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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의 살 권리를 노래하다

자타가 공인하는 자유와 평등의 국가, 미국의 이면에는 흑인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과 멸시의 역사가 존재한다. 강제 이주 및 노예제로 건국 초기부터 고통을 받았던 흑인들은 노예제가 철폐된 이후에도 오랜 기간 백인들과 동등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전설적 여가수 빌리 홀리데이는 1939년 ‘Strange fruit’에서 적나라한 비유를 통해 참혹한 현실을 드러냈다. 노예제 폐지는 명목상의 해방이었을뿐, 실질적 차별은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짐 크로우 법’을 두고 각층의 목소리가 충돌하고, 말콤 엑스와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등장했던 격동의 1960년대 전후, 혼란스러운 흑인들을 위로한 것은 음악이었다. 샘 쿡은 ‘A change is gonna come’으로 따뜻한 격려를 건넸고, 제임스 브라운의 ‘Say it loud – I’m Black and I’m Proud’는 흥겨운 펑크(funk)로 사람들을 독려했다. 

밥 말리의 ‘Redemption song’퀸시 존스가 주도한 1980년대 인기 가수들의 대형 프로젝트 ‘We are the world’는 더 넓은 메시지를 함의했지만, 흑인들에게는 연대의 송가와도 같았다. 1990년대에 들어 마이클 잭슨은 ‘Black or white’로 흑백의 화합을 노래했고, 1993년 슈퍼볼 하프타임 쇼에서는 대규모 카드 섹션으로 미국 사회에 경종을 울리기도 했다.

‘Strange fruit’으로부터 70년이 흐른 지난 2009년, 미국은 건국 이래 최초로 흑인 대통령을 맞이했다. 척 베리와 리틀 리차드, 마빈 게이와 제임스 브라운을 거쳐 1980년대 마이클 잭슨에 이르자 음악계 최전선에 서는 흑인 아티스트들도 다수 등장했다. 1990년대를 전후로 힙합과 뉴잭스윙, 알앤비 등 흑인 음악이 시장에 돌풍을 일으켰고, 어셔와 비욘세, 알리시아 키스 등 걸출한 팝스타들이 연속으로 등장하며 블랙 뮤직은 최전성기를 맞았다. 불과 150여년 전만 해도 ‘민스트럴시'(우스꽝스러운 흑인 분장을 한 백인들의 엔터테인먼트 쇼)가 선풍적 인기를 모았던 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감개무량이며 천지개벽이다.

많은 부분에서 인종의 평등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지만, 여전히 미국을 관통하는 주요 키워드는 흑백 갈등이다. 트레이본 마틴 살인 사건 등 2012년 이후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미국 내 잔존하는 흑인에 대한 편견과 멸시를 수면 위로 끌어 올렸고, 흑인 사회는 ‘흑인도 살 권리가 있다'(‘Black lives matter’)며 외치기 시작했다. 음악인들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50여년 전 샘 쿡이 그랬듯, 오늘 날을 살아가는 뮤지션들은 음악으로 흑인들을 독려하는 동시에 끈질기게 남아있는 인종간 반목을 없애기 위한 노래를 내놓았다.

2013년 말 개봉한 영화 < 노예 12년 >은 비인간적 인종 차별이 얼마나 비극적인 역사를 만들었는지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 일깨움이 채 가시기도 전인 2014년 8월, 퍼거슨 시에서 비무장 흑인 소년이 백인 경찰 총에 숨지는 사태가 일어나자 흑인 사회의 집단 움직임은 뚜렷해졌다. 연말까지 평화 집회와 폭력이 수반된 소요가 계속되며 좀처럼 진정되지 않던 분위기에 커먼(Common)과 존 레전드의 ‘Glory’는 새로운 앤썸(anthem)이 됐다. 1960년대 흑인 민권 운동을 조명한 영화 < 셀마 >의 사운드트랙으로 사용된 노래는 성가를 연상케하는 진행과 현실을 녹여낸 가사로 뜨거운 반응을 모았다.

비슷한 시기에 디안젤로가 14년 만에 ‘검은 구세주’라는 뜻의 < Black Messiah >를 발표하자 분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거창한 음반 제목과 달리 수록곡 다수가 보편적 사랑 노래로 채워졌지만, ‘우린 그저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원했다’고 읊조리는 ‘The charade’와 인트로부터 1분 30초간을 1960, 70년대의 급진, 과격주의 흑인 운동조직 ‘흑표당’의 유명 연설들로 채운 ‘1000 deaths’가 흑인 사회를 결집시켰다. 팝의 요소를 차용해 수용 범위를 넓힌 피비알앤비(PBR&B) 등이 주류로 부상한 것과 관계없이 정통의 흑인 음악에 충실하는 완강한 스탠스를 보인 것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이듬해인 2015년 3월 발매된 켄드릭 라마의 < To Pimp A Butterfly >는 이 모든 것의 정점이었다. 블루스와 재즈, 펑크(funk)와 알앤비 등 흑인 음악을 총 망라해 자양분 삼고, 거대한 스토리텔링 안에 흑인으로서의 자부심과 고통을 녹여낸 걸작에 흑인 사회는 뜨겁게 응답했다. 그는 돈과 섹스, 마약에 몰두하는 여타 랩퍼와는 확연히 달랐다. ‘피부색으로 적이 될 수 없다’고 일갈하는 ‘Complexion(A Zulu Love)’, 뼈 아픈 노예의 역사와 상술한 트레이본 마틴 살인 사건을 각각 언급한 ‘Wesley’s theory’‘The blacker than berry’ 등 앨범의 모든 곡이 가려운 곳을 긁어냈다. ‘마틴 루터 킹의 환생’이라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 To Pimp A Butterfly >의 충격파가 한창이던 2015년 4월, 백인 경관에 의해 흑인 청년이 목숨을 잃는 사건이 일주일 사이에 2회 연속으로 벌어지자 흑인 사회는 분노에 휩싸였다. 사건이 벌어진 곳 중 하나인 볼티모어에서는 대규모 폭력 시위가 벌어졌고, 비욘세와 아이스 큐브(Ice Cube) 등 많은 흑인 아티스트가 경찰을 규탄하고 시위대를 지지한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인종과 무관하게 지치고 상처입은 볼티모어를 음악으로 위로한 것은 록 레전드 프린스였다. 평소 저작권에 엄격해 유튜브에 동영상 게시도 꺼리던 그는 ‘모두 총을 치워버리고 서로 사랑하자’는 인류애적 메시지를 담은 흥겨운 펑크(funk)곡 ‘Baltimore’를 무료로 공개하며 평화와 화합을 노래했다.

