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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10곡 특집 Feature

라디오 PD들의 ‘내 인생의 음악 10곡’ – #20 이선아 PD

이즘이 2021년 개설 20주년을 맞아 지난해부터 특집 기획으로 연재해온 라디오 방송 프로듀서 20인의 < 내 인생의 음악 10곡 > 이 어느덧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마친다니 참 아쉽습니다. 15년 이상 이력의 방송 프로듀서들이 전한 신선한 선곡과 해설이 모처럼 독자들의 관심을 모으면서 호평이 이어졌습니다. 원고 작성에 애쓰셨을 PD 분들에게 다시 한 번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마지막 스무 번째는 SBS 이선아 프로듀서가 장식해주셨습니다.

‘그가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 필요했던 유일한 증거는 음악이었다’. 오래전 커트 보니것의 에세이를 읽다가 마주친 문구였는데, 여태껏 이보다 음악의 신비로운 힘을 근사하게 표현한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강산이 두 번 바뀌어도 변함없이 라디오PD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듣는 귀가 뛰어나지도 않고, 내세울 만한 음악적 식견 따위는 없다. 다만, 한 가지 ‘부심’이 있다. 음악 안에서 일하는 나는 보통 직장인보다 훨씬 더 자주, 더 즐겁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신의 존재’를 느끼며 살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 < 사운드 오브 뮤직 > ‘Do re mi’
정신분석 상담을 시작할 때  ‘생애 최초의 기억이 뭔가요?’ 라는 질문을 던진다고 한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기억의 퇴적층을 주의 깊게 살펴보게 하는 준비운동 같은 질문이다. 비슷한 방식으로 음악에 대해 자문해봤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Do re mi는 유년시절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마들렌 같은 곡이다. TV에서 처음 ‘사운드 오브 뮤직’을 봤는데, 유치원에서 배운 동요가 알아들을 수 없는 꼬부랑 언어로 흘러나와 큰 충격을 받았다. 게다가 마리아 수녀와 일곱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화음은 처음 들어보는 종류의 아름다움이었다.

영화가 끝난 후 어머니에게 도레미송이 다시 듣고 싶다고 떼를 쓰자, 어머니는 방송국에서 영화를 틀어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타이르셨다. 하염없이 기다렸지만 허사였다. 많은 시간이 흐른 뒤 OST를 선물 받고 나서야 이 노래를 질릴 때까지 들을 수 있었다. 음악이란 쉽게 얻을 수 없는 귀한 대상이라는 인식을 심어준 최초의 경험이었다. 음악이 흔해 빠진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지만, 이 노래를 방송에 틀 때마다 그 첫 마음이 떠올라 기분이 풍선처럼 날아오른다.

Nirvana ‘Come as you are’
또 너바나야? 하시겠지만, 너바나를 빼고 간다면 스스로를 속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너바나의 명반 < Nevermind >에 수록돼 있는 ‘Come as you are’는 내 기억 속에 ‘불가항력’이라는 단어로 저장돼 있다. 아무리 뿌리치려 해도 더 깊숙이 빠져드는 개미지옥 같은. 10대 시절, 주말이면 MTV Asia 케이블 채널을 틀어놓고 각종 뮤직비디오를 섭렵하는 데 몰두했다. 그러다 너바나의 언플러그드 공연을 보게 됐다. ‘Come as you are~’ 떡 진 머리의 커트 코베인이 쇳소리로 내뱉는 첫 소절을 듣는 순간, 너바나의 음악으로부터 영영 도망칠 수 없음을 직감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후렴구 ‘I don’t have a gun~’을 따라 부르면서 보냈는지 모른다. 이 노래는 침대에 대자로 누워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불러야 제맛이었다. 니체가 ‘근육으로 음악을 듣는다’고 했는데, 이 음악이 딱 그랬다. 음악이 몸을 통과할 때, 감정은 물론 표정, 자세, 생각, 태도까지 바꿀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깨달았다.

