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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승근의 하나씩 하나씩 Feature

돌이킬 수 없는 꼰대 필자가 좋아하는 2010년대 케이팝 노래들

우리나라 가수들의 노래와 앨범이 빌보드 싱글차트와 앨범차트를 제 집 드나들 듯 진입하는 현재의 상황은 1980년대 초반부터 팝송을 들어오고 빌보드 차트를 신주단지 모시듯 절대적으로 생각해온 저에겐 정말 감격적인 일입니다. 마이클 잭슨과 마돈나, 프린스, 휘트니 휴스턴 같은 세계적인 스타들이 휩쓸던 그 인기차트를 대한민국 가수가 접수하다니. 2000년을 전후한 시기에 김범수의 ‘하루’가 빌보드 서브차트에 오른 것과 2009년에 원더걸스의 ‘Nobody’가 빌보드 싱글차트 76위에 올랐을 때만 해도 ‘와! 이런 날도 오는구나’했는데 지금은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 갓세븐, NCT, 트와이스, 몬스타 엑스, 세븐틴 등 많은 가수들이 빌보드를 < 가요 탑 텐 >으로 만들고 있네요.

사실 대부분의 팝 마니아는 가요를 무시하고 잘 듣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가요가 외국 팝을 받아들여 토착화된 노래고 늘 해외의 음악의 트렌드를 쫒아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팝송을 들어야 뭔가 앞서가고 세련된 것처럼 보일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세계 사람들이 케이팝을 들어야 그런 대리만족을 느끼는 가 봅니다. 또 여기에 우리만의 것과 다른 나라들이 시도하지 않았던 독창적인 방식을 접목시켜 대중음악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개척하고 있죠. 이중에는 저 같은 팝 마니아 꼰대도 반하게 만든 케이팝 노래들이 있는데요. 그래서 이번 < 하나씩 하나씩 >에서는 저에게 케이팝의 매력을 알려준 소중한 노래들을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비스트 ‘Fiction’

저는 텔레비전 예능에 자주 출연했던 이기광과 양요섭 밖에 몰랐습니다. 심지어 용준형을 ‘용준이 형’으로 알 정도로 비스트에 대해 무지했죠. 그룹 이름 때문에 멤버들이 우락부락하고 건장한 짐승돌인 줄 알았지만 실제로 본 그들은 앳된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팀 명을 잘못 지었다고 생각했으나 이들의 무대를 보고 깨달았죠. 그룹 비스트는 짐승이 아니라 야수라는 걸. 제가 비스트의 노래 중에서 가장 애정을 갖고 있는 곡은 2011년에 발표한 ‘Fiction’인데요. 물론 ‘아름다운 밤이야’도 좋아했지만 그래도 손을 주머니에 넣고 춤을 추는 안무는 인상적이었고 높은 고음도 안정적으로 소화하는 보컬 능력도 나쁘지 않은 ‘Fiction’을 더 사랑했습니다. 아이돌 그룹은 가창력이 좋지 않다는 제 선입견에 금이 가게 만들어준 노래죠.

에프엑스 ‘피노키오’

기성세대는 샹송 가수 다니엘 비달의 ‘Pinocchio’를 기억하겠지만 저는 에프엑스의 ‘피노키오’입니다. 이 노래를 듣자마자 마치 팝송처럼 느꼈는데요. 알렉스 캔트렐, 제프 호프너, 드와이트 왓슨 그리고 우리나라의 프로듀서 히치하이커가 공동으로 이 노래를 만들었으니 제 생각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었죠. 그래서 팝송을 많이 듣는 제 귀에도 어필했던 것 같습니다. 레이디 가가가 부른 ‘Bad romance’의 안무를 참고한 ‘피노키오’의 앙증맞은 춤은 귀여웠구요. ‘피노키오’는 연서화 된 인더스트리얼과 상큼한 뉴웨이브 신스팝이 케이팝과 만났을 때 어떤 시너지 효과를 내는지를 증명한 고급스럽고 실험적인 곡입니다. 슬픔과 불안을 감추고 억지로 밝은 미소를 만들어서 노래 부르던 설리를 추모합니다.  

