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M 엔터테인먼트의 역사는 실재하는 우주의 변천사와 평행을 달린다. 수많은 스타들이 탄생하고 소멸했지만 그들의 파편은 지금까지도 가요계를 수놓고 있다. 허공에 흩뿌려진 유산은 팽창의 자양분이 되어 2020년 마침내 일원화된 신세계 SMCU(SM Culture Universe)를 창조했다. 그 과정에서 선배들의 에너지를 흡수하며 태어난 거대 세계관의 주인공이 바로 걸그룹 에스파다.
팀 이름부터 방향성은 명확했다. 인간 멤버들이 자신의 데이터에 기반한 아바타 ‘아이(æ)’를 만나 경험하게 될 메타버스 스토리. 미래 기술과 음악의 접목이란 사실만으로 등장 전부터 이목이 쏠렸다. 낯익은 이미지로 점철된 데뷔곡 ‘Black mamba’가 그 기대에 미치진 못했으나 올해 손목을 꺾는 디귿 춤과 쫀득한 발음을 곁들인 ‘Next level’이 인기를 끌며 에스파는 단숨에 대세로 우뚝 섰다. 산업 간의 융합으로 호기심을 자아내긴 했지만 가상과 현실의 간극을 좁힌 건 결국 음악이었다.
유행의 본질을 파악하고 돌아온 이들의 음조는 더욱 맹렬해졌다. 강렬한 비트와 찢어 늘인 신시사이저 그리고 극적인 고음 애드리브까지, ‘Savage’의 기틀은 보아와 동방신기가 프로듀서 유영진과 함께 주도했던 2000년대 중반 SMP다. 물론 그 시절에만 충실한 것은 아니다. 후렴구는 엔시티 127의 대표곡 ‘Cherry bomb’처럼 짧은 호흡으로 받아치며 중독성을 배가하고, 브릿지는 엑소의 알앤비 발라드 ‘What is love’를 들여와 보컬 기량을 발산한다. 더불어 둔탁한 타격의 틈엔 영국 일렉트로닉 레이블 PC 뮤직의 시그니처 샘플들을 분절시켜 입체감을 높인다. 기획사의 노하우를 집약하고 하이퍼 팝까지 이식한 K팝 트랙은 혁신적 관점으로 시대를 매끈하게 앞서간다.
뒤이은 ‘I’ll make you cry’까지 야성적인 자세로 일관한 데 비해 후반부는 톤을 낮추며 캐주얼한 면모를 드러낸다. 몽롱한 멜로디의 ‘자각몽’은 이달의 소녀나 레드벨벳의 드림 팝이 스치고, 자존감이 충만한 ‘Yeppi yeppi’는 있지의 ‘달라달라’와 비슷한 뉘앙스를 풍긴다. 비교적 친숙한 질감이 자칫 독보적인 매력에 대한 반감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다채로운 전자음과 목소리의 블렌딩은 음악적 친밀감을 제고하며 타이틀곡의 접근법이 낯선 이들마저 새로운 차원으로 빨아들인다.
음악 외의 콘텐츠도 흡인력을 강화한다. 어린이 만화에 나올 법한 ‘ænergy’의 대사나 ‘Savage’ 뮤직비디오 속 2D 애니메이션은 키치한 즐길 거리다. 막연한 연출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훗날을 위한 면밀한 설계로 짐작된다. 현실의 ‘나’와 가상의 또 다른 자아 ‘아이’는 익명에 가려진 시스템의 양면이고 둘 사이를 갈라 놓으려는 빌런 ‘블랙 맘바’는 딥페이크를 비롯한 기술 범죄의 초상이다. 허구의 이야기 속 투쟁은 디지털 사회의 실태고 이를 조영하는 비주류 매체는 유머 섞인 지적질을 날린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는 서브컬처의 상승으로 근래 보기 드문 아이돌식 풍자를 완성했다.
팬데믹을 기점으로 메타버스는 점점 일상에 스며들었다. 그러나 그 실체는 여전히 흐릿하다. 엉성한 3D 모델링과 각종 표절 논란만 봐도 생소한 개념은 그저 키워드 마케팅에 불과해 보인다. 그럼에도 네 명의 소녀와 네 개의 홀로그램이 그려갈 문화 행보는 근시안적 태도의 불손함을 상쇄한다. 탄탄한 가창력과 과거의 질료로 구축한 세련된 사운드 그리고 다각적인 고발과 비판의 메시지. < Savage >는 미디어와 함께 삼위일체를 이루며 가장 이상적인 SMP를 주조했다. 시대가 공증할 수 있는 ‘Iconic’한 존재, 선구자의 발걸음에 신세기의 성패가 달렸다.