패닉 ‘기다리다’
불온하고 어두운 앨범 재킷 디자인에 끌려 패닉 2집을 사서 들은 이후, 패닉의 음악에 빠져들었다. 1집 앨범은 뒤늦게 샀는데, 1집에 비해 2집의 완성도와 실험정신이 업그레이드된 걸 확인하고선 팬으로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1,2집을 통틀어 가장 많이 들었고, 기회가 날 때마다 선곡하는 노래는 1집의 ‘기다리다’이다. 단순한 기타 반주에 이적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차분하게 톤 다운 되어 ‘익숙해진 손짓과 앙금 같은 미소만 희미하게 남은’ 기다림을 읊조린다. 이 노래는 언제 들어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과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장소를 그리워하게 되는 묘한 경험을 안겨준다.

이 세상엔 매력적인 뮤지션이 넘쳐난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믿고 듣는 뮤지션’이 된다는 건 결코 평범한 관계가 아니다. 이적은 내게 그 평범치 않은 곁을 내준 아티스트다. 얼마 전 이적의 새 앨범 <흔적>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으면서, 그와 동세대인으로 함께 나이 들어갈 수 있어 참 고맙다는 생각을 다시금 했다. 새 앨범에 수록된 ‘준비’라는 곡을 듣고선 내 속을 들켜버린 느낌이었는데, 푸른 마음으로 들었던 ‘기다리다’에 대한 세월의 화답 같기도 해서 혼자 서글퍼졌더랬다.  

어떤날 ‘하늘’
신입 PD 시절, 한 선배가 어떤날을 좋아하냐 물었다.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고 답했더니 선배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훌륭한 음악이니 꼭 한번 찾아 들어보라 했다. 나는 음반실에서 CD를 찾아 방송에 트는 마지막 세대였고, 음반실은 참새 방앗간 같은 공간이었다.

그날도 음반실에서 퇴근길에 빌려 갈 앨범들을 뒤적거리고 있었는데, 어떤날 1집 < 1960ㆍ1965 >가 눈에 들어왔다. 선배의 추천이 생각나 얼른 대출을 신청했고, 지금은 사라진 30번 좌석버스 안에서 이어폰을 끼고 1번 트랙 ‘하늘’을 들었다. 마지막 트랙인 ‘오후만 있던 일요일’까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조동익과 이병우가 들려준 세계는 맑고 섬세했다. 완전히 새로운 감수성의 발견!

누구에게나 원형의 음악이 있다. 특정 감성에 눈뜨게 하고, 취향의 밑그림을 그리는 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음악 말이다. 2001년 어느 겨울날 ‘하늘’이 활짝 열어젖힌 감수성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장필순, 토이, 재주소년, 루시드폴, 옥수사진관, 언니네이발관, 브로콜리너마저, 팻 매스니(팻 매스니가 어떤날 멤버들에게 영향을 준 것이겠지만, 내겐 순서가 뒤바뀌어 있다) 등 수많은 아티스트와 연결을 가능케 해주었다.    

U2 ‘I still haven’t found what I’m looking for’
U2의 정규 5집 < The Joshua Tree >는, 내게 U2의 세계를 알려준 동시에 록음악을 본격적으로 찾아듣게 한 기념비적인 음반이다. (이 음반이 발매된 지 10년 후인 1997년에서야 처음 듣게 되었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U2가 드디어 2019년 첫 내한공연을 했다. 그것도 < The Joshua Tree > 음반 발매 30주년을 기념하는 콘셉트로 말이다.

앨범에 수록된 순서와 똑같이 공연에서도 ‘Where the streets have no name’에 이어 ‘I still haven’t found what I’m looking for’ 전주가 흘러나왔다. 이 노래를 라이브로 듣다니, 온몸에 전율이 일어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완벽한 몰입의 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공연을 보다가 흥분에 휩싸인 현기증을 느꼈던 게 언제였던가. 공연 관람은 업무의 연장선이 될 때가 많았다. 프로그램 게스트를 응원하기 위해, 대중음악계 트렌드 파악을 위해, 이번에 못 보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온갖 이유가 덧대어졌다. 아무 이유 없이 무조건 좋은 느낌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날 선 똑똑함보다 따뜻한 친절함에 끌리고, 다른 곳을 꿈꾸기보다 내 자리를 성실하게 지키는 것의 미덕을 아는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이 노래를 들을 때만큼은,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고 욕망으로 허기졌던 스무 살의 나로 돌아갈 수 있어 반갑고, 애잔하다.  

