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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다니엘 시저의 음악세계

7월 15일과 16일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HAVE A NICE TRIP 2023 첫째날 헤드라이너로 선 다니엘 시저는 감각적인 알앤비 뮤직으로 국내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2018년 내한 공연으로 한국과의 인연을 맺은 시저는 알앤비 싱어송라이터 헐(H.E.R.)과 협연한 ‘Best part’로 61회 그래미 최우수 알앤비 퍼포먼스를 수상했고, 2021년 저스틴 비버와 협업한 메가 히트곡 ‘Peaches’로 빌보드 핫100 정상을 밟는 등 대중적 성공과 평단의 지지를 두루 획득했다.

2023 에디터스 초이스 4월에도 선정된 세번째 정규 앨범 < Never Enough >은 “Driver Seat(운전석)에 앉았다”라는 시저 본인의 표현처럼 작사 작곡과 프로듀싱 등 음악 전반의 주도권을 높였다. 푸른 라이트 멜로우로 물든 53분 몽환계엔 록과 소울, 힙합이 녹아있고, 감정의 여러 부면을 세밀하게 어루만졌다. 7월 13일 유니버설뮤직이 주관한 기자간담회에서 시저는 < Never Enough >과 음악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여유롭게 풀어냈다.

신보 < Never Enough >
28세의 젊은 뮤지션에게서 세 번째 정규 앨범에 대한 자신감과 자부심을 읽었다. 토니 토니 톤 출신 베테랑 라파엘 사딕과 마크 론슨의 쟁쟁한 프로듀서진 사이로 이름을 포함한 시저는 축적된 내공과 노하우를 고스란히 앨범에 투영했다. 알앤비를 토대로 다채로운 음향을 실험하는 작법은 기존과 동일하되 전체적인 구성과 흐름 측면에서 아티스트의 정체성이 더욱 많이 드러난 모양새다.

시저는 < Never Engouth >의 핵심으로 삶에 작용하는 밀고 당기는 힘, 즉 저항력을 들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의 추구와 그에 대한 해답이 결국 내면에 있으며, 내면에 이르는 과정에서 깊은 감정이 발생한다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들려줬다. 앨범아트의 푸른빛과 음반 전체를 관류하는 침잠(沈潛)의 정서는 슬픔과 우울과는 다른 맥락의 멜랑꼴리로 묘사했다.

화음 진행과 편곡 부문에서 작금의 알앤비 음반들보다 난해하게 느껴진다는 평에 대해선 “너무 어렵게 받아들이기보다 음악적 새로움을 발견하는 과정으로 여겨줬으면 좋겠다”라며 도전 의식을 강조했다. 정규 1집 < Freudian >(2017)의 영감으로 네오소울 기수(旗手) 디안젤로의 < Voodoo >를 들며 창조적 알앤비의 욕구를 드러낸 시저는 향후 장르 내에서의 다채로운 변화와 실험을 암시했다.

기타와 베이스, 드럼을 모두 연주한 마지막 트랙 ‘Unstoppable’을 비롯해 < Never Enough > 크레딧의 대부분을 자신의 이름으로 채우고 있다. 직접 악기 연주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마치 (멀티 인스트루멘탈리스트로 유명한) 프린스가 된 것 같은 기분”이라며 웃음 지은 시저는 그것이 자신에게 자신감과 자부심을 불어넣어 주며, 더 나아가 삶의 긍정적 기운으로 작용한다고 설명했다.

흔히 다루는 부드럽고 달콤한 사랑 이외의 다양한 감정을 다루고 싶었던 시저는 일견 당황스러울만큼 강렬한 노랫말의 수록곡 ‘Shot my baby’는 최악의 감정 그 극대점을 음악으로 승화했다. 사이키델릭한 분위기의 ‘Vincent Van Gogh’는 생전 부귀영화를 못 부린 고흐와 달리 자신의 음악세계가 널리 인정 받고 있다는 스웨그며 제작 과정에서 자유로움을 만끽한 이번 앨범 최애곡이라고 말했다.