“정의가 없는 곳에는 평화도 존재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또 다시 피 흘리는 날을 겪어야 하나요?
우는 것도, 사람들이 죽는 것에도 지쳤습니다.
모두 총을 치워버립시다.”
– ‘Baltimore’, 프린스(Prince)

지난 2월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50회 슈퍼볼 하프타임 쇼는 콜드플레이의 몫이었으나, 정작 언론과 SNS를 달군 것은 단 3분간 무대에 오른 비욘세였다. 주체적 여성상을 강조하던 기존 기조에 흑인으로서의 자긍심을 더한 신곡 ‘Formation’을 슈퍼볼 하루 전에 기습 발매하며 관심을 독차지한 그는, 음원 공개 이튿날 하프타임 쇼에서 선보인 신곡 무대로 단숨에 논란의 중심이 됐다.

검은 제복과 베레모 차림을 한 댄서들의 의상과, 주먹을 쥔 채 하늘로 팔을 뻗는 등의 안무가 1960년대 ‘흑표당’을 떠오르게 한다는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을 비롯, 비욘세를 향한 보수세력의 맹공이 이어졌고 급기야 SNS에서는 반(反)비욘세 시위를 도모하는 움직임까지 생겨났다. 노래는 특정 음원 서비스 업체(TIDAL)에서만 판매되었고 뮤직비디오 역시 링크가 없으면 감상이 불가능했지만 사회적 파급력은 상당했다.

자유와 평등의 국가 미국은 정작 백인을 제외한 다른 인종에게 온전한 자유, 평등을 허용하지 않았다. 버스의 좌석 구분은 없어졌지만 고질적인 편견에서 비롯된 멸시와 기저에 깔린 백인 우월주의는 아직 남아있다. 빠르게 바뀐 세상에 비하면 지독하게 오래 지속된 갈등이다.

70년 전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로 위안을 얻었을 세대의 손자, 손녀들이 이제는 켄드릭 라마와 비욘세의 격려를 받는다. ‘Black lives matter’ 슬로건이 한창 펄럭이는 지금, 미국은 가던 길과 새로운 길, 그 기로에 서있다.

(20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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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ential Prince 20

“(세상에는) 많은 왕이 있다. 하지만 왕자는 단 한 명만 존재한다.” 프린스가 헌액된 2004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서 앨리샤 키스는 이 말로 헌사의 첫 운을 떼었다. 팝 세계가 허락한 단 한 명의 왕자, 프린스는 수많은 명작으로 많은 이들을 즐겁고 행복하게 했다.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남겼던 작품들 가운데서 스무 곡을 뽑았다.

I wanna be your lover (1979, Prince 수록)

프린스의 이름을 처음으로 알린 노래. 펑크(funk)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는 이 노래에서 그는 비지스의 영향을 받아 가성으로 곡을 애무하고 위무한다. ‘Forget me knots’로 유명한 흑인 여가수 패트리스 루센을 위해 작곡했지만 거절당한 ‘I wanna be your lover’는 당시 미국의 클럽에서 먼저 인정을 받아 프로펠러를 달고 1979년에 빌보드 싱글차트 11위를 기록했고 알앤비 차트에선 정상을 차지했다. 프린스가 광기를 드러내지 않은 비교적 평범한 디스코 펑크(funk) 곡이지만 그의 위대한 역사가 시작된 것임을 알린 명곡이다. (소승근)

I feel for you (1979, Prince 수록)

소울 여가수 샤카 칸이 1984년에 발표해서 빌보드 3위를 차지한 ‘I feel for you’가 그래미에서 최우수 알앤비 노래 부문을 수상했을 때 그 트로피의 주인공은 바로 프린스였다. 그가 1979년에 발표한 원곡을 샤카 칸이 멋들어지게 리메이크했기 때문. 프린스의 오리지널은 디스코와 펑크의 중간 접점에서 중용의 미덕을 발휘한 흙속의 진주였다. 이 노래의 진가를 알아본 많은 가수들, 매리 웰스와 마이클 잭슨의 누나 레비 잭슨 그리고 포인터 시스터스 등 여러 아티스트가 리메이크했지만 래퍼 멜르 멜과 스티비 원더가 하모니카로 조력을 보탠 샤카칸의 버전으로 드디어 빛을 보았다. (소승근)

Dirty mind (1980, Dirty Mind 수록)

1980년도에 발매된 세 번째 정규앨범의 타이틀이다. 펑크(funk)와 알앤비 장르를 바탕으로 그의 독특한 정신세계를 가감없이 표현한 곡으로 빌보드 알앤비 싱글차트에서 65위를 차지했다. 음란한 마음을 뜻하는 ‘Dirty mind’라는 제목과 ‘우리가 어디에 있던 누가 우리 주변에 있던 상관없어, 그건 중요하지 않아. 난 그저 네가 아래에 눕길 바랄 뿐이야’ 라는 가사내용은 본능에 충실한 그의 의식을 엿볼 수 있다.