David Bowie ‘Space oddity’
우주에 가면 상하, 종횡, 고저의 개념이 통하질 않는다고 한다. 우주에서 유효한 방향은 오직 안쪽과 바깥쪽이다. 나와 나 아닌 세계가 있을 뿐이다. 외부와 연결되고 싶은 갈망과 완벽한 고독의 추구가 길항하는 텅 빈 공간. 데이비드 보위는, 인간이 달에 착륙하기 며칠 전에 ‘Space oddity’를 발표했다.

그가 이미 우주에 다녀온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우주의 적막과 우주인의 고립감을 기가 막히게 표현했다. ‘Space oddity’는 가상의 캐릭터 우주비행사 톰 소령과 지구 관제소 간의 교신 내용을 담고 있다. 텅 빈 공간을 떠도는 톰 소령은 ‘지구는 푸르고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마지막 메시지를 남기고 사라진다.

이 노래가 각별한 이유는, 내 일의 아름다운 면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꼭 우주에 가야만 톰 소령을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 모두에겐 바깥세상과 소통하고 싶으면서도 자신만의 세계에서 달팽이처럼 웅크리고 싶은 톰 소령의 이중성이 있다. 라디오방송은 뭐랄까. 특정할 순 없지만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이 분명한 톰 소령들에게 교신을 시도하고, 그들의 외로운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 아닐까 싶다. 물론,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하는 게 포인트다.

장기하와 얼굴들 ‘그때 그 노래’
2012년 봄, < 장기하의 대단한 라디오 >라는 심야 프로그램을 론칭했다. DJ 장기하와 함께 동틀 때까지 술도 많이 마시고, 공개방송과 요상한 특집도 참 많이 했다. CP가 적당히 눈감아 준 덕분에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쉰, 조이 디비전, 토킹 헤즈, 도어즈, 세인트 빈센트 류의 ‘비대중적인’ 음악을 마구 틀어댔다. 열정과 체력이 콸콸 넘치던 때였다.

장기하와 얼굴들 2집 ‘그때 그 노래’는 장기하도 좋아하고, 나도 좋아해서 방송에 정말 많이 튼 노래다. 산울림의 ‘너의 의미’를 듣다가 단숨에 써 내려간 곡이라는데, 장기하 특유의 힘을 뺀 창법이 관조적인 응시와 어우러져 여백의 미를 극대화한다. 무방비 상태로 들었다간 ‘그 많고 많은 밤들이 한꺼번에 생각나’  잠 못 이룰지도 모른다.

내가 겪은 장기하는, 황량한 사막에서도 자신만의 북극성을 올려다보며 길을 찾아갈 흔치 않은 고집의 뮤지션이다. 가장 나답게 살기 위해 아무것도 안 할 수 있는 사람. 무언가를 더하기보다 무언가를 빼는 게 중요하다는 걸 잘 이해하고, 삶과 음악에 적용하는 고수. 그와 함께한 시간은 어느덧 이 노래와 함께 내 인생의 ‘화양연화’가 되었다.  

아케이드 파이어(Arcade Fire) ‘Wake up’
음악은 다양한 정서를 일으킨다. 어떤 마음의 상태로 들어가고 싶을 때 음악을 적극 활용하는 편이다. 실력보다 의욕이 앞서던 십수 년 전, 새 프로그램을 준비하다가 실패를 겪고 자존감과 자존심이 동반 추락해 우울감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때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준 노래가 바로 아케이드 파이어의 ‘Wake up이다.

지금까지도 관성에 젖어 나태해질 때, 일을 하다가 조직의 쓴맛을 볼 때, 심기일전하고 전투태세를 갖춰야 할 때 이 노래를 반복적으로 들으면서 마음을 다잡는다. 도입부의 ‘아~ 아’  부분만 들어도 온몸의 세포가 바짝 긴장하는 듯하다. 음악의 주술적인 힘이 이런 건가 싶다. 이 노래가 실려 있는 < Funeral > 앨범은 버릴 곡이 하나도 없다.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낸 밴드 멤버들의 이별의 경험을 밑바탕에 깔고 있는데, 슬픔, 애도, 그리움, 희망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들이 듣는 이의 마음에 스며들어 묘한 고양감을 자아낸다.

