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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aespa) ‘My World’ (2023)

평가: 2.5/5

에스파에게 이번 EP는 특히나 중요하다. 내부에서는 전작 < Girls >의 부진과 소모적인 갓더비트(GOT the beat) 활동에 이수만 프로듀서가 강제했다는 ‘나무 심기’ 가사 논란까지 있었고, 외적으로도 SM 엔터테인먼트의 인수합병 등 불리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악당 블랙맘바와 싸우던 가상 세계 광야를 벗어나 현실 세계로 진입한 것은 접근장벽을 낮추고 대중적 입지를 되찾으려는 의지로 읽을 수 있다.

나이비스(nævis)의 피쳐링을 지우면 에스파의 곡이 아니라 해도 믿을 만한 ‘Welcome to my world (Feat. 나이비스)’와 달리 타이틀곡 ‘Spicy’는 절충적이다. 일상적 풍경 속 온갖 이상 현상이 벌어지는 뮤직비디오처럼 복잡한 세계관 가사를 내려놓았으나 자극적인 질감의 외피는 유지하고 있다. 사이버 전사의 정체성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다른 말로 하면 타협이다. 그룹의 색채와 대중성을 모두 잡으려고 한 탓에 결과적으로 ‘Spicy’는 독창성도 옅고 클리셰적인 맛도 부족하다. 두 번 등장하는 포스트 코러스(‘Don’t stop 겁내지 마’)를 제외하면 답답한 단조 멜로디는 마땅히 해소되지 못하고, 귀 아픈 전자음이나 곡을 가득 채운 랩도 유의미한 구심점으로 기능하는 대신 f(x)의 ‘Hot summer’나 있지(ITZY) 등의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쟁점은 특정 사운드가 아니라 태도에 있다. 진한 PC 뮤직 스타일 리듬의 ‘Salty & sweet’이 안일한 훅과 함께 침몰하는 반면, 선율과 음색이라는 기본 재료 위주로 꾸린 ‘Thirsty’와 ‘I’m unhappy’가 오히려 와닿는 대조적 상황이 이를 말해준다. 마찬가지로 레드벨벳의 잔상이 강하지만 감각적인 후렴과 소셜 미디어에 반감을 표하는 가사 등 곡 자체의 매력은 출중하다. 급진성을 유지하기 힘들다면 아예 보편성의 측면으로 과감히 파고드는 것도 하나의 대책이 될 수 있다.

이미 하반기 또 다른 앨범을 예고했듯이 신보는 그룹에게 드리워진 부정적 이슈를 일차적으로 씻어내려는 전략적인 수다. 당연히 음악적으로도 속 시원한 해답보다는 다음 단계 및 장기적 행보를 둘러싼 고뇌의 과정에 가깝다. 복귀와 함께 이미지 확장이라는 자체 목표 완수에는 성공했으니 이번의 도움닫기를 이어질 도약으로 연결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 My World >는 영토 점령의 선포보다는 경계를 넘어 관문을 여는 신호다.

-수록곡-
1. Welcome to my world (Feat. 나이비스)
2. Spicy
3. Salty & sweet
4. Thirsty
5. I’m unhappy
6. ‘Til we meet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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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빨간사춘기 ‘사랑.zip’ (2023)

평가: 3/5

대중이 기대하는 볼빨간사춘기의 음악은 확실하다. 화사한 봄을 닮은 낭만적인 멜로디와 예쁘장한 어쿠스틱 기타 사운드, 또는 침울하게 내면의 아픔을 토로하는 발라드의 이미지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된다면 공감대를 형성하는 정서 밀착형 가사가 될 것이다. 공고한 캐릭터는 쉬운 길을 보장하지만, 욕심이 있는 아티스트라면 이를 오히려 쇄신을 위한 자극제로 삼기 마련이다.

올해도 마찬가지로 봄에 맞춘 발매 시기 등 < 사랑.zip >은 외견상 익숙한 볼빨간사춘기 이미지의 연속처럼 보인다. 그러나 음악을 뜯어보면 미묘한 차이점이 있다. ‘Chase love hard’의 독특한 발음은 데뷔 초 보컬을 연상시키면서도 보다 주도적으로 리듬을 밀고 당기며, ‘Love story’의 연장선상에 놓인 ‘Friend the end’에서는 바삭바삭한 일렉트릭 기타를 한층 전면에 내세웠다. 안전지대 내에서 도모한 나름의 변주다.

