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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라디오를 켜봐요] Vol. 5 – 이즘 에디터의 라디오 시그널

전성기는 지났다. 스마트폰의 중심으로 무수히 쏟아지는 영상 플랫폼과 OTT 서비스에 더 익숙한 젊은 층에게 ‘라디오’는 세대를 나누는 낡은 매체의 기준처럼 다가올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 오늘날에도 라디오는 수많은 팬과 함께 굳건히 존재한다. 매일 꾸준하게 습관처럼 챙겨 듣는 마니아부터 문득 향수에 젖어 다시금 찾아오는 방문객 그리고 그 아날로그적인 특색에 반해 접하기 시작하는 호기심 많은 입문자까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 작디작은 전파 속 흘러나올 음악과 이야기를 기다린다.

9년 전, 이즘에서 진행한 [라디오를 켜봐요] 시리즈의 마무리를 짓는다. 특집을 처음 시작할 때와는 많은 것이 바뀌었고 필자마저 전부 다르지만 저마다 라디오를 들으며 자라왔다는 사실만큼은 모두 같다. 저마다 추억과 애정이 꼬깃꼬깃하게 담긴 사연과 함께 이즘 필자들이 기억하는 ‘시그널 송’을 조심스레 소개한다. 자, 지금 이 주파수를 고정하기 바란다.

KBS 2FM 나얼의 음악세계 / 나얼 ‘Love dawn’
KBS 2FM에서 진행된 < 나얼의 음악세계 >를 들은 사람은 분명 흑인 음악을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다지 유명하지도 않은 오래전의 알앤비를 묵묵히 틀어주던 나얼의 진행은 흑인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 이라면 버티기 힘들 정도로 지루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새벽엔 좋은 음악이 있었다. 나얼 솔로 정규 1집에 수록된 인스트루멘탈 ‘Love dawn’은 침전하는 기분을 음악으로 집중시키는 시그널이다. 이 곡의 차분한 사운드를 듣고 있으면 순수함을 향한 그날의 동경이 떠오른다. (김호현)

KBS 2FM 볼륨을 높여요 / 바버렛츠 ‘Summer love’
학업에 집중하리라 마음을 먹기만 하면 주변의 온갖 것들이 흥미롭게 느껴지고는 한다. 그래서 그랬을까, 저녁 식사를 마치고 펜을 집어들 때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KBS 2FM의 < 볼륨을 높여요 > 속 악동뮤지션 수현의 목소리는 애석하게도 매일같이 나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그렇게 들뜨는 마음을 애써 외면하다가도 수현과 바버렛츠의 ‘Summer love’가 방송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면 나는 손에 쥔 펜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넷의 산뜻한 하모니가 나의 결심을 번번이 무너뜨릴 만큼 달콤했으니까. (이승원)

MBC FM4U 태연의 친한 친구 / 텐시러브(Tensi love) ‘Cake house’
학창 시절 조용한 자습실에서 두근대며 문자 사연을 보내던 기억은 꽤나 강렬하다. 라디오를 처음 접했던 중학생은 당시 소녀시대 태연이 진행하던 MBC FM의 < 친한 친구 >에 사연을 보냈고 설레는 마음을 안고 MP3 이어폰으로 전파를 찾았다. 흘러가는 야간 자율 학습 중에 3부 오프닝 곡 텐시러브의 ‘Cake house’가 흘러나왔고 무료한 시간을 버티게 해준 청취 이후에도 기계음으로 가득한 초창기 일렉트로니카 음악을 자주 흥얼거리곤 했다. 비록 사연은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라디오가 주는 동시성과 생동감은 특별한 경험으로 남았다. (손민현)

KBS 클래식FM 세상의 모든 음악 / 마이크 배트(Mike Batt) ‘Tiger in the night’
모 뮤직바 사장님의 단골 질문은 “< 세상의 모든 음악 > 알아요?”다. 마침 질문받을 당시 늘 듣던 종류 밖의, 클래식, 재즈 외 다른 여러 나라의 음악이 궁금하던 차였다. 덕분에 그 이후 오후 6시면 KBS 클래식FM을 찾았다. 시그널 음악은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마이크 배트(Mike Batt)가 작곡하여 로열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Tiger in the night’. 하프와 오보에, 클라리넷이 두런두런 모이는 모양은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DJ의 변함없는 인사말과 어울린다. 얼마 전, 사장님은 나와는 오래 보는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건네왔다. 새삼스러웠다. 같은 주파수로 접어들 때마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여러 수단 중에서도 라디오는 밤의 호랑이처럼 여전히 밝게 빛나고 있다. (신하영)

KBS 2FM 이기광 가요광장 / 데이비드 포스터(David Foster) ‘Winter games’
노래 듣는 것에 권태를 느낄 때는 라디오로 기분을 환기하곤 한다. 운이 좋으면 취향을 저격하는 음악을 발견하기도 하고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근황을 듣거나 새로운 정보를 얻기도 한다. < 이기광의 가요광장 >은 점심시간에 편안한 목소리와 트렌디한 선곡으로 라디오로서 역할은 물론 연예계 활동으로 다져온 입담을 통해 재미까지 놓치지 않는다. 하루 중 가장 생기 있는 시간대에 걸맞게 시그널 송은 위대한 작곡가 데이비드 포스터의 1988년 캘거리 동계올림픽 주제가 ‘Winter games’를 사용한다. 시카고의 ‘Hard to say I’m sorry’, 휘트니 휴스턴의 ‘I will always love you’ 등 그의 수많은 대표곡에 비하면 덜 유명하지만 파워풀한 건반은 태양이 가장 높이 떠 있는 시간에 울려 퍼져 활력을 더한다. (백종권)

SBS 러브FM 정엽의 LP카페 / 정엽 ‘회전목마’
레코드판을 수집하는 입장에서 관심이 갈 수밖에 없는 이름이다(DJ와 같은 ‘엽’자를 써서 그런 것도 있지 않을까). 개인 소장 바이닐을 가지고 실제로 공개 방청까지 다녀왔다. 턴테이블을 통해 음악을 틀어준다는 것과 더불어 다양한 라이브 무대가 특징이다. 디제이가 가수인 점을 살려 오프닝 시그널은 정엽의 노래가 SBS 러브FM의 103.5 MHz를 타고 매일 밤 저녁 6시 5분에 흘러나온다. ‘회전목마’라는 제목에 맞춰 놀이공원에서 들릴 법한 도입부 뒤 분위기는 잔잔하게 가라앉으며 진행자의 목소리와 프로그램의 무드에서 일맥상통하는 따스함이 전파를 타고 단번에 퍼진다. 아날로그, 라디오, LP, 음악, 뉴트로, 레트로. 옛것이 현재로 돌아온 지금의 대중문화를 반영해 그 시절의 자글거리는 감성을 간직했다. 오늘도 ‘카페’에 들러 음악 한 모금을 마신다. (임동엽)