글렌 굴드 ‘골드베르크 변주곡 아리아’
‘클알못’이지만 자주 손이 가는 클래식 음반이 몇 장 있다. 그중에서도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앨범(1981년)을 가장 아낀다. 글렌 굴드는 생전에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을 두 장 냈다. 그를 20세기를 대표하는 천재 피아니스트 반열에 올려준 첫 앨범도 골드베르크이고,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마지막으로 녹음한 앨범도 골드베르크이다. 1981년 버전은 1955년의 것보다 느리게 연주되었다. 생기는 덜하지만 좀 더 명상적이고 묵직한 통일성이 느껴진다.

주체할 수 없다는 듯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글렌 굴드의 허밍은 비를 부르는 먹구름 같기도 하고, 밤하늘을 긋는 유성우 같기도 하다. ‘아리아’부터 ‘아리아 다 카포’까지 한 바퀴 듣고 나면, 종교적인 체험을 한 것 같은 기분이라 영원과 소멸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윤상 소년’
두 살 터울의 언니는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초등학생이었던 나와 구별짓기를 시도하기 위해 방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방에 몰래 침입해 책상을 기웃거리고 나서야 그녀가 윤상의 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언니가 하는 건 다 좋아 보이던 시절이었기에, 나도 윤상의 음악에 입문했다. 윤상의 사운드와 박창학의 노랫말의 조합은, 알듯 모를 듯해서 더욱 매혹적인 어른의 세계를 엿보게 해주었다. 지금도 가끔 그때를 돌이켜 보며, 일찌감치 탁월한 뮤지션을 알아본 언니의 선구안에 감탄하곤 한다.

윤상 2집에 수록된 ‘소년’은 E.O.S 보컬로 활동 중이던 김형중이 불렀다. 기교는 불완전하나 무구함이 느껴지는 김형중의 목소리가 어른의 세계를 탐하던 내 마음과 공명을 일으켰다. 흠… 그러고 보니 이 노래는 삶은 거대한 농담이란 내 오래된 믿음을 증명하기도 했다.

*프로필
SBS 이선아PD (porfavor@sbs.co.kr)
2001년 라디오PD로 SBS 입사 < 장기하의 대단한 라디오 > < 정지영의 스위트뮤직박스 > < 이숙영의 파워FM > < 박선영의 씨네타운 > < 최화정의 파워타임 > 등 다수 연출. 2021년 2월부터 < 박소현의 러브게임 >을 10년 만에 다시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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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10곡 특집 Feature

라디오 PD들의 ‘내 인생의 음악 10곡’ – #9 오지영 PD

이즘이 내년에 개설 20주년을 맞습니다. 이를 앞두고 여러 특집 기획을 준비하고 있는데요, 그 일환으로 라디오 방송 프로듀서 20인의 < 내 인생의 음악 10곡 >을 마련해서 현재 연재중입니다. 라디오는 음악과 동의어라는 편집진의 판단에 따라 기획한 시리즈지요. 모처럼 라디오 방송의 프로듀서들이 전해주는 신선한 미학적 시선에 독자 분들이 좋은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이 시리즈에 선뜻 응해주시고 선곡에 대한 좋은 글을 써주신 프로듀서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이즘 독자 분들에게도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각 방송사의 라디오국에서 음악 프로를 관장하며 15년 이상의 이력을 가진 20인 PD의 ‘인생 곡 톱10’입니다. SBS 라디오 오지영 프로듀서가 아홉 번째 순서를 맡습니다.

휴대폰에 있는 ‘플레이 리스트’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한다. 지금 나의 플레이 리스트엔 프로그램 선곡을 위한 곡들이 채워져 있어, 나의 노래가 아닌 청취자의 신청곡이 대부분인데, 내가 골라보는 내 인생의 노래는 무엇일까 이 자리를 빌어서 골라본다. 나로서는 처음 해보는 지극히 개인적인 플레이 리스트가 되겠다.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 / Billie Jean

