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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노을(Parannoul) ‘After The Magic’ (2023)

평가: 3.5/5

마법이 일어났다. 긴 잠에서 깨어 밖을 보자, 창문 너머 추종자들이 자기 이름을 연신 연호하고 전 세계에서 날아든 편지가 산더미처럼 쌓이는 광경이 펼쳐졌다. 아무도 알지 못하던 은둔 음악가는 하루아침에 모두에게 주목 받는 주인공이 되었다.

< After The Magic >은 그 이후의 이야기다. 어떠한 신상 공개도 꺼리던 그가 용기내어 대중 앞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고, 여러 아티스트와 교류하며 화합의 언어를 배우기 시작한 순간들.

이 후일담에는 변화와 배제, 두 가지 양상이 강하게 맞물린다. “모종의 이유로 과민반응 하는 사람들과, 듣지도 않고 선입견을 품은 사람들에게 심술이 났다”는 그의 언급처럼 <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 > 이후 진행된 후속 작업은 개선이나 수리보다도 덜어냄의 과정이었다.

더 정확히는 감정 과잉의 근원인 이모(Emo) 색채를 걷어내고 그가 선호하는 질감과 구조를 강화하기 위한 모색 과정에서 생겨난 타의적 변화에 가깝다. 앨범 커버가 마음의 조리개를 열어 어두웠던 골방에 마냥 빛을 비춘 결과물 같다가도 문득 지우고 싶은 영역을 지우개로 세차게 문질러 없앤 흔적처럼 보이는 이유다.

파란노을을 상징하는 대부분의 요소가 정돈된 모습이다. 정제되지 않은 로파이 효과를 기반으로 사운드 간 층위를 분명하게 구분하던 전작에 비해 안정된 보컬과 더욱 다양해진 악기 구성은 동등한 위치에서 조화를 이룬다. 불투명한 미래와 고독에 몸부림치던 내용도 한껏 긍정적으로 변했다.

무엇보다 공백을 메우기 위해 모여든 협업자의 명단이 두드러진다. 이들은 홍대 롤링홀에서 열린 ‘디지털 던’ 라이브 공연에서 함께 어깨를 맞대며 정을 나눈 동료들. 피처링 보컬의 델라 지르(Della Zyr)와 기타를 덧댄 아시안 글로우, 트럼펫을 협조한 핀 피오르(Fin Fior)가 만든 두터운 대형이 앨범 곳곳에 연대의 흔적을 스민다. ‘타의적 변화’는 바로 이 온기에서 흘러나온다.

달라진 분위기는 수록곡 단위의 조밀한 화소로 확대할 때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입문용으로 각색되었다 해도 믿을 만큼 부드러운 필터를 입힌 뒤 슬며시 비기를 꺼내 드는 ‘북극성’만으로 충분한 설명이 될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연성화 작업과 클리셰 탈피다. 기존 작법의 골자는 취하되 유려한 현악 세션으로 접근성을 높이고 투박함을 지워낸 ‘우리는 밤이 되면 빛난다’와 ‘Parade’가 전작의 작법을 일부 부수고, 그다음 라디오헤드의 ‘High and dry’의 명료함을 구현한 ‘Sound inside me, waves insdie you’와 넬의 일렉트로닉 기포가 부글거리는 ‘After the magic’이 변혁의 바통을 이어받는다. 비관 속에 가려져 있던 상상이 발색하는 순간이다.

포효가 바래진 것도 아니다. 가사와 운용법이 조금 순화되었을 뿐 감흥을 극한으로 끌고 가는 드라마틱한 연출은 여전히 건재한데다 오히려 선율을 전면으로 가져온 덕에 듣는 부담을 상당수 줄였다. ‘흰천장’의 과포화 포맷을 계승한 후일담 ‘불면증’을 보자. 전자가 침잠이라면 후자는 전진이다.