루나 ‘Free somebody’

루나는 에프엑스에서 다른 멤버에 비해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높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2016년에 솔로활동을 시작하자 저는 루나의 새로운 모습을 보고야 말았죠. 딥하우스를 기반으로 한 솔로 데뷔곡 ‘Free somebody’에서 루나는 연체동물처럼 유연한 댄스와 폭포 같은 가창력을 과시했는데요. 아쉽게도 그 이후의 후속곡이 없어서 지금까지는 단발의 성공으로 끝났지만 ‘Free somebody’는 2016년에 발표된 곡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노래였습니다.

방탄소년단 ‘봄날’

이 노래는 처음부터 끝까지 감동입니다. 전주만 들어도 가슴이 먹먹해지죠. 가사는 물론이고 뮤직비디오, 소리의 조율, 보컬의 어레인지, 녹음 그리고 후반부의 코러스까지 거의 모든 것이 벅찬 감정을 절정으로 끌어올립니다. 개인적으로 레너드 스키너드의 ‘Simple man’이나 피터 가브리엘의 ‘Solsbury hill’처럼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게 만드는 마음의 노래죠. 방탄소년단을 그저 잘 생긴 멤버들이 춤만 추는 보이밴드로만 생각했던 저에게 생각의 전환을 가져다 준 이 숭고하고, 아름답고, 슬픈 ‘봄날’은 대한민국의 대중가요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명곡 중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브레이브걸스의 ‘옛 생각’, ‘운전만 해’

2017년에 발표한 미니앨범 < Rollin’ >이 뜨지 못한 건 남사스런 음반표지도, 그 시기성도 아닙니다. 매너리즘에 빠진 방송국 사람들과 저처럼 음악 평론가랍시고 잘난 체하며 대중적인 댄스음악을 얕잡아 보는 집단의 무시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당시 무명에 재정이 넉넉하지 않은 중소기획사 소속인 브레이브걸스는 방송국과 음악 관계자 집단에 의한 직무유기의 희생양입니다. < Rollin’ > 앨범에는 모두 4곡이 수록되어 있는데요. 역주행 후 다시 주목을 받은 ‘하이힐’과 1980년대의 어반 알앤비 발라드 ‘서두르지 마’ 그리고 1980년대 프리스타일 풍의 ‘옛 생각’ 같은 양질의 노래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직무유기 평론가’ 중 한 명인 저도 뒤늦게 브레이브걸스의 노래를 다 들어봤는데요. 그 중에서도 ‘운전만 해’와 ‘옛 생각’이 제일 좋았습니다. 확실히 용감한 형제는 1980, 1990년대 팝송을 21세기 케이팝에 맞게 이식하는데 탁월한 수완을 보여주네요.

악동뮤지션의 ‘Dinosaur’

예전에 악동뮤지션에 대해 검색을 하다가 이수현의 보컬에 대한 글이 있는 블로그를 보게 됐습니다. 그 블로거는 이수현의 가창력을 극찬하면서 링크를 건 영상이 바로 ‘Dinosaur’였고 그때 이 노래를 처음 들었죠. 듣자마자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캘빈 해리스와 리아나가 함께 한 ’This is what you came for‘랑 비슷하네?’였지만 녹음 기술과 사운드 엔지니어링은 절대 밀리지 않았습니다. 2010년대 후반 전 세계적으로 붐을 이룬 딥하우스 스타일을 성공적으로 이식한 ‘Dinosaur’는 제가 느낀 첫 인상처럼 팝적인 곡이기 때문에 제가 더 좋아했던 것 같아요. 동생 이수현의 투명한 고음에 밀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이찬혁의 목소리도 이 곡에서만큼은 신선했답니다.  

마마무의 ‘넌 is 뭔들’

2016년에 이런 복고적이고 구닥다리 스타일로 인기를 얻었다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댄스팝의 바탕 위에 1970년대 미국의 소울과 디스코를 가미해 듣기 좋고 부담스럽지 않은 대중음악이 탄생했는데요. 마치 미국의 소울 보컬 그룹 라벨의 1975년도 빌보드 넘버원 ‘Lady marmalade’처럼 마마무는 이 곡을 자신만만하고 당차게 불렀습니다. 연약하고 예쁘게만 보이려는 기존 걸 그룹들과 달리 씩씩하고 당당한 마마무가 등장한 겁니다. ‘넌 is 뭔들’은 흑인의 자부심을 표현한 소울을 우리나라의 정서에 맞게 비교적 잘 이식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노래의 제목이 뭔 뜻인지 몰랐다가 후배한테 그 뜻을 듣고는 저도 ‘넌 is 뭔들’ 같은 남자가 되고 싶었지만….

