는 제안이 나온 상황인데 고민을 많이 하고 있다. 일단 내가 엄두가 안 나서. (웃음)

최근 ‘POP-UP STORE’의 슬로건을 내건 싱글이 두 개 나왔다. 하나는 서사무엘과 함께한 ‘To-kyo’, 또 하나는 던말릭과 수비(Soovi)가 참여한 ‘없어도 돼’다. 어떻게 구상하게 된 프로젝트인가.
예전에는 프로듀서가 싱글 앨범을 릴리즈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싱글은 포맷 상 기본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요소가 적은 데 정녕 메시지를 담을 수 있느냐는 입장이었던 거다. 근데 < DI-ANA >를 만들면서 고생을 너무 많이 하기도 했고 조금은 가벼운 기분으로 창작을 해보고 싶었다. 시리즈별로 기획을 짜고 ‘POP-UP STORE’라는 슬로건을 짜면서 본격적으로 곡을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일단 대중적으로 가고 싶었고, 내가 생각하는 기준의 커머셜한 사운드를 많이 차용했다. 기존의 공격적인 신시사이저보다는 듣기 편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강조했다. 그래서인지 확실히 < DI-ANA > 때와는 달리 지치지 않고 즐기면서 하게 되더라.

뭔가 기존 스타일에서 공간감이 확장된 것 같다.
내가 원한 의도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고 보면 된다. ‘To-Kyo’는 일종의 워드 플레이인데, 찾아보니 ‘Kyo’가 공허라는 뜻이 있더라. 그 앞에 ‘Too’가 붙은 셈이다. 사람들과 부딪히고 섞이면서 살다 보면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많고, 가끔 혼자 있고 싶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런 편안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청각으로 표현한 곡이다. 그렇기에 듣기 부담스럽지 않은 앰비언트하고 칠 아웃한 사운드가 나오게 되었다.

서사무엘과의 작업은 어땠나.
우선 ‘To-Kyo’ 곡 자체로 가지고자 한 목적은 ‘편안함’이었는데, 서사무엘은 직접적인 요청 없이도 알아서 듣기 편한 최적의 루트로 채워냈다. 그리고 이제껏 같이 작업한 이들 가운데 베이스에 대한 이해도가 가장 높다. 두 번째 버스의 도입부에서 베이스 프레이즈를 긁으며 들어가는 구간에 소리를 비워 놓은 걸 보고 굉장히 놀랐다. 본인의 앨범 < Frameworks >를 인용한 듯한 가사도 무척 마음에 들고.

‘없어도 돼’에서 던말릭이 펼친 퍼포먼스도 인상적이다. 특히 메시지가 얼라이브 펑크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 준 느낌이 들었다.
너무 좋은 질문이다. 사실 던말릭은 저번 앨범에서 같이 하기로 한 곡이 있었고, 완성까지 했는데 그 결과물이 둘 다 만족스럽지가 않아 미처 발매하지 못했는데, 그럼에도 작업이 재밌었고 평소 너무 좋아하는 래퍼라 다시 한번 만나 작업을 도모했다. 하나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 준 느낌이 들었다’고 하지 않았나. 실수로 작업 전에 수비에게만 에세이를 주고 실수로 던말릭에게는 안 보냈더라. 결국 던말릭은 ‘없어도 돼’라는 제목 하나만 듣고 참여한 거다. 근데도 멋지게 가사를 써줬고, 심지어 발매 기간이 촉박했던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작업 분위기도 정말 좋았다. 서로 장난도 치고.

어떻게 보면 또 에세이를 보내지 않은 게 새로운 시너지를 만든 게 아닐까.
앞으로도 그렇게 해볼까 생각 중이다. (웃음)

다양한 시도를 준비하고 있다는 만큼, 향후 발매될 팝업스토어 프로젝트에 대한 기대가 크다. 장르에 얽매이지 않는 음악으로 구성될 예정인지.
사실 그 점에 관해서는 내 작업 스타일에 대해 먼저 설명을 하고 싶다. 나는 앨범을 제작할 때 앨범을 위한 곡을 만드는 편은 아니다. 오히려 곡을 만들어 놓고 언젠가 아카이빙된 그 수많은 곡을 나중에 펼쳐 보았을 때 느낌이 오면 수록을 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 ‘이불 위 DI-ANA’ 같은 곡은 앨범 발매 4년 전에 쓴 곡이고, < DI-ANA >를 만들면서 버린 곡만 해도 63개에 달한다. 심지어 전부 아날로그로 작업했다.

물론 곡이 별로라서 뺀 건 아니다. 그저 넣으면 안 되는, 이 < DI-ANA >라는 앨범 안에서는 생명력을 지니지 못하는 트랙이었던 거다. 지금도 팝업스토어 프로젝트를 겨냥하고 쓴 곡이 벌써 열다섯 곡 정도 되지만, 그 곡이 수록될 가능성은 미지수다. 처음 목표로는 볼륨 1부터 3까지 발매한 뒤 후에 새로운 곡을 추가한 디럭스 버전으로 만들려고 했는데, 그때부터는 또 하나의 앨범이 되는 거니까 또 통일성을 생각해야 할 테고. 그래도 차근차근 주제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다.

아날로그 세션을 자주 사용하는 만큼 밴드 라이브에 대한 관심이 있는지 궁금하다.
그렇게 큰 욕심은 없다. 아직 드러나는 것보다는, 대중에게 먼저 작품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아직 내 안에 남아 있다. 만약 하게 되더라도 다른 세션을 쓰기보다는 혼자 원맨밴드 식의 작업 방식을 고수할 것 같다. 예를 들어 멀티 트랙을 깔아놓고 공연을 한다거나. 정직한 앨범을 냈기 때문에 라이브 현장에서도 정직해야 하지 않을까.

코로나 시기에 대해 아쉬움이 남을 것 같은데.
이건 참여한 래퍼들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앨범을 내고 파티 같은 것도 기획하고 있었는데 전부 무산되었다. 아쉽기는 하지만 앞으로도 보여줄 것이 아직 많이 남아있고, 조금 더 열심히 해서 대중에게 다가가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많은 아티스트와 협업을 하고 있지만, 꼭 한번 같이 작업해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한국에서 모두가 원할 테지만, 빈지노와 작업을 해보고 싶다. 어떤 음악의 기준이나 특수한 사운드 접근법에 구애받지 않고, 또한 각종 리듬과 장르를 전부 소화할 수 있는 뮤지션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다. 빈지노는 정규 1집의 수록곡 ‘Break’에서는 로큰롤 리듬을 선보이지만 ‘Dali, van, picasso’로는 재즈틱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최근 발매된 ‘Blurry’는 또 트랜스 음악과 많이 닮았다. 그런 면에서 이해도가 높고 스펙트럼도 넓은 아티스트라 꼭 한 번 원 엠시 원 피디로 작업을 해보는 게 꿈이다. 멋진 작업을 할 자신도 있고.

다양한 음악을 듣는 만큼 추천하고 싶은 음악도 많으리라 생각한다. 얼라이브 펑크가 좋아하는 여러 장르에서 대표로 한두 장씩 소개 부탁한다.
일단 힙합 앨범에서는 DJ Shadow의 < Endtroducing…… >을 꼭 들어봤으면 좋겠다. 최초의 샘플러와 턴테이블로만 만든 앨범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데다, 브레이크 비트 같은 개념이나 트립 합 등에 영향을 끼친 앨범이다. 턴테이블리즘이 일어났을 때 그 중심에 있던 음악가기도 하다. 만약 샘플링을 공부하는 분이라면 DJ Shadow의 음악이 좋은 소재가 되리라 생각한다.

디스코에서는 스타일리스틱스(The Stylistics), 코모도스나 팔리아먼트 등 괴물 같은 그룹에 가려진 감이 있지만 이에 필적할 만한 그루브를 가진 팀이다. 우리나라에서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 아쉽다. 순수 재즈는 아니지만 재즈틱한 앨범 중에서는 아이작 헤이즈(Isaac Haves)의 < Chocolate Chip >을 뽑고 싶다. 어쿠스틱하고 애시드한 사운드를 많이 썼기에 지금 들어도 촌스럽지 않고 유행에 구애받지 않을 앨범이다. 소울 음악이라 하면 소울 폴 리얼(Soul for Real)의 앨범을 추천한다. 뉴 잭 스윙이나 슬로우 잼 같은 다양한 소울 펑크 리듬이 있고, 나 역시도 거기서 악기의 어레인지 같은 것을 많이 참고한 것 같다.

일렉트로니카에서는 Teebs의 < Anicca >. 앰비언트한 요소도 있지만 강력한 드럼도 있고, 이 앨범에서 사운드 접근법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공부가 많이 된 뮤지션이라 추천을 하고 싶다. 록은 다들 많이 알 테지만, 라디오헤드의 < OK Computer >를 권한다. 내 기준에서 가장 완벽에 가까운 앨범이고, 아직까지 이걸 뛰어넘은 앨범은 존재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나 더 있다면 핑크 플로이드의 < The Dark Side Of The Moon >을 꼽고 싶다.

최근 재밌게 들은 앨범이 있을까.
일단 한국에서는 마인드 컴바인드가 있고, 그리고 외국에서는 조금 아쉽지만 키드 커디(Kid Cudi)의 < Man On The Moon III : The Chosen >을 뽑고 싶다. 물론 첫 등장이 워낙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Man on the moon’이라는 타이틀을 붙이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리고 작년 발매된 프레디 깁스(Freddie Gibbs)와 알케미스트(The Alchemist)가 같이 작업한 < Alfredo >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음악 팬들이 얼라이브 펑크의 음악을 들을 때 어떻게 받아들였으면 좋겠는지.
아까도 말했듯, 결국 시간이 지나면 작품의 하자나 허점은 분명 내 눈에도 보일 거라 생각한다. 그렇다고 내가 영원히 미완성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인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음악을 완성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청자다. 최고의 칭찬이던, 혹은 정말 별로라는 말을 남기든 간에, 어쨌든 평이 나온 것 자체가 음악을 완성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청자분들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앞으로 얼라이브 펑크로 활동하면서 솔직한 음악을 들려주고 싶다. 나의 일기 같은 음악을 들으면서 그 당시의 얼라이브 펑크가 이걸 좋아했고, 이런 생각을 했다고 유추해도 좋다. 어쨌든 솔직함은 소중한 가치고, 그걸 고수하는 게 멋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니까. 정말 감사하다.