다니엘 시저의 음악세계
2017년 데뷔 앨범 < Freudian >의 성공 이후 약 6년이 흐른 지금, 소통과 생활 방식 차원에서 많은 것이 변화함에 따라 음악에서 다루는 주제들도 넓어졌다. 사랑을 중점적으로 얘기한 < Feudian >에서 점차 신과 죽음, 부모와의 관계 등 보다 철학적 주제 확장을 이룬 후속작들은 서사의 깊이 측면에서 음악적 성숙을 드러냈다. 신보를 비롯한 근작에선 다시 사랑의 주제에 천착하고 있다고 말했다.

음악을 만들 때 오직 자기 자신만을 들여본다고 하는 그는 솔과 가스펠 등 미국 음악 유산을 두루 흡수했고 ‘Peaches’에서 돋보이는 하모니의 다층성과 기타의 높은 활용 빈도, 독창적인 베이스 리프와 직설적인 노랫말을 특징으로 한다.제이콥 콜리어와 존 메이어가 참여한 정규 2집 < Case Study 1 >는 틀에 박힌 음악과는 거리가 먼 뮤지션임을 알려준다.

시저는 그의 음악을 소량의 노란색이 섞인 파랑으로 표현했다. 전체적으로 멜랑꼴리한 정서에 한 줄기 희망을 투영하는 방식을 색깔에 빗댔다. 시적이며 회화적인 그의 사운드스케이프는 피비알앤비의 대표 뮤지션 프랭크 오션과 카니예 웨스트, 더 도어스의 프론트퍼슨 짐 모리슨 등 다양한 예술가들에게서 영향받았다.

간담회 종종 한국 팬들의 놀라움을 언급했다. 2018년 첫 내한 때 팬들의 보여준 열정과 환호를 잊을 수 없다고 말한 그는 열린 HAVE A NICE TRIP 2023 에서도 < Never Enoguth >의 신곡들과 기존 히트곡을 엮은 셋리스트로 관객들을 만족시켰다. 아티스트로써 “나 자신이 될 것(Be Yourself)”를 강조한 다니엘 시저에겐 예술가의 자유로움과 단단한 중심이 공존했다.

취재: 염동교
사진: 유니버설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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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um KPOP Album

유라 ‘꽤 많은 수의 촉수 돌기'(2023)

평가: 3.5/5

음반을 이해하거나 정의 내리는 것이 쉽지 않다. 평단과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EP < Gaussian > 이후 재즈 그룹 만동과 함께 낸 음반 < 이런 분위기는 기회다 >에서 부각된 재즈적 터치가 그의 첫 정규인 이번 신보에 짙게 자리한다. 개인 커리어와 콜라보 음반 사이 연결 고리를 찾자면 그 접촉면은 후자에 더 넓게 포진해 있다. 과거 코스믹 보이와 함께한 싱글 ‘Can I love?’, 기리보이와 손잡은 ‘도쿄’ 같은 곡에서 느껴지던 대중 감성, 이미지가 최근 커리어에서는 많이 옅어졌다. 변화 혹은 자유로움. 작품 첫 장에서 느껴지는 인상이다.  

의중을 알 수 없는 타이틀만큼 수록곡 역시 저마다 난해하고 의문스러운 제목을 가진다. ‘구운듯한 얼굴이 너의 모티프’, ‘허영 깊은 분위기에 실오라기 같은 눈을 가진 자’ 등 쉬이 뜻을 헤아릴 수 없는 노래 명 사이 전곡의 작∙편곡을 함께한 그룹 만동의 멤버이자 베이시스트 손남현의 터치가 가미되자 앨범의 질감은 전에 없이 독특해진다. 희뿌연 연기와 흐릿한 실루엣이 연일 소리로 만들어진다. 모호하고 아슴아슴한 가사의 나열이, 감정 표현을 최대한 거둬 낸 듯 노래하는 유라의 보컬이, 별다른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 툭 던져 낸 음반 사이를 자유롭게 오간다.  