티아라의 ‘러비 더비’

여타 걸 그룹에 비해 상대적으로 ‘뽕끼’ 많은 곡들을 자주 부른 티아라의 다른 노래들과 달리 ‘러비 더비’는 전형적인 미국의 댄스팝 스타일입니다. 신사동 호랭이의 대중적 감각이 뛰어나다는 걸 다시 한 번 증명한 노래라고 할 수 있는데요. 잘게 쪼갠 비트와 그 위의 멜로디 라인은 자유롭게 어울리고 그에 맞는 안무 역시 인상적이었죠. 당시 유행하던 셔플 댄스를 바탕으로 한 춤은 9년이 지난 지금 봐도 촌스럽지 않네요.  

위너의 ‘Really really’

트로피컬 사운드를 사용한 우리나라 노래 중에 단연 최고 중 하나라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흑백으로 처리한 뮤직비디오 영상도 멋졌고 네 멤버들의 스타일링도 뛰어났죠. 코드가 바뀌면서 ‘널 좋아해 Really x 4, 내 맘을 믿어줘 Really x 4’부터 쉴 새 없이 두들기며 비트를 좁쌀처럼 쪼개는 하이해트 소리는 곡의 숨은 매력 중 일부입니다. ‘보통 사람이 향유하는 음악이자 넓은 호소력을 갖는 음악’이라는 대중음악의 정의에 잘 어울리는 노래이자 강승윤도 춤을 잘 춘다는 걸 증명한 2010년대의 명곡 중 하나입니다.

오마이걸의 ‘돌핀’

“상큼하고 시원한 노래 같아.” ‘돌핀’에 대한 초등학생의 이 말은 정확한 것 같습니다. 신시사이저를 줄이고 리듬 기타를 중심으로 비트를 최대한 살려 미니멀리즘을 실행한 이 곡은 바다 위를 뛰어오르는 돌고래처럼 투명하고 가벼우며 시원했죠. 기존의 케이팝 곡들과 차별화에 성공한 오마이컬은 이 지점에서 한 단계 더 도약합니다. 기존의 여리고 귀여운 이미지에서 조금 더 성숙해졌고 음악도 10대와 20대 초반뿐만 아니라 30대까지도 커버할 수 있는 그룹이 됐으니까요. 그리고 2021년에 발표한 디스코 풍의 ‘Dun dun dance’로 기성세대의 입맛까지 확보했으니 그들의 성장 스토리는 현재까지도 진행 중에 있죠. ‘돌핀’은 이 돌이킬 수 없는 꼰대 필자를 살짝 설레게 했습니다.

아이유의 ‘Eight’

솔직히 말씀드리면 ‘잔소리’와 ‘좋은 날’이 인기를 얻으면서 아이유가 국민 여동생으로 등극했을 때도 저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후에도 아이유의 활발한 활동은 저는 매력을 느끼지 못했죠. 그러다가 제가 일하는 프로그램 앞에 하는 가요 프로그램에서 이 곡을 처음 듣고 작가분한테 가수와 제목을 물어봤습니다. 왜냐하면 전혀 아이유의 노래답지 않았다고 생각했거든요. 선율과 리듬은 볼빨간 사춘기를, 노래를 둘러싼 전반적인 사운드는 1980년대의 뉴웨이브와 펑크를 다시 화제의 중심으로 올려놓은 미국 밴드 에코스미스를 참고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에잇’의 매력 포인트는 가사와 음악의 조화입니다. 수필 보듯 그냥 읽으면 낯설고 생경하지만 선율과 리듬 위에서 노랫말은 잘 어울리면서 세련되고 그루브한 느낌을 유지합니다. 음악의 승리죠. 천하의 방탄소년단 멤버 슈가가 랩 피처링으로 참여했지만 ‘에잇’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아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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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걸(OH MY GIRL) ‘Dear Ohmygirl’ (2021)

평가: 3/5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차트를 지키고 있는 히트곡 ‘Dolphin’과 ‘살짝 설렜어’로 7인조 걸그룹 오마이걸은 대세의 반열에 올랐다. 그만큼 팬덤 위주의 케이팝 시장에서 < Nonstop >이 일으킨 반향은 엄청났다. 톡톡 튀는 발랄함과 밤하늘을 유영하는 서정적인 이야기로 기반을 다져온 팀에게 전작은 분명 평범한 편이었지만 인지도 상승을 위해 이만한 묘수도 없었다. < Dear Ohmygirl >은 다시 한번 익숙한 장르를 앞세워 입지 굳히기에 나선다.

