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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그는 기타의 새 역사였다!

“그는 기타의 새 역사였다!”
에드워드 밴 헤일런에게 바치는 아홉 기타리스트의 헌사

UNSPECIFIED – CIRCA 1970: Photo of Van Halen Photo by Michael Ochs Archives/Getty Images

1980년대를 호령한 밴드 밴 헤일런(Van Halen)의 축인 기타리스트 에드워드 밴 헤일런이 지난 10월6일 65살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77년 ‘Eruption’부터 1983년 마이클 잭슨의 ‘Beat it’, 그리고 밴드의 스매시 ‘Jump’에 이르기까지 마치 건반 연주와도 같았던 그의 경이로운 기타 워크는 동시대의 무수한 기타리스트와 지망생들에게 일대 충격을 던지면서 새 역사를 열었다.

당대 일렉트릭 기타 플레이 전반이 에드워드 자기(磁氣) 작용이 미치는 공간에 속했다고 해도 과장일 수 없다. 에드워드 밴 헤일런으로부터 어떠한 영감과 영향을 받았는지 우리 9인 기타리스트들이 전하는 추모의 헌사를 만난다.

신대철

신대철 / 시나위
중학생 때 재킷이 멋져서 산 백판을 통해 ‘Eruption’을 들었을 때 실로 멘붕에 빠졌다. ‘사람이 친 건가’, ‘과연 이게 기타 연주 맞나’.. 그건 가히 혁명이었다. 지미 헨드릭스, 에릭 클랩튼, 지미 페이지, 제프 벡만 알다가 갑자기 솟구쳐 올라 ‘이렇게도 연주가 되는 거구나’를 일깨운 것이다. 전적으로 새로운 발상의 연주였다. 그는 또한 기타리스트를 넘어 키보드 연주도 출중하고 작곡솜씨도 빼어났던 위대한 아티스트였다. 사망 소식을 접한 뒤 유투브 영상을 보다가 하루 종일 눈물을 뚝뚝 흘렸다. 너무 슬프다.

유병열 / 전 YB, 현 YBY
기타의 역사를 새롭게 쓴 사람이다. 지미 헨드릭스에 이어 또 한 번 연주에 있어서 기존 질서의 파괴를 이끌었다. 에드워드 밴 헤일런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양손 태핑일 텐데 그것을 체계적으로, 정교하게, 완벽하게, 마치 건반을 치듯 연주한 것은 그가 시발점이었다. 그를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그 테크닉은 하나의 유혹이었고 따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타를 잡은 사람이라면 다 그랬듯 기타 연주의 극점까지 가야 했기에 ‘Eruption’은 성장 프로세스에 있어서 필수 레퍼토리였다.

사촌동생은 배우 전혜진, 김태원, 신대철과 함께 한국 3대 기타리스트, 미운 우리 새끼 김도균 편의점 마스터된 사연은?

김도균 / 백두산
1980년대 기타 연주를 완벽하게 주도한 인물이다. 프로 포함 아마추어까지 모든 기타리스트의 주법이 그의 영향 아래 있었다. 1980년대는 실로 ‘기타 올림픽’ ‘기타의 시대’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빼어난 기타리스트들이 잇달아 출현하면서 1970년대 구축된 기타연주가 정점에 도달한 시절, 그 상승흐름을 압축한 인물이 바로 에드워드 밴 헤일런이었다. 라이트핸드 주법도 그렇다고 보는데, 클래식을 모티브로 한 ‘네오 클래시컬’ 장르의 문을 연 사실도 빼놓을 수 없고… 그에게는 ‘역사’란 말을 붙여야 한다.

4K]191229 Dancin'-기타 (퍼플레인 양지완) @슈퍼밴드TOP3콘서트 in서울(일) - YouTube

양지완 / 퍼플레인
내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20대, 30대 전성기 때 모습으로, 기타 아이돌로 남아 있다. 그 우상이 사라져 믿기지가 않는다. 그 빨간 색 의상 하나만으로도… 그를 한창 카피하고 연습하면서 느낀 것은 비록 양손 태핑, 라이트핸드 주법으로 이슈가 되긴 했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에드워드 밴 헤일런은 리프를 창작한 거라든가 음악에 맞게 기타 연주를 만들어가는 것을 정말 잘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는 기타 테크니션이 아니라 아티스트였다.

기타리스트 조필성에게 기타레슨 받고 싶다면..

조필성 / 예레미
초년생일 때 기타영웅이었다. 우리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영웅이란 그런 칭호는 최초를 받은 인물이라고 본다. 나도 단순히 주법 뿐 아니라 기타 톤, 그 둥글둥글한 톤을 닮으려고 무척이나 노력했다. 심지어 쇼맨십까지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의 주법은 너무도 생소했고 희한했으며 소름 끼치는 것이었다. 나중 라이브 영상을 보면서 ‘저렇게 치는 구나’ 확인했을 때의 전율. ‘와∽ 원 맨 솔로 기타 하나로도 저렇게 사람을 휘어잡을 수 있구나..’ 정말 놀라움 투성이었다.

하세빈

하세빈 / 네미시스
기타를 시작함에 있어 영감을 준 여러 기타리스트가 있었지만 그중 히어로 중 히어로가 에드워드 밴 헤일런이었다. 큰 별이 졌다. 그런 인물이 유명을 달리해 더 슬프다. 진심으로 애도를 표한다. 점점 기타의 히어로가 사라지고 있는 시절이라 더 그렇다. 그가 새롭게 개발해 이제는 역사가 된 태핑 주법은 기타리스트라면 대부분 사용하고 나도 때로 동원할 만큼 존경심을 간직하고 있다. 내게 밴 헤일런의 영향은 상당했다.

사운드캣 인터뷰] 기타리스트 Tommy Kim - 사운드캣

타미 김 / 전 김종서밴드, 현 타미 김 블루스 밴드
SNS를 통해 처음 부고 소식을 접했을 때 이렇게 말하면 과장일지 모르지만 친인척이 사망한 것만큼 가슴이 쓰렸다. 나는 그로부터 연주 뿐 아니라 음악을 하는 태도와 삶의 모습 전반에 걸쳐 영향을 받았다. 기타의 모든 것을 규합해서 그렇게 창의적으로 연주한 사람이 그전에는 없었다. 우리는 모두 ‘포스트 밴 헤일런’으로 규정해야 하고 폴 길버트, 리치 캇슨을 포함한 해외의 많은 기타리스트들처럼 나도 밴 헤일런 키드다. 내게는 지미 헨드릭스보다 임팩트가 3배 이상은 컸다.