그는 ‘차가운 감촉 아래 날아보고, 떨어지고, 죽어봤’기에 이제 ‘아침이 되어도 무섭지 않’다고 고백한다. 여러 소리가 마구 뒤섞이는 가운데 유일하게 선명함을 잃지 않는 노랫말에서 혼란의 눈보라를 헤치며 꿋꿋이 나아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우리가 이 한없이 작은 음악가에게 기대 이상의 감정을 투자하게 되는 이유는 평면적인 음악적 감흥을 넘어 실제 서사가 체감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일정 수위를 유지하던 전작과 달리 출렁이는 기조와 배치가 간혹 방해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지저분한 마찰이 자아내던 날 것의 매력이나 한없이 음울한 감성이 일순간 없어진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단적인 예로 두 차례의 극적인 체력 소모를 요구한 후 등장하는 평탄한 대곡 ‘도착’은 사실상 앨범의 마무리를 종용하는 듯하고 일종의 댄스 트랙 ‘스케치북’과 느슨한 도입부의 ‘개화’는 조합에 일부 의아함을 가져온다.

그럼에도 온전히 하고 싶은 소리를 구현하고, 그 소리를 통해 의도를 전달하는 것, 아티스트라면 반드시 겪는 이 두 가지 고민을 명쾌하게 해결하며 과도기적 희열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순식간에 이미지를 전복하고 또 다른 방식으로 구축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되리라는 예감이 든다.

그 여느 때처럼 적막한 고요의 밤을 넘어, 꿈의 저편을 지나, 새하얀 아침을 맞이한 파란노을. 다만 어제와 유일한 차이가 있다면 이제는 수많은 친구가 그의 곁에 늘 함께 한다는 사실이다.

– 수록곡 –
1. 북극성
2. 불면증

3. 도착
4. 우리는 밤이 되면 빛난다
5. Parade
6. 스케치북
7. Imagination
8. Sound inside me, waves inside you
9. 개화
10. After the mag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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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Choice

2022/03 Editor’s Choice

호림(Horim) < Winter To Spring >

기어이 봄을 피워내는 진솔한 여정이 무력한 새벽에게 건네는 위로.
추천곡 : ‘Nightmare’, ‘I love you for sentimental reasons’, ‘Joy’

by 김호현

파란노을(Parannoul) < White Ceiling / Black Dots Wandering Around >

한낮의 구름을 파란노을이라 부르는 소년이 흩뿌려놓은 슈게이징의 조각들.
추천곡 : ‘그곳에는 낭만이 있다 (Soft bruise)’, ‘Ending credit’

by 손민현

브레이크봇 & 이르팡(Breakbot & Irfane) < Remedy >

다프트 펑크 해체 이후 프렌치 하우스의 빈집을 채우고 있다.
추천곡 : ‘Remedy’

by 임동엽

샬롯 아디제리 & 볼리스 푸풀(Charlotte Adigéry & Bolis Pupul) < Topical Dancer >

오락과 무용의 탈을 쓴 녹진한 시사 풍자쇼.
추천곡 : ‘Blenda’, ‘Ceci n’est pas un cliche’, ‘Haha’

by 장준환

250(이오공) < 뽕 >

진짜 피곤해서 내 마음대로 살고 싶다 할 때 BGM으로 틀고 싶은 음반.
추천곡 : ‘뱅버스’, ‘모든 것이 꿈이었네’, ‘바라보고’

by 박수진

더 플라워 킹스(The Flower Kings) < By Royal Decree >

비록 가늘지라도 프로그레시브 록의 명맥은 이어진다.
추천곡 : ‘World gone crazy’, ‘Evolution’, ‘The big funk’

by 염동교

카빈스키(Kavinsky) < New Born >

신스 웨이브의 환생. 황홀한 네오 누아르 판타지.
추천곡 : ‘Pulsar’, ‘Plasma’, ‘Vigilante’

by 김성욱

스윗 트립(Sweet Trip) < Seen/Unseen >

추억을 태우며 정리하는 50곡. 마지막까지 달콤하고도 투박한 이별 여행.
추천곡 : ‘Aluralura’, ‘Darlin’’

by 정다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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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2021 올해의 가요 앨범

2020년대의 추세가 희망차다. 코로나 급풍이 한차례 휩쓸고 간 황량한 대지 위에도 여전히 수많은 아티스트가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다. 그 속에서 태어난 앨범들은 장르와 작법, 하물며 가사의 필압조차 세세히 다르지만, 모두 기세에 꺾이지 않고 본인의 역량을 가감 없이 담아낸 단단한 작품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IZM 선정 2021년을 대표할 가요 앨범 10장을 소개한다. 글의 순서는 순위와 무관하다.

