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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이(SAAY) 인터뷰

사람이 가장 멋있어 보이는 순간은 언제일까. 쎄이(SAAY)와 대화를 나누며 깨달았다. 그것은 자신이 걸어온 발자취와 빚어낸 결과물에 자부심을 느낄 때라고. 유년 시절 가족의 이야기부터 시작해 20대의 궤적을 담은 정규 2집 < S:INEMA >, 그리고 앞으로의 포부까지 드러내는 그에게서는 하나의 예술가로서 가진 숭고한 열망이 보였다.

스스로 말이 정말 많은 ‘투 머치 토커’라며 시작부터 너스레를 떨었던 쎄이. 유니버설 뮤직 사무실에서 1시간 남짓 이어졌던 인터뷰는 진지한 문답이 오가는 가운데 소탈한 웃음이 함께했던 시간이었다. 추가 질문까지 능청스레 유도할 정도로 음악에 진심인 아티스트를 보며 속으로 연신 감탄을 삼켰다.

신보 < S:INEMA >를 들고 돌아왔다. 어떤 작품인지 소개 부탁한다.
내 20대를 녹여낸 앨범으로 일종의 결산이자 내 20대에게 마무리 인사를 하는 역할이다. 우여곡절이 굉장히 많았는데 크게 무너질 수 있던 상황 속에서도 그 시기를 견뎌준 스스로에게 정말 고마웠다. 그리고 비슷한 상황에 있는 분들에게 나도 그래봤고 그래도 괜찮다는 위로도 해주려 했다. 실제로 소셜 미디어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메시지를 보내는 분들이 많다. 일일이 답을 해드릴 수 없는 만큼 음악으로 대신 ‘너무 자책하지 말라는’ 그런 해답을 드리고자 했다.

앨범 타이틀에도 표했듯 ‘영화’ 콘셉트를 취했다.
이번 작품을 구상할 때 모든 이야기가 모이니 한 편의 영화처럼 보였다. 쎄이의 시네마라는 의미로 ‘Cinema(영화)’의 첫 글자를 ‘S’로 바꿨고, 중간에 있는 두 점(:)은 10대부터 20대까지를 표현하는 상징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20대에는 특히 의지가 넘쳐 불필요한 부분까지 날카로웠던 적이 많았다. 백지 스케치북 같은 나 자신을 너무 다양한 컬러로 물들이려고 애썼는데,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서른이 되어 돌아보니 한 편의 흑백 영화 필름 같아서 뮤직비디오까지 전부 흑백화 시켰다. 경험과 노하우가 많이 쌓였으니 이제는 다른 열린 시각으로 열심히 색을 채워가겠다.

‘Interstellar’, ‘Sin City’, ‘ROCKY’처럼 영화 제목을 딴 곡들이 많다.
< 씬 시티 >의 경우 정말 또 나오기 힘든, 천재적인 작품 같다. 컬러 영화 시대에 일부 포인트만 빼고 전체를 흑백으로 만든 감독은 오늘날의 사회를 미리 본 느낌이다. ‘ROCKY’도 비슷한 맥락에서 록 장르의 스피릿에 영화 < 록키 >를 겹쳤다. 세상의 바닥을 찍고 모두가 나를 향해 칼을 겨눈 듯했을 때 썼던 곡으로, 열 번 쓰러지면 열한 번 일어나는 주인공의 메시지를 결합했다. 안 좋은 기억까지 꺼내 음악으로 빚는 과정이 내가 불쌍하게 보일 정도로 힘들었지만 끝내고 나니 사우나에서 땀을 뺀 듯이 개운했다

< 인터스텔라 >의 경우 할머니께서 말씀해 주신 윤회 사상이 온전히 투영된 영화라 생각한다. ‘그래도 우린 답을 찾을 것이다’라는 메시지가, 어떻게 보면 답은 정해져 있으니 결국 우리 모두 그곳으로 향할 뿐이라는 말이라 해석했다.

인트로 트랙 ‘Everything comes n goes’에 그 메시지가 잘 담겨있는 듯하다.
할머니께선 돌아가시기 한참 전부터 어디 묻거나 하는 대신 아무 곳에나 뿌려 달라고 하셨다. 모든 것은 돌고 도니 모르는 대로 살아가면 되고 한 번에 담아두려 하지 말라는 인생관을 항상 강조하셨다. 임종 후에 1년 가까이 힘들어하다가 < 인터스텔라 >를 여러 번 돌려 보면서 그래도 어딘가 계실 할머니를 떠올리며 슬픔을 아름답게 승화하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초반부의 ‘Everything comes n goes’와 ‘Interstellar’가 신보의 중심을 튼튼하게 지탱하고 있다.

영화적 요소를 들여와서인지 러닝타임도 1시간이 넘는다.
아티스트라면 앨범을 그냥 툭툭 내뱉으면 안 되고 사명감이 뚜렷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정규 앨범을 끝까지 고집하는 이유기도 하다. 자라오는 과정에서 브랜디, 프린스, 마이클 잭슨 등의 정규 앨범을 늘 기다리며 살았다. 확고한 자신만의 정체성을 앨범 전체의 스토리에 풀어내듯 나도 여러 곡에 걸쳐 다양한 경험과 메시지를 담는 앨범 아티스트가 되려 했다.

정규 1집 < CLAASSIC > 발매 이후 3개월 동안 의도적으로 음악과 멀리 떨어져 방전 상태로 지내다, 그 이후 바로 2집을 준비했다. 순수하게 이번 작품을 위해서 70여 곡 정도를 썼다. 원래는 20대를 보내는 앨범이라 딱 스무 곡만 수록하려 했는데, 많이들 좋아하시는 곡이라 ‘Summer In Love’ 솔로 버전을 특별히 보너스 트랙으로 넣었다.

싱글 단위 소비가 득세하는 시점에 쉬운 선택은 아니었을 텐데.
정규 앨범을 안 내는 추세도 있지만 회사의 지원 부재 등 여러 여건상 못 내거나 아예 어떻게 만들지 모르는 경우도 있다. 감사하게도 유니버설 사장님은 정규 앨범을 중요하게 여기는 분이다. 음악적으로 열린 분을 만나 정말 행운이다.

나에게는 정규 앨범이 일종의 명함이다. 제작에 엄청난 노력이 들어가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정규 앨범 내는 분들을 정말 존경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특별히 뛰어난 것은 아니다. 나는 삶을 음악으로 잘 포장하는 재능이 있을 뿐이다. 각자 대단한 이야기를 지닌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이다.

견고한 짜임새를 갖추는 중에도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
경험을 진솔하게 드러내려 했다. 한글은 참 예쁜 언어지만, 혹시라도 가사로 풀어낼 때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전달이 될까 봐 익숙한 영어로 많이 쓰게 됐다. 돌려 말하지 않는 만큼 듣는 입장에서도 돌려 받아들이지 않도록 쉬운 단어를 많이 찾는다.

쎄이(SAAY)라는 활동명처럼 들려주고 싶은 말이 정말 많은 것 같다.
음악으로 ‘말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의미를 담은 예명이다. 그룹 활동도 하고, 프로듀서로도 일하다 유니버설 뮤직에 들어와 솔로 아티스트로 전향하면서 조금 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플러스 A’의 의미로 사이에 A를 추가했다. 그리고 AA를 거꾸로 뒤집으면 눈 모양이 되듯이, 그저 ‘들을 수 있는 음악’이 아닌 ‘보여줄 수 있는 음악’을 하려는 포부도 담겨 있다.

