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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레이시(Steve Lacy) ‘Gemini Rights’ (2022)

평가: 4/5

MBTI와 혈액형 이전에도 사람들은 성격과 운명을 풀이해줄 해설서를 갈구했다. 동양권에 십이간지 띠와 사주팔자가 있다면 서양에서 그 역할은 타로 카드, 그리고 밤하늘 별자리의 몫이다. 5월 23일생 스티브 레이시는 변덕스럽고 이기적인 만남과 이별의 일대기를 쌍둥이자리의 속성인 자유와 방랑 정신의 탓으로 돌린다. < Gemini Rights >는 자기중심적이기에 더욱 순수한 한 편의 수필이다.

사랑에 물드는 속도만큼 빠르게 물러나는 남자는 그리워할 대상이 되고자 하면서도 상대가 매달리는 것은 원치 않는다. 그는 마음에 단단한 헬멧을 두르고 이별을 고하나 정작 추억에서 발버둥친다. 키스를 나눈 이후 만남을 거부하는 ‘Amber’와 헤어진 후에도 여전히 함께 있고 싶다 외치는 ‘Sunshine’에 걸쳐 드러나는 모순적인 감정, 이를 자신도 알고 있기에 뮤지션의 목소리에는 쓸쓸함이 새어 나온다.

언어의 장벽이라는 거름망에 가사를 남겨두고 추출된 소리의 매력이 < Gemini Rights >를 속 깊은 일기장 이상의 ‘음반’이 되게 한다. 이국적인 보사노바 리듬이 넘실대는 ‘Mercury’와 대중의 선택을 받아 빌보드 싱글 차트 상위권까지 올라간 ‘Bad habit’의 선명한 선율이 킬링 트랙 자리를 놓고 대립 구도를 펼치고 있다. 따스한 햇살로 낭만 가득한 해변가 술집의 풍경을 제시하는 ‘Helmet’과 근사하고 값비싼 재즈 바의 한가운데로 위치하는 ‘Amber’의 차이도 흥미롭다.

예사롭지 않은 음색과 몽환적인 무드 등 소위 말해 ‘힙’한 요소를 갖추고 있음에도, 명료한 선율과 구태여 배배 꼬지 않은 전개를 통해 앨범은 청취의 어려움을 낮추고 친절하게 다가간다. 근래 위켄드의 음악이 지닌 접근성과 프랭크 오션의 < Blonde >가 지닌 섬세한 난해함 사이 적절하게 무게추를 맞췄다. 네오 소울의 재부흥을 일궈낸 밴드 인터넷(The Internet)의 멤버이자 켄드릭 라마, 솔란지, 뱀파이어 위켄드 등 굵직한 뮤지션들의 곡에 참여한 전적에서부터 그의 감각은 이미 보증된 결과였다.

투명한 자기 고백과 폭넓은 공감대, 고상한 품격과 쉬운 난이도라는 양면성을 하나의 그릇에 너무나도 가뿐히 담아낸 작품이다. 문자를 차근차근 음미하며 듣든, 들려오는 소리에 편히 몸을 맡긴 채 감상하든 동일한 맛을 보증한다.조금 더 실용적인 쓰임새를 원한다면 샤데이의 < Diamond Life >와 더불어 유혹하고 싶은 상대를 위한 사랑의 묘약으로도 써먹을 수 있겠다. 유일한 진입장벽이라면 빨간 도깨비처럼 생긴 앨범 커버 뿐.

-수록곡-
1. Static
2. Helmet
3. Mercury
4. Buttons
5. Bad habit
6. 2Gether (Enterlude)
7. Cody freestyle
8. Amber
9. Sunshine (Feat. Fousheé)
10. Give you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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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즈(Muse) ‘Will Of The People’ (2022)

평가: 3.5/5

2018년 작 < Simulation Theory >는 전자음악의 경도로 팬들을 당혹게 했다. 폭발적 화력의 2015년 작 < Drones >에서 옛 향수를 자극한 터라 더욱 그랬으나 장르 하이브리드가 정체성이 된 지도 오래, 십수년간 이어온 실험을 한 프레임에 가두기 어렵다. 이제 중요한 건 설득력. 사반세기를 함께한 트리오의 아홉 번째 정규앨범 < Will Of The People >은 농익은 기량으로 의문부호를 지웠다.