인터뷰 : 김도헌, 임동엽, 장준환
사진 : 임동엽
글 : 장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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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창모 인터뷰

‘마에스트로’의 피아노 치는 래퍼에서 ‘Meteor’의 별똥별에 이르기까지. 창모의 성공 신화는 강렬하고도 명쾌한 음악의 승리였다. 이제는 TV 프로그램을 비롯해 각종 미디어에 자주 등장해 주류로 올라섰음에도 그는 여전히 자신을 ‘언더그라운드 록스타’라 칭한다. 예술적 고집과 독자성만큼 진지함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게 또한 창모가 힙합 애호가들과 대중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두드려온 동력일 것이다. 그의 음악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창모만이 털어놓는 ‘솔직함’과 대중 영합을 넘어서는 ‘진정성’이 공감을 부른다는 사실을 안다. 첫 정규 앨범 < Boyhood >의 성공 스토리는 경기 덕소의 꿈나무 래퍼가 새 시대의 전국 힙합스타로 솟아오르는 신분 상승을 엮어낸 강력한 자기 서사였다.

음악만큼이나 그는 인터뷰에서도 자신을 이야기하는 데에 솔직담백했다. 음악적 다양성에 대한 야망과 더불어 ‘돈’에 대한 나름의 철학까지 거침없이 자신의 진면(眞面)을 공개했다. 하지만 편안하고 밝은 목소리 안에는 살짝 고민도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와 나눈 대화는 한 편의 자서전을 읽는 것 같았다.

첫 정규 앨범 < Boyhood >와 타이틀 ‘Meteor’로 2020년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이러한 성공에 대해 현재 기분은 어떤가?
일단 덤덤했다. ‘Meteor’로 1위 했을 때, 항상 꿈꾸어 왔던 거라 상기되어 있다기보다는 그냥 ‘세상에 나를 보여줬구나.’ 싶었다. 결국 그런 일을 벌일 것이라고 생각은 했다. 내가 그걸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보여줄 거라는 목표도 있었고. 나는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 음악 산업의 성공 모델은 아니다. 다른 모델이면서도, ‘이런 식으로도 음악을 하면 성공 가도를 달릴 수 있구나’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다른 모델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대중음악 신에 싱어송라이터는 언제나 존재했지만, 나는 그중에서 드문 힙합 신의 싱어송라이터다. 그리고 음악 외적으로 봐도 활동할 때 스타일리스트도 없고, 회사가 나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주거나 한 것도 아니다. 단지 창의력을 현실로 옮기는 일에만 몰두했다. 다른 아티스트들의 성공에는 여러 요소가 들어있기도 하지 않나. 음악을 통한 승리라고 말하고 싶다.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개념으로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내가 생각하는 언더그라운드는 홍대의 공연장, 라이브 클럽과 같은 문화 그 자체다. 사람들은 언더그라운드와 소위 말하는 오버그라운드 힙합을 나누기도 하는데, 나는 다 힙합이고 공연하는 곳과 활동하는 곳이 언더와 오버를 가른다고 생각한다. 나는 잘되고 돈을 많이 벌었을 때도 항상 언더그라운드에 있었다. 오히려 사람들이 거리에서 더 보기 쉬운 아티스트였다. 까다롭고, 숨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다.

‘Meteor’를 발표했을 때, 히트할 거라고 생각했나?
아니다. 오히려 작업하면서 너무 많이 듣고 익숙해지는 바람에 어떤 감각을 잃어서인지 막판에 타이틀곡으로 안 한다고 했다. 회사에서 뜯어말렸었다. 형들이 무조건 타이틀로 해야 된다고 말하더라. 형들 말을 들어보자 해서 타이틀로 냈다.

‘Meteor’는 한 방에 오는 곡이었다. 힙합 신에 실력 있는 래퍼들의 작품도 잘 만들었다지만 대중적으로는 어렵게 다가오는 곡이 있는데, ‘Meteor’는 아주 잘 들렸다. 그 이유를 발성과 음색으로 풀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거친 스탠스?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렇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웃음)

(인스타그램 질문) < Boyhood >는 첫 정규 앨범인데, 다른 앨범들과 비교해서 준비 과정이나 기간에 다른 점이 있었나? 그리고 < Boyhood >가 무엇 때문에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나?
이전까지의 앨범들은 ‘앨범을 만들어야겠다.’ 생각하고 만든 노래들이 많았다. 그런데 < Boyhood >의 곡들은 내가 스무 살 때부터 만들어 놓고 나중에 정규앨범에 내기 위해 빼놓은 곡들이 많다. 그래서 장독대에 묵은 김치처럼, (웃음) 메시지도 더 깊고 진득하게 담긴 것 같다.

본인의 래핑, 음악에 있어 앞으로 보완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메시지다. 뇌에서 생각나는 대로 바로 쓰기보다 시 같은 가사를 쓰고 싶다. 한 번 정제하고, 사람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그런 메시지 말이다.

개인적으로 느끼기에는 버스(verse)와 코러스 부분이 음색 차이가 분명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그건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래도 이런 새로운 피드백을 받는 걸 좋아한다. 원래는 남의 의견을 잘 안 듣는 스타일이었는데, 안 듣다가는 더 새로운 걸 못 만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계가 반드시 있으니. 옛날에 활동했던 밴드에서 영감을 얻기도 하는데, 그 이유가 밴드는 멤버 수가 많아서 더 창의적인 것을 만들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서다. 공동체, 커뮤니티이니까.

최근 다양한 아티스트들과 피쳐링 등을 통해 협업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인가?
꼭 그런 건 아니다. 왜냐하면 사실 나는 내 음악과 피쳐링은 구분하는 편이다. 피쳐링은 나에게 있어서는 래퍼로서 폼을 유지하기 위해 하는 일이다. 최근 피쳐링 제의를 많이 받는데, 그건 그만큼 래퍼로서 현재 폼이 좋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트위터 질문) 샤이니의 신곡 ‘Atlantis’ 작사 / 작곡에도 참여했는데, 비하인드 스토리가 궁금하다.
SM에서 나의 랩을 원한다고 요청이 먼저 왔다. 협업하려는 법도 배울 겸 멤버 민호 씨의 스타일과 목소리를 생각해서 랩 메이킹에 참여하게 됐다.

많은 사람들이 창모를 가리켜 ‘랩 피지컬’이 좋다고 말한다. 그게 무슨 의미일까?
나도 잘 모르겠다. (웃음) 그런데 내가 랩의 ‘정석파’이기는 하다. 요즘 랩에서 영감을 받기보다 예전 투팍(2Pac) 같은 거장들에게 영감을 받는다. 그 사람들은 악보를 그릴 때 무조건 지켜야 하는 오선처럼 무조건 지켜야 하는 존재다. 랩 피지컬이 정확히 무슨 말인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그런 ‘기본’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해주시는 거 아닐까 싶다.

창모를 이야기할 때 오토튠을 빼놓을 수 없다. 약간 고집스러운 면도 느껴지는데, 오토튠의 강점이 무엇이라 생각하나?
2008년쯤에 미국과 한국에 오토튠이 붐이 일었다. 그때 15살이었는데, 거기에 많이 영감을 받았다. 왜냐하면 나는 노래를 잘 못 불렀는데 멜로디는 부르고 싶었고, 그걸 보정해주는 게 오토튠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의 음악 자체에 익숙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오토튠을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해주는 장치 정도로 생각했다. 음이 어긋나고, 기계음처럼 들리는 것도 나이 탓인지 몰라도 자연스러웠다. 내가 부족한 싱잉 부분을 보완해줬다.

그리고 피아노를 쳤다 보니 연주를 하는 것과 음악을 만드는 것은 개념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안다. 연주는 시간을 들이고 손을 움직이면서 노력한다는 점에서 체육 같은 면도 있는데, 많은 기술을 이용해 만들어내는 음악의 개념도 있다. 나도 어렸을 땐 피아노를 쳤었는데 힙합을 접하고 화성 형식도 없고 그냥 무한 반복인 걸 보고 ‘와, 이런 음악도 있구나.’ 느꼈었다.

피아노를 치다가 힙합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건 모차르트, 베토벤 같은 작곡가들이 써놓은 걸 쳐야 하는 거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이걸 치기만 하는 게 음악인가?’ 아니면 ‘내가 직접 작곡해서 치는 게 음악인가?’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나는 만드는 쪽에, 재현보다는 창의에 더 끌렸다.

창모의 음악은 강하게 때리는 드럼 부분이 만들어내는 타격감이 있다. 반드시 이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카니예 웨스트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는 느낌이다.
그렇다. 내가 음악 실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에 카니예 웨스트의 영향이 7할 정도다. 카니예 웨스트의 음악에는 모든 게 다 섞여 있으니까.

카니예 웨스트를 배웠다면 음악을 어렵게 할 법도 한데 몸속에 대중적인 감각이 있는 것 같다. 결코 어렵게 음악을 풀어내지 않는다.
내 음악이 소위 말하는 ‘뽕끼’가 있다고 한다. 팬들과 리스너들도 꼭 한 번씩 언급한다. 내가 학생 때는 모두가 한 장르에 빠지면 그 장르가 최고고, 타 장르나 한국에서 나오는 그 장르의 음악들은 무시하기 마련이었다. 나도 힙합에 빠졌을 때, 힙합이 좋으면서도 한국에서는 서울대 나온 사람들이 랩을 하고, 한국인의 감성이 배어있는 걸 보고 한편으로는 이건 진짜 힙합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 끝도 없이 나누게 되더라.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모든 걸 그냥 받아들였다. 나는 한국인이고, 한국에서 음악을 하는 건데 이 감성이나 내가 살아온 생활 방식이 남아있는 게 과연 나쁜 걸까. 어떻게 보면 해외 사람들이 들었을 때는 또 새로운 느낌일 테니까.

힙합 말고 다른 대중가요도 많이 듣나?
깊게는 아니지만, 한국 록을 들었다. 예전에 국내 대중음악 100대 명반 리스트를 본 적이 있다. 거기서 충격을 받았던 게 들국화와 산울림이었다. 메시지에 당시의 시대상이 담겨 있는 게 좋았다. 1970-80년대 나왔던 굉장히 착한 노랫말로 만들어진 건전 가요도 신기하게 느껴진 건 한국의 시대상이 담겨 있어서였다. 앨범 하나만으로도 역사니까. 거기서 위대함을 느꼈다.