해석의 실마리는 귀보다 마음을 열었을 때 다가온다. “순수 현존하려면 바로 응고해야 한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곡들은 찰나의 순간, 기억을 소재로 파편화된 무언가를 표현한다. 거두절미하고 감각한 것들을 적시한 가사는 데뷔 이래 그가 늘 음악을 써온 방식이다. 즉, 재즈에 거점을 두고 다채로운 사운드를 들려주지만 그 문체는 언제나처럼 ‘유라스럽다’. 다양성과 통일성이란 두 가지 틀을 중심으로 자기감정을 노래하는 이 아티스트의 음악은, 애써 길을 찾지 않고, 구태여 길을 잃고자 할 때, 그제서야 우리에게로 온다.

둥둥거리는 베이스와 함께 묘한 긴장감이 서린 ‘목에게’, 전자음을 가미해 복잡한 내면을 서술한 것만 같은 ‘따갑고 부끄러워지는 것’을 지나 중후반부 ‘수풀 연못 색 치마’, ‘그늘덮개’, ‘동물원’로 이어지는 3곡은 이 작품의 핵심이자 정수다. 일면 대표곡 ‘미미’가 떠오르기도 하는 ‘그늘덮개’는 곡 말미 통기타 사운드를 덧대며 ‘그리움’, ‘외로움’을 말로 내뱉지 않으며 포착한다. ‘동물원’은 밴드 셋의 로큰롤로 밝게 서글픔을 노래한다. “저기 봄볕은 오뉴월 물드는 풍경을 볶고 있고”로 시작해 “떠난 자국 위에는 무지개가 생길 거다 말하면서”로 끝나는 노래라니. 근사하다.  

유일한 아쉬움은 음반의 끝이 너무 빠르게 묶여 버린다는 데 있다. 3분 남짓 8개 수록곡으로 정규의 메시지를 다 풀어내기엔 그 무게가 다소 가볍다는 인상도 든다. 한편으론 달려 나가면서, 되레 앨범의 문을 열어둔 채 끝나는 것 같기도 하다. 마치, 빈 공간엔 청자의 해석을 덧대라는 식으로. 자유롭고 풍부한 음반. 주제를 가두지 않고 노래의 끈을 잘라 각자의 순간을 곡에 빗대게 한다. 꿈속인 듯 몽롱하고 현실인 양 비범하다. 언어적 상상력의 끝에 음악이 걸려있을지니, 그걸 잡아 의미를 새기는 건 오롯이 듣는 자들의 몫이다.  

– 수록곡 –
1. 구운듯한 얼굴이 너의 모티프
2. 목에게
3. 따갑고 부끄러워지는 것
4. 수풀 연못 색 치마
5. 그늘 덮개
6. 동물원
7. 허영 깊은 분위기에 실오라기 같은 눈을 가진 자
8. 허무한 허무함의 패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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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이 시대의 한국 R&B/Soul 명곡 10 (2000년대)