‘베스트 앨범을 만들라’는 워너레코드의 압박에 대한 응답이다. 하드 록과 프로그레시브 록, 일렉트로니카를 경유하는 ‘신곡 컴필레이션’으로 경력을 회고했다. ‘Knights of Cydonia’와 ‘The globalists’의 대곡 지향적 풍모는 옅어졌지만, 개별 곡의 응집력이 탁월하다. 글램 록 시대의 코러스에 전자음을 버무린 ‘Will of the people’부터 마지막 트랙 ‘We are fucking fucked’까지 기력 쇠잔의 기미가 없다. 높은 밀도 덕분에 ‘You make me feel like it’s Halloween’과 ‘Verona’ 같은 다소 키치한 곡들도 의외의 매력으로 다가온다.

베이스 기타리스트 크리스 볼첸홈이 닦아놓은 지반 위로 매튜 벨라미의 기타 다이너마이트가 터졌다. ‘Plug in baby’와 ‘Hysteria’ 같은 인장이 될만한 곡들에 강도를 높여 앨범 전반에 헤비메탈 사운드를 구축했다. ‘Stockholm syndrome’을 연상하게 하는 ‘Kill or be killed’ 섹시하고 날카로운 뮤즈의 사운드스케이프를 압축했고 ‘Euphoria’ 같은 댄서블한 신스팝 넘버도 기타로 특색을 더했다.

목줄을 꽉 움켜쥐었다가 달래주는 구성은 능력치의 방증이다. 기타와 드럼의 중음 합동작전으로 타격감을 주다 일렉트로니카로 선회하는 ‘Won’t stand down’과 퀸을 오마주한 ‘Liberation’으로 피아노와 보컬이 중심적인 ‘Ghosts (how can I move on)’로 부드러이 흘러간다. 펑크(Punk)와 오페라 록이 공존하는 ‘We are fucking fucked’로 ‘변주’의 테마를 요약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장르 하이브리드가 내공을 증명했고 강력한 기타 사운드로 앨범의 밀도를 유지했다. 절정기의 순도에 못 미칠지언정 밴드의 경력을 조각모음 한 듯한 소구력 높은 곡들로 저력을 드러냈다.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세태를 주제로 한 < Will Of The People >은 역설적으로 뮤즈의 역량을 다시금 증명했다.

-수록곡-
1.Will of the people
2.Compliance
3.Liberation
4.Won’t stand down
5.Ghosts (how can I move on)
6.You make me feel like it’s Halloween
7.Kill or be killed
8.Verona
9.Euphoria
10.We are fucking fuck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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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욘세(Beyoncé) ‘Renaissance'(2022)

평가: 4.5/5

‘팝의 여왕’이란 칭호는 순수한 퍼포먼스나 보컬 실력과 더불어, 후대를 견인할 기준점과 영향력을 제시할 수 있는 초월성에서 기인한다. 갑작스레 등장해 오감을 직격한 즉발성 팝 컬렉션 < Beyonce >(2013)와 예술과 상업의 합일을 일군 무결점 명반 < Lemonade >(2016). 이 두 작품이 비욘세를 지금의 절대적 위상에 오르게 한 결정적인 도약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참신함과 완성도뿐만 아니라 후배들의 꾸준한 회자 속 대체 불가능한 불변의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장대한 트릴로지의 개막이자 6년 만의 정규작 < Renaissance >는 그렇기에 쉽고 안전한 팝의 노선을 따르지 않는다. 마치 모두의 지지 속 미지의 향로를 개척하고 등대를 세워야 하는 선각자의 걸음인 셈이다. 키워드는 코로나 여파로 전례 없는 침체기를 맞이한 ‘댄스’ 문화다. 비욘세는 단어의 재건을, 더 나아가 누구나 마음대로 움직이고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위해 왕좌에서 일어서기 시작한다. 어두컴컴하고 땀 냄새 자욱한 지하실로 행차한 여왕의 진두지휘하에 인류의 동적 본능을 복원하고 해방하려는 본격적인 지반 공사가 펼져진다. 바야흐로, 1980년대 시카고 언더그라운드 클럽 신에서 부흥한 ‘하우스’ 르네상스의 재(再)도래다.

