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손길을 바라는 음악들과 못내 악보를 접는 아티스트들에 비하면 제이클레프의 기다림은 상대적으로 길지 않았다. 싱글 ‘multiply’와 사운드클라우드를 통해 공개한 믹스테잎 < Canyon >으로 서서히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더니 정규 1집 < Flaw, Flaw >를 그 해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완성하며 공고한 팬층을 쌓아 올렸다.
앨범 단위의 작업은 약 5년 만이다. 염세적인 태도로 세상의 흠집을 흥얼거렸던 지난 음반에 비해 < O, Pruned >는 가까운 것들이 남기고 떠난 온기에 집중한다. 연인이나 친구 혹은 신을 떠난 동료 뮤지션, 과거의 자신 등을 대상으로 한 노랫말은 어느 쪽으로 읽어도 지나친 현학없이 울림을 전한다.
어쿠스틱 기타를 전면에 내세운 변화는 노랫말에 힘을 싣는다. 얼터너티브 사운드로 트렌드의 발을 맞췄던 전작과 달리 잔잔한 기타 선율로만 곡을 전개하는 ‘Jonn’s guitar (take1)’ 등의 트랙은 앨범의 명확한 지향을 드러낸다. 덕분에 앨범은 일체감을 형성하며 약 20분간의 러닝타임동안 옆자리에 앉아 직접 연주를 듣는 듯한 경험을 선사한다.
콘셉트와 구성이 잘 맞아떨어져 분명히 매력을 확인할 수 있음에도 미처 지우지 못한 레퍼런스의 향기가 짙게 남아 감흥을 줄인다. 담백한 제이클레프의 목소리 덕에 흐릿하게나마 개성을 유지하지만 소리의 질감을 의도적으로 뭉개는 피비 알앤비의 특성뿐만 아니라 그 운용방식마저 프랭크 오션 < Blonde >와의 무시하기 힘든 교집합으로 독창성을 떨어뜨린다.
긴 시간만의 복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른 가수의 이름을 가져오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박수가 멈칫거린다. 단순한 비교를 피하기 위해선 참조 영역에 정당한 설명을 덧붙여야 하지만 프랭크 오션 음악에 비해 조금 더 따뜻함이 묻어난다는 점을 제외하면 차별성에 대한 설득력이 부족하다. 아쉽지만 5년 전 충격적인 등장에 비하면 설익은 복귀이다.
– 수록곡 – 1. O, pruned 2. O, pruned, part ii (Feat. Hoody) 3. Johnny’s sofa 4. Jonny’s guitar (take 1) 5 Derbyshire 6. 무언가
에스파에게 이번 EP는 특히나 중요하다. 내부에서는 전작 < Girls >의 부진과 소모적인 갓더비트(GOT the beat) 활동에 이수만 프로듀서가 강제했다는 ‘나무 심기’ 가사 논란까지 있었고, 외적으로도 SM 엔터테인먼트의 인수합병 등 불리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악당 블랙맘바와 싸우던 가상 세계 광야를 벗어나 현실 세계로 진입한 것은 접근장벽을 낮추고 대중적 입지를 되찾으려는 의지로 읽을 수 있다.
나이비스(nævis)의 피쳐링을 지우면 에스파의 곡이 아니라 해도 믿을 만한 ‘Welcome to my world (Feat. 나이비스)’와 달리 타이틀곡 ‘Spicy’는 절충적이다. 일상적 풍경 속 온갖 이상 현상이 벌어지는 뮤직비디오처럼 복잡한 세계관 가사를 내려놓았으나 자극적인 질감의 외피는 유지하고 있다. 사이버 전사의 정체성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다른 말로 하면 타협이다. 그룹의 색채와 대중성을 모두 잡으려고 한 탓에 결과적으로 ‘Spicy’는 독창성도 옅고 클리셰적인 맛도 부족하다. 두 번 등장하는 포스트 코러스(‘Don’t stop 겁내지 마’)를 제외하면 답답한 단조 멜로디는 마땅히 해소되지 못하고, 귀 아픈 전자음이나 곡을 가득 채운 랩도 유의미한 구심점으로 기능하는 대신 f(x)의 ‘Hot summer’나 있지(ITZY) 등의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쟁점은 특정 사운드가 아니라 태도에 있다. 진한 PC 뮤직 스타일 리듬의 ‘Salty & sweet’이 안일한 훅과 함께 침몰하는 반면, 선율과 음색이라는 기본 재료 위주로 꾸린 ‘Thirsty’와 ‘I’m unhappy’가 오히려 와닿는 대조적 상황이 이를 말해준다. 마찬가지로 레드벨벳의 잔상이 강하지만 감각적인 후렴과 소셜 미디어에 반감을 표하는 가사 등 곡 자체의 매력은 출중하다. 급진성을 유지하기 힘들다면 아예 보편성의 측면으로 과감히 파고드는 것도 하나의 대책이 될 수 있다.