보컬과 사운드의 연합은 그러한 메시지를 한층 강화한다. 리듬을 타며 반복되는 신디사이저의 멜로디,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여성이 부르는 듯한 매혹적인 미성은 외설스러움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중반부를 지나면서 노래는 절정에 이른다. 보컬의 부르짖음과 동시에 커지는 기타리프의 확장은 인간 본연의 쾌감을 자아낸다. (현민형)

When you were mine (1980, Dirty Mind 수록)

< Dirty mind >의 수록곡으로 한때 신디 로퍼가 커버하기도 했던 ‘When you were mine’. 노골적인 첫 번째 트랙 ‘Dirty mind’의 거침없던 프린스는 어디 갔을까. 뒤이어 등장하는 남자는 180도 변했다. 돈이든 옷이든 모든 것을 헌신했던 연인의 외도에 쿨하게 ‘I don’t care’로 받아치다가도 돌연 순애보로 돌변해 고백한다. 요동치는 마음을 표현할 길은 음악뿐 중반부를 넘어 설쯤 두서없이 연주되는 신시사이저는 마치 요란한 감정을 그려낸 듯 자유분방하다. 베이스와 드럼으로 만든 리듬 위에 신스사운드를 맛깔나게 곁들인 곡은 사차원 아니 그 이상의 세계관을 가진 뮤지션의 흔적이 짙게 베었다. 가끔은 이해하기 어려웠고 괴기했지만 그래서 더 특별했던 그는 보라색 빗속으로 사라졌다. (박지현)

Do me, baby (1981, Controversy 수록)

며칠 전만 해도 그는 지구상에 존재한 가장 섹시한 남자였다. 영국의 가디언(The Guardian)지는 ‘프린스는 섹스 그 자체였다’라며 그를 회고했고, 심지어는 유명 포르노 사이트 폰허브(Pornhub)는 ‘하늘이 세상에서 가장 섹시한 남자를 데리고 갔다’라며 Porn의 P를 프린스를 상징하는 보라색 마크로 교체하며 애도를 표했다. 157cm의 왜소한 체구와 우람한 근육 하나 없는 그가 세계적인 섹스 심벌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는 여성을, 섹스를 다룰 줄 아는 뮤지션이었기 때문이다. < Controversy >에 수록된 ‘Do me, baby’에서 그는 부드럽게 들이미는 신시사이저와 피아노 위에 전혀 야하지 않은 단어와 문장들로 야한 말을 쏟아내는데, 어떻게 하면 이렇게 감미롭고 고급질 수 있을까. ‘프린스는 지구상의 모든 여자를 꼬실 수 있다.’라는 말은 과장 섞인 허풍이 아니다. (이택용)

1999 (1982, 1999 수록)

< Purple Rain >으로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되기 전인 1982년에 발표한 앨범 < 1999 >의 타이틀곡이다. ‘California dreamin”으로 유명한 포크 그룹 더 마마스 & 더 파파스의 넘버원 싱글 ‘Monday Monday’의 도입부에서 힌트를 얻은 신시사이저 건반 리프가 유명한 ‘1999‘는 미국과 소련의 핵무기 경쟁에 대한 공포를 세기말 분위기에 투영했지만 프린스가 주조한 펑키(funky)한 분위기에 그런 진지함은 희석되었다. 하지만 덕분에 사람들은 ‘1999‘를 좋아했고 필 콜린스 역시 자신의 히트곡 ‘Sussudio’에서 ‘1999‘의 건반 연주를 따라하며 프린스의 팬임을 드러냈다. (소승근)

Little red Corvette (1983, 1999 수록)

팝의 영원한 왕자님이 데뷔 때부터 마냥 잘나갔던 것은 아니다. 1979년 ‘I wanna be your lover’로 처음 성공을 맛본 뒤 프린스는 3년 넘게 차트에서 침묵했다. 짧지 않은 정적은 1983년 ‘Little red Corvette’가 빌보드 싱글 차트 6위에 오름으로써 비로소 깨졌다. 노래는 프린스 최초의 빌보드 톱10 싱글이었으며 이후 프린스가 대중음악계의 슈퍼스타로 성장하는 디딤판이 됐다.

노래의 포인트는 후렴이다. 읊조리듯 낮게 부르는 버스(verse)를 지나 후렴에서 목소리가 커진다. 이 부분의 멜로디는 단번에 인식될 만큼 명쾌하다. 신시사이저도 선명하게 톤을 드러낸다. 간주와 세 번째 후렴에서 선두에 서는 일렉트릭 기타 연주는 곡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한다. 마지막에 자리하는 아득한 스캣 애드리브는 노래에 관능미와 간절한 뉘앙스를 부여했다.

