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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장호일 인터뷰

그룹 공일오비는 톡 쏘는 가사와 진보적인 사운드가 떠오르는 1990년대 X세대의 아이콘이었다. 그룹의 전신은 ‘그대에게’의 무한궤도로 신해철을 제외한 조형곤, 조현찬이 1990년에 데뷔한 공일오비에게 흡수되었으나 대중에겐 장호일과 정석원, 듀엣 포맷의 잔상이 강하다. 음악적 두뇌인 동생 정석원이 은둔자였다면 형 장호일은 연예인적 끼가 넘치는 인물로 두 사람의 묘한 시너지가 그룹의 동력으로 작용했다.

장호일 하면 동시다발적으로 공일오비가 떠오르지만, 이외의 경력도 다채롭다. 공일오비 이전의 첫 시작이었던 서울대학교 밴드 갤럭시와 신성우와 함께한 프로젝트 밴드 지니 등 음악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최근엔 솔로 1집 < Retro >에 수록되어 있던 주곡 ‘Aneka’를 재발매했고, 장호일밴드를 결성했다.

하우스와 일레트로니카 등 다양한 장르를 시도한 공일오비지만, 장호일의 DNA엔 헤비메탈이 흐르고 특히 딥 퍼플과 밴 헤일런에 강한 자극을 받았다. 기타 연주가의 축제 < 골든기타핑거 기타페스티벌 >에 첫회부터 내리 5회 연속 참여할 정도로 기타리스트로서의 정체성이 강한 그는 기타만큼은 절대 질리지 않는다고 했다.

여전히 공일오비의 장호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은데, 근황은 어떠한가요.

요즘 저희가 윤종신의 < 월간 윤종신 >처럼 월간 싱글을 내고 있습니다. 곡마다 객원 가수를 선별하는 체계죠. 정석원은 그룹의 안 살림을 도맡는 메인 프로듀서 역할이고 저는 예전부터 그랬지만 팀의 대변인 역할들 하며 공연 및 방송을 도맡고 있습니다. 코로나19 떄때 급격히 줄어들었던 공연을 슬슬 다시 시작하게 될 것 같네요.

코로나가 완전히 해제된 건 아니지만 거리두기가 완화되었는데 공연 계획을 잡고 있나요? 라인업이나 공연 진행 방식도 궁금합니다.

당장의 단독 공연은 계획에 없지만 각 지방의 문화센터 등 다른 공연들은 많이 잡혀 있습니다. 따로 준비한다기보다는 상황에 맞춰서 공연하게 될 것 같습니다. 밴드 이젠(EZEN) 당시 보컬이었던 헥스와 하고 정석원은 단독 공연에만 출연합니다.

정석원과 친동생인데 왠지 모르게 공식적으로, 그리고 비공식적으로 거리감이 있어 보입니다.

정서적으로는 거리감은 전혀 없습니다. 워낙 팀을 오래 해오다보니 화해의 과정에서 생긴 규칙 혹은 묵계가 딱 정해져 있고, 그 선은 안 넘어가기 때문에 아마 그렇게 느끼실 것 같습니다.

혹시 그 묵계 중에 하나만 공개해주신다면?

음악에 대한 전권은 정석원이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가끔 기타 연주를 요청하거나 ‘이 곡 모니터링 한번 해줘’해줘’라고할 때는 제 의견을 얘기하얘기하지만, 일반적으로 관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음악과 예술적인 측면에는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겠군요.

간섭하지 않는 거죠. 대신에 공일오비가 바깥으로 공연하러 다니거나 외부 활동을 할 때도 정석원이 전혀 관여하지 않습니다. 딱 선이 정해져 있어요. 그래도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해줄 수 있는 인생의 파트너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형은 외부로, 그다음에 동생은 내부로 딱 나눠지는군요. 그래도 정석원을 그리워하는 팬들이 많을 것 같은데요.

원래 정석원과 공일오비의 베이시스트 조형곤이 방송과 외부 활동을 기피하는 아웃사이더적인 성격이고 공일오비 당시에 단독 공연도 몇 번 안 했습니다. 그래서 정석원은 프로듀싱만 하고 외부 활동은 제가 하겠다고 공언한 거죠.

드물긴 하지만 단독공연을 하면 정석원이 나오기 때문에 팬들이 반가워합니다. 단독 공연과 행사성 공연과의 차별화라고나 할까요. 일반적으로는 헥스가 보컬을 맡지만, 지방에 다닐 때는 가끔 원년 객원 가수 중 한 명인 이장우가 동행해서 향수를 채우기도 합니다.

*이장우: 공일오비 2집 < Second Episode >의 수록곡 ‘떠나간 후에’에 참여한 객원 가수.

< 장호일 음악 인생의 세 가지 순간 >

장호일의 음악 인생에 가장 결정적이었던 세 가지 모멘트가 있었다면, 언제입니까?

공일오비의 결성입니다. 결성 당시엔 동아리 모임처럼 기념만 하고 흩어지는 일회성 프로젝트로 여겼거든요. 저희가 프로 뮤지션이 된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 했는데 이렇게 30년을 넘게 음악을 하다니 운명인가 봅니다.

사실 동물원 같은 팀엔 대학생들의 풋풋한 느낌과 아마추어리즘이 있었는데 공일오비의 음악은 그렇게 아마추어적인 느낌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당시 출현한 악기의 영향이 큽니다. 2집 때는 시퀀서가 등장하고 저희가 30대쯤 되면 샘플러가 나오게 됩니다. 사실 리얼 밴드로만 녹음한 1집은 저희가 들어도 어설플 수밖에 없었지만, 미디가 나오면서 프로그램으로 기본적인 틀을 잡고 가니 연주의 빈틈을 보완할 수 있었죠.

*시퀀서: 연주 데이터를 재생하여 자동 연주하는 프로그램 장비
샘플러: 음을 디지털화하거나 저장하며, 그 음을 소리 신호로 바꾸는 장비.

2집에서 시퀀서가 등장하면서 프로그래밍과 리얼 밴드가 공존하는 상황이 되었군요.

사실은 모든 앨범에 걸쳐 공존을 하죠. 기본 틀을 미디로 설계하고 그 위에 건반이나 색소폰 같은 실제 악기들이 같이 더해지는 형태가 되었습니다. 이런 음악 스타일이 이미지에 더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요즘 레트로가 유행인 것과 달리 당시에는 디지털이 트렌디하고 세련된 느낌이었죠. 대학생 오빠들이 최첨단 미디 프로그램으로 찍은 음악에서 미국 음악에서나 듣던 톤 메이킹과 편곡이 나오니까 요즘 말로 ‘너무 힙한 거 아니야?’ 약간 이런 느낌을 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순간은?

음악에 대한 마인드가 바뀐 카투사 시절입니다. 당시 국내 대중음악계엔 ‘이건 안되고 저건 되’라는 자기들만의 이상한 법칙이 있었고 그게 창의성을 저해했습니다. 미군들과 연주하며 ‘이렇게 하면 왜안되?’ 라는 자유로운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미군들하고 밴드를 같이 했던 건데 거기서 얻은 건 무엇입니까?

음악에는 틀이 없다는 걸 배웠고 늘 관습에 반기를 들었던 공일오비의 음악적 마인드와도 통하는 지점입니다. 한 가지 특별한 기억이 있습니다. 흑인 친구가 펑키(Funky)한 키보드 치는데 거 너무 잘 치더라구요. 연주에 감동 받아 몇 년이나 쳤냐고 물어보니 일주일이라고 답하더군요. 타고난 리듬감으로 소리를 느껴가며 연주하는 거죠.이후에 ‘음악은 배워서 되는 게 아니구나,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느끼는 대로 하는 게 음악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모멘트는 무엇인가요.

1999년 말 장호일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1집 < Retro >를 냈던 것입니다. 직접 노래를 부르는 것의 어려움을 비롯해 벽을 많이 느꼈습니다.

장호일이라는 이름으로 솔로 활동을 시작할 때 마음가짐은 무엇이었습니까?

어차피 가야 할 길이 아니냐는 생각을 좀 했었어요. 이미 그전에 신성우와 지니를 조직한 경험도 있고, 대부분의 밴드가 영원히 함께 가기엔 쉽지 않기 때문에 언젠가는 혼자 해야 한다는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보컬 능력의 부족을 느끼며 차라리 방송이나 아니면 연기 쪽으로 가볼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1집 외에도 솔로 앨범 몇 장 내셨나요?

제 명의로 된 솔로 앨범은 1999년에 나온 1집 < Retro > 한 장입니다. 공일오비 때 각 멤버가 한 장씩 솔로 앨범을 냈고 저는 < Kloma >를 발표했는데 정확하게 장호일 이름을 걸고 발매한 것은 그 한 장이에요.

< 객원 가수 체제의 배경 >

공일오비의 두 축 정석원과 장호일은 정통 보컬과는 거리가 멉니다. 정석원 씨 같은 경우는 아마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 같은 경우를 보고 음악에 대한 희망을 얻었을까요?

그것은 아까 얘기했던 ‘Why not?’ 정신과 통합니다. 내가 노래를 못하는데 음악을 해야 하겠고, 작곡에는 자신이 있다면 말씀하신 대로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라든지, 아니면 이레이저(Erasure)처럼 멤버가 2명인데 프로듀싱만 하는 그런 모양새를 그대로 저희가 닮아간 거죠.

객원 가수의 아이디어는 정석원이, 아니면 장호일이 제시했나요?

아무래도 정석원 씨 같습니다. 그는 무한궤도 정식 멤버였고 저는 초기엔 세션 멤버에 가까웠기 때문에 발언 기회가 적었습니다.

결국 공일오비는 정석원의 음악과 장호일의 퍼스널리티가 융화되는 팀이라고 볼 수 있는데, 지금 돌이켜 봤을 때 강조하고 싶은 장호일의 공헌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공일오비의 미싱 링크(전체를 이해하거나 완성하는 데 필요한 정보)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장호일이 없었으면 공일오비도 그저 음악 잘하는 여러 팀 중 하나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장호일이라는 멤버가 들어오면서 아이돌 적인 특성을 부여했기 때문에 음악성 중심의 팀들과는 무언가 다른 느낌을 준 것 같아요. 약간 날라리 오빠들 같은 모습을 좋아해 주신 것 같습니다.

< 기타를 잡게된 계기 >

두 형제는 계산된 음악, 머리로 하는 음악 같지는 않았고 약간 몸적인 음악을 한 것 같아요. 음악을 오랫동안 사랑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는데, 음악을 향한 관심이 형성되었을 어린 시절 풍경이 궁금합니다.

저는 잠깐 피아노를 배우다가 접었는데 대타로 간 정석원 씨가 재능을 발견한 거죠. 어차피 전공할 건 아니니까 당시 유행이었던 팝 피아노를 몇 개월 배우다가 선생님께서 더 가르쳐줄 것이 없다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쯤에 록 음악에 눈을 뜨게 되었고 기타라는 악기에 푹 빠졌습니다. 대구 MBC에 계셨던 아버님의 엘피를 통해 음악을 쉽게 접했던 것 같습니다. 제 인생이 이제 바뀌게 되는 순간은 딥 퍼플의 베스트 앨범 < Deepest Purple: The Very Best Of Deep Purple >을 들었을 때입니다. 딥 퍼플이라는 팀이 있다는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들은 앨범인데 첫 곡에 ‘Highway star’가 나왔어요. 곡 중간 전설의 기타 솔로를 듣고 충격을 받았죠. 그렇게 기타의 세계에 빠져들면서 월간 팝송을 읽고 딥 퍼플과 레드 제플린이라는 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타를 쳐야 하겠다 결심하게 된 순간인 거죠.

*월간팝송: 1971년 창간한 국내 최초 팝 음악 잡지

그렇게 기타 연습을 시작하셨군요.

