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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OP Album

조동익 ‘푸른 베개'(2020)

평가: 4/5

이 음반에는 짙은 안개가 가득 들어차 있다. 26년 만의 신보. 대중음악사에서 결코 뺄 수 없는 한 자리를 차지한 포크 듀오 ‘어떤날’로 시작해 1994년 첫 솔로 음반 < 동경 >을 세상에 내놓은 조동익이 이제 서야 발매한 소포모어는 묵혀온 것들을 성급하게 내려놓지 않는다. 하고 싶은 말들을 지글거리는 엠비어트 뒤로, 낮고 무거운 첼로음 뒤로, 자연의 소리 뒤로 묻고 아주 천천히 꺼내 올린다.

총 12개의 수록곡 중 절반을 연주곡으로 채워 감상을 앞세운다. 이 소리의 어울림이 특히 첫 장에 강한 인상을 남긴다. 씁쓰레하고 몽환적인 공간음으로 천천히 빗장을 여는 ‘바람의 노래’부터 ‘날개 1’, ‘푸른 베개’는 한 곡처럼 이어진다. 그 중 ‘날개1’은 얇게 깔리는 코러스의 힘을 받아 음악적 황홀경을 넓게 펼쳐 그려내고 10분이 훌쩍 넘는 ‘푸른 베개’는 글자 그대로 서정성이 극점에 다다른다. 피아노를 하나씩 두들겨 소리를 쌓고 소음을 빼는가 하면 맑은 종소리를 가미해 사운드를 정화한다. 작품을 휘감은 어두움에서 위로를 느낄 수 있는 건 바로 이 영롱함 덕택이다.

그림 그리듯 채색된 사운드와 더불어 꼭꼭 씹어 뱉은 가사 또한 마음을 울린다. 작품은 ‘그간’ 못다 한 말들을 전하는 대신 오늘날 기억의 ‘편린’을 노래한다. 2017년 암으로 세상을 뜬 선배 뮤지션이자 친형인 조동진과의 추억을 내레이션으로 회고한 ‘Farewell. jdj,knh[1972]’, 어느덧 자라 한 아이의 엄마가 된 딸과 손녀를 위한 연주곡 ‘Song for chella’ 등 앨범에는 온통 나 조동익에 관한 이야기가 가득 들어차 있다.

오늘 바라본 그때의 기억과 지금 풀어낸 현재의 기억에는 그 어떤 아쉬움이나 고통, 회한이 없다. 이제 인생의 동반자가 된 포크 가수 장필순의 목소리를 통해 전해 온 ‘슬픔은 잠시 마음속에 머물다 가기를 / 아픔의 꽃도 잠시 마음속에 피다지 기를’ 이란 수록곡 ‘내가 네게 선사하는 꽃’의 메시지는 조동익의 염원이라기보다 먼저 살아온 선배의 경험담에 가깝다. 젊음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그래서 젊음은’과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을까’ 자문하는 ‘내 앞엔 신기루’ 역시 치열함보단 관록의 토닥임이 더 큰 묵직한 곡들이다.

내달리지 않고 천천히 문을 열고 천천히 문을 닫는다. 이 기이하리만큼 부재하는 조바심은 곧 음반이 쉽지만은 않다는 걸 뜻한다. 금방 익숙해지는 중독적인 후크도, 볼륨 높여 일상을 잊게 할 강력한 리듬감도 없다. 대신 그 자리는 전곡을 하나로 이어 꿰는 의도된 부유하는 잡음과 몇몇 자리에서 소리의 맥을 바꾸는 전자음이, 피아노가, 현악기가 채우고 있다. 새벽녘 세상을 메운 안개의 심상이 그러하듯 잔잔하게 다가와 살며시 적시고 서서히 사라진다. 연륜 있는 음악가의 자전적 풍경과 깃 세운 위로를 담고 있는 음반. 곁을 주면 넉넉히 잠식당할 위엄까지 품고 있다.

-수록곡-
1. 바람의 노래
2. 날개 I
3. 푸른 베개
4. 내가 네게 선사하는 꽃(Feat. Soony)
5. Song for chella
6. 그 겨울 얼어붙은 멜로디(Feat. Soony)
7. 비가 오면 생각나는
8. 그래서 젊음은
9. Farewell. jdj,knh[1972]
10. 내 앞엔 신기루
11. 날개 II
12. Lulla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