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보다 여성 아이돌의 인기가 뜨거운 지금 르세라핌은 ‘이야기 속 주인공 되기’ 전략으로 차별을 둔다. 에스파가 얼마 전 발매한 신보 < My World >로 가상에서 현실세계로의 이동을 선언했고, 아이브와 (여자)아이들이 ‘주체성’이란 바운더리 내에서 세계관보단 메시지 전파에 열을 올리며 ‘우리 곁의 아이돌’이 된다면 이들은 다르다. 르세라핌이 몰두하는 건 ‘Fearless’ 두려운 것이 없고, ‘Antifragile’ 충격받을수록 더 강해지며, 용서 따위는 바라지 않는 ‘Unforgiven’ 즉, 용서받지 못한 자로서의 ‘나 만들기’이다. 이때 이들의 메시지가 선명해지려면 르세라핌의 세계가 살아있어야 한다. 곤경, 고난, 서사가 맞닿았을 때야 노래의 외피가 두꺼워지기 때문이다.
2022년 데뷔 후 발매한 2장의 EP 수록곡 일부와 7개의 신곡을 묶은 첫 번째 정규음반 < Unforgiven >엔 세계관 정립을 위한 노력이 곳곳에 자리한다. 그 제목부터도 선언적인 ‘The world is my oyster’부터 ‘The hydra’, ‘Burn the bridge’가 대표적이다. 한국어, 일본어, 영어를 혼용해 ‘나는 꺾이지 않아’, ‘나는 점점 더 강해져’, ‘나랑 저 너머로 같이 가자’ 외치는 내레이션은 앨범에 독특한 질감을 형성하며 곡에 서사를 덧댄다. 실제로 앞서 언급한 노래들은 각각 ‘Fearless’, ‘Antifragile’, ‘Unforgiven’의 바로 앞에 배치되며 이어지는 음악의 메시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또 그에 맞는 이미지를 직선적으로 그려낸다.
친절한 안내를 통해 다다른 르세라핌의 ‘현실’은 여기가 아니라 ‘저 너머’에 가깝다. 그룹 세계관을 웹툰으로 그린 < 크림슨 하트>가 수록곡 ‘Blue flame’을 BGM으로 “푸른 반딧불이를 따라 마법의 황야”로 떠나는 여정을 담듯, 이들은 계속해서 ‘저 너머’ 어딘가로 ‘모험’을 떠난다. 신보의 후반부 배치된 신곡들로 미뤄볼 때 금번 이들의 행보는 용서받지 못할지라도 금기를 깨고 앞으로 나아가는 쪽으로 향한다. 타이틀 ‘Unforgiven’의 손을 맞잡고 앞으로 걸어 나가는 퍼포먼스가 이를 증명, 음악관에 힘을 싣고자 한다.
이처럼 음반은 내레이션, 콘셉트 확장을 위한 웹툰, 댄스 퍼포먼스 등 그룹 세계관 형성을 위해 총력을 다하지만 되려 작업의 단합력이 부족하다. ‘Unforgiven’을 두고, 르세라핌을 “용서하지 않은 자가 누구냐”라 질문은 이들이 만들어 나가는 서사의 기반이 탄탄치 않음을 보여준다. 이야기의 빈틈을 메울 만큼 음악이 강하지도 않다. 영화 < 석양의 무법자 >의 메인 선율을 가져오고, 유명 기타리스트 나일 로저스가 참여한 것이 무색하게도 곡에 이 소스들의 잔향은 옅다. 애써 귀 기울이지 않으면 흔적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
다시 말해, “우리들 만의 길을 가겠다”는 르세라핌의 도전이 기존 작업물의 모음집 격인 이번 음반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서사로 여타 아이돌과 구별되는 지점을 만들려 했으나 갑자기 등장하는 흥겨운 브라스 세션 기반의 ‘No-return’이 말하는 모험에 동참하고 싶은 의지가 지금으로써는 잘 생기지 않는다. 뜬금없는 위치에 배치된 팬송 ‘피어나’, 이지 리스닝 계열의 ‘Flash forward’, 라틴 장르를 가져온 끝 곡 ‘Fire in the belly’로 이어지는 구성 역시 헐겁다. 금기를 부수겠다며 강렬한 모습을 보이다 급 힘을 풀어버리니 이들의 외침도 흩어져 버린다.