엔하이픈(ENHYPEN) < Border : Carnival >

아이랜드라는 공간이 갖는 의미는 하이브의 곡 스타일 분배와 CJ 이엔엠의 시각적 역동성이라는 우월적 합이다. 그걸 지반으로 몇 개월도 안 된 신인은 단숨에 ‘기득권’자로 폭발성장을 기했다. 팬덤 ‘엔진’의 가속 페달을 밟아 숨 가쁘게 올해의 신인, 음원 밀리언 셀링, 미 NBC 켈리 클락슨 쇼 출연 등을 이어가며 글로벌 팬들의 번식을 꾀한 결과. 이 두 번째 ‘미니’앨범이 초고속 하사된 4세대 아이돌 타이틀을 굳혀준 ‘맥시’펀치다.

음악의 승리라고 해야 한다. 인트로와 아웃트로에 떠들썩한 예술적 소란을 장벽으로 쌓고 중간에 ‘Drunk-dazed’, ‘별안간 (Mixed up)’ 등 대중그룹다운 들을만한 싱글 넷을 가지런히 배치해 제대로 곡 승부를 걸고 있다. 이를 위해 동원한 도구는 폭넓은 장르분산, 바로 다양성이다. 시대적 명령인 아이돌스런 음악패턴을 따르되 시도, 도전, 변화로 에워싸는 음악선동이 가상하다. 아이돌 수다, 그 상투적 어법 타파가 남았다. (임진모)

지올 팍(Zior Park) < Syndromize >

빛 하나 들지 않는 어두운 방, 끊임없이 필름을 구동하는 영사기의 소음이 들렸다. 벽에 맺힌 원형의 무대 위로 그림자는 계속해서 모습을 바꾸며 서로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어딜 둘러봐도 환영뿐인 작은 공간에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의미하게 섞였고 그렇게 탄생한 잔혹하고도 아름다운 장소를 < Syndromez >라고 명명했다. 창조주는 지올 팍. 경쾌하게 삶을 난도질하는 한 예술가의 보금자리였다.

각각의 주제에 맞게 꾸려진 놀이기구가 관람객을 맞이한다. 랩을 버렸다는 농담 섞인 인터뷰처럼 특정 장르에 매몰되지 않고 여러 갈래로 뻗어가는 상상력이 중성적 목소리, 음악, 영상 등 한계를 규정하지 않고 ‘지올 팍’이란 아티스트를 양분 삼아 유일한 형태로 조형된다. 그가 화려하게 꾸며낸 세상은 포장지를 뜯어낼수록 깊은 상처를 드러내지만 선홍빛을 띠는 속살마저 찬란하다. 완벽하게 제작된 극의 폐막이 어느 때보다 쓸쓸하기에, 이 포근한 악몽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않기를. (손기호)

마인드 컴바인드(Mind Combined) < Circle >

힙합, 일렉트로니카처럼 비트 중심의 음악이 득세함에 따라 비트메이커들의 가치는 공고해졌다. 다양한 뮤지션의 리듬을 책임지며 베테랑 프로듀서가 된 피제이는 마인드 컴바인드라는 플랫폼에 올라 조금 더 자유롭게 역량을 펼쳤다. 단짝 진보는 피제이의 비트 위를 유영하며 농익은 기량을 선보였다. 11년 전 발표한 첫 번째 앨범 < The Combination >과 마찬가지로 과정의 즐거움이 양질의 결과물로 이어졌다.