지금 생각해보면 일본어를 번역해 놓은 엉터리 타브 악보로 기타를 배웠습니다. 일렉트릭 기타가 주요 악기인 록을 보고, 용돈 받아서 기타도 사면서 점점 기타에 빠져들게 된 거죠. 그렇게 정석원과 다른 길을 가게 된 거예요.

음악을 평생 직업으로 삼겠다는 생각이 없었는데(카투사 복무를 마치고 그는 나라기획이라는 광고 회사에 몸담기도 했다.) 무한궤도에서 다른 밴드가 파생되는 과정에서 어쩌다 보니 함께하게 되었고 정신 차려보니까 어느덧 공일오비의 30주년이 되었습니다.

무한궤도와의 인연은 어떻게 되나요?

제대하고 나니 정석원은 무한궤도에 들어가 있었고 신해철도 집에도 자주 놀러 오고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제 라이브 세션으로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신해철이 기타를 쳤지만, 라이브 할 때는 노래를 해야하니 기타 세션이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 장호일이 뽑는 공일오비 베스트 5 >

7집 정규 앨범 < Lucky 7 >까지 했으니까 일곱 장에 다 참여하셨습니다. 그 가운데서 장호일이 꼽는 공일오비 베스트 다섯 곡은 무엇입니까?

1. 텅 빈 거리에서

그 곡이 없었으면 지금의 공일오비도 없었을 겁니다. 밴드 역사의 시작점이라서 지금도 연주할 때마다 가슴이 약간 짠한 느낌이 있어요. 원래 타이틀 곡도 아니었고 노래를 한 윤종신도 다른 곡들의 녹음을 마치고 마지막에 참여한 것입니다. 그래서 초판에는 아마 B면 제일 마지막에 있었다가 인기에 힘입어 나중에 나온 판들에는 타이틀로 올라옵니다. 9개월~10개월가량 역주행한 곡이라 어떻게 보면 팔자를 스스로 개척한 곡이라고도 할 수도 있습니다.

‘텅 빈 거리에서’는 공일오비가 일회성 프로젝트라는 느낌을 사라지게 했죠. ‘이젠 안녕’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2. 이젠 안녕

그래서 노래도 팔자가 있다고 합니다. 정규 2집 < Second Episode >에 들어있는 ‘이젠 안녕’도 알아서 잘 팔자를 개척했는데 원래 이게 제목 그대로 밴드 활동에 작별을 고하는 노래였습니다. 정규 1집 < 공·일·오·비 >를 내고 멤버들이 흩어졌다가 앨범이 잘 팔리는 바람에 사장님의 부름을 받고 낸 2집이거든요. 우리는 각자 취직하고 복학해야 하니 그래 여기까지 ‘이젠 안녕’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노래 인기가 높아져 한동안 노래방 보너스 타임의 단골이 되고 이제는 졸업식을 대표하는 곡이 되었습니다.

이게 왜 졸업 노래가 됐나를 유래를 좀 살펴보니까 저희 팬 중 선생님이 되신 분들께서 졸업 노래로 ‘이젠 안녕’을 골랐고 그게 마치 구전 가요처럼 퍼지고 퍼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3.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애증의 곡입니다. 유재학 대영 AV 사장님께서는 소속 뮤지션들에 큰 간섭은 안 하셨는데 이 곡만큼은 ‘랩을 해보자’라고 제안하셨죠. 저희 입장에서는 서태지를 비롯한 몇몇 뮤지션이 빠른 랩을 구사했으니 반대로 느린 랩을 시도해보려고 했지만, 사장님 마음에 안 드셨나 봐요. 그래서 리듬 없는 내레이션을 해봤는데 이번엔 저희 마음에 안 와닿았고 원래 의도대로 진행했죠. 내정된 2집의 타이틀 곡은 ‘4210301’이었는데 팬 음 감회에서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의 불호가 많아서 청개구리처럼 이 곡을 선택했죠.


*대영 AV: 1990년대의 대표적인 레이블로 김동률, 신해철과 공일오비가 소속되어 있었다.

4. 아주 오래된 연인들

‘아주 오래된 연인들’의 데모가 참 좋았는데 1차 녹음이 생각대로 안 나왔죠. 보컬도 따로 없는 상태였다가 윤종신의 친구였던 김태우가 급작스럽게 투입되었어요. 다행히 김태우의 목소리 톤이 너무 좋아서 정석원도 바로 녹음에 들어가자고 했죠. 다만 첫 녹음은 생각 밖으로 별로여서 비상 회의 끝에 새벽 4시까지 숙소에 모여서 결국 멜로디를 바꾸고 수정된 버전을 내게 되었습니다. 그 곡으로 덕분에 언더그라운드에 있던 공일오비가 오버그라운드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김태우: 1969년 출생으로 그룹 뮤턴트 및 솔로로 활동

이 곡에 힘입어 후속곡들도 인기를 얻었는데 타이밍 좋게 < 내일은 늦으리 > 콘서트에 나가게 되었죠. TV 출연 한 번도 안 하다가 방송에 나오게 된 셈인데 사람들은 공일오비 하면 서울대 출신 모범생을 예상하였나 봐요. 그런데 김태우가 야생마처럼 무대를 휘젓고 무슨 날라리 같은 애들이 나와서 폴짝폴짝 뛰어다니니까 약간 문화적 충격을 줬던 것 같습니다. 소위 말하는 오버 나잇 센세이션이라고 하룻밤 만에 스타가 되었죠. 마니아에서 대중으로 팬의 범위가 넓어진 거죠.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늘 김태우를 기준으로 다른 보컬들을 판단하는 것 같아요. 그 정도의 가창력과 무대 장악력을 가지고 있긴 쉽지 않습니다.

*내일은 늦으리: 1992년부터 1996년까지 대한민국에서 개최된 환경보전 슈퍼 콘서트.

5. 신인류의 사랑

원래 정규 4집 < The Fourth Movement >의 타이틀 후보곡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 영화사에서 X세대 남녀 간의 사랑에 관한 음악을 요청해왔고, 감독님께서 모던한 스타일을 원한다고 하셔서 ‘신(新)인류의 사랑’을 가지고 갔더니 거절당했죠. 욱하는 마음에 이 곡을 타이틀로 밀었는데 대박이 나서 전체 앨범 판매량은 4집이 가장 높았습니다. < 응답하라 1994 >에 나왔던 가요 톱텐 연속 5주 1위와 골든컵 수상의 영예를 안겨준 곡이죠.

*KBS 가요 순위 프로그램 < 가요톱텐 >에서 5주 연속으로 1위를 하면 골든컵이라는 명예 졸업 제도가 있었다.

가사가 상당히 화제 되었습니다.

여성단체에서 최악의 가사 중 하나로 뽑을 만큼 당시에도 논란의 여지가 있었죠. 조금 억울한 게 전체적으로 찌질한 정서의 남자 얘기고 ‘신(新)인류의 사랑’이라고 한 것 자체가 이미 비꼬는 제목이거든요. 논란이 있었지만 ‘맘에 안 드는 그녀에게 계속 전화가 오고’처럼 다들 속으로 말 못하는 데 공감하는 그런 내용들을 담았죠.

정석원이 기본적으로 소심한 마인드기 때문에 가사도 억지로 만들어낸 게 아니라 본인에게서 나오는 소심남의 정서를 표현하는 거죠.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아도 속으로 생각하는 것들이 있잖아요. ‘너를 생각하며 집 앞에서 기다린다.’ 이런 심상들이 공일오비 발라드에 공통으로 흐르는 거죠. 여기에 약간 기술적인 방식이 추가되는 건데 구체적 날짜나 장소명을 가사에 넣어서 대중의 공감을 끌어냅니다.

정규 5집 < Big 5 >에서는 리메이크 곡인 ‘슬픈 인연’과 ‘단발 머리’가 히트했습니다. 유재학 사장이 이전에 조용필의 매니저였기에 허락을 받을 수 있었을텐데 ‘단발머리’를 고른 이유는 무엇인가요?

‘슬픈 인연’은 소리의 완성도가 높은 곡이고 ‘단발머리’는 저희가 항상 꾸준하게 추구해온 복고 사운드의 완성형입니다. 사실 지금의 복고 유행이 저희들 시선에서 재밌고 신기합니다. 옜날에 우리도 복고를 추구했는데, 2~30년 후의 대중음악도 복고를 지향한다는 지점에서요.

원래는 앨범 전체를 리메이크 곡으로 만드려고 했는데 사장님께서 결사 반대를 했죠. 한국에서는 그건 안 된다. 의견을 절충해서 두 곡을 만들기로 했고 저희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조용필 선배님을 빼놓을 수 없었죠. 선배님의 여러 곡 중 ‘단발머리’로 낙점했고 힘들게 허락 받다보니 부담감이 커져 녹음을 약 10차례 진행했습니다. 타이틀 곡으로 밀었는데 인기는 ‘슬픈 인연’이 더 많았죠.

돌이켜 보면 5집 < Big 5 >를 정점으로 공일오비가 하향세에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레트로로 가는 선택은 지혜로웠으나 창작곡으로 승부를 겨뤘다면 앨범 두어 장은 더 발표하지 않았겠느냐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개념이 공일오비의 음악 인생을 관통하는 모토군요.

말씀처럼 뮤지션은 본인이 하고 싶은 걸 해야 한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 길로 가면 잘 되는 게 너무 뻔하게 보이는 거죠. 밴드 초기에는 이것저것 고민도 많이 했지만, 이제는 많이 경험이 쌓였으니 ‘가고 싶은 데로 가자’ 라고 생각했습니다.

< 장호일 기타 연주의 핵심- 범용성 >

장호일의 기타 연주의 핵심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범용성이라고나 할까요. 록밴드 갤럭시로 시작한 만큼 하드락이나 헤비메탈 DNA가 있지만 공일오비는 정반대의 발라드를 했거든요. 저한텐 제일 어려운 장르가 발라드예요. 발라드 편곡법이 굉장히 어려운데 반강제로 연습하다 보니 실력이 쌓이고 스펙트럼이 되게 넓어진 거죠. 그래서 웬만한 장르는 이제 자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우스갯소리긴 하지만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덕에 한국 힙합의 시조새이기도 합니다. 힙합책에도 적혀 있어요. 신성우와 한 프로젝트 그룹 지니의 1집 < Cool World >가 한국 펑크(Punk)의 시조가 되더라고요. 1995년 작이니 크라잉 넛보다 1년 먼저 나왔거든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도움이 됐던 일이 하나 있어요. 서울대학교 밴드 갤럭시에 2기로 들어가 선배들에게 사랑과 평화 스타일의 펑크(Funk) 음악을 사사하였죠. 소위 말하는 ‘쨉쨉이’ 연주 스타일을 반강제로 주입받게 되었는데 나중에 엄청난 도움을 준 거죠. 장기간 수련이 돼 있기 때문에 또 제가 가장 자신 있는 분야가 이 펑크 장르입니다. ‘아주 오래된 연인들’ 같은 경우도 피아노가 워낙 분리해서 잘 일이지만 사실은 펑키 기타가 꽤 많이 들려요. 

이번 ‘Aneka’의 재발매도 기타리스트로서의 장호일은 다시 한번 각인시키는 사건이었습니다. 기타 축제 <골든핑거기타페스티벌>에도 수년째 참여하고 있구요.

보컬 멤버가 그룹의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해 공일오비의 앨범에는 항상 연주곡이 하나씩 들어 있었고, 그 전통이 제 솔로 앨범에도 이어져 1번 트랙은 기타 연주곡 ‘Aneka’입니다. <골등핑거기타페스티벌>에서 제 곡을 들려드리면 의미가 더 깊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이 곡을 연주할 때마다 좋아해주시더라구요. 개인적으로도 굉장히 의미가 있는 곡이고 대중들로 하여금 기타리스트로서 장호일을 생각해보게 만들어주는 곡이라서 뿌듯합니다.