음악과 서사가 합쳐져 시너지를 낼 때, 르세라핌의 모험은 생명력을 얻는다. 그것이 이들이 데뷔 이래 지금껏 몰두하는 단 한 가지 가장 큰 지향이다. 목적지가 어딘지 불확실한 지금, 이 연대에 손을 얹기가 어렵다. 장황하다. 캐릭터 혹은 주인공 만들기에 급급해 중심이 흔들린 음반. 정리가 필요하다.
– 수록곡 – 1. The world is my oyster 2. Fearless 3. Blue flame 4. The hydra 5. Antifragile 6. Impurities 7. Burn the bridge 8. Unforgiven (Feat. Nile Rodgers) 9. No-return (Into the unknown) 10.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 11. 피어나 (Between you, me and the lamppost) 12. Flash forward 13. Fire in the belly
피프티 피프티의 고공행진이 계속된다. 2022년 11월 내놓은 데뷔 음반 < The Fifty > 이후 발매한 첫 번째 싱글 ‘Cupid’의 이야기다. 이제 데뷔 6개월 차에 접어든 신인 그룹에, 국내에선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지만 해외 차트에서 먼저 이 곡을 알아보고 상위권에 올렸다. 숏폼 플랫폼 틱톡(Tiktok) 발, 바이럴이 인기의 핵심 요인으로 꼽힌다. 프리 코러스 부분을 잘라 속도를 올린 스페드업(Sped up, Speed up의 준말로 노래의 속도를 빠르게 올린 음원) 버전을 중심으로 너른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위캔드 & 아리아나 그란데 ‘Die for you’, 핑크팬서리스 & 아이스 스파이스 ‘Boy’s A Liar, Pt. 2’, 코이 르레이 ‘Players’ 등 요새 차트를 수놓은 많은 히트곡이 틱톡의 수혜를 입는다.
하지만 틱톡에서 인기를 끈 곡이 다 차트 상위권을 순항하는 것은 아니다. 빠르게 순위권에 올랐다고 해도 그 수치를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Cupid’는 다르다. 천천히 끓어오르는 중이다. 지난 13일(현지 시각) 공개된 영국의 오피셜 싱글차트 톱 100에 8위로 안착하며 K팝 여성 아이돌 그룹 사상 가장 높은 성과를 내는가 하면, 9일(현지 시각) 미국의 빌보드 핫 100 차트에선 19위, 16일(현지 시각)엔 전주보다 2계단 상승한 17위에 올랐다. 올해 2월 24일 발표한 곡으로 한 달여 만에 영미 차트 100위권 안에 오르고 이후 꾸준히 가속도를 냈다. 곡이 좋기 때문에 만들어진 성과다. 풀이하면 완성도 높은 노래였기에 틱톡의 수혜를 입을 수 있었다.
‘Cupid’가 영미권을 지나 세계 음악시장에 화살을 명중할 수 있었던 원인을 좇아본다. 핵심은 ‘음악’이며 그 시작은 ‘프로듀싱’에 있다.
기존 K팝과 다르게
유튜브 공개 2주 만에 1000만 조회수 달성을 앞둔 ‘Live in studio FIIFTY FIFTY’가 실마리다. 처음부터 해외 시장을 염두에 두고 곡을 썼다는 소속사 대표의 말처럼 ‘Cupid’는 한국어 버전과 랩 부분을 빼고 모든 가사를 영어로 쓴 트윈버전(Twin ver.)이 동시에 발매됐다. 영미 차트를 중심으로 외국인들의 관심을 쉽고 빠르게 받게 된 데에는 이 트윈버전의 역할이 컸다. 영상은 ‘Cupid twin ver.’을 멤버들이 직접 라이브로 부르는 장면을 담는다.
현재 이 영상의 제일 핫한 인기 댓글은 “오디오 엔지니어의 월급을 올려줘야 한다”이다. 소리의 톤이 부드럽고 믹싱이 훌륭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피프티 피프티는 데뷔 때부터 이 ‘부드러움’에 강수를 뒀던 그룹이다. 데뷔 음반 < The Fifty >의 대다수 곡 중 특히 타이틀 ‘Higher’가 그랬다. 이 편안함이 이들이 여타 K팝 그룹과 다른 점이었다. 한 번에 시선을 잡아끌 강한 사운드, 또 다른 유희 거리를 만들어 줄 세계관 없이 그룹은 “듣기 편한 음악이라는 것만으로도 현 K팝 신에서 돋보일 수 있는 위치를 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정확한 유효타였다.