기타리스트 박창곤 뮤직비디오 '희망가' - YouTube

박창곤 / 이승철황제밴드
기타리스트라면 그를 안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내 경우는 어렸을 적부터 특별히 경배해마지 않았다. 그 연주를 너무 닮고 싶었다. 흔히 에드워드 밴 헤일런 하면 태핑, 해머링의 주법 측면에서 많이 얘기되지만 나는 그 톤을 더 좋아했다. 그걸 제대로 재현하고 싶어서 여러 브랜드의 기타를 사곤 했다. 난 한마디로 그가 기타를 가장 ‘자유분방하게’ 연주한 사람이라고 정의하고자 한다.

박영수[지하드] - Brothers (Yngwie Malmsteen cover) - YouTube

박영수 / 지하드
솔직히 그를 추종했다고 할 수 없지만 나도 그로부터 영향과 자극을 안 받았다고 할 수 없다. 기타에 홀렸던 키드 시절, 기타의 새로운 세계를 알게 해주고 연주의 새로운 영역을 구축한 사람임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칠수록 빠져드는 오묘한 기타의 매력을 더 느끼게 해준 인물이다. 그 환상의 연주를 더 듣지 못하게 돼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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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승근의 하나씩 하나씩 Feature

헤비메탈로 춤을 추게 만든 밴 헤일런

현지 시각 2020년 10월 6일 밴드 밴 헤일런(Van Halen)의 기타리스트 에디 밴 헤일런이 향년 65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IZM은 기타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고인을 추모하며 과거 업로드 되었던 특집을 모바일 페이지로 공개하고자 합니다. 두번째 글은 2013년 1월 IZM 소승근 대표가 기고한 ‘헤비메탈로 춤을 추게 만든 밴 헤일런입니다.

“뭐? 헤비메탈에 춤을 춰?”

열혈 메탈 팬들은 이 제목이 매우 거북할 겁니다. 하지만 1980년대에는 정말로 젊은이들이 팝 메탈에 맞춰 열정을 불태웠고 그와 함께 발을 비벼대던 신발에는 구멍이 뚫렸죠. 그 이전인 1970년대에는 고고장에서 딥 퍼플의 ‘Highway star’와 ‘Smoke on the water’에 몸을 맡긴 적도 있었거든요.

1980년대에 폭발한 팝 메탈의 씨를 뿌린 밴드가 밴 헤일런입니다. 이들의 명성은 시간이 흐를수록 태핑이라는 기타 주법으로만 수렴되는 경향이 있지만 밴 헤일런은 육중했던 헤비메탈의 무게를 가볍게 줄여 대중성을 취득한 일등공신이죠. 물론 당시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밴 헤일런은 대중음악 그룹입니다. 미국에서만 5,600만장, 전 세계적으로 8,600만장의 앨범 판매고를 기록하고 빌보드 록 차트에서 가장 많은 넘버원을 배출한 밴 헤일런은 2007년에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올랐죠.

이번 하나씩 하나씩에서는 미국 록 밴드 중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밴 헤일런의 핵심적인 노래들을 소개해 드릴까합니다.

You really got me

영국 밴드 킹크스가 1964년에 발표한 이 원곡을 자신들의 데뷔 싱글로 선택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많은 음악 관계자들이 최초의 헤비 기타 리프로 꼽는 ‘You really got me’를 내세워 자신들의 음악적인 뿌리를 대중들에게 확실하게 각인시키기 위해서죠. 이 곡을 만든 킹크스의 레이 데이비스는 밴 헤일런의 버전을 더 좋아했다고 밝혀서 화제가 됐습니다.

Eruption

1분 40초짜리 이 연주곡은 지미 헨드릭스 이후, 기타 연주의 틀을 완전히 바꿨습니다. 이 음악은 태핑 주법으로 유명한데요. 사실 이 태핑은 원래 바이올린에서 시작된 연주법이죠. 이것을 기타로 도입한 것은 1960년대 후반 재즈 기타리스트들과 아트록 밴드 제네시스의 기타리스트 스티브 하켓이었는데 에드워드 밴 헤일런은 이 태핑을 양손으로 연주해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라이트 핸드 주법이라고도 하죠.

드러머 카마인 어피스가 이끌었던 록 밴드 캑터스가 1970년에 발표한 ‘Let me swim’의 도입부를 차용한 ‘Eruption’은 에드워드 밴 헤일런이 공연 전, 리허설 할 때 손가락을 풀기 위해서 연습하던 곡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녹음하고 싶지 않았지만 프로듀서 테드 템플만의 주장으로 음반에 수록됐죠. 미국의 기타 전문지 < 기타 월드 >에서 집계한 ‘위대한 기타 솔로곡 100’에서 2위를 차지했고, < 롤링 스톤 >지에서 선정한 ‘위대한 기타 트랙 100’에선 6위를 차지했습니다.

Running with the devil

1978년에 공개한 데뷔앨범의 1번 트랙입니다. 밴 헤일런을 발굴하고 도움을 준 하드 록 밴드 키스의 보컬리스트 진 시몬스의 아이디어로 자동차 경적 소리를 인트로에 삽입한 이 곡의 제목은 ‘Love rollercoaster’로 인기를 얻은 흑인 펑크(funk) 밴드 오하이오 플레이어스의 ‘Running from the devil’에서 착안했습니다. 빌보드 싱글차트에선 84위까지 밖에 오르지 못했지만 데이비드 리 로스의 사포처럼 거친 보컬과 정중동을 지키는 마이클 앤소니의 탄탄한 베이스와 알렉스 밴 헤일런의 드럼 그리고 날카로움을 갖춘 에디 밴 헤일런의 칼날 같은 기타는 그들의 정체성을 확립했습니다.

Dance the night away

제목처럼 이 노래는 댄스곡이라고 해도 별 무리가 없을 정도로 흥겨운 리듬감을 놓치지 않습니다. 대단히 팝적이어서 그랬는지 에디 밴 헤일런은 이 곡을 만들어 놓고도 음반에 싣고 싶지 않았지만 상업적인 결과물을 기다린 음반사의 요구로 2집에 수록했죠. 플리트우드 맥의 ‘Go your own way’에서 영감을 받은 이 노래의 원래 제목은 ‘Dance, lolita, dance’였다고 합니다.