그래서인지 시각적인 부분도 무시할 수 없다. 타이틀곡 ‘Talk 2 Me Nice’의 뮤직비디오에서 직접 분한 남성 캐릭터는 마이클 잭슨의 ‘Smooth criminal’이 스쳐가고 여성 캐릭터는 에이미 와인하우스가 떠오른다.
구체적인 레퍼런스를 잡고 작업하는 편은 아닌데 우연히 그런 그림들이 겹친 느낌이다. 남성 인물은 영화 < 씬 시티 >에서 여자 주인공을 끝까지 찾으려 하는 남자 주인공의 정장 이미지를 가져왔고, 여성 인물은 내 머릿속 할리우드의 빈티지 캐릭터였다. 물론 마이클 잭슨과 에이미 와인하우스, 두 사람 모두 내 음악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아티스트임에는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쎄이를 음악가로 이끈 가수 혹은 음반은 무엇인가.
가장 먼저 마이클 잭슨의 < Bad >. 이유가 필요한가. 조금 더 꼽자면, 스티비 원더가 참여했던 라파엘 사딕(Raphael Saadiq)의 < The Way I See It >, 프린스의 < Purple Rain >, 디안젤로의 < Voodoo >도 빼놓을 수가 없다. 어스 윈드 앤 파이어는 모든 앨범이 좋지만 그래도 ‘September’가 있는 < The Best Of Earth, Wind & Fire, Vol. 1 >로 올리고 싶다.

여러 뮤지션들의 양분을 흡수한 쎄이의 음악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가요계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따라붙는 수식어가 많았다. 하지만 나는 원체 휘둘리는 성격이 아니라서 무언가에 맞춰 가기 보다 그냥 가장 ‘쎄이’스러운 음악을 하고 있다. 늘 세상에 존재하면서도 확실한 선을 지닌 수평선 같은 음악을 하고픈 사람이라 스스로를 칭한다. 첫 믹스테이프 < HORIZON : THE MIXTAPE >도 그런 의미였다. 음악을 통해 어디서든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본인 음악의 주체로 자리하면서도 데뷔 때부터 프로듀스 디즈(DEEZ)와 꾸준히 합을 맞추고 있다.
원래는 디즈의 제자로 시작했다. 당시 한 기획사에 작곡가로 들어갔는데, 그의 겸손한 모습을 보고 최연소 작곡가라는 타이틀에 조금은 오만했던 마음을 내려놓고 음악을 다시 배웠다. 특히 물질적인 것을 떠나 인간이 품기에 음악이 얼마나 위대하고 큰 존재인지를 깨달았다. 우리는 그저 음악의 에너지가 왔을 때 이를 잠시 녹여내는 도구라 생각한다. 이런 자세로 디즈에게 오랫동안 트레이닝을 받다 보니 사제 관계에서 점차 파트너까지 올라오게 되었다.

어머니께선 국악 학원을 운영하셨고 형제자매 역시 음악을 했다고 들었다.
음악에 관해선 1부터 100까지 모두 가족 영향을 받은 케이스로, 가장 먼저 국악 학원을 크게 운영했던 어머니의 3~400명 제자 중 하나였다. 아버지도 본업 외에도 통기타를 들고 다니며 작곡, 작사에 시와 사진 작업까지 하셨다. 부모님을 통해 예술적 환경에 가장 첫 번째로 노출이 된 셈이다.

형제자매로는 언니와 오빠가 있는데, 오빠는 내게 메가데스, 엑스재팬 등 하드한 밴드 음악의 영향을 많이 준 사람이다. 언니와는 중학생 때 같은 춤 동아리 출신으로 댄서 생활을 4년 정도 함께 했다. 나는 그렇게 국악부터 어쿠스틱, 메탈, 댄스 등 모든 음악을 계승한 종합체였다.

국악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듣고 싶다.
어머니는 판소리부터 한국무용, 사물놀이까지 국악의 전 분야를 섭렵하신 분으로 김덕수 선생님의 사물놀이패 공연에도 참여하신 적이 있다. 보통 어린아이들에게 첫 음악은 동요이기 마련인데 나는 국악을 가장 먼저 배웠다. 지금 무대 위에서의 손짓 등은 한국무용의 선이, 약간 끓는 듯한 발성에는 판소리가 녹아 있다.

뻗어 나갈 수 있는 갈래가 다양했음에도 대중음악, 특히 알앤비 장르를 택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
부모님이 잭슨 파이브 시절부터 마이클 잭슨을 굉장히 좋아하셨다. 설거지를 할 때에나 업무를 보실 때에도 TV에 관련 영상을 틀어 놓을 정도였다. 자연스럽게 그 음악을 따라 흥얼거리다 보니 팝을 배웠고, 마이클 잭슨을 연구하니 프린스까지 연결되어 알앤비로 기틀이 잡혔다. 가수라는 직업도, 마이클 잭슨처럼 무대 위에서 춤과 노래로 내 메시지를 주고 싶어 꿈꾸게 되었다.

대중음악으로의 전향에 대한 부모님의 생각이 어땠을지 궁금하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판소리를 배우던 중 득음 과정에서 내가 너무 힘들어했다. 목이 상할까 하는 걱정도 크셔서 다른 영역으로 오히려 나를 열어 주셨다. 춤추고 노래하는 사람들에 대한 시각이 좋지 않았을 때였음에도 많이 지원해 주셨고, 나 또한 춤을 추면서도 온갖 반장은 도맡아 하는 모범생으로 살았다.

각기 다른 문화들을 수용하면서 음악적으로 체득한 부분도 분명 있을 것 같다.
부모님이 한국적인 뿌리는 지키되 다양한 요소를 많이 만나보라고 기회를 적극 주셨다. 아버지 지인이 계셨던 뉴욕 윌리엄스버그에 가서 홈스쿨링을 했는데, 당시 아티스트라면 거쳐가야 하는 스타 등용문 같은 도시라 그래피티부터 버스킹까지 예술인의 문화가 잘 잡혀 있었다. 길을 걷다 노래하고 싶으면 그냥 서서 노래하는 그런 환경에 물들었다. 지금도 종종 작업 중에 스트레스를 받으면 음악을 직업이 아닌 삶 속에서 풀어내는 그때 그곳의 문화를 추억하기도 한다.

첫 정규 앨범 < CLAASSIC >에서 인생의 3요소로 시간, 에너지, 그리고 사랑을 꼽았다. 4년이 흐른 지금의 관점은 어떠한가.
지금도 똑같다. 시간이 있고, 견딜 수 있는 에너지가 있고, 함께 안아줄 수 있는 사랑이 있다면 사람이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 같다. 아마 죽을 때까지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 것 같다. 차이점이 있다면 시야가 좀 넓어진 정도다.

새로 도전하고자 하는 영역이 있다면.
시각적인 부분을 중요하게 여기고 디자인적으로 의미 부여하는 걸 좋아해서 최근 그래픽 디자인을 배우고 있다. 지금도 뮤직비디오 시놉시스나 앨범 커버 등의 작업에 다 참여는 하지만, 조금 더 다채롭게 표현해 보고 싶다는 생각에 시작하게 되었다. 보여주는 음악을 더욱 세련되게 다듬어 이른바 ‘4D 음악’으로 발전시키고자 한다.

과거 국악의 장단을 접목한 팝 넘버 ‘ZGZG’처럼 멋들어진 댄스 곡을 기대해 봐도 될지.
퍼포먼스는 평생 놓지 못한다. 그런 스타일의 곡이 더 있었는데, 정말 아까운 곡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다른 팀에게 보냈다. 원래는 앨범에 수록하려 했으나 백현이 정말 잘 소화해 준 ‘Bambi’를 보고, 어쩌면 내가 끝까지 쥐고 있으려는 고집이 욕심일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가끔씩은 곡을 놓아줄 줄도 알아야겠더라.