이를 위해 이들이 포기한 것은 ‘가창력 어필 포인트’다. 강한 고음으로 내지르는 구간이 없다. 뉴진스의 ‘Ditto’, 트리플 에스의 ‘Rising’ 역시 일정 부분 힘을 뺀 음악이긴 하나 무게 중심이 ‘사운드 톤’에 쏠리지 않았다. 더하여 눈여겨 봐야 할 지점은 가창력을 부각하려 하지 않았음에도 그룹의 가창이 계속해서 관심을 끈다는 사실이다.
심심찮게 이들의 음악에서 197~80년대 뮤지션인 아바, 카펜터스의 향취를 느낀다는 후기가 이어진다. 또한, 메인 보컬 아란, 시오의 음색을 지목하는 댓글도 많다. 각각 중저음, 메조소프라노의 음역을 지닌 이들의 보이스 칼라가 그만큼 돋보인다. 래퍼 라인인 키나, 새나를 향한 애정 어린 후기도 많다. 즉, 각기 다른 음색에 저마다 출중한 보컬 실력을 지녔다는 거다. 보컬의 강조와 보컬에서의 강점. K팝 레드오션에서 그룹이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이란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딘, 크러쉬, 예바(YEBBA)와 같은 요새 아티스트를 즐겨 듣는 그룹이 요즘 음악과는 다른 스타일을 들려주게 된 것은 프로듀싱이 의도한 효과일 가능성이 크다. 여러 차례 곡의 프로듀서 안성일(SIAHN)은 “노래 자체의 멜로디와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다른 부분을 최소화 시켰다”고 밝혔는데
그의 이러한 접근이 멤버들의 힘을 뺀 창법으로 이어지며 색다른 K팝의 창조로 이어졌다고 본다.
디스코 팝을 넘어 그때 그 시절 버블껌 음악까지
이 색다른 K팝은 K보다 ‘팝’ 역사 쪽에 그 기원을 둔다. 현재 이들의 음악을 두고, 2019년 큰 인기를 끈 도자 캣의 ‘Say so’에서 비롯된 디스코팝 계열을 많이 인용하나 이는 반쪽짜리 해석이다. 물론 도자 캣처럼 틱톡을 통해 인기를 끌었고, 그의 음악처럼 소프트한 복고풍의 디스코 사운드를 근간으로 하고 있긴 하지만, ‘Cupid’는 디스코와 곁들여진 드럼 사운드에 귀 기울였을 때 더 맛이 사는 곡이다. 마치 기타 소리를 죽이고 몽환적이고 몽글몽글한 사운드를 들려준 존 메이어의 ‘New light’처럼 말이다.
따라서 굳이 ‘Cupid’의 사운드 핵심을 뽑자면 그건 소프트한 드럼이다. 날카롭기보다는 끝을 뭉툭하게 다듬은 드럼이 곡에 특유의 꿈결(dreamy) 같은 분위기를 완성시킨다. 또 하나 이들 노래가 쉽게 귀에 감기는 이유는 곡이 1960대부터 인기 끈 ‘버블껌 음악’을 떠오르게 한다는 데 있다.
버블껌 음악은 쉽게 말해 오늘날 아이돌 음악의 효시이다. 10대들이 하거나 또는 그들을 겨냥한 감각적인 음악을 뜻하는 말로 주로 10대들이 좋아하는 풍선껌(버블껌)처럼 달콤하고 쉬운 노래를 의미한다. 당시 굵직한 인기를 끌었던 몽키스, 오하이오 익스프레스를 거쳐 마이클 잭슨이 있었던 1970년대의 잭슨 파이브 등이 다 이 계열에 속한다. 그중 ‘Cupid’에게선 토미 로의 ‘Dizzy’, 아치스 ‘Sugar sugar’, 숀 캐시디 ‘da doo ron ron’ 같이 밝고 달콤한 향이 짙게 묻어난다.