시도가 성공의 동의어는 아니다. 챈트 형식의 존재감이 큰 나머지 ‘Chase love hard’의 황민현은 게스트로서 온전히 녹아들지 못하고 겉돌며, ‘Friend the end’는 소극적인 멜로디 진행으로 움츠러든 아이유의 ‘Blueming’을 듣는 듯하다. 저음이 강해진 목소리 변화에 맞춘 결과물이겠지만 그만큼 옅어진 생동감을 메꿔줄 장치가 ‘friend’와 ‘the end’를 이용한 언어유희로는 부족한 감이 있다.

흥미로움은 수록곡에서 발견된다. 로마에 사랑을 표하는 ‘Rome’은 ‘여행’처럼 해맑은 인사 대신 건조한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오묘함을 유지하는 선율과 짤막한 기타 브릿지가 신선한 공기를 불어 넣으며 반복 청취를 유도한다. 비슷한 결에서 전형적인 발라드 ‘사랑이 이별이 돼 가는 모습이’보다 ‘좋은 꿈 꿔 0224.mp3’의 여운이 더 크다. 아쉬울 정도로 짧은 러닝타임에 조심스레 해석의 여지를 남김에 따라 음반의 키워드인 ‘사랑’이라는 단어를 곱씹게 만든다.

물론 이러한 곡을 볼빨간사춘기의 새 지향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는 어디까지나 흥행 공식을 놓을 수 없는 대중가수의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 사랑.zip >은 변화와 유지 사이에서 원만한 합의를 이룬 작품이라 볼 수 있다. 다만 내심 드러내듯 ‘워커홀릭’이나 ‘나비효과’ 등에서 보여줬던 변신 의지를 계속 담아두고 있다면 배짱을 더 갖춰도 괜찮아 보인다. 사춘기가 지났다고 해서 음악을, 미래를 굳어버리게 둔다면 아까우니까.

-수록곡-
1. Chase love hard (Feat. 황민현)
2. Friend the end
3. Rome
4. 사랑이 이별이 돼 가는 모습이
5.좋은 꿈 꿔 0224.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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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쉬 아일랜드(ASH ISLAND) ‘Rose'(2023)

평가: 2.5/5

처절한 고독을 울부짖었던 ‘Paranoid’부터 잔망스러운 리듬으로 풋풋한 청춘을 그려낸 ‘멜로디’까지, 한 꺼풀씩 어린 시절의 아픔과 고독의 그림자를 벗겨온 애쉬 아일랜드는 순차적인 자기 치유를 이뤄냈다. 이에 발맞추어 편집증이나 악몽을 외치던 음울한 힙합은 옅은 무채색의 틀만 남겼고, 사랑과 이별을 읊는 팝으로 영역을 넓혔다. 힘이 강한 멜로디와 일반적인 주제로 꾸며진 < Rose > 역시 이러한 접근성을 더 높여 다가간다.

단짝 프로듀서 토일 대신 지휘봉을 잡은 보이 콜드는 특유의 친화력과 수용성으로 아티스트의 확장을 꾀한다. 팝과 힙합을 넘나드는 중심부는 일견 비슷해 보여도, 선이 굵은 기타 스트로크나 짙은 서정성의 난립은 분명 낯설다. 애쉬 아일랜드는 거친 야성은 감추고 목소리의 강약을 조절하며 이에 대응했다. 밴드 사운드를 비롯해 기존 기조는 유지하되 약간의 세련미를 더한 우회로, 여리여리한 목소리를 강조한 ‘Rose in the heart’와 ‘시간은 왜 앞으로만 가’가 신보의 이러한 변화를 대표적으로 상징한다.

그리하여 그가 도달한 이상향은 팝도, 록도, 힙합도 아니다. 물론 장기인 캐치한 후렴구를 삽입하기에는 적합한 환경으로, 감성적인 선율과 쉬운 글감으로 귀결된 이 종착지에 어느 정도 수긍은 간다. ‘작별인사’와 ‘Wonder’에서 그는 록 밴드의 프론트 맨으로 귀에 쉬이 남을 만한 멜로디를 쏟아내고, ‘Drop top’과 ‘Trapped’에서는 표류하는 이모(Emo)와 트랩의 흔적을 찾으며 충실히 노래한다. 과감한 결단이었다. 래퍼로 업을 시작한 그가 랩은 최대한 요약한 채 보컬만으로 승부를 본 것이다.