KBS 1FM 생생 클래식 / 모차르트(Mozart) ‘The London sketchbook, K.15a’
누군가의 우아함을 사모하다 덩달아 고상해지는 경우가 있다. KBS TV < 특파원 보고 세계는 지금 >의 열혈한 애청자인 나는 유려한 말솜씨를 가진 진행자 윤수영 아나운서를 동경하게 됐고 곧 그가 KBS 1FM < 생생 클래식 >의 오랜 MC라는 걸 알게 됐다. 정오를 알리는 이 라디오는 모차르트가 런던에 머물 동안 쓴 스케치 시리즈로서 제목이 없어 a부터 ss번까지 문자로 대신해 부르는 희유곡의 ‘K.15a’를 시그널로 삼았다. 영국의 지휘자 네빌 마리너의 통솔 아래 관현악기가 수다스럽게 빗발치며 한낮의 태양을 환희한다. 가끔 삶을 축복하고 싶을 때 들을 만한 음악이 추가됐다. 타인의 기품, 다정함, 전문성을 닮고 싶어 맞춰 놓은 주파수가 클래식 문외한에게도 취향이란 걸 심어주었다. (박태임)

MBC FM 임국희의 팝스퍼레이드 / 러브 언리미티드 오케스트라(Love Unlimited Orchestra) ‘Love’s theme’
1980년대 중반, 매일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MBC FM에서 방송된 < 임국희의 팝스퍼레이드 >는 나에겐 반 토막 프로그램이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면 1부는 듣지 못했기 때문에. 아나운서 출신인 임국희 디제이의 약간 냉정한 진행과 선곡되는 노래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시원한 현악기로 시작하는 시그널 음악이 마음에 들었다. 이 곡은 저음으로 유명한 소울 가수 배리 화이트가 이끌었던 러브 언리미티드 오케스트라(Love Unlimited Orchestra)의 초기 디스코 스타일의 ‘Love’s theme’이다. 내가 주말을 기다렸던 이유 중 하나는 정각 오후 4시에 세련된 이 음악을 들을 수 있어서였다. (소승근)

MBC FM4U 세상을 여는 아침 최현정입니다 / 타카피 (T.A.-COPY) ‘케세라세라’
새벽 다섯 시. 하루를 온전히 마무리한 퇴근자의 안도와 이른 출근길의 불안과 설렘이 뒤섞이는 지점에 ‘세상을 여는 아침 최현정입니다’가 있었다. 아나운서 최현정은 특유의 나긋한 목소리로 각자가 지닌 선을 이어주며 청취자를 다독였다. 무엇보다 생각이 깊어질 무렵. 펑크 밴드 타카피가 부른 2부의 여는 곡 ‘케세라세라’는 직선적이고도 흥겨운 리듬으로 고민에 빠진 이들을 ‘될 대로 돼라’며 응원했고 작곡 학원에 다니고자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초짜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생에게 더할 나위 없이 큰 격려가 됐다. 오랜 세월이 지나 잠시 잊고 있었지만 불현듯 떠오른 그때의 온도와 풍경이 여전히 생생하다. (손기호)

CBS FM 한동준의 FM POPS / 어 플록 오브 시걸스(A Flock Of Seagulls) ‘Space age love song’
중학교 시절 처음 접한 CBS 음악FM의 < FM POPS >는 도회적이었다. 디스크자키 김형준의 쿨함은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서늘한 시간과 어울렸고 프로그램이 소개한 레벨 포티투(Level 42)의 ‘Love games’ 덕에 퓨전 재즈와 소피스티-팝에 매혹되었다. 나른한 오후 2시를 유쾌 상쾌로 깨우는 < 한동준의 FM POPS >에 이르기까지 방송의 시작을 알리는 노래는 같았다. 리버풀 출신 뉴웨이브 밴드 어 플록 오브 시걸스의 ‘A space age love song’은 신시사이저와 각종 소리 효과, 펑키(Funky) 기타의 합세로 가슴을 두드렸다. 제목처럼 공상과학적 사운드스케이프였다. 리드 보컬 마이크 스코어의 헤어스타일을 비롯해 멤버들의 패션도 시각적이었다. (염동교)

MBC FM4U 배철수의 음악캠프 / 비엔나 심포닉 오케스트라(Vienna Symphonic Orchestra) ‘(I can’t get no) satisfaction’
나에게 ‘Satisfaction’은 롤링 스톤즈가 아니라 비엔나 심포닉 오케스트라의 곡이다. 당연히 < 배철수의 음악캠프 > 때문이다. 해외 음악을 접하겠다는 일념으로 무턱대고 라디오를 듣게 되면서 ‘Satisfaction’은 내 안에 오프닝 시그널 송으로 먼저 뿌리를 내렸다. 마치 ‘헛, 둘, 셋’처럼 들리는 인트로부터 위트 넘치는 베이스, 현란한 현악 연주가 차례로 날리는 일격에 당하고 나니 나중에 찾아 들은 원곡과는 친해질 수가 없었다. 사실 오케스트라 버전도 2분 30초를 넘어가면 마치 마스크 벗은 맨얼굴을 처음 보는 느낌이다. 배철수 DJ의 “출발합니다!” 없이는 영 어색하다. (한성현)

MBC FM4U 푸른밤 종현입니다 / 샤즈(Shazz) ‘Heaven’
자정이 되기 직전 끝난 야간 자율 학습, 지친 하루가 끝나면 기숙사 룸메이트는 MP3로 라디오를 틀었다. 시그널송 샤즈(Shazz)의 ‘Heaven’으로 시작하는 MBC FM4U < 푸른 밤 종현입니다 >. 피아노 선율이 이끄는 포근한 재즈 사운드는 오늘과 내일 사이의 아늑한 공간으로 초대했다. 매일 도착하는 사연들과 그들의 고민을 함께 나누는 목소리는 다정하고 진중했다. 라디오는 늦은 새벽까지 공부할 때면 적막한 틈을 메웠고,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우리의 또 다른 친구가 되기도 했다. 여전히 ‘Heaven’을 들으면 3년 동안 자정을 지켜줬던 DJ의 사려 깊은 말들이 떠오른다. (정수민)