19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이 도출한 한국어 랩의 가능성과 이태원 클럽 문나이트를 일대로 벌인 춤꾼들의 춤사위. 이는 나아갈 새천년의 국내 대중음악계 주류를 흑인 음악으로 맞바꾸어 놓은 초석과도 같았다. 그 후 21세기를 맞은 2000년대는 말하자면 한국이 흑인 음악에 열광, 열중하던 시기였다. 바다 건너 흑인들의 것인 줄만 알았던 ‘소울’을 한국화한 혼혈, 재미 교포 출신 가수들의 선구적인 활약과 그를 우리 정서에 맞게 녹여낸 ‘소몰이 창법’의 물결까지. 다양한 형태의 히트곡들이 줄을 이었다. 가창력의 척도가 스크리밍(Screaming) 등 록 기반의 고음에서 알앤비 특유의 정교한 기교, 꺾기로 변화한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알앤비/소울은 현대의 젊은 세대에게도 익숙하다. 빌보드 차트에서 목도하듯 세계 음악 시장을 주름잡는 블랙 뮤직은 그 위세를 그칠 줄 모른다. 비대해진 힙합의 지분으로 이제는 랩과 노래 그 중간 어딘가에 있는 싱잉 랩이 새 시대의 창법으로 성행하기도 한다. 이쯤에서 돌아볼 필요가 있겠다.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는 시간이 지났지만, 2000년대 국내 대중음악계를 빛낸 알앤비/소울 명곡들의 보다 날 것의 감성을 들어보자. 지금의 국내 흑인 음악 트렌드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 추이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제이 – 어제처럼 (2000)
재미교포 가수 제이의 시작이 댄스였다는 사실은 지금 와서는 새삼 믿기 어렵다. 그를 기억하면 언제나 ‘어제처럼~’이 귓가에 맴돌기 때문이다. 1집의 존재감은 그만큼 미미했지만 소울로의 안정적인 노선 변경에 성공한 차기작은 그의 진가를 발휘한 튼실한 앨범이었다. ‘어제처럼’ 하나만으로도 말이다.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는 감성을 제공한다. 알앤비하면 흔히 기교 섞인 목소리나 짙은 감정선을 연상하곤 하지만 ‘어제처럼’은 그와 사뭇 다른 부드럽고 담백한 멜로디와 여린 목소리로 유통기한이 긴 제이만의 소울을 잉태했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큰 인기를 얻은 노래는 2000년도 SBS 가요대상 신인가수상 등을 석권하며 그에게 꿈같은 한 해를 선물했다.

박화요비 – 그런 일은 (2000)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처럼, 재능 있는 아티스트는 때로 놀라울 정도로 이른 때에 두각을 나타내곤 한다. 등장부터 숙성된 가창력을 자랑하며 박정현과 국내 알앤비 신을 양분한 화요비이지만 이 노래를 부를 당시 그의 나이 고작 19세. 머라이어 캐리의 발라드 ‘My all’에서 따온 앨범 제목이 만용으로 보이지 않는 진짜 ‘노래 잘하는 신인’의 출현이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그를 ‘한국의 머라이어 캐리’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선명하게 들리는 숨소리의 호소력과 천부적인 완급 조절이 캐리의 그것과 닮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설과의 유사성을 차치하고 그가 내뿜는 소리 자체에 귀 기울여 보자. 말할 때 육성에서 알 수 있는 낮은 톤, 여기에 자연스럽게 갈라지는 허스키한 보이스가 실로 매력적이다. 성숙한 음성과 대비되는 여린 이별 가사가 더해져 더욱 가슴 아린 화요비표 알앤비 발라드.

박정현 – 꿈에 (2002)
솔리드의 김조한과 함께 국내 알앤비 보컬의 선두주자로 통하는 박정현이다. 여러 장르를 좋아하는 그는 자신을 알앤비 가수로 결정지어 결부하기를 거부하지만, 누가 뭐래도 당대 우리나라 알앤비 돌풍의 주역은 그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데뷔 이래 ‘P.S. I love you’, ‘You mean everything to me’ 등 멋진 곡을 많이 들려줬다. 하지만 ‘꿈에’만큼 강렬한 곡은 그에게도, 다른 가수에게도 찾아보기 어렵다.

당시 많은 이들에게 안긴 극적인 구성의 놀라움이 지금도 유효하다. 공일오비 정석원이 편곡한 몽롱한 국악기 소금 반주를 시작으로 ‘꿈에서 만난 옛 연인’이라는 주제 아래 기쁨과 절망, 잠에서 깬 후의 아련한 감정을 차례대로 연결 짓는 노래는 ‘스토리텔링’의 정석이 무엇인지 깨닫게 한다. 박정현은 이 대담한 서사에 더욱 높은 수준의 입체감을 조각한다. ‘보컬 올림픽’이란 말도 나왔을 정도. 약간은 부정확한 발음에서 오는 특유의 느낌과 절마다 창법을 변조해나가는 완급 조절, 막힘 따위 모르는 막강 성량이 결합하여 폭발한다. 작곡가의 상상 그 이상을 실현하는 가수의 놀라운 역량이다.