이미 하반기 또 다른 앨범을 예고했듯이 신보는 그룹에게 드리워진 부정적 이슈를 일차적으로 씻어내려는 전략적인 수다. 당연히 음악적으로도 속 시원한 해답보다는 다음 단계 및 장기적 행보를 둘러싼 고뇌의 과정에 가깝다. 복귀와 함께 이미지 확장이라는 자체 목표 완수에는 성공했으니 이번의 도움닫기를 이어질 도약으로 연결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 My World >는 영토 점령의 선포보다는 경계를 넘어 관문을 여는 신호다.
-수록곡- 1. Welcome to my world (Feat. 나이비스) 2. Spicy 3. Salty & sweet 4. Thirsty 5. I’m unhappy 6. ‘Til we meet again
대중이 기대하는 볼빨간사춘기의 음악은 확실하다. 화사한 봄을 닮은 낭만적인 멜로디와 예쁘장한 어쿠스틱 기타 사운드, 또는 침울하게 내면의 아픔을 토로하는 발라드의 이미지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된다면 공감대를 형성하는 정서 밀착형 가사가 될 것이다. 공고한 캐릭터는 쉬운 길을 보장하지만, 욕심이 있는 아티스트라면 이를 오히려 쇄신을 위한 자극제로 삼기 마련이다.
올해도 마찬가지로 봄에 맞춘 발매 시기 등 < 사랑.zip >은 외견상 익숙한 볼빨간사춘기 이미지의 연속처럼 보인다. 그러나 음악을 뜯어보면 미묘한 차이점이 있다. ‘Chase love hard’의 독특한 발음은 데뷔 초 보컬을 연상시키면서도 보다 주도적으로 리듬을 밀고 당기며, ‘Love story’의 연장선상에 놓인 ‘Friend the end’에서는 바삭바삭한 일렉트릭 기타를 한층 전면에 내세웠다. 안전지대 내에서 도모한 나름의 변주다.
시도가 성공의 동의어는 아니다. 챈트 형식의 존재감이 큰 나머지 ‘Chase love hard’의 황민현은 게스트로서 온전히 녹아들지 못하고 겉돌며, ‘Friend the end’는 소극적인 멜로디 진행으로 움츠러든 아이유의 ‘Blueming’을 듣는 듯하다. 저음이 강해진 목소리 변화에 맞춘 결과물이겠지만 그만큼 옅어진 생동감을 메꿔줄 장치가 ‘friend’와 ‘the end’를 이용한 언어유희로는 부족한 감이 있다.
흥미로움은 수록곡에서 발견된다. 로마에 사랑을 표하는 ‘Rome’은 ‘여행’처럼 해맑은 인사 대신 건조한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오묘함을 유지하는 선율과 짤막한 기타 브릿지가 신선한 공기를 불어 넣으며 반복 청취를 유도한다. 비슷한 결에서 전형적인 발라드 ‘사랑이 이별이 돼 가는 모습이’보다 ‘좋은 꿈 꿔 0224.mp3’의 여운이 더 크다. 아쉬울 정도로 짧은 러닝타임에 조심스레 해석의 여지를 남김에 따라 음반의 키워드인 ‘사랑’이라는 단어를 곱씹게 만든다.