이 지점에서 단순히 정체성의 문제만이 아닌 근본적인 논점이 발화한다. 본질은 곡 하나하나가 단일로는 적당한 만족감을 주지만, 꿰어진 상태로는 소구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U know it’ 등 몇몇 수록곡에서는 촘촘한 음계가 눈에 띄나 벌스로 갈수록 그 힘은 떨어지고, 청취 시간을 흥미롭게 채워 넣기에는 대부분의 트랙 분위기가 비슷하다. 칠린 호미의 타이트한 랩이나 루이의 공격적인 피쳐링이 유일한 탈출구라는 사실은 앨범의 단조로운 흐름을 더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럼에도 ‘작별인사’의 기세는 오래도록 뜨거울 테니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너른 장르 수용에 기반한 일반화는 그가 지닌 차별점을 뭉툭하게 다듬었고, 동시에 범용성까지 넓혀 왔으니 말이다. 어찌 보면 일찍이 팝 지향성을 선포했던 < Island >부터 예견된 결과물이다. 그러나 일관된 방향과는 별개로 설득력 있는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 < Rose >라는 낭만적인 도전장을 팝에 전하는 데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애쉬 아일랜드 장르 자체의 정당성에는 의문을 남겼다.

– 수록곡 –

  1. 작별인사
  2. Wonder
  3. Rose in the heart
  4. Trapped (Feat. 칠린 호미)
  5. U know it (Feat. 루이)
  6. Drop top (Feat. 더 콰이엇)
  7. 거짓말이라도
  8. Bad words (Feat. 비오)
  9. 시간은 왜 앞으로만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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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트디(Agust D) ‘D-Day’

평가: 3/5

팀 동료 알엠의 솔로 활동이 여러 인디 아티스트들과 협업해 특유의 지적인 면모를 강조했다면 슈가의 또 다른 자아 어거스트 디의 그것에 온기는 없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날 서 있고, 세다. 래퍼로서의 인정에 목마른 듯 그간 두 장의 믹스테이프를 발매해 왔으며 < D-DAY >는 그의 첫 번째 정규작이다.

힙합에 대한 열띤 연구와 현대적인 감각이 더해진 구성이 알차다. 최신 유행의 드릴과 편안한 알앤비, 무게감 있는 붐뱁으로 이어지는 트랙들은 두루 일정 이상의 완성도를 보장하고 있다. 반복되는 가사와 멜로디가 어색한 이모 힙합 트랙 ‘Amygdala’처럼 겉도는 구간도 있지만 매끈한 훅의 ‘D-Day’나 견고한 선율 감각을 뽐내는 ‘Life goes on’처럼 귀에 또렷이 맴도는 곡이 다수를 차지한다.

가사에서도 고민의 흔적이 역력하다. ‘대취타’의 잔상을 잇는 ‘해금’은 국악기 해금을 활용해 자유와 방종에 대해 설파하며 대중을 묶어놓는 사회의 사슬과 억압을 해체하는 ‘해금(解禁)’의 곡이다. 깊게 가라앉는 붐뱁 트랙 ‘극야’의 날 선 질문처럼 그의 컨셔스함은 날카롭지만 누군가를 할퀴지 않는 친절함에서 비롯된다. 냉소적인 래퍼와 불특정 다수를 보듬는 아이돌로서의 면모 사이를 절묘하게 줄타기하는 것이다.

힙합 신의 쟁쟁한 경쟁 상대들과 비교해 호불호를 내포하던 특유의 긁는 톤도 한결 가라앉혀 자연스러워졌고 ‘사람 Pt.2’와 ‘Sdl’에서는 보컬도 무리 없이 소화해 낸다. 일본 영화 음악 거장 고(故) 류이치 사카모토와 협업해 고풍스러운 비트를 완성한 ‘Snooze’처럼 그이기에 가능한 시도와 결과물이 현 케이팝 신에서 그가 올라있는 독보적인 위치를 각인시킨다.

< D-DAY >는 결코 가벼이 치부하기 어려운 랩 앨범이다. 그룹 활동이 잠정 중단된 그에게 솔로 행보의 청신호를 켜는, 두 장의 믹스테이프와 수련을 거쳐 탄생한 단단한 ‘오늘’이다.

– 수록곡 –
1. D-Day 
2. 해금 
3. Huh?! (Feat. j-hope)
4. Amygdala
5. Sdl
6. 사람 Pt.2 (Feat. 아이유)
7. 극야
8. Interlude : Dawn
9. Snooze (Feat. Ryuichi Sakamoto, 김우성 of The Rose) 
10. Life goes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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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정 ‘Alone’ (2023)

평가: 4/5

스트링과 밴드 합주 위에서 이별의 책임을 비겁하게 떠넘기는 ‘헤어지자 말해요’. 친숙한 기승전결을 취하면서도 본인만의 개성과 역량을 표출한 양질의 발라드를 거부할 이유가 없다. 오디션 우승자란 칭호가 무색할 만큼 빛을 못 봤던 10년 차 뮤지션 박재정에게도 드디어 대표곡이 생겼다.