그래서 그걸 아예 듣지 않은 래퍼들과 다른 표현법이 나오나 보다. 거기에 카니예 웨스트, 투팍 등 외국 래퍼들의 음악도 접목되니 완벽한 창모의 스타일이 나온 게 아닌지.
맞다. 나도 그 100대 명반 리스트를 본 게 인생의 한 수라고 생각한다. 그때부터 시야가 넓어졌다. 한국 음악이 결코 안 좋은 게 아니고 엄청난 것이라는 걸 깨닫고 받아들였다.

유튜브 채널 딩고 뮤직, < 쇼미더머니 >, < 고등래퍼 > 등 미디어에 자주 출연한다. 그런 게 사실 언더그라운드 힙합 신에서는 경계했던 부분이다. 그런 생각에서 자유로운지 이 부분 얘기를 들려 달라.
그런 말을 하는 사람 중에서 차트 1위에 오른 사람은 없지 않은가. 내가 음악적으로 좋은 곡을 만들고 계속 음악 생활을 하면서 마치 정원 나가듯이, 산책하듯이 그런 프로그램들에 나가면 그건 나쁠 게 없다고 생각한다.

‘Swoosh flow’에서 UK 드릴을 선보였다. 이 곡이 속해 있는 폴 블랑코와의 협업 앨범 < BIPOLAR >에서도 보여준 것처럼 장르에 있어 한계를 두지 않고 계속해서 도전하는 모습이다.
항상 다양한 것을 하고 싶어 한다. 힙합의 태도를 가지고 만든 음악과 시도하고 싶어서 만드는 다른 여러 음악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항상 힙합의 태도를 지키고 있다. 그런 애티튜드만 있다면 장르는 내가 창의적으로 해석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한다.

창모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대중음악계의 스타로 거듭났다. ‘Meteor’와 미디어를 통해 그를 접한 이들도 많겠지만, 힙합 신에서 창모가 인지도를 다지는 데에는 < 돈 벌 시간 2 >와 그 수록곡 ‘마에스트로’가 지대한 밑거름이었다. 그 무렵을 회상하며 그는 “앞길이 안 보이던 시절 ‘마에스트로’는 내 최후의 한방 같은 노래였다”며 노래의 탄생 배경을 설명했다. 미래가 불투명하던 시기에도 그가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던 데에는 날 것의 메시지에서 오는 ‘리얼함’이 있었다.

그간의 미니 앨범 제목에 ‘돈’이 자주 언급되는 데에도 나름의 이유를 덧붙였다. 그는 그것을 어린 시절의 생활 환경과 연관이 있다고 말했다. 자연스럽게 그의 유년기에 귀 기울일 수 있었다. 고향 ‘덕소’가 가지는 의미는 그에게 생각보다 큰 듯 보였다.

오늘날의 창모를 만든 데에는 < 돈 벌 시간 2 >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어떻게 보면 ‘Meteor’보다 더 중요한 곡이 ‘마에스트로’와 ‘아름다워’가 아닐까.
‘아름다워’는 만들어 놓은 지 좀 됐었고, ‘마에스트로’는 앨범 작업하면서 급하게 쓴 곡이다. 좋은 음악이 나오려면 빡세게 살아야 한다고 그러던데, 그때가 음악을 하면서 제일 막막하던 때였다. ‘이걸 접어야 하나’하는 생각까지 했었는데, 이왕 포기할 거면 마지막으로 좋은 곡을 하나 내보고 끝내자 싶은 마음으로 쓴 곡이다.

‘마에스트로’의 반응은 조금 느렸는데, 그 곡이 왜 통했다고 보나?
여러 가지가 작용한 것 같다. 그 당시에 사장님들이 새로운 회사를 만들어서 나와 계약을 하다 보니 나에 대한 관심이 쏠렸다. 그때 내가 노렸던 건 사람들이 하던 ‘랩 문법’을 피해서 하는 거였다. 그때 힙합 신은 그야말로 ‘돈 자랑’의 시대였다. 그런데 진짜 돈 있는 사람들의 돈 자랑이 아닌 근본 없는 돈 자랑의 나열이었다. (웃음) 그래서 ‘이런 건 안 되겠다.’ 생각했다. 내가 밑바닥에서 올라왔는데, 왜 이렇게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진실한 메시지를 담아서 보여준다면 사람들에게 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흙수저’라 부르는 창모의 신분 상승 같은 게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나 보다.
어렸을 때부터 그런 생각을 했다. 분명 우리가 사는 사회에는 계층이 나누어져 있다. 결코 올라갈 수 없는 장벽도 우리 세대 때부터 더 심해졌다. 어떻게 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이 계급 구조를 한 단계 올라갈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 무렵 영국 밴드들에게 영감을 받기도 했는데, 오아시스도 자기를 ‘워킹 클래스‘라 부르고, 비틀스도 그랬다. 그런 것들이 나에게 단점이 아닌 강점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간 발매한 음반 제목들에서도 알 수 있지만, ‘돈’ 이야기를 유독 많이 한다. 돈에 대한 나름의 철학이 있는 것 같은데.
로버트 기요사키의 <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라는 책이 있다. 내 인생을 바꾼 책 중 하나다. 그 책을 보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재정적으로 자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본 한국 문화는 그랬다. 내 또래들이 다 그렇겠지만, 나도 어릴 때 아버지가 자주 돈 이야기 하시는 걸 보며 자랐다. 상황은 하지만 개선되지 않았고 내가 돈을 많이 벌어서 가업을 완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돈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 같다. 성공하고 난 후에는 부모님도 많이 기뻐하신다.

버클리 음대에 합격을 했는데 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지금처럼 이렇게 뜨고 나서는 음악을 더 오래 하기 위해 꼭 버클리가 아니더라도 다른 곳을 통해 전문적인 교육을 받아야겠다는 생각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계획도 있는지.
뭘 배우려는 생각보다는 요즘이 협업의 시대이다 보니 음악을 만들 때 나에게 플러스 요인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서 울타리를 넓히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래서 그런 걸 공부하고 싶다. 사람들을 설득하는 법? 곤조가 센 사람들이 있지 않나. 그런 사람들을 이렇게 꾀는 방법을 배우고 싶다. (웃음)

만약 지금 버클리 음대를 다니고 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해본 적 있나?
해봤다. 지금처럼 못 됐을 거다. 그냥 그 나이 때 제때 대학 들어간, 그 나이 때 해야 할 것들을 했던 사람이지 않았을까 싶다.

어릴 적 살았던 고향 ‘덕소’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아주 작은 동네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다 이어져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이 친구를 잘 모르는데 알고 보니 이 친구가 내가 자주 가는 미용실 원장님의 아들이었다던가. (웃음) 그리고 거기서 만난 친구들이 좋았던 건 관심사가 비슷했다. 옷 좋아하고 랩 좋아하고. 친근한 작은 커뮤니티, 공동체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에 잊을 수 없는 곳이다.

학창 시절 밴드를 했다고 들었다. 밴드를 했을 때의 감성이 지금 창모의 음악과 연관이 있는지.
밴드에 들어갔을 때 충격을 받았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들어갔는데, 피아노도 치고 했으니 여자애들에게 이름도 알릴 겸, 공연도 할 겸 그렇게 들어갔다. 당시 나는 힙합 키드여서 밴드 형들이 하는 연주가 신선했다. 그리고 그 무렵 서태지를 제대로 알게 됐다. 기타 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옛날 록 음악의 기타 리프들을 들으면서 멜로디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 같다. ‘힙합 비트 루프를 만들 때도 이런 멜로디가 있으면 좋지 않을까?’. 피아노, 밴드 두 가지를 경험하며 그러한 확신을 얻은 것 같다.

지금까지 만든 곡 중 대중들에게는 덜 알려졌는데, 나에게 자랑스러운 곡이 있다면?
달달한 노래다. < 닫는 순간 >에 수록된 ‘Interlude’. 2분짜리의 짧은 곡인데 그게 나의 감정도 잘 담겨 있고, 멜로디도 괜찮고, 노래의 독창성도 있다. 그래서 애정이 간다.

단순하게 ‘마에스트로’와 ‘Meteor’ 둘 중 하나를 택한다면?
‘마에스트로’. 이거는 나의 사소한 고민이었는데, ‘Meteor’의 발음이 완전 한국식이다. 그런데 적어도 훅에 나오는 영어 단어만큼은 영어 발음을 제대로 하고 싶었다. (웃음) 멋있어 보이게 하고 싶었는데 그게 잘 되지 않았다.

‘Meteor’는 유성, 별똥별이라는 뜻인데 분명 여기에도 메시지를 담은 것 같다. ‘Meteor’의 정확한 메시지는 무엇인가?
‘사람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박히게 된다’라는 뜻이다. 내가 사람들이 원하는 스타상은 아닐지라도, ‘너희가 원하든 원치 않든 내가 차트도 점령하고 너희 거리 주변에 다 나오게 해줄게’. 이런 승리의 표현이다.

창모는 프로듀서이기도 하고, 래퍼이기도 하지만 프로듀서로서 다른 래퍼들을 지원하거나 그들에게 비트를 줘본 적이 거의 없다. 프로듀서 창모로서 다른 래퍼들을 키워보거나 발굴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나? 있다면 작업해보고 싶은 래퍼는?
나는 내가 2명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프로듀서로서 ‘래퍼 창모’에게 맞춰 그 사람을 프로듀싱 해 1위 가수로 만들었다. 이제 ‘창모 프로듀서’는 완성이 된 거다. 그리고 이제는 다른 아티스트의 프로듀싱도 도전하려고 한다. 작업하고 싶은 래퍼는 어린 래퍼들. 왜냐하면 내 음악도 그 친구들이 들었을 때는 신선한 게 아닐 수도 있으니까. 어린 친구들이 만족한다면, 내가 여전히 ‘Fresh’ 하다는 거 아닐까.