MBC 표준FM 강석, 김혜영의 싱글벙글쇼 / 폴 모리아(Paul Mauriat) ‘Please return to Pusan port’
몇몇 기억은 어렴풋한 흔적으로 시작해 평생을 함께하는 문신이 된다. 어린 시절 차에 타기만 하면 뒷자리로 꾸물꾸물 넘어가 어머니에 기대 누운 채 그 조용한 떨림을 만끽하며 한가로이 졸던 나는 부모님이 즐겨 듣던 라디오 < 강석, 김혜영의 싱글벙글쇼 >의 시끌벅적한 만담을 자장가로 삼곤 했다. 1984년 출항을 알린 이 장수 프로그램의 시그널은 프랑스의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폴 모리아가 첫 내한을 앞두고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경음악으로 편곡한 버전이다. 아직도 그 도입부만 들으면 강석과 김혜영의 힘찬 오프닝 멘트와 함께 여러 광경이 산발적으로 떠오른다. 반쯤 감긴 시야 너머로 핸들을 잡고 계신 아버지의 커다란 뒷모습, 앞유리창에 부딪혀 사방으로 퍼져 나가던 햇살, 그 사이를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가로수까지. 원곡의 쓸쓸함이나 편곡의 경쾌함보다 내게는 기분 좋은 포근함으로 기억되는 이유다. (장준환)

MBC 표준FM 이윤석, 신지의 싱글벙글쇼 / 코요태 ‘순정’
인생 절반 이상을 < 싱글벙글쇼 >로 써 내려간 강석과 김혜영, 30년 넘는 세월의 호흡을 단숨에 이어받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전설을 고스란히 따라갈 수는 없는 법. 진행자를 교체해가며 방향을 잡아간 지 10개월이 지난 2021년 3월 뜻밖의 시그널이 울려 퍼졌다. 우렁찬 말 울음소리와 함께 ‘디스코 타임’을 알리는 코요태의 명곡 ‘순정’, 혼성 콤비의 부활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원곡자인 신지와 개그맨 정준하는 시트콤 < 거침없이 하이킥 >에서 이미 연기로 합을 맞춰본 만큼 재치 넘치는 만담으로 점심시간을 달궜고 20여 년 전 인기곡까지 소환하며 청취자층을 폭넓게 끌어안을 수 있었다. 2022년 9월부터 정준하 대신 동료 이윤석이 신지와 함께하고 있는 ‘최장수 라디오 프로그램’은 여전히 그 시절 그리고 오늘날의 순정을 담아 유쾌한 전파를 날리고 있다. (정다열)

MBC 표준FM 조PD의 비틀즈 라디오 / 루카 콜롬보(Luca Colombo) ‘Blackbird’
< 조PD의 비틀즈 라디오 >와 함께한 새벽 두 시는 불투명한 미래가 주는 압박에서 잠시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 심야 라디오가 지닌 포근함이 심적 안정을 제공했고 우상으로 삼았던 비틀스의 음악에 집중할 수 있어 더없이 아늑했다. 매일 밤 리버풀 청년들의 위대한 유산을 소개해준 조정선 디제이는 최고의 명사였으며 방송의 문을 연 폴 매카트니의 걸작 ‘Blackbird’는 잠 못 드는 새벽 네 명의 비틀과 나를 이어준 징검다리가 되었다. 원곡과 달리 찌르레기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프로그램 시그널은 이탈리아 기타 명인 루카 콜롬보의 핑거스타일 커버 곡을 사용했다. (김성욱)

SBS 파워FM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 / 제프 & 마리아 멀더(Geoff & Maria Muldaur) ‘Brazil’
기타 반주가 한쪽 귀를 어루만지며 시작한다. 휘파람과 함께 모든 세션이 합쳐지면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라는 나긋나긋한 오프닝 멘트가 들린다. 기분 좋은 아침을 만드는 음악과 목소리. 테리 길리엄의 영화 < 브라질 >의 삽입곡인 제프 & 마리아 멀더 부부의 ‘Brazil’은 암담한 회색 도시에 내리쬐는 따스한 한 줄기 햇살이 잘 표현된 곡이다. <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 > 또한 빌딩 숲에 둘러싸인 채 바쁘게 살아가는 이들의 편안한 쉼터다. 수더분한 말씨로 사연을 읽어주는 ‘아침창 아저씨’ 김창완과 부드러운 포크 ‘Brazil’의 오랜 동행은 20년 넘게 이어져 지금까지도 순조롭다. (김태훈)

MBC FM4U 4시엔 윤도현입니다 / 윤도현밴드(YB) ‘오늘은’
윤도현의 목소리는 멋지고 입담도 화려하다. 하지만 < 4시엔 윤도현입니다 >를 처음 들었을 때 무엇보다 내가 반긴 건 시그널 송 ‘오늘은’이었다. 11년 전 중학교 시절 처음 듣고 자유분방한 가사에 반한 ‘오늘은’. 경쾌하면서도 어딘가 나른한 데가 있는 이 노래를 하교 후 해가 지기를 기다리며 4시에 들었는데 11년이 지난 지금 똑같은 시간, 우연히 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 4시엔 윤도현입니다 >에서는 노래가 보컬 없이 반주만 나온다. 그래서 열심히 대본을 준비했을 윤도현 디제이와 작가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프로그램이 시작할 때면 오프닝 멘트는 깡그리 무시하고 왕왕대는 기타 연주에 맞춰 그저 이 노래의 벌스(Verse)를 읊조리곤 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YB의 곡도 ‘오늘은’이지만 윤도현도 가장 아끼는 곡이 ‘오늘은’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묘한 유대감이 든다. (이홍현)

정리 : 장준환
이미지 편집 : 백종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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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유병열 인터뷰

기타리스트 유병열의 음악 인생은 길고 굽이굽이 이야기가 들어차 있다. 1990년대 윤도현 밴드(현 YB)의 주축 멤버로 데뷔해 비갠 후, 바스켓노트를 거쳐 최근엔 산울림의 김창훈이 만든 김창훈과 블랙스톤즈로 음악 활동을 이어왔다. 산울림 음악을 바탕으로 한 창작 뮤지컬 < 창문너머 어렴풋이 >의 음악감독 역시 유병열이다. 다각도로 쉬지 않고 활동하는 원동력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그저 웃으며 “전투적인 사람의 덩어리로 태어났다”라고 답했다.

