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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 래 젭슨(Carly Rae Jepsen) ‘The Loneliest Time’ (2022)

평가: 3.5/5

2010년대 컬트 클래식에 등극한 < Emotion >부터 수준급의 작품을 꾸준히 내놓았던 칼리 래 젭슨의 음악은, 팝의 이상향에 무척이나 가까웠던 탓에 본인만의 캐릭터가 개입할 여지는 부족했다. 보편적인 심리를 자극하여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감동을 제공한 것이 다른 측면에서는 중심에 선 화자의 존재를 모호하게 만드는 이유였다. 전 인류가 함께 외로웠던 시간을 거쳐 나온 < The Loneliest Time >은 비로소 이 물음에 응한다. 신보는 음악적인 비전을 넘어 ‘칼리 래 젭슨이 누군지’에 대한 답변이다.

‘그대와 함께 솔직해지고 싶다’는 첫 트랙 ‘Surrender my heart’의 끝 문장처럼 가사 곳곳에서는 뮤지션이 처했던 상황이 투영되어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할머니의 임종에 함께하지 못했던 슬픔은 ‘Western wind’의 따스한 재회의 소망으로,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았던 데이팅 앱에서의 경험은 냉소적이고 코믹한 ‘Beach house’로 나타난다. 많은 이들이 팬데믹 상황을 해방의 댄스 음악으로 극복하려 했을 때, 복고 트렌드의 선두 주자는 이를 자아 표출의 기회로 돌렸다.

자전적인 고찰은 가사에만 그치지는 않는다. 자신에게 큰 영향을 끼친 루퍼스 웨인라이트와 듀엣을 펼치는 타이틀곡에서는 디스코와 더불어 전직 브로드웨이 신데렐라 배우로서 뮤지컬 문화에 가진 지대한 사랑이 묻어 나온다. 특유의 명랑함을 덜어내고 대체로 고요하게 가라앉힌 전체적인 분위기는 ‘잘하는 것’을 넘어 ‘하고 싶은 것’을 추구한 산물이다. 여기에 더해 언뜻 테임 임팔라를 닮은 ‘Anxious’의 비범한 분위기는 ‘할 수 있는 것’까지 제시하며 또 다른 잠재력을 보여준다.

‘Talking to yourself’를 위시한 낯익은 업비트 팝과 차분한 미디엄 템포 트랙의 공존은 조금만 더 대담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낳는다. 개별적인 퀄리티와는 별개로 구심점이 분명하지 않은 탓에, 2년간의 겨울을 끝내고 지상으로 올라온 데메테르의 작품은 추수의 결과물보다 아직 씨를 뿌리는 과정에 가깝다. 과도기적인 특성상 전통을 따라 1년 후 발매가 사실상 확정된 사이드 B가 보여줄 달의 이면보다는 다음 프로젝트가 더 중요해 보인다.

팝의 모범 교과서가 된 < Emotion >, 장르의 생존전략을 제시한 < Dedicated >에 비해 확연히 가라앉은 < The Loneliest Time >은 저 멀리 명확한 목표를 설정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의 뮤지션을 드러낸다. 서른 중반, 약 15년의 커리어에서 필연적으로 다가온 탐색의 시점에서 침착하게 빚어낸 음반은 그저 범작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중요한 분기점이다. 칼리 래 젭슨의 ‘음악’에서 ‘칼리 래 젭슨’의 음악으로, 무게추가 조금 당겨졌다.

-수록곡-
1. Surrender my heart
2. Joshua tree
3. Talking to yourself
4. Far away
5. Sideaways
6. Beach house
7. Bends
8. Western wind
9. So nice
10. Bad thing twice
11. Shooting star
12. Go find yourself or whatever
13. The loneliest time (Feat. Rufus Wainwright)
14. Anxious
15. No thinking over the weekend
16. Keep aw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