초등학교 시절 < 서울국제무역박람회 >(지금은 ‘엑스포’) 견학을 갔다. 지금 삼성동 무역센터 자리가 벌판이던 시절 거대한 천막 같은 걸 쳐 놓은 전시장이었다. 미래의 세상엔 세끼 밥 대신 알약을 먹는다, 집에 있는 엄마랑 화면으로 통화를 할 수 있다.. 외출해서 집에 있는 전기밥솥을 켤 수도 있다…는 당시로서는 공상과학 영화 같았던 미래전시관을 지나 큰 공터에서 마이클 잭슨의 뮤직비디오가 상영되고 있었다. 음악이 좋았던 건지 거대한 화면과 큰 스피커에서 나오는 스테레오 음향에 압도된 건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쿵쾅대는 비트에 날렵하고 섬세하게 춤추던 마이클 잭슨의 ‘빌리 진’이 내 음악 덕질 인생의 짜릿한 오프닝이었던 건 확실하다.

아버지는 그 전축으로 여러 종류의 음악을 들으셨다. 클래식이 많았고 최신 가요 음반도 종종 사 들고 오셨는데 팝 음반은 별로 기억에 없다. 그런데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팝송을 즐겨 부르신 걸 보면, 분명 열심히 들으셨겠지.

아버지 친구 분 가족들과 함께 버스를 대절해서 어딘가 놀러갔을 때, 버스 안에서 아버지가 차내 마이크를 들고 불렀던 곡은 폴 앵카의 다이애나(Diana)였다. I’m so young and you’re so old.. 내가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알게 된 ‘팝송’이었다. 아버지의 노래는 나름의 ‘겉멋’이 잔뜩 들어간, 당시의 나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의 발산처럼 느껴졌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좀 멋진 아버지 같기도 하다. 지금은 아버지도 나도 젊지 않고(아버지는 몇 년 전 돌아가셨다), 노래 속 폴 앵카만 영원히 열 여섯 살이다.

안전지대 / Friend

중학교 시절에는 J-POP에 미쳐있었다. 요즘처럼 여중생이 빠질만한 아이돌이 없었던 그때, 일본의 소년대는 BTS 이상이었다. 히가시야마 노리유키의 사진을 구하러 압구정동 어느 골목 좌판에 갔다가 주인아저씨가 권해준 테이프까지 사왔다. 정식 앨범이 아니고 튜브, 안전지대, 사잔 오르 스타즈(Southern All Stars), 쿠도 시즈카 등의 노래들을 엮어놓은 리어카 테이프였다. 테이프 표지엔 알지도 못하는 일본어로 노래제목과 가수가 개발 새발 쓰여 있고 곡의 순서와 맞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음질은 또 왜 이렇게 안 좋은지… 그 와중에 테이프 B면 중간에 있었던 ‘사요나라 다케..’로 시작하는 이 노래를 돌리고 돌려가면서 다시 들었다. 워크맨 이어폰을 통해 타마키 코지는 속삭이며 노래를 불렀고 그렇게 나는 소년대를 탈덕, 안전지대의 타마키 코지로 입덕을 시작해 J-POP의 세계에 더 깊이 빠져든다.

자드(Zard) / 키미가 이나이

이어지는 J-POP 얘기. PD생활을 하던 때 일본문화 개방이 돼서 운좋게도 ZARD의 콘서트에 초대를 받았다. 비행기 티켓과 체재비, 부장님 눈치가 보이는 휴가가 필요했지만 방송활동도 거의 없는 ZARD의 팬이었기에 동료 몇 명과 1박 2일의 일정으로 호기롭게 떠났다. 공식적인 전국투어로는 처음이었던 이 공연에서 ZARD는 혼자 서서 미동도 없이 노래만 불렀다. 오프닝 곡이었는지 아니었는지 생각은 나지 않지만, 암전된 무대에서 ‘키미가 이나이~’하고 그녀의 청량한 목소리로 인트로가 나오고 조명이 켜지던 순간 잊고 있었던, 나의 20대가 소환되어 가슴이 떨렸다.

그날 밤 함께 간 동료들과 신주쿠 어디에선가 들뜬 목소리로 떠들어대며 맥주를 마셨고 그 다음날 숙취에 늦잠을 자고 비행기를 놓치기까지 했다. 몇 년 후 그녀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듣고 그 날의 동료 PD와 그 밤 신주쿠 선술집의 텐션을 함께 추억했다. 작년 언젠가 딸내미와 ‘명탐정 코난’ 극장 판을 보다가 엔딩에 주제가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관심도 없는 딸에게 ‘쟈도’에 얽힌 나의 추억담을 한 바가지 들려줬다.