선율과 편곡이 대중의 입맛에 맞았지만 ‘Dirty mind’, ‘Head’ 등 이전에 발표한 노래들보다 표현이 덜 노골적이어서 많은 이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다. (한동윤)

When doves cry (1984, Purple Rain 수록)

1999 >로 대중에 성큼 다가간 프린스는 자전적 영화 < Purple Rain >과 동명의 앨범으로 최전성기를 맞았다. 결정타는 영화감독의 요청으로 뒤늦게 만들어진 ‘When doves cry’였다. 명쾌한 구성과 중독적 비트가 댄스 본능을 자극했고, 낭랑한 신시사이저는 시종일관 귀를 간질였다. 특히 평범함을 거부하며 과감히 베이스 라인을 제거한 구조가 혁명적이었다. 베이스 없이 만들어낸 근사한 댄스 리듬에 대중은 환호했다. 차트 폭발력 또한 상당했다. 노래는 프린스의 첫 번째 빌보드 차트 1위 곡이자 그해 가장 많이 팔린 싱글이 됐고, 이후 많은 매체의 서로 다른 ‘가장 위대한 노래’ 리스트에도 빠짐없이 이름을 올렸다. 타고난 천재성을 마음껏 발휘한 시대의 명곡. (정민재)

The glamorous life (1984, 쉴라 이(Sheila E.) 곡, The Glamorous Life 수록)

프린스는 다른 가수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기부(?)했다. 뱅글스의 ‘Manic Monday’, 시나 이스턴의 ‘Sugar walls’, 마티카의 ‘Love… thy will be done’, 알리샤 키스의 ‘How come you don’t call me’, 쉴라 이(Sheila E.)의 ‘The glamorous life’ 모두 그가 만들어준 곡이다. 여름에도 밍크코트를 입고 다니며 돈 많은 남자를 꼬시려는 여자를 소재로 한 이 노래는 자연스런 멜로디와 리듬을 극대화한 쉴라 이의 퍼커션 연주가 찰떡궁합을 과시한 댄스 명곡이다. 재즈와 라틴 음악도 호흡하는 ‘Glamorous life’는 9분짜리 앨범 버전을 들어야만 프로듀서로서의 진가를 발휘한 프린스의 다재다능함을 확인할 수 있다. 프린스, 그는 존경받아야 한다. (소승근)

Darling Nikki (1984, Purple Rain 수록)

‘난 니키라는 여자를 알았지/ 섹스 프렌드라고 할 수 있어/ 난 그녀를 호텔 로비에서 만났지/ 잡지를 보면서 마스터베이션을 하고 있었어…’ < Purple Rain > LP의 A면 마지막 곡에는 프린스 하면 떠오르는 ‘외설’의 딱지가 붙었고, 이 노래를 비롯한 몇몇 퇴폐적인 노래들 때문에 티퍼 고어 여사 주도의 대중가요감시단 설립(PMRC) 법안이 통과됐다. 1980년대 대중문화 논쟁에서 거의 생필품처럼 취급된 ‘섹스’와 ‘섹슈얼리티’ 소재와 관련해 빠지지 않던 곡이다.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비판도 가해지지만 프린스가 이러한 관능적 성을 노골화하고 심지어 행동으로 옮긴 것은 보수적 성적 의식에 대한 도발이라는 해석이 더 설득력을 지닌다. 이 시기부터 팝 담론을 주도하는 의제는 섹스였다. (임진모)

Let’s go crazy (1984, Purple Rain 수록)

프린스하면 ‘Purple rain’이지만 같은 앨범에 히트곡 ‘Let’s go crazy’도 자리한다. 발랄한 건반과 원초적인 보컬은 듣는 이를 미러볼 조명이 반짝이는 댄스홀로 데려 간다. 무엇보다 곡에 생명력을 불어넣어준 것은 백밴드 더 레볼루션(The Revolution)과 함께 한 기타다. 기존 소울음악에 일렉 기타를 섞어 특별함을 높였고, 록을 선호하는 백인들까지 그의 보랏빛 음악 안에 끌어들였다.

화려한 에너지와 마지막에 폭발하는 구성은 프린스의 빠른 곡에서 등장하는 특징들이다. 용솟음치는 기타 연주는 후대 일렉트로 펑크(funk)에 영향을 주며 그를 많은 가수들이 존경하는 이로 기억되게 한다. 자극적인 제목과 가사로 국내에서 금지곡으로 지정되기도 했지만, 프린스의 넘버원 싱글 5곡 중 하나로 꼽힌다. (정유나)

Purple Rain (1984, Purple Rain 수록)

당대에 흑인 뮤지션들 가운데 왜 유독 그에게만 록 팬들의 편애가 잉태했는지를 생생히 말해주는 8분45초짜리의 중후한 록 대작이자 걸작이다. 앞의 싱글 ‘When doves cry’와 ‘Let’s go crazy’이 모두 넘버원에 등극하면서 앨범이 한참 물이 올랐을 때 3번째 싱글로 나와 전미차트 2위에 오르는 예상 밖 기염을 토했다. 이 노래가 록 팬 베이스를 구축하면서 마이클 잭슨과는 달리 록 쪽의 성원이라는 특전이 프린스에게는 주어진 것이다. 칼 같은 프린스의 기타와 입체적인 느낌의 스네어 드럼을 시작으로 시종일관 록의 사나운 공습이 무자비하게 펼쳐진다. 흑인 알앤비와 펑크 뮤지션이 하는 곡으로 보기는 어렵다. 후반부로 갈수록 그 잔혹한 반복은 거의 우기기 수준이다. “이렇게 하는데도 안 좋아할 거야?” 프린스의 매력은 이와 같은 대중모독 수준의 생고집이다. (임진모)