최근 재밌게 들었던 앨범은 무엇인가.
국내에서는 카더가든의 < Diamond >가 인상 깊었다. 워낙 좋아하는 분이라 콜라보레이션도 하고 싶은데, 일단 그전에 만나서 대화부터 나누면 좋겠다. 해외에서는 비욘세의 < Renaissance >와 실크 소닉의 < An Evening With Silk Sonic >이 근래 가장 즐겨 듣는 앨범이다. 여담이지만 롤모델인 어셔나 저스틴 팀버레이크와도 나중에 같이 작업을 하고 싶다.

앞으로의 활동 각오를 다진다면.
다가올 12월 15일에 내 이름을 걸고 하는 첫 단독 공연이 있어 열심히 준비 중이다. 그리고 작업 기간이 길었던 만큼 당분간은 국내외를 넘나들며 앨범 활동도 이어 나갈 계획에 있다. 항상 해왔던 것처럼 작사/작곡, 프로듀서로도 열심히 일하면서 쎄이라는 이름을 안 들을 수 없도록 하겠다.

진행: 장준환, 정다열, 정수민, 한성현
정리: 한성현, 장준환, 정다열
사진: 정다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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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34 파제(Pa.je)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서른네 번째 주인공은 관성에 갇히지 않고 음악으로 내 이야기를 하는 뮤지션 파제(Pa.je)다.

뮤지션 파제(Pa.je)는 음악가가 어디를 향해 어떻게 움직이는지 묻게 한다. 차 막히는 주말 아침, 홍대 인근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저녁에 있을 공연을 위해 거주지인 인천에서 서울로 막 도착했다고 했다. 카페를 운영하고, 음악을 만들고, 공연을 열고, 무대에 서는 그는 바쁘지만 편안한 인상으로 질의에 답했다.

군 제대 후, 본격적으로 기타를 잡고(그의 기타 실력은 정말 엄청나다!)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는 그에게 ‘음악이란 무엇인가’ 물으니 “결국에는 내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 중간 매개물”이란 답이 돌아왔다. 음악이 목표가 아닌 수단이라는 예상치 못한 답변에서 그만큼 일상에 깊게 침투한 음악의 파워가 느껴지는 듯했다. 음악가는 어디를 향해 어떻게 움직이는가. 파제는 삶 속에서 음악과 함께, 음악을 곁에 두며, 담담하게 걸어 나간다.

2020년 연주곡으로 채워진 정규 음반 < Pa.je Archive >를 발매했고 8월 30일, 오랜만에 EP < 관성의 바깥 >을 발매했다.
작년에 음반을 하나 내긴 했다. (무엇이냐고 물으니) 홍대에서 긴 시간 같이 활동했던 뮤지션 ‘엉망’과 ‘포래스트’라는 팀명으로 < Piece Forest >를 냈다. 엉망이 노래를 부르고 내가 작곡, 편곡, 연주를 했다. 사실 < 관성의 바깥 > 녹음도 작년에 다 끝낸 상태였다. 2022년도에 다른 일이 무조건 많을 것으로 예상했기에 앨범에 대한 방향성을 고민하던 와중 인천문화재단에 좋은 지원사업이 떴고 다행이 지원받게 되어 < 관성의 바깥 >을 발매하게 되었다.

< 관성의 바깥 >과 관련된 공연 혹은 활동 계획이 있다면?
11월 19일에 인천에 있는 카페 겸 문화공간 ‘인천여관X루비살롱’에서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EP 중심의 공연은 아니고 그냥 파제라는 뮤지션이 해오던 지난 활동들의 연장선상으로 봐주면 좋겠다. < 관성의 바깥 >의 후속 공연은 아마 없지 않을까? 이번 음반은 연주자로서, 싱어송라이터로서 파제가 아니라, 마음 가볍게 시간이 날 때마다 만든 곡들을 묶어 발매했다. 작곡부터 그렇게 진행했다 보니 발매 이후의 공연을 염두 하지 않았다. (웃음)

‘관성의 바깥’이라는 음반 명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사람들이 인식하는 뮤지션 파제의 이미지가 있다. 기존 발매했던 ‘제주의 봄’과 같은 따스한 어쿠스틱 사운드의 음악이 있고, 버둥 혹은 다른 뮤지션들과 콜라보한 음반에서처럼 싱어송라이터, 포크 뮤지션으로서의 행보가 있다. 이것 말고 내가 가진 영역, 즉 우주가 상당히 큰데 그걸 보여주기가 사실 쉽지만은 않다. 그런 면에서 < 관성의 바깥 >은 내가 관성처럼 해오던 음악과는 확실히 다르지만 누가 들어도 파제의 노래임을 알 수 있게 만들었다.

앨범을 통해 관성의 바깥에 있는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었다면 이해가 쉬울까? 음반 커버를 보면 동그란 게 막 있는데 그게 나의 태양계다. 우리한테 관성은 태양계이지 않나. 애매한 위치에 모여있는 별들은 ‘관성의 바깥’을 표현한 거다. 태양계 밖에 있는 무언가를 드러내고 싶어, 디자인을 맡아 준 장희문과 상의 끝에 완성했다.

EP 수록곡 ‘사천진 걸음마’란 노래를 재밌게 들었다. 얼마 전 유튜브에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 영상을 올리기도 했던데.
친한 동생과 강릉에 놀러 갔었다. 동생이 혼자 컨셉을 잡고 걸어가다가 갑자기 카메라를 보고 인사를 하고, 또 걸어가며 장난을 치더라. 그때 문득 그냥 걸어가는 모습을 찍어보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계속 한 방향으로 씩씩하게 걸어가는 영상을 찍었고, 집에 와서 영상을 붙여보니 그 반복되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영상 클립을 먼저 따고 바로 이런 식의 곡을 만들겠다는 감이 왔다. 귀엽고 발랄하게 사운드를 뽑으려고 장난을 많이 친 노래다.

인천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쭉 음악 활동을 한 건가?
군대 빼고는 늘 인천에서 살았다. 심지어 군대도 용산 쪽이어서 인천을 관통하는 1호선을 타고 다녔다. (웃음)

음악 활동을 하기에 공연장 등 인천의 인프라는 어떤가?
형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록, 메탈이 주였던 1990~2000년대 초에는 구월동 쪽에 연습실도 많고 서울에서 인천 쪽으로 공연을 보러 오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활동하는 시기도 다르다 보니 내게는 너무 오래전 이야기다.

그 당시 음악을 했던 사람들은 이제 클럽을 차리거나 본인의 공간을 가질 수 있을 만한 나이가 됐다. 그러다 보니 인천에 헤비니스 부류의 공연장이 많이 생기는 것 같다. 그런 이유로 인천에 있는 어쿠스틱한 음악을 하는 뮤지션들이 주로 서울에 가서 활동하게 되는 것에 대해 아쉬움이 좀 크다.

인천에서 개인 카페를 운영하고 있고, 또 그곳에서 공연도 열었던 걸로 안다.
동료 뮤지션 단편선, 전유동, 이권형과 함께 공연했었다. 외곽의 넓은 공간에서 음악 하며 놀면 재밌겠다는 이야기를 이전부터 나눴고, 내가 운영하는 카페에서 이를 진행해보겠다는 결심을 한 뒤, 만날 때마다 조금씩 계획을 세웠다. 때마침 공고가 뜬 인천문화재단의 ‘시작공간일부’를 통해 청년 축제 사업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서울에서 관객도 많이 오고, 우리 카페 고객도 꽤 많이 현장을 찾아 즐기고 갔다. 다만, 정기적으로 공연을 제안하시는 분도 있는데 현실적으로 그건 힘들다. 기획 음악 장비 및 인력 구축, 관객 홍보 등 고민할 지점이 많기에 단순히 음악을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무턱대고 진행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인천에서 참여한 공연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 하나를 꼽아준다면?
콜트콜텍 노동자 음악제. (이)권형이 나를 섭외해서 엉망과 인천의 다른 밴드들과 주안역 앞에서 버스킹을 했었다. 그곳이 인구밀도가 높은 곳이긴 하지만 퇴근 시간대여서 아무도 우리 얘기를 안 들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발걸음을 멈췄다. 지나가던 학생들, 어른들까지 말이다.