(인스타그램 질문) 현재 촬영 중인 < 고등래퍼 4 >에서 앞으로 회사를 만들어 사장이 되는 게 목표라고 했다. 어떤 포부에서 한 말인지 궁금하다.
항상 뭔가를 이루려면, 미리 그 마인드로 살아야 한다는 게 나의 좌우명이다. 혼자 마음속으로 이미 사장 놀이를 하고 있다. 레이더에 있는 래퍼들도 있다. 하지만 다른 회사가 낚아채 갈 수도 있으니 말하지는 않겠다. (웃음)

(트위터 질문) 래퍼가 꿈인 팬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인생을 살아야 한다.’ 내가 앨범을 제대로 만들고, 사람들에게 반응도 얻을 때쯤에는 20대로서 삶을 힘들게 살았기 때문에 그런 메시지와 가사를 쓸 수 있었고 그게 전달이 된 거다. 요즘에는 랩만을 잘하려고 랩 레슨을 받는 친구들도 있는 것 같다. 그런 것도 중요하지만, 랩에서 중요한 것은 삶이고 그것을 담는 것이다. 래퍼가 되려면 막살든, 잘 살든 생각을 할 수 있게 일단 살아봐야 한다.

나를 음악인, 래퍼, 프로듀서로 만든 앨범이나 가수가 있다면.
카니예 웨스트의 < My Beautiful Dark Twisted Fantasy >다. 예술이라는 걸 그때 접했다. 그전에도 음악을 들었지만, 포괄적으로 비주얼, 음악, 퍼포먼스, 그리고 약간의 허세까지 모든 게 들어가 패키지화되어있다. ‘이게 예술이야’라는 걸 알려준 앨범이다. 그리고 카니예 웨스트의 < Yeezus >. (웃음) 투팍 노래 중에서는, ‘All about you’를 꼽겠다. 그 곡이 약간 지 펑크(G-Funk) 스타일의 말랑한 곡인데, 거기서 힙합 문법을 이해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는데, 가사를 보고 놀랐다. 노골적이면서도 그 나름의 달콤함이 있다.

인터뷰 : 임진모, 임동엽, 김성엽, 이홍현
정리 : 김성엽, 이홍현
사진 : 임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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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밀스 인터뷰

던밀스는 수많은 대체재가 범람하는 힙합 신에서도 독자성을 얻는 데 성공했다. 개인 작업물을 비롯한 여러 협업으로 독특한 존재감을 피력하고, 각종 미디어 매체에서 활약을 펼치며 조금씩, 그리고 꾸준히 본인만의 영역을 꾸려 나갔다. 그가 추구한 노선은 유일무이한 캐릭터를 낳았고, 결과적으로 초창기 레이블의 성장에 실질적인 양분을 제공했다.

하지만 성장한 것은 레이블뿐이 아니었다. 그저 기세로 덤벼들었다’는 말처럼 신인의 저돌적 포부를 내비치던 88의 그는 대중과의 극적인 ‘화합’을 거치고 완성형의 ‘미래’와 조우하며 본인만의 고유 문법을 정착해 나갔다. 그리고 정규 2집 < F.O.B. >는 한층 정돈된 모습을 가져오며 또 한 번의 성장을 선언한다. 서교동에 위치한 비스메이저 컴퍼니, 야심에 찬 복귀만큼이나 할 말이 쌓여 있던 그를 만나 작품에 관한 담화를 나누었다.

전역 후 싱글과 정규 앨범 발매는 물론 < 딩고 프리스타일 >과 < 랩하우스 온에어 >, 그리고 < 마이크 스웨거 >까지 출연하는 등 열정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렇게 허슬하는 배경이 있을까.
사실 매일매일 일정이 있는 건 아니다. 스케줄이 잡힐 때만 조금 정신이 없지, 나머지는 집에 있거나 운동을 하며 개인적으로 시간을 보낸다. 일단 군대에 간 동안 2년을 쉬었으니까 시간이 아깝더라. 피처링 제안이 들어오면 웬만해서 다 하려 하고, 개인적인 작업물도 내면서 올해는 내 목소리가 쉬지 않고 계속 나오게끔 할 예정이다. 사실 이런 게 좀 당연한 건데 조금만 쉬어도 게을러지니까. 근데 요즘 또 작업하는 게 재밌어서 최대한 많이 할 수 있을 때 하고 있다.

평소에도 규칙적으로 뭔가 하려고 하는 스타일인지.
속으로는 규칙적으로 일어나서 운동 가기 전에 정신도 좀 깨고 싶은 게 있다. 근데 막상 일어날 때가 되면 졸려서 마음처럼 잘 안되더라. 제대하고 나서 일주일은 여섯 시 반에 자동으로 기상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기억도 안 날 정도다. 어떻게 새벽에 깨서 야간근무도 나가고 아침에 깨서 뛰고 소리 지르고 했는지 모르겠다. 우리 국군장병 여러분들, 참 대단하다.

신병훈련소 종교 활동에서 부른 ‘88’의 영상 조회 수가 벌써 80만을 넘어가고 있다. 많은 분들이 던밀스의 군 생활에 대해 궁금해할 것 같다.
너무 재미있었다. 포병으로 복무하면서 탄을 운동 삼아 들곤 했다. 사실 그때 군기가 바짝 든 내 모습에 취해있었다. 처음 신병 위로 휴가를 나가서도 3박 4일 동안 전투복을 입고 다녔을 정도다. 근데 이제 상병 분대장 정도 되니까 짬이 좀 차더라. 주머니에 손도 들어가고.

군대에서 음악 생각을 많이 했다고 들었다. 작업에 대한 구상도 틈틈이 이뤄졌나.
군대가 일과시간에 단 1초도 쉬지 않고 뭔가를 진행하는 것은 아니다. 종종 쉬는 시간이 있고, 청소를 하다가도 해이해지는 시간이 생긴다. 자주포 안에 수첩이 항상 있었다. 선임들이 잠시 자리를 비우고 혼자 남겨졌을 때 머릿속으로 BPM을 상상하면서 랩도 해보고, 가사도 많이 썼다.

최근 결혼 소식을 발표하며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는데, 이후 삶의 달라진 부분이 있는지.
코로나 때문에 혼인신고만 해놓고 아직 식을 올리지 못한 상태인데, 자연스럽게 같이 지내게 된 터라 인생에 있어 크게 달라진 점은 잘 모르겠다. 요즘 밖에 나가질 못하니까 집에서 같이 넷플릭스 보고, 칵칵대며 웃고, 살 빼야 한다고 말하다가도 어떤 음식을 시켜 먹을지 고민하면서 보내곤 한다. 그야말로 신혼의 삶을 즐기는 어린 부부인 셈이다. 나중에 저스틴 비버와 헤일리 비버처럼 결혼식을 올리고 싶은데 아직은 참고 있다. 또 내가 한국의 저스틴 비버가 아닌가.

그렇다면 나중에 ‘Peaches’ 같은 곡을 기대해봐도 될까.
‘복숭아쓰’로 해보겠다. 천도복숭아로.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는지. 특히 넉살 팬들이 경악했다고.
코로나가 없던 시절, 군대 휴가를 나가 혼인신고를 마치고 스무 명 가까이 되는 VMC 멤버를 모아 자리를 마련한 적이 있다. 고깃집에서 이 내용을 발표했는데 다들 갑작스러워하더라. 지금이야 멤버들이 하나둘 결혼을 하고 있지만 그때만 해도 기혼자가 거의 없었으니까. 군대를 한 번 떠나보냈더니 여기서 또 한 번 더 떠나보낸다고 아쉬워했다. 그리고 비록 내가 넉살과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웃음) 영원한 동반자로서 서로 부족할 때 채워주는 관계로 남을 테니 팬분들 너무 섭섭하지 말아달라.

앨범의 제목을 ‘북미 대륙에 막 내린 이민자’를 뜻하는 슬랭, ‘Fresh off the boat’로 지었다. 이유가 있을까.
처음 유학을 갔을 때는 영어를 아예 할 줄 모르고, 한국말처럼 발음하니 ‘fob’이라는 단어에 예민해 있었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나를 봤을 때 ‘한국에서 이제 막 온 친구네’ 이런 시선보다는 겉모습은 동양인이더라도 여기서 태어나고 자란 2세처럼 보이고 싶었던 거다.
앨범을 준비하면서 여러 제목을 생각해 봤고, 결국 내가 살면서 가장 예민하게 생각했던 그 단어로 제목을 정하게 됐다. 군대에 있다가 사회로 다시 복귀했을 때 이 사회 입장에서는 갓 전역한 내가 ‘뜨내기’다. 사회에 적응하는 사람으로서 ‘Fresh off the boat’라는 말을 떠올렸고, 캐나다에 살 때 있던 일들과 느꼈던 감정을 가사로 풀어냈다. 그러다 보니 앨범의 서사가 만들어졌다.

유독 지역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캐나다와 한국을 필두로 서사를 풀어낸 뒤, 노래방과 플스방 등이 세부적으로 등장하고 마지막에 집으로 돌아오는 구성이다.
처음부터 자세하게 구상한 건 아니고, 그냥 한 곡씩 작업하다 보니 퍼즐처럼 맞춰졌다. 앨범이 80% 완성됐을 때 여기에는 이런 주제가 필요하겠다 싶어 추가한 곡도 있다. ‘Home sweet home’이 그런 경우다.

정규작으로는 < 미래 > 이후 5년 만이다. 앨범의 준비 기간은 얼마나 걸렸나.
훈련소 때부터 군대를 전역하자마자 앨범을 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정작 < F.O.B. >에 들어간 곡 중 군대에서 쓴 가사는 ‘다시 서울’밖에 없다. 이 트랙만 휴가 때 녹음을 해서 완성했고 나머지는 전부 작년 9월부터 만들었으니 제작 기간은 5~6개월 정도인 셈이다. 도중에 고민을 많이 했다. 풀어내는 스타일을 바꿔볼까 싶어 여태까지 하지 않은 랩을 한번 해봤는데 뭔가 이상하고 나에게 잘 묻지도 않고, 소위 ‘야마’가 없더라. 그래서 깔끔히 정리하고 하고 싶은 대로 다시 시작했다. 그 후로는 술술 나왔다.