흥겨운 선율의 타이틀 ‘Dun dun dance’는 세계적인 디스코 유행에 뒤늦게 탑승한 만큼 따라 부르기 쉬운 멜로디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복고풍 악기 연주 사이의 트랩 비트는 단조로울 수 있는 진행에 반전을 주며 무한 재생을 이끄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리드미컬한 후렴구와 끝을 올리는 밴딩 처리는 각자의 특색을 도드라지게 하며 무더위를 날려버릴 만큼 청량하다.

펑키(Funky)한 리듬 이후엔 기존 정서를 담아내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잡는다. 부제에 걸맞게 꿈에서 뛰어노는 듯한 ‘나의 인형’은 순수한 어린 시절을 그리는 노랫말과 음향 왜곡 효과가 환상 동화 한 편을 들려준다. 허스키한 음색이 어우러진 보사노바 느낌의 ‘초대장’도 팬과의 만남을 기다리는 본인들을 미지 행성의 외계인에 비유하며 특유의 캐주얼한 면모를 뽐낸다.

전곡에 걸친 라이언 전의 프로듀싱은 ‘Dolphin’의 흥행 공식을 답습한다. 앞선 작품의 게임 세계관을 이어간 ‘Quest’는 8비트 사운드를 중심으로 단순한 짜임새를 보인다. 간소한 구성과 차분한 보컬이 성숙해진 감성을 조명하는 건 사실이지만 전체적으로 나른함을 안기는 변수가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흐름 때문에 비바람을 뚫고 온 백조들의 피날레 ‘Swan’이 드라마틱한 전개에 비해 짧은 여운만 남기고 금세 머릿속을 떠난다.

활기차면서도 신비로웠던 가요계 새싹들이 뿌리를 내린 지 어느덧 6년. 짧지 않은 기간이지만 트렌드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지 않았고 고유의 정체성을 지키며 끝내 울창한 숲을 이뤄냈다. 신록의 계절을 맞이한 음악엔 산들바람 같은 선선함이 감돈다. 따스한 햇살을 받고 자라날 오마이걸의 그늘로 더 많은 지구인들이 몰려들고 있다.

– 수록곡 –
1. Dun dun dance
2. Dear you (나의 봄에게)
3. 나의 인형 (안녕, 꿈에서 놀아)
4. Quest
5. 초대장
6. S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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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 (오마이걸) ‘Bon Voyage’ (2020)

평가: 3.5/5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갈망. < Bon Voyage >는 이 같은 작금의 절망에 대한 돌파구로 원시성을 제시한다. 숲, 자유, 하늘, 달 등 각종 자연물을 대변하는 키워드가 가득한 앨범은 인간 사회, 정확히 말하자면 바벨탑을 쌓은 오만한 인간 사회를 경계하는 듯하다.

대자연을 기리듯 월드 뮤직의 요소로 무장한 ‘숲의 아이’는 도시의 유아가 열망하는 세계를 그린다. 노래에 울려 퍼지는 풀피리 소리와 아프리칸 부족의 가창을 따온 백 코러스가 자연의 이미지를 환기하는데, 이는 도시에서의 삶을 대표하는 디스코 트랙 ‘Diver’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1970년대의 도시 음악에 기반해 일렉 기타 스트로크로부터 펑크(Funk), 리듬 앤 블루스의 록킹한 속성까지 가져간 ‘Diver’는 비지스의 노래 가사를 인용하며 장르적 오마주를 꾀한다. 여기에 딥 하우스 장르의 ‘자각몽 (Abracadabra)’까지 이어지는 신스 베이스는 인위와 자연이 보다 선명하게 대비되는 지점이다.  

앨범에 이처럼 뚜렷한 서사가 담길 수 있었던 건 유아의 영민한 콘셉트 해석력 덕분이다. ‘Far’와 ‘Diver’, ‘자각몽’에서 도시의 이방인을 자처한 그는 성숙한 보컬로 완급조절을 해가며 소위 ‘요즈음’의 노래를 부른다. 반면 자연의 일부가 되어 숲을 가로 지를 때(‘숲의 아이’) 그리고 꿈에서 깨어나 그곳으로 돌아가리라 다짐할 때(‘End Of Story’) 유아는 기교를 덜어내고 곧게 뻗어 나가는 맑은 목소리로 작품의 시작과 끝을 알린다. 특히 ‘숲의 아이’의 백 코러스를 지휘하는 그의 목소리에선 모종의 힘까지 느껴지며 아레나 팝으로서의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한다.