요즘 아무리 세상이 각박해졌다고 해도 어떤 소리를, 메시지를 던졌을 때 시민들이 들어주는 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적어도 사람들이 진심을 들을 수 있는 시간과 마음의 여력이 있구나 하는 걸 배웠다고나 할까? 관심을 주는 것을 보고 사실 조금 놀라기까지 했다. 세상은 충분히 움직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 했다.

처음부터 ‘파제’란 활동명으로 음악 커리어를 시작한 게 아니라고.
2010년도에 전역하고 친구들이랑 밴드를 만들었다. 기존에 각자 속해있는 또 다른 밴드들이 있었고,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시간 맞추기가 어렵더라. 혼자라도 먼저 해야겠다 싶어 그룹을 나와 음악을 시작했다. 그때는 밴드 음악을 그냥 어쿠스틱 기타로 가져와서 하는 형태이다 보니 우울한 노래들이 많았다. 회색빛의, 회색 톤의 음악을 한다고 해서 ‘그레이톤’이라는 이름을 썼었다. 내 이미지랑 안 맞지 않나. (웃음) 2013년 후반부터 ‘파제’란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파제의 음악에서 기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기타는 언제부터 익힌 것인지.
2006년 11월 수능 끝난 날에 형한테 처음 배웠다. (실력이 뛰어나 어린 시절부터 친 것인 줄 알았다고 하니) 얼마 안 됐다. (웃음) 형은 일찍부터 음악을 하려고 하던 사람인데, 나는 그냥 ‘기타 치면서 데미안 라이스 노래 부르고 싶다’ 정도였다. 군대 막바지에 조금씩 기타를 치기 시작했고, 형을 통해 핑크 플로이드나 오아시스 등을 접하면서 영역을 넓히게 됐던 것 같다. 기타 솔로 같은 것도 따보고 하면서.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한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종류의 악기, 기타를 다루는 등 누구보다 음악 스펙트럼이 넓다.
한국에 플라멩코 단체가 있다. 내가 플라멩코를 좋아하는데 어떻게 하다 그 단체 선생님과 인연이 되어 스페인에 직접 가서 플라멩코를 배웠다. 그때 ‘파두’라는 포르투갈 장르를 알게 됐고, 터키에서는 ‘카눈’이란 악기를 배웠다. 그렇게 다양한 음악에 조금 더 관심을 두게 됐다. 물론 나는 그 소리를 단순히 내 음악에 잘 녹여내고 싶다는 측면에 가까워 적절한 연주법만 익힌 정도다. 프로 연주자만큼의 실력은 절대 아니다. (웃음) 그래도 그런 식으로 하면서 음악에 대한 지평이 넓어지다 보니까 조금 더 수월하게 음악을 만들고 진심을 더 담을 수 있게 된 건 확실하다. 전에는 많은 게 막연했고 음악 카피도 잘 안되고 그랬다.

파제를 대표할 수 있는 음악 혹은 음반을 한 장 뽑아준다면?
무조건 연주 앨범인 정규 1집 < Pa.je Archive >. 그 음반에 오랜 기간 내가 해오던 음악 스타일이 잘 녹아 있다. 곡을 쓰던 때와 현재 시점에서의 생각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과거보다 지금의 내가 더 나쁜 사람이, 더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거다. < Pa.je Archive >에는 당시에 내가 했던 생각과 마음이 온전히 들어있다. 존경도 애정도 때로는 아쉬움도 담기지 않았겠나. 그런 감정들을 나만의 방식으로 솔직하게 음반에 담았다. 

앞으로의 활동 계획도 궁금하다.
연주곡 중심의 음반을 한 2장 정도 발매하려고 생각 중이다. 실제로 곡을 꽤 만들긴 했는데 앨범을 내려면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중이다. 사실 음반 계획은 한 번에 네다섯 개씩 한다. 예를 들어 < Pa.je Archive 2 >가 있을 것이고, 또 다른 스타일의 연주곡 앨범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상황에 맞춰 조금 더 완성되고, 충분히 즐거운 앨범이 뽑힌다면 그때 작업물을 세상에 내놓지 않을까.

진행 : 박수진
정리 : 장준환, 박수진
사진 : 정다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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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33 이박사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서른 세 번째 주인공은 테크노와 뽕짝을 한국적인 맛으로 버무린 가수 이박사다.

유교 문화의 영향 때문일까, 우리는 신나고 재밌는 음악을 한껏 즐기다가도 한편으로는 경박하다며 곱지 않은 시선을 내비친다. 이박사에 대한 세간의 평가도 비슷했다. ‘몽키매직’을 비롯한 그의 유쾌함을 사랑하는 이들 맞은편에서는 ‘B급 정서’라며 독특한 캐릭터를 폄하하는 시선이 공존했다. 그러나 이박사는 온갖 코멘트에 개의치 않고 자신만의 길을 이어왔고, 이를 따라 이제는 그의 음악도 서서히 재발굴되고 있다.

한낮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번쩍거리는 화려한 의상을 입고 이즘을 만나준 이박사의 아우라는 스타 그 자체였다. 그에게는 모든 곳이 무대였다. 삶과 음악을 묻는 질문에 툭툭 명언을 남기며 시원시원한 말투로 인터뷰를 휘어잡은 거장과의 대화를 공개한다.

1973년도부터 음악을 시작했으니 올해로 거의 50년 째다. 여태까지의 음악 생활에 대한 스스로의 생각이 궁금하다.
음악을 한다는 것은 “일기예보”다. 짜여진 것이 아니라 갑자기 변하곤 하니까. 임기응변이나 기동력, 순발력이 필요하고 나는 처음부터 그렇게 예술을 했다. 원래 내 직업은 디자이너로, 결혼식 신랑 예복을 재단하고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 서로 다른 체형에 맞추고 내 기술도 개발하다 보니 음악도 자연스럽게 공연마다 나를 새롭게 맞췄다.

여태까지 가졌던 직업 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무엇인가.
관광 가이드다. 단풍이 나는 가을 아침 5시에 출발하고 새벽 1시에 돌아온다. 갔다 온 후에도 청소하고 버스에서 자면서 다음날 멘트를 외웠다. 몸도 피곤한데다 짖궃은 손님들도 많아 그런 것이 힘들었다. 그래도 저녁에 서울로 돌아올 때 버스에서 불 끈 채로 나이트 클럽처럼 노래 부르는 재미는 있었다.

당시 관광버스마다 있는 ‘메아리 전자’ 같은 음악 기기가 있었다. 코드만 누르면 그에 맞춰 남성은 마이너, 여성은 메이저 식으로 조성도 자동으로 나오는 형식이었다. 즉 이름만 우리가 몰랐을 뿐이지 테크노가 그때도 존재한 것이다. 이 리듬에 맞춰 내가 멜로디와 추임새를 만들어 넣었다. 같은 메이저 노래끼리 메들리로 엮어 150곡 정도 만들어 부르니 반응이 매우 좋았다.

그때의 경험이 본격적인 테크노로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1989년에 메들리 음반 녹음 당시에 청주 스튜디오에서 하루에 150곡을 모조리 녹음했다. 내 관광 가이드 모습을 본 음반 제작자의 요청에 하루에 10만원을 받고 작업했다. 160 BPM 이상으로 속도도 빠른 곡을 그렇게 빨리 완성하니 엔지니어도 놀랐다.