‘F.O.B. Interlude’의 외국인 승무원 역할을 화지가 맡은 것으로 알고 있다.
맞다. 원래 예정에 없던 트랙인데, 딥플로우 형과 앨범을 공유하면서 ‘Fresh off the boat’ 앞에 유기성을 위한 스킷이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고, 아이디어를 주고받다가 입국심사 느낌으로 해보면 어떨까 해서 나오게 된 곡이다. 입국심사는 받아주는 사람이 필요한데 혼자서 1인 2역을 하면 너무 오그라들 것 같았다. 그래서 영어가 유창한 멤버를 찾았고, 로스는 이미 피처링에 참여했으니 화지가 한번 해보면 재밌겠다 싶었다.

그러고 보니 ‘Fresh off the boat’에 참여한 로스 역시 교포 출신이다. 의도가 있는 기용인가.
원래 로스와 작업을 하게 된 건 단순히 내가 웨스트 코스트 힙합을 좋아한다는 이유에서다. 1집 < 미래 >에도 ‘That shit’이라는 웨스트 코스트 풍의 비트가 있고, 또 이런 랩을 한국에서 제일 멋있게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은 로스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둘 다 절묘하게 외국에서 온 공통점이 있다 보니 ‘Fresh off the boat’에 맞는 가사와 곡이 나왔다.

타이틀곡 ‘대박인생’의 경우에는 피처링 라인업이 상당히 독특하다. 노스페이스갓(Northfacegawd)과 언에듀케이티드 키드(Uneducated Kid)와는 어떻게 협업하게 되었나. 혹시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을까.
‘대박인생’은 앨범이 완성되고 추가로 한 두 곡 더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제작되었다. 공연장에서 많은 분과 재밌게 떼창을 할 수 있는 곡이 필요했고, 평소 하는 말 중에 알아듣기 쉬운 단어가 뭐가 있을까 하다가 조금 위트있는 느낌의 ‘대박인생’이란 말을 떠올렸다. 원래 혼자 하려 한 곡인데, 녹음을 다 하고 들어보니 미니멀한 비트에 내 목소리만 계속 나오니까 너무 지루하더라.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어 2절을 날려버리고 이 ‘B급 감성’과 어울릴 만한 언에듀케이티드 키드와 노스페이스갓에게 연락을 했다.
노스페이스갓과의 작업은 원테이크로 끝났다. 작업실로 데려온 뒤 테스트 삼아 한번 녹음을 해봤는데, 쭉쭉 해보더니 결과물이 너무 괜찮더라. 그래서 그대로 마무리했다. 언에듀케이티드 키드 같은 경우에는 따로 녹음을 해서 보내줬다. 보통 나는 피처링 작업을 할 때 음원이 이상하거나 박자의 싱크가 맞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좋다고 하는 편이다. 언에듀에게 초안을 보내고 ‘저녁에 피드백을 드려도 될까요’라는 답장이 왔길래 바쁜가 싶었는데, 생각했던 그 친구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긴 문장들의 피드백이 쌓여서 와있더라. 신경을 많이 써줘서 너무 고마웠다.

일각에서는 이런 음악을 소위 ‘멍청트랩’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내가 2014년도 데뷔하면서 기세로 막 덤벼들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그랬다. 그전까지만 해도 진지한 랩을 구사하는 래퍼들이 많았고 내가 ‘강백호’, ‘88’ 같은 약간 무식하고 단순한 가사로 밀어붙이니 그런 반응이 나온 셈이다. 나는 마음이 가는 대로 랩을 했기에 이런 ‘멍청트랩’이라는 말을 나쁘게 듣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류의 트랩 음악에 먼치맨이나 언에듀케이티드 키드, 노스페이스갓 같은 친구들이 꼽히곤 하는데, 사실 이 친구들은 전혀 멍청하지 않다. 정말 철저하고 똑똑한 친구들이다.

던밀스라는 아티스트의 장점은 접근성 높은 훅 메이킹이나 특유의 감칠맛 나는 래핑 등이 있지만, 그 바탕에는 ‘기세’와 ‘에너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지치지 않는 에너지의 비결이 있다면.
사실 나도 지친다. (웃음) 처음 랩을 시작할 때는 ‘내가 랩을 세상에서 제일 잘한다, 누구든지 데리고 와보라’는 과잉된 자신감이 있었기에 거기서 에너지가 나왔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현실을 깨닫게 되더라. 특출나게 가사를 잘 쓰는 편도 아니고, 나보다 잘하는 래퍼도 많고, 그렇다고 음악 스펙트럼이 넓은 것도 아니니까 내가 뽐낼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했다. 그래도 내가 남들보다 에너지가 넘치고 육체적으로는 안 밀리지 않나. 이걸 음악으로 표현하겠다는 생각으로 뭐든 열심히 하고 있다. 운동이든 음악이든.
그러다 보니 캐릭터에 많이 집중하게 된다. 약간 덩치가 있고 터프한 음악을 하는 래퍼로 더 게임(The Game)이나 50센트, 그리고 지금은 안타깝게도 하늘의 별이 된 군대에 있을 때 좋아하던 팝 스모크(Pop Smoke)가 있지 않나. 나도 영상에 나올 때 어떤 모습으로 보일지 생각한다.

그런 에너지가 잘 담긴 트랙이 ‘MVP’라 생각한다. 공연장에서 듣고 싶을 정도다.
아까 말한 대로 ‘대박인생’과 같이 나중에 추가된 곡 중 하나가 ‘MVP’다. 약간 조금 템포가 빠른 트랩을 하고 싶어서 버기(Buggy)에게 부탁했는데, 어느 날 버기가 쥬시 제이(Juicy J)의 앨범을 듣고 필이 꽂힌 거다. 신나고 빠른 느낌의 BPM의 초안이 만들어졌고 약간 구호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농구에는 경기 때 제일 잘한 선수가 공을 잡으면 관중들이 ‘MVP’라 외쳐주는 찬트 문화가 있다. 내가 어릴 때 농구를 좋아하기도 했고, ‘MVP’라는 훅을 만드니 버스(Verse)도 금방 나오더라. 그렇게 완성된 곡이다. 코로나만 아니었어도 공연장에서 화끈하게 했을 거다.

아이디어가 결과물로 바로 나오는 스타일 같다.
합이 맞으면 바로바로 되는 편이다. 나 혼자는 한계가 또 있으니까. 근데 요즘은 비트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있다. 이번 ‘망나니 Freestyle’이라는 트랙은 직접 초안을 만들고 랩까지 전부 한 다음에 편곡 단계에서 홀리데이(Holyday)의 도움을 받은 곡이다. 이제 싱글을 낼 때 웬만하면 내 비트를 많이 써볼 예정이다.

이번 작품에서 넉살과 함께한 ‘다이나믹 듀오’를 짚지 않고 넘어갈 수 없겠다. 오랜 기간 다져온 둘의 케미스트리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나.
지금까지 넉살과 둘이서만 한 곡이 없더라. ‘Ye I need’는 오디가 참여했고, ‘얼굴 붉히지 말자구요’는 뱃사공이, 그리고 ‘브라더’는 로스가 참여했다. 요즘 < 궁금한 나라의 넉밀스 >도 같이 진행하면서 둘이 힙합 노부부로 불리기도 하고, 단지 보여주기식이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 넉살과는 오랜 역사도 있고 곡으로 풀어내면 재밌을 얘기가 많다. 그중에서도 만나게 된 일화를 다뤘다. 후에 개코와 최자에게 다이나믹 듀오 이름을 빌려도 되는지 물어봤고 감사하게도 허락해 주셨다. 샤라웃 투 개코 최자.

만남이라면 ‘영 노래방’에서의 디보를 빼놓을 수 없다.
내 기억에 그때 디보가 열아홉 살이었고 내가 스물세 살이었을 거다. 처음에 어떤 학교에서 선생님께 랩 하는 친구라고 소개를 받아 만나게 되었고, 서로 얘기를 나누다가 가사 쓴 적이 있냐는 질문에 없다고 답하길래 알려주면서 친해지게 됐다. 마음도 잘 맞아서 사람을 모아 ‘크라운 타운’이라는 크루를 결성했다. 당시 토론토에 한국인들이 많이 가는 영 노래방이 있었는데, 노래방 뒤에 매주 모여서 프리스타일 랩과 사이퍼를 즐겨 했다. 그때 디보의 랩은 정말 독특했다. 그러면서 친구들과 같이 녹음도 하고, 거기서 이 곡의 프로듀서인 DZ도 만났다. ‘붕어빵 팔던 소년 이제 beat 팔아’라는 라인이 그의 이야기다. 그때 아르바이트로 붕어빵을 팔던 DZ가 지금은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이번 < F.O.B. >는 많은 프로듀서가 참여했는데도 유기성이 굉장히 좋다. 사람이 많으면 조율 과정이 어려울 텐데.
조율 과정에서 한 명씩 만났다. < 미래 > 앨범부터 같이 작업을 해온 라우디(Raudi)와 군대에서 알게 된 아민서울(Imeanseoul)과는 군 복무 중에도 연락을 정말 많이 주고받았다. 둠스데이(Doomsday)에게는 웨스트 코스트 풍의 비트를 직접 요청했고, 홀리데이는 내가 옆에서 많이 괴롭혔다. TK는 ’88’부터 함께 해왔으니 말할 것도 없다. 아마 사전에 다져 놓은 팀워크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전부 기존에 다 알던 친구들이니까. 나 혼자는 이렇게 못했을 거다. 다들 너무 고맙다.

웹 예능과 미디어에 많이 출연하다 보니 캐릭터가 확실하지만, 오히려 그만큼 기믹이나 캐릭터로만 소비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맞다. < F.O.B. >를 내고 나서는 좀 덜한데, 예를 들어 옛날에는 던밀스가 피처링에서 기가 막히게 했다는 글이 올라오면 ‘던밀스 노래 왜 듣냐, 딱딱해말고 뭐 있냐’는 반응이 있었다. 처음에는 열 받았다. ‘Tough cookie’ 같은 싱글을 냈을 때 실력도 없는데 인맥 힙합이냐는 말이 많았다. 가끔은 억울하고 자신감도 떨어지곤 했는데, 결국 더 보여줘야 싶더라. 내가 또 그런 나쁜 글 쓰는 사람들의 생각을 돌려놓기 위해 음악을 하는 건 아니지 않나. 내가 좋아서 시작한 거고, 어차피 날 싫어하는 사람들은 내가 뭘 하던 싫어할 테니 그냥 신경 끄고 날 좋아해 주는 분들에게 멋있는 모습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요즘은 온전히 나 자신에게만 신경 쓰고 있다.