Jump

삶을 비관한 남자가 빌딩 옥상에 서 있는데 옆에 있는 사람이 그를 설득하지 않고 “Jump, go ahead jump!”라고 말한다면 자살방조죄죠? 밴 헤일런의 ‘Jump’는 바로 이런 노래입니다. 긍정적인 의미의 점프가 절대 아니죠. 1980년대 팝 메탈의 시작을 알린 이 곡에서 그 유명한 건반 연주는 에디 밴 헤일런이 직접 했는데요. 어렸을 때 피아노를 배운 것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사실 밴 헤일런은 그 이전 노래들에서도 신시사이저를 도입했지만 ‘Jump’가 건반 연주를 강조했기 때문에 당시 많은 팬들이 실망했는데요. 에디 밴 헤일런이 홀 & 오츠의 대릴 홀에게 전화를 걸어서 ‘Kiss on my list’의 건반 연주를 사용해도 되겠냐고 양해를 구해 허락을 받고 탄생한 노래입니다.

Why can’t this be love

1985년에 보컬리스트 데이비드 리 로스가 솔로활동을 위해 밴드를 탈퇴하자 밴 헤일런은 1970년대부터 활동한 싱어송라이터 새미 해거를 영입합니다. 기타리스트이자 작곡에도 실력을 갖추고 있는 그의 가세로 밴 헤일런의 음악은 한층 더 뚜렷한 멜로디와 힘이 넘치는 보컬을 장착했는데요. 1986년에 빌보드 3위에 오른 ‘Why can’t this be love’는 바로 이 두 가지를 증명하는 시작점에 있는 노래죠.

When it’s love

1988년에 공개한 8번째 앨범에 대해 사람들은 ‘도대체 이건 또 무슨 뜻이야?’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Oh, you ate one too!”를 발음되는 대로 적은 이 문장의 뜻은 ‘오! 너도 한 방 먹었네’ 정도 되겠죠. 음반의 첫 싱글로 전미 차트 5위에 랭크된 ‘When it’s love’는 에디와 알렉스 형제가 건반과 드럼으로 먼저 곡 구조를 만든 다음에 새미 해거가 그 위에 멜로디와 가사를 붙여 탄생하게 된 곡입니다.

Right now

밴 헤일런은 1991년에도 말장난을 이어갑니다. 9집은 < For Unlawful Carnal Knowledge >라는 타이틀로 발표했는데요. 이걸 해석하려고 문법 지식을 동원할 필요는 없습니다. 각 단어의 이니셜을 따면 모든 지구인들이 다 아는 하나의 낱말이 되거든요. 이 음반에서 세 번째로 커트한 싱글은 ‘Right now’인데요.

사실 밴 헤일런은 파티, 술, 담배, 여자, 자동차 같은 남자들의 로망을 대변하는 노래들을 많이 불렀죠. 그런데 새미 해거는 ‘Right now’를 공개하면서 “우리는 싸구려 섹스 노래에 질렸다. 에디와 나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곡을 만들고 싶었다”라고 밝혔습니다. 긍정의 힘을 설파한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는 내용에 맞게 대단히 공익광고스러운 스타일로 제작됐는데요. 그해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에서 건스 앤 로지스의 ‘November rain’을 제치고 올해의 뮤직비디오를 수상합니다.

Can’t stop lovin’ you

샴쌍둥이를 표지로 내건 1995년도 앨범 < Balance >는 밴 헤일런의 전성기에 마침표를 찍은 음반입니다. 여기선 빌보드 30위까지 밖에 오르지 못했지만 국내에선 유독 사랑받은 ‘Can’t stop lovin’ you’가 수록돼 있죠. 이 곡은 에디 밴 헤일런이 ‘I can’t stop loving you’를 부른 레이 찰스를 존경해서 그에게 바치는 의미로 제목을 비슷하게 정했는데요.

이 ‘I can’t stop loving you’는 원래 돈 깁슨이라는 컨트리 가수가 1958년에 발표한 오리지널을 레이 찰스가 리메이크한 겁니다. ‘Can’t stop lovin’ you’는 멤버들 간의 사랑과 우정에 대한 노래라고 밝혔습니다. 에디와 알렉스 밴 헤일런, 안소니 마이클은 얼마 후에 새미 해거를 해고하고 그룹 익스트림의 보컬리스트였던 개리 셰론을 3대 보컬리스트로 맞이해서 1998년에 < Van Halen Ⅲ >를 발표했죠.

[유병열의 기타리스트 열전]
Van Halen의 에디 밴 헤일런(Eddie Van Hal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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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열의 기타리스트 열전] Van Halen의 에디 밴 헤일런(Eddie Van Halen)

현지 시각 2020년 10월 6일 밴드 밴 헤일런(Van Halen)의 기타리스트 에디 밴 헤일런이 향년 65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IZM은 기타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고인을 추모하며 과거 업로드 되었던 특집을 모바일 페이지로 공개하고자 합니다. 첫번째 글은 2010년 6월 기타리스트 유병열 씨가 IZM에 ‘유병열의 기타리스트 열전’ 코너에 기고한 ‘Van Halen의 에디 밴 헤일런(Eddie Van Halen)’입니다.

Eddie Van Halen Recalls '1984' Battles With Producer

에디 밴 헤일런(Eddie Van Halen)은 1980년대 초반 내가 막 일렉 기타에 막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서울 혜화동 로터리 소재의 < MTV >라는 음악카페에서 라이브 영상으로 처음 만났다. 당시 첫 느낌은 “어떻게 기타를 저렇게 칠 수가 있지?”라는 생각뿐이었다. 혀를 내두르게 하는 신기(神技)의 플레이였던 것이다.

1955년생인 에디 밴 헤일런은 친형인 드러머 알렉스(Alex) 밴 헤일런과 주축이 되어 밴드 명을 자신들의 성인 밴 헤일런으로 내걸고 본격적인 음악을 시작한다. 그는 네덜란드 출신으로서 어렸을 때부터 부모로부터 클래식 교육을 혹독하게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간 두 형제는 1972년 캘리포니아 주 파사데나에서 밴드를 조직해 동네 파티 등의 행사를 다니며 아마추어 클럽 밴드로서 10대 시절을 보낸다.

그러다가 1976년 우연하게도 할리우드 클럽의 공연을 본 전설의 밴드 키스(Kiss)의 진 시몬스(Gene Simmons)에게 발탁되어 데모 테이프를 만들게 되고 ‘워너 뮤직’에 의해 1978년 세상에 첫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당시 밴 헤일런의 등장은 음악계에 하나의 매머드 쇼크였고 유수의 록 평론가들은 에디 밴 헤일런을 ‘지미 헨드릭스 이후에 가장 혁신적인 기타리스트’로 평가했다. 나 개인적으로도 기타 연주 방법론의 혁신이라는 측면에서 역사에서 에디 밴 헤일런의 높이에 오를 자가 없다고 단언한다.