이박사 하면 떠오르게 되는 독창적인 추임새는 어떻게 체득한 것인가?
그냥 반주만 재생해서는 관광버스에서 재미가 없다. 내가 원체 끼가 있다 보니 음악만 듣고서도 입으로 자동으로 그런 추임새가 흘러나왔다. 이를 듣고 열광한 관광객들이 당시 이름을 붙여줬는데, 그게 바로 ‘신나는 이군’이었다.

가수 생활 초창기 이야기가 궁금하다.
1973년도 5월 KBS < 민속 백일장 >에 나갔다. 경기민요 부문에 출전했지만 우승자로 제주도에서 올라온 피리 연주자 등 다른 쟁쟁한 악기 연주자들에 밀려 그때는 아쉽게 떨어졌다. 그 이후 ‘배뱅이굿’의 대가 이은관 선생을 찾아갔으나 당시 공연으로 바쁘셨던 때라 만나 뵙지는 못했다. 대신 이창배 선생에게 향해 디자이너 생활로 바쁜 와중에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가 국악을 배웠다. 그러다 디자이너 생활에 싫증이 나 밤무대에서 가수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민요를 위해서는 옆에 코러스가 필요했다. 그보다는 혼자 할 수 있는 가요를 배워야겠다 싶어 이번에는 가수 나훈아의 음악을 제작한 임종수 선생을 찾아갔다.

종로에서 학원을 하시는 그분과 만나게 되면서 덩달아 한복남 선생님과 가수 방주연, 통기타 혼성듀오 ‘라나 에 로스포’의 한민 등과도 알게 되었다. 그곳에서 다섯 달 동안 악보 공부를 하고 다시 밤무대로 향해 한 달에 30만원 정도의 수입을 벌었다. 이때 내 소문이 퍼져 찾아온 연예부장이 여러 곳에 꽂아줘 하루에 많게는 열한 곳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그 이후의 행보가 결코 쉽지 않았던 것으로 안다.
‘신바람 이박사’라는 이름으로 방송국에 찾아가 활동을 하려 했지만 메들리 음악이라는 이유로 심의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좌절을 겪었지만 이기범 악단의 도움을 받아 MBC < 내고향 좋을씨고 >에 출연하게 되었다. 90년도부터는 아예 전속으로 활동하며 노래를 받았지만 내 성에 차지 않아 직접 만들었는데 이번에도 심의에서 떨어졌다.

그 다음에 간 TBS의 < 9595쇼 >에서 당시 MC였던 허참, 박세민의 옆에서 5~6개월 간 보조 진행자로 활동했다. 나중에는 허참의 뒤를 이어 MC를 맡을 뻔했으나 윗선에서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이후 한동안 주춤하다 1995년도 일본 소니를 통해 기회가 찾아왔다.

국내에서 가장 큰 호응을 얻은 ‘몽키매직’도 일본 곡으로 알고 있다.
원래 제목은 ‘원숭이 나무에 올라’였다. 95년도 공연 무대를 위해 일본에 갔을 당시 레퍼토리로 받은 150곡 중 하나였다. 그 많은 곡을 일주일만에 다 외워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그 와중에 한국어 가사를 내가 만들어야겠다 싶어서 직접 작사 제안을 했고, 그러면서 ‘몽키매직’이라는 제목이 탄생했다. 판권은 일본에 있다.

일본 노래 중에서는 ‘몽키매직’의 인기가 가장 높지만 코로나19 발발 전에 ‘야야야’라는 곡도 서서히 뜨기 시작했다. 과거와 달리 백댄서 없이 혼자 무대를 하다 보니 그런 모자람을 채우기 위해 즉흥적으로 만든 코러스였다. 지금은 전국적으로 중년 여성들의 품바나 난타 강습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당시 인기가 꽤 많았다. 그런 인기의 비결이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인기가 꽤 많았던 수준이 아니라 최고였다. 더군다나 일본은 음반 로열티가 높게 나오고 CD 구매도 활성화된 덕분에 돈도 많이 벌었다. 그리고 활동이 바쁜 탓에 그 많은 돈을 쓸 시간도 없었다.

일본 음악 특유의 느낌과 다르게 당기는 테크노 리듬으로 빠르게 간 것이 차별화 지점이 되어 인기를 끈 것 같다. 일본 측에서는 풀 밴드 구성을 선호했으나 나는 거부하고 그 대신 오르간 연주자와 함께 듀오를 이뤘다. 한국에서의 익숙한 방식이기도 했고 이목을 나에게 집중시키려는 전략이기도 했다. 이것이 잘 맞아 떨어져 소위 ‘대박’이 났다.

그쪽에서 빨간색으로 의상도 정해줬는데, 디자이너 출신이었던 나는 이것도 내 고집으로 양복을 입고 무대에 섰다. 멜로디는 일본 관객들에게 익숙했지만 박자도 빠르고, 가사도 내가 아는 한국어로 바꿨다. 맘에 들지 않는다면 전속 계약을 관두겠다 하니 결국 일본 측에서 논의를 하다, 그래도 익숙한 멜로디 때문에 충분히 먹힐 것이라며 내 손을 들어줬다.

익숙한 멜로디와 경쾌한 리듬의 적절한 조화가 성공을 이룬 것 같다. ‘재미의 전형’이다.
거기에 입으로 넣는 추임새까지 넣어 무대를 꾸리니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당시 1,500명 정도 되는 젊은 관객들이 비록 가사는 한국말이었어도 자신들이 아는 멜로디를 하니 신나서 꽹과리도 치고 엄청난 호응을 보여줬다. 원래 두 시간 공연을 앵콜 요청 때문에 두 시간 더 해 총 네 시간 동안 할 정도였다.

끝나고 내게 사인을 받으려는 줄도 길게 서있었다. 관객들 대부분은 여자였는데, 그 중에서도 또 절반은 음악을 하는 이들이었다. 내 독창성에 매료된 셈이다. 이후 함께 작업을 하자는 제의도 들어왔지만 언어의 차이도 있는데다, 내지르는 한국 스타일과 달리 맛있고 아기자기하게 부르는 일본 스타일이 맞지 않아 혼자 하겠다고 했다. 어쩌면 이런 생소함이 그들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 후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얻어 ‘한국적 테크노’라며 존경하는 시선도 있었지만 한편으로 언론에서는 ‘B급 문화’ 혹은 ‘엽기’라면서 깎아내리기도 했다.
관광 가이드 생활을 하면서 이미 많이 겪었던 일이었다. 손님들이 수고비도 주지 않으면서 부려먹는 경험도 종종 있었다. 이를 통해 내가 철칙을 하나 얻었다. ‘칭찬을 욕으로 듣고, 욕을 칭찬으로 듣는다.’

인천과의 연관점도 듣고 싶다.
어린 시절 취미가 있어 < TV쇼 진품명품 >에도 나오셨던 ‘장석’ 구서칠 선생님께 간석동에서 서예를 배운 적이 있다. 그렇게 인천에 한번 발을 들이니 장학회도 다니다가 나이트클럽에도 가게 되고 했다.

인천에 대한 이미지는 어떤가.
최고다. 인천에서는 나쁜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이박사는 열심히 사는 사람’, ‘부지런하다’ 같은 좋은 얘기만 들었다. 내가 실제로 남에게 피해주거나 하는 일도 없었지만. 그리고 공연 문화에서도 인천은 다르다. 타 지역에 비해 사람들이 흥이 많아 점잖지 않고 적극적이다. 즉 노는 문화가 강하다.

