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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5 박기영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비와이, 홍이삭, 김구라와 아들 그리, 그리고 베테랑 가수 백영규 등이 자리해 그들만의 음악 이야기는 물론, 각각의 인천 부평에 대한 인연도 들려주었다. 이번 다섯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노래 잘하는 가수 박기영이다.

박기영은 노래를 잘한다. 잘해서 1997년 데뷔 이래 히트곡이 많다. ‘시작’ ‘마지막 사랑’, ‘Blue sky’, ‘산책’, ‘나비’, ‘그대 때문에’, 그리고 영화 <시>의 ‘아네스의 노래’와 ‘넬라 판타지아’ 등등 꽤 여러 노래가 떠오른다. 동시에 TV 오디션 형식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 <오페라스타>, <복면가왕>, <불후의 명곡> 등에 나와 과시한 돋보이는 가창력도 기억된다. 하지만 박기영은 노래를 잘하는 것보다 먼저 노래하는 걸 좋아한다. 인터뷰 중 짧은 몇 마디에 ‘싱어 유전자’가 느껴질 정도.

코로나 시국에 최근 다시 유튜브 활동에 돌입한 것도 ‘노래는 쉬지 않는다!’라는 사고의 발로다. 그는 “음악은 나를 살게 한다”고 했다. 당연히 음악에 대한 감사함이 내재화해 있다. 고교 방송반 활동이 자랑스러웠다는 그는 인천이란 연고가 많은 음악적 토대가 됐다고 밝혔다. 그는 음악 관련 대화를 즐거워했다. 어떤 질문에도 조금의 막힘이 없이 답을 풀어냈다. 그는 가수로서 다양성을 보여주는 것,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에 대해 수차례 강조했다.

23년이 된 가수 활동을 하면서 사이사이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건 팝페라 시도일 것 같다.<불후의 명곡>의 ‘넬라 판타지아’ 영상을 보고 ‘박기영 맞아?’하는 생각도 들었다. 대중가수가 오페라 영역에 도전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특별한 계기가 있나?
2012년에 tvN<오페라스타> 출연한 것이 결정적 계기이다. 음악적 도전이기도 하고 그때 <오페라스타>가 뜨거운 반응을 얻을 만큼 매우 핫(hot)했다. ‘시즌 1’이 성공을 거둔 것을 보고 ‘왜 나를 안 불렀지’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하고 싶어서 ‘시즌 2’ 출연 연락이 오자마자 바로 ‘오케이’했다. 당시 많은 경연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이왕 한다면 새로운 것을 하고 싶었다.

자작곡을 시도한 지난 2000년의 3집 ‘Blue sky’와 팝페라 시도의 음악적 쾌감을 비교한다면
20대는 알 수 없는 치기가 앞섰다. 굉장히 열정적이지만 근원을 모르고, 자기 자신에게 도취해 있다. 나중 그게 별거 아니고 허상이라는 걸 깨쳤을 때 엄청난 좌절을 경험했다. 데뷔해서 좋은 반응을 얻어 바쁜 삶을 보내게 됐을 때 ‘내가 지금 뭐 하는 걸까’하는 정체성 혼란이 왔다.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하는 물음조차 던질 여유만큼 정신이 없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박기영 하면 떠오르는 곡들, 이른바 히트곡이 그 당시의 노래들이라는 점이다.

‘넬라 판타지아’의 음악적 기쁨이 더 컸다는 뜻으로 들린다
그렇다. 어릴 때는 음악을 ‘안다’ 보다 ‘어쩌다 보니 했다’의 느낌이 더 컸다. 많이 혼란스러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수십억을 줘도 그 당시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대면 콘서트가 다시 일상화되면 공연에서 과거 히트곡들은 안 부를 건가
나를 기억해주는 곡들인데 당연히 한다. 대중의 니즈니까. ‘넬라 판타지아’도 대중의 니즈 중 하나이다. 아마 사라 브라이트만 언니는 내가 누구인지 정말 궁금해할 것이다. (웃음) 원곡자보다 영상 조회 수가 높으니 말이다.