– 수록곡 – 1. ænergy 2. Savage 3. I’ll make you cry 4. Yeppi yeppi 5. Iconic 6. 자각몽 (Lucid dream)
물음표 섞인 갸우뚱거림이 서서히 리듬을 타는 순간, 다국적 보이그룹 엔시티의 핵심 가치인 ‘네오(Neo)’가 뇌리에 박힌다. 생소한 감각에 대한 정의는 여전히 불명확해 거리감이 느껴지나 지난해 엔시티 127이 < NCT #127 Neo Zone >으로 대중에 한 발짝 다가서며 그 간격을 좁혔다. 기세를 이어 엔시티는 시대를 넘나드는 음악으로 두 번째 단합 대회 < NCT Resonance >를 개최했고 행사에 참석했던 23명의 청년들은 올해 다시 각자의 위치에서 교감을 이어가고 있다.
거대한 반향에 공명하는 엔시티 127의 악기는 피리다. 동양풍 사운드와 탄탄한 베이스의 순환은 타이틀곡 ‘Sticker’에서 이들의 오묘한 정체성을 꾸며내는 최적의 요소로, 맹렬한 외침을 담은 ‘영웅’의 프로듀싱과 결을 같이 하면서도 가창에 대비를 두어 또 하나의 실험 데이터를 쌓는다. 랩의 비중을 대폭 줄이고 들여온 알앤비 보컬은 성대를 긁고 꺾어가며 리드미컬한 멜로디를 주도한다.
단편적인 기교로만 맛을 돋우다 보니 본연의 멋을 상실했다. 단출한 기악 구성에 이렇다 할 변주마저 없는 ‘Sticker’는 태용과 마크의 래핑을 그저 보컬진의 유려함을 견인하는 정도로 활용한다. 단순 파트 배분의 문제를 넘어 엔시티 세계관의 근원인 힙합이 중심에 위치하지 못하고 있다. 이 같은 형국은 앨범 전반으로 뻗어가 피아노가 잔잔히 흐르는 ‘내일의 나에게’ 같은 발라드 트랙의 몰입까지 저해한다. 결과적으로 앨범 커버처럼 멤버 모두가 색을 잃고 만 것이다.
벌어진 이음새를 다시 쫀쫀하게 붙이는 건 냉소를 머금은 메시지다. 데뷔곡 ‘소방차’부터 최근의 ‘Punch’까지 진취적이고 저돌적인 태도로 일관한 이들은 이번 작품에서도 기조를 유지하며 기량을 마음껏 발휘한다. 달콤 쌉싸름한 ‘Lemonade’는 세상의 잡음을 시큼한 레몬에 비유해 쿨하게 들이키면서도, 직진 본능에 충실한 ‘Bring the noize’의 질주는 사회를 향해 역으로 노이즈를 발산하며 선명한 스키드 마크를 찍는다. 특히 위 두 곡에서 보컬리스트 재현이 낮은 톤으로 읊조린 랩 파트는 본작의 주요 퍼포먼스로 자리하며 팀의 운용 반경을 넓힌다.
이제 앨범 제목 앞에 항상 붙어있던 ‘NCT #127’이란 스티커는 필요 없다. 1년 반만의 복귀지만 굳이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모두가 알아본다는 자신감의 표출이다. 지난 5년간의 활동을 통해 청년들의 평판은 물론 상업적 성과까지 꾸준한 상승세를 타고 있다. 그럼에도 새로움을 갈망하는 문화 기술은 흥행이 아닌 유행을 이끌기 위해 도전을 주저하지 않는다. 개방과 확장으로 영생을 꿈꾸는 그들에게 < Sticker > 역시 먼 미래를 위한 빅데이터에 불과하다.
– 수록곡 – 1. Sticker 2. Lemonade 3. Breakfast 4. 같은 시선 (Focus) 5. 내일의 나에게 (The rainy night) 6. Far 7. Bring the noize 8. Magic carpet ride 9. Road trip 10. Dreamer 11. 다시 만나는 날 (Promise you)
사회적 거리두기로 공연이 사라지자 예술가들은 창작에 몰두했고 그 결과로 우리는 여느 해보다 많은 앨범 단위 결과물을 접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듯 쏟아지는 작품 속에는 치열한 젊음의 고민과 베테랑의 조용한 귀환, 글로벌 단위의 논의가 돋보인다. IZM 선정 2020년을 대표할 가요 앨범 10장을 소개한다. 글의 순서는 순위와 무관하다.