박광현 / 한 송이 저 들국화처럼

중학교 시절 MBC 라디오 < 이수만의 팝스 투나잇 >을 열심히 들었다. 그 프로그램의 백일장 이벤트에서 장원을 한 여자 분이 전화연결이 됐는데 자신이 가수 박광현의 누나(여동생?)라고 했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의 PD 라는 사람이 나와 백일장의 심사과정 등을 들려줬다. < 이수만의 팝스 투나잇 >이라면 이수만 DJ 혼자 다 하는 줄 알았는데… PD가 있고 작가가 있고 국장님이 있는 거였다. 그때부터 라디오 PD에 대한 동경이 생겼던 것 같다.

글렌 메데이로스(Glenn Medeiros)의 음반을 가장 먼저 받아볼 수 있고 , 내가 좋아하는 박광현 가수의 누나랑 통화도 하는 멋진 사람. 백일장 행사의 대장정을 마치며 들려준 박광현의 ‘한 송이 저 들국화처럼’은 코를 처박고 들었던 ‘라디오 트랜지스터’ 너머 ‘라디오 방송국’ 세계의 문을 살짝 열어본 그 순간의 배경음악이다.

유재하 / 우울한 편지

여고생 시절, 세련되고 이쁘고 좀 노는 친구가 있었다. 영화나 음악도 아는 게 많아서 부러웠는데 이 모든 게 대학생 언니가 있어서 그런 거라고 나는 믿었다. 어느 날 자기 언니가 다니는 학교 오빠의 음반이라며 유재하의 음반을 빌려줬는데 지르거나 뽐내지 않는 담백한 목소리가 정말 대학생 오빠 같았다. 이 친구와 유재하 얘기를 하려고 이 친구 수준에 맞춰 동네 햄버거 집에서 콜라도 많이 사줬다. 그러다가 어느 날 유재하의 사고 소식을 듣고 둘이 통화하며 어찌나 울었던지…울면서 “나는 ‘우울한 편지’가 제일 좋아..” “난 ‘지난날’이 좋더라..” 이러면서 둘이 꺽꺽댔던 기억이 있다.

그 후 <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 음반도 빠짐없이 사서 들었는데 이 대회의 기획자이자 유재하의 친구인 한봉근 PD는 < 이수만의 팝스 투나잇 > 담당PD로 나를 라디오키드로 만드는데 큰 공을 세우신 분. 후에 < 수요예술무대 >를 연출하실 때 이촌동 어느 상가 지하 식당에서 만나 뵙고 큰 절 올리고 인사를 드렸다. 그 때 “라디오 재밌지요? 열심히 해요~” 하고 수줍게 말씀해 주셨는데…
그냥 재밌게 하고 있습니다. 선배님!

김현철 / 오랜만에

< 월간 팝스 >를 옆구리에 끼고 허세 꾀나 부리던 내게 같은 학원에 다니던 남학생이 잉위 맘스틴(지금은 잉베이 라고 부르는)의 앨범을 던져주듯 주고 뛰어갔는데 난 그걸 김현철 1집으로 바로 바꿨다. 참새방앗간처럼 들르던 동네 음반가게 < 페니 레인 > 언니가 이 음반을 보더니 깔깔 웃으며 잉위 오빠 음반이 너에게 갈 선물이었냐 한다. 언니는 동아뮤직에서 나온 괜찮은 신인의 음반을 추천해주었고 나는 이 음반에 홀딱 빠져 그 해 가을.. CD가 닳도록 들었다. 잉위를 버리고 내가 택한 김현철! ‘동네’, ‘비가와’, ‘춘천 가는 기차’ ..3곡을 좋아하긴 했지만 음반의 첫 곡 ‘오랜만에 ‘ 흐흐흥~ 빠암~하는 도입부분은 여전히 심쿵 포인트.