< 장호일 인생의 결정적인 앨범 >

오늘날 장호일을 만든 결정적인 앨범은 무엇이 있나요? 

1. < Deepest Purple: The Very Best of Deep Purple > – 딥 퍼플

2. < 한동안 뜸했었지 > – 사랑과 평화

1번은 앞서 언급한 < Deepest Purple >입니다. 가장 중요한 ‘인생 기타리스트’는 리치 블랙모어고 가장 결정적인 곡은 ‘Highway star’겠죠. 기타라는 악기를 잡게 된 터닝 포인트가 되었으니까요. 국내 앨범은 사 ‘한동안 뜸했었지’ 들어간 사랑과 평화의 1집 < 한동안 뜸했었지 >입니다. 이 앨범을 들으며 펑크(Funk) 음악을 수련했죠.

3. < Van Halen > – 밴 헤일런

리치 블랙모어 때문에 기타를 잡았지만 가장 많이 좋아하고 따라했던 기타리스트는 에드워드 밴 헤일런입니다. 최근 우연히 밴 헤일런 음악을 쭉 듣다 보니 제가 그들의 리프를 거의 다 칠 줄 알더라구요. 옛날에 연습했던 감각이 남아있는거죠. 태핑 주법을 대중화한 ‘Eruption’은 일대 충격이었습니다.

4. < Are You Experienced > –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오히려 최근 한 10년 사이에 지미 헨드릭스를 되게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한참 기타를 배울 1980년대에는 밴 헤일런과 잉베이 맘스틴 같은 걸출한 인물들이 등장하다보니 지미 헨드릭스는 올드한 스타일이다라고 인식했습니다. ‘1960년대 후반에 이미 기타를 완성한 사람이구나’라는 걸 깨달은 건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습니다. 제가 만약 1970년대 사람이고 지미 헨드릭스의 연주를 본다면 ‘저 사람은 진짜 외계인으로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예전에는 엘피로 소리만 접했는데 요즘은 수많은 라이브 영상들을 보다보니 느낌이 새로워요.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가 않고 공연 사진들 보면 옛날 흑인들 무시당하던 시대에 관객이 전부 백인이에요. 지미 헨드릭스는 기타의 조상신이죠. 

최근에 주목한 뮤지션이 있습니까?

잔나비. 대중들에게 많이 뜨기 전부터 개인적으로 알고 지냈는데 취향 저격입니다 반복해서 듣는 음악이 몇 없는데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가 수록된 < 전설 > 앨범이 무척 좋아서 반복해서 들었어요. 혁오도 좋아하는 밴드입니다.

진행: 임진모, 손민현, 염동교
사진: 염동교
정리: 손민현, 염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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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이오공) 인터뷰

뽕, 가까우면서도 멀게 느껴지는 한 글자에 대한 탐구는 몇 년 전만 해도 분명 유행에 반하는 흐름이었다. 하지만 이 미지의 기운은 대한민국 가요계 역사에서 틈틈이 한자리씩 차지하며 시대 전체를 관통했다. 뽕짝 또는 트로트라는 이름만으로, 통속적인 멜로디나 구성진 창법이란 특징만으로 ‘뽕’을 정의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시 돌고 돌아 뽕은 무엇인가? 2017년 돌연 뽕을 찾아 떠나겠다고 선언한 댄스 음악 프로듀서 250(이오공) 역시 그에 대한 해답을 바로 내리지 못했다. 물론 초조해하지도 않았다. 충분히 시간을 두고 이박사를 비롯한 뽕짝 음악의 전설들에게 조언을 구하며 특유의 분위기를 체화했고 지난 3월 드디어 세상을 향해 문제작 < 뽕 >을 내던졌다. 기나긴 고민과 노력 끝에 나름의 결론을 도출하기까지 5년, 그간의 발자취를 되짚어 보며 한국적인 사운드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을 나눴다.

생소할 법한 ‘뽕’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예전부터 전형적인 EDM 공식에 맞춘 음악들을 즐겨 들었고 그런 사운드를 만들고 싶어 했다. 특히 직접 녹음한 목소리보다 전혀 관계없는 장르의 기존 보컬 소스들을 미디 프로그램으로 편집해서 만드는 샘플링 방식이 멋있어 보였다. 그러던 중에 어디에서 소재를 가져올지 찾아보게 되었고 탐색 끝에 내린 결론이 ‘뽕짝’이었다. 뽕짝을 원재료로 한 노래는 들어본 적도 없었고 아카이브 자체가 무궁무진해서 그야말로 노다지에 가까운 분야였다.

가끔씩이라도 듣던 음악이긴 했는지.

일부러 찾아 들은 적은 없었다. 작업을 위해 고른 뽕짝이 막상 음악적으로 어떤 요소가 있는지 하나도 몰라서 한 2년 정도는 진지하게 뽕짝만 들으면서 지냈다. 그래서 당시에 사운드클라우드도 완전히 끊었다. 플랫폼을 사용하다 보면 실시간으로 최신 노래들이 뜨는데 어느 순간 그런 것들에 쫓기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당장은 세련되고 멋있는 소리지만 한편으로는 잠시 스쳐 지나가는 스타일일 수 있다. 유행어처럼 짧게 소비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참고 견뎠다.

음악을 제대로 시작한 이후부터 스티비 원더나 마이클 잭슨처럼 의식적으로 찾아 들어야 하는 음악들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정립한 나만의 기준이 있었는데 그것들을 전부 걷어내고 그 이전의 기억으로 돌아가서 뽕을 만드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 뽕 >을 제작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주변 반응은 어땠는지.

일단 회사 사람들 외에는 음악적인 피드백을 주고받는 사람이 거의 없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만들었고 회사도 그걸 존중해 주었기 때문에 작업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별다른 접점이 없었다.

하지만 실제 공연에서 믹스셋을 틀었을 때는 반응이 달랐다. 전에 클럽 케이크샵에서 요즘 떠오르는 힙합 뮤지션들을 모아서 하는 힙합 파티가 있었다. 내가 선곡한 음악들이 행사 분위기와 맞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힙합만 틀기는 싫었기 때문에 순수하게 뽕짝으로만 1시간을 채웠다. 웬만하면 나를 앞으로 이런 애매한 환경에 놓이지 않게 하기 위한 결단이었다. 결과는 예상한 대로다. 그때 카메라가 나를 향해 있어서 영상에 담기지 않았지만 관객들이 한 명도 안 빠지고 다 나갔었다.

음악도 음악이지만 단어 자체가 주는 은근한 반감도 무시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

실제로 앨범 제목이 마음에 안 들어서 섭외에 응해주지 않은 분도 계셨다. 꼭 해주셨으면 하는 분이었어서 편지를 써서 설득해 보려 했는데 막상 쓰려고 하니까 뭐라 말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어떤 의미에서 < 뽕 >이라는 제목을 싫어하는지 알겠는데 그렇다고 내가 지금 하려는 뽕은 그렇게 뻔하고 통속적인 뽕짝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이상했다. 아쉽지만 어설프게 설명하려다 앞뒤가 안 맞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포기했다. 뽕이라고 하는 단어에 누군가는 거부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까진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앨범을 제작하면서 참고한 작품이나 아티스트가 있다면.

앨범 전체의 레퍼런스 같은 곡이 이은하의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이다. 개인적으로 한국에서 레코딩된 노래 중 가장 좋아하는 곡이기도 하지만 음악적으로 분석하면서 들었을 때 시대와 관계없이 너무 완벽한 노래다. 진보적이면서도 세련된 사운드, 애절함이 느껴지는 가사, 중간에 기술적인 부분을 과시할 수 있는 구간까지 모든 요소가 적절히 녹아 있는 곡이라서 그 노래 같은 앨범을 만들고 싶은 게 내 바람이었다.

레퍼런스가 뽕짝이 아니라는 점은 의외다.

이은하 씨가 원래 절창인데다가 꼬아가면서 부르는 편인데 그 곡에선 확 튀는 순간 없이 차분하게 눌러서 절제한다. 알고 보니 이 곡의 작곡 겸 프로듀싱을 맡은 장덕 씨가 주문한 방식이었다고 한다. 노래를 잘하는 것과 별개로 오히려 참고 부르면 더 슬프게 들릴 거라고 디렉팅을 해서 그런 노래가 나왔다고 한다. 항상 능력을 최대치로 쏟아내는 게 아니라 필요한 순간에만 그 감정을 정제해서 표현하는 느낌, 이런 부분이 여러모로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했다.

뽕짝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음악적 요소는 무엇인지.

반주의 메커니즘 자체가 매우 개인적이다. 연주자 한 명이 키보드 한 대로 모든 걸 해결한다. 자동 반주 기능을 켜고 왼손으로 베이스, 오른손으로 코드를 연주하면서 바탕을 먼저 쌓아두고 후에 여기저기서 리드 악기를 덧붙이며 멜로디를 쌓아가는 방식이다. ‘사랑 이야기’만 봐도 이박사님이 불렀던 멜로디를 찢어지는 신스 사운드로 바꾸고 거기에 모듈레이션을 걸었다. 뽕짝 연주자들이 현장에서 손으로 직접 하는 걸 나는 마우스로 하나하나 조절했다. 절대 밴드 음악은 아니다.

실제로 사운드에 엄청난 공을 들였다. 현존하는 뽕짝 음악 중에서는 최고의 소리를 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음악적으로 촌스러워자는 건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과거의 질료를 들여와 만든 작업물인 만큼 기본적으로 사운드만큼은 타협할 수 없었다. 그리고 감정적인 공감으로 호평을 듣는 것도 좋겠지만 나에겐 사운드가 좋다는 말만 한 칭찬이 없는 것 같다.

음원 사이트에는 다프트 펑크 앨범 작업을 맡았던 프랑스의 CHAB가, 한정반으로 발매한 CD에는 류이치 사카모토와 협업했던 코테츠 토루가 마스터링에 참여했다. 두 가지 버전으로 공개한 이유는.

둘 중에 어느 하나를 꼽을 수 없을 정도로 각각의 개성도 느껴졌고 차이도 컸다. 아마 들어보면 확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오죽하면 마스터링 때문에 스피커를 하나 새로 장만했다. (웃음)

앨범에 실린 11개의 곡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곡은.

< 뽕 >의 전반적인 흐름을 고려했을 땐 ‘모든 것이 꿈이었네’다. 이박사님과 함께 김수일 선생님을 만나 뵈었을 때 불러주신 곡 중 하나인데 당시 현장에 있던 모두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느끼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날 바로 투트랙으로 반주랑 가창을 녹음 받아서 어떻게 활용할지 많이 고민했었는데 그 순간의 감동을 담는 게 더 의미 있는 작업이 되지 않을까 싶어 처음 부른 파일 그대로 실었다.

앨범을 완성하고 1~2달 정도 안 듣고 있다가 마스터도 맡기고 믹스도 최종 수정을 해야 해서 ‘모든 것이 꿈이었네’를 오랜만에 들었는데 덜컥 내가 죽기 전까지 이거보다 좋은 노래를 만들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이박사와 김수일, 두 콤비와의 작업기는 다큐멘터리 < 뽕을 찾아서 >를 통해 공개되기도 했다. 어떻게 기획하게 된 영상 콘텐츠인지.

온전히 회사의 아이디어다. 나는 그냥 앨범을 빨리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는데 회사에서 먼저 앨범 만드는 과정을 영상으로 남겨보자고 제안을 했다.