각성을 위해 빼곡히 수놓아진 152명의 참여자 명단, 시대별 캐논을 위시한 샘플 크레딧, 디제이의 셋리스트처럼 각 트랙을 유기적으로 이은 세구에(segue) 형식까지. 사학자의 면모와 기획자의 통찰을 겸비한 < Renaissance >는 비욘세의 보컬을 재료로 한 전지구적 거대 리믹스 기획이자 광란의 경배 의식에 가깝다. 언뜻 포맷 자체로는 두아 리파가 선보였던 초호화 믹스셋 < Club House Nostalgia >를 연상케 하기도 한다. 미국의 디제이 더 블레스드 마돈나가 두아 리파의 광풍을 무도회로 재편성했듯, 각지의 힙합 프로듀서와 디제이가 재림의 순간을 함께 하기 위해 스튜디오로 모여들었다.

트랙에 걸쳐 여러 장소와 지역, 시대를 호령했던 댄스 플로어의 역사가 순차적으로 복각된다. 라파엘 사딕과 나일 로저스 조합으로 펑크(Funk)의 광채를 담아낸 ‘Cuff it’, 샘플링의 교본 격인 로빈 에스의 ‘Show me love’ 리프와 빅 프리디아의 강렬한 랩 스크래치를 버무린 하우스 넘버 ‘Break my soul’ 등이 그렇다. 기나긴 여정의 마무리를 장식하는 것은, 영원한 고전인 도나 섬머 ‘I feel love’를 직접 호출하여 격한 예우와 경의를 표하는 ‘Summer renaissance’의 몫이다.

침투와 혼합 과정은 때론 교묘하게 행해지는데, 지극히 현대적인 트랩 비트 위로 에스닉한 토속 사운드가 등장하는 ‘Thique’는 클럽 신의 시제를 탐닉하고, ‘America has a problem’은 음산한 덥(dub) 향취와 강박적인 탐탐 사운드를 통해 먼지에 둘러싸인 다양한 전자 음악 분파의 실루엣을 미세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PC 뮤직의 수장 A. G. 쿡의 손길이 닿은 ‘All up in your mind’의 주재료는 2010년대 등장한 신흥 강자 ‘버블검 베이스’의 팽창된 질감이다. ‘Pure / honey’의 경우에는 심장 박동스런 리듬과 최면 같은 읊조림으로 집단 광기를 유도하다 순식간에 베이지색 미러볼 밑으로 옮겨 놓기도 한다. 위협적이고, 쾌락적이다.

코첼라 실황을 담은 라이브 앨범 < Homecoming >과 < The Lion King : The Gift >를 거치며 여성 운동과 블랙 프라이드의 공식적인 대변자로 올라선 만큼 메시지적 측면도 결코 놓치지 않았다. 가스펠부터 댄스홀, 알앤비, 뉴 잭 스윙 등 상징적인 블랙 뮤직들의 재현은 물론 ‘있는 그대로의, 내 피부가 편안하고 아늑해’(Cozy)라는 메시지에는 흑인으로서의 긍지가 담겨 있고, ‘넌 내 영혼을 부수지 못해’(Break my soul)라는 외침에는 팬데믹이 야기한 대퇴직 시기(Great Resignation) 속 희망 잃은 젊은이를 향한 위로와 지지 선언이 담긴다. 단순한 댄스가 아닌 ‘하우스’로 키워드를 내건 것 역시 백인 중산층에 의해 음지로 밀려난 소수자를 품은 피난처, 웨어하우스의 포용 의지를 잇겠다는 표명이다.

댄스 전반의 흐름을 16개의 트랙을 통해 고르게 분포한데다 곡간 연결부와 전체적인 완급, 개개 퀄리티 모두 흠잡을 곳이 없다. 비주얼 앨범으로 충격을 가져온 일전의 행보를 한 번 더 비틀어 뮤직 비디오 하나 없이 온전한 오디오적 몰입을 유도했다는 점에서는 과거의 방편에 기대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엿보인다. 상당한 자본과 시간을 요하는 프로젝트임에도 본인의 브랜드에 입각한 대규모 송캠프와 철저한 분업화를 통해 성공적으로 물꼬를 텄다는 것도 놀라운 성과다. 성적은 어떠한가. 빌보드 앨범과 싱글 차트 정상은 물론 전 수록곡 차트 진입이라는 어마어마한 기록까지 거머쥐었으니. 이제 아무도 그를 의심할 사람은 없어 보인다. 여왕의 귀환 아래, 새로운 성경의 첫 장이 펼쳐진다.