그들의 소리엔 과거와 현재, FX와 리얼 밴드가 교묘하게 교차하며, 장기인 소울과 펑크(Funk)부터 록과 하우스 등 다채로운 스타일이 어우러진다. 변화가 잦은 곡조를 버텨내는 건 정교한 리듬 트랙이지만 섬세한 기타가 돋보이는 ‘Can you understand’와 라틴음악의 즉흥성을 포착한 ‘Purple sky’처럼 힙합 비트 이외의 미덕이 가득하다. 소리와 메시지에 지향점을 고스란히 반영한 ‘Singularity’(특이성)와 ‘Multiverse’(다중우주론)로 마인드 컴바인드의 인장을 단단히 새긴다. (염동교)

이랑 < 늑대가 나타났다 >

한 해를 회고할 때 가장 뾰족하게 튀어나온다. 물길을 거슬러 오르듯 요새 흐름에 영합하지 않았고 투명하게 ‘나’의 이야기를 썼다. 중요한 건 그의 시선이 비단 나에게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를 투영하고, 나를 지나 사회로 가닿는 ‘늑대가 나타났다’, ‘환란의 세대’와 같은 곡은 이 음반이 얼마나 현재를, 현대를, 지금을 찌르고 있는가를 증명한다.

동시에 과감한 터치가 돋보인다. ‘아는 언니들’이란 합창단과 손을 잡고 기이하고 기괴하게 덧붙인 ‘환란의 세대(Choir ver.)’의 코러스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는 그 누군가의 감정을 대신 토해낸다. ‘대신’. ‘빵을 먹었어’에선 앞장서서 목청을 높이고 ‘의식적으로 잠을 자야겠다’에선 죽음과 삶을 툭툭 말한다. 거침없는 연대와 거리낌 없는 고백으로 올해를 끌어안았다. (박수진)

양진석 < Barn Orchestra >

양진석은 가창력으로 승부하는 가수가 아니지만 작곡 능력과 편곡 실력은 그 미진한 보컬을 채우고도 남는다. 10년 만에 발표한 여섯 번째 에피소드 < Barn Orchestra >가 이 주관적인 가설을 객관적으로 증명한다. 각 곡에 맞는 보컬리스트의 초빙과 세미클래식부터 팝, 재즈까지 스며든 도회적인 컨템포러리 음악은 멜로디와 리듬, 화음을 하나하나, 차곡차곡 쌓아올린 아름다운 건물처럼 빛난다. 막대한 시간 투자, 소리에 대한 고집, 음악에 대한 그의 자신감은 이 앨범이 정갈하고 세련되게 태어날 수 있는 탄탄한 지반공사였다.

현대사회의 외로움을 여러 형식으로 변조한 수록곡들은 살아있는 생명체이면서 건물 구조물에 사용된 유기적인 원자재다. 양진석은 케이팝과 네오 트로트 열풍에 가려져 한동안 잊고 있었던, 젊은 세대도 편하게 감상할 수 있는 21세기 한국형 어덜트 컨템포러리 음악을 완공해냈다. (소승근)

최엘비 < 독립음악 >

힙합 오디션 < 쇼미더머니 5 >에서 비와이와 씨잼이 1,2등 자리에 나란히 설 때, 친구인 최엘비는 예선 탈락 후 TV로 결승 무대를 시청했다. 찬란히 빛나는 두 주연에 비해 음지가 익숙했던 조연은 슬퍼하지 않으려 애써 눈물을 감췄다. 그 반짝임에라도 묻어가야 크레디트 어딘가에 이름이 남는 걸 알았기 때문. 하지만 어느덧 20대의 마지막에 다다른 청년은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더 이상 숨어 살 수 없다. 늘 배경으로 찍히기만 했던 엑스트라는 직접 조명과 카메라를 들여와 시점을 180도 전환시킨다. 주연과 조연의 역전으로 그간 묵혀두었던 응어리를 낱낱이 고백한다.