사실 비트메이커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뒤에서 어떤 면으로는 아티스트보다 더 큰 존재로 활동하는 모습을 상상했기 때문에 매체에 내 얼굴을 드러낸다는 그림이 없었다. 단지 내 음악을 듣고 누가 만든 건지 찾아봐주고 알아줄 때, 프로듀서와 리스너 사이에 이상적인 관계가 성립된다고 생각하고 지냈었다. 그런데 이번 앨범을 통해 그 고정관념이 많이 사라졌다.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앞서 언급했던 두 분과의 만남 당시 직접 사용하시는 악기도 보여주실 수 있는지 정중히 여쭤봤고 흔쾌히 수락해 주셨다. 그때 들고 나오신 악기는 평생 사용하신 장비였는데 플로피 디스크를 꽂아서 저장해 둔 데이터를 로딩하는 방식이었다. 그 속엔 ‘YMCA’나 ‘몽키 매직’ 같은 옛날 노래들이 원본으로 담겨 있었고 재생 버튼을 누르는 순간 키보드 자체에서 소리가 웅장하게 뿜어져 나왔다.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스피커나 이어폰으로 듣던 음악들이 내 눈앞에 있는 악기, 연주자, 즉석 시퀀싱에 의해 물리적으로 실존할 수 있다는 걸 느꼈고 음악을 듣는다는 기준 개념 자체가 흔들렸다. 음악을 시작한 이래로 가장 임팩트가 센 순간이었다. 어차피 혼자 집에서 마우스로 비트를 만들던 사람이니까 다큐멘터리를 찍는 게 큰 의미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날 서울로 돌아올 때 내가 찍는 영상이 어쩌면 의미가 있는 기록물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뱅버스’의 뮤직비디오도 화제가 많이 됐다.

뮤직비디오 역시 아이디어를 제공해 줬을 때 가볍게 의견 정도만 첨언하는 식이고 크게 물어보지 않는다. 기왕이면 나도 완성본이 떴을 때 직접 클릭해서 보고 싶다. 결과물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스태프분께서 현장 사진을 찍어서 보내줬는데 난데없이 모텔 벽에 어떤 사람이 매달려 있었다. 마치 스파이더맨 촬영장을 보는 것 같았다. 뽕에서 시작했는데 긴 와이어를 달고 액션을 펼치는 스턴트맨이 나올 줄 누가 알았을까. 그 사진 보고 엄청 웃었다.

근 5년이란 작업 기간을 가졌다. 앨범 공개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 이유는.

코로나 때문에 1년 정도 지연된 것도 있지만 그 사이에 ‘휘날레’와 ‘춤을 추어요’가 추가되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밀렸다기보단 앨범이 완성되지 않았었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애초에 이런 결과물을 만드는 데 이 정도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긴 시간 끝에 체득한 ‘뽕’은 도대체 무엇인가.

누군가는 뽕짝을 생각하고 어떤 이는 트로트를 떠올린다. 누구나 자조적인 해석으로 한 마디씩 거들 수 있는 건 맞지만 ‘뽕’이라는 한 글자에 기본적으로 ‘촌스러움’이란 공통분모가 내재되어 있다. 나는 그걸 인정하고 시작했다. “나는 촌스러워. 난 촌스러운 게 좋아” 하면서 말이다. 물론 음악을 만들면서 너무 올드한 감성으로 가고 있는 건 아닌가 고민하기도 했는데 세련돼 보이기 위해서 억지로 꾸며대는 것이야말로 제일 촌스러운 행동 같았다. 차라리 이 촌스러움을 정말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때부터는 이유 있는 촌스러움, 즉 나의 온전한 취향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 트랙 ‘휘날레’가 유독 튀는 것도 비슷한 이유일지.

그렇다. 사운드 자체만 볼 때 뽕짝이라고 할 이유는 없지만 나를 슬프게 만들고 향수를 자극하는 소리야말로 나에겐 뽕이었다. 그런 점에서 1990년대 만화 주제가는 나에게 노스탤지어 그 자체였다. 특히 < 아기공룡 둘리 >는 엄마를 찾아 떠돌아다니는 아이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유독 아련하게 남아있다. 계속 슬프게 기억되는 어린 시절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에 앨범 마지막에 ‘휘날레’라는 곡을 넣게 되었고 이왕이면 원곡을 부른 오승원 씨가 서사를 아름답게 마무리 지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유튜브에서 오승원 씨가 비교적 최근에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신 영상을 봤다.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비현실적이고 동화적인 음색엔 변함이 없었고 동심으로 돌아간 관객들은 모두 탄성을 자아내며 무대에 깊이 빠져 있었다. 댓글들도 다 똑같은 얘기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게 그대로인데 그 사이에 흘러버린 시간을 체감하면서 복잡함 감정을 느낀 게 아니었을까 싶다.

음원 사이트에서는 누락된 ‘춤을 추어요’는 어떤 곡인가.

원곡 자체는 장은숙의 ‘춤을 추어요’지만 사실 故 신해철의 기일에 맞춰 사운드클라우드에 올리려고 했던 일종의 헌정곡이다. 앞부분에 나오는 드럼은 넥스트 ‘인형의 기사 Part Ⅱ’에 나오는 드럼을 샘플링했고 중간중간 허밍이나 보컬 소스들도 조금씩 넣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구매한 앨범이 신해철 2집인 만큼 신해철은 나에게 각별한 뮤지션이다. 여러 이유로 앨범에 실리진 못했다.

특별한 사명감을 가지고 만든 앨범은 아니지만 듣는 입장에선 이날치처럼 우리나라 고유의 정서를 이식하는 작업으로 느껴져 의미 부여를 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분명 있었어야 하는 시도인 건 맞지만 < 뽕 > 은 어디까지나 나 250의 사운드를 담은 작품일 뿐이다. 나는 태어나서 외국을 나가본 적이 한 번도 없다. 평생을 한국에서 먹고 자며 자랐기 때문에 뭘 해도 난 결국 한국인이다. 애초에 정체성을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한국인으로서 내가 가지고 있는 음악적 DNA를 고민해 본다면 그 답이 결코 국악이 될 수는 없었다. ‘국악’이라고 하면 가끔 TV에서 보여주는 민요 공연이나 국립국악원 정도의 이미지만 떠오른다. 내 삶과는 조금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 사운드 자체에서 뭔가가 느껴지진 않았다.

그에 비해 뽕짝은 왠지 모르게 친숙하고 서글프다. 다들 뽕짝 음악을 어디서 맨 처음으로 들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냥 어렸을 때 고속도로 위를 운전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 화장실 가려고 잠깐 들린 휴게소에서 우연히 듣게 된 소리, 언제 들었는지 알 수 없는 그런 음악이다. 의식하고 들은 것이 아니라 살아가다 보니 우리 삶의 배경 속에 슬그머니 스며들어 있던 음악이었고 내 음악에도 이런 정체성을 억지로 어필하기 보다 자연스럽게 녹여내기 위해 노력했다.

해외 매체에서도 이런 한국적인 질감에 신선함을 느껴 주목하는 분위기다.

뽕이라는 화두가 있어서 다뤄준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외국인들에게도 전혀 진입 장벽이 없이 신선하고 재미있는 사운드로 느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앞으로도 비슷한 맥락으로 밀어붙일 생각인지.

무슨 대단한 업적을 세운 것처럼 그다음에 뭔가를 하려는 것도 좀 그렇고, 이미 한 번 했다고 똑같은 거 두 번 안 한다는 것도 이상한 것 같다. 이번 앨범을 만들 때도 전부 내 마음대로 했듯이 그때그때의 내 감정에 충실하면서 적당한 그릇에 담으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래서 당장은 큰 변화 없이 똑같이 가려고 하고 있다.

힙합 인스트루멘탈 앨범을 제작할 계획은 없는지.

사실 힙합 앨범도 생각은 하고 있다. 살면서 가장 좋아했던 음악 중 하나인데 그걸 한 번도 안 하는 것도 이상하고 맨날 노스탤지어만 뒤지고 다니면서 음악을 하는 것도 아니니까 언젠가는 꼭 만들 생각이다. 다만 지금 시점에 힙합을 한다고 하면 어떤 사운드를 해야 할지 혼란스러울 것 같아 구체화된 건 없다.

향후 공연 계획도 궁금하다.

최대한 많은 곳에서 이 곡들을 라이브로 들려드릴 수 있게끔 준비하고 있다. 일반 힙합 클럽에서 공연하기 위해서 다른 음악들과 뽕짝 음악의 접점을 찾아야 하고, 어떤 식으로 섞어서 틀지에 대한 고민을 본격적으로 해야 하는 단계다.

답사 차원으로 다녀온 콜라텍 같은 무대에서 공연할 생각도 있는지.

물론이다. 콜라텍이 생각보다 놀기 좋은 공간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는 클럽들이랑 차원이 다르다. 사운드도 빵빵하고 반짝이 같은 조명도 막상 켜놓으면 은은하게 분위기가 산다. 술 마시고 춤추면서 논다고 볼 때 웬만한 클럽보다 쾌적함이 훨씬 높은 것 같다.

진행: 장준환, 임동엽, 정다열
사진: BANA 제공
정리: 정다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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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모노트리 황현 인터뷰

K팝이 세계화되면서 송캠프를 주최하는 기획사가 늘어나고 해외 작곡가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변화된 시스템에 의해 앨범을 이끄는 프로듀서의 존재감이 희미해진 가운데,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국내 작곡진들이 있다. 모노트리(MonoTree)는 그 가운데서도 눈에 띄는 프로듀싱 팀이다. 황현, 지하이, 이주형을 주축으로 시작한 작가(작곡/작사가) 회사는 많은 엔터테인먼트와 아이돌 팬들이 찾는 프로덕션으로 성장했다.

회사를 이끄는 황현은 샤이니의 ‘방백’, 온앤오프의 ‘사랑하게 될 거야’ 등 숨은 K팝 명곡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이름이다. ‘믿고 듣는 황현’, ‘황토벤’ 등으로 불리며 리스너들의 굳건한 지지를 받는 프로듀서를 지난 1월 모노트리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상쾌함 속에서 감성을 자극하는 그의 음악처럼 황현은 진지한 태도로 음악 세계를 풀어놓으면서도 위트가 넘쳤다.

본인과 회사에 대한 소개를 부탁한다.
작곡가 겸 프로듀서이자, 모노트리의 대표다. 모노트리는 작가들이 모인 프로덕션이자 저작권을 관리하는 퍼블리싱 회사다. 최근에는 옐로라는 아티스트를 필두로 뮤지션 제작도 겸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작가들이 모여 활동하는 곳은 찾아보기 어렵다. 회사의 설립 계기가 궁금하다.
도제식으로 작곡을 배웠고 혼자 일할 때는 비즈니스까지 스스로 했다. 음악에만 집중하고 싶어서 일본의 작가 사무소 경험과 영미권 소규모 프로덕션과의 교류에서 얻은 힌트로 회사를 세웠다. 목적은 후배양성이다. 히트곡을 만든 선배들이 여러 문제로 몇 년 안에 역사의 뒤안길로 가는 모습을 보며 작가 보호 시스템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야 오랫동안 음악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황현, 지하이, 이주형 작곡가 세 분이 함께 모노트리를 창립했다. 각자의 역할이 어떻게 되나.
막연하게 운영하다가 자연스럽게 역할이 나뉘었다. 나는 전반적인 운영을 하고 이주형은 신인 작가를 발굴한다. 지하이는 해외 송캠프에 가거나 외국 작곡가가 국내 송캠프에 참여하는 등 영어가 필요한 일을 맡고, 해외 교류가 줄어든 지금은 저작권 협회와의 소통과 퍼블리싱을 담당하고 있다.

2014년 말 모노트리 설립 이후 어떤 점이 힘들었고, 어떤 점이 좋았을까.
우선 셋 다 회사 경험이 부족해서 법인 회사를 만드는 초반 과정이 힘들었다. 나만 MBTI(성격유형검사)가 J(판단형)라서 경리 업무를 담당했다. 세금계산서 같은 오피스 시스템 구축에 힘을 쏟느라 첫 6개월은 작업을 못할 정도였다. 게다가 친한 동료들이 모여 시작할 때는 크루의 느낌이 컸기에 회사가 점차 모양새를 갖추는 과정에서 성장통을 겪었다. 다들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고, 나도 작가들과 대화할 때 대표로서 말하는 건지 지인으로서 말하는 건지 헷갈리더라.