– 수록곡 –
1. I’m that girl
2. Cozy
3. Alien superstar
4. Cuff it
5. Energy (Feat. Beam)
6. Break my soul

7. Church girl
8. Plastic off the sofa
9. Virgo’s groove
10. Move (Feat. Grace Jones & Tems)
11. Heated
12. Thique
13. All up in your mind
14. America has a problem
15. Pure/honey

16. Summer renaiss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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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우브(Lauv) ‘All 4 Nothing'(2022)

평가: 3/5

뮤지션들의 놀이터인 사운드 클라우드에서부터 차근차근 성장의 단계를 밟아 온 라우브는 이제는 팝스타의 칭호를 목전에 두고 있다. 그의 노래들은 일상 속 배경음악으로 듣기 좋은 가벼운 팝의 전형이다. 귀에 쉽게 들어오는 멜로디와 편안한 코드 진행을 기반으로 유려한 보컬을 얹어 군더더기 없는 믹싱으로 음악을 포장한다. 찰리 XCX와 데미 로바토 등 팝 현장의 다른 가수들에게 곡을 주는 작곡가이기도 한 만큼 대중의 감성을 기술적으로 포착하는 데에 능하다.

< All 4 Nothing >은 짧은 형식 안에 여러 장르를 섞어낸 곡들로 구성되었기에 어느 한 장르의 사운드가 도드라지진 않는다. 그럼에도 조금 더 드러나는 특징이 있다면 신스를 활용한 깔끔한 팝 사운드와 약간의 알앤비 터치다. 중독성 있는 후렴구의 ‘Stranger’와 앨범의 이름과 제목이 같은 ‘All 4 nothing (I’m so in love)’에서 음반의 이러한 음악적 성격이 잘 드러난다. 전반적으로 아티스트의 개인적인 욕심보다는 대중성에 집중한 앨범이다.

라우브의 노래를 들으면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따라 불러보고 싶어진다. 이는 익히기 편한 멜로디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민첩한 음정 이동과 매끈한 보컬 뉘앙스 덕분에 그의 노래가 부르기 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성량감이 크지 않아 흥얼거리는 듯한 느낌이 연출되는 것도 그에 대한 잠깐의 과소평가에 한 몫을 한다. ‘Better than this’의 근사한 분위기는 그의 연주 디테일에서 기인하는데 이를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전작들의 가사가 바쁜 일상과 어두운 미래 사이에서 긴장감을 느끼는 이들에게 적적한 공감을 이끌었다면 이번 앨범의 메시지는 얼마간 가벼워진 성장의 서사를 제공한다. 성공 이후의 달라진 삶을 노래한 ’26’, 어린 시절의 추억을 그린 ‘Kids are born stars’에서 이러한 모습이 눈에 띈다. 다소 상투적인 이 변화의 순간은 라우브에게 있어선 중요하다. 완전히 대중적인 팝스타로 그 목표를 잡을 것인지, 아니면 파급력은 적었지만 특색은 더 있었던 이전의 모습을 고집할 것인지 이번 앨범의 성적으로 앞으로의 전략을 가늠할 수 있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팝 가수 라우브는 전술한 가수들에 더해 에드 시런, BTS, 앤 마리, 트로이 시반 등 많은 뮤지션들의 인정을 받으며 그 커리어를 순항 중이다. 성실한 작업량을 확보하고, 더 기억에 남는 캐릭터를 구축해야 하는 앞으로의 과제는 남아 있지만 솔직해서 특색 있는 메시지에 터 잡았기에 긍정적인 미래를 상상하게 한다. 그가 한국에서 있기 있는 이유가 단순히 유통사의 영리한 마케팅 때문만은 아니다.