다시 말해, ‘Cupid’가 응축한 복고는 디스코에서 시작된다기보다 영미권의 그때 그 시절 아이돌 음악을 생각나게 한다는 점에 있다. 틱톡으로 흥한 모든 노래가 차트 상위권에 오르지는 못하지만 틱톡으로 빛을 본 음악은 더 많은 사람에게 가 닿을 가능성이 높다. 이를 뒷받침하듯 곡은 2030 이용자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스트리밍 사이트 스포티파이 데일리 톱송 차트에서 글로벌 4위 미국 8위 영국 10위에 오르는가 하면 연령층이 다소 높은 아이튠즈 다운로드 순위에서도 40위 권을 오르내리며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 K팝 열혈 팬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다양한 연령층에게 고루 사랑받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만들어진 성공, 이유 있는 흥행
이들의 성공 옆에 붙는 ‘틱톡’, ‘바이럴’, ‘좋은 음악의 힘’과 같은 수식어는 정확히 만들어진, 의도된 성과이다. 서로 다른 음색을 지닌 멤버들을 모으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고, 그룹의 영어공부에 힘쓴 것은 물론, 이들을 관리하는 이준영 본부장(A&R 총괄), 김지훈 팀장(글로벌 PR 담당) 등을 모두 해외 프로덕션에 최적화 된 인물로 구축했다는 탄생 비화까지 모든 곳에 보이지 않는 땀방울이 묻어있다. 어쩌면 ‘Cupid’를 향한 가장 큰 상찬의 말은 ‘K팝인지 몰랐다’는 댓글일 수도 있다.
처음부터 국내보다 외수 시장을 위해 맞춘 곡으로 영어 발음까지 하나하나 교정해 만든 ‘Cupid’. 해외 유학 없이 전 멤버가 한국에서 자랐고, 이곳에서 꿈을 키운 이들이 일군 성과는 그래서 값지고 그렇게 더 체계적이었다. 현재 틱톡에 업로드된 ‘Cupid’ 관련 영상의 수는 200만 개가 넘는다. 안무를 따라 하고 곡의 일부를 각색해 만든 여러 리액션 비디오 속 인종과 나이대는 손에 잡을 수 없을 만큼 넓다. 이 평이한 댄스 라인과 가사까지 모두 의도된 작품이었다고 하니, 그들의 성공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기대된다.
김뜻돌의 음악 지평은 넓다. 때로는 어쿠스틱 기타 반주에 맞춰 포크를 하고 또 때로는 일렉트릭 기타를 들고 록을 한다. 차림새도 매번 다르다. 꾸밈없이 단정하기도, 머리를 짧게 자르고 물들이기도 한다. 종잡을 수가 없다. 이 종잡을 수 없음은 김뜻돌이 그만큼 자유롭게 내 음악을 한다는 사실과 맞닿아 있다. 이 곡은 그런 그가 꺼내든 또 다른 페르소나다. 조금은 힘을 풀고 ‘봄’과 ‘사랑’의 상관관계를 부드럽게 이야기하는 곡은 지금껏 들려준 적 없던 월드뮤직 풍의 사운드를 끌어와 독특한 매력을 선보인다.
아이리시 휘슬, 만돌린이 부유하고 그 곁을 바이올린, 퍼커션이 채운다. “새로 나는 이빨을 자랑해야지 / 색깔 없는 그림을 그려줘야지” 하는 김뜻돌 특유의 자유분방한 가사도 매력적이다. 봄의 끝과 여름의 초입 선 요즘 일상을 ‘캡처’하게 하는 음악. 기꺼이 노래에 맞춰 순간을 채색하게끔 하는 좋은 싱글이다.
만 17살의 나이로 데뷔한 그때 그 시절의 ‘나’에게 쓴 편지다. 2022년 발매한 싱글 ‘Feeling’이 젊은이들의 감성에 무난히 가 닿을 댄스 기조를 안고 있었다면, 이후 발매작들은 더욱더 ‘성인 지향적’이다. 같은 해 쓴 ‘사과꽃’처럼 이번 노래도 세월을 살아본 자가 전하는 진한 어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록 발라드 근간의 사운드와 뜨겁게 감정을 달구며 후반부 고조되는 편곡 또한 근사하다. 작사 작곡은 물론 커버아트도 그가 직접 그렸다. 묵직한 울림을 지닌, 어른의 노래다.