장면 하나하나가 가슴 깊은 곳을 아리게 찌른다. 스스로를 딸려오는 사은품이나 브랜드 이름을 뗀 무지 티에 비유할 정도로 완전히 내려놨다. 비교와 동정으로 물든 열등감의 서사는 부와 명예를 좇는 작금의 힙합 신과 다름을 인정하고 같아지기를 포기한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존중하는 < 독립음악 >의 주인공은 험난한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최엘비이며 그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이기도 하다. 세대와의 교감을 넘어 시대와 공명하는 앨범, 그야말로 올해 최고의 ‘대중음악’이다. (정다열)

파란노을(Parannoul) <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 >

신원미상의 음악가 파란노을이 일으킨 파급력은 거셌다. 잠룡의 일렁임을 일찍이 포착한 곳은 국내가 아닌 해외다. 순간이었지만 <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 >은 영미권 슈게이즈 팬들의 큰 지지를 얻어 미국의 음악 커뮤니티 레이트 유어 뮤직에서 올해 발매한 앨범 중 평점 1위를 기록했다. 소규모 음악가들을 대상으로 한 디지털 플랫폼 밴드캠프에서부터 저명한 음악 비평 사이트 피치포크와 스테레오검의 각광을 받기까지 이 드라마틱한 실화는 언어의 장벽을 가뿐히 뛰어넘었다.

스스로를 낮추며 자신의 치부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파란노을의 패배주의 텍스처는 생생하다. 거친 노이즈와 투박한 가상 악기로 연출한 음압은 포스트 록과 이모코어(Emocore)를 난폭하게 품어내고, 열등감으로 뭉그러뜨린 보컬은 타오르는 화자의 내적 분노를 겨우 삼킨다. 우울감과 외로움으로 범벅된 어두운 터널에서도 끝끝내 탈출구를 발견하고자 한 원시적 울부짖음이 격변의 시대를 관통한다. 2021년, ‘흰 천장’만을 바라보던 골방 외톨이가 주도한 ‘청춘 반란’의 실황. 이제는 더 이상 막연한 동경이 아닌 빛나는 ‘꿈의 다음 부분’으로 넘어간 듯하다. (김성욱)

유라(youra) < Gaussian >

유라는 자신이 음악을 하며 지켜온 ‘개똥철학’을 잘라낸 것이 < Gaussian >이라고 했다. 스스로 깎아내리는 듯한 단어로 설명했지만, 그의 세계는 조금씩 덜어내지 못하고 한 번에 잘라내야 할 만큼 견고하다. 데뷔부터 지속해온 내면 탐구는 단단한 결정체로 거듭났고 싱어송라이터는 그것을 자신으로부터 떼어내며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마련했다.

부드럽고 흐리게 표현하는 효과를 뜻하는 앨범의 이름처럼 가사는 은유적이나 선율은 또렷하고 그가 전하는 감각은 선명하다. 간결하게 배치된 악기들은 범람하지 않고 제 위치에서 역할을 다하며 그 중심의 유라는 전자음을 가미한 듯한 독특한 목소리로 곡을 이끈다. 최소한의 의미만 전달하는 개인적인 음반에서도 헤이즈와 함께한 마지막 넘버 ‘하양’은 대중성을 드러내며 뮤지션의 넓은 가능성을 제시한다. 작년에 이어 올해를 뒤덮은 연대와 위로의 물결 속에서 내면 깊숙이 파고드는 침잠의 미학이 돋보였던 앨범이다. (정수민)

아이유(IU) < Lilac >

‘젊은 날의 기억’이란 꽃말처럼 < Lilac >은 아이유의 20대 마지막 순간을 장식한다. 10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그를 거쳐 간 모든 것들이 일련의 꽃잎처럼 곡 사이사이로 책갈피처럼 수놓아진다. 그만큼 앨범에는 유독 다양한 맛과 멋이 자유롭게 존재한다. 마치 대중음악가의 소명을 잠시 접어두고 30대를 앞둔 한 명의 인간으로서, 개인적인 염원과 열망을 한데 모아 전부 성취하는 것으로 다음 10년을 위한 에너지를 충전하려는 듯이 말이다.