I would die 4 u (1984, Purple Rain 수록)

실험적인 사운드와 매력적인 멜로디로 가득한 명작 < Purple Rain >의 트랙 리스트에는 버릴 곡이 하나 없다. ‘I would die 4 u’ 역시 그러한 작품이다. 잘게 쪼개 놓은 심벌 비트, 뉴웨이브/신스팝 식 신시사이저 라인, 프린스는 미니멀한 베이스로 근사한 일렉트로 펑크(funk) 사운드를 구축하고, 사랑이나 신념 혹은 구도의 메시지처럼 보이는 가사에 팝 멜로디를 엮어 훌륭한 노래를 완성했다. 수록곡 라인업의 후반부에 등장해 프린스의 천재성을 확인시키는 ‘I would die 4 u’는 빌보드 싱글 차트 8위에 오르기도 했다. 곡의 사운드를 다음 트랙에 위치한 ‘Baby I’m a star’의 도입부가 이어받는다. (이수호)

Pop life (1985, Around the World In A Day 수록)

‘세기의 예술가 프린스’를 대표하는 상징과도 같았던 명작 < Purple Rain > 이후,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그는 일곱 번째 스튜디오 앨범 < Around the World In A Day >(1985)를 세상에 내놓았다. 음반의 중심부에 위치한 ‘Pop life’는 너무 쉬워서 오히려 어려운 곡이다. 도입부부터 명료한 베이스 라인과 피아노 코드 워크가 규칙적으로 등장하고, 그것이 끝까지 유지되면서 외형으로는 크게 발전되지 않는 듯하다. 제목과 동명의 가사가 후렴구에서 훅(hook)을 만들지만 썩 공격적이지도 않다. 그런데도 곡에는 몸을 움직이지 않고는 못 견디게 할 펑크(funk)의 호르몬이 뿜어져나온다. 기술 아닌 기술, 그만이 할 수 있는 작법일 테다. 귀를 때리는 데시벨과 끝 모르고 상승하는 전자음은 필요치 않다. ‘댄스 천재’ 프린스는 준비 동작 하나 없이, “Dig it” 한 마디로 세계를 ‘팝’하게 만들었다. (홍은솔)

Kiss (1986, Parade 수록)

줬다 뺏은 경우라 할까. 그의 천부적인 창작력은 수많은 다른 뮤지션에게 은총이 되기도 하였지만 ‘Kiss’는 이런 훈훈한 경우와는 다르다. < Around The World In A Day >가 발매되기 직전, 프린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탄생한 펑크(Funk) 밴드 마자라티(Mazarati)는 프린스에게 곡 하나를 부탁했고, 이 자비로운 스승은 그날 바로 어쿠스틱 데모를 만들어주었다. 밴드와 프로듀서 데이비드 리브킨(David Z)은 밤을 새가며 데모 버전을 완전한 악곡으로 개조하였고, 탈바꿈한 곡을 들은 스승은 자신이 만든 곡에 숨겨져 있던 잠재력에 깜짝 놀라며 결국 다시 빼앗아갔다. 이러한 웃지 못 할 탄생 비화가 숨어있는 ‘Kiss’는 후에 < Parade >에 수록되었고, 그의 세 번째 빌보드 넘버원 싱글이 된다. 매끈하게 정제된 앨범의 버전도 물론 좋지만, 거친 맛이 살아있는 7분짜리 Extended Version을 추천한다. (이택용)

Sign ‘o’ the times (1987, Sign ‘O’ The Times 수록)

프린스는 사회참여적인 아티스트이기도 했다. 조금은 블루지한 이 펑크(funk) 넘버에는 에이즈와 약물 중독, 갱, 로켓 발사, 핵 전쟁과 같은 당대의 위험 징후(sign of the times)에 대해 관조적으로 써내린 텍스트가 담겨 있다. 묵직한 베이스, 그루비한 펑크 기타, 신시사이저로 만든 효과음으로 멋진 사운드를 만들어냈을 뿐만 아니라 의미 있는 가사까지 함께 만들어낸 셈이다. 프린스의 방대한 디스코그래피 가운데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씨디 두 장짜리 마스터피스, < Sign O The Times >의 포문을 이 뛰어난 싱글이 연다. (이수호)

If I was your girlfriend (1987, Sign ‘O’ The Times 수록)

레드와 블루를 섞은 퍼플처럼. 여성과 남성을 뒤섞은 ‘양성 젠더’는 프린스에게 가장 두드러지는 색깔이다. 줄곧 ‘러브 심볼’이나 파격적인 외모를 선보여왔던 그지만 이 노래는 아예 여성 자체가 되어버린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옷을 입혀주고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지극히 여성스러운 가사를 고음과 교성으로 노래 한다. 사실 외향의 성(性)을 바꾸는 것 보다 보컬의 색을 바꾸는 것이 더 어려울 것이다. 그는 전자적인 장치로 자신의 성대의 성을 완전히 바꿔버렸고 덕분에 이 노래에서는 독특한 야릇함과 교태가 가득하다. 이 노래를 정말 여자가 불렀으면 어땠을까. 이런 궁금증은 1994년 TLC가 2집 < CrazySexyCool >에서 풀어준다. (김반야)