그는 각종 기타 플레이어 부문상을 싹쓸이 하다시피 했다. 음악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을 뿐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하여 1984년에 발표한 앨범 <1984>에 수록된 곡 ‘Jump’는 록 밴드로서는 드물게 빌보드 싱글차트 1위에 오르는 흥행대박을 터뜨렸다. 이후에도 대중적인 성공 행진은 멈추질 않았다. 원년 멤버인 보컬 데이비드 리 로스(David Lee Roth)가 탈퇴하고 새로운 보컬 새미 헤이거(Sammy Hager)를 교체하는 진통 속에서 발표한 앨범 < 5150 >(1986년)도 엄청난 성공을 지속해 밴드의 상징인 보컬이 바뀌면 망한다는 징크스를 깨기도 했다. 팬들이 ‘밴 헤일런에 에디 밴 헤일런이 있으면 문제가 없다’고 간주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실로 밴 헤일런에 없어서 안 될 핵 중의 핵인 인물로 새로운 기타 테크닉 시대를 열어준 인물이다. 그의 플레이는 온통 실험성으로 가득했고 기타로 낼 수 없는 소리에 도전했으며 결국을 그것을 일궈내 자신의 스타일을 확립했다. 많은 기타지망생들을 미치게 한 그의 트레이드마크 플레이는 말할 것도 없이 라이트핸드 주법(피크를 쓰지 않고 양손 해머링, 플링을 이용한 속주 플레이)과 태핑(Tapping, 오른손으로 기타 플랫을 때려서 내는 옥타브 음)에 의한 하모닉스주법이다. 이것은 그냥 연주기법이 아니라 역사적 위업이라고 난 감히 단정하고자 한다.

Eddie Van Halen's 20 Greatest Solos - Rolling Stone

또한 당시엔 비브라토 성으로서만 사용된 트레몰로 아밍(Arming) 주법의 틀을 깬 그만의 아밍 주법 또한 빼놓을 수 없다. 현재도 많은 기타리스트들은 하이테크닉 교본과도 같은 플레이로 그의 주법을 공부한다. 가히 기념비라고 할 데뷔 앨범의 연주곡 ‘Eruption’을 들어보면 라이트핸드 주법과 아밍 주법이 불을 뿜는다. 특히 후반부는 사람들을 몰아지경으로 이끄는 경이의 순간을 선사한다.

스케일은 펜타토닉(반음을 제외한 5개 음) 스케일과 반음을 이용한 블루 노트 스케일 그리고 도리안(3도와 7도가 플랫 된 음) 스케일 또한 즐겨 쓴다. (도리안 음계는 클래식적이면서도 영화음악 느낌의 선율이 가능해서 프로그레시브 스타일에 많이 쓰인다) 이것은 어쩌면 그가 네델란드라는 유럽 태생이라서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러한 스케일의 활용도 중요하지만 결국엔 즉흥성과 독자적인 맛을 내기위해 불협화음적인 요소를 두려워하지 않고 아밍 주법에 의해 곡의 순차적인 뻔한 진행의 틀을 바꿔 놓기도 한다. 편곡 시 기타 리프(곡 반주의 굵은 뼈대)를 만드는 기술과 아이디어도 빼어나다는 점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당시 유행했던 메탈적인 파워코드 리프보다는 아르페지오 성 리프들과 누구나 들어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팝적인 리프들의 짜임새는 그가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발돋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두말할 것 없이 먼저 마이클 잭슨의 ‘Beat it’ 초반부를 들어보라.

Subt Rock on Twitter: "Happy Birthday Eddie Van Halen. #runningwiththedevil  #eruption #unchained #ainttalkinboutlove #atomicpunk #littledreamer  #andthecradlewillrock #beautifulgirls #panama #jump #hotforteacher  #vanhalen #evh #eddievanhalen #subtrock ...

리듬감 또한 훌륭해서 리프 연주 시 뿐만 아니라 솔로 연주할 때에도 엄청난 그루브 감이 살아있고 다이내믹함을 느낄 수 있다. 보통 당시의 록 기타리스트들은 마디에 충실한 스타일인 반면 에디의 스타일은 리듬을 끌고 가는 연주 즉 싱커페이션(전 마디 박자를 물고 들어가는)과 엇박(정박을 비껴나가는)에 의한 밀고 댕기는 듯한 거침없는 연주 또한 탁월하다.

기타 볼륨과 딜레이를 이용한 볼륨 주법 또한 획기적인 테크닉이었다. 왼손으로 지판을 때리고 오른손으로 볼륨을 올리면 어택이 늦게 따라 나오면서 마치 신디사이저 같은 소리가 만들어지는 이 테크닉 역시 기타리스트들의 혼을 뺐다. 기타 톤(소리) 또한 당시의 거칠고 헤비한 톤이 아닌 부드러우면서도 팝적인 톤으로, 기타 이펙터의 활용도 다채로운(다시 말해 이펙터를 넓게 사용할 줄 아는) 기타리스트이기도 하다.

그의 플레이는 마치 기타를 떡 주무르듯 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기타를 가지고 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지금은 보편화되었지만 당시로서는 엄두도 못 낼 엄청난 플레이였고 상기한 것처럼 마이클 잭슨의 ‘Beat it’에서의 명 리프와 기타솔로 하나만으로 팬들을 충격의 도가니에 빠지게 했다. 기타를 과격하게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곡에 충실한 해석력을 가진 멀티 플레이어로 신디사이저를 직접치기도하고 결국에는 밴 헤일런 스타일의 신디사이저 페턴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실제로 이후 팝계에선 밴 헤일런 스타일의 신디사이저 소리가 많이 쓰였다)

Rocker Eddie Van Halen, Battling Cancer, Celebrates Birthday with First  Posted Photo Since the Summer | SurvivorNet

아메리칸 하드록 밴드라고 정리하기엔 너무도 다양한 스타일을 구사하는 에디 밴 헤일런은 기타리스트로서 뿐만 아니라 뮤지션으로도 만능이라는 생각이 든다. 제2의 록 씬에 새로운 스타일의 지표를 열어준 기타리스트, 엄청나게 테크니컬 하지만 선율의 중요성을 살릴 줄 아는 기타리스트, 편안한 무대 의상에 스텝을 밞아가며 점프를 즐겨하고 늘 웃는 얼굴로 하이 테크닉을 편하게 연주하는 기타리스트가 에디 밴 헤일런이다.

암 투병을 하면서 힘겹기도 했었지만 그는 여전히 최고 록 기타연주자로 추앙받고 존경받는다. 나부터 존경의 염은 깊다. 적어도 지미 헨드릭스 이후 ‘기타연주의 혁신’이란 말은 누구도 아닌 오로지 그에게만 붙여야 할 수식 아닐까. 그는 그것으로 명성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역사를 창조했다.