– 수록곡 –
1. 26
2. Stranger
3. Kids are born stars
4. Molly in Mexico
5. All 4 nothing (I’m so in love)
6. Stay together
7. Summer nights
8. Time after time
9. Hey ari
10. Better than this
11. Bad trip
12. I (don’t) have a problem
13. First gr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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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간 더 스탈리온(Megan Thee Stallion) ‘Traumazine’ (2022)

평가: 3/5

절대 강자의 부재 하에 영미권 2020년대 여성 래퍼 지형도에는 긴장이 가득하다. 꾸준한 생명력의 니키 미나즈와 유쾌함과 파격을 두루 갖춘 카디 비의 양강 구도 사이 도자 캣이 화려한 비주얼로 빠르게 영역을 넓혔다. 트렌디함을 겸비한 ‘Best friend’의 스위티(Saweetie), ‘Fantasy’를 샘플링해 원곡자 머라이어 캐리까지 대동한 ‘Big energy’의 라토(Latto), 보기 힘든 듀오로 활약 중인 시티 걸스(City Girls) 등 떠오르는 신예들도 만만치 않다. 이에 반해 별다른 장치 없이 탄탄한 실력으로 승부를 보는 메간 더 스탈리온의 캐릭터는 화려하지 않아 오히려 그만큼 독보적이다.

리드 싱글로 공개된 팝 듀엣곡 ‘Sweetest pie’가 맨 끝자락에 위치한 것 외에 나머지를 순도 높은 힙합 트랙으로 채운 구성은 도자 캣의 < Planet Her >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조금 살펴보면 내용물은 전혀 다르다. 온갖 색채를 배제한 흑백 사진에 얼굴 만이 프레임 안에 위치한 아트워크, ‘트라우마적 상황에서 생기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뜻하는 제목이 암시하듯 < Traumazine >은 개인적인 고뇌에 무게가 실려 있다.

시종일관 우울하고 무거운 작품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흥겨운 리듬에 중독적인 훅을 주입한 ‘Her’, 즈네 아이코와 유연하게 어우러지는 ‘Consistency’ 등 대중적 어필을 놓치지 않는다. 부담 없는 비트로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치는 한편 마릴린 먼로, 휘트니 휴스턴, 브리트니 스피어스 등 유명세에 고통받은 여성들과 연대 의식을 표하는 ‘Anxiety’가 곧 앨범을 요약한다. 도발적인 언어 사이에 자전적 이야기를 능숙하게 섞는 솜씨는 메간 더 스탈리온을 흔들림 없는 주인공으로 추켜세운다.

퓨처를 비롯한 여러 게스트의 출연에도 ‘Flip flop’ 등 솔로 트랙의 위력이 우세하다는 사실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메간의 매서운 랩이 지니는 굳건한 존재감, 그리고 대체로 상대를 잡아먹는 양상으로 흘러가는 탓에 의도한 만큼 생겨나지 않는 시너지다. 다양한 협업은 자칫 음반 단위의 청취가 지루해질 수 있는 상황에 대한 타개책으로 보이는데, 그보다는 자가복제 느낌으로 반복하는 플로우와 추임새에서 우선적으로 벗어나야 한다.

레이블과 계약 관련한 분쟁으로 어수선한 상황 속 기습 발매한 음반은 속 시원한 돌파구보다는 묵묵한 현상 유지에 가깝다. 한창 약진해야 할 시기에 조금은 시기상조가 아닌가도 싶지만 최선의 공격은 방어라는 이치를 일찌감치 깨달은 점에 그 의의가 있다. 다행히 곳곳에 묻어 나오는 영리함과 출중한 기본기로 보아 래퍼가 뻗어나갈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아 보인다.

-수록곡-
1. NDA
2. Ungrateful (Feat. Key Glock)
3. Not nice
4. Budget (Feat. Latto)
5. Her
6. Gift & a curse
7. Ms. Nasty
8. Who me (Feat. Pooh Shiesty)
9. Red wine
10. Scary (Feat. Rico Nasty)
11. Anxiety
12. Flip flop
13. Consistency (Feat. Jhené Aiko)
14. Star (Feat. Lucky Daye)
15. Pressurelicious (Feat. Future)
16. Plan B
17. Southside royalty freestyle (Feat. Sauce Walka, Big Pokey, Lil’ Keke)
18. Sweetest pie (With Dua Lip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