유병열은 하지만 고민이 많다. 한국 최초로 록 기타리스트들의 축제 < 골든핑거 >를 성공적으로 이끌고, 이에 맞춰 ‘지구를 지켜라’라는 테마의 싱글 ‘We want green earth’를 발매했지만 세간의 관심은 요원하기만 하다. 이를 두고 일정 부분 자포자기 혹은 관망 상태임을 고백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정중동이다. 모든 걸 쏟아부은 자만의 ‘초연함’이랄까. 최근 활동을 중심으로 기타리스트 유병열의 현재를 돌아봤다.

얼마 전 < 골든핑거 기타페스티벌 >(이하 ‘골든핑거’)을 ‘비대면’으로 끝냈다.
첫 회는 창동에서, 두 번째는 통영에서 대면으로 공연했는데 3회에 이어 이번 4회 차 역시 비대면으로 진행했다.

기타리스트 공연을 비대면으로 한다는 게 감이 잘 안 잡힌다. 노래 없이 기타만 치는 것이기 때문에 조금 쉽게 성사된 면도 있지 않나?
오히려 연주곡 중심이라서 더 안 될 거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연주는 유튜브에 너무 많다.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으니까 ‘이걸 돈 내고 봐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할 거라고 봤다. 그래서 공연 준비하면서 애로사항도 많았고…

뭐가 애로사항이었는지?
대면으로 했던 1~2회 공연은 거의 매진이었다. 물론 통영에서 공연할 땐 통영 플랫폼을 통해서 입장료가 비싸지는 않았지만… 하지만 싸다고 관객이 오는 건 아니다. 그렇게 붐이 일어서 좋았는데 코로나 때문에 비대면으로 전환하면서 아쉬움이 컸다. “유튜브로 다 볼 수 있는데 뭐 하러 돈 내고 영상을 봐?” 하는 생각이 들지 않게 장비를 엄청나게 들여왔다. 진짜 방송처럼 지미집을 동원하기도 했는데 그래도 한계는 있었다.

현장에서 기타 연주 공연을 보니까 예상보다 울림이 크던데… 대면이 매진됐다는 게 이해가 된다.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실제로 기타 공연을 보면 감동도 있고 재미도 있다. 우리가 항상 가수들 뒤에서 연주하거나 록 밴드에서도 보컬 뒤에서 연주하니까 사람들이 잘 모르는 거다. 연주만 가지고도 정말로 충분히 감동할 수 있다. 이 공연이 그런 계기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톡톡히 했을 거다.

이번 공연에서 적게는 3, 4살 많게는 10살 정도의 나이 차이가 나는 기타리스트와 함께했다. 특별히 느낀 바가 있다면?
솔직히 말해서 다 개성이 있다. 예전에는 누가 더 잘 치는 것 같으면 열 받고 뒤에서 연습하고 그랬다. 근데 지금은, 내가 기타를 30년 넘게 쳤는데… (웃음) 지금은 전혀 그런 게 없다. 황린(< 골든핑거 >에 참여한 젊은 기타리스트) 같은 애들을 보면 ‘얘는 아이디어가 좋구나’, 또 ‘쟤는 어린데 잘 치네’ 그런다. 동시에 또 ‘그럴 때지’ 하는 생각도 든다. 나도 젊을 때는 특이한 것 치려고 난리 치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 점에 대해서 인정하고 ‘저 사람은 나보다 손가락이 두 배가 빠르네’ 이러고 만다.

그렇게 다양한 나이대의 사람들이 모여 < 골든핑거 >를 성황리에 마쳤고 환경에 관한 싱글 ‘We want green earth’도 냈다. 곡을 내게 된 배경은?
일단 환경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갖게 됐다. 내가 키우는 강아지도 있고 그래서 더 기후 변화나 다큐멘터리를 찾아보는 편이다. 요즘 환경오염이 날로 심각해져 가고 있는데 매스컴 등에 덜 노출되다 보니까 사람들이 심각성을 모르는 것 같다. 내가 음악 하면서 할 수 있는 게 이런 거니까, 그래서 곡을 썼다.

처음부터 < 골든핑거 >에 참여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려는 기획이었나?
< 골든핑거 >라는 연주 공연을 계속하고 있었고 또 거기에 (싱글 발표가) 맞물려 있었다. 아무래도 이럴 때 무대에 서는 사람들이랑 소통하는 게 수월하다는 장점이 있지 않나. 보통 곡들은 노래 중심인데 이번에는 이런 장점들을 살려 8분 남짓의 연주 중심 곡을 썼다.

과거 록 분야에서 환경 관련 메시지를 담은 노래들이 꽤 주목받았다. 그런 면에서 이번 싱글의 가치와 시의성이 상당하다고 본다.
지속해서 어느 정도의 연계성을 갖고 계속 발표하고 싶다. 사람들이 이 곡을 듣고 각성을 하든 안 하든, 노출되든 안 되든 상관없이 말이다. 사실 이 곡을 가지고 ‘플라스틱 챌린지’를 SNS에서 진행했는데 잘 안됐다. 누굴 지목해서 플라스틱 분리수거를 하고 그 인증사진을 올리는 걸 했다. 당연히 길게 연결되지 않았다. 나름대로 시도는 했는데 유명인이 아니니까 그 흐름이 끊어지더라.

국내 정상급 기타리스트인데…
최고라는 소리를 종종 듣는데 그럴 때마다 뭐가 최고라는 거지? 최고라고 하면서 처우가 왜 이러는지 생각하곤 한다. (씁쓸하다고 말하니) 슬프지만 그게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외국에서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이 있고 핫한 신인들이 나오면 그 둘이 함께 간다. 근데 우리는 신인 애들이 나오면 옛날 사람은 그냥 없는 사람이 된다. 요즘 많은 연주자도 윗세대 연주자들을 모른다. 당연히 나도 잘 모를 거다. 실용음악과가 생기면서 입시 위주의 ‘이런 곡을 들어야 해!’하는 게 생기니까 속된 말로 ‘실용 펑키(Funky)(입시 때 연주 실력을 잘 보여줄 수 있는 펑키한 곡을 많이 연주하곤 한다 -편집자)’ 스타일의 기타 연주 흐름이 생겼다고 본다.

유병열은 기타리스트이자 창작자이기도 하다. YB의 초창기 히트곡 ‘먼 훗날’, ‘가리지좀 마’가 그의 손에서 탄생했고 상기한 다양한 밴드를 이끌며 대중의 관심도와 상관없이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었다. 직접 쓴 많은 곡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노래가 무엇이냐 물으니 예상 밖으로 비교적 최근에 발매한 ‘길꽃같은 우리’를 꼽았다.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 이야기를 길가에 피어있는 생명이 질긴 꽃에 비유한 노래라고 했다. 작사, 작곡 그리고 뮤직비디오의 촬영 및 편집까지 전부 그가 한 곡이다.