훌륭한 콘셉트 앨범이다. 문화 전유 논란에서 자유롭진 않으나, 작품 자체의 짜임새는 견고하다. 아티스트의 이미지와 트렌드, 작금의 세태를 고려한 앨범 기획과 제작 단계부터 이를 완벽히 소화하고 실현한 실행 단계까지 어느 하나 모자람이 없다는 말이다. 케이팝의 종합 예술적 성격을 고려하면 < Bon Voyage >는 장르가 추구해야 할 가장 이상적인 결과다.

– 수록곡 –
1. 숲의 아이 (Bon voyage)
2. 날 찾아서 (Far)
3. Diver
4. 자각몽 (Abracadabra)
5. End of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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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걸(OH MY GIRL) ‘NONSTOP'(2020)

평가: 3/5

개운치 않은 성공

사실 ‘살짝 설렜어’를 처음 들었을 땐 다른 걸그룹의 앨범을 잘못 플레이한 줄 알았다. 선율 중심의 팝송을 추구하던 그들이, 갑작스레 무난한 트로피컬 하우스라니. 나름의 의욕적인 시도였겠지만, 개인적인 실망감은 감출 수 없었다. ‘Windy day’에 혹하고 ‘비밀정원’에 빠져든 후 ‘다섯 번째 계절(SSFWL)’에 감동했던 입장에서, 그간 착실하게 쌓아온 그룹의 캐릭터를 한순간에 뒤집어버리는 듯한, 스스로 너무 평범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활동이 종료되고 이 곡이 커리어의 최고 성과를 거둔 지금에도, 이들이 보여준 타이틀곡 중 가장 매력이 덜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명확히 말해 이 노래는 오마이걸이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스타일이다. 그럼에도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 퀸덤 >을 통한 새로운 팬덤의 유입과 더불어, 이 노래의 형식이 KPOP하면 보편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표준모델에 가까워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퀸덤 > 이후 달라진 상황에서 A&R은 많은 고심을 거듭했을 것이고, 기존의 지지층과 새로운 팬덤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방법으로 떠올린 것이 ‘살짝 설렜어’와 같은 스탠다드를 활용하는 전략이지 않았나 싶다.

다행히도 수록곡들은 충실히 제 몫들을 해내고 있다. 특히 ‘Dolphin’의 만듦새는 놀랍다. 아이유의 인스타그램 스토리의 언급된 것이 화제의 시초이긴 했지만, 장기간 음원차트의 상위권에 머물러 있는 것은 전적으로 노래의 힘이다. 가사에 담긴 독특한 발상, 이를 음악으로 이미지화하는 미니멀한 프로그래밍이 일반적인 프로듀싱과 명확히 선을 긋는다.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듯한 멤버들의 곡 이해도 및 표현력 또한 완성도의 한 축으로 작용한다. ‘da da da da da’라는 단순한 가사가 이렇게 맛깔나게 담겨 있는 노래가 또 있었나 싶을 정도. 그야말로 트렌드를 통한 진화의 이상향을 보여주며, 타이틀로 밀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나머지 세 곡은 ‘내가 알던 오마이걸’에 가깝다. ‘꽃차’는 노랫말에 맞는 따스한 가창과 재즈의 문법을 도입한 반주가 좋은 합을 보여주는 발라드. 8비트 퍼커션과 빈티지한 신시사이저가 발랄한 레트로 팝을 표방하는 ‘Ne♡n’은 그룹 특유의 대중성이 담겨있는 트랙으로, 풍성한 화음이 장식하는 후렴구가 귀에 꽂힌다. 더불어 1세대 케이팝 팬들이라면 왠지 모르게 익숙할, 세기말의 아련함을 극대화한 ‘Krystal’까지. 어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트랙들이 앨범의 완성도에 일조하고 있다.