헤비메탈로 춤을 추게 만든 밴 헤일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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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R.I.P. 시대의 광인 리틀 리차드 안식하다

2020년 5월 9일, 87세로 영면에 들어간 리틀 리차드는 초기 로큰롤의 싱어송라이터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다. 척 베리, 버디 홀리, 팻츠 도미노, 에디 코크란, 엘비스 프레슬리, 진 빈센트, 제리 리 루이스 등과 함께 당시까지도 미완이었던 로큰롤이 자리 잡는데 큰 역할을 했고 이후에는 비틀즈, 프린스, 프레디 머큐리, 엘튼 존 등 위대한 후배들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과시했다.

빌보드 싱글차트 1위에 오른 노래는 단 한 곡도 없고 탑 텐에 오른 노래도 겨우 3곡뿐. 우리에게 유명한 ‘Tutti frutti’와 ‘Long tall Sally’, ‘Lucille’은 10위에 오르지도 못했는데 많은 음악 관계자들은 왜 리틀 리차드를 추앙할까?

1932년 미국 조지아 주에서 리차드 웨인 페니맨의 본명으로 태어난 리틀 리차드는 40년대 후반부터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1950년대 초반에 메이저 음반사 RCA와 계약했지만 1956년에 ‘Tutti frutti’와 ‘Long tall Sally’가 인기를 얻기 전까지는 지역구 스타였다.

거대 음반사에서 첫 음반을 내고 ‘Tutti frutti’로 자신의 시대를 열었지만 그 영광은 이 곡을 리메이크한 백인 스탠더드 가수 팻 분에게 돌아갔다. 팻 분은 ‘Tutti frutti’와 ‘Long tall Sally’를 커버해 리틀 리차드의 원곡보다 좋은 차트 성적을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팻츠 도미노의 ‘Ain’t that a shame’을 리메이크해서 빌보드 싱글차트 정상에 올랐다.

그래서 리틀 리차드는 “로큰롤은 리듬 앤 블루스가 이름만 바뀐 것이다. 백인이 흑인의 로큰롤을 갈취해 그 영혼과 숨결을 팔아먹었다”는 주장을 폈고 사실 이 코멘트는 틀린 말이 아니다. 흑인 창법으로 노래한 엘비스 프레슬리, 팻츠 도미노와 자신의 노래를 부드럽게 이미지 세탁해 더 큰 사랑을 받은 팻 분이 그 증거. 이 상황에 화가 나고 환멸을 느낀 리틀 리차드는 1950년대 후반에 목사가 되겠다며 대중음악 계를 떠나 가스펠 음악에 전념했지만 곧바로 다시 팝계로 복귀하기도 했다.

리틀 리차드 노래에서 중심 악기는 피아노다. 고전음악 악기인 피아노는 점잖게 의자에 앉아서 연주하는 정적인 악기지만 리틀 리차드는 고리타분한 방법을 거부했다. 일어나 몸을 흔들며 연주하는 것은 기본이고 심지어는 오른발로 건반을 두들겼다.

고정관념을 탈피하려는 그의 무모해 보이는 이런 시도가 바로 로큰롤이다. 같은 시대에 활동한 백인 싱어 송라이터 제리 리 루이스, 음악 천재 엘튼 존, 1970년대를 수놓은 수많은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에서 건반을 친 키보디스트 그리고 기타 없는 록 밴드를 추구한 벤 폴즈 등은 리틀 리차드의 길을 따른 수혜자다.

하얗게 분칠한 얼굴에 짙은 아이라인으로 이미지를 강조한 그의 외모는 1980년대 프린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아바, 엘튼 존, 데이비드 보위, 키스, 티 렉스, 개리 글리터 같은 1970년대 초반에 전 세계에 붐을 이룬 글램록 아티스트들에게 동기부여 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뿐만 아니라 정제되지 않은 거칠고 투박한 보컬은 흑인의 자긍심을 음악으로 표출한 소울에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레이 찰스, 샘 쿡과 함께 소울 스타일을 확립했다고 평가받는 리틀 리차드의 가창에는 두려움이 없다. 직선적이며 호쾌하다. 흑인임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흑인이라 주눅 들지 말라는 소울 정신에 가장 정확하게 어울리는 가수가 바로 리틀 리차드. 흑인은 소울이고 그 소울이 바로 리틀 리차드다.

1980년대 후반에 그래미 어워즈에서 시상자로 등장한 리틀 리차드는 이렇게 얘기했다. “나는 오랫동안 로큰롤 음악을 해왔지만 단 한 번도 그래미상을 수상한 적이 없다”. 진심과 울분이 서린 이 농반진반의 말에 시상식장에 있는 모든 동료, 후배 뮤지션들은 기립박수로 그의 말에 동의했고 그를 응원했다.

1993년에 그래미 평생 공로상을 수상한 리틀 리차드가 대중음악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에피소드일 것이다. 고정관념을 타파한 ‘미치광이 로큰롤의 전설’ 리틀 리차드의 안식을 기도한다.

R.I.P. Little Richard
1932. 12.05 ~ 2020. 05. 09

– 대표곡 –
Tutti frutti
Long tall Sally
Rip it up
Lucille
Jenny Jenny
Good Golly, Miss Moly
Baby face
Slippin’ and slidin’
Ready Teddy
The girl can’t help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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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Essential Prince 20

“(세상에는) 많은 왕이 있다. 하지만 왕자는 단 한 명만 존재한다.” 프린스가 헌액된 2004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서 앨리샤 키스는 이 말로 헌사의 첫 운을 떼었다. 팝 세계가 허락한 단 한 명의 왕자, 프린스는 수많은 명작으로 많은 이들을 즐겁고 행복하게 했다.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남겼던 작품들 가운데서 스무 곡을 뽑았다.

I wanna be your lover (1979, Prince 수록)

프린스의 이름을 처음으로 알린 노래. 펑크(funk)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는 이 노래에서 그는 비지스의 영향을 받아 가성으로 곡을 애무하고 위무한다. ‘Forget me knots’로 유명한 흑인 여가수 패트리스 루센을 위해 작곡했지만 거절당한 ‘I wanna be your lover’는 당시 미국의 클럽에서 먼저 인정을 받아 프로펠러를 달고 1979년에 빌보드 싱글차트 11위를 기록했고 알앤비 차트에선 정상을 차지했다. 프린스가 광기를 드러내지 않은 비교적 평범한 디스코 펑크(funk) 곡이지만 그의 위대한 역사가 시작된 것임을 알린 명곡이다. (소승근)

I feel for you (1979, Prince 수록)