지금은 안정기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는지.
아직 안정기는 아니다. 옐로를 제작하면서 기존에 없던 지출이 많이 생겼고 보험료가 오르는 문제도 있었다. 그렇지만 뮤지션의 제도권 편입화를 위해 우리 프로듀서들은 모두 4대 보험을 적용 중이다.

곡을 팔아서 돈을 벌자는 목표보다 시스템이 먼저였기 때문에 친한 동료가 모노트리를 레퍼런스 삼아 시스템을 구축할 때 가장 뿌듯하다. 내게 조언을 구하러 오면 가감 없이 답변하며 최대한 도와준다. 표준까진 아니더라도 괜찮은 본보기가 된 것 같다. 나는 데모 CD를 들고 발로 뛰며 회사들을 찾아다녔지만 요즘 신인 작가들은 제작사보다 우리 같은 프로덕션에 먼저 메일을 보내주니까. 보내오는 연락만큼 모노트리에 들어오길 원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니 감사할 따름이다.

좌측부터 지하이, 황현, 이주형

기업의 대표이자 프로듀서, 작사, 방송 활동 등 다양한 방식으로 모습을 비추는 황현이지만 결국 그 근간에는 음악이 있다. 하지만 그의 음악을 좋아하는 팬들도 ‘황현 스타일’이 무엇인지 콕 집어 얘기하지 못한다. 만화 주제가 같은 감성적인 노래부터 전공을 살려 다양한 클래식 악기를 사용한 곡, 재즈, 라틴, 전자음악까지, 그 넓은 스펙트럼이 어디서 왔는지 가늠해보았다.

어떤 계기로 음악을 좋아하고 업으로 삼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그냥 한 느낌이다. (웃음) 외가 친척들이 모두 미술을 해서 음악보다는 미술에 가까운 환경에서 자랐다. 나와는 맞지 않아서 다섯 살 즈음 피아노 학원으로 보내졌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가 본인 시간을 가지고 싶으셔서 그랬던 것 같다. 그 후로 계속 피아노를 치면서 칭찬을 받으니 ‘관종’의 끼가 생겼다. 또 그림은 반응이 미지근하지만 피아노는 잘 못 쳐도 환호를 많이 해주지 않나.

초등학교 6학년 때 메탈에 빠지면서 피아노 레슨을 그만두고 루나 씨, 엑스 재팬 등 일본 비주얼 록을 통해 아이돌 문화를 받아들였다. 내가 가장 영향을 받은 시기다.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 때 4년제 음대에 가겠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클래식 작곡을 지망했다. 그때도 대중음악을 하겠다는 마음은 없었고 군대를 다녀온 후 자연스럽게 대중음악으로 진입했다.

그렇다면 대중음악으로 접어든 특별한 계기나 동기는 무엇인가.
특별한 계기라면 컴퓨터로 음악을 만들던 것이다. 19살에 상경하면서 만난 캐스커 이준오를 통해 일렉트로니카를 접했고 제대 후 컴퓨터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대학교 3학년 무렵 영화 음악 작가 정재형의 어시스턴트를 하며 어깨너머로 일을 배웠다. 거기서 전공을 살리면서 할 수 있는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요 스트링 편곡이라든가 악보 작업이라든가. SG 워너비가 유행하던 시절이라 스트링이 꼭 들어갔다. 이렇게 점차 여기까지 오게 됐다.

그때 클래식, 일렉트로니카 경험이 지금 프로듀싱의 자양분이 된 건지.
그런 것 같다. 모든 작곡가가 그렇듯이 나만의 앨범을 만들고 싶었다. 코넬리우스나 사카모토 류이치같이 완전히 예술도, 대중음악도 아닌 것을 꿈꿨다. 돈도 벌어야 하고 빨리 이름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곡을 파는 쪽으로 궤도를 수정했지만. 지금은 아이돌 음악이 제일 재밌다.

작업물을 보면 라틴 음악도 좋아하는 것 같다.
첫 번째는 개인적 선호, 둘째는 사람들이 잘 안 해서다. 중학교 1학년 때 음반 가게 형의 추천으로 스탄 게츠와 주앙 지우베르투의 < Getz / Gilberto >를 처음 접했다. 어떤 언어인지도 모르고 재즈와 보사노바 음악을 몇 개월간 하루도 쉬지 않고 들었다. 당시 ‘제3세계’라는 표현 때문에 더욱 신비롭고 이국적으로 느껴졌다. 윤상과 작업하던 시기 박창학을 만나면서 더 좋아지기도 했다. 정서적으로도 라틴과 우리나라가 잘 맞는 것 같다. 내가 작업했던 카라 박규리의 솔로곡 ‘백일몽’도 사람들이 잘 하지 않는 탱고 장르다.

다른 장르에도 관심이 있나.
주로 록을 듣다 보니 록 기반이지만 록이 아닌 음악을 만들려고 고민을 많이 한다. 그 결과 탄생한 곡이 레드벨벳의 ‘Day 1’이다. 시퀀싱을 첨예하게 찍어 페퍼톤스와 일본의 심벌즈라는 팀의 스타일을 입혔다. 최근 온앤오프가 부른 < 연애혁명 >의 OST ‘이별 노래가 아니야’에도 같은 방식을 접목했다.

최근 들은 곡 중에서 재미있던 곡이 있을까.
지금 생각나는 것은 위켄드의 ‘Out of time’이다. 1980년대 일본 시티팝을 통째로 샘플링해 구성한 탑라인이 마음에 들었다. 3년 전부터는 일본 밴드 오피셜히게단디즘을 미친 듯이 좋아하고 있다. 내가 썼다고 착각할 정도로 맞춤양복 같은 음악을 하는 팀이다. 국내에서는 새소년의 ‘Joke!’나 적재의 < 서로의 서로 >, 아이돌 음악은 에스파의 ‘Next level’을 꼽고 싶다.

(좌) 스탄 게츠, 주앙 지우베르투 < Getz / Gilberto >
(중앙) 레드벨벳 ‘Day 1’
(우) 위켄드 ‘Out of time’

2008년 소녀시대의 ‘오빠 나빠’로 데뷔한 황현은 SM엔터테인먼트의 송캠프에 참여하던 때부터 마니아층을 형성했지만 그의 음악은 타이틀곡이 아닌 수록곡에 머물렀다. 그랬던 그가 모노트리의 이달의 소녀 프로듀싱에 이어, 홀로 WM엔터테인먼트의 보이그룹 온앤오프의 음악을 전담하며 전면에서 앨범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데뷔부터 함께한 온앤오프 프로듀싱을 중점으로 황현의 음악 세계를 속속들이 살폈다.

처음으로 전담 프로듀싱을 맡은 그룹 온앤오프에 황현의 특색이 많이 이식된 것 같다. 데뷔 때부터 전담한 계기가 궁금하다.
모노트리를 설립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WM엔터테인먼트 이사에게 연락이 왔다. 오마이걸도 데뷔한 지 별로 안 됐을 때다. 당시 이달의 소녀 프로듀싱에 집중하고 있어서 거절하려고 했는데 그냥 한번 만나자고 해서 갔다. 그 자리에서 신인 그룹이었던 온앤오프의 전담 프로듀싱을 의뢰받았다. 앨범 전체를 도맡아서 프로듀싱해 본 경험이 없다고 해도 잘할 거라고 하더라. (웃음)

그때 덜컥 맡은 인연이 지금까지 쭉 이어졌다. 데뷔 초반에는 다른 남자 아이돌에게 데모를 주지 못할 정도로 집중했다. 솔직히 앨범 한두 장 정도 발매하면 잘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장이나 엔터테인먼트 상황이 녹록지 않더라. 그러다 보니 오기가 생겨서 더 집중하게 됐다.

온앤오프를 프로듀싱하면서 구현하고자 한 음악 스타일이나 이미지가 있나.
팬들의 반응을 보면서 조금씩 바뀌지만 일단 나와 회사의 공통적인 의견은 ‘다른 그룹에게 어울리는 곡은 쓰지 말자’다. 다른 작가의 트랙을 가지고 수정을 해도 무조건 온앤오프의 색깔이라는 말이 나오게끔 팀의 오리지널리티를 만들려고 했다. 대형 기획사보다 자본 규모가 작은 중소 기획사가 시장 상황을 이겨낼 방법은 그것뿐이라 생각했다.

그룹의 특색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곡이나 멤버가 있을까.
곡마다 주인공이 다르고 매 앨범의 타이틀곡이 멤버들의 캐릭터를 가장 잘 드러내기에 답하기 어렵다. 타이틀곡 콘셉트가 연달아서 비슷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곡에서 모든 것이 시작한다고 생각해서 사람들이 유추하는 방향과 일치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음악에 확실한 캐릭터성이 있어야 뮤직비디오부터 안무까지 박자가 맞는다. 조금이라도 이전과 비슷한 음악이 나오면 의상이나 화장 등도 비슷해지고 재미도 덜해진다.

온앤오프가 처음 반응이 왔던 곡이 ‘사랑하게 될 거야’였던 것 같다. 지금에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데 이 곡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
가사가 온앤오프의 캐릭터를 크게 결정한다. 보통 남자 아이돌을 보면 멋있고 화려하지만 무슨 얘기를 하는지 잘 모를 때가 있다. 개인적으로 서사와 감성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화려하고 세면 해외 팬은 확실히 빨리 붙는다. 온앤오프는 서사와 감성에 포인트를 맞추다 보니 해외 팬을 빨리 모으지 못했지만 대신 탄탄한 국내 팬덤을 만들지 않았나 싶다.

특히 가사의 어떤 부분에 신경 썼나.
‘사랑하게 될 거야’에서 주구장창 사랑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원래 그 말은 아껴 써야 한다고 생각해서 웬만하면 ‘좋아한다’ 쪽으로 간다. 혹여 쓰더라도 화자가 고민이 많은 편이라 3절에서야 등장한다. ‘사랑하게 될 거야’라는 가사 역시 상대방한테 하는 말이지만 독백일 수도 있지 않나.

두 번째 타이틀곡 ‘Complete’부터는 범용적인 관계를 위해 인칭대명사를 잘 쓰지 않는다. 꼭 필요할 때는 ‘그’라고 표현하거나 성별을 모호하게 쓰려고 한다. 연인 간의 사랑이 아니라 친구 간의 우정일 수도 있고,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등 넓게 해석할 수 있으니까. 온앤오프의 두 번째 앨범인가, 세 번째 앨범 최종 수정녹음 전에 가사지를 다 확인해서 바꾸기도 했다.

과거에는 앨범 작업만 맡으면 됐지만 요즘은 경연 프로그램이나 연말 시상식에 사용할 색다른 편곡까지 필요하다. 온앤오프 역시 < 로드 투 킹덤 > 출연으로 성장의 발판을 만들었다. 이 프로그램에서 무 관객, 360도 스테이지라는 시각적인 요소를 무시할 수 없었는데 그 비하인드가 궁금하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 (웃음) 일단 온앤오프가 편곡적으로 칭찬을 많이 받았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다. 대형 기획사에서는 매번 다른 프로듀서에게 의뢰하지만 나는 멤버들이 어떻게 무대에 서는지 다 알기 때문에 잘 나왔다. 이 프로그램으로 온앤오프가 성공하지 못하면 나도 이 시간을 보상받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그때 안무가와 소통하면서 배운 것도 많다. 시간이 촉박했기에 내가 먼저 편곡하면 멤버들과 스태프들이 다 같이 들으며 의견을 냈다. 나는 음악만 해온 사람이니까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었는데 무대장치, 동선, 구간별 속도, 체력 안배 등 신경 쓸 부분이 많더라. 