플라이 투 더 스카이 – Missing you (2003)
대중에게 익숙한 국내 알앤비 명곡을 살펴보면 대부분 사랑을 주제로 한 사실상의 알앤비 ‘발라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림과 애절함에 흔들리는 이 우리 정서는 이별 등 연모의 감정에 유독 취약하다. ‘Missing you’는 그 한국적 감수성의 표본이다. 대중의 보편적 가녀림을 파고드는 섬세하고 애절한 노랫말의 주제는 이별을 넘어 ‘사별(死別)’이다.

다양성과 장수의 목적 아래 SM이 내놓은 이들의 시작은 비주얼부터 화려한 아이돌이었지만 성숙한 느낌의 곡만큼은 어른 취향 가까워 심심할지라도 긴 수명을 보냈다. 만화 속 소울메이트처럼 외형적으로도 잘 어울리는 환희와 브라이언은 이 노래에서 각각 터프한 흉성과 맑은 미성의 매끈한 조화로 모범적인 듀오의 콤비 플레이를 전시했다.

휘성 – With me (2003)
휘성은 풋내가 없는 신인이었다. 서태지, 신승훈의 상찬을 등에 업고 등장한 괴물 신예에게 1집 발라드 ‘…안 되나요…’는 공전의 히트를 안겼지만 가수는 그 이상을 넘봤다. 차기작 < It’s Real >에서 마음껏 발산한 원숙미야말로 ‘진짜 자신’을 선언한 예술가적 발로였다. 이 중심에는 지금의 휘성을 있게 한 ‘With me’가 있었다.

당시 유행하던 미디엄 템포 장르를 멋들어지게 구현했다. 전작에 비해 강해진 장르적 색채에도 리드미컬한 드럼 타격이 주도하는 어반한 분위기는 대중에 가닿기에 충분했다. 신선함을 익숙함으로 맞바꾸는 작곡가 김도훈의 완연한 멜로디 라인에 묵직한 톤으로 능란하게 박자를 타는 휘성의 자신감 넘치는 활약은 거부할 수 없는 성공 공식이었다. 음반 판매량 40만 장을 넘기는 가공할 만한 위세를 누렸다.

빅마마 – 체념 (2003)
여타 멤버의 가창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더라도 노래 잘하는 가수 한두 명만 중심을 잡아줘도 그 팀은 실력파 그룹으로 인식이 가능하다. 그런데 네 명이라면? 요즘 시쳇말로 ‘사기캐’다. YG 엔터테인먼트와 알앤비 전문 레이블 엠보트(M-Boat)의 의기투합이 발굴한 빅마마가 그렇다. 당시 가요계 립싱크 행태를 꼬집은 ‘Break away’ 뮤직비디오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의 등장은 비주얼 가수에게 응수하는 ‘가창력 그룹’의 도발적인 한 방이었다.

이영현이 홀로 작사, 작곡, 노래한 솔로곡 ‘체념’이 팀의 디스코그라피에서 가장 오랜 시간 지지를 받고 있다. 실제 이별 경험을 토대로 작사한 노랫말과 선 굵은 선율이 이영현 특유의 카랑한 고음을 타고 가슴 속에 아로새겨진다. 양현석과 엠보트 대표 박경진은 ’10년이 지나도 듣기 좋을 곡을 만들겠다’는 목표로 팀을 꾸렸다던데, 이들을 한참이나 과소평가했다. 벌써 18년째 애청, 애창되고 있으니 말이다.