타이틀곡의 인기에 이끌려 앨범의 다음 페이지를 들췄다면 그의 기획 의도에 호되게 당한 뒤다. 혼자란 느낌이 들 때마다 노랫말을 붙였다 밝힌 < Alone >은 첫 곡 ‘헤어지자 말해요’를 지나친 이후부터 극한의 외로움으로 얼룩진다. 마음 편치 않은 이야기를 최대한 널리 퍼뜨리기 위해 대중 친화적 발라드가 관객을 끌어모으는 용도로 등장한 것.

감춰둔 연막 안은 한없이 적적하다. 피아노 한 대 아래 홀로 버텨온 옛 시간을 드리운 ‘Alone’부터 세상의 소리와 완전히 분리된 녹음실 한가운데에 놓인다. 있는 그대로의 감정 기록을 위해 악기는 최후방으로 밀어냈고 기교 없는 중저음 가창이 남은 40여 분의 러닝타임을 깊숙이 타격한다.

쓸쓸함에 흠뻑 젖었음에도 호소하거나 울부짖지 않는다. 기악 구성을 절제한 인정과 체념의 화법은 직관적 제목의 트랙에서 도드라진다. 한 번 더 건반과 마주한 ‘망가진 내 자신을 보면서’는 사랑이란 흔한 감정조차 조심스레 내비쳐야 하는 현실을 덤덤히 고백하고, 느리게 기타를 튕기는 엔딩곡 ‘슬픔이 나를 지배할 때’는 자책으로 갉아먹은 지난날에 대해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후회와 단념 사이를 속삭인다.

연이은 우울의 잠식에 비관적 단상도 떠오르나 이를 차단하기 위한 음악적 묘수로 재즈를 내세운다. 진정한 쉼터가 되어야 할 ‘집’에서마저 느낀 불편은 아늑한 피아노 선율로 애써 포장했고, 병환으로 생을 마감한 조부에게 ‘표현하지 못했던 아쉬움’은 선선한 리듬감의 베이스와 가녀린 백 보컬을 만나 입체적인 그리움으로 피어났다.

완성도 높은 재즈는 ‘일상’에서 정점을 찍는다. 플루트, 현악 4중주, 기타, 피아노가 균형을 이루는 고풍스러운 악곡은 나른한 멜로디를 되풀이하다 코러스와 같이 화음을 쌓아가며 영원한 반복에 대한 회의를 아련히 풀어낸다. 이전까지 발표한 자작곡이 ‘가사’와 ‘4년’ 단 두 곡뿐이라 어쩌면 모르고 지나쳤을, 싱어송라이터 박재정의 작곡 감각에 내공이 깃들었음을 직감할 수 있다.

외로이 지새운 나날에도 멈추지 않고 성장할 수 있던 건 음악과 함께 곁을 지킨 오랜 친구들 덕이다. 피아니스트 박현중은 브라질리안 재즈를 대표하는 뮤지션 엘리안느 엘리아스의 실황 연주자까지 드럼 세션으로 초빙할 정도로 편곡과 녹음에 심혈을 기울였고, 박재정과 협업 경험이 있는 알앤비 듀오 콧(cott)의 김형표는 상호 간 음악적 신뢰를 바탕으로 견고한 사운드를 구축하는 데 힘을 보탰다.

결국 고립이 아닌 자립. 과거의 나와는 작별을 고하고 새로운 나에겐 행복과 사랑을 찾길 바라는 ‘끝인사’ 속 열여섯 번의 ‘안녕’, 일순간 뻗치는 허탈한 몇 마디에 무수한 해방감이 밀려온다. 잔잔히 철썩이던 고독의 파도가 스스로를 침식했지만 깎여 나가고 퇴적되길 거듭한 자리엔 강건한 세월의 지층이 쌓였다. 당장 그 가치를 입증하는 건 중요치 않다. 시간은 언제나 그의 편에 서 있다.

– 수록곡 –
1. 헤어지자 말해요
2. Alone

3. B에게 쓰는 편지
4. 집
5. 나의 겨울
6. 표현하지 못했던 아쉬움
7. 망가진 내 자신을 보면서
8. 일상
9. 끝인사

10. 슬픔이 나를 지배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