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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트레인(A.Train) ‘Private Pink’ (2022)

평가: 4.5/4

곁에 머물지만 형체를 규정할 수 없는 상처를 다룬 전작 < Paingreen >은 초연했다. 거대한 우울을 거부하지 않고 곧이곧대로 받아내 부서진 아티스트의 마음은 초현실적인 형태로 재탄생했고 무겁고도 진중하게 다가섰다. 동시에 불안정했다. 불투명한 고통은 치유란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불안이 되었고, 어느새 짙은 안개로 퍼져 그를 심연으로 가라앉게 했다. 우린 지금 숨 쉬는 ‘생명’이기에 안식은 죽음이란 추상적 해결에서 오지 않았다.

멈추지 않고 흘러내리는 가학의 폭포에서 살기 위해 발버둥 친 표류자는 그렇게 부표를 찾는다. 스스로 새긴 흉터를 숨기고자 억지로 덧댄 누더기는 사실 외부에서 주어온 그럴듯한 변명의 수단이었기에 에이트레인은 외투를 벗어 던지고 본연과 마주하기로 결심한다. 삶에 덕지덕지 붙여냈던 불쾌한 녹색 딱지를 뜯어내며 생긴 분홍 생채기, 두 번째 정규 < Private Pink >이다.

흐릿한 사운드스케이프로 청자를 잠식했던 지난 앨범과 다르게 < Priviate Pink >는 지독하게 개인을 해체하며 명백하게 나뉜 부위를 대중에게 전시한다. ‘나’를 중심으로 세 개의 주제로 구성된 독백 극은 얼터너티브 알앤비와 포크, 일렉트로닉 등 다양한 장르로 뚜렷한 기승전결을 드러낸다.

‘Scarberry’로 시작되는 1부의 한껏 과장된 편안한 기조 속 심어놓은 반전이 돋보인다. 길게 늘어뜨리는 창법과 따스한 피아노로 형성된 느슨한 분위기가 곧 의도한 불협으로 기괴하게 전환된다. 노이즈를 지나 어쿠스틱 기타가 매력적인 ‘안 괜찮아’ 역시 오소영의 담담한 목소리 뒤로 절규와 같은 코러스를 통해 또 다른 전개를 암시한다.

자학은 가족 등 타인에게로 향하고 기어코 열등으로 번진다. 성가 ‘식물’과 우스꽝스러운 소리로 자조하는 재즈 ‘가정통신문’에서 이어지는 ‘줘도 안 가질 보물’은 기억의 굴삭 후 발견한 추억에 대한 찬사이자 과거를 아름답게 치장하면 할수록 반대로 추악해지는 본인을 그린다. 초록색 대문이 부끄러워 나가지 못한 어린아이는 아직도 커야 한다.

이혜지의 첼로 연주를 비롯해 퍼커션을 활용한 편곡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감정선에 따라 변화하는 주법과 소스의 배치로 서사를 관통하며 카코포니, 최엘비 등 적재적소에 맞춰 사용한 피처링 또한 빈틈없이 이야기를 설계하는 치밀한 공법이다. 확고한 문학적 목표를 가지고 결집한 여러 질감이 어긋나지 않고 일관된 흔적을 남긴다.

‘이름을 바꿨다’로 이름까지 바꿔가며 운명이란 핑계를 쫓는 자신을 날카롭게 난도질하던 심경은 ‘잘라도 내가 잘라야지’로 차분히 내려앉는다. 되감기 효과로 하이라이트에 진입하는 곡에서 회상을 마친 그는 첫 번째 트랙부터 겹겹이 쌓인 악기의 층에 기대어 울부짖는다. 어쩌면 오만했던, 타의로 떠넘긴 거짓된 위안에 결국 자기혐오로 추락한 모습을 반성하듯.

무릇 깊게 팬 틈이라도 언젠간 새살이 돋기 마련이다. 직접 묻은 슬픔의 찌꺼기를 건저내기 위해 치부를 파헤친 에이트레인의 손끝은 어느 때보다 너덜너덜하지만, 내면에 자라난 ‘나’란 증오가 마침내 용서를 양분 삼아 포근한 위로의 새싹을 품어낸다. 이윽고 바닥을 뚫고 성장한 자생의 줄기가 < Private Pink >란 환한 핑크색 열매를 맺는다.