아소토 유니온 – Think about’ chu (2003)
짧아서 아쉽고, 그래서 더 소중한 활약이었다. 국내 흑인 음악 신의 선구자이자 보석과도 같던 팀 아소토 유니온의 빛나는 합동은 아프리카 부족 제사 의식용 북 ‘아소토’를 발췌한 그룹명처럼 원시적이고 날 것 그대로의 연주를 들려줬다. 드렁큰 타이거가 주도하던 크루 무브먼트의 밴드로서 이들이 보여준 것은 흑인 음악 원류에 관한 치밀한 탐구. 포화 상태에 있던 유사 블랙 뮤직들 사이에서 진정한 ‘검은 맛’이 무엇인지 시범이라도 보이는 것 같았다.

연주곡과 영어 곡의 큰 비중 속 ‘Think about’ chu’의 우리말 가사가 빛난다. 짙은 호흡을 섞어 허스키한 톤을 구사하는 김반장의 보컬이 소울 본연의 필(Feel)을 적극 구현하면서도 그 중심에 또렷이 생동하는 노랫말은 소울과 한국어의 반가운 악수를 보는 듯하다. 귀에 착 감기는 베이스 그루브와 서정성을 가미한 전자피아노의 끈적거림을 매끈하게 마감질한 사운드는 리마스터의 필요성에 반기를 든다. 2003년도 우리나라에 이런 노래가 나왔다.

나얼 – 귀로 (2005)
브라운 아이즈로 점화한 미디엄 템포 붐과 브라운 아이드 소울로 완성한 갈색 하모니의 정수. 결과물로 보여준 영향력도 지대하지만 이렇게 한 장르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여준 아티스트가 또 있었나 싶을 정도로 오랜 시간 같은 우물을 파는 뚝심이야말로 나얼이 국내 알앤비/소울의 대명사가 된 원동력이다. 2005년 발매한 < Back To The Soul Flight >는 옛 명곡을 소울로 재해석한 소울에 바치는 그의 러브레터였다.

중독적이다 못해 최면적인 도입부 피아노 반주에 기절하고 나면 소울 도인(道人)의 경지를 탐하는 나얼의 목소리가 들린다. 눈물을 머금은 듯 애잔하고, 탁월한 공명감의 두성이 아름답다. 흉내 의지를 꺾는 화려한 애드리브를 정밀하게 스케치해낼 때면 이게 우리나라 가수가 맞나 싶다. 심지어 이는 1989년 박선주의 원곡을 여자 키 그대로 부른 것이다. 나얼은 독보적인 노래꾼이다.

BMK – 꽃피는 봄이 오면 (2005)
제임스 브라운, 아레사 프랭클린 등 1960년대 소울 거장들의 육성을 들어보자. 원시의 소울은 흑인의 민권 회복과 자긍심 표출을 위한 분출구와 같았으며 이들의 보컬은 필히 웅변적인 힘, 우렁찬 스태미너를 특징으로 한다. BMK의 스피커가 터질 듯 묵직하고 강력한 목소리와 비교해보자. 그들처럼 차별에 대한 격노나 한을 노래하지는 않아도, 무자비한 성량만큼은 그것의 전형과 쏙 빼닮았다. 과연 ‘소울 국모’다.

‘꽃피는 봄이 오면’의 절절함도 여기서 온다. 산뜻한 봄날 옛 연인에 대한 그리움으로 사무쳐버린 감정의 파고를 노래하는 이 곡은 간주도 없이 빽빽하게 채운 보컬이 굵직한 멜로디를 뽑아내고 이내 극단의 감정을 토해내는 후렴부로 치닫는다. ‘찰나 같아 찬란했던 그 봄날’처럼 이별의 심정을 지독하리만치 아름답게 대변하는 노랫말은 또 어떠한가. 우리가 알고 있던 봄의 계절감을 잊게 할 만큼 애틋하다. 소개한 다른 가수들에 비해 히트곡이 많지 않은 그이지만, ‘꽃피는 봄이 오면’ 하나만으로 계절만 되면 소환되는 스테디셀러의 주인공이 됐다.