U got the look (1987, Sign ‘O’ The Times 수록)

롤링 스톤 선정 역대 최고의 앨범 500선 중 93위에 오른 < Sign ‘O’ The Times >의 두 번째 장을 열며 싱글 차트에서 가장 선전한 전형적 미니애폴리스 사운드 곡. 기계적 드럼머신에 대비되는 인간적 퍼커셔니스트 쉴라 이와 함께 곡을 함께 영롱하게 이끌어나가는 보컬리스트 쉬나 이스턴(Sheena Easton) 둘 다 프린스와 한 때 염문설을 뿌린 여성들이다. 음악적 천재성을 내면에 잠식시키지 않고 맑은 하늘에 뜬 무지개처럼 항시 주위에 흩뿌린 그이기에 맑은 날이든 보랏빛 비 내리는 날이든 불쑥 떠오를 것 같다. 편히 쉬시길. (이기찬)

7 (1992, Love Symbol 수록)

이름대로 산다고 했던가. 제목처럼 이 노래는 1993년에 빌보드 싱글차트 7위를 기록했다. 1960년대 소울 가수 오티스 레딩과 칼라 토마스의 듀엣곡 ‘Tramp’를 샘플링한 ‘7’은 신곡이었지만 마치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은 멜로디로 대중을 포섭했다. 그의 다른 노래들처럼 범상치 않은 코드워크를 가지고 있지만 친숙하게 다가가는 그만의 작곡, 편곡 문법은 ‘7’에서도 고스란히 꿈틀댄다. 프린스의 음악은 살아있는 생명체이며 깨어있는 소울이다. (소승근)

The most beautiful girl in the world (1994, The Gold Experience 수록)

1993년 어느 날 팝의 황제는 뺨에 ‘SLAVE’를 적고 대중 앞에 나타난다. 그는 거대 음반사와 법정공방을 다투며 자신을 노예로 표현했다. “워너 브라더스는 내 이름을 빼앗아 갔다. 그들은 ‘프린스’를 이용해 돈벌기 바빴고, 난 그들의 돈줄이나 다름없었다.” 아티스트의 독립성과 자유를 외치던 그는 자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음할 수 없는 기호’로 이름을 바꾼다. 여성기호와 남성기호를 합친 듯한 이 상징(‘러브 심볼’이라고도 불린다.) 하에 발매된 첫 싱글이 바로 ‘The most beautiful girl in the world’이며 이 곡은 빌보드 싱글차트 3위의 쾌거를 이뤄낸다.

느린 템포와 서정적 가사, 그리고 듣기 좋은 멜로디는 완벽한 발라드의 공식이 아닐까. 기타와 건반 위를 유려하게 훑는 팔세토 창법은 물론, 곡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저음 보컬은 가사에 진중함을 더하며 매력을 배가한다. 사실 아름다운 상대를 찬양하는 이 노래는 프린스가 사랑한 댄서 메이트 가르시아를 향한 세레나데지만 그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고, 매번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여성들을 뮤직비디오에 등장시키며 감동적인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외적 아름다움이 아닌, 여성 그 자체를 사랑한 프린스의 희망적인 러브송. (정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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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구절로 프린스 이해하기

4월21일 전해진 프린스의 돌연사는 우리에게 데이비드 보위의 사망에 못지않은 충격을 던져주었다. 서구 언론은 2016년을 이미 비극의 해로 규정하고 있다. 프린스(Prince)는 천재와 기인의 평판 아래 1980-90년대 전성기를 누리면서 무수한 명곡과 명반을 남겼다. 그의 삶과 의식을 축약하는 10개의 구절을 통해 그의 위대한 음악발자취를 더듬어보기로 한다.

슈퍼 펑키(Funky) 판타지

그의 음악은 흑인음악의 역사에 걸친 모든 장르의 요소들이 뭉개진 것 같으나 엄연히 개체적 느낌이 살아있다. 미국의 정체성인 ‘샐러드 보울’을 닮았다. 이게 프린스 음악의 핵심이며 크로스오버라는 용어는 어쩌면 그의 음악을 두고 써야할 말이다. 따라서 그의 음악에 대한 통상적인 장르 분류는 의미가 없다. 딱히 뭐라고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살아 숨 쉬는 개체 가운데 펑크(Funk)의 느낌이 가장 먼저 들어온다. 전성기 시절의 ‘1999‘, ‘Dirty mind’, ‘Raspberry beret’, ‘Sign ‘o’ the times’ 등 대부분 곡들이 펑키 사운드가 제공하는 탄력적, 입체적이며 핫한 리듬의 환희다. 프린스 위 계보에 ‘제임스 브라운’과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가 있다는 규정은 그가 크로스오버 속에서도 펑크가 지향한 아프로(Afro) 아이덴티티를 견지했음을 의미한다.

“록 인구도 그를 사랑했다!”