요즘 젊은 친구들의 기타 치는 스타일이 있다고 보는 건가?
근데 이건 유행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 카시오페아(일본의 퓨전 재즈 밴드)가 유행할 때 다 그 스타일을 따라 하는 것 같은 느낌? 마치 그랬던 것처럼 비슷한 플레이들이 많아서 아쉬운 것들이 있다. (지금도 어떤 하나의 스타일에 쏠리는 것 같으냐 물으니) 그렇다. 지금 친구들은 어떻게 보면 다 실용음악과에 맞춰져 버렸다. 대학을 가기 위해, 입시 곡 위주로 기타를 배우다 보니까 거의 다 그쪽으로 먼저 빠진다. 그렇게 안 치면 ‘구리다’고 한다. 그래서 톤도 다 비슷하고.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준다면?
나는 앰프 세대다. 오프라인에 직접 앰프를 써서 거기서 나는 소리가 콘솔로 가는 거다. 근데 요즘은 ‘앰프 시뮬레이션’을 건다. 앰프 없이 다이렉트로 콘솔에 소리를 받는다. 그러다 보니까 소리가 건조하다. 대신 선명도는 있고 입체감은 떨어지는 차가운 톤이 된다. 전형적인 디지털 톤이랄까? 또 예전에는 굵은 저음도 막 둥둥 나왔다면 요새는 얇게 저음도 딱 깎고 하이도 딱 깎는다. 듣기 편한 소리. 어쩌면 전형적인 세션 맨 톤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요새 음악이 좀 들리기는 하나? 음악을 한다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들 것 같기도 한데.
음악하고 있는 자체도 재미없다. (태연한 어조로) 제일 재밌는 거는 산에 가 있는 거다. 아침에 등산해서 산에 있는 거랑 맨날 자연 보는 게 낙이다. 언젠가는 시골에 가서 살고 싶다. 가족이랑 같이 시골 가서 우리끼리 텃밭 가꾸고 사는 게 꿈이다. 음악이 꿈이 아니라, 기타리스트 유병열의 꿈이 아니라. 사람 자체로서의 꿈이다. 그때는 음악 안 해도 된다, 나는. (웃음)

현재 진행 중인 별도의 기획은 없나?
원래는 한 달에 한 번씩 싱글을 계속 냈다. 아마 올해 3월까지 싱글을 냈던 것 같다. 근데 이게 맞는 건지… 그렇게 계속 내다보니까 사람들이 그거에 대해서 별로 감흥이 없기도 하고 그걸 모아서 정규로 낼까 싶기도 하고. 고민하고 있다. 요즘에 약간 정체기다. 그래도 곡은 한 20곡 정도 써뒀다. 그걸 2장짜리로 해서 아트록처럼 스토리가 있게, 타이틀을 딱 정해서 앨범으로 내려 하다가 흐지부지됐다.

앞으로의 음악 활동을 어떻게 꾸려가고 싶은가?
계획이 없다. 솔직하게 심정을 얘기하면 내 창작은 이제 계획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안 하면 안 하는 거고 자연스럽게 (활동이) 이어지면 하는 거고…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으니 어딘지 마음 한 편이 씁쓸하다.
(더 밝게 웃으며) 경험이 너무 많아서, 지레짐작으로 상상을 해서 내가 걸러 버리는 거다. 뚜렷한 변화가 있을 때… 새로운 길을 모색해보겠다. 하하하!

‘산’, ‘요즘 애들’, ‘나 때는’이라는 말 사이 ‘꼰대’라는 단어가 번쩍 튀어나왔다. 그는 자신을 종종 꼰대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의 비판과 잔소리에는 강단이 묻어 있었다. 오랜 시간 한 자리에서 욕심껏 기타를 친 연륜 있는 자의 자신감 혹은 주관은, 결코 먼지 쌓인 고루한 말들이 될 수 없다. 언제 연주를 그만둘지 모르겠다고 버릇처럼 말했지만 인터뷰 당일에도 내내 연습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온 그였다.

자신을 ‘전투적이며 하나에 꽂히면 미치는 사람’이라 표현한 그는 후회 없이 기타를 털어낼 수 있을 만큼 기타연주에 모든 것을 토해냈다. “음악을 관둘 때 지저분하게 관두기 싫다. 하루아침에 사라질 거다. 확 불 지르고 마른 장작처럼 한 번에 없어질 거다. 그때는 미련 없이 음악을 떠날 거다” 모든 것을 쏟아부은 자에게 후회란 없다. 자포자기 같은 톤의 언어들에서도 그런 열정과 달관이 쉼 없이 새어 나왔다.

인터뷰: 임진모, 임동엽, 박수진
정리: 박수진
사진: 임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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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OP Album

YB ‘Twilight State'(2019)

평가: 3.5/5

관건은 과연 이 음반이 흘러갈 수 있느냐는 거다. 데뷔 31년 차. 2002년 한일 월드컵의 호혜를 입은 ‘오 필승 코리아’의 흥행 이후 ‘박하사탕’, ‘잊을게’ 등의 히트곡. 연이어 윤도현 솔로 곡인 ‘사랑했나봐’의 대중 호응을 거쳐 2011년 오디션 프로그램 < 나는 가수다 >의 활약 등 YB 커리어에는 언제나 급격한 상승 곡선이 이어져 왔다. 그러나 지난 몇 년간 이들에게 새바람은 불어오지 않았다. 어쩐지 과거의 모습으로만 밴드가 소환되던 와중 6년 만의 정규 10집은 그룹의 기로를 결정했다. 잠시 막혀있던 통로는 시원하게 열렸고 YB는 그들만의 방법으로 건재함을 증명한다.

젊음과 연륜을 동시에 좇는다. 이는 내레이션이 활용되는 방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첫 곡 ‘딴짓거리’는 다국적 밴드 슈퍼올가니즘의 한국인 멤버 소울의 독특한 혼잣말과 휘파람 소리를 섞어 젊은 감성을 체득하고 반대로 ‘생일’은 요즘 잘 쓰지 않는 감성적 읊조림으로 노래의 문을 연다. 자연의 소리를 바탕삼아 시인 이응준의 시구를 읽은 뒤 서정적인 곡의 전개가 시작되는데 옛 감성을 우회한 위로의 메시지가 근사하다. 이처럼 음반은 과거의 것과 요새의 것을 들여오는데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곡에 알맞은 색깔로 소스를 배합한다. 세대 불문. 그들의 음악이 소화될 수 있는 이유다.