올해로 11년째 12~2시를 책임지는 < 정오의 희망곡 > DJ 김신영을 만났다. 팔이 불편해 보이길래 물으니 이제 막 < 전국노래자랑 >에서 유도 시연을 하다가 다친 어깨의 깁스를 풀었다고 했다. 걱정 어린 눈길에 대답 대신 멋쩍은 웃음이 돌아온다. 말로 천하를 호령하는 기세보단 얇은 막 같은 긴장이 서린 첫인상이었다. 그는 “낯을 가린다”고 했다.
‘낯’은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민낯’ 같았다. 힘들었던 어린 시절 할머니와 아버지 곁을 오가며 이사만 60번을 다니고, 때로는 비닐하우스에서 지내며 혼자 키웠을 외로움의 감정. 생의 고단함을 일찍 겪을수록 빨리 찾아오는 게 사람과의 거리두기, 즉 낯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그는 그 영겁의 경험을 동력 삼아 일등 코미디언이, MC가, DJ가 또 때로는 연기자가 됐다. 그는 자신을 “결핍에서 시작한 사람”이라고 했다. 결핍. “행님아”를 외치던 152cm의 22살 청년이 “전국”을 외치는 41살이 됐다. 그사이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악착같이 음악과 웃음 곁을 좇은 김신영. 그와의 대화를 시작해본다.
요새 스케줄이 어떻게 되나? < 전국노래자랑 >이 농사와 비슷하다. 엄청 더울 때는 안 하고, 엄청 추울 때는 또 안 나간다. 날씨가 좋은 날 한 번에 몰아서 (촬영을) 하는데, 4월에 녹화가 9개 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꽃피고 날씨 좋고 할 때. 4~6월까지 바쁘다.
< 전국노래자랑 >을 시작한 지 얼마나 됐나. 방송에 적응은 좀 됐나? 이제 거의 6개월쯤 됐다. 적응이라기보단 여전히 배우는 단계다. < 전국노래자랑 > 자체가 1980년대에 시작된 프로그램이고 송해 선생님이 30년 진행하셨는데, 6개월이면 오프닝 수준 아닌가. (웃음) 아직 워밍업 단계다.
또, 보통 방송 가면 진행 큐 카드나 프롬프트가 있다. 근데 < 전국노래자랑 >은 그게 없다. 아예 없다. 생라이브. 전날 4시나 늦으면 8시에, 19페이지 분량의 대본이 나온다. 처음에는 부담이 많이 됐다. 그래서 필사를 했다. 대본을 깜지쓰듯 다 적어가며 새벽까지 외운다. 소설책처럼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고 리허설에 참여하고 있다.
사실상 올인을 해야 하는 건데. 그렇다. 그래도 행복하다. 하길 정말 잘했다.
왜 김신영이 < 전국노래자랑 >의 새 MC가 된 것 같나?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어렸을 때 이사도 60번 넘게 다녔다. 그 덕에 여러 고장의 사투리를 잘 안다. 또 음악을 좋아하기도 하고… 가장 중요한 건 내가 < 정오의 희망곡(이하 ‘정희’) >만 11년째다. 성실함. 라디오는 매일 움직여야 한다. < 전국노래자랑 >도 성실하지 않으면 힘들다. 그런 면을 높게 봐준 것 같다.
인상과는 달리 낯을 가리는 편이라고. 진행할 때 어려운 점이 있을 것도 같은데. 성격이 낯을 가린다고 일은 안 하는 건 아니다. 각자마다 성향과 성격이 다 있다. 하지만 일을 하는 사람인데 내 성격대로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프로’이지 않나. 내성적인 성격은 라디오나 팬 미팅 같은 거 보면서 많이 나아졌다. 보통 여성 코미디언들이 지역 축제 사회를 잘 안 보는 편인데 나는 레크레이션 자격증을 따고 행사도 많이 다녔다. ‘10년은 무조건 배우는 시기다’ 했다.
더불어 < 전국노래자랑 > 같은 경우에는 내가 주인공이 아니다. 참가자들이 주인공이다. 나는 그들이 최대한 스트레스 안 받고 긴장 안 하게 도와주는 역할일 뿐이다. 현장 가면 내가 그런 말을 한다.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내려가시라고. 여러분이 주인공이라고. 다 받아들이겠다고.