남들의 시선보다 자신에 집중하는 건가.
시간이 아깝다. 차라리 귀여운 걸 자주 본다. 집에 강아지를 기르는데, 이름이 붓따다. 몸무게가 30kg인데도 너무 귀엽다. 붓따를 보면서 마음을 정화한다.

< F.O.B. >를 준비하면서 가장 공들여 만든 트랙이 있을까.
‘망나니 Freestyle’. 내가 만든 비트로는 세상에 처음 공개가 되는 곡이다. 그리고 내가 래퍼다 보니 믹스할 때는 항상 목소리 위주로만 신경을 썼는데, 이 곡은 비트도 목소리도 전부 내 거니까 전반적인 부분에서 내가 의도한 사운드가 잘 들리는지가 중요했다.

만들면서 영향을 받은 게 있다면.
일단 와이프가 영감이 많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있던 곳인 토론토도. 앨범에 과거 모습과 학교 다닐 때의 감정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고등학교 때는 거의 농구 인생을 살았는데 또 앨범에 ‘MVP’라는 곡이 있고, 아마 현재까지의 나를 대변해 줄 수 있는 앨범일 거다. 사실 내가 태어난 시절부터는 없지만, 한 고등학교 3학년부터의 랩 라이프가 담겨있는 셈이다. 차후작은 아직 계획이 없다. 프로젝트 성으로 앨범이 나올 수도 있고, 아마 몇 년 후 아기가 생긴다면 또 재밌는 음악이 나오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팬분들께 인사 부탁한다.
사실 < F.O.B. >를 다섯 번 이상 쭉쭉 듣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항상 좋은 앨범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메시지 보내주시는 분들께 감사하고, 보답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매일 고민한다. 공연을 하면서 재밌게 공유를 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다 보니까. 어쨌든 건강하게 이 시기를 잘 버티고 이겨내서 꼭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 고맙다.

인터뷰 : 김도헌, 임동엽, 장준환
정리 : 장준환
촬영 : 임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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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이두헌 인터뷰

1980년대 음악을 기억할 때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름이 밴드 ‘다섯 손가락’이다. 그 시절 음악 젊음들에게 그들이 남긴 노래 ‘새벽기차’,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그리고 ‘풍선’은 1순위 애창 레퍼토리들로 남아있다. 특히 ‘풍선’은 2006년 아이돌 동방신기가 리메이크하면서 한참 뒤 세대 청춘들도 다섯 손가락이란 존재를 알게 됐다.

이두헌(기타)은 이 팀의 사실상 음악감독이나 같았던 존재였다. ‘새벽기차’와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을 작사 작곡했고 ‘풍선’의 노랫말도 빚어냈다. 그는 전성기 시절 투톱이었던 임형순(보컬)은 물론 원년 멤버 최태완(건반)과 투합하면서 곧 다섯손가락의 컴백 앨범이 나올 것이라는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베이스는 송골매와 위대한 탄생 출신의 이태윤, 드럼은 베테랑 장혁이 맡는다고 한다. 다섯 손가락은 현재 신곡 녹음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했다. 이두헌은 자신이 만든 카페이자 작은 음악회장인 경기 수지 소재의 ‘책가옥’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는 다섯손가락의 궤적 뿐 아니라 음악 팬이라면 귀 담아 들어야 할 의미 있는 이야기를 전했다.

다섯 손가락이 완전체로 돌아온다니 기쁩니다. 임형순과 함께 선 마지막 무대가 언제지요.
2004년에 배철수 씨가 진행한 < 7080콘서트 > 2회에 출연했어요. 그때 저희가 다시 만나서 연주를 했죠.

임형순과 이두헌 두 분의 음악적 비전 차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함께 하자’는 대의명분이 있었나보죠.
명분이라기보다는 나이가 드니까 너그러워진 것 같아요. 제가 둥글어졌다고 봐야죠. 굳이 뭐 이제 와서 ‘내 건 내 거고 네 건 네 거고’ 이럴 필요가 뭐 있나요.

이력을 많이 남기신 분들이라서 돌아온 다섯 손가락은 과연 어떤 스타일의 음악을 들려줄지 궁금합니다.
이미 써놓은 곡도 많고 지금도 곡을 계속 쓰고 있어요. 4월 중순 즈음에 드러머 장혁 씨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시작해요. 저는 사실 머릿속에 생각이 많죠. 블루스도 하고 싶고, 재즈도 하고 싶고. 그렇지만 명색이 공식적 활동인데 대중적 지향을 갖지 않을 수는 없어요. 임형순 씨는 아직도 다마키 코지같이 옛날 다섯 손가락 스타일의 음악을 좋아하는데, 저는 미국 유학 다녀오면서 좀 많이 바뀌었죠. 지금은 다룰 수 있는 음악이 많아져서 사실은 하고 싶은 것도 많습니다.

이두헌과 합을 이룰 요즘 스타일이라면 어떤 것일까요.
저는 재즈가 가장 가까운 것 같아요. 재즈 중에서도 아주 스탠더드 하거나 비밥 스타일은 아니고 컨템포러리한 스타일이요. 네오 비밥 같은 스타일이라고 해야 하나. 인스트루멘탈 같은 스타일에 보컬도 같이 생각을 하고 있어요. 요즘 키스 자렛이나 브래드 멜다우 같은 친구들도 ECM 스타일로 가기 시작하면서 클래식이나 전통 음악, 포크가 다 교배가 되니까.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것은 완전 재즈의 언어보다는 포크적인 언어, 국악적인 것들, 클래식적인 거죠.

임형순과 같이 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작곡에 팝 보컬의 개념이 필요할 텐데 이 부분도 고려하겠지요.
그렇죠. 이미 그렇게 맞춰서 쓰고 있기 때문에 다채로울 겁니다. 거기다가 또 베이시스트 이태윤 씨가 노래를 또 잘해요. 송골매 때도 그랬고 부활 때도 그랬고. 그래서 이태윤 씨의 보컬도 이번에 많이 들어갈 거예요.

임형순 이두헌 최태완은 원래 오리지널 멤버인데 이태윤과 장혁은 어떤 인연인가요.
이태윤은 1980년대 중반 그때부터 항상 저희 언저리에서 있었던 친구예요. 장혁은 후배이긴 하지만 워낙 프로고. 그래서 팀으로 어딜 나갈 때는 오래전부터 항상 같이했어요. 이 다섯 라인업으로 이미 한 10년 정도를 활동하고 있었죠.

이두헌 씨는 젊었던 시절부터 음악의 깊이와 관련한 고민이 많았던 것으로 압니다. 우선 기타리스트라는 측면에서 볼 때 다섯손가락 시절과 미국 유학에 다녀온 후 어떻게 달라졌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단어가 많아졌죠. 예전에는 쓸 수 있는 단어가 아버지, 어머니 정도였다면 지금은 부친, 모친까지는 할 수 있는 거죠. 언어의 깊이나 수준은 확실히 나아졌죠. 근데 또 그런다고 기타가 좋아지는 건 아니더라고요. 오히려 반대로 그게 더 정제가 되고 말이 적어지면서 훨씬 더 좋은 기타가 된다고 생각해요.

먼저 다섯손가락 멤버들보다 선배인 김성호와 어떻게 인연이 닿은 건지 얘기해보죠. ‘풍선’의 작곡자잖아요. 1집에도 ‘좁은 골목’ ‘작은 기쁨’ ‘슬픈 사랑’ 등 3곡이나 주었고요.
옛날 서울 신림동 살던 집 앞에 레코드가게가 하나 있었는데 거기가 중앙대 캠퍼스밴드 ‘블루 드래곤’ 드러머 분의 친형이 운영하시는 곳이었어요. 중학교 2학년 때 제가 기타를 좀 치고 그러니까 그분께서 “네가 기타를 제대로 치려면 우리 팀에 있는 성호 형을 한 번 찾아가 봐라”라고 말했고 , 저는 친구 3명이랑 김성호 씨가 살고 계셨던 강남 대치동 은마 아파트로 무작정 찾아갔죠. 거기서 오디션 비슷하게 봤는데 나머지 두 명은 집에 가라고 하더라고요. 너희는 공부해라 그러면서요. (웃음) 저 보고는 시간 되는대로 오라고 하셔서 처음엔 일주일에 1~2번 정도 가다가 나중엔 거의 맨 날 갔죠. 당시에 신림동에서 대치동을 가려면 버스를 세 번 정도를 갈아탔어야 해서 오고 가는 길이 쉽지도 않았는데 말이에요. 어쨌든 거기 다니면서 김성호 형으로부터 기타 연주부터 화성, 작 편곡까지 다 배웠죠.

당시에 다섯 손가락은 학생들인데 연습실까지 소유하면서 집요하게 음악에 매진하는 팀이라고 소문이 났던 기억이 납니다. 김성호씨 이후의 과정들에 대해서 설명 좀 부탁드려요.
일단 저희 싱어가 원래 ‘세월이 가면’을 부른 최호섭 씨였고, 베이스는 작곡가 하광훈이었어요. 근데 앨범이 나오기 직전에 두 명이 탈퇴한 거죠. 그래서 녹음을 시작했을 때 베이스는 조원익 선생이 쳐줬어요. 중학교 때부터 이미 각자가 자기 악기에서는 프로를 지향했던. 1집 멤버 정리를 해보자면 임형순, 이두헌, 박강영, 최태완이 있고 베이스는 빈자리나 마찬가지였죠. 근데 여기에 이우빈이라고 저희를 서울음반에 소개했던 매개체가 되었던 친구가 사진을 같이 찍은 거였죠. 실제로 베이스는 조원익 씨가 쳤고요.

‘새벽기차’,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이 히트하고 나서 팀 내부의 분위기는 어땠었나요.
안 좋았죠. 사실 저희는 음악적인 욕심이 많았었는데 임형순 씨가 들어오면서 대중적으로 변한 편이죠. 형순이가 가요 지향적인 친구이기도 했고 소속사도 막상 음반으로 내려고 하니까 이전 노래들은 안 팔릴 거라며 노선 변경을 요구했죠. 그러다 보니 저희 음악이 좀 더 쉽기도 하면서 상업적인 쪽으로 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죠.