명확한 선율로 대중성을 고려한 히트 메뉴 ‘라일락’ 사이로, 독특한 영감을 버무린 ‘Coin’이 도발 한 스푼을 첨가한다. 이에 재치 있는 비유를 가미한 ‘Flu’와 ‘어푸’가 각각 가벼운 에피타이저와 디저트를, 차분한 발라드 트랙 ‘봄 안녕 봄’과 ‘빈 컵’이 담백한 뒷맛을 담당한다. 아이유의 과거와 미래를 망라한 앨범이다. 오랜 전성기를 구가해온 아티스트가 여전히 과감함과 노련함을 보일 수 있다는 점이 놀라울 뿐. ‘Blueming’이 예고한 푸른 개화는 보랏빛 라일락으로 이제 막 피어난 듯하다. (장준환)

언오피셜보이 & 하이프하이프(unofficialboyy & HAIFHAIF) < 그물,덫,발사대기,포획 >

언오피셜보이는 각성한다. < 쇼미더머니 10 >에서 스스로 밝혔듯 ‘예능캐’로 가벼이 소비되던 과거와 선을 긋고, 진중한 태도로 음악가로서의 인정을 원한다. 그간 익살맞은 리액션이나 화끈한 패션, 특유의 거들먹거리는 스웨그로 더 주목받은 그였기에 솔직히 앨범의 빼어남은 의외였다. 프로듀서 하이프하이프(HAIFHAIF)의 철저한 지원이 빛을 발했고, 그의 역량을 최대치로 끌어올렸으며, 그 결과 많은 장르 애호가를 자신의 편으로 포획했다.

진가는 다양성과 치밀함에서 비롯한다. 2000년대 힙합의 계승 의지로 낳은 ‘돈내’와 ‘누가왔게’, 화끈한 댄스플로어의 ‘Unofficialboyy pt.2′, 최신 팝 문법의 ‘Mmm’ 등을 한데 엮어내는데 그 흐름은 유려하다. 신예답게 신선하고 동시에 높은 장르적 유연성을 보여준 셈이다. 풋내기 티가 나지 않는 탄탄한 플로우와 중독성 강한 훅(Hook)은 흡인력을 극대화했으며, 재치 있는 입담과 인간관계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는 가슴 시큰한 메시지는 작가적 성취를 담당했다. ‘근거 있는 자신감’이란 무엇인지 보여준 앨범이다. (이홍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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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노을(Parannoul)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 (2021)

평가: 3.5/5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아티스트다. 유일하게 노출된 정보인 밴드캠프의 소개란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서울에 거주하는 20대 남성이며, 파란노을이라는 개인 프로젝트 밴드를 꾸리고 있다는 사실 정도다. 국내 인지도도 낮던 그가 최근 인디계의 유망주로 부상하게 된 계기는 여러 해외 커뮤니티를 등지로 한 영미권 리스너들의 반향이었다. 베일에 싸인 뮤지션에게 레이트유어뮤직과 레딧 유저들은 흥미를 보였고 수많은 담론을 활성화했으며 급기야 그 관심은 스테레오검과 피치포크까지 번져 나갔다.

이러한 컬트적인 열광은 작품이 2010년대 접어들며 점차 사장되기 시작한 장르인 슈게이즈의 호출과 동시에 이모의 어법을 구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퍼즈 이펙트를 극대화한 노이즈와 조악한 레코딩 환경 속 열화를 거친 사운드, 그리고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후위로 밀려난 보컬 등 장르가 지닌 음향과 가사의 클리셰적 요소는 정공법의 일환으로 적극 차용된다.

마니아 취향을 사로잡은 또 하나는 밴드 스스로가 언급한 ‘청소년기에 영향을 끼친 수많은 것들에 대한 레퍼런스’다. 앨범은 1990년대 일본의 서브컬처 문화와 록 마니아라면 즉각 반응할 수 밖에 없는 오마주로 가득하다. 효과음이나 내레이션 등 부가적 장치를 통해 간접적으로 관여하거나, 개별 아티스트의 잔상을 가져오는 등 방식도 다양하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 릴리 슈슈의 모든 것 >(2001) 대사로 시작하는 ‘아름다운 세상’의 드러밍 도입부는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의 ‘Only shallow’를, ‘청춘반란’의 초반 진행은 카 시트 헤드레스트의 9분짜리 대곡 ‘Beach life-in-death’를 각각 소환한다. ‘흰천장’에서는 언니네이발관 ‘가장 보통의 존재’의 기타가 일그러지며 뭉개지는 순간과, 모임별 ‘푸른전구빛’의 신디사이저가 뚜렷한 형체를 찾아가는 상반된 감상을 동시에 얻을 수 있다.