소울 여가수 샤카 칸이 1984년에 발표해서 빌보드 3위를 차지한 ‘I feel for you’가 그래미에서 최우수 알앤비 노래 부문을 수상했을 때 그 트로피의 주인공은 바로 프린스였다. 그가 1979년에 발표한 원곡을 샤카 칸이 멋들어지게 리메이크했기 때문. 프린스의 오리지널은 디스코와 펑크의 중간 접점에서 중용의 미덕을 발휘한 흙속의 진주였다. 이 노래의 진가를 알아본 많은 가수들, 매리 웰스와 마이클 잭슨의 누나 레비 잭슨 그리고 포인터 시스터스 등 여러 아티스트가 리메이크했지만 래퍼 멜르 멜과 스티비 원더가 하모니카로 조력을 보탠 샤카칸의 버전으로 드디어 빛을 보았다. (소승근)

Dirty mind (1980, Dirty Mind 수록)

1980년도에 발매된 세 번째 정규앨범의 타이틀이다. 펑크(funk)와 알앤비 장르를 바탕으로 그의 독특한 정신세계를 가감없이 표현한 곡으로 빌보드 알앤비 싱글차트에서 65위를 차지했다. 음란한 마음을 뜻하는 ‘Dirty mind’라는 제목과 ‘우리가 어디에 있던 누가 우리 주변에 있던 상관없어, 그건 중요하지 않아. 난 그저 네가 아래에 눕길 바랄 뿐이야’ 라는 가사내용은 본능에 충실한 그의 의식을 엿볼 수 있다.

보컬과 사운드의 연합은 그러한 메시지를 한층 강화한다. 리듬을 타며 반복되는 신디사이저의 멜로디,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여성이 부르는 듯한 매혹적인 미성은 외설스러움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중반부를 지나면서 노래는 절정에 이른다. 보컬의 부르짖음과 동시에 커지는 기타리프의 확장은 인간 본연의 쾌감을 자아낸다. (현민형)

When you were mine (1980, Dirty Mind 수록)

< Dirty mind >의 수록곡으로 한때 신디 로퍼가 커버하기도 했던 ‘When you were mine’. 노골적인 첫 번째 트랙 ‘Dirty mind’의 거침없던 프린스는 어디 갔을까. 뒤이어 등장하는 남자는 180도 변했다. 돈이든 옷이든 모든 것을 헌신했던 연인의 외도에 쿨하게 ‘I don’t care’로 받아치다가도 돌연 순애보로 돌변해 고백한다. 요동치는 마음을 표현할 길은 음악뿐 중반부를 넘어 설쯤 두서없이 연주되는 신시사이저는 마치 요란한 감정을 그려낸 듯 자유분방하다. 베이스와 드럼으로 만든 리듬 위에 신스사운드를 맛깔나게 곁들인 곡은 사차원 아니 그 이상의 세계관을 가진 뮤지션의 흔적이 짙게 베었다. 가끔은 이해하기 어려웠고 괴기했지만 그래서 더 특별했던 그는 보라색 빗속으로 사라졌다. (박지현)

Do me, baby (1981, Controversy 수록)

며칠 전만 해도 그는 지구상에 존재한 가장 섹시한 남자였다. 영국의 가디언(The Guardian)지는 ‘프린스는 섹스 그 자체였다’라며 그를 회고했고, 심지어는 유명 포르노 사이트 폰허브(Pornhub)는 ‘하늘이 세상에서 가장 섹시한 남자를 데리고 갔다’라며 Porn의 P를 프린스를 상징하는 보라색 마크로 교체하며 애도를 표했다. 157cm의 왜소한 체구와 우람한 근육 하나 없는 그가 세계적인 섹스 심벌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는 여성을, 섹스를 다룰 줄 아는 뮤지션이었기 때문이다. < Controversy >에 수록된 ‘Do me, baby’에서 그는 부드럽게 들이미는 신시사이저와 피아노 위에 전혀 야하지 않은 단어와 문장들로 야한 말을 쏟아내는데, 어떻게 하면 이렇게 감미롭고 고급질 수 있을까. ‘프린스는 지구상의 모든 여자를 꼬실 수 있다.’라는 말은 과장 섞인 허풍이 아니다. (이택용)

1999 (1982, 1999 수록)

< Purple Rain >으로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되기 전인 1982년에 발표한 앨범 < 1999 >의 타이틀곡이다. ‘California dreamin”으로 유명한 포크 그룹 더 마마스 & 더 파파스의 넘버원 싱글 ‘Monday Monday’의 도입부에서 힌트를 얻은 신시사이저 건반 리프가 유명한 ‘1999‘는 미국과 소련의 핵무기 경쟁에 대한 공포를 세기말 분위기에 투영했지만 프린스가 주조한 펑키(funky)한 분위기에 그런 진지함은 희석되었다. 하지만 덕분에 사람들은 ‘1999‘를 좋아했고 필 콜린스 역시 자신의 히트곡 ‘Sussudio’에서 ‘1999‘의 건반 연주를 따라하며 프린스의 팬임을 드러냈다. (소승근)

Little red Corvette (1983, 1999 수록)

팝의 영원한 왕자님이 데뷔 때부터 마냥 잘나갔던 것은 아니다. 1979년 ‘I wanna be your lover’로 처음 성공을 맛본 뒤 프린스는 3년 넘게 차트에서 침묵했다. 짧지 않은 정적은 1983년 ‘Little red Corvette’가 빌보드 싱글 차트 6위에 오름으로써 비로소 깨졌다. 노래는 프린스 최초의 빌보드 톱10 싱글이었으며 이후 프린스가 대중음악계의 슈퍼스타로 성장하는 디딤판이 됐다.

노래의 포인트는 후렴이다. 읊조리듯 낮게 부르는 버스(verse)를 지나 후렴에서 목소리가 커진다. 이 부분의 멜로디는 단번에 인식될 만큼 명쾌하다. 신시사이저도 선명하게 톤을 드러낸다. 간주와 세 번째 후렴에서 선두에 서는 일렉트릭 기타 연주는 곡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한다. 마지막에 자리하는 아득한 스캣 애드리브는 노래에 관능미와 간절한 뉘앙스를 부여했다.