부평구문화재단과 함께 일한다면 어떤 프로젝트를 하고 싶나.
홍보대사가 하고 싶지만 인천 사람이 아니라 좀 곤란하니, 역시 공연을 하고 싶다. 노인들이 좋아하는 경기 민요부터 해서 정통 오리지널 뽕짝까지. 임창정과 했던 ‘임박사와 함께 춤을’ 처럼 젊은 뮤지션들이 피쳐링하는 그런 그림도 좋다.

국내 후배 중에서 유심히 보는 가수가 있나 궁금하다.
김호중 노래가 좋다. 소위 ‘쇳소리’가 들어간다. 딱 찔러주는 느낌을 좋아하는 한국 취향에 맞게 김호중의 그 유리를 긁는 듯한 목소리에는 카리스마가 있다. 누군가는 약간 답답하게 느낄지 몰라도, 원래 완벽한 느낌 보다는 인간적인 느낌이 사람을 안달나게 하는 법이다.

여러 무대를 서면서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곳은 어디라 생각하는가.
나이트 클럽에 가면 그곳에 맞게, 칠순 잔치 가면 다 특성에 맞게 다 나를 맞춘다. 다른 사람들과 겹치지 않는 개성, 나만의 것을 그때그때 보여준다. 며칠 전 안산 공연에서도 짧은 무대였지만 즉흥적으로 가사를 보여주니 관객들이 놀라더라.

그동안의 음악 작업 중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결과물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경기민요’다. 1989년 메들리 음반 1, 2, 3집 중에서 2집을 경기 민요에 디스코를 섞어 만들었다.

여태까지 온갖 추임새를 다 했다. 그 중에서 최고의 추임새를 선정한다면 어떤 것일까.
“좋아 좋아.” 내가 좋다 하니 보는 사람들도 다 좋아한다. “고래?” 하는 것도 다 내 입에서 나온 추임새다. “앗싸” 등도 반응이 좋다.

가장 큰 영향을 준 음악가는 누구인지.
딥 퍼플이다. 어릴 때 팝송을 들으면서 ‘Highway star’, ‘Black night’ 등을 많이 접했다. 이외에도 산타나의 ‘Black magic woman’이나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도 빼놓을 수가 없다. 대체로 솔로보다는 밴드 음악을 좋아했다.

음악이라는 존재를 이박사 자신에게 있어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예술은 나의 취미요, 음악은 나의 친구요, 노래는 나의 동반자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진행 : 임진모, 임동엽, 정다열, 한성현
정리 : 한성현
사진 : 임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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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30 이권형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서른 번째 주인공은 찰나의 단면을 노래하는 이권형이다.

암막 커튼 친 창작자의 방에서 통기타 소리가 흘러나온다. 어느덧 데뷔 11년 차에 접어든 뮤지션 이권형이 음악을 만드는 순간이다.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인디 음악’을 좇아 홍대에 발을 들인 그는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는 일터에 나가며 시간을 쪼개 음악을 만든다. 얼마 전 정규 3집 < 창작자의 방 >을 내놓고, 틈틈이 < 인천의 포크 >와 같은 컴필레이션 음반을 발매하기도 했다.

음악을 위해 돈을 버는 삶을 살고 있지만 정작 그는 자신의 음악을 “시행착오”, “과정 중에 있다”고 표현했다. 신보를 두고는 “기승전결 없이 딱 본론만 말한 것 같아 아쉽다”는 말을 잇기도 했다. 유달리 본인에게 엄격한 그는 순해 보이는 첫인상과 달리 내면에 아주 많은 생각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말을 뒤집어 이권형의 음악을 다시 소개한다. 문을 열어놓고 끊임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 이권형. 두세 번씩 단어를 골라 정성스레 질문의 답을 이어가던 그와의 인터뷰를 공개한다.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아마추어리즘에 기반해서 직접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인디 음악을 듣고 인디 뮤지션을 동경하다 보니 내 음악까지 직접 하게 되었다. (음악) 아직 나 자신이 프로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인천을 기반으로 음반을 기획해왔고 최근에 3집 < 창작자의 방 >을 발매한 뮤지션이다.

인디씬 혹은 음악씬의 데뷔는 언제인가?
19살이었던 2011년에 해방촌에서 처음 공연했다. 직접 기획해서 내놓은 공연이니 그때를 데뷔로 보고싶다. 따지고 보면 시작은 ‘바다비’ 등에서 펑크 공연을 보고 펑크 음악을 하던 때이지만 지금 하는 ‘포크’ 음악을 제대로 시작한 건 2011년이었다.

펑크에서 포크로 변화하게 된 계기가 있는가?
당시에는 씬에 진입해 누구든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렇게 펑크씬에 들어간 건데 막상 음악을 하다 보니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 (웃음) 그럼에도 적은 코드로 음악을 만들고, DIY로 음악을 제작하는 등 포크와의 교차점에 있는 펑크의 태도는 아직도 간직하는 중이다.

10월 7일 발매된 정규 3집 < 창작자의 방 > 역시 정규 2집 < 터무니없는 스텝 >에서 보여줬던 특유의 장난기 어린 가사, 선율 등을 들려줄지 알았다. 막상 열어보니 그때보다 한층 차분해진 인상이 들었다.
3집은 특히 정돈된 방식을 지향했다. DIY로 만들되 조금 더 꼴을 갖추려 했다고나 할까? 2집은 정규라고 하기에 스스로에게도 창피하다. (이유를 물으니) 음반을 발매하고 군대에 가려 했는데 그러다 보니 자꾸 시기가 늦어졌다. 결국 조금 조급하게 앨범을 묶어내게 됐다.

녹음, 믹싱, 마스터링 등 전 과정을 혼자 담당하는가?
1, 2집은 막역한 동료 뮤지션 파제(Pa.je)의 집에서 기타를 녹음하고 작업실에서 마무리했다. 시간을 맞추기 어려워 주로 주말에 녹음했는데 체력이 많이 소진됐다. 그러다 보니 3집은 동선도 다 줄이고 내가 혼자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들더라. 일을 병행하며 짬짬이 음악을 스케치했다. 자다가 일어나서 조금씩 음악을 만든 거다. 그래서인지 음반을 관통하는 서사가 없고 본론만 딱 잘라내 말하는, 기승전결 없는 음반이 완성됐다.

물론 문을 열고 닫는 방식으로 구성한 작품도 있지만, < 창작자의 방 >은 아예 의도적으로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아 오히려 재밌었다. 문을 열어 두고 계속해서 내 얘기를 한다고나 할까?
그렇게 읽어주니 고맙다. 처음부터 내 주변에 있는 것들을 소재로 끌어당겨서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수록곡 ‘파크라이프’는 내가 쓰다가 영 마음에 안 들어서 ‘물과음’에게 의뢰했는데 오후의 공원 풍경을 그린 듯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잘 다듬어주었다.

주로 일상의 어떤 것들을 음악적 소재로 삼는지.
1집이 내 진심을 전하고 싶어서 말을 가득 채워 넣는 상당히 ‘포크’스러운 접근법이었다면, 2집과 3집의 방식은 ‘속도감 있게, 소리 나는 대로’에 가까웠다. 나의 말을 음악으로 옮겨 적다 보면 작위적이기도 하고 특별하게 하고 싶은 말이 없으면 인위적인 곡이 나온다. 그래서 이번에는 손 가는 대로 스케치해보자는 마음으로 일상을 지나쳐가는 모든 것들을 소재로 삼았다.

이권형은 자신의 음악을 음반으로 묶어내는 것에 큰 의미를 두는 편인 것 같다.
음악을 하게 만드는 동기는 앨범이라는 꼴을 갖추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동료들과 어떤 시너지가 나는지, 어떤 기록으로 남는지가 또 중요하다. 대중적인 성과를 바란 것은 아니기에 앨범을 만드는 그 과정 자체가 내게는 참 중요하다.