밀리 바닐리(Milli Vanilli) / All or nothing

팝을 주로 듣던 시절 큰 충격이었던 가요음반이 김현철 1집이었다면 그해의 충격적인 팝음반은 밀리 바닐리 1집이었다. 잘 생긴 두 청년이 토끼춤을 추는 뮤직비디오와 세련된 리듬의 노래로 여고생의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나의 팝송 메이트 지영이(그녀는 전지영)에게 당당하게 소개할만했다. 언제나 멋진 음악을 나보다 먼저 듣고 소개해줬던 지영이도 그들의 음악(비주얼?)에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그들이 립싱크 가수였다는 폭로가 터진다. 찰떡 호흡 두 지영이들이었지만, 서로 선호 가수가 달라 휘트니 휴스턴 VS. 머라이어 캐리 , 마돈나 VS. 신디 로퍼 , 티파니 VS. 데비 깁슨…등으로 갈려 신경전이 있기도 했던 참에, 간만에 이룬 대동단결이었건만…별 시덥지 않은 가짜들에 혼이 나갔던 그간의 열정이 부끄러워 지영이들은 그 얘기를 대놓고 하지도 못하고 데면데면하다 멀어진다.

빛과 소금 / 그대 떠난 뒤

너무 아끼던 테이프였다. 친구에게 빌려줬다가 받아오는 길에 주머니에서 열쇠꾸러미와 엉켜 다 망가지고 말았다. 다시 살까 망설이다 못 샀는데 나중에 대학생이 되고 남친이 이 얘기를 듣고 CD로 선물해줬다. 이 남친과 헤어진 나를 내 친구가 불쌍히 여겨 대학로에서 하던 빛과 소금 콘서트에 데리고 가주었는데 이 노래를 들으며 얼마나 울었던지… 나의 행복한 현재 생활과는 전혀 상관없는 울적한 이야기이니 짧게 남기겠다.

MC몽 (ft.박정현) / 죽도록 사랑해

많은 DJ와 프로그램을 만들었지만 내가 원하는 DJ와 , 하고 싶은 색깔의 프로그램을 론칭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당시 나를 믿어주었던 구경모 CP가 나의 기획에 힘을 실어주었고 MC몽은 너무나 바빠서 생방송을 할 일정이 안 됐지만 긴 고민 끝에 수락해줘서 ‘MC몽의 동고동락’은 시작됐다. 신인 시절부터 알아온 서로에게 믿음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라디오를 사랑한 MC몽의 의지가 컸다.

TV 예능과 라디오 스케줄까지 빡빡했는데 그 와중에 앨범 < Show’s Just Begun >을 냈다. 취재 명목으로 녹음 스튜디오까지 따라가서 이 노래를 들었는데 말캉말캉한 박정현의 목소리까지 섞인 노래의 제목이 ‘죽도록 사랑해’란다. 함께 간 제작진과 제목이 이게 뭐냐고 놀려대긴 했지만 , 언제나 그랬듯 세련되지 않은 그의 노랫말들이 꾸밈이 없어서 내심 참 좋았다.

산울림 /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 아름다운 이 아침 >의 새 DJ로 결정된 김창완 님과 첫 미팅을 앞두고 음반실에서 산울림의 CD들을 빌려와 며칠을 공부하듯 들었다. 소장하고 있던 CD들도 있고 좋아하는 곡들도 많았지만 공부하듯 들으니 잘 들리지 않았고 이런 엄청난 뮤지션을 DJ로 맞이해 잘 할수 있을까 겁이 나기 시작했다. 제대로 듣지 못하고 CD더미를 한켠으로 밀어놓았다.

첫 미팅의 날, DJ를 기다리며 시그널 음악을 들려드리기 위해 가져갔던 디스크맨의 플레이 버튼을 눌렀는데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나른하면서도 싱그러운 사운드를 들으며 긴장이 풀렸다. 저 앞에 걸어 들어오고 있는 저 아저씨와 왠지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김창완 아저씨와는 20년이 되어간다.

함께 시작하고 한참을 헤어졌다가 <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 20주년이 되는 해에 다시 만났다. 아저씨랑 함께 술을 마실 수 있어 행복했고, 이 대단한 분이랑 함께 만든 역사가 있다는 게 행복하다.

*프로필

오지영 (OHPD@sbs.co.kr)
SBS 라디오 PD
< 최화정의 파워타임 >, < MC 몽의 동고동락 >, <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 > 외 다수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