윤미래 – What’s up! Mr. good stuff (2007)
전략은 중도, 무기는 실력. 윤미래는 날고 기는 신의 강자들 사이에서 잔학한 쌍칼 검법의 가능성을 창출한 독보적인 멀티 플레이어다. 대중과 장르 애호가를 모두 사로잡기 위한 랩, 노래의 현란한 휘날림과 속속 발매한 발라드 히트 넘버들로 양 분야 모두의 정상급 인정을 확보한 그였다. 그러한 완벽에 가까운 이도류의 특성을 압축하고 블랙 뮤직 스페셜리스트로서의 위상을 철저하게 굳힌 작품이 < t 3 Yoonmirae >다.

수록곡 ‘What’s up! Mr. good stuff’는 리얼하다. 인트로의 거친 드럼에서 예고하듯 호쾌한 펑크(Funk) 그 팔딱거리는 참맛을 별다른 효과 없이 기타, 브라스 등 화끈한 세션의 합연만으로 전달한다. 역동적인 박수 소리와 브릿지 내레이션은 입체감 이상의 현장감을 부른다. 자유롭게 그루브를 타고 흐르는 윤미래의 보컬을 따라 춤을 참을 수 없을 것이다. 2008년 한국 대중음악상 최우수 알앤비&소울 음반, 노래 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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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 한동윤의 러브 앤 어택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고 떠나는 브라이언 맥나이트

미국 가수 브라이언 맥나이트(Brian McKnight)가 지난 6월 새 앨범 < Exodus >를 발표했다. 2017년에 낸 전작의 제목이 ‘창세기'(Genesis)였고, 이번 앨범은 ‘출애굽기’이니 얼핏 성경 시리즈로 여겨질 수 있겠다. 하지만 성서에 관한 내용은 어디에도 없으며, 가스펠이나 CCM의 성격을 띠지도 않는다. 두 작품 모두 내내 연정만 표할 뿐이다. 혹여나 구약을 테마로 했다면 음악 팬들은 개신교 기준 서른일곱 장의 앨범을 더 만나야 한다. 그 기나긴 여정이 펼쳐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종교와 무관하긴 해도 ‘탈출’이라는 뜻의 표제에는 확실히 각별한 의미가 서려 있다. < Exodus >가 마지막 음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뮤지션 경력에 온전한 마침표를 찍는 것은 아니다. 신곡으로 채운 음반은 더 내지 않겠다고 했을 뿐이다. 따라서 공연이나 리메이크 음반 제작 등 여타 활동에 대한 여지는 남아 있다. 은퇴 선언에 훗날을 지혜롭게 대비해 뒀다.

브라이언 맥나이트는 올해 초부터 < Exodus >가 마지막 앨범임을 공언해 왔다. 그는 2003년 이혼 후 2014년 새 인연을 만나 2017년 두 번째 가약을 맺었다. 1992년 데뷔해 지금까지 달콤한 사랑 노래를 상당수 만들고 불렀지만 한 인터뷰에서 사실 자신은 그동안 누군가를 생각하며 곡을 쓴 적이 없다고 했다. 두 아이를 낳았으며, 십수 년을 같이 산 전 부인이 들으면 서러움을 넘어 기분 잡칠 발언이다. 반면에 현재의 아내를 만난 뒤에는 그녀가 거의 모든 노래에 영감이 됐다고 밝혔다. 지천명을 넘긴 브라이언 맥나이트는 자신의 인생을 바꾼 소중한 사람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은 마음에 창작 활동을 중단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사랑과 가정 핑계를 댔으나 거듭된 상업적 부진도 음악계에서 발을 빼는 데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브라이언 맥나이트는 1993년 버네사 윌리엄스(Vanessa Williams)와 부른 드라마 < 비버리힐즈의 아이들 >(Beverly Hills 90210) 사운드트랙 ‘Love is’를 시작으로 ‘One last cry’, ‘You should be mine (Don’t waste your time)’, ‘Back at one’ 등 다수의 히트곡을 배출하며 1990년대의 대표 R&B 스타가 됐다. 차트 진입에는 실패했으나 1997년에 출시한 ‘Anytime’은 우리나라에서 큰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새천년에 넘어와서는 빌보드 싱글 차트 100위 안에도 들지 못할 때가 허다했다. 영광의 시절보다 시련의 시기가 훨씬 길었다.