이 같은 대중성이 작품의 승전고를 울린다. 록을 중심으로 모던 록, 헤비메탈, 록 발라드 등의 연성화를 이어가며 앨범을 꾸리는 와중 음악적 실력을 과시하려 연주를 확대한 지점이 없다. 로킹한 스피드로 중무장한 ‘Find us’, 탄탄한 리듬감을 강조한 ‘외람된 말씀’, 육중한 헤비메탈 ’10E’ 등 다양한 질감을 가진 곡들이 포진돼 있으나 이것들의 호흡을 늘려 자극 포인트를 강조하지 않으니 곡이 쉽다. 얼터너티브 밴드이자 유명 록 그룹 스매싱 펌킨스의 기타리스트 제프 슈뢰더(Jeff Schroeder)와 협업한 ‘야간마차’ 역시 마찬가지. 욕심을 내지 않은 탓에 음반은 범대중적인 소구력을 얻었다.

기본적 틀을 유지한 채 다채로운 분위기를 담았다. ‘반딧불 그 슬픔에 대한 질문’은 점점 침잠하는 낮은 분위기를 밸런스 좋은 연주를 통해 입체적으로 그려냈고 ‘나는 상수역이 좋다’는 이전 인기곡 ‘나는 나비’, ‘흰수염고래’ 풍의 위로를 전한다. 여기에 한바탕 뛰기 좋을 라이브 전용곡도 있다. ‘Jumping to you’, ‘개는 달린다, 사랑처럼’의 활력이 그것. 신보가 들여온 가장 큰 의미는 바로 여기서 나온다. 여전히 ‘대중’ 곁에서! 펼쳐낼 수 있는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오히려 힘을 덜어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음악을 들고나왔다. 중용의 미덕 지켜 유지한 대중 밴드의 타이틀. YB는 흐른다.

– 수록곡 –
1. 딴짓거리(Feat. Soul of Superorganism)
2. 생일
3. 야간마차(Feat. Jeff of Smashing Pumpkins)
4. 외람된 말씀
5. 개는 달린다, 사랑처럼.
6. 차라리 몰랐더라면
7. 반딧불… 그 슬픔에 대한 질문
8. 나는 상수역이 좋다
9. 10E
10. 그럴 이유가 하나도 없다
11. Jumping to you
12. Find us
13. 거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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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YB 인터뷰

작년 10월. YB의 정규 10집이 발매됐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의 풍향을 따라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밴드로 성장하고 연이어 2003년 정규 6집 < YB Stream >의 수록곡 ‘잊을게’로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그들은 이후 17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꾸준히 노래를 쌓았고 음악적 변화를 일궈왔다. 신보 < Twilight State >에는 이러한 이들의 에너지와 세간의 트렌드를 놓치지 않은 영특한 장르의 활용. 그리고 무엇보다 세월의 흔적을 담은 연륜 있는 메시지와 연주가 번뜩였다.

시기는 조금 늦었지만 지난주 화요일 영등포 근처의 한 카페에서 YB의 다섯 멤버 윤도현(보컬), 박태희(베이스), 허준(기타), 김진원(드럼), 스캇 할로웰(기타)를 만났다. 이제 두 자릿수로 접어든 디스코그래피의 소회를 물으니 보컬 윤도현은 멋쩍게 웃으며 “이 음반으로 만든 음악적 성과는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이 앨범을 통해 다음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단 거다. YB의 히스토리는 계속된다”고 말했다. 6년에 걸쳐 탄생한 정규 음반의 제작 비하인드 스토리와 어느덧 데뷔 26주년을 맞이한 그들의 우여곡절을 공개한다.

○정규 10집, “터널을 지나자 길이 보이더라!”

10집 < Twilight State > 발매를 축하한다. 기분이 어떤가?
도현 : 10은 의미를 담아야만 하는 숫자 같다. 근데 사실 그걸 그렇게 크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내놓고 나니까 그제서야 ‘아, 우리가 이렇게 10집을 냈구나’ 싶었다. (웃음)

진원 : 레드 제플린이 음반 라이센스를 9장까지 내고 지미 페이지가 편집 음반으로 10집까지 만들었다. 그러니까 드러머 존 본햄이 살아있을 때를 기준으로 모든 멤버가 함께 한 건 9장이다. 우리도 정규 2집 (YB가 정식 밴드로 구성을 갖춘 건 2집부터였다 -편집자)부터 이제 딱 9장을 낸 거다. 어쩔 수 없이 가장 좋아하는 아티스트인 레드 제플린과 비교를 하게 된다. 그들과 같은 기간 동안 음반 활동을 하고 있구나 생각하면 감회가 새롭다. 만감이 교차한다.

허준 : 나는 지금껏 작품을 만들며 이번이 제일 재밌었다. 그냥 과정 자체가 좋았다. 물론 즐겁지만은 않았겠지만 그 전과 비교해봤을 때 훨씬 즐기며 음악을 만들었다. 그동안 앨범을 만들며 조금씩 배워왔던 것들이 있지 않나. 그것들을 통해 머릿속에 있는 사운드를 실제로 구현해가는 과정을 직접 느꼈다. 너무 즐거웠다.

태희의 소감도 궁금하다.
태희 : 난 우리가 지금까지 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노래를 만들고 쌓아가는 과정이 굉장히 길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한 터널을 지나고 나니까 수월해지더라. 시간이 지나면 어차피 분명 만족스럽지 않은 지점이 생길 테니까 과감하게 밀어붙이자. 여기가 마지노선이다. 생각하니 많은 것들이 미끄럼틀을 탄 듯 흘러내려 갔다. 

그때가 언제 즈음인가?
태희 : 2019년 1, 2월쯤이었다. 마지막 음반 < Reel Impulse >(2013)을 내고 4, 5년은 정말 힘들었다. 노래는 많은데 잘 뭉쳐지지 않으니까. 그러다 2018년 겨울에 도현이 산에 들어갔다. 그만큼 절박했고 그랬기에 이번 앨범을 최종적으로 완성할 수 있던 거 같다.