더 블랭크 숍(The Blank Shop) < Tailor >
미디어의 도움 없이 음악 자체로 자생하기 힘든 시기에 만능 뮤지션 윤석철은 좋은 대중가요를 고민했다. 화려한 뮤직비디오 없이도, 굵직한 퍼포먼스 없이도, 예능 프로그램의 도움 없이도 그 자체로 오래 들을 수 있는 이지 리스닝의 팝을 지향했다. 그는 이 작업을 위해 더 블랭크 숍이라는 새 페르소나를 만들어 좋은 가요 프로듀서의 첫 발을 내디뎠다.
고급 맞춤 정장처럼 참여 가수들에게 딱 들어맞는 < Tailor >는 만능의 작품이다. 일렉트로닉, 재즈, 힙합, 블루스, 록, 인디 등 다양한 장르가 치밀한 재봉술을 거쳐 금방 흥얼거리고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로 뽑혀 나온다. 일상 속 단편을 흥미롭게 관찰하여 한 편의 완성된 이야기로 풀어내는 그의 음악에는 기타 수식어가 필요 없다. 산업과 기술의 시선 이전에 음악은 그 자체로 좋아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 우리는 엔터테이너보다 이런 외골수에 더 집중해야 한다. (김도헌)
추다혜차지스 < 오늘밤 당산나무 아래서 >
신에게 소원을 빌기도 하고 신의 꾸지람을 듣기도 하며, 산 자의 건강과 행운을 빌면서도 망자의 영혼이 평안하기를 비는 무속음악 무가(巫樂). 굿판에서 벌어지는 음악이다. 삶에 대한 인간의 소망이 담겼음에도 참으로 기괴하고 소름 돋는다. 적어도 추다혜차지스의 < 오늘밤 당산나무 아래서 >를 듣기 전까지는. 굿판을 벌이는 장소이자 마을의 수호신이기도 한 ‘당산나무’ 아래서 무가는 위로의 언어로 재탄생한다. 놀랍게도 재료는 펑크(Funk)다.
우리가 나고 자란 한국의 토속적인 정서가 오히려 반(反)대중적이라 느껴질 만큼 국악은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앨범은 가히 2020년 음악계의 충격적인 사건이라 불릴 만 한다. 국악, 그것도 무속음악을 들으면서 ‘얼씨구‘와 같은 몸짓이 아닌 힙합에서 나올 법한 그루브를 탈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럼에도 감상의 끝에 남는 건 애절한 꺾기의 향연, 그 숭고하고도 처절한 한국의 정서다. 지극히 대중적이고 서양적이며, 동시에 철저히 한국적이다. 앨범 전반을 매끄럽게 주도하는 파격적인 장르의 혼합, 무가의 재해석. 국악의 새 시대를 열었다. (조지현)
진보(Jinbo) < Don’t Think Too Much >
말 그대로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로킹한 기타와 현란한 드럼, 그리고 뒤뚱거리는 신시사이저가 그루비한 작법 아래 감당하기 힘들 만큼 쏟아진다. 풍부한 성분과 영양을 갖춘 사운드 위로는 화려한 피처링진이 각자의 감칠맛을 발휘하며 곡에 녹아든다. 이때 필요한 준비물은 활짝 열린 귀 뿐, 이후로는 그저 트랙에 몸을 맡기면 된다.
탄력적인 프로듀싱의 < Afterwork >와 자기만의 색채로 히트곡을 버무린 선집 < KRNB >, 그리고 몽롱한 사랑의 언어 < Fantasy >의 걸출한 커리어를 거쳐, 진보(Jinbo)는 또 한 번 아이디어의 창고 아래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더욱 직관적인 형태로 발전한 < Don’t Think Too Much >는 모두의 니즈를 만족시키는 일종의 자유이용권이다. 이를 어떻게 비유하면 좋을까. 고막 위 펼쳐지는 힙합 퍼레이드. 음악계 풍운아가 만든 감각의 제국. 매끄럽게 오르내리는 롤러코스터. 수식어가 부족할 정도다. (장준환)
방탄소년단(BTS) < MAP OF THE SOUL : 7 >
케이팝 보이 밴드가 아닌, 팝 뮤지션이자 BTS 그 자체가 되기 위한 고군분투가 담겼다. 일곱 명의 7년이 담긴 < MAP OF THE SOUL : 7 >은 멤버 개개인의 자아를 녹여내면서도 그룹의 역사를 유기적으로 엮으며, 더 높은 곳으로 날기 위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아본다. 강산이 변하기도 전에 그들은 국내 대중음악의 틀을 바꾸고, 세계 팝 시장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Intro : Persona’ ‘Interlude : Shadow’ ‘Outro : Ego’로 이어지는 서사적 앨범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 ‘작은 것들을 위한 시 (Boy with luv) (Feat. Halsey)’의 밝음과 ‘Black swan’의 어둠이 상반된 힘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Respect’처럼 힙합을 보여주다가도 ‘Filter’처럼 라틴을 내비친다. 자신들에게 한계가 없음을 증명하며 다양함으로 거대해지는 사운드가 BTS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단결한다. 음악부터 비즈니스까지 이젠 그들이 기준이고, 케이팝이다. (임동엽)
NCT < NCT Resonance Pt.1 >
< NCT Resonance Pt. 1 >은 새 시대를 여는 SM의 야심이다. 개방과 확장이라는 두 모토 아래 유기적으로 회전해온 NCT는 두 새 멤버가 더해진 23인의 NCT 2020으로 더 높은 단계의 비상을 감행했다. 기존 그룹이 가지고 있던 색깔과 면모를 한데 모으되 그것을 더욱 성장한 음악으로 재편한 음반은 팀의 색채를 짙게 하는 랩 트랙과 광폭한 전자음의 댄스, 서정적이고 잔잔한 느린 곡과 다국적의 특색을 살린 언어 혼용까지 가공할만한 완성도로 담아냈다. 단연 올해 가장 빛나는 아이돌 앨범이었다.