물론 이러한 곡을 볼빨간사춘기의 새 지향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는 어디까지나 흥행 공식을 놓을 수 없는 대중가수의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 사랑.zip >은 변화와 유지 사이에서 원만한 합의를 이룬 작품이라 볼 수 있다. 다만 내심 드러내듯 ‘워커홀릭’이나 ‘나비효과’ 등에서 보여줬던 변신 의지를 계속 담아두고 있다면 배짱을 더 갖춰도 괜찮아 보인다. 사춘기가 지났다고 해서 음악을, 미래를 굳어버리게 둔다면 아까우니까.
-수록곡- 1. Chase love hard (Feat. 황민현) 2. Friend the end 3. Rome 4. 사랑이 이별이 돼 가는 모습이 5.좋은 꿈 꿔 0224.mp3
중성적인 목소리와 과장된 창법으로 고유의 연극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지올팍은 자신의 음악뿐만 아니라 참여하는 여러 작업물에서 특유의 색깔로 존재감을 과시했다. 독자 노선을 다져가던 그에게 2021년 발매한 < Syndromez >는 커리어의 분기점이었다. 믹스테입과 싱글 단위에서 보여줬던 독특함을 성공적으로 첫 정규앨범에 이식했고 덕분에 유망한 음악가는 고유의 색깔을 낼 줄 아는 아티스트로서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약 2년 만의 복귀를 알리는 < Where Does Sasquatch Live? Part 1 >은 상승한 인지도만큼이나 철저함을 둘렀다. 동화스러운 제목과 그에 상응하는 구성으로 기존의 장점을 극대화하며 한편의 구연동화를 듣는 경험을 선사한다. 이전의 성과를 거둔 방식이지만 전위적인 측면을 줄여 한층 친화적인 모습으로 변화를 취한다.
쉽고 재밌는 안무와 독특한 콘셉트, 특정 명품브랜드의 이름을 이용한 가사가 유행을 탄 ‘Christian’이 대표적인 결과물이다. 두 번째 트랙 ‘Sasquatch’ 정도를 제외하면 비교적 어려운 멜로디를 사용했던 기존 곡에 비해 멜로우하고 캐치한 후렴구로 매니아와 대중을 동시에 포용한다.
가사에 모두 영어를 사용하며 의도를 한 꺼풀 덮었지만 대중친화적인 변화와 별개로 노랫말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담아 중심을 잃지 않는다. 앨범 전반에 걸쳐 자신이 동경했던 것들에 대한 회의와 좌절감, 극복 과정을 담으며 서사구조를 완성한다. 변화와 성장을 예고하는 노랫말에서 각종 미디어를 통해 지올팍이 활동반경을 넓히는 이유를 확인할 수 있다.
알고리즘의 수혜를 입어 그의 음악이 많은 이들의 핸드폰 화면을 채웠지만 역설적으로 독특한 목소리와 영어만으로 된 가사가 많은 사람들의 반발 심리를 샀다. 지나치게 단편적인 측면만 부각된 탓에 ‘천재 호소인’이라는 오명을 샀지만 지올 팍이 독특하고 완성도 있는 음악으로 몰입도를 선사할 수 있는 아티스트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아직 칸예 웨스트의 영향권에 걸쳐있음을 제외하면 그의 음악을 평가절하할 이유는 없다.
-수록곡- 1.The man who saw sasquatch 2.Sasquatch 3.Being human 4.Sunburnkid 5.Magic! 6.Christian 7.Falling from the sky
어느 때보다 여성 아이돌의 인기가 뜨거운 지금 르세라핌은 ‘이야기 속 주인공 되기’ 전략으로 차별을 둔다. 에스파가 얼마 전 발매한 신보 < My World >로 가상에서 현실세계로의 이동을 선언했고, 아이브와 (여자)아이들이 ‘주체성’이란 바운더리 내에서 세계관보단 메시지 전파에 열을 올리며 ‘우리 곁의 아이돌’이 된다면 이들은 다르다. 르세라핌이 몰두하는 건 ‘Fearless’ 두려운 것이 없고, ‘Antifragile’ 충격받을수록 더 강해지며, 용서 따위는 바라지 않는 ‘Unforgiven’ 즉, 용서받지 못한 자로서의 ‘나 만들기’이다. 이때 이들의 메시지가 선명해지려면 르세라핌의 세계가 살아있어야 한다. 곤경, 고난, 서사가 맞닿았을 때야 노래의 외피가 두꺼워지기 때문이다.