산에 들어갔다고?
도현 : 이렇게는 도저히 안 되겠더라. 겨울이면 많은 밴드들이 한창 투어를 할 때다. 일부러 그 시기를 골라 산으로 갔다. 투어 등 우리가 해야 할 것들을 포기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안 하면 안 된다 하면서 정말 이를 물고 곡을 쓰고 편곡을 했다. 그때 아마 한 100여 개쯤 노래가 있었는데 정말 열심히 추리고 추려 13개의 수록곡을 골랐다. (웃음)

결과물에는 만족하나? 
태희 : 최선을 다했다. 1, 2개의 타이틀로 앨범 전체의 성격을 보여줄 수 없어 위험한 줄 알면서도 타이틀을 3개로 정하기도 했다. 그만큼 후회는 없다. (프로듀서인 윤도현과 마찰은 없었냐는 질문에) 좋게 말하면 좋은 프로듀서였다. 하하하 (일동 웃음)

도현 : 프로듀싱도 프로듀싱이지만 믹싱 하는데 시간이 정말 많이 걸렸다. 톤 스튜디오의 김대성이 고생을 많이 했다. 이 친구는 예전부터 쭉 록을 만지던 사람이다. 그러다 요즘은 먹고 사는 게 그렇듯 가요부터 록까지 일이 들어오는 대로 다 하더라. 사실 대성은 YB 1집부터 어시스트 엔지니어였다. 우리와는 각별한 사이인데 바빠도 너무 바쁘니 이번에 함께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들더라. 이런 생각을 허심탄회하게 소주 한잔하면서 얘기했다. 그랬더니 “10집인데 내가 목숨 걸고 하겠다” 하더라. 그렇게 다시 뭉쳤다.

본격적으로 수록곡 얘기를 해보자. 기존 인기곡이었던 ‘박하사탕’, ‘잊을게’ 등이 넓은 의미에서 일반적인 사랑의 감정을 담았다면 이번 수록곡은 더욱 개인적인 면모가 많이 느껴진다.
도현 : ‘내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야겠다’ 하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거창한 주제보다는 ‘사람의 감정’에 치중해보자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감정을 통해 시대를 보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다. 그걸 잘 표현할 수 있으면 더 좋고.

설명을 조금 더 이어준다면?
도현 : ‘생일’ 이란 수록곡은 위로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예전에는 이러한 위로가 어떤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배경 삼아 시작했다면 이번에는 완전히 나 자신의 감정을 그 출발점으로 삼았다. 사적인 가사를 느꼈다면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일 거다.

‘생일’의 ‘벗어나지 못하는 이 사막의 중심에서 /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꺼라고 말했다 / 그러자 모든 것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라는 가사가 참 매력적이다.
도현 : 이응준 시인의 작품이다. 이 시를 읽는 순간 내 마음과 같다고 느꼈다.

특히 이번 음반은 YB의 분투가 느껴진다. 앞서 말한 이응준 시인과의 협업은 물론 세계적인 얼터너티브 록 그룹 스매싱 펌킨스의 제프 슈뢰더(Jeff Schroeder)가 기타 연주로 앨범에 참여(‘야간마차’)하기도 했다. 또한 다국적 밴드로 한차례 유명세를 치른 슈퍼올가니즘의 소울 역시 첫 곡 ‘딴짓거리’에 피처링으로 합류했다. 26년이란 관록의 활동 속에도 끊임없이 변화하려 하는 이들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편집자 

독특하게도 이번 음반에 타이틀이 3개다. 그중 하나는 YB의 히트곡 제조기(‘나는 나비’를 만들었다 -편집자) 태희의 작품인데.
태희 : ‘나는 상수역이 좋다’를 썼다. 앨범에는 6번째 트랙에 위치 하긴 하지만 최종 수록곡으로 묶인 건 맨 마지막이었다. 솔직히 내게 1970년대 아저씨 정서가 있다. 뭐, 내 나이가 있으니까 당연한 거다. 그런 면에서 이 곡이 최종 선발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회사와 멤버들이 잘 봐준 거 같다. (웃음)

멤버들에게 물어보자. 타이틀로 뽑은 이유가 무엇인가?
진원 : 앞서 말했듯, 이번 음반은 한두 곡으로 전체 앨범을 규정할 수 없다. 태희의 곡을 타이틀로 밀어붙인 건 과거 ‘나는 나비’가 그랬듯 이 곡이 가진 편안함과 대중성 때문이었다. 또 다른 대표곡 ‘생일’이 그동안 우리가 해왔던 파워풀한 에너지를 건넬 수 있는 노래였다면 슈퍼 올가니즘의 소울이 내레이션으로 참여한 ‘딴짓거리’는 진화하는 우리의 모습을 담은 곡이다. 주제를 두고 묶기보다는 해보고 싶은 것들을 다 해보려는 마음이 컸다.

그럼 허준이 좋아하는 가장 꽂힌 곡은 무엇인가?
허준 : 워낙 만들 때 공을 많이 들여 그런지 지금은 대부분 다 좋은 거 같다. (그래도 하나만 꼽아 달라고 했더니) 공연했을 때 가장 좋은 건 ‘반딧불 … 그 슬픔에 대한 질문’이다. (웃음) 

○올해의 목표? “공연. 뮤지션과의 생생한 에너지 교감은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다”

말이 나왔으니 공연 얘기를 좀 해보자. 이번 음반 발매 기념 콘서트 후기가 엄청나다.
도현: 한 번도 음반 안에 있는 전곡을 연주한 적이 없다. 무대에서 완전 처음 선보이는 12개의 곡을 연달아 들려 드렸고 그 사이사이 히트곡도 넣었다. 그래서 더 좋게 봐주시는 것 같다. (웃음)

며칠 전 영동대로 공연(2020년 새해 카운트다운 공연으로 YB만 유일한 록 그룹이었다 –편집자)은 또 어땠나. 현장 반응이 정말 좋던데.
도현 : 앞뒤로 다 아이돌, 래퍼여서 그랬는지 현장에서 사람들이 더 반겨준 게 있었다. 록 밴드가 생방송 무대에 선 게 오랜만이기도 하고. 특히 감사했던 건 히트곡 말고 이번 음반의 수록곡인 ‘Jumping to you’, ‘나는 상수역이 좋다’와 같은 신곡도 함께 따라 즐겨주셨다는 거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곡을 통해서도 충분히 교감할 수 있다는 또 한 번의 확신을 얻었다.

그런 측면에서 기성 세대와 젊은 세대를 이어줄 밴드가 바로 YB라고 생각한다. 
도현 : 나도 딸이 있고 애들이 요즘 어떤 노래를 듣고 어떻게 음악을 향유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기회를 열어주는 것뿐이다. YB를 충분히 잘 모르는 어린 친구들도 공연 현장을 왔다 가면 생생한 라이브가 주는 그 에너지에서 느끼는 게 많은 것 같다. 이번 우리 앨범 발매 공연만 보더라도 연령 분포가 20대에서 40대까지 고르게 퍼져있다. 10대도 꽤 되고… 감사한 일이다.