전성기에 결성한 ‘레볼루션’ 그리고 이어서 ‘뉴 파워 제네레이션’이란 밴드는 멜로디와 코드워크 이상으로 펑크 리듬을 밀어대려는 욕구의 산물이다. 그러다 보니 지향이 비슷한 록과 부담 없이 손을 잡게 된다. 프린스 음악은 곧 펑크 록(Funk rock)이다. 하지만 이 록의 터치가 상대적으로 짙은 ‘블랙’ 감성을 가리는 결과를 초래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언젠가 “난 하나의 특정 문화풍토에서 성장하지 않았다. 난 펑크도 아니고, 리듬 앤 블루스 가수도 아니다. 백인이 많은 미네소타 주의 중산층 출신이기 때문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반드시 흑인감성에만 충절하지 않았음을 가리킨다. 본인이 기타리스트였기에 더욱 확연히 드러난 록의 감성으로 인해 1980년대, 그 펄펄 날던 시절에 프린스는 마이클 잭슨보다 훨씬 더 많은 록 인구를 규합했다. 그것을 증명하는 단 하나의 곡이 다름 아닌 ‘Purple rain’이다.

마이클 잭슨의 라이벌, 프린스

상기한대로 록 팬들의 선택은 마이클 잭슨이 아닌 프린스였다. 1980년대를 놓고 봤을 때 마이클 잭슨이 비틀스라면 프린스는 롤링 스톤스였다. 동갑인 둘을 놓고 음악 팬들 사이에도 암암리에 경쟁의식이 작용했다. 빌보드차트는 그 시대를 정리하면서 전체 1위를 마이클 잭슨(총 2080점), 2위를 프린스(2019점)로 집계했다. 별 차이나지 않는다. 프린스 같은 까칠하고 훨씬 덜 대중적인 음악이 등위(等位)를 누렸다는 것은 경이적이다. ‘When doves cry’, ‘Let’s go crazy’, ‘Kiss’, ‘Batdance’, ‘Cream’ 등 무려 다섯 곡이 빌보드 1위. 마이클 잭슨도 프린스의 영향을 받는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불타는 숲 속의 새끼사슴’이라고 묘사했던 연약한 마이클 잭슨은 ‘어두운 동굴의 사자’ 프린스가 크게 어필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악동’ 이미지를 차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게 버클을 주렁주렁 달고 부츠에 체인과 벨트가 잔뜩 달린, 제목 그대로 다소 거친 이미지의 1987년 앨범 < Bad >다.

프린스의 영원한 수식은 천재

음악을 잘한다고 무조건 천재(genius)라는 수식을 들이대지 않는다. 눈과 귀를 본능적으로 잡아끄는 각별함, 독자성, 일반적인 관행이나 보편적 질서를 따르지 않는 비타협성이 작위적이 아닌 자연스럽게 술술 나와야 천부적 능력의 소유자라는 영예를 얻는다. 데이비드 보위가 그렇듯 프린스는 부고 기사가 언론을 도배하는 지금은 물론, 생전에도 언제나 뮤지컬 지니어스(musical genius)라는 타이틀을 달고 다녔다. 그가 아니면 표현하지 못할 그것도 광대한 음악의 땅을 < Dirty Mind >, < 1999 >, < Purple Rain >, < Sign ‘O’ The Times >, < Graffiti Bridge> 등으로 굴착했다. 선배 스티비 원더의 헌사를 듣는다. “프린스는 실로 다양한 문화를 함께 엮어 우리에게 전달했다. 그는 원했다면 클래식을 했을 것이다, 원했다면 재즈도 했을 것이며 원했다면 컨트리도 했을 것이다. 그는 록을 했고 블루스를 했고 팝을 했다. 그는 모든 것을 했다. 그는 진정 위대한 뮤지션이다.”

MTV 스타, 멀티미디어 아티스트

프린스는 1980년대를 견인한 뉴 미디어 MTV의 총아이기도 했다. 그는 음악만이 아니라 외적 개성의 표현에서도 우월했다. 한때 6피트 장신 여성모델 옆에 서게 되자 “장난해? (키 올려주는) 애플 박스 어디 있어?”라고 했다는 에피소드가 말해주듯 단신임에도 결코 카리스마를 놓치지 법이 없었다. 그 특출 난 스타일은 단지 보여주는 수준이 아닌, 음악의 외연 확장과 유기적으로 관계했다. 이러한 이미지와 메시지의 혼재, 사운드와 패션의 결합이 1980년대의 ‘팝 컬처’였고 프린스는 그 글로벌 선두였다. 유명 패션 디자이너 크리스티앙 시리아노의 말. “우리는 진정한 패션 아이콘을 잃었다. 프린스는 과감했고 동시에 패션과 재밌게 놀았던, 머리에서 발끝까지 진정한 ‘아티스트’였다!” 그는 음반을 정복했고, 방송(MTV)과 공연을 제패했고 나아가 < Purple Rain >, < Under The Cherry Moon >, < Sign ‘O’ The Times >, < Graffiti Bridge > 등 스크린도 유린했다. ‘우린 토탈 엔터테이너, 멀티미디어 아티스트를 잃었다!’

레코드 산업, 그 거대자본과 싸운 혁명아

아티스트는 창작의 자유를 건드리는 음반사가 밉지만 대놓고 그 증오를 실행하기란 쉽지 않다. 프린스는 1993년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시상식장에서 난데없이 법정서류를 꺼내 읽었다. “아마도 어느 날 모든 권력들은 깨닫게 될 것이다. 뮤지션의 작품을 그들이 조종하고 제한하기보다는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도록 놔둬야 한다는 것을!” 그는 그때까지 17년간 소속되어 있던 음반사 워너레코드사과 자신의 관계일반을 ‘제도화된 노예제’로 규탄했다. 언론은 그것을 ‘혁명 수행 중’이라고 했고 <뮤지션>지는 “프린스는 아티스트와 기업 간의 현상(現狀)에 도전하는 몇 안 되는 혁명아 중 한사람”이라고 치켜세웠다. 프린스는 이의 일환으로 1993년부터 음반녹음을 거부했고 심지어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 심볼로 대체했다. 당혹스런 언론은 궁여지책으로 그를 ‘과거에 프린스라 알려진 아티스트’라고 불렀다. 그는 7년이 지난 2000년이 되어서야 다시 프린스라는 이름으로 돌아왔다.