그렇다면 1집이 성공할 때부터 이미 음악적 트러블이 있었겠네요.
그렇죠. 박강영 씨 같은 경우에는 음반 내자마자 아예 활동을 같이 못했어요. 녹음만 같이 한 거죠.

당시 새로운 세대의 평단이 호평하고 지원해주면서 대학생들에게 많이 알려진 것으로 압니다. 평가 가운데 기억나는 것이 있는지?
강인중 씨는 레코드사 제작부장으로 우리 앨범을 제작했고 유명 라디오작가인 왕광순, 그리고 재즈평론가 김진목 선생 등이 있겠네요. 몇몇 분은 아예 연습실로 찾아오시기도 했어요. 오셔서 얘 네들 음악은 신선하고 좋다는 얘기를 해주셨죠. 대학교 1학년 애들 작품으로 프로 음반을 만들어 보라고 했으니까 그만한 칭찬이 없죠.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같은 경우는 실제로 수요일에 빨간색 장미가 많이 팔릴 정도로 인기를 끌었어요.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이나 ‘새벽 기차’는 어떤 상황에서 쓰게 된 곡들이죠?
앨범에 실을 곡들을 웬만큼 갖춰 놓은 상황이었는데 회사 쪽에서는 지금 있는 곡들로는 히트하기 어렵다면서 두 곡 정도는 대중적인 걸 써야 한다고 했어요. 그렇게 오더가 떨어졌고 부랴부랴 급하게 쓴 노래가 ‘새벽 기차’랑 ‘수요일에 빨간 장미를’이죠. 두 곡 모두 가장 나중에 쓴 곡이고 엉겁결에 만들어진 노래입니다.

근데 ‘수요일에 빨간 장미를’에서 굳이 수요일을 붙인 이유가 있나요. 그럼 호응이 있을 걸로 생각했나요.
그냥 만든 날이 수요일이었어요. (웃음) 짝사랑했던 여학생이 있었는데 그날 퇴짜를 맞고 명동 거리를 걸어가는데 백화점 앞에서 어떤 할머니가 장미꽃을 팔고 계시더라고요. 그걸 보고 나서 버스를 탔는데 또 뒤에 여학생들이 수다를 떨어요. “밖에 비가 오는데 오늘이 수(水)요일이라서 그런가.” 이렇게 농담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할머니가 장미 팔던 모습, 비오는 수요일 이런 게 엮이면서 나온 거죠. 한창 담배 피울 때였는데 급한 대로 담뱃갑 안 종이에 줄 쳐서 멜로디랑 가사를 썼죠.

기법적으로 음악적인 실험도 많이 하셨지만 ‘수요일에 빨간 장미를’에서는 빨간색, ‘풍선’에서는 노란색을 쓰는 걸 보고 색깔 감각 그러니까 은근히 대중적인 감각도 있다고 느꼈거든요. 색감 같은 게 이두헌에게 있어서 중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색에 대한 생각이 있기도 하고 일단 무채색보다는 컬러를 좋아해요. 음악 작업을 할 때도 항상 색깔을 많이 떠올리는 편입니다. ‘이층에서 본 거리’나 ‘전자오락실에서’, ‘서울은’에서는 회색이라고 하면, 또 어떤 곡은 약간 오렌지색, 푸른색이 생각나기도 하고 그러죠. 곡 작업을 하면서 기본적으로 색깔을 생각하기 때문에 은연중에 색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간다고 봅니다.

1집과 2집이 어쨌든 많은 판매량을 기록했죠. 그런데 수록 곡 가운데 대중적으로 소화가 안 되어서 아쉽게 여기는 곡은 있나요.
최근에 새로 녹음을 진행하면서 임형순 씨가 1집에 실린 ‘고독한 이에게'(이두헌 작사작곡이다)라는 곡을 다시 녹음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다시 들어봤는데 그 당시에 어떻게 이런 노래를 썼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사도 좀 우울한 면이 있고.

말이 나온 김에 여쭤보는데요. 이두헌 음악은 왜 그렇게 사람 잡아먹을 정도로 우울했던 건가요.
저희 아버지는 이북에서 내려오신 실향민이에요. 거기선 양조장을 운영할 정도로 부잣집 아들이나 다름없었는데 일사 후퇴 막바지에 내려오면서 완전 빈털터리가 되셨잖아요. 물론 혼자 사업을 정말 열심히 하셔서 성공은 하셨는데 어쨌든 아버님의 성격이 저랑은 썩 맞지 않았죠. 그야말로 애증의 관계죠. 그게 결국엔 저를 굉장히 우울하게 만들었죠.

그런 환경에서 음악을 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그렇죠. 아버지께서 술 많이 드신 날에는 고향 생각도 나고 하셔서 난폭해지기도 하셨어요. 화목한 가정을 꿈꿨는데 그게 어려웠죠. 그러다 보니까 20대까지만 해도 “집은 가고 싶지 않은 곳”이 되어버렸고 모든 게 다 어두워졌던 거죠.

보컬에 있던 임형순이 2집 후 팀을 떠나게 되었어요. 그때 솔직히 임형순과의 갈등이 심했나요.
아니에요. 형순이랑 저는 그다지 갈등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지금도 이렇게 편하게 잘 지내는 거죠. 최태완 씨가 농담처럼 자꾸 얘기하는 건 있어요. ‘뭔가 준비된 게 (솔로) 있었을 것이다.’ 제가 보기에도 좀 그랬던 것 같아요. 그 당시에는 옷 잘 입고 솔로로 나가면 반응이 좋았으니까. 잘 모르긴 해도 일종의 제안이 있었을 거예요. 준비를 계속하다 보니까 계속 겉돌게 되는 거죠.

그리고 저희는 발표할 곡들을 공연장에서 미리 선보이는 편이었어요. 근데 아무래도 곡을 제가 쓰다 보니까 자기한테 맞는 노래가 점점 없어진다고 느꼈던 거죠. 본인이 생각하는 분위기도 아니었고 ‘전자오락실에서’, ‘이층에서 본 거리’의 가사는 무겁고 우울했으니까.

‘전자오락실에서’는 인스트루멘탈(연주곡) 아니었나요.
가사가 있었는데 심의 통과를 못했어요. 무조건 안 된다는 식이었죠. 전자오락실에서 사행성을 조장한다든지 청소년 유해시설에 대한 예찬이라는 이유를 대면서요. 그래서 3집에는 인스트루멘탈로 남았다가 4집에서 다시 가사가 생겼죠.

다섯손가락 3집으로 된 앨범에 수록된 ‘이층에서 본 거리’는 마니아들 사이에서 명곡으로 꼽힐 만큼 호평을 받았지요. 전 당시 ‘수녀’가 가사에 등장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 그건 어떤 배경에서 나온 곡인가요.
대학생 때 제가 이층에 있는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아래층 구두 부스에서 중학교 때 친했던 친구가 구두를 닦고 있었어요. 구두를 가지러 올라왔다가 몇 년 만에 우연히 절 만난 거죠. 얼마나 놀랐겠어요. 다 집어 던지고 바로 나가 버렸죠. 어린 마음에 본인은 대학을 못 나오고 구두를 닦고 있다는 현실이 좀 그랬었겠죠.

그때 마침 수녀가 지나가고, 건너편에 약국이 있는데 밑에 담배라는 간판이 붙어있고. 또 조금 있으니까 초등학교 6학년쯤 되어 보이는 애가 껌 사달라고 놔두고 가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그 상황을 그대로 썼던 거죠. 원래 가사는 ‘어릴 적 내 친구는 구두를 닦고/ 세상은 모순 속에 깊어만 가고/ 온종일 껌을 파는 아이도 있고’였어요. 이것도 심의에 걸리면서 통과가 안됐죠.

그래서인지 ‘이층에서 본 거리’가 분명히 다섯 손가락의 타이틀로 나왔음에도 많은 세월 속에서 이두헌의 솔로로 사람들이 기억을 하더라고요. 어쨌든 그 다음이 다섯 손가락의 마지막인데 3집에서 이미 반응이 많이 떨어진 상태에서 왜 4집까지 강행했나요.
이제 음악을 안 하기로 마음을 먹고 3집의 마지막에 ‘노래를 마치며’라는 곡을 넣었어요. 그러고 나서 결혼까지 했는데 머릿속에선 계속 멜로디가 생각나고 기타만 잡으면 또 새로운 코드가 생각나고 하니까. 그래서 써놓은 노래들 마무리만 하겠다. (웃음) 그런 마음가짐으로 만들었죠.

사실 저도 죄송하지만 4집은 안 샀어요. 그래도 4집까지 내면서 이두헌 씨가 거둔 음악적 성과가 있다면 뭘까요.
저는 제가 ‘주제’ 갖고 노래를 만들려고 애쓴 80년대의 뮤지션 중 한사람이었다고 생각해요.

주제라고 한다면 정확히 뭘 의미하나요.
예전에 김민기 씨나 한대수 씨가 무엇을 노래해야겠다는 생각이 있는 상태에서 노래를 만들었거든요. 막연한 대중적 접점만 찾는 게 아니라 ‘나만의 특별한 테마’를 가지려고 했죠. 도시에 대한 반대든, 동심파괴에 대한 이야기든 1980년대 들어와서는 그렇게 주제를 가지고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 거의 사라졌죠. 그래서 저는 노찾사 이런 개념과는 달리 한 가지 주제를 갖고 음악을 만들었어요. 지금도 계속 하고 싶은 것이 그런 거예요.

그 뒤로 이두헌 씨가 겪었던 음악적 갈등을 듣고 싶습니다.
프랭크 시내트라가 80살에 < Duet > 앨범으로 그래미상을 탔잖아요.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그때 제 나이가 서른 중반 정도로 기억하는데 ‘내가 음악을 팔십까지 저렇게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근데 일단 단어가 너무 없어요. 요리로 치자면 냄비 하나랑 라면 하나만 달랑 있는 거죠. 파도 없고 계란도 없고. 그래서 그때까지 음악을 하려면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고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됐죠. 사실 유학은 오래전부터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결심을 한 건 딱 그때인 거죠.