우리나라 록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다고 생각하나? 
도현 : 록 음악 시장이 어렵다고들 이야기하는데 필드에 있는 입장에서는 (늘 그래 와서 인지) 특히 요즘이 더 힘들다는 생각은 안 든다. 물론 나도 트렌드가 힙합이나 아이돌에 치우쳐 있다는 건 느낀다. 하지만 그래도 좋은 밴드들이 계속해서 생겨나는 걸 보면 무조건 덮어두고 침체는 아닌 것 같다. 경제적으로 기울 때가 많고 그런 부분에서 제약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런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록에 대한 관심이 떨어진 것까지 부정할 순 없는 것 같다. 당장 YB의 10집만 봐도 매스컴의 주목이 부족했다. 
도현 : 대중적으로 큰 사랑을 받지 못한 건 사실이다. 음반을 내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우리가 대중음악신과 거리감이 있다는 걸 살갗 근처에서 느꼈고 실제로 어느 정도 서운함이 있기도 했다. (웃음) 그럼에도 우리 음반을 들어준 한 명, 아니 두 명, 아니 세 명, 네 명의 분들이 이 작품을 정말 집중도 있게 감상하고 내려준 고마운 리뷰를 보며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넓은 관심을 받진 못하지만 깊은 관심을 받고 있다면 그걸로 만족이다. ‘잘 만들었다, 잘 냈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아쉬움을 상쇄할 수 있는 건 뭘까?
도현 : 공연. 조금 아까도 부사장님과 진지하게 얘기했다. 올해는 작은 곳, 큰 곳 가리지 않고 단독 공연을 많이 할 예정이다. 생각해보니 활동하면서 클럽 투어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더라. 그래서 지난 연말 공연이 끝나자마자 바로 2020년 공연 대관을 다 마쳤다. 지방의 작은 클럽까지 직접 돌아다닐 예정이니 많이 기대해 달라. (웃음)

○26주년, “YB의 히스토리는 계속된다”

YB가 활동한 지 벌써 26주년이 됐다. 가장 자랑스러운 곡을 하나 뽑는다면?
도현 : 범대중적인 사랑을 받은 곡이 아닐까? ‘나는 나비’. 우리를 대표하는 곡이다.

진원 : 지금은 신보의 ‘야간마차’가 제일 좋다. (예전 앨범까지 포함해 골라 달라고 하니) 너무 많아 못 정하겠다. 유명하고 팬들이 좋아해 주는 곡을 대표곡이라 말 할 수도 있겠지만 커리어를 통틀어 내 마음에 가장 잘 들어오는 노래는 그런 우열순위를 통해 나눌 수 있는 것 같지 않다. 지금만 보자. (웃음) 난 ‘야간마차’다.

허준 : ‘박하사탕’. 내가 막 밴드에 들어와 낸 첫 번째 음반 < An Urbanite >(2001)의 수록곡이다. 연주한 지 오래됐는데 연주할 때마다 새롭고 늘 더 공들여 소리 내게 된다.

끝으로 태희와 스캇의 픽은 무엇인가?
태희 : 글쎄… 오늘 무대에서 부를 노래가 가장 좋은 곡인 거 같다. 이번에 10집을 내면서 느낀 건 어제의 노래는 우리한테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 무대에서 연주할 곡이 언제나 베스트다.

지금 무대에 선다고 가정하고 고른다면?
태희 : 그건 내가 정할 수 없다. (일동 웃음) 멤버들이랑 함께 정하는 거다. 곡들이 저마다 다 흐름을 타고 연결돼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비’도 ‘박하사탕’이 없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거고, ‘박하사탕’도 1집 < 가을 우체국 앞에서 >(1994)의 ‘임진강’ 같은 내면의 고통에 주목한 노래 없이 탄생할 수 없었을 거다. 아까 진원의 말대로 한 곡만 뽑기는 너무 어렵다. 

스캇 : 나는 밴드 밖에서 곡을 들었을 때와 내가 직접 연주했을 때, 이 2가지로 나눠 곡을 정해 봤다. 한국에서 처음 본 YB 공연에서 ‘잊을게’를 들었다. 그때 그 곡이 연주되는 광경과 멜로디가 지금도 생생하다. 또한 하드록을 좋아하는 록 키드 출신으로 ‘정글의 법칙’이 가진 시원함을 좋아한다. 연주할 때마다 늘 푹 빠진다. 내 선곡은 이 두 개다. ‘잊을게’와 ‘정글의 법칙’.

‘잊을게’는 인기가 많았던 반면 우려도 컸던 싱글로 기억된다.
도현 : 이게 (윤)일상의 곡이다. 그때는 정말 밴드 음악에 대한 자존심이 강했던 때다. 우리 뿐만 아니라 팬들도 그랬다. 그랬는데 작곡가의 곡을 받는다고? 정말 말이 안 되는 거지. (웃음). 더군다나 당시의 나는 윤일상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커리어를 보니까 댄스 음악부터 대중적인 곡을 많이 썼던데 그러니까 더 반항심이 들고 이질감이 생기더라. 사장님이 곡은 받아왔지 녹음은 해야 하지. 하기 싫은 티 팍팍 내며 말 한마디 안 하고 그렇게 레코딩을 했다.

그래도 반응이 정말 좋았다.
도현 : 음반을 내자마자 그 곡이 터졌다. 거의 이효리의 ’10 minutes’와 맞붙을 정도였으니 말 다 한 거 아닌가. 그래서 더 오랜 시간 일상에게 미안함이 있었다. 사랑을 많이 받은 노래니 자연스레 무대에서 부르기도 많이 불렀는데 그때마다 일상이 떠올랐다. 뒤늦게나마 진심으로 내 마음을 전했다. 고맙게도 이해해주더라. 10년 묵은 응어리를 시원하게 풀었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2002년 ‘오 필승 코리아’로 주류 밴드가 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진원 : 앞서 스캇이 말했던 ‘정글 스토리’의 음반이 1996년 6월에 나왔고 그 전에 도현이 1집이 1994년도에 발매됐다. 이후 < 한국 록 다시 부르기 >로 살짝 주목 받은 게 1999년이니까 오래 걸리긴 했다. (웃음)

그렇게 먼 길을 돌아온 정규 10집이다. 음악적 성과가 있다면 뭘까?
도현 : 음악적 성과는 잘 모르겠다. 우리는 과거나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도 아니고 지금 이 순간만 직시한다. 그래도 굳이 성과를 꼽자면 이 앨범을 통해 다음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단 거다. YB의 히스토리는 계속된다!

인터뷰 : 임진모, 김도헌, 박수진, 임선희, 임동엽 
정리 : 박수진
사진 : 디컴퍼니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