작년 온앤오프가 첫 정규앨범의 타이틀곡 ‘Beautiful beautiful’로 결실을 거뒀다. 멤버들이 방송에서 1위를 하며 황현 프로듀서를 언급했다. 이렇게 좋은 반응을 얻을 때 심정이 어떤가.
일단 온앤오프의 작업물로 피드백이 올 때 가장 고양된다. 결국 노력은 배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하고. 나는 대국민 히트송이 있는 작곡가도 아니고 가수도 아닌데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졌다. 비슷한 상황의 작곡가가 거의 없어서 감사하고 신기하지만 부담스러울 때도 있다. 관심을 많이 받는 만큼 허투루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다.

온앤오프 멤버들이 동반 입대했다. 그동안의 추억도 많고 걱정도 될 텐데 남기고 싶은 말이 있나. 
내게 친구 같은 사람들이다. 다섯 명이 한 번에 입대한 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와이엇과 엠케이는 더 늦게 갈 수 있었는데 멤버들끼리 합의해서 시기를 맞췄다. 함께 하려는 의지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사실 전역 후 바로 컴백한다면 공백기가 길진 않다. 여름 스페셜 앨범 발매 후 번아웃이 왔을 때도 멤버들의 상황을 알다 보니 책임감을 갖고 < Goosebumps >까지 작업할 수 있었다.

(좌) 온앤오프(ONF) ‘사랑하게 될 거야’
(중앙) 온앤오프(ONF) ‘신세계’
(우) 온앤오프 (ONF) ‘Beautiful beautiful’

앞으로의 작업 계획이 궁금하다.
내 인생을 참치에 비유한다. 부레가 없는 참다랑어과 물고기는 멈추면 죽어서 잘 때도 헤엄을 친다. 내 생활패턴도 그렇다. 계속 바쁘게 보내다가 12월 중순 온앤오프 단독 콘서트 이후 여유가 생겼다. 10년 만에 한가로운 연말이었다.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작업실에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니 불안하더라. 1월 초에도 할 일이 없었지만 괜히 불편한 마음에 아무도 시키지 않은 작업을 했다. 

11~12월에 걸쳐 끝낸 일로는 2020년부터 참여한 부산음악창작소의 인디 뮤지션 싱글 프로젝트가 있다. 수연이라는 싱어송라이터인데 지하이가 선발하고 내가 프로듀싱했다. 경제적인 논리로 보면 맞지 않는 일이지만 인디 아티스트와의 작업이 재밌다. 앞으로는 온앤오프에 열중하느라 놓쳤던 회사 시스템들을 보완하려고 한다.

SM 송캠프 참여, 모노트리 설립, 이달의 소녀와 온앤오프 프로듀싱 등 길고 다양한 커리어 속에서 작곡가가 지켜오고 있는 신념이 궁금하다.
음악의 시대가 다시 오길 꿈꾸고 있다. 물론 꿈을 위해선 하던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직업의식만 가지고 하면 금방 지친다. 음악을 오래 하려면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그 안에서 재미를 찾아 발전해야 한다.

모노트리의 대표로서 이루고 싶은 목표는 무엇일까.
기존에 없던 형식의 프로덕션이 되길 바란다. 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다 자본이 들어가는 일이라 조금씩 만들어가고 있다. 무엇보다 지금 K팝의 굵직한 작가 회사가 된 모노트리를 프로덕션 위주의 팀으로 더 발전시키고 싶다. 우리나라는 한 회사에서 비주얼과 매니지먼트, 음악 제작까지 모두 담당하지만 해외는 분리된 경우가 많다. K팝을 선도하는 프로덕션 회사가 되면 재밌겠다. 가수가 어디에 소속되어 있든 우리는 프로듀싱만 잘하면 되니까.

인터뷰 : 장준환, 정수민, 정다열, 한성현
정리 : 정수민
사진 : 모노트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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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최엘비 인터뷰

‘영혼 없는 힘내라는 말이 더 힘든 걸 알아
또 고작 그거 가지고 그렇게까지 힘들어하냐고’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中)

청춘은 왜 아파야만 하고, 고통을 감내해야만 하는가. 이해와 공감이 결여된 사회는 많은 사회 초년생들을 점점 구석으로 내몰고 있다. 빛나는 힙합 스타들의 주변을 맴돌던 래퍼 최엘비 역시 여러 아픔을 겪으며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다. 하지만 그는 귀를 막고 밴드 브로콜리너마저의 음악을 택했다. 세상의 어떤 말보다 노래 가사 한 줄이 주는 울림을 몸소 깨달았고 누군가에게 자신의 음악도 위로가 될 수 있기를 꿈꿨다.

그 염원은 작년 11월 정규 3집 < 독립음악 >으로 결실을 맺었다. 열등감으로 물들어 일그러진 과거는 물론 냉혹한 현실에 수긍하며 살아가는 조연들의 모습을 낱낱이 기록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이끌어 냈다. ‘죽음까지 막는 음악가’의 의지를 이어받은 최엘비는 더 이상 엑스트라가 아닌 주인공으로 우뚝 서있었다. 2021년의 끝자락, 어느 때보다 행복한 연말을 보내고 있던 최엘비와 함께 그의 마지막 20대를 정리해 봤다.

최근 발매한 정규 3집 < 독립음악 >의 반응이 상당히 뜨겁다. 인기를 실감하는지.

여태까지 냈던 것들과 확실히 다르다. 음원 사이트에 댓글도 많이 달리고 SNS 개인 메시지로 장문의 감상평을 보내주시기도 한다. 지극히 개인의 경험과 생각을 녹인 자전적 앨범이지만 세상의 수많은 조연들, 즉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으려 노력했기 때문에 많은 공감을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커뮤니티나 평론 사이트에서도 언급을 많이 해줘서 사람들이 내 음악을 자연스럽게 많이 접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변화를 하루빨리 무대 위에서 체감하고 싶을 뿐이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주요 장치로 극적인 요소들이 자주 등장한다. 영화적 연출의 배경이 궁금하다.

처음부터 독립영화를 생각하고 작업했다. ‘최엘비’라는 배우가 오디션장에서 주인공 배역을 따내려는 장면을 상상했고 그렇게 처음 탄생한 곡이 ‘아는 사람 얘기’다. < 독립음악 >의 시작은 무조건 내가 오디션 보는 걸로, 대본을 읽는 걸로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중간중간 감독이 하는 평가는 따로 정해둔 것 없이 프리스타일로 녹음을 했다. 큰 틀만 정해두고 그냥 생각나는 대로 자유롭게 진행했다.

첫 곡 ‘아는 사람 얘기’부터 < 쇼미더머니 5 > 예선 탈락처럼 가장 초라했던 시절을 드러내고 스스로를 패배자라고 단정 짓는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래야 후련할 것 같았다. 앨범 작업할 때 보통 그 당시의 나를 데리고 와서 다시 꺼내곤 한다. 이번 앨범에 그때의 모습을 기록해야 이 답답한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을 것 같았고 이왕 하는 거 최대한 솔직하게 다 표현했다.

‘최엘비 얘기를 하는 최엘비를 연기하는 최엘비’가 화자로 나선 것도 같은 이유인지.

정확하다. 자신의 치부를 드러낼 때 내 얘기는 아니라면서 대화를 끌어가서 열등감의 밑바닥을 온전히 드러내고자 했다. 그리고 한 번 더 비꼬아서 들려주면 사람들이 듣기에 몰입감도 있고 재미있는 포인트가 될 거라 판단했다.

열등감과 비교의 중심엔 친구 비와이와 씨잼이 있다. 두 친구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는지.

고등학교 시절 비와이는 같은 반, 씨잼은 옆반이었다. 그 둘은 항상 같이 붙어 다닌 반면 나는 혼자 있는 걸 좋아했다. 내가 쉬는 시간에 앉아서 가사를 쓰고 있으면 둘이 옆으로 다가와 서로 랩도 들려주며 어울렸던 기억이 난다.

학생 때도 그 둘은 잘 했다. 작업량도 상당했지만 무대 위에서의 끼가 장난이 아니었다. 학교 축제 무대에 같이 선 적이 있는데 내가 제스처를 소극적으로 하는데 비해 걔네들은 웃통까지 벗고 난리가 났었다. 얘네는 나중에 진짜 크게 되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속으로 그들과 어느 정도 격차를 두었던 것 같다.

가사에도 나오지만 둘과 음악 취향도 달랐다. 크루를 함께 하면서 의견 차이는 없었는지.

애들이 피프티 센트나 릴 웨인을 들어보라고 했는데 조용한 음악을 좋아하는 나에겐 잘 와닿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내가 어떤 음악을 해야겠다는 구체적인 그림이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타협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냥 랩하는 게 재미있었다. 단체곡을 할 때도 내가 제안한 적은 한 번도 없고 잔잔한 재즈 비트에 내 노래를 따로 만들어 보는 게 전부였다. 사실 섹시 스트릿이란 이름도 맘에는 안 들어서 처음 들어갈 때 고민을 많이 했었다. (웃음)

스스로 그들과 거리를 두고 열등감을 느끼긴 했지만 유명한 친구들 덕분에 이름을 알리기 쉬웠던 것도 사실이다. 최엘비를 항상 ‘누구누구 친구’로 기억하는 세상 속에서 나 자신부터 바뀌어야겠다고 결심한 계기나 사건이 있었는지.

한 번은 행사에 가서 기리보이 형의 백업 더블링을 도와준 적이 있었다. 여럿이서 무대에 오르면 언제나 함성이 가득하다. 나는 그 환호를 즐기면서 랩을 하는데 그날 문득 정신 차리고 관객들을 바라보니까 전부 기리 형을 찍느라 바빴다. 내가 랩을 하고 있는 중에도 다른 사람이 집중 받는 상황을 접한 후에 이건 아니다 싶었다. 내가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스스로 변화의 필요를 느끼고 작업을 결심했다.

기리보이 얘기도 빼놓을 수 없다. 초기 활동명 ‘레이지본즈’에서 지금의 ‘최엘비’로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큰 일조를 한 걸로 알고 있다. 기리보이와 크루 우주비행은 어떤 존재인가.

사실 < 쇼미더머니 5 > 예선 탈락 이후 열등감이 극에 달했던 24살 즈음 음악을 관두려고 했었다. 랩은 그만하고 원래 하던 그림을 그리자고 다짐했을 때 우주비행에 래퍼가 아닌 아트 디렉터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기리 형이 요즘엔 랩 안 하냐고 물어보면서 피처링 한번 해보자고 제안을 했다. 마음은 접어둔 상태였지만 가사 쓰고 서울 가서 같이 녹음도 해보니까 또 재미있었다. 기리 형은 내가 다시 음악을 할 수 있게 만들어준 은인이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기리보이의 열렬한 팬이었다. 개인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소박한 감성을 우리나라 힙합 음악에 가장 처음, 그리고 제일 많이 접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만나서 얘기를 나눠보니까 기리 형도 나처럼 인디밴드를 좋아했다. 심지어 즐겨 듣는 팀까지 많이 겹쳐서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나에게 음악적 아버지이기도 하다.

인디밴드를 좋아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는지.

예전에 아는 교회 집사님께서 mp3에 노래를 넣어주셨는데 따뜻한 분위기의 음악이었다. 인터넷으로 알음알음 검색해 보니까 인디밴드들의 노래에 그런 향취가 묻어있었고 그때부터 유명한 팀들을 하나씩 찾아 들었다. 꼭 인디밴드가 아니더라도 잔잔한 음악들을 많이 들었다. 

주로 어떤 밴드의 음악을 많이 들었는지 궁금하다.

