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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R.I.P. 반겔리스, 소리의 모험가를 떠나보내며

5월 17일, 코로나19가 또 하나의 귀중한 음악적 자산을 앗아갔다. 프로그레시브 록, 재즈, 심지어는 앰비언트까지 섭렵하며 전자음악의 선구자로 불리던 반겔리스가 향년 79세의 나이로 세상과 작별했다는 소식이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룹 포밍스(The Forminx)와 아프로디테스 차일드(Aphrodite’s Child)를 거치며 1970년대부터 솔로 활동을 벌인 그는 영화 음악을 비롯해 다양한 프로젝트에 폭넓게 참여한 종합 음악인으로, 국내에서는 2002 한일 월드컵의 주제곡인 ‘Anthem’을 선물한 작곡가로 알려져 있다. 그를 추모하는 의미에서 커리어와 대표작을 소개한다. 아티스트를 이미 알고 있던 이들에게는 추억할 수 있는, 처음 들어보는 독자들에게는 그의 음악을 새로이 탐구할 수 있는 글이 될 것이다.

본명은 에반겔로스 오딧세이 파파타나시우(Evangelos Odysseas Papathanassiou). 훗날 전세계에서 유명세를 떨치며 우주로도 뻗어 나간 뮤지션의 시작점은 그리스의 작은 항구도시 볼로스였다. 1943년 태어나 어린 나이부터 피아노를 만지며 음악에 관심을 보인 그는 체계적인 교육을 따르는 대신 독창성을 빚어냈고, 1963년에는 5인조 밴드 포밍스를 결성해 일렉트릭 오르간을 맡았다. 전통 음악이 우세하던 당시 그리스에 재즈와 록 등의 서구적인 사운드를 도입한 ‘Jeronimo Yanka'(1964) 등의 싱글로 새 바람을 몰고 왔다.

인기에 힘입어 국제 무대에서의 홍보 방안으로 다큐멘터리 또한 제작되었으나 제작진의 분쟁으로 촬영이 중단되었고, 그 영향으로 밴드 또한 최고 전성기인 1966년 해체를 알리게 된다. 이후 군사정권의 쿠데타를 피해 프랑스로 거처를 옮긴 그가 만든 팀이 바로 아프로디테스 차일드다. 루카스 시데라스와 아이돌스(Idols)라는 그리스 밴드에서 활동했던 데미스 루소스가 합류한 그룹은 요한 파헬벨의 ‘Canon’을 차용한 싱글 ‘Rain and tears'(1968)로 여러 유럽 국가에서 히트를 거두며 명성을 얻었다.

첫 앨범 < End Of The World >(1968)의 뒤를 이어 애절한 선율 덕에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은 싱글 ‘I want to live'(1969)와 ‘It’s five o’clock'(1969), ‘Spring, summer, winter and fall'(1970) 등이 연속적으로 흥행에 성공했다. 2집 < ‘It’s Five O’Clock’ >(1969) 이후 병역 문제로 활동하지 못한 초기 멤버 실버 쿨루리스가 다시 합류해 4인조가 된 밴드는 상업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레코드사가 발매를 막는 상황에서도 2년에 걸친 작업 기간 끝에 < 666 >(1972)를 완성시켰다. 기존의 팝적인 색채를 대부분 들어내고 사이키델릭/프로그레시브 록의 요소를 대거 투입한 음반은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극찬과 더불어 지금까지도 컬트 명반으로 남아있다.

팀이 해체된 후 리드 보컬이었던 데미스 루소스가 ‘We shall dance'(1971), ‘Goodbye, my love, goodbye'(1973) 등으로 차트를 휩쓸며 곧바로 승승장구한 것과 달리 반겔리스는 상업성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1970년대 중반, 런던으로 이주한 그는 본인이 설립한 네모(Nemo) 스튜디오에서 전위적인 신시사이저 사운드를 선보인 < Heaven And Hell >(1975)을 발매하며 로열 앨버트 홀 공연을 매진시켰고, 프랑스의 다큐멘터리 감독 프레데릭 로시프(Frédéric Rossif)의 작품에 사운드트랙을 제공하면서 영화 제작자들의 주목을 샀다.

1980년대, 마침내 < 불의 전차 > OST가 제3의 부흥기를 몰고 왔다. 오케스트라 위주로 편성하던 기존의 관습에서 벗어나 신시사이저를 중추로 하여 만든 사운드트랙은 1981년 빌보드 앨범과 싱글 차트에서 모두 1위를 기록했다. 이듬해 아카데미 시상식의 영화음악 부문도 그의 차지였다. 다양한 영화사에서 러브콜을 보냈고, 리들리 스콧 감독의 < 블레이드 러너 >에 참여하면서 미래 디스토피아 사회를 생생하게 묘사한 음악으로 극찬을 받았다.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다큐멘터리 < 코스모스 >에 < Heaven And Hell >의 수록곡을 삽입하기도 했다.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예스(Yes)의 보컬 존 앤더슨과 듀오 존 앤 반겔리스(Jon and Vangelis)를 결성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다.

좌 < 불의 전차 >(1981), 우 < 블레이드 러너 >(1982)

쾌거는 다양한 영역으로도 이어졌다. 1997년 아테네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에서는 무대 지휘를 맡았고 2000년 시드니 하계 올림픽 폐막식에서는 감독 자리에 올랐다. 2002년에는 한일 월드컵의 공식 주제가로 한국과 인연을 맺기도 했다. 우주로도 눈길을 돌린 뮤지션은 나사의 2001 마스 오디세이 탐사선 프로젝트를 위한 < Mythodea >(2001), 유럽 우주국 ESA의 탐사선 로제타의 추류모프-게라시멘코 혜성 착륙을 기념하며 < Rosetta > (2016) 등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영감을 줬다”라는 ESA의 추모사처럼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어지며 확장과 쇄신을 거듭한 커리어는 많은 후배들에게도 귀감이 되었다. 유명 영화음악 작곡가인 한스 짐머는 반겔리스를 가장 좋아하는 아티스트로 꼽았고, 같은 그리스 출신이자 뉴에이지 장르를 대표하는 야니는 스스로 그의 팬을 자처하기도 했다. 국내 아티스트 중에서는 윤상이 그의 음반을 듣고 음악에 대한 꿈을 키웠다고 밝힌 바 있다.

< 불의 전차 >에서 주인공은 난관을 겪지만 소신을 지킨 끝에 결국 값진 승리를 얻어내는 인물이다. 반겔리스의 일대기도 비슷하다. 다른 외부적인 요인에 개의치 않고 좋은 음악을 만들겠다는 일념을 지킨 끝에 많은 이들의 마음에 각인되었으니 말이다. 성실함이 미덕의 자리에서 조금 물러난 시대,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 정신의 숭고함은 끝까지 이어진다. R.I.P. 반겔리스.

“꼭 들어야 할 반겔리스 음악 10곡”
‘Rain and tears’ (아프로디테스 차일드, 1968)
‘I want to live’ (아프로디테스 차일드, 1969)
‘It’s five o’clock’ (아프로디테스 차일드, 1969)
‘Spring, summer, winter and fall’ (아프로디테스 차일드, 1970)
‘La petite fille de la mer’ (< L’Apocalypse des animaux > 사운드트랙, 1973)
’12 o’clock’ (< Heaven and Hell > 파트 2, 1975)
‘Chariots of fire'(< 불의 전차 > 사운드트랙, 1981)
‘Polonaise’ (존 앤 반겔리스, 1983)
‘End title’ (< Blade Runner > 사운드트랙, 1994)
‘Anthem’ (한일 월드컵 공식 주제가,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