올해로 방송 11년 차에 접어든 < 정희 > 또한 김신영의 큰 궤적이다. 내게 < 정희 >는 삶이다. < 정희 >에는 정선희 선배가 DJ 했을 때 게스트로 처음 출연했다. 내가 난독증이 좀 있다. 코미디는 3분 힘써서 하고 나가면 끝인데, 라디오는 말에 귀 기울이니까 처음에 너무 힘들었다. 정선희 선배가 ‘신영아, 넌 잘할 수 있어. 넌 재주 있는 애야. 포기하지 마. 넌 게스트도 할 수 있고 DJ도 할 수 있어’ 하면서 계속 다독여줬다. ‘00시에 사는 A씨 사연입니다’를 못했다. 순간 겁먹으면 글이 다 날아다녔으니.
< 정희 >가 한 달간의 시간을 준 유일한 매체였다. 그 시간 동안 읽고 말하는 걸 계속 연습했다. 그러면서 자신감이 붙고 다른 데 9개 고정 게스트를 했다. 슬슬 소문이 돌면서 < 심심타파 > DJ가 됐다. 내가 생각보다 참 많이 돌아서 온 아이다. 낯을 가리니까. 예능도 4년 동안 통편집됐었고.
음악을 좋아하는 걸로 잘 알려져 있다. 음악은 언제부터 좋아했던 건가? 나는 때로는 할머니 손에 또 때로는 아빠 손에 컸다. 두 분이 음악을 좋아했다. 할머니들은 또 음률을 넣으면서 말을 하지 않나. ‘머얼 먹으면 자알 먹었다고 소문이 나알까나~’. 사실 이게 음악이다. (웃음) 할머니가 김상국의 ‘쥐구멍에도 볕들날 있다’ 같은 옛날 노래도 많이 불러줬다. 아버지는 포크송을 좋아했다. (몇 년생이냐고 물으니) 1955년생. 당시 그룹사운드 음악들, 밴드 이글스, 김광석이나 김현식, 송골매 이전 활주로 시절 노래들. 또 대학가요제 음악도 많이 들었고.
마그마의 ‘해야’도 좋아한다. 보컬이 조하문씨인데. ‘해야’가 가사를 또 시에서 가져온 거다. 옛 표현들이 참 아름답다. 가사가 수필, 시 이런 느낌이다. 쌓다가 부수고 느낌도 있고. 유상록 ‘해운대 연가’의 한 구절인 ‘푸른 물결 춤을 추고, 물새 날아드는 해운대의 밤은 (…) 솔밭길 걷던 우리들의 사랑 얘기가 파도에 밀려 사라지네’에는 누구에게나 다 있는 10~20대가 그려진다. 그런 걸 담아낸 음악들이 좋다.
라디오 DJ로서 옛 음악을 많이 아는 건 확실한 강점이다. 그래서 난 우리 방송에서 임병수의 ‘아이스크림 사랑’을 엄청 많이 틀었다. DJ는 디스크자키니까.
자라면서 할머니나 아버지의 음악적 영향을 놓치지 않고 받은 것도 한몫한 것 같다. 가난해서 그랬다. 학원에 다니지도 않았고…. 음악은 내 힘듦을 달래 줬고, 꿈을 꾸고 키우게 해줬고, 또 어떨 때는 같이 울어주던 존재다. 굉장히 고생을 많이 했는데, 그럴 때 ‘노동요’가 짱이다. 음악은 위로인 것 같다. 양희은 선생님이 그러더라. 결핍이 많은 애들이 음악을 좋아한다고. 코미디언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여러 부류의 코미디언이 있겠지만 어렸을 때 웃을 일이 없거나 내가 웃는 거를 못 보면 다른 곳에 가서 그 웃는 걸 찾고 싶어진다. 그게 사실 결핍인데. 나는 그 결핍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지금 (활동에) 충족이 많이 된다. 충전되는 느낌이고.