섹스와 섹슈얼리티 코드의 마케팅

1970년대까지 아티스트는 정치사회적 메시지로 기성 질서와 가치에 시비를 걸었다. 극도의 상업성이 지배하던 미국 레이건과 영국 대처의 보수시대에 음악가는 자선 의식을 표출하거나 아니면 유서 깊은 성(性)에 칼을 휘두르는 방식을 택했다. 외설이라는 보수 언론의 딱지에도 불구하고 프린스는 거의 광기로 성을 통한 자유 의식의 설파에 집중했다. 섹스에 대한 억압 이데올로기에 든 반기라고 할까. 마돈나에 적용되었던 혐의처럼 호기심의 자극 혹은 성공 창출을 위한 방법론이 아닐까 하는 일각의 회의적인 시선을 깔아뭉개며 프린스는 여성의 자위, 신음, 근친상간, 오럴 섹스 등 음반사도 앨범을 낼지 말지를 고민할 만큼 표현수위가 높은 소재를 거리낌 없이 음악에 옮겨 놓았다. 의도적으로 섹스를 노골화하고 섹슈얼리티를 충격적으로 부각해 억제된 인간내부의 자유분방함을 꺼내려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그가 얻은 닉네임은 ‘악당 전하(His Royal Badness)’. 그는 모든 면에서 왕자 아니면 왕이었다.

고유 컬러를 확립한 미니애폴리스 제국

전성기에 그는 ‘더 타임’, ‘베이너티 6′(올해 2월, 57세의 나이로 사망), ‘아폴로니아’, ‘실라 이’, ‘웬디 앤 리사’ 그리고 ‘더 레볼루션’ 등의 뮤지션들과 함께 언론과 벽을 쌓으며 자신의 고향 미네소타 주 미니애폴리스에 그들만의 음악 성지를 축조했다. 이른바 미니애폴리스제국. 제도적 장치로 파악한 매스컴과의 일정한 간격 유지에 의해 미니애폴리스 음악제국은 더욱 신비화되는 효과를 낳았다. 마이클 잭슨처럼 프린스도 음악적 자유를 ‘폐쇄’책을 통해서 실현하고자 한 셈이다. 미니애폴리스제국은 하지만 외부와의 차단을 통해 음악에 매진하는 작업공간으로서의 개념을 넘어, 바깥세상의 제도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가치에 의해 통치되는 별개의 소우주로 기능했다. 이것은 그가 스타인 동시에 반(反)스타 기질의 소유자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아메리칸 팝의 주류를 반역적으로 비틀었던 프린스의 선동은 아름다웠다.

최고의 히트 작곡가로서 기염을 토하다!

언론의 접근이 차단된 별도의 미니애폴리스 제국을 통치하면서 프린스는 당대에 활약한 무수한 아티스트의 히트 레퍼토리를 제공하는 작곡가로도 금자탑을 쌓았다. 제국 내의 산물로 < Purple Rain > 당시인 1984년 모리스 데이가 이끈 ‘더 타임’의 ‘Jungle love’와 드러머 실라 이(Sheila E)의 펑키 감성이 물씬한 ‘The glamorous life’가 있지만 이후 리스트는 더욱 화려했다. 그 무렵 샤카 칸의 ‘I feel for you’, 시나 이스턴의 ‘Sugar walls’, 여성밴드 뱅글스의 ‘Manic Monday’ 등 차트를 주름 잡은 곡들이 모두 프린스의 오선지에서 나왔다. 1990년 시네이드 오코너의 깊은 보컬이 빛나는 명곡 ‘Nothing compares 2 U’가 그의 작품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팝 팬들은 혀를 내둘렀다. 그는 가수만이 아니라 성공적인 작곡가로 당대를 풍미했다. 음악 관련미디어 영역에 프린스의 이름이 내걸리지 않은 곳은 없다.

2000년 이후만 독집 앨범 16장 발표

2015년에 프린스는 두 장의 앨범 < HITnRUN Phase One >과 < HITnRUN Phase Two>를 잇따라 내놓았다. 여기서 활약한 여성 3인조 백업 밴드 ‘써드아이걸’은 BBC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앨범은 저 옛날 < Purple Rain >의 사운드를 듣기 원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프린스가 뭘 말하고자 하는가를 귀 담아 듣는 팬들을 위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 그의 창의 스피릿은 꺼지지 않을 듯 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앨범이 2014년, 4년 만에 컴백해 거푸 두 장의 신보 < PlectrumElectrum >과 < Art Official Age >를 낸 후에 다시 또 두 장의 새 앨범 발표를 반복했다는 사실이다. 겨우 한해 지나 또 신작으로 롤백 한 그 왕성한 생산력은 후대의 귀감이다. 2000년대 들어서 내놓은 독집이 자그마치 16장이다. 거룩한 다산(多産). 마지막까지 음악의 불꽃을 태운 것이다. 그는 음악으로 산 게 아니라 ‘음악을 살았다!!’

(2016.04.21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