3집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 창작자의 방 >이라는 음반 명은 어떻게 짓게 된 것인가?
앨범의 전체적인 방향성은 아트워크를 담당한 이려진 작가의 그림을 보고 영감을 받았다. 대충 스케치한 것 같은데 그려본 사람들은 안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이다. 그림에서 느껴지는 속도와 분위기가 음악에서도 풍기길 바랐다. 이 그림의 제목이 ‘창작자의 방’이다. 방에서 녹음하고 주변 소음, 오토바이 소리가 담긴 이번 신보의 작업 방식과 테마와도 맞아서 앨범을 < 창작자의 방 >이라고 이름 붙였다.

‘사랑에 관한 짧은 스케치’를 들으며 감정 고조가 크지 않은 사람이라 느꼈다.
1집 < 교회가 있는 풍경 >을 발매할 땐 어떻게든 내 진심이 전해지길 바라며 애썼다. 내 커리어중 가장 다이내믹한 작품일 거다. ‘테이크 아웃 드로잉’ 등 젠트리피케이션 활동을 하며 내가 많이 변했다.

어떤 소재를 다루고 이야기할 때 관점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는 것들을 절제하게 됐다고 할까? 가치를 판단하는 일이 어려워졌다. 감정 고조를 느끼지 못할 때도 많아졌고. 기승전결이 없는 음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는 않지만 객관적이고 차가운 태도를 유지하다 보니 음악에도 자연스레 나타난 것 같다.

그런가 하면 동료 뮤지션 예람, 천용성과 함께 한 ‘석촌호수’는 굉장히 메이저 지향적이다.
개인적으로 이 곡이 타이틀보다 더 좋다. 하하하. 후렴구 정도만 완성했을 때 다른 이들과 함께하는 게 작업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성은 생각하지 않고 일단 맡겨 봐야지 정도 밑그림을 그렸었다. 막상 예람, 천용성에게 받은 부분을 합쳐보니까 더 재밌게 결과물이 나왔다. 플레이어보다 기획자 입장으로 접근한 곡이기도 하다.

이번 음반에서 제일 공들였거나, 혹은 듣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곡이 있는지?
‘커피 토크’. 다른 수록곡과 코드를 다르게 접근했는데 제일 깔끔하면서도 독특하게 완성됐다. ‘경기도민 되기’도 추천하고 싶지만 어쩐지 부끄럽다.

‘경기도민 되기’는 < 인천평화창작가요제 >에서 공개한 곡으로 알고 있다.
필요에 의해 만들어져 인위적인 감이 있다. 이 곡을 만들 때 여러 개가 겹쳤다. 하나는 음반을 함께 만든 사람들의 주제가 비슷한 곡으로 < 인천평화창작가요제 > 공모에 제출하고자 만들게 된 노래다. 또 하나는 강남에서 경기도민들이 광역버스를 타고 출퇴근하는 무표정한 모습이 ‘송장’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들을 위해 바치는 장송곡 콘셉트로 노래를 썼다.

< 창작자의 방 > 음반이 본인에게 어떤 의미로 남을지, 그리고 대중들에게 어떻게 다가가면 좋을까?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협업으로 만든 앨범이라는 게 내게 가장 큰 의미로 다가온다. 이렇게 간단한 방식으로, 혹은 일상에서 음반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도 있었다. 리스너를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기보다는 그동안 좋은 사람들을 만나 그렇게 계속 음악을 하면 될 수 있다는 ‘인디 음악 가이드’라고도 생각한다.

그럼 이 음악은 대중보다는 창작자들에게 다가가는 음반인가?
그렇다. 동료 창작자, 인디씬에서 순수하게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또한 특히 3집은 제대 후에 빨리 완성해야겠다는 마음을 품고 작업한 음반이기도 하다. 그래야 그다음도 있을 것 같았다고나 할까?

인천 지역 신문에 꾸준히 기고하는 칼럼도 그렇게 음악에서도 인천 출신이라는 것이 많이 소환된다고 느껴진다. 음악 안에 지역의 정체성을 묻어나도록 노력하는 편인가?
종종 펀딩 지원사업을 받기 때문에 요구받는 것과 음악의 합의점을 뽑아내고자 한다. 음악에 인천과 지역을 거는 것은 약간의 낚시, 유인책, 그리고 ‘이스터에그’ 정도라고 생각해주면 좋을 것 같다. 사람들이 음악에 친밀감 있게 접근할 수 있도록 출신 지역을 걸어 두었지만 안에 담긴 내용들은 그것과 상관없이 가는 경우도 많다.

‘찐 음악가’. 음악 하기 위해 돈을 버는 사람이라는 평가도 있다.
직장을 그만두고서도 음악을 계속할 수 있게끔 저축하고 있다. 왠지 모르겠지만 음악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음악을 하며 주위 사람들도 만나고 일상과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나에게 중요한 것 같다.

이권형을 음악으로 이끈 내 인생의 뮤지션, 앨범이 있다면?
이장혁 2집 < 이장혁 Vol.2 >. 한창 곡을 쓸 때 발매가 됐고 감명을 많이 받았다. 그때 이장혁 님이 하신 작은 카페 공연 ‘다방 투어’를 따라다니며 처음 맛있는 커피도 먹어보고 이렇게 간단하게 공연할 수 있겠구나 하는 것들도 배웠다.

2011년을 데뷔라고 치면 벌써 11년 차 가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인천에 사는, 인천 출신의 뮤지션들이 합작한 < 인천의 포크 > 트릴로지의 마지막 컴필레이션 < 모두의 동요 >를 완성했을 때다. 당시에는 죽어도 여한이 없고 이제 내 음악을 시작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하나는 최근에 동료 뮤지션 파제가 운영하는 ‘카페 륙’에서 했던 페스티벌을 뽑고 싶다. 그때 모인 사람들이 < 인천의 포크 >에 참여한 뮤지션들이었고, 마침 내 생일이기도 하고 해서 기억에 강하게 남는다. < 인천의 포크 >가 아니었다면 굉장히 외롭게 음악을 하고 있었을 것 같았다. 지금 음반을 만들 때도 그들에게 들려주려, 보여주고자 하는 욕심이 들 만큼 말이다.

진행: 박수진, 손민현, 정다열
정리: 박수진, 손민현
사진: 임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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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30 조유진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서른 번째 주인공은 대한민국 대표 록밴드 체리필터의 프론트우먼 조유진이다.

코로나로 주춤했던 공연계가 다시금 기지개를 켜면서 수많은 축제 마니아들이 각지의 스테이지로 몰려들고 있다. 특히 그 부활의 신호탄으로 작용한 <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은 무더운 날씨에도 엄청난 인파를 끌어모으며 억눌려있던 음악팬들의 갈증을 해소했다. 다채로운 라인업 가운데 가장 눈에 띈 팀은 단연 체리필터. 2000년 데뷔해 지금까지 멤버 변동 한번 없이 무대에 오를 수 있었던 건 탄탄한 보컬로 그룹의 정체성을 지탱하는 조유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와 이즘이 20년 만에 다시 만났다. ‘낭만고양이’로 대히트를 친 이후에도 가수로서 맹렬한 소신을 드러냈던 과거 인터뷰만 봐도 이번 만남은 예견된 재회였다. 위치는 달랐지만 음악 하나로 굳건히 자리를 지켜온 가수 조유진과 평론가 임진모는 서로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며 회포를 풀었다. 호쾌한 웃음소리만 가득했던 그날의 인터뷰를 공개한다.