그럼에도 브라이언 맥나이트는 성적에 초연한 듯 본인만의 어법을 고수했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 Exodus > 역시 차분한 곡 위주로 꾸렸다. 포근한 느낌의 반주와 가성이 잘 어우러진 ‘Stay on ur mind’, 어쿠스틱 타악기와 온화한 키보드 연주를 앞세워 담백함을 제공하는 ‘Hula girl (Leilani)’ 적당한 리듬감으로 90년대 R&B 발라드 형식을 재현한 ‘When I’m gone’ 등 편안하게 감상하기에 무난한 노래들이 마련돼 있다. 이따금 나오는 리드미컬한 곡도 번잡하거나 우악스럽지 않다. 앨범은 그저 순하기만 하다.

물론 듣기 편하다고 해서 다 인기를 얻는 것은 아니다. 브라이언 맥나이트의 곡들은 오늘날 R&B 동향과 멀찍이 거리를 둔다. 젊은 음악 애호가들은 대체로 이런 심심한 음악을 선호하지 않는다. 더욱이 젊은 세대는 그들과 비슷한 연령의 가수들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결국 싱글로 낸 노래들과 앨범은 어느 차트에도 입장하지 못했다. 약 30년의 음악 생활을 정리하며 작별을 고하는 자리도 그늘이 잔뜩 졌다. 그래미 시상식에 열일곱 번이나 후보로 호명됐지만 단 한 번도 상을 가져가지 못한 사실을 떠올리면 그의 퇴장은 더욱 초라하게 느껴진다.

작금의 상황은 오랜 세월 한 우물만 판 것에 기인한다. 브라이언 맥나이트는 데뷔 이래 단 한 번도 컨템퍼러리 R&B 영역을 이탈한 적이 없다. < Exodus >까지 열여섯 편의 모든 앨범에 어느 정도 탄력이 있는 곡, 각 시절에 뜨던 R&B 트렌드를 흡수한 곡을 몇몇 싣곤 했으나 큰 줄기는 언제나 잠잠한 R&B, 어덜트 컨템퍼러리였다. 동료 뮤지션들의 초대를 받아 참여한 작품들도 브라이언 맥나이트 개인의 세상과 거의 동일했다. 1994년 힙합 듀오 일 알 스크래치(Ill Al Skratch)와 함께한 ‘I’ll take her’에서도 느른한 비트를 배경으로 나긋나긋한 보컬을 입혔다. 브라이언 맥나이트의 스타일은 어디에서도 계속됐다. 이 확고한 정체성(正體性)은 안타깝게도 고루한 정체성(停滯性)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장기간 무력했고, 피날레마저 볼품없을지라도 브라이언 맥나이트는 분명히 귀한 성과를 남겼다. 한결같은 걸음이 특징을 만들고, 자연스럽게 본보기를 생성했다. 그는 R&B와 팝의 요소를 버무려 이룬 부드러운 곡조, 로맨틱하게 애정을 표하는 가사를 일관되게 펼침으로써 색이 뚜렷한 음악 세계를 구축했다. 자극적이지 않은 소리와 노랫말은 R&B가 더 많은 이에게 퍼지는 데 도움이 됐다. 정교함과 절제를 겸비한 발군의 가창은 가수 지망생들에게 교범처럼 여겨진다. 지금도 많은 이가 유튜브에 브라이언 맥나이트를 커버한 영상을 올리고 있다. 브라이언 맥나이트가 지나온 길은 이처럼 빛도 자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