박기영의 히트곡들에 성악적 요소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넬라 판타지아’가 놀랍다. 어렸을적 성악에 대한 경험이 있었을 것 같은데..
전혀 없다. <오페라스타> 하기 이전에는 성악의 성자도 몰랐다. 다들 어렸을 때 배웠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심지어 성악가 김활란 선생님과 같이 공연을 했는데 대기실에 오셔서“솔직히 말해봐. 원래 했지?”라고 물어보실 정도였다. 당시에 해외와 달리 우리나라는 대중가수가 팝페라로 도전한 경우는 드물어서 ‘내가 한번 해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록, 발라드, 재즈, 팝페라, 포크 등 추구한 장르가 다양하다. 장르에 대한 왕성한 식욕이랄까. 박기영의 특장인데 또 그중 하나로 ‘어쿠스틱블랑’ 활동을 빼놓을 수 없다.
<오페라스타>로 성공했을 때 아이가 생겨서 모든 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애착육아를 하면서 아이에 전념하는 시기를 보냈고 음악을 하려면 혼자 곡도 쓰고 명상하는 시간이 필요한데 그러질 못했다. 음악에 대한 부담을 줄이기 위해 사람들과 같이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7년 라이브 앨범도 냈는데
현재진행형 뮤지션이라는 뜻이다. 스튜디오 라이브의 경우, 국내에서 최초로 PA 스피커 없이 진행했다. 녹음실에서만 접할 수 있는 섬세한 사운드를 공유하고 싶어서 스튜디오에 관객을 초대하여 공연을 선보였다. 관객은 헤드셋을 끼고 제 노래를 듣는데 숨소리까지 들려서 다들 깜짝 놀라시더라.

한번은 팬분들께 단독 콘서트와 스튜디오 라이브 중 어떤 것이 더 좋았냐고 물어보았는데 스튜디오 라이브를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정도로 만족도가 굉장히 높았다.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스튜디오 라이브를 취소 했는데 내년에는 꼭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많은 프로그램 출연과 어쿠스틱블랑, 라이브 등 쉼 없이 꾸준하게 활동한다. 이렇게 분주하게 움직이는 이유는
아니다. 쉰 적 은근히 많다. 20대는 소속사와의 갈등으로 쉬기도 했다. 잠시 잊혔던 기간이라고 생각한다. 딸을 낳고 키우면서도 팬들 머릿속에 사라질 수 있었다. ‘어쿠스틱블랑’을 한 이유가 바로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음악은 나를 살게 한다.

약 20년 넘는 음악 인생에서 중요한 모멘트를 짚어본다면
일단 처음 1999년 ‘시작’과 ‘마지막 사랑’은 대중이 나를 인식해주신 감사한 시기이자 아까 말했듯 너무나도 정신없던 시기이다. 4년이라는 공백을 마친 후 오랜만의 활동인 ‘나비’와 ‘그대 때문에’가 분기점이 될 것이다.

그다음은 2010년 7집 앨범의 ‘빛’이 타이틀이었는데 쫄딱 망했다. 이때 당시 가요계가 음반을 내면 손해인 분위기였다. 갈팡질팡하던 때를 지나 ‘아네스의 노래’로 다시 사랑을 받게 되었다. 그 이후에 <오페라스타>와 크로스오버 앨범을 뽑을 수 있겠다.

‘아네스의 노래’는 어떻게 만들어진 곡인가.
5, 6집이 여러 면에서 성공을 거두었는데 7집이 이에 비해 성과를 보지 못했다. 그간 달라진 음악 시장을 마주하면서 더 이상 음악을 못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을 접을까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던 찰나, 연락이 왔다. 지금은 종영한 <대한민국 영화대상>에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가 8개 부문에 이름을 올렸는데 OST가 없다고, 여성이 주인공이고 여성을 소재로 하였으니  OST를 만들고 영화제 축하 무대에 서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너무 멋있어서 바로 ‘오케이’ 했는데 영화제가 3주 남은 시점이었다. (웃음)

영화 마지막 장면에 이창동 감독님이 작성한 시가 나오는데. 이 시가 주는 여운이 매우 강력해서 어떻게 함축하기가 어려웠다. 그대로 넣었을 때 의미가 살아있다고 판단했다. 영화 속 시가 없었더라면 노래를 만들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네스의 노래’ 덕분에 음악을 계속하게 되었다.

박기영 관련한 자료 어느 것을 찾아봐도 어김없이 인천 신현초등학교, 동인천여자중학교, 인성여고 등 학적 사항이 나온다. 인천 출신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서울과 가까운 지역적 근린 때문에 굳이 밝히지 않는 경우도 있다. 박기영은 인천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궁금했다. 그의 답변은 시원시원했다.

인천이 고향 맞나.
엄밀히 말하면 서울에 태어났고 학교 들어가기 전에 인천으로 이사를 갔다. 아버지 회사로 인해 인천의 남동공단에서 살았고 신현초등학교를 다녔다. 중학교는 ‘동인천여자중학교’를, 고등학교는 ‘인성여자고등학교’를 나왔다.