페스티벌 무대에서 정말 오랜만에 만난 느낌이다.
희한하게 큰 규모의 록 페스티벌과는 연이 없었다. 한창 활동하던 때엔 주류 시장과 더 많이 엮여서 그쪽 공연이나 행사를 많이 뛰었다. 물론 1년에 1~2번씩은 계속 단독 공연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꾸준히 와주셨던 분들에겐 익숙한 그림이었을 것이다.

체리필터 하면 떠오르는 레퍼토리를 선보였다.
‘이물질’, ‘오리 날다’, ‘피아니시모’, ‘Happy day’, ‘달빛소년’, ‘낭만고양이’. 이렇게 여섯 곡을 준비했다. 처음엔 리스트가 좀 달랐다. 비사이드도 조금씩 넣어서 하려다가 시간이 초과되면 안 되니까 다 걷어내고 단독 공연에서 자주 하는 엑기스들만 추렸다. ‘오리 날다’ 때는 관중분들이 다 정신없이 뛰셨는데 그 에너지에 압도 당해서 우리도 같이 광분하게 됐다.

열기가 엄청났나 보다. 체력적인 부담은 없었는지.
연출 분들이랑 몇 번 얘기했을 정도로 해가 쨍한 시간대에 공연하는 게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너무 뜨거워서 일사병으로 사망했다고 뉴스에 나오는 거 아닌가. (웃음) 뭔가 록밴드로서 낮에 하는 페스티벌 무대에 대한 로망이 있긴 했는데 막상 실제로 하려니까 살짝 겁이 났다.

무대에서 인천 출신이라 언급할 정도로 고향을 향한 애정이 큰 것 같다.
완전히 인천 토박이다. 지금의 차이나타운인 동인천 북성동, 송월동 쪽에서 나고 자랐고 초중고도 다 여기서 나왔다. 조부모님들께서 이북 분이셨는데 아버지 어릴 적에 인천 쪽에 정착하셨다고 한다. 엄마는 서울 분이셔서 매번 서울로 이사 가기를 희망하시는데 아버지께선 인천에 살아온 세월도 있고 친구, 직장 동료분들도 많고 하셔서 벗어나기를 싫어하신다.

살아오면서 느낀 인천의 이미지는 어떤가.
록적인 인상이 굉장히 강하다. 한때 동인천, 주안 쪽은 완전 록의 메카였다. 당시에 콜라나 커피를 팔면서 록 음악만 틀어주는 음악 방 같은 데가 있었다. 소파에 앉아서 온종일 뮤직비디오만 봤었는데 그때 들었던 음악의 영향이 크다. 저녁 시간대는 DJ가 나와서 직접 노래도 틀어줬다고 하는데 어릴 땐 늦게까지 남을 수가 없어서 밤 분위기까진 잘 모른다.

일찍이 록의 세례를 받았다.
집에서 라디오로 팝송을 듣기보다 현장에서 앰프가 쏘아대는 울림을 온전히 몸으로 받아서 그런지 헤비메탈 같은 강렬한 음악도 굉장히 좋아했다. 사실 제대로 음악을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1990년대 이전의 노래들은 거의 몰랐다. 한동안 얼터너티브 중심으로 메이저 성향만 듣다가 점점 폭을 넓혀갔다. 애초에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해서 일본 애니메이션 음악, 트로트 같은 장르들도 가리지 않고 듣는다.

조유진을 뮤지션으로 이끈 음악은 무엇인지.
지금 들어도 촌스럽지 않은 멜로디의 팝 록이 1990년대에 꽃을 피웠다. 주류 시장에서도 성공한 세미소닉, 라디오헤드, 너바나를 좋아했고, 앨라니스 모리셋, 셰릴 크로우 같은 여성 로커들도 엄청 동경했다. 밴드적인 측면에선 셜리 맨슨이 프론트우먼으로 활약한 가비지의 ‘Push it’을 즐겨 들었다. 윤복희 선생님, 한영애 선생님, 이선희 선생님 같은 우리나라 대선배들도 너무 존경한다.

요즘엔 나이 들어서도 계속 무대에 서는 분들은 다 멋있어 보인다. 아직까지도 활동하는 하트의 앤 윌슨이 라이브 하는 걸 들으면 너무 잘해서 눈물이 난다. 사생활 다 배제하고 보면 에어로스미스의 스티븐 타일러가 제일 멋있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로커 특유의 각이 살아있다. 미친 것 같다. (웃음) 나도 치밀하고 섬세하게 준비해서 더 나이 들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유지하고 싶다.

추구하는 음악 스타일은 어떤지.
특별히 무언가로 규정하고 있진 않지만 단순하게 스트레이트를 꽂으려고 한다. 굳이 따지자면 복잡하지 않은 팝 얼터너티브를 추구하는 편이다. 점점 큰 시장에 몸담으면서 가사나 악곡 형태에 완급 조절을 가하긴 했지만 대중들과 멀어지는 걸 바라진 않았기 때문에 공연에서 다 같이 질러댈 수 있는 음악으로 초점을 맞췄다.

지금까지의 작업물 중에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곡은.
직접 곡을 쓴 사람에겐 다 소중한 작품들이다. 전체적인 완성도로 봤을 땐 ‘Happy day’가 실린 4집 < Peace N’Rock N’Roll >을 가장 아낀다.

차기작은 언제쯤 만나볼 수 있을지.
곧 나올 거다. 노래는 산더미처럼 있어서 빨리 내보려고 발악 중이다. 이제는 음악, 앨범 하나하나에 성격을 규정하기 보다 그냥 체리필터의 노래를 남긴다는데 의미를 두고 싶다.

많은 후배들이 체리필터의 뒤를 이어 열심히 활동 중이다. 선배 입장에서 현재 우리나라 음악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하다.
아날로그가 아닌 디지털을 지향하면서 확실히 곡 쓰기가 편해졌다. 드래그 앤 드롭으로 보컬, 랩 녹음은 물론이고 각종 효과들까지 자유자재로 배치할 수 있게 되면서 모두가 쉽게 음악을 만들고 있다. 접근성이 좋아진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지만 이런 싱어송라이팅의 세계는 굉장히 절망적이다. 잊을만하면 터지는 표절 의혹들도 어느 정도 유사한 맥락에서 발발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비전 자체는 굉장히 좋다고 본다. 인디 뮤지션들이 대기업의 자본에 의존하지 않고도 자신만의 색깔을 표출할 수 있는 방법이 많아졌다. 풀 렝스 앨범이 아닌 싱글로 자주 소통하고, 아예 외국 기업과 계약해서 해외 중심으로 활동하는 등 가수 생활의 반경이 확실히 넓어졌다.

세월이 흐르면서 달라진 게 있는 걸까.
옛날에는 좀 까칠하고 성격도 모난 구석들이 있었는데 요즘은 자취를 감췄다. 먹고살기 괜찮고 남들처럼 살면 확실히 음악을 오래 하기 힘든 것 같다. 그렇다고 일부러 어려울 필요는 없으니까 남들과는 다르게 사고할 수 있는 사람들, 철없는 사람들이 하는 게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조유진에게 음악은 무엇인지.
이제는 되게 ‘치사한 것’. 뭔가 친구 같다가도 자꾸 삐져서 안 풀리고, 친절한 것 같으면서도 불친절하고 그러더라. 옛날에 이때쯤 되면 호텔에 살면서 월드 투어하자고 했었는데 맘처럼 쉽지 않았다. 그래도 음악 하는 사람은 남한테 굳이 안 들려주고 본인이 만든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도 성취감이 엄청나다. 그런 면에서 예나 지금이나 항상 진심으로 임했다는 건 자부할 수 있다.

진행: 임진모, 임동엽, 정다열
정리: 정다열
사진: 임동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