타이틀곡 ‘도망가!’의 피처링을 맡아주신 브로콜리너마저는 나에게 많은 음악적 영감을 안겨준 밴드다. 그리고 내가 추구하는 찌질함의 극치와 맞닿아 있는 팀이 십센치다. 1집의 ‘그게 아니고’가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캐스커, 한희정, 롤러코스터, 디어클라우드, 요조,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 파고, 못처럼 많은 인디 가수들의 노래를 들으며 자랐다.

1년 전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에서도 브로콜리너마저에게 애정을 표한 바 있다. 언제부터 좋아하게 된 건지.

입시 미술을 준비하던 고2 때부터 2년 동안 브로콜리너마저만 계속 들었다. 1집 < 보편적인 노래 >, 특히 ‘속좁은 여학생’이란 노래를 굉장히 좋아했었다. 내가 여학생이 된 것 같은 착각까지 들 정도로 음악이 전하는 이야기가 눈앞에 선명하게 묘사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그 앨범을 들으면 당시 미술 학원의 물감 냄새, 걸레 말리는 냄새까지도 다 떠오른다.

동경하던 밴드를 실제로 만난 건 언제인지.

한 유통사 인터뷰에서 깜짝 이벤트로 덕원 님이랑 전화 연결을 해 주셨고 나중에 콜라보 할 일 있으면 같이 하자고 말씀해 주셨다. 처음엔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어느 날 ‘우리 공연하는데 같이 할 수 있겠냐?’라고 연락을 주셔서 인연을 쌓게 되었다.

사실 잘 알지도 못하는 래퍼가 갑자기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이란 노래를 들고 나와서 찬양하고 있었으니까 혹시나 부담스러워하시면 어쩌나 하고 고민도 했었다. 실제로도 처음에 듣고 살짝 부담스러웠다고 하셨다. (웃음) 그래도 지금은 다 같이 단체 방에서 꾸준히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전작과 동일한 위치에 있는 마지막 곡 ‘도망가!’에서 밴드가 실제로 모습을 드러내며 ‘죽음까지 막는 음악가’의 의지를 그들과 함께 실현했다. 같이 작업한 소감이 남달랐을 것 같다.

거의 10년 넘게 스피커나 이어폰을 통해 듣던 목소리가 내 눈앞에 실존한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직접 만난 것도 믿기지 않았지만 작업 의뢰를 드린 이후도 적잖이 놀랬다. 특별히 내가 주문한 게 없었다. 정해진 멘트 없이 곡 내용만 설명해 드렸는데 단번에 의도를 파악하셔서 녹음도 바로 오케이가 났다. 브로콜리너마저로 출발했던 내 음악에 그들이 도착한 순간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선망하는 아티스트임은 틀림없지만 분명 독립이라는 취지에 맞춰 피처링을 완전히 걷어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협업을 해야겠다고 다짐한 이유가 있을지.

원래 전부 혼자 하려고 했었다. 근데 작업을 하면 할수록 누군가가 마지막에 등장해서 ‘하나 둘 셋 하면 도망가’라고 밀어주는 장면이 계속 떠올랐다. 내가 브로콜리너마저의 음악을 듣고 자랐으니까 내 우상의 격려로 마무리를 지어주는 게 이 앨범의 완성이라고 생각했다.

앨범 전반에 부모님을 향한 존경과 애정도 느껴진다.

‘독립음악’의 노랫말에도 쓰여있지만 나는 특이한 아이였다. 어릴 때부터 행동 강박이란 걸 앓았는데 그것 때문에 내가 상상하는 모든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움직이는 끈을 보고 뱀을 떠올리고, 그 뱀이 똬리를 틀고 있을 때의 포근함까지 연상하는 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학교에서는 애들이 멀리하던 편이었다.

하지만 엄마, 아빠는 믿고 기다려 주셨다. 내가 혼자 빠져있는 그 세계를 즐기도록 놔뒀고 오히려 그 공상을 발전시켜서 그림 같은 걸로 표현하도록 힘을 불어넣어 주셨다. 그때 받은 사랑이 아직까지도 내 음악의 영감이 되고 내 화법으로 자리 잡는데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집중력 있는 행동이 곡 작업할 때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어떤 상황을 볼 때 멀리서 보는 게 아니고 돋보기로 보는 것처럼 최대한 가까이 관찰하려 한다. 상황을 세세하게 묘사하다 보니까 들었을 때 그 장면들이 상상되고 가사, 연주의 색깔과 온도로도 드러난다. 음악을 하게 되면 브로콜리너마저처럼 소박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고 싶었는데 이런 점들이 고스란히 내 노래에 녹아들면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 같다.

가장 도드라지는 곡을 뽑아보자면.

처음 담배 피울 때의 기억을 더듬어 만든 ‘구름구름’이란 노래가 있다. 만화를 그릴 때 속으로 하는 생각을 말풍선에 담곤 하는데 구름처럼 피어나는 담배 연기가 꼭 말풍선 같았다. 그래서 담배 피우는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두고 그 말풍선 속에 표현들을 채워나갔다. 다른 곡들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을 만화처럼 몇 개의 컷으로 구체화하는 편이다.

그림이나 학업에 대한 미련은 없는지.

앨범 커버 작업할 때도 어느 정도 밑그림을 그려서 디자이너에게 전달하기 때문에 큰 미련은 없지만 요즘 내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그림으로 표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부쩍 많이 든다. 사진을 찍든 그림을 그리든 하나하나 내 손을 거쳐서 하나의 아트워크 단편집을 만들어보고 싶다.

과거 퍼그 모양의 복면을 눌러쓰고 활동했을 만큼 강아지 ‘율무’도 굉장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애완견을 넘어 또 한 명의 가족인 ‘율무’는 어떤 존재인가.

감정이 메말랐을 때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늘 가지고 있었다. 항상 옆에 있길 바라다보니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닌 동물이 되었고 실제로 키우게 된 건 성인이 된 이후다. 씨잼과 행사를 뛰면서 5만원씩 벌었고 그렇게 모은 40만원으로 데리고 온 친구가 강아지 율무다.

퍼그는 얼굴에 주름이 져있어서 기분이 좋을 때도 인상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웃고 있지만 슬픈, 웃픈 모습을 보면 꼭 나를 보는 것 같았고 내 음악도 퍼그와 닮아 있다고 생각해서 데리고 왔다. 처음엔 엄마가 반대도 많이 했지만 지금은 나보다 더 아들처럼 생각하고 있다. 일종의 분신이다.

‘율무’는 물론이고 용궁으로 떠난 물고기 ‘삼칠이’와 현재 키우고 있는 햄스터 ‘콜리’만 봐도 동물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키우기 전에 한 다섯 달 정도는 공부를 한다. 나한테 온 친구들은 최고의 환경에서 살게 하자는 생각이 있어서 애착이 좀 남다르긴 하다. 그 동물의 역사까지 찾아보고 하니까. (웃음) 조만간 내가 키운 동물들의 기억을 모아 하나의 얘기, 하나의 앨범으로 제작하려 한다.

< 독립음악 > 이후에 세워둔 계획이 있는지.

당장 대면 행사로 진행하긴 어렵겠지만 상황이 나아지는 대로 단독 콘서트를 꼭 열고 싶다. < 오리엔테이션 >부터 < CC > 그리고 < 독립음악 >까지 엮어서 하나의 연극으로 만들고 싶다. 짧은 연기 사이사이에 랩을 하는 식으로 스토리가 있는 공연을 구성하고 싶고 코로나가 풀리면 바로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준비 중이다.

그럼 이번 앨범으로 대학교 시리즈가 마무리된 것인가.

내가 계획한 건 4부작이다. 아직 < MT >가 남아있다. < 독립음악 >이 혼자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이었다면, < MT > 즉 멤버십 트레이닝은 전곡 피처링으로 채워 멤버들과 랩으로 여행을 떠날 계획이다. 여태까지의 작업 중에 제일 즐거운 감정으로 임하고 있다. 학교를 다닌 지 하도 오래돼서 나중에 재입학 해서 엠티를 한번 다녀와 볼까도 생각했다. (웃음)

그 전에 앞서 얘기했던 동물들이 커버를 장식하는 앨범을 먼저 발표할 예정이다. 제목은 < 푸른바다38 >이 될 것 같다. 예전에 만들었던 노래들을 상자에 담아 나룻배를 타고 미지의 섬으로 찾아가는 스토리를 기획하고 있는데 결말은 안 정했다. 그걸 두고 올지 아니면 그대로 다시 가지고 나올지는 모르겠다. < 독립음악 >처럼 내 경험을 담아 또 한 편의 서사를 써보려 한다.

최종적으로 < 독립음악 >이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이고 그 대상은 누구인가.

빛나는 주연 뒤엔 현실에 맞춰 조연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당신들이 결코 패배한 게 아니라는 걸 알리고 싶었다. 꿈을 향해 나란히 같이 걷고 있는 모두가 결국엔 각자의 삶에서 주인공이기 때문에 내 노래를 듣고 스스로를 많이 아껴줬으면 좋겠다.

< 똥파리 >라는 영화가 있는데 극의 주인공은 흔히 우리가 피하고 신경도 안 쓰는 그런 사람이다. 근데 그런 사람도 결국 자기 모습을 조명하는 영화 안에선 주인공이 된 거다. 저마다의 스토리가 있는 거고 그래서 나도 조연들의 마음을 대변한다는 생각으로 만든 것 같다.

인간 최재성의 20대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그 이유는.

최근에 보고 있는 웹툰의 제목이기도 한데 내 20대는 ‘찌질의 역사’다. 패배감에 젖어 있고 연인과의 이별에도 힘들어하며 찌질하게 살았는데 이제 그 역사가 끝나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려 한다. 그래도 < 독립음악 >을 통해 열등감으로 물들었던 내 과거를 어느 정도 털어낸 기분이 든다. 실제로 씨잼, 비와이는 알지만 나를 몰랐던 분들도 이제 너도 주인공이라고 말을 많이 해주신다. 사람들이 보내주는 글을 보면서 위안을 얻은 만큼 감사한 마음을 담아 꾸준히 곡 작업을 이어갈 것이다.

눈앞에 다가온 30대, 앞으로의 ‘최엘비 유니버스’는 어떤 모습으로 그려가길 바라는지.

어린 티만 살짝 벗어도 만족이다. < 오리엔테이션 >이든 < CC >든 다 대학생, 젊을 때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나도 이제는 좀 어른의 얘기를 해보고 싶다. 그러니까 앨범 속에 투영하는 ‘나’도 같이 성장하는 느낌으로 가져가고 싶다는 말이다. 서른이 된 만큼 또 말도 안 되는 거 막 시도하고 만들어 볼 예정이다. (웃음)

재차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을 그의 한 마디. 지는 걸 부끄러워하지 말고, 우는 걸 창피해하지 말자. 우리는 이미 각자의 인생에서 주인공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더 아껴주자. 아픈 과거를 드러내면서도 인터뷰 내내 수줍게 미소를 머금은 그의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청춘의 얼굴이 아닐까.

그때그때 떠오르는 ‘내 얘기’를 음악으로 다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선언한 최엘비. 또 어떤 평범한 이야기로 가장 보통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지 기대하며, 그의 선한 영향력이 널리 퍼지길 기원할 뿐이다.

인터뷰: 정다열, 장준환, 김성욱
촬영: 김성욱
정리: 정다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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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Sound check, 엔지니어 – 나의 명곡, 나의 명반] 임창덕

음향 기술의 발전은 음악을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으며, 누구나 손쉽게 즐길 수 있는 문화로 바꿔 놓았다. 대중음악은 그렇게 탄생했다. 음악을 많은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곡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지만, 노래에 ‘대중성’이라는 특수성을 더하는 데에는 음향 엔지니어 혹은 음향 기사라 불리는 이들의 힘이 결정적이었다.