인천에 대한 기억은. 서울에서 이사 온 것이라면 친구가 많지 않았을 것 같다.
처음 인천으로 이사 왔을 때 말처럼 친구가 하나도 없었다. 아이들이 서울에서 왔다고 하면서 아무도 놀아주지 않았다. 친구들에 비해 소심한 성격이었는데 살아남기 위해서 나중에는 저절로 씩씩하게 되더라. (웃음) 같이 놀 친구가 없어서 피아노 학원에 다니게 되었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음악을 접하게 되었다. 아마 놀 친구들이 많았다면 음악을 안 했을지도 모르겠다.

음악을 시작함에 있어 학창 시절이 중요하다고 본다.
생각해보면 중학교 때 방송반을 맡았고 합창 대회에 매번 나간 걸로 보아 음악적으로 무언가 있었다. 방송반이니 점심시간에 음악을 틀고 소개하는 글을 쓰고 낭독을 하면서 쌓은 경험이 지금 와서도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 때까지 계속 방송반을 했고 방송제도 나갔다. 인성여자고등학교 ISBC(InSung Broadcasting Center) 21기 방송반이었는데, 이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히 컸었다. 인천에 있는 모든 고등학교가 우리 학교 방송제를 보러 올 정도였다. 나의 음악 생활에 많은 토대가 되었다.

다시 얘기를 돌려서 코로나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나
3월에는 정신적으로 피폐해졌다. 5월 즈음 되니 어쩔 수 없구나 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혼란스럽긴 하다. 생물학자 최재천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하게 된 생각이 있다. 직접 했든 안 했든 인간의 공동 문제이기 때문에 유연하게 대처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나도 책임이 있고 나도 가해자 중 한 명이라는 생각으로 어떻게 하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 반성과 활로 모색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가장 안타까운 건 아이들이다.

코로나로 인해 음악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다
유럽이 문화 예술과 인간에 대한 진중한 물음이 생기고, 음악에 대한 다양한 장르가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느 정도 먹고 살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현재는 코로나로 인해 세계 전체가 많이 침체되어 있는데 이러한 시기에는 단순한 대중문화를 접하면서 기분 전환에 몰두하는 것이 편하다. 나도 요즘 시기에는 과거 깊은 감성으로 작업했던 내 노래를 듣는 것이 힘들 지경이다. 예상을 하자면 대중문화 자체가‘쉽게 다가올 수 있는 것’ 조금은 신나는 것으로 교체되지 않을까.

현재 준비하고 있는 작업이 있는지
크로스오버 정규 앨범을 준비하고 있다. 2 LP를 생각하고 있고 6~7곡 제작하는데 ‘넬라 판타지아’도 넣을 예정이다. 하나씩 새로운 시도를 다 해보는 것이 나의 목표이다.

문화 다양성 실천주의자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할 것 같다
감사하다. 데뷔했을 당시에는 작업을 함께 했던 프로듀서님들이‘노래는 너무 잘하는데 개성은 없는 거 같아’라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당시 가요계에는 개성으로 똘똘 뭉친 가수가 장악하고 있었기에 주눅들 수밖에 없었다. 돌이켜보면 어떤 뚜렷한 개성을 갖는 것보다 다양성을 가졌기에 내가 여러 장르를 소화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팝페라도 소화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 자체가 다양성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갑자기 이즘의 20년 맞이 <내 인생의 음악 10곡> 기획이 생각나 ‘박기영이 꼽는 박기영의 노래 10곡’을 꼽아 달라고 했다. 이런 주문에 응하는 것은 시간이 걸리기 마련인데 그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자신과 대중과의 관계에 대한 성실한 관찰이 느껴졌던 대목. “내가 만족하면서도 대중이 사랑을 준 곡들이어야겠죠?” 그 10곡을 공개하면…

1. <불후의 명곡>에서 부른 ‘넬라 판타지아’
2. <복면가왕>에서 부른 밴드 부활의 ‘Lonely night’
3. ‘나비’
4. ‘그대 때문에’
5. ‘Blue sky’
6. ‘나비’가 수록된 2004년 앨범의 ‘Mercy’
7. ‘아네스의 노래’
8. <오페라스타 >에서 노래한 ‘Caronome (그리운 이름이여)’
9. <불후의 명곡 > 김수희편에서 부른 ‘멍에’
10. ‘시작’

진행 : 임진모, 김도헌, 임선희
정리 : 임진모
사진 : 김도헌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추진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