타이틀곡의 아쉬움을 수록곡들이 메워주는, 새로운 지향점과 기존의 정체성이 알차게 담겨 있는 작품이다. 다만, 그룹이나 소속사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던질 앨범이기도 하다. 고유의 색을 덜어낸 ‘살짝 설렜어’가 최대 히트곡이 된 시점에서, 과연 ‘번지’나 ‘다섯 번째 계절(SSFWL)’, ‘불꽃놀이’와 같은 팝 노선으로 다시금 회귀할 것인지. 아니면 이번 성공이 대중의 니즈임을 인식하고 ‘살짝 설렜어’와 같은 기조를 유지할 것인지. 성공의 달콤함을 충분히 누리기도 전에 부딪힌 과제에 고민이 많을 법하다. 그래도 크게 걱정은 되지 않는다. 이를 풀어낼 실마리와 가능성이 이 앨범에 충분히 담겨있으니까.

– 수록곡 –
1. 살짝 설렜어(Nonstop)
2. Dolphin 
3. 꽃차(Flower Tea)
4. Ne♡n
5. Krys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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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걸(OH MY GIRL) ‘THE FIFTH SEASON’ (2019)

평가: 3/5

가끔 ‘Liar liar’, ‘Coloring book’처럼 말괄량이일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오마이걸은 아련한 사랑을 노래하는 순수 소녀들이었다. 타이틀곡 ‘다섯 번째 계절(SSFWL)’은 이 정체성의 선명한 각인이다. 북유럽풍의 간결하고 절제된 멜로디 라인과 단편 동화집을 연상케 하는 서사 구조, 그리고 걸크러쉬 유행에도 굴하지 않고 수줍게 내민 순백의 이미지가 있다.

사랑을 확신하는 순간을 ‘다섯 번째 계절’에 비유한 서지음의 서정적인 가사와 이를 뒷받침하는 오케스트라 세션, 신비로운 여림과 후렴부 화사한 발산을 부드럽게 연결하는 보컬 배치가 돋보인다. 이는 ‘Closer‘, ‘Windy day‘, ‘비밀정원‘으로부터 이어져 온 핵심 전개다. 어느 정도의 기시감은 있으나 정규 앨범의 첫 타이틀로 무난한 표준형을 제시하며 외도보다는 정도(正道)를 택한다.

앨범도 타이틀의 기조를 이어 콘셉트를 공고히 한다. 신혁, 스티븐 리(Steven Lee), 션 알렉산더(Sean Alexander), 그리고 캐롤라인 구스타프슨(Caroline Gustavsson) 등 오마이걸의 이미지를 형성한 작곡가들을 한데 모았다. 그들의 시너지는 화려함 대신 우아함으로 수렴한다. 타이틀 ‘불꽃놀이‘처럼 튀어 올랐던 전작 < Remember Me >에 비해 힘을 뺀 모습은 뚜렷한 원색보다 은은하게 묻어나는 그러데이션에 가깝다. ‘비밀정원‘의 속편으로 봐도 무방한 ‘소나기’가 앨범의 방향을 이어가고, ‘Perfect day’의 록적인 터치를 피아노로 대체한 ‘Tic toc’ 또한 발랄하지만 사운드 핵심은 겸손이다.

욕심 없는 전개는 안정을 가져다 주나 튀는 시도를 가로막기도 한다. ‘미제 (Case No.L5VE)’의 뚜렷한 기승전결과 중반부 ‘홀린 듯 홀린 듯 그렇게 / 살며시 다시 널 그리네’의 몽롱한 보컬은 오밀조밀한 구성의 승리다. 반면 긴박한 트랜스 인트로와 반전되는 메시지의 ‘Crime scene’, 브라스 세션과 뭄바톤을 혼합한 ‘Checkmate’는 화려하게 터지는 듯하다 앞서 형성한 이미지에 개성이 눌리는 모습이다. 멤버들의 차분한 보컬과 대비되는 공격적인 사운드의 미묘한 부조화는 덤이다.

오마이걸은 느닷없는 인도풍 멜로디의 ‘Windy day‘와 사운드 과부하의 ‘Coloring book’, 그리고 유아적 콘셉트의 ‘바나나 알러지 원숭이’라는 오답 노트를 갖고 있었다. 그렇게 나온 그들의 첫 정규작 < The Fifth Season >은 팀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부분만을 담는 데 집중한다. 지속적인 정체성 탐구와 숱한 자기 견제가 만들어낸, 안정적인 프로토타입이다.

– 수록곡 –
1. 다섯 번째 계절 (SSFWL)
2. 소나기
3. 미제 (Case. No.L5VE)
4. Tic toc
5. 유성 (Gravity)
6. Crime scene
7. 심해 (마음이라는 바다)
8. Vogue
9. Checkmate
10. 다섯 번째 계절 (SSFWL) (In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