– 수록곡 –
1. Scarberry (Feat. 서보경)
2. 안 괜찮아 (Feat. 오소영, Dey Kim) 
3. 사실 나는 꽤나 괜찮은 사람일지도 (Feat. 이랑, 이혜지)
4. 나도 좀 알았으면 좋겠다 (Feat. 이혜지)
5. Something beautiful (Feat. 김뜻돌, 시문, 서보경) 
6. 그런 날이 있어 (Feat. 카코포니)
7. 식물 (Feat. 시문) 
8. 초록대문
9. 가정통신문 (Feat. 이혜지, 서보경)
10. 줘도 안 가질 보물 (Feat. 이혜지)
11. 커야 돼 (Feat. 최엘비, 이혜지)
12. 이름을 바꿨다 (Feat. NUNACRIS)
13. 잘라도 내가 잘라야지 (Feat. 이혜지)
14. F, A and F again (Feat. 이혜지)
15. 한림대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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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둥 ‘지지않는 곳으로 가자’ (2021)

평가: 3.5/5

우리는 모두 자주 버둥거린다.
애써도 애쓴 만큼 결과물이 따라주지 않는, 날들의 연속. 우연히 버둥의 음악을 만났다. 선홍색의 불빛이 짧은 머리의 웅크리고 있는 여성을 비춘 커버. 어딘가 외롭고 쉽게 그 의중을 찾아낼 수 없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첫 곡 ‘처음’을 재생. 이내 자세를 고쳐 앉고 음반 전체를 꼼꼼히 받아 적었다.

버둥. 나름 열심히 음악을 따라 듣고 있지만 그리 익숙지 않은 이름이었다. 하지만 완숙한 멜로디가 돋보였다. ‘00’, ‘Muse’ 등의 신시사이저로 문을 열고 잘 들리는 선율로 무장한 곡들이 있었고 가사 또한 특별했다. ‘00’은 ‘영영’이라는 단어가 반복되고 곧 ‘1과 2가 지켜보길 / 3과 4가 지나가길’하는 식으로 숫자를 이용해 서사의 흐름을 살렸다. ‘연애’는 ‘날 네 것으로 널 내 것으로 / 만들지는 않을 거야’ 노래하며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하고 확실하게 표현한다.

쉽게 말해 직접 쓴 노랫말은 음악을 통해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선명하게 내뱉고 있었다. 음악적 시선이 뚜렷한 곡. 난해하고 알 수 없는 단어들로 뭉뚱그리지 않고 시적이되 사고를 명징하게 풀어낸 작품은 뮤지션 ‘버둥’을 한정하기보다 오히려 확대했다. 마치 이쪽에서 ‘당신은 어떤 삶을 살아왔나요?’ 묻게 하고 더불어 ‘당신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요.’하게 한달까.

그렇게 2018년에 첫 EP < 조용한 폭력 속에서 >를, 2019년에 < 잡아봐! >를 발매했음을 알게 됐다. 두 개의 짧은 음반과 몇 개의 싱글을 거쳐 당도한 이번 정규 앨범은 오랜 시간 버둥거리며 부단히 노력한 흔적을 보여준다. 우선 대중을 놓치지 않는다. 선율이 전작에 비해 확실히 매끄럽다. 타이틀 ‘씬이 버린 아이들’을 들어보자. 그간의 싱글 중 가장 밝은 기조를 띈 이 노래는 둥둥거리는 베이스와 리듬을 타게 하는 신시사이저가 어우러지며 매력적인 후렴을 만든다.

또한 더 풍성해졌다. 신시사이저의 활용이 단정하고 깔끔하게 적소에서 터진다. ‘공주이야기’와 같은 노래에선 오르간, 브라스 세션 등을 활용해 전에 없던 터치를 담았다. 즉 이 음반은 인디 뮤지션으로서 모든 것을 스스로 해오던 그가 ‘지지 않았음’을 그래서 버둥을 주목해야 함을 증명한다. 제 색을 찾으며 발전한 흔적이 여기 있는 것이다.

버둥거리다. 힘에 겨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쓰다. 버둥이 쓰는 음악은 어떤 순간들을 지나치고 또 어떤 기억들을 묻기 위한 삽처럼 느껴진다. 완전한 것을 노래하지 않고 조금은 불편하고 아프고 답답한 것들을 써 내린 음반. 자주 버둥거리며 살아가는 우리를 비추기 충분하다. 버둥, 버둥. 그의 이야기가 계속 궁금하다.

– 수록곡 –
1. 처음
2. 00
3. 나의 모든 슬픔이
4. 그림
5. 공주이야기
6. Muse
7. 씬이 버린 아이들
8. 파아란
9. 연애
10. 기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