선율과 편곡이 대중의 입맛에 맞았지만 ‘Dirty mind’, ‘Head’ 등 이전에 발표한 노래들보다 표현이 덜 노골적이어서 많은 이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다. (한동윤)

When doves cry (1984, Purple Rain 수록)

1999 >로 대중에 성큼 다가간 프린스는 자전적 영화 < Purple Rain >과 동명의 앨범으로 최전성기를 맞았다. 결정타는 영화감독의 요청으로 뒤늦게 만들어진 ‘When doves cry’였다. 명쾌한 구성과 중독적 비트가 댄스 본능을 자극했고, 낭랑한 신시사이저는 시종일관 귀를 간질였다. 특히 평범함을 거부하며 과감히 베이스 라인을 제거한 구조가 혁명적이었다. 베이스 없이 만들어낸 근사한 댄스 리듬에 대중은 환호했다. 차트 폭발력 또한 상당했다. 노래는 프린스의 첫 번째 빌보드 차트 1위 곡이자 그해 가장 많이 팔린 싱글이 됐고, 이후 많은 매체의 서로 다른 ‘가장 위대한 노래’ 리스트에도 빠짐없이 이름을 올렸다. 타고난 천재성을 마음껏 발휘한 시대의 명곡. (정민재)

The glamorous life (1984, 쉴라 이(Sheila E.) 곡, The Glamorous Life 수록)

프린스는 다른 가수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기부(?)했다. 뱅글스의 ‘Manic Monday’, 시나 이스턴의 ‘Sugar walls’, 마티카의 ‘Love… thy will be done’, 알리샤 키스의 ‘How come you don’t call me’, 쉴라 이(Sheila E.)의 ‘The glamorous life’ 모두 그가 만들어준 곡이다. 여름에도 밍크코트를 입고 다니며 돈 많은 남자를 꼬시려는 여자를 소재로 한 이 노래는 자연스런 멜로디와 리듬을 극대화한 쉴라 이의 퍼커션 연주가 찰떡궁합을 과시한 댄스 명곡이다. 재즈와 라틴 음악도 호흡하는 ‘Glamorous life’는 9분짜리 앨범 버전을 들어야만 프로듀서로서의 진가를 발휘한 프린스의 다재다능함을 확인할 수 있다. 프린스, 그는 존경받아야 한다. (소승근)

Darling Nikki (1984, Purple Rain 수록)

‘난 니키라는 여자를 알았지/ 섹스 프렌드라고 할 수 있어/ 난 그녀를 호텔 로비에서 만났지/ 잡지를 보면서 마스터베이션을 하고 있었어…’ < Purple Rain > LP의 A면 마지막 곡에는 프린스 하면 떠오르는 ‘외설’의 딱지가 붙었고, 이 노래를 비롯한 몇몇 퇴폐적인 노래들 때문에 티퍼 고어 여사 주도의 대중가요감시단 설립(PMRC) 법안이 통과됐다. 1980년대 대중문화 논쟁에서 거의 생필품처럼 취급된 ‘섹스’와 ‘섹슈얼리티’ 소재와 관련해 빠지지 않던 곡이다.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비판도 가해지지만 프린스가 이러한 관능적 성을 노골화하고 심지어 행동으로 옮긴 것은 보수적 성적 의식에 대한 도발이라는 해석이 더 설득력을 지닌다. 이 시기부터 팝 담론을 주도하는 의제는 섹스였다. (임진모)

Let’s go crazy (1984, Purple Rain 수록)

프린스하면 ‘Purple rain’이지만 같은 앨범에 히트곡 ‘Let’s go crazy’도 자리한다. 발랄한 건반과 원초적인 보컬은 듣는 이를 미러볼 조명이 반짝이는 댄스홀로 데려 간다. 무엇보다 곡에 생명력을 불어넣어준 것은 백밴드 더 레볼루션(The Revolution)과 함께 한 기타다. 기존 소울음악에 일렉 기타를 섞어 특별함을 높였고, 록을 선호하는 백인들까지 그의 보랏빛 음악 안에 끌어들였다.

화려한 에너지와 마지막에 폭발하는 구성은 프린스의 빠른 곡에서 등장하는 특징들이다. 용솟음치는 기타 연주는 후대 일렉트로 펑크(funk)에 영향을 주며 그를 많은 가수들이 존경하는 이로 기억되게 한다. 자극적인 제목과 가사로 국내에서 금지곡으로 지정되기도 했지만, 프린스의 넘버원 싱글 5곡 중 하나로 꼽힌다. (정유나)

Purple Rain (1984, Purple Rain 수록)

당대에 흑인 뮤지션들 가운데 왜 유독 그에게만 록 팬들의 편애가 잉태했는지를 생생히 말해주는 8분45초짜리의 중후한 록 대작이자 걸작이다. 앞의 싱글 ‘When doves cry’와 ‘Let’s go crazy’이 모두 넘버원에 등극하면서 앨범이 한참 물이 올랐을 때 3번째 싱글로 나와 전미차트 2위에 오르는 예상 밖 기염을 토했다. 이 노래가 록 팬 베이스를 구축하면서 마이클 잭슨과는 달리 록 쪽의 성원이라는 특전이 프린스에게는 주어진 것이다. 칼 같은 프린스의 기타와 입체적인 느낌의 스네어 드럼을 시작으로 시종일관 록의 사나운 공습이 무자비하게 펼쳐진다. 흑인 알앤비와 펑크 뮤지션이 하는 곡으로 보기는 어렵다. 후반부로 갈수록 그 잔혹한 반복은 거의 우기기 수준이다. “이렇게 하는데도 안 좋아할 거야?” 프린스의 매력은 이와 같은 대중모독 수준의 생고집이다. (임진모)

I would die 4 u (1984, Purple Rain 수록)

실험적인 사운드와 매력적인 멜로디로 가득한 명작 < Purple Rain >의 트랙 리스트에는 버릴 곡이 하나 없다. ‘I would die 4 u’ 역시 그러한 작품이다. 잘게 쪼개 놓은 심벌 비트, 뉴웨이브/신스팝 식 신시사이저 라인, 프린스는 미니멀한 베이스로 근사한 일렉트로 펑크(funk) 사운드를 구축하고, 사랑이나 신념 혹은 구도의 메시지처럼 보이는 가사에 팝 멜로디를 엮어 훌륭한 노래를 완성했다. 수록곡 라인업의 후반부에 등장해 프린스의 천재성을 확인시키는 ‘I would die 4 u’는 빌보드 싱글 차트 8위에 오르기도 했다. 곡의 사운드를 다음 트랙에 위치한 ‘Baby I’m a star’의 도입부가 이어받는다. (이수호)

Pop life (1985, Around the World In A Day 수록)

‘세기의 예술가 프린스’를 대표하는 상징과도 같았던 명작 < Purple Rain > 이후,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그는 일곱 번째 스튜디오 앨범 < Around the World In A Day >(1985)를 세상에 내놓았다. 음반의 중심부에 위치한 ‘Pop life’는 너무 쉬워서 오히려 어려운 곡이다. 도입부부터 명료한 베이스 라인과 피아노 코드 워크가 규칙적으로 등장하고, 그것이 끝까지 유지되면서 외형으로는 크게 발전되지 않는 듯하다. 제목과 동명의 가사가 후렴구에서 훅(hook)을 만들지만 썩 공격적이지도 않다. 그런데도 곡에는 몸을 움직이지 않고는 못 견디게 할 펑크(funk)의 호르몬이 뿜어져나온다. 기술 아닌 기술, 그만이 할 수 있는 작법일 테다. 귀를 때리는 데시벨과 끝 모르고 상승하는 전자음은 필요치 않다. ‘댄스 천재’ 프린스는 준비 동작 하나 없이, “Dig it” 한 마디로 세계를 ‘팝’하게 만들었다. (홍은솔)

