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을 깨고 태어나는 새처럼, 틱톡이라는 세계를 떠나 힘찬 날갯짓을 시작한 핑크팬서리스가 성공적인 고공비행을 이어 나간다. 첫 정규앨범 < Heaven Knows >는 2020년대의 대중음악 트렌드로 자리매김한 UK 개러지의 선봉을 넘어 천국과도 같은 이상에 닿고자 하는 꿈이 드러난다. 틱톡 스타의 자리에서 머무르지 않고 팝 아티스트로서 뚜렷한 정체성을 보유하려는 의지가 과욕으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준수한 모습이다.
믹스테이프 < To Hell With It >에서의 여리고 불안한 감성이라는 원료는 그대로 가져가되, 음악 자체를 촘촘하게 바느질하며 더욱 거대하고 아름다운 옷을 완성한다. 연인의 죽음으로 인한 공허함을 그린 첫 번째 트랙 ‘Another life’는 다른 생에서 재회를 소망하는 다소 극단적인 가사가 무리하게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짜임새가 좋다. 장례식을 연상케 하는 오르간 사운드에서 드럼 앤 베이스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초반부 구성으로 이번 작품에 구축된 또 다른 세상의 문을 연다. 떠나간 연인 입장에서의 불안감을 토로하는 레마(Rema)의 랩 피쳐링, 하늘에 손을 뻗는 듯 극적으로 치솟는 후반부의 기타 솔로도 훌륭하게 제 역할을 수행한다.
핑크팬서리스가 만들어 낸 세계는 결핍, 갈망, 공허, 불안으로 버무려진 감정선에서 이탈하지 않는다. 동경하는 스타에게 처절하리만큼 애정을 갈구하는 ‘True romance’, 망가진 우정에 관한 후회와 개선 의지를 그린 ‘The aisle’ 등 관계의 불균형으로 발생한 집착과 우울을 주저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낸다. ‘Bury me’, ‘Nice to meet you’를 포함한 여러 곡에서는 곪은 마음의 종착지로써 죽음을 암시하거나 직접적으로 그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슬픈 사랑의 이야기들 틈새에 급작스러운 성공으로 얻은 부와 명예에 관한 혼란도 끼워져 있다. 가진 것이 많아도 소중한 사람이 없으니 되려 죽은 것과 같다고 느끼는 ‘Mosquito’가 그렇다. 명성이 높아진 자신에게 매달리는 팬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하지만, 그렇다고 관심이 마냥 나쁘지만은 않은 감정을 노래하는 ‘Internet baby’의 작법은 특히 직접적이다.
부정함의 늪 속에서도 사랑의 달콤함이 느껴진다. 핑크팬서리스의 부드러운 보컬은 멜랑꼴리하고 매혹적이다.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사람의 목소리를 받쳐주는 멜로디는 가볍고 아름답다. 진정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익사하는 비극을 맞는 < 햄릿 >의 인물, 오필리어를 모티브로 한 ‘Ophelia’가 그렇다. 황홀한 하프를 들려주며 아름답게 시작하지만, 선명하던 비트가 점점 흐려지는 구성은 물에 잠기며 생명이 꺼지는 듯하다. 타의에 의한 죽음임이 확실해지자 들려오는 사이렌과 아웃트로의 기포 소리는 이야기에 섬뜩한 몰입감을 더한다.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가득한 핑크팬서리스는 그것을 해냈다. 풍부한 스토리텔링, 트렌디한 음악의 강화, 새로운 세대의 시선, ‘Boy’s a liar pt. 2’로 대표되는 메가 히트곡이자 킬링트랙 등 < Heaven Knows >에는 데뷔 앨범만이 가질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현 유행의 지속 기간에 대해서는 하늘만이 알고 있겠지만, 일단 지금은 그 하늘을 유유히 날아다니며 비행운을 만들어 내는 핑크팬서리스의 궤적을 즐겁게 따라갈 뿐이다.
– 수록곡 –
1. Another life (feat. Rema)
2. True romance
3. Mosquito
4. The aisle
5. Nice to meet you (feat. Central Cee)
6. Bury me (feat. Kelela)
7. Internet baby (interlude)
8. Ophelia
9. Feel complete
10. Blue
11. Feelings
12. Capable of love
13. Boy’s a liar pt.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