2022년 데뷔 후 발매한 2장의 EP 수록곡 일부와 7개의 신곡을 묶은 첫 번째 정규음반 < Unforgiven >엔 세계관 정립을 위한 노력이 곳곳에 자리한다. 그 제목부터도 선언적인 ‘The world is my oyster’부터 ‘The hydra’, ‘Burn the bridge’가 대표적이다. 한국어, 일본어, 영어를 혼용해 ‘나는 꺾이지 않아’, ‘나는 점점 더 강해져’, ‘나랑 저 너머로 같이 가자’ 외치는 내레이션은 앨범에 독특한 질감을 형성하며 곡에 서사를 덧댄다. 실제로 앞서 언급한 노래들은 각각 ‘Fearless’, ‘Antifragile’, ‘Unforgiven’의 바로 앞에 배치되며 이어지는 음악의 메시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또 그에 맞는 이미지를 직선적으로 그려낸다.
친절한 안내를 통해 다다른 르세라핌의 ‘현실’은 여기가 아니라 ‘저 너머’에 가깝다. 그룹 세계관을 웹툰으로 그린 < 크림슨 하트>가 수록곡 ‘Blue flame’을 BGM으로 “푸른 반딧불이를 따라 마법의 황야”로 떠나는 여정을 담듯, 이들은 계속해서 ‘저 너머’ 어딘가로 ‘모험’을 떠난다. 신보의 후반부 배치된 신곡들로 미뤄볼 때 금번 이들의 행보는 용서받지 못할지라도 금기를 깨고 앞으로 나아가는 쪽으로 향한다. 타이틀 ‘Unforgiven’의 손을 맞잡고 앞으로 걸어 나가는 퍼포먼스가 이를 증명, 음악관에 힘을 싣고자 한다.
이처럼 음반은 내레이션, 콘셉트 확장을 위한 웹툰, 댄스 퍼포먼스 등 그룹 세계관 형성을 위해 총력을 다하지만 되려 작업의 단합력이 부족하다. ‘Unforgiven’을 두고, 르세라핌을 “용서하지 않은 자가 누구냐”라 질문은 이들이 만들어 나가는 서사의 기반이 탄탄치 않음을 보여준다. 이야기의 빈틈을 메울 만큼 음악이 강하지도 않다. 영화 < 석양의 무법자 >의 메인 선율을 가져오고, 유명 기타리스트 나일 로저스가 참여한 것이 무색하게도 곡에 이 소스들의 잔향은 옅다. 애써 귀 기울이지 않으면 흔적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
다시 말해, “우리들 만의 길을 가겠다”는 르세라핌의 도전이 기존 작업물의 모음집 격인 이번 음반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서사로 여타 아이돌과 구별되는 지점을 만들려 했으나 갑자기 등장하는 흥겨운 브라스 세션 기반의 ‘No-return’이 말하는 모험에 동참하고 싶은 의지가 지금으로써는 잘 생기지 않는다. 뜬금없는 위치에 배치된 팬송 ‘피어나’, 이지 리스닝 계열의 ‘Flash forward’, 라틴 장르를 가져온 끝 곡 ‘Fire in the belly’로 이어지는 구성 역시 헐겁다. 금기를 부수겠다며 강렬한 모습을 보이다 급 힘을 풀어버리니 이들의 외침도 흩어져 버린다.
음악과 서사가 합쳐져 시너지를 낼 때, 르세라핌의 모험은 생명력을 얻는다. 그것이 이들이 데뷔 이래 지금껏 몰두하는 단 한 가지 가장 큰 지향이다. 목적지가 어딘지 불확실한 지금, 이 연대에 손을 얹기가 어렵다. 장황하다. 캐릭터 혹은 주인공 만들기에 급급해 중심이 흔들린 음반. 정리가 필요하다.
– 수록곡 – 1. The world is my oyster 2. Fearless 3. Blue flame 4. The hydra 5. Antifragile 6. Impurities 7. Burn the bridge 8. Unforgiven (Feat. Nile Rodgers) 9. No-return (Into the unknown) 10.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 11. 피어나 (Between you, me and the lamppost) 12. Flash forward 13. Fire in the bel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