자연스레 2000년대를 관통하는 강렬한 노스탤지어를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그 감정의 근원은 누군가의 청춘이 깃든 국내 인디 록, 슈게이즈의 비주류성과 그런지의 반항 정신에 대한 동경, 더 나아가면 라디오헤드의 ‘Creep’과 벡의 ‘Loser’가 노래하던 ‘찌질함’의 표상이다. 작품은 이러한 지점을 노골적으로 겨냥하며 공감을 유도하고 청자를 끌어 당기는데, 공통분모가 많을수록 그 인력은 더욱 거세진다.

침투 과정은 면밀하고 능숙하다. 열등감을 숨기지 않고 토로하는 노랫말은 청춘이 지닌 미숙한 면과 부끄러운 기억을 회고하게 만들지만, 인공적으로 만든 노스탤지어와 비교적 쉽고 명징한 선율을 통해 일시적으로 감각을 마비시키고 미화된 기억을 주입한다. 지하철 소음과 라디오의 시보음을 삽입한 ‘아름다운 세상’과 알람소리를 넣은 ‘흰천장’의 경우가 그렇다. 기억을 파고드는 일상의 소음을 배치한 뒤 부유하듯 몽롱한 잔향과 거친 악기의 질감, 그리고 최면과도 같은 보컬의 읊조림을 차례차례 배치하며 앨범의 명명처럼 ‘꿈의 저편’으로 넘어가는 듯한 효과를 부여하고 있다.

비협조적인 디스토션을 강조한 ‘변명’과 반대로 어쿠스틱한 면을 내세우며 환기를 주도하는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 메탈의 금속성과 여러 악기의 불포화 가운데 제세동을 가하는 ‘격변의 시대’ 등 일관된 목적 아래 다양한 시도를 행하는 점도 흥미롭다. 절제된 감정선 아래 보컬의 존재감을 격상하는 ‘엑스트라 일대기’ 역시 반전을 주도하는 구간이다. 다만 대부분 곡이 긴 러닝타임에도 뚜렷한 완급 없이 계속해서 높은 수준의 고양감을 요하는데다, 가공되지 않은 텍스처를 지나치게 강조하기에 피로감이 누적된다. 청취에 있어 휴식이 반강제적으로 필요하다는 단점이 명확하다. 은어로 가득한 ‘청춘반란’의 훅과 ‘Chicken’의 상투적 비유는 공들여 쌓은 몰입을 깨트리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자기혐오와 무기력으로 점철된 화자는 여전히 격한 비관과 자조적 언어를 늘어놓을 뿐이다. 그럼에도 ‘더는 도망가지 않’고(I can feel my heart touching you) ‘누군가에게 평생 기억되고 회자되는 사람이 되’기 위해, 혹은 자신의 ‘노래가 죽지 않’기 위해(청춘반란) 당당히 주체로서 행동하고 처절하게 기록한다. 그리고 그의 의도가 무엇이었던 간에 우리는 이 과정에서 극복이라는 서사를 떠올리고 일종의 해방감을 얻게 된다. 그 수단이 비록 상투적일지라도, 잊고 지내던 과거의 순수와 저마다의 설렘과 아림을 추억할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는 사실만으로 이 미지의 아티스트가 창조한 공색 백일몽에는 분명한 가치를 찾아볼 수 있다.

– 수록곡 –
1. 아름다운 세상 
2. 변명
3. 아날로그 센티멘탈리즘 
4. 흰천장 
5.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
6. 격변의 시대
7. 청춘반란
8. 엑스트라 일대기
9. Chicken
10. I can feel my heart touching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