Kiss (1986, Parade 수록)

줬다 뺏은 경우라 할까. 그의 천부적인 창작력은 수많은 다른 뮤지션에게 은총이 되기도 하였지만 ‘Kiss’는 이런 훈훈한 경우와는 다르다. < Around The World In A Day >가 발매되기 직전, 프린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탄생한 펑크(Funk) 밴드 마자라티(Mazarati)는 프린스에게 곡 하나를 부탁했고, 이 자비로운 스승은 그날 바로 어쿠스틱 데모를 만들어주었다. 밴드와 프로듀서 데이비드 리브킨(David Z)은 밤을 새가며 데모 버전을 완전한 악곡으로 개조하였고, 탈바꿈한 곡을 들은 스승은 자신이 만든 곡에 숨겨져 있던 잠재력에 깜짝 놀라며 결국 다시 빼앗아갔다. 이러한 웃지 못 할 탄생 비화가 숨어있는 ‘Kiss’는 후에 < Parade >에 수록되었고, 그의 세 번째 빌보드 넘버원 싱글이 된다. 매끈하게 정제된 앨범의 버전도 물론 좋지만, 거친 맛이 살아있는 7분짜리 Extended Version을 추천한다. (이택용)

Sign ‘o’ the times (1987, Sign ‘O’ The Times 수록)

프린스는 사회참여적인 아티스트이기도 했다. 조금은 블루지한 이 펑크(funk) 넘버에는 에이즈와 약물 중독, 갱, 로켓 발사, 핵 전쟁과 같은 당대의 위험 징후(sign of the times)에 대해 관조적으로 써내린 텍스트가 담겨 있다. 묵직한 베이스, 그루비한 펑크 기타, 신시사이저로 만든 효과음으로 멋진 사운드를 만들어냈을 뿐만 아니라 의미 있는 가사까지 함께 만들어낸 셈이다. 프린스의 방대한 디스코그래피 가운데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씨디 두 장짜리 마스터피스, < Sign O The Times >의 포문을 이 뛰어난 싱글이 연다. (이수호)

If I was your girlfriend (1987, Sign ‘O’ The Times 수록)

레드와 블루를 섞은 퍼플처럼. 여성과 남성을 뒤섞은 ‘양성 젠더’는 프린스에게 가장 두드러지는 색깔이다. 줄곧 ‘러브 심볼’이나 파격적인 외모를 선보여왔던 그지만 이 노래는 아예 여성 자체가 되어버린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옷을 입혀주고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지극히 여성스러운 가사를 고음과 교성으로 노래 한다. 사실 외향의 성(性)을 바꾸는 것 보다 보컬의 색을 바꾸는 것이 더 어려울 것이다. 그는 전자적인 장치로 자신의 성대의 성을 완전히 바꿔버렸고 덕분에 이 노래에서는 독특한 야릇함과 교태가 가득하다. 이 노래를 정말 여자가 불렀으면 어땠을까. 이런 궁금증은 1994년 TLC가 2집 < CrazySexyCool >에서 풀어준다. (김반야)

U got the look (1987, Sign ‘O’ The Times 수록)

롤링 스톤 선정 역대 최고의 앨범 500선 중 93위에 오른 < Sign ‘O’ The Times >의 두 번째 장을 열며 싱글 차트에서 가장 선전한 전형적 미니애폴리스 사운드 곡. 기계적 드럼머신에 대비되는 인간적 퍼커셔니스트 쉴라 이와 함께 곡을 함께 영롱하게 이끌어나가는 보컬리스트 쉬나 이스턴(Sheena Easton) 둘 다 프린스와 한 때 염문설을 뿌린 여성들이다. 음악적 천재성을 내면에 잠식시키지 않고 맑은 하늘에 뜬 무지개처럼 항시 주위에 흩뿌린 그이기에 맑은 날이든 보랏빛 비 내리는 날이든 불쑥 떠오를 것 같다. 편히 쉬시길. (이기찬)

7 (1992, Love Symbol 수록)

이름대로 산다고 했던가. 제목처럼 이 노래는 1993년에 빌보드 싱글차트 7위를 기록했다. 1960년대 소울 가수 오티스 레딩과 칼라 토마스의 듀엣곡 ‘Tramp’를 샘플링한 ‘7’은 신곡이었지만 마치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은 멜로디로 대중을 포섭했다. 그의 다른 노래들처럼 범상치 않은 코드워크를 가지고 있지만 친숙하게 다가가는 그만의 작곡, 편곡 문법은 ‘7’에서도 고스란히 꿈틀댄다. 프린스의 음악은 살아있는 생명체이며 깨어있는 소울이다. (소승근)

The most beautiful girl in the world (1994, The Gold Experience 수록)

1993년 어느 날 팝의 황제는 뺨에 ‘SLAVE’를 적고 대중 앞에 나타난다. 그는 거대 음반사와 법정공방을 다투며 자신을 노예로 표현했다. “워너 브라더스는 내 이름을 빼앗아 갔다. 그들은 ‘프린스’를 이용해 돈벌기 바빴고, 난 그들의 돈줄이나 다름없었다.” 아티스트의 독립성과 자유를 외치던 그는 자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음할 수 없는 기호’로 이름을 바꾼다. 여성기호와 남성기호를 합친 듯한 이 상징(‘러브 심볼’이라고도 불린다.) 하에 발매된 첫 싱글이 바로 ‘The most beautiful girl in the world’이며 이 곡은 빌보드 싱글차트 3위의 쾌거를 이뤄낸다.

느린 템포와 서정적 가사, 그리고 듣기 좋은 멜로디는 완벽한 발라드의 공식이 아닐까. 기타와 건반 위를 유려하게 훑는 팔세토 창법은 물론, 곡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저음 보컬은 가사에 진중함을 더하며 매력을 배가한다. 사실 아름다운 상대를 찬양하는 이 노래는 프린스가 사랑한 댄서 메이트 가르시아를 향한 세레나데지만 그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고, 매번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여성들을 뮤직비디오에 등장시키며 감동적인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외적 아름다움이 아닌, 여성 그 자체를 사랑한 프린스의 희망적인 러브송. (정연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