데뷔 20년 차 김신영 엔터테인먼트 역사에 있어서 가장 기뻤던 순간은? 예원예술대학교 코미디 연기학과에 붙었을 때. 코미디 관련된 대학이 대한민국에 딱 거기 하나밖에 없다. 전유성 교수님이 있었는데, 시험문제 4번이 아직도 기억난다. 혜화역 4번 출구에서 애국가 부르기. 얼마나 창피했는지. 내가 이 과를 왜 들어와서… (웃음) 또 이게 뭐야 했던 건 지하철에서 물건 팔기. 부딪혀 보라는 의미였던 것 같다.
두 번째는 대학교 축제 때 연극했던 것. 그때 했던 연극이 01학번 선배가 만든 < 신데렐라 콤플렉스 >이다. 여기서 참 많은 걸 배웠다. 나에 대한 확신. 내가 무대 위에서 즐겁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행님아(김신영이 했던 대표 개그 코너)’도 할 수 있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행복은 벚꽃 같다. 벚꽃이 피길 기다리다가 막상 피면 감흥이 없다. 근데 지면 또 그때부터 그리워한다. 기다리는 거다. 행복은 지나 봐야 아는 거지. 돌아봤을 때. 내가 살아 있다고 느꼈던 건 작년 말 < 전국노래자랑 > 연말 결산 때였다. MC 시작하고 2개월쯤 됐을 때 ‘설 특집 1020’을 하게 됐다. 내가 다른 건 웬만해서 다 해봤다. 근데 이거는… 연말 결산 끝나고 나니까 땀이 쫙 나더라. ‘오랜만에 땀 뺐다. 이걸 혼자 해냈다’ 싶었다. 막걸리를 한잔 딱 마셨는데 뜨거운 기운이 다리까지 퍼지는 느낌에 막 희열이 들었다.
그는 스스로를 눈물도 없고 무뚝뚝한 사람이라고 했다. 겉이 두껍다고 하여, 속까지 딱딱하지는 않다. 유난히 고달팠던 어린 시절을 달래준 ‘행복의 나라로’를 < 전국노래자랑 > 첫 방송에서 양희은과 부를 때, 감춰뒀던 그간의 상처, 외로움, 기쁨, 희열이 한 데 뭉쳐져 울상이 되고, 무대에 오른 한 퇴직 광부의 무덤덤한 사랑 고백에 울컥하는 사람. 그에게서는 느껴본 자만이 맡을 수 있는 인간의 냄새가 났다.
텔레마케터, 신문, 음료 배달 등 안 해본 일 없이 열심히 산 그에게 ‘입담’은 가난이자 결핍이고, 상처이자 선물이었다. 라디오에서 돈도 못 받고, 도리어 잔뜩 욕만 먹은 청취자의 일화가 전파를 탈 때 엉엉 울 틈을 내주는 사람. 그리곤 다음 날 다시 그 벨을 누르라고 용기와 힘을 주는 사람. 눈물이 쓰고 짠 것을 아는 자만이 지닌 넉넉한 유쾌함이 그의 단어 하나하나에서 새어 나왔다.
반대로 너무 힘들었던 때가 있다면. 괴로운 건 뭐 눈 뜨면 괴롭다. 내 멋대로 사는 인생이 어디 있겠나. 그래도 가장 괴로우면서 나한테 득이 됐던 건 2012년 공황장애가 터졌을 때. 하늘 높을 줄 모르고 그냥 이렇게 살아가는 구나를 느꼈던 김신영에게 갑자기 공황장애가 찾아왔다. 12월부터 3개월을 꼬박 쉬었다. 엘리베이터도 못 타고 집에서도 계속 발작하고.
그때 전유성 교수님이 이런 얘기를 하더라 ‘축하한다. 너는 득도를 할 꺼야. 너에 대해서 진짜 공부를 이제부터 시작하는 거지’ 그래서 내가 ‘아무리 그래도 나는 지금 죽을 것 같다. 밥을 먹어도 갑자기 갑자기 그러니까…’ 했더니 ‘그러니까! 인생이 갑자기 갑자기인데 너가 계속 갑자기 발작이 오는 건 네가 너를 너무 몰라서 그래. 앞만 보지 마. 일단 너를 보고 나서 앞을 봐야지. 낭떠러지가 있는데 앞만 보고 걸어봐라. 너 죽는 거야. 축하한다’ 그러는데 기분이 팍 상했다. (웃음)
내가 남에 대해서 공감 능력이 부족했다. 예능 나가서 한 세 번 크게 웃기고 ‘그래 김신영이다’라는 얘기 듣고 살아야지 욕심냈다면 공황장애가 딱 터지고 나서 바로 고꾸라졌다. 방송을 못 하고 2~3년은 힘들었지.