음악가들과 가장 밀접한 위치에서 음악을 조율하는 이들은 누구보다 소리에 민감하고, 누구보다 많은 양의 음악을 분석한다. 녹음, 믹싱, 마스터링에 프로듀싱까지 음악 제작의 거의 모든 부분에 참여하는 최고의 음향 전문가들은 자신의 명반으로 무엇을 뽑았을까. 이즘 필자, 독자, 라디오 PD에 이은 ‘내 인생의 음악’ 시리즈를 위해 직접 나섰다.

첫 트랙은 ‘부밍사운드’의 대표이자 국내 음향 기사 중에서도 대표급인 임창덕 엔지니어다. 활동 기간만 40년에 가까운 그는 김건모, 김현철, 지오디, 코요태 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가수들과 전성기를 함께 누볐다. 경력이 긴 만큼 어느 시대의 어느 음악을 꼽을지 궁금했다. 선택지가 많으면 고르기 더 어려운 법이니까.

가장 먼저 나온 인물은 요 몇 년 사이 ‘시티팝’이 유행하면서 반강제로 무대에 복귀한 김현철이다. 임창덕 기사는 그의 모든 음악을 추천했지만 깊은 고심 끝에 김현철을 1990년대 스타로 만든 ‘달의 몰락’(1993)과 재즈의 향이 깊게 밴 ‘왜 그래’(1995)를 골랐다. 퓨전 재즈를 좋아하는 그의 취향과도 연관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사운드에 대한 이해가 남달랐던 음악가를 물어봤을 때는 고민 없이 김현철을 불렀지만, 그와 함께 언급한 뮤지션이 있다. 임재범의 ‘너를 위해’를 썼던 프로듀서 겸 작곡가 신재홍이다. 그는 재미교포 알앤비 듀오 애즈원과도 꾸준히 작업했는데 임창덕 엔지니어는 이들의 2003년 정규작 < Never Too Far >에서 비교적 덜 알려진 타이틀 곡 ‘Mr.A-Jo’를 자신의 리스트에 추가했다.

인생 노래를 고민하던 중 낯선사람들 동명의 데뷔 앨범 < 낯선사람들 > 얘기를 꺼내며 아티스트들과 있었던 일화를 들려주었다. ‘낯선사람들’은 재즈 스타일의 보컬이 중심인 그룹으로 이 팀의 1집과 2집 레코딩도 임창덕 기사가 전담했다. 초기 멤버 이소라의 목소리에 반했던 그는 이후 동아기획에서 솔로 음반을 준비하던 이소라를 다시 만났다.

1995년 < 이소라 1집 >에서 (계속해서 등장하는) 김현철이 작사작곡한 ‘난 행복해’를 녹음하던 당시 좋은 느낌을 받았다는 임창덕 기사의 말처럼 이 앨범과 노래는 큰 히트를 쳤다. 작업 후 쫑파티 겸 대낮에 과천 어린이 대공원에 간 이들은 맥주를 딱 한 잔씩 마시고는 ‘잘해 보자’ 얘기하며 헤어졌다고 한다. 앨범 위주의 장시간 작업이 많아 금방 정이 들던 시절의 재미난 추억이다.

임창덕의 간택을 받은 명반은 낯선사람들의 < 낯선사람들 >, 애즈원의 ‘Mr.A-Jo’, 김현철의 ‘달의 몰락’과 ‘왜 그래’다. 음향 엔지니어이기 때문에 누구나 인정할만한 거장의 작품이 뽑힐 거라 예상했지만, 그는 ‘지금은 아닐 수도 있지만 당시에는 음악적으로도 그렇고 사운드가 좋았다’며 회답했다. 그렇다면 전문가의 입장에서 그에게 영향을 준 음악들은 무엇일까.

어찌 보면 뻔하지만 모두가 기다렸을 답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마이클 잭슨과 토토를 들으며 테크닉을 다진 그는 특히 < Thriller >, < Bad >, < Dangerous >로 마이클 잭슨의 전성기 엔지니어링을 담당했던 브루스 스웨디언을 추천했다. 세 앨범 모두 그래미 최우수 엔지니어드 레코딩(비클래식 부문)을 수상했다. 마이클 잭슨에 대해서는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좌 브루스 스웨디언(Bruce Swedien),우 GRP Records 로고

퓨전 재즈와 디지털 작업 방식으로 유명한 GRP Rec에서도 드럼, 베이스를 많이 참조한 그는 이 외에도 핑크 플로이드, 휘트니 휴스턴, 록, 발라드 등 특징, 분야별로 잘하는 엔지니어의 소리를 파고들었다. 예의 음악들을 접했을 때 느꼈던 감성, 감정을 자신의 사운드하고 비교하면서 좋은 소리와의 대비점을 연구했다. 순수하게 혼자서 노력한 이 오랜 시간이 지금의 임창덕을 낳았다.

직업적인 이유로 전 장르를 취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그는 퓨전 재즈를 제일 좋아한다. 최근에는 클래식도 듣고, 흐름을 알기 위해 국내 가요와 미국에서 히트하는 곡들도 청취하고 있다. 누구나 그렇듯 그 역시 모든 음악에 공감하기는 쉽지 않지만 공부를 하기 위해서 듣고 있다고 전했다.

음악 얘기를 마무리하며 그가 긴 시간 지켜본, 그리고 지켜온 음향 업계의 동향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현장이 열악했던 1980년대부터 K팝에 세계가 주목하는 2022년까지 음악, 음향뿐 아니라 세상은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중이다. 우여곡절은 물론이거니와 최근 코로나 사태까지 그가 현업에서 겪은 풍파를 들어보자.

과거와 지금의 업계 분위기를 비교해 보면 어떤 점이 다른가요?
요즘은 가르쳐주는 기관이 많다 보니 학생들이 기본적이거나, 음악적인 부분들까지 다 알고 있다. 접근이 쉬워졌다. 심지어 컴퓨터나 기계 관련해서는 젊은 엔지니어에게 내가 배우기도 한다. 아날로그로 진행할 때는 내가 다 했었는데 지금은 컴퓨터가 다 하더라.

코로나와 함께 콘텐츠 시장은 영상이 지배한 지 오래다. 2022년, 음원 시장의 방향과 포맷의 형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러한 시장 흐름에 맞춰 ‘부밍사운드’도 오디오만 하는 곳이 아닌 영상도 함께하는 곳으로 바뀔 예정이다. 올해부터는 영상 후반 작업도 할 수 있도록 구조를 바꾸고 있다. 그리고 돌비 애트모스 믹싱도 계획 중이다.

* 5.1 서라운드 사운드 : 전면 좌우, 중앙, 후면 좌우 총 5개의 채널과 저음 전용 채널을 활용한 오디오 시스템.
* 돌비 애트모스 : 5.1에 천장 4곳과 좌우 2곳을 추가해 상하 개념이 들어간 7.1.4 서라운드 시스템. 환경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LP, CD, MP3 등 음악의 다양한 플랫폼을 경험하셨는데 엔지니어 입장에서 각 플랫폼과 그 변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LP가 제일 마음에 든다. 잡음 때문에 불편하지만 완벽한 사운드를 구현하는 건 아날로그라고 생각한다. 아날로그로 시작했으면 아날로그로 끝나야지, 사람 귀가 디지털은 아니잖아요? (웃음) 소리의 파형에서 디지털은 아날로그를 표시만 한 거다. 아날로그가 정말 따뜻하고 음폭이 넓다. 편리성을 위해 디지털화되고, 아날로그를 모르는 세대가 더 많다 보니 사람들이 특유의 예쁜 소리를 모르는 것 같아 아쉽다.

돌비 애트모스의 경우 채널 수가 매우 많지만 사실 제대로 감상하기 어렵다. 그만큼 스피커를 놓기도 힘들고. 5.1 서라운드 사운드도 해당 시스템으로 플레이하면 공간감을 느낄 수야 있겠지만 그걸 다시 2채널로 모으는 것 아닌가. 약간의 공간감은 전해져도 완벽하진 않다. 물론 새로운 방식을 추구하다 보니 스테레오로 들어도 평면적이 아닌 입체적인 사운드가 만들어져서 도움은 된다고 본다.

▶왼쪽부터 김종진(봄여름가을겨울), 임창덕, 장기호(빛과 소금), 박성식(빛과 소금)

시대의 요구에 따라 대학들이 음향 관련 전공을 늘렸음에도 여전히 ‘음향’과 ‘음악’을 동의어로 보는 이들이 많다. 그만큼 이 분야에 대한 정보와 관심이 적은 탓이다. 인터넷의 발달로 전문 지식은 수없이 쏟아지는 것에 반해 피와 살이 될 선배의 식견은 상대적인 기록이 부족하다. ‘조언’이 ‘라떼’로 바뀐 지 오래지만 그 한 잔조차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학습 자료다.

음향에 관한 공부는 어떻게 하셨나요? 비결도 궁금합니다.
당시에 공부라는 개념은 없었다. 교육 기관도, 책도 없어서 혼자서 도제식으로 굉장히 어렵게 익혔다. 물론 조금씩 배우기도 했는데 그때는 납땜하는 방법부터 배웠다. 음악적으로는 이론이나, 실기를 배우기보다 많이 들으면서 비교, 분석하는 시간을 가졌다.

선생님의 작업 방식이 궁금합니다. 본인만의 철칙이 있으신가요?
처음에는 음악을 쭉 들어본다. 음악의 기초가 되는 드럼과 베이스로 중심을 잡고, 곡을 전체적으로 구상한다. 이큐(이퀄라이저, Equalizer), 컴프(컴프레서, Compressor) 같은 이펙트로 사운드를 정리하면서 나머지 악기를 얹는다. 엔지니어라면 누구나 다 그렇게 한다.

구상하고 풀어가는 과정에서 먼저 공간을 구성한다. 홀(hall), 룸(room), 바로 옆에서 듣는 것처럼 말이다. 징크스 같은 건 없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한다. 내가 무언가 놓치고 있다고 느낄 때는 외부의 좋은 사운드를 살펴본다.

음악도 트렌드에 따라 변하는 것처럼 음향도 변하지 않나. 그러한 유행을 따라가는 편이신가요, 아니면 자신의 사운드를 밀고 나가는 편이신가요?
믹싱을 오래 했다 보니 기준점은 확실하게 있다. 나만의 틀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이 원하는 소리가 있다면 거기서 절충한다. 허용치 안에서는 수용하고 그 이상은 거절하기도 하는데 처음 하는 엔지니어들은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자칫 휘둘릴 수도 있다. 중심이 없어지는 거다. 프로듀서가 원하는 대로 다 하면 해결이 안 된다.

약 40년 가까이 활동하신 대선배의 입장에서 이제 시작하는 후배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요즘은 컴퓨터가 발달해서 혼자 음악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기회가 점점 줄어드는 거 같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음악적 역량을 키우라고 말한다. 프로듀서 역할도 해보고, 엔지니어 역할도 해보면 좋은 소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본다. 엔지니어가 프로듀싱하면 소리가 좋은 음악이 나올 수밖에 없다. 직접 주체가 돼 봐야 한다.

예를 들어 핑크 플로이드와 작업했던 알란 파슨스는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라는 자신의 이름을 건 팀으로 본인이 프로듀싱한 앨범을 냈는데 엔지니어로서 역량을 갖추고 있다 보니 사운드도 기가 막혔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프로듀싱 능력도 소홀히 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가끔 음악만 공부한 사람들은 사운드를 잘 몰라서 많이만 넣으면 좋은 줄 안다. 킥 드럼(kick drum) 7개, 스네어(snare) 5개, 아니면 200채널 넘게도 가져온다. (웃음) 합치면 좋은 줄 알고 욱여넣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위상만 나빠지고, 사운드를 해치는 첫걸음이다.

인터뷰 : 임동엽, 임선희, 백종권
정리 : 임동엽, 임선희
사진 : 임동엽, 백종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