처음에는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떠난 게 아니었어요. 1993년 보스톤 소재 버클리 음악대학 프로듀싱 전공으로 갔는데 첫날 학교 퍼포먼스 센터에서 기타 과 전공 선생님 7명이 리사이틀을 한 거예요. 기타도 안 가져갔었는데 그걸 보고 바로 한국에 전화해서 기타를 보내 달라고 했어요. 그리고 바로 다음 학기에 기타를 배우기 위해서 퍼포먼스 전공으로 바꿨어요.

버클리에서 배운 것은요.
다양성이죠. 이스라엘이나 브라질 같은 여러 인종의 음악을 만나잖아요. 똑같은 기타에 똑같은 장르를 쳐도 그 나라나 개인의 인생의 색깔들이 느껴져서 굉장히 신선했어요. 그래서 음악은 결국 글로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보스턴이 물가가 비싸기로 유명하잖아요. 등록금과 수업료도 그렇고… 1996년까지 학비를 어떻게 충당을 했나요.
그때 이미 프로듀서로 활동하면서 벌어두었던 수입이 있었죠. 그리고 지금 얘기하면 아무도 안 믿을 얘기지만 그때 컴퓨터 프로그래밍 음악 2세대라고 할 정도로 작업을 많이 했어요. 조규찬의 ‘따뜻했던 커피조차도’, 김건모의 ‘첫인상’을 비롯해서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의 컴퓨터 시퀀싱을 전부 제가 맡아서 했었죠. 당시에는 편곡료보다도 비싸게 받았어요. 세션이 한 30만원 받을 때, 프로그래밍 하는 사람은 100만원을 받았으니까요. 거기다 프로그래머도 별로 없었던 시절이었죠.

이제 한국 K팝도 시장 측면에서 글로벌로 가고 있는데 BTS를 비롯한 K팝의 도약에 대해서 음악적으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 궁금하네요.
저는 사실 큰 점수는 안 줘요. 기초가 부족하다고 봐야죠. 예를 들면 비틀스를 가지고 있는 영국. 퀸이나 핑크 플로이드, 딥 퍼플, 레드 제플린을 들으면서 자란 세대의 자녀들. 심지어는 일본 애들도 마찬가지예요. 이런 친구들은 최소한 장르에 대한 존중이 다 있잖아요. BTS가 지금 K팝으로 세계에서 최고라고 하더라도 김민기, 노찾사, 신중현도 최고라고 생각해 주는 분위기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죠. 이렇게 뿌리가 약한 식물은 그렇게 크게 자라지 못하거든요.

음악적인 면에서 토양이 굳지 못한 거고 또 거기에 대한 대중들의 존중심도 부족하고. 이런 점이 아쉽죠. 어제 (이)승환이랑 같이 기타치고 놀면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번에 < 이승환과 아우들 >이라는 공연을 했어요. 근데 제가 “승환이 네가 우리나라에서 ‘이승환과 형님들’은 할 수 없다는 게 참 안타깝다”라고 했어요.

그래도 나름 우리가 외국 팝과 록을 들으면서 내공을 쌓아온 건데 어느 순간부터 뿌리가 약하다는 게 드러났을까요.
아무래도 프로덕션 개념이 발전되면서 그랬다고 봐야죠. 예전에 음반사 시스템이었을 때는 음악을 아는 분들이 포진해 있었지만, 어느 날인가부터 장사를 하는 사람이 음반을 제작하기 시작한 거죠. 음악이 예술에서 산업으로 이동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봐요. 옛날 동아기획이나 지구레코드처럼 좋은 음악을 하려고 했던 사람들의 영향력이 줄어들었죠.

홍보지원도 크게 없었고 TV에 많이 나오지도 않았었는데 KBS에서 그룹상까지 수상했다. 당시에 사람들이 다섯 손가락을 왜 그렇게 좋아했다고 보나요.
그렇게 좋아한 것 같진 않은데. (웃음) 물론 음반이 많이 팔리긴 했었죠. 회사에서 65만장이 팔렸다고 저희한테 얘기를 했으니까. 활동 당시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은 딱 한 번 불렀어요. 그 노래를 TV에서 불러본 적이 없어요. 홍보시스템은 제로였죠.

솔직히 ‘풍선’은 1집의 곡들보다는 가볍다는 이미지를 주는 곡이다. 그런데 나중에 동방신기가 리메이크해서 대박을 쳤을 때의 느낌은 어땠는지.
이 노래가 그럴 만한 곡인가? (웃음) 전혀 예상 못 했죠. 그렇게까지 재조명 받을 만한 노래인가? 근데 다시 발표했을 때 보니까 또 (동방신기의 분위기에) 맞더라고요.

그래도 새로운 세대가 다섯 손가락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죠. 김광진 씨는 동방신기가 ‘마법의 성’을 불러줘서 그 세대 아이들이 자기를 안다는 게 영광이라고 했었거든요.
저도 당연히 인정은 하지만 사실 크게 감흥은 없었어요. 김광진 씨와는 정반대네요. 저는 누구나의 뮤지션이 되고 싶지만 아무나의 뮤지션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대상으로서 저를 봤을 때 누구나 나를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지만, 아무나 날 좋아하는 건 제가 사양하겠다는 거죠.

다섯 손가락은 분명 아마추어의 순수와 프로뮤지션십을 공유한 팀이죠. 그래서 ‘새벽 기차’나 ‘풍선’이 먹혀든 게 여학생들이 들을 음반이었기 때문이라고 보는데 결국엔 그건 작사와 작곡을 주도한 이두헌 덕분 아닐까요.
그건 아니에요. (웃음) 팀이 다 같이 한 거니까. 다 뛰어난 친구들이었잖아요. 다섯 손가락 해체하자마자 최태완은 김현식부터 해서 봄여름가을겨울, 조용필까지 갔으니까. 지금도 같이 연주해보면 깜짝깜짝 놀라요.

최태완은 음악적 스승이 고 김명곤 씨 아닌가요. 우리 음악계 편곡분야 제일의 인물인데..
맞아요. 개인적으로 제일 존경하는 분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귀국했을 때 가장 먼저 전화하신 분도 김명곤 선생이었고요. 아직도 잊지를 못해요. 전화도 방금 개통하고 새로 한 번호인데도 전화를 주셨어요. “이제 너희 세대가 음악 신에서 목소리도 내고 더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정말 기대하겠다!”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그러고 얼마 안 되어서 돌아가셨어요.

이두헌 선생님을 음악가로 만든 인생의 뮤지션은 누구인가요.
먼저 한대수. 아홉 살 때 그의 ‘바람과 나’라는 노래를 듣고 그랬고. 그 후론 이정선이라는 뮤지션. 저랑 너무 가깝지만 지금도 그걸 영광스럽게 생각할 정도예요. ‘섬소년’부터 시작해서 그 이후의 모든 노래가 음악적으로 세련됐죠. 편곡이나 작곡도 잘 하셨고. 제일의 롤 모델이었죠. 물론 김민기, 한 대수 그리고, 김정호도 있지만 세월이 다 지난 다음에 한 사람만 내게 남아있다고 생각하면, 이정선 이 세 글자에요.

팝 쪽에선?
외국에서 한 사람만 고르라면 지미 헨드릭스죠. 너무 완벽해요. 연주만의 얘기가 아니라 보컬, 작곡, 톤, 뉘앙스, 뮤지션십. 그냥 모든 면에서 뛰어났어요. 그다지 높지 않은 목소리인데도 노래를 할 수 있었다는 것? (웃음) 이걸 배웠죠. 사실 저도 노래를 할 생각은 없었거든요. 그래도 밥 딜런과 지미 헨드릭스에게 용기를 얻었죠. 자기 개성이 확실했죠.

음악적으로 가장 만족했던 하이라이트 모멘트는.
남들이 볼 때는 제일 존재감이 없었을 때예요. 4집의 ‘서울은’이라는 곡의 심의가 해결이 되면서 인스트루멘탈이 아닌 노래로 나올 수 있었을 때 좋았아요. ‘하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는 도시/ 저녁 찬거리에 팔아버린 자존심이 울먹이는 곳’ 이런 가사가 들어갔는데, 들뜬 88년 올림픽 시점에서 일반적인 서울 정서와는 반대되는 곡이었죠. 하지만 음악가로서 제일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어서 좋았죠.

미국에 다녀와서 낸 앨범들은 어떤 게 있죠.
재즈부터 펑크(Funk), 라틴까지 들어있었고, 인스트루멘탈 곡도 3~개가 있는 2000년의 < Imagine >이 있고요. 그 다음에 제가 다 노래한 < Sings >, ‘두개의 시계’ 정도가 있겠네요.

기본적으로 이번에 다섯 손가락이 다시 만나게 된 이유를 뭐라고 할까요.
형순이 얘기로는 사람이 이 나이를 먹으면서 반목하지 않고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한 모습인데, 아직까지 (연주할) 손이 죽지 않고 있을 때 하나 정도 남겨야 하지 않겠냐고 얘기하더라고요.

교편은 언제부터 잡은 거죠.
귀국하자마자 2000년에 신설된 경희대학교 포스트모던 음악학과의 겸임교수를 맡았고 지금까지도 하고 있습니다. 근데 사실 교수가 잘 맞지는 않아요. 시간도 그렇고 정치의 세계 느낌도 들고. 2019년부터는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실용음악과 주임교수로 활동하고 있어요. 다음 학기부터 초빙으로 바뀌는데 그렇게 되면 이제 경희대는 정리를 해야 하는 상황이죠.

중학교 때 음악에 꽂혀서 40년 가깝게 활동을 하고 있네요. 미국 가서 공부도 하고 돌아와서 어떤 형태든 기쁨도 좌절도 겪었는데 음악은 도대체 이두헌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제 몸을 구성하는 유기물 중 하나로 봐요. 뚜렷한 의미가 있지는 않은 거죠. 사람들이 숨을 잘 쉬려고 애를 쓰잖아요. 숨이야 그냥 붙어있는 건데 호흡법 강좌를 배워가면서 하죠.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느 정도의 체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거죠.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서 너무 좋네요. 코로나 팬더믹이 해제되어 더 재미있게 활동했으면 좋겠네요.
저희 멤버들도 바라고 있어요. 특히 작은 공연을 많이 하고 싶어 해요. 원래도 그랬지만 이태윤이나 다른 친구들이 100석, 200석 규모의 공연장을 너무 그리워해요.

인터뷰: 임진모, 임동엽, 정다열
정리: 임진모
사진: 임동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