그런데? 그런데. < 정희 >에서 기다려 주겠다고 했다. 사실 다른 방송에서는 다 잘렸다. 예능이 얼마나 빨리 돌아가는 곳인데 그거를 기다려주나. 그런데 또 KBS 심미진 PD한테 연락이 왔다. < 인간의 조건 여자편 >을 할 건데 내가 하면 하고, 내가 안 하면 안 한다고. 언제쯤 낫느냐고. 6개월 정도 인지 행동 치료 같은 거 필요하다고 하니까 기다리겠다고 했다. 방송국에서 기다려준다는 건 없는 일이지 않나. 그런데 참 많은 분이 기다려줬고, 그래서 더 감사하다. 책임감이 많이 든다.
사람들이 내 목소리 하나에 즐겁고 웃고, 사연도 보내고 한다. 또 < 전국노래자랑 >가서 ‘여러분 손 머리 위로’ 하면 모두가 다 손을 머리 위로 든다. 이게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른다. 지금 오른팔을 다쳤는데, 무대에 있으면 아픈 게 없다. 이번에 영도에 가서 내가 그랬다. 지금 박수를 너무 치고 싶은데, 왼팔밖에 없으니 여러분들이 내 오른팔이 돼 달라고. 박수 많이 쳐달라고. 그러고 나서 ‘전국’ 했을 때 돌아오는 ‘노래자랑’ 소리. 소름 돋고 행복하다. 사람들이 웃는 순간순간이 다 나한테는 행복이고 기쁨이다.
*김신영이 꼽은 나에게 울림을 준 노래 BEST 5
1. 엘튼 존 ‘Crocodile Rock’
공황장애가 터지고 아무것도 못 하고 있을 때 엘튼 존이 엘리자베스 2세 즉위 60주년 콘서트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걸 봤다. 너무 아름다워 눈물이 나더라. 부러운 게 아니고, 내가 평생 이런 무대를 해봐야지 싶었다. 음악으로 하나가 되는. 그때 기억과 그 울림이 아직도 여기 남아 있다.
2. 양희은 ‘행복의 나라로’
원래는 한대수 선생님의 곡인데, 나는 양희은 선생님이 부른 버전을 더 많이 들었다. 고등학생 때 금니를 했는데 그때 치과 가는 게 그렇게 무섭더라. 다 큰 손주가 무섭다고 하니까 외할머니가 나랑 같이 병원에 가줬다. 같이 가서 앉아있는데 라디오에서 이 곡이 나왔다. 할머니가 내 손을 꼭 잡아주면서 귀에 대고 이 노래를 불러줬다.
3. 김현식 ‘추억 만들기’
모르겠다. 그냥 이 노래가 너무 좋다. 울고 싶을 때는 이 노래를 많이 틀고 울었다.
4. 서태지와 아이들 ‘난 알아요’
우리나라 음악의 판도를 바꿔놨다. 동시에 내 음악 취향도 많이 바꿔 놨고. 어릴 때 오빠랑 둘이 엄청나게 연습하고 그랬다.
5. 셀럽파이브 ‘셀럽이 되고 싶어’
일본 여고생 댄스팀 TDC의 영상을 한 만 번쯤 보고 무턱대고 일본으로 갔다. 우여곡절 끝에 아카네 코치를 만나서 허락받았다. 바로 송은이 선배한테 전화해서 ‘허락 맡은 게 있는데 정말 하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시작한 프로젝트다.
고등학교 때 내가 중늙이었다면, 이때의 내가 진짜 고등학생 같다. 35살 전까지는 그냥 나 이렇게 예능 하다가 죽을 사람인가보다 생각했지 이렇게 머리 속에 있는 걸 기획할 수 있는 사람인지 몰랐다.
단체복 원단 고르는 것부터 개사까지 다 직접 했다. 셀럽 파이브 활동을 통해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구나 느꼈다. 이게 되는구나. 내 자신감을 높여줬던 시기라 내게는 굉장히 뜻깊은 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