다양한 모습을 가진 팀이기에 선보일 수 있는 영화로 치면 블록버스터 같은 이 스케일에서 SM이 제시한 신개념 플랫폼의 긍정성을 봤다. 문법 선택이 자유롭기에 지루할 틈이 없고, 이는 이들이 묵묵히 자신의 음악 역사를 쌓아왔음을 보여준다. 회사의 기획에 발맞추어 하나의 콘셉트를 수행하는 가수의 활약, 특히 랩 멤버의 강한 에너지로 팀의 실력에 대한 의구심을 날려버린 것은 덤이다. 그들이 꿈꿔온 이상에 비로소 한 발 더 다가서는 걸음이었다. (이홍현)
정밀아 < 청파소나타 >
포크 씬의 활약이 돋보인 한 해였다. 팬데믹으로 세상이 시끄러워서일까? 잔잔한 일상, 곁을 풀어낸 음반들이 유난히 좋은 흐름을 보였다. 정밀아의 < 청파소나타 >는 그중에서도 우뚝 선다. ‘그럼으로 / 나는 오늘의 나를 살 것이다’(‘서시’) 나긋하게 선언하는가 하면 ‘서울역에서 출발’에는 위트 있게 현재와 과거를 돌아본다.
잘 닦은 10개의 돌멩이가 반짝이듯, 매끈한 수록곡들을 지녔다. 도시에서의 삶을 겪으며 느낀 텁텁함과 답답함부터 언젠가 그리워질 시절을 아름다운 단어로 그린 음반은 지독히 개인적이며 동시에 대중적이다. 일상의 언어로 품은 그의 자전적 이야기가 위로와 공감을 건넨다. 작은 기타 반주를 넘어서 울리는 또렷한 오늘의 목소리. 웃고 우는 희로애락이 여기에 담겨있다. (박수진)
딥플로우(Deepflow) < FOUNDER >
한 래퍼의 커리어가 파노라마로 흐른다. 딥플로우는 < FOUNDER >에서 힙합에 빠지고 본격적으로 랩을 시작한 순간부터 레이블 대표로서 고군분투하던 모습, 음악성을 인정받으며 인지도가 올라간 때 등을 차곡차곡 기록한다. 각 상황과 당시 느꼈던 감정을 생생하게 나타낸 가사로 노래들은 한껏 사실감을 뽐낸다. 딥플로우가 설립한 레이블에 속한 래퍼들의 찬조도 앨범이 현실성을 또렷하게 발하는 데 힘을 싣는다.
볼품없었지만 이제는 잘나가는 래퍼로 성장한 모습을 알차게 담은 사항 때문에 앨범은 한 편의 전기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을 들게 한다. 여기에 1970년대에 나왔을 법한 투박한 솔뮤직, 펑크 반주는 딥플로우의 역정을 한층 묵직하게 가공해 준다. 또한 일련의 음악적 보조를 통해 < FOUNDER >는 음반 커버로 암시하듯 블랙스플로이테이션 영화의 향을 진하게 풍긴다. 내용과 음악이 잘 어우러져 상승효과를 이룬 근사한 작품이다. (한동윤)
쿤디판다(Khundi Panda) < 가로사옥 >
밑그림을 펼쳐 놓은 < 쾌락설계도 >와 뼈대를 조립하는 과정의 < 재건축 > 속 자재가 이뤄낸 것은 < 가로사옥 >이다. 완공의 결과는 꼭대기를 향해 쌓아 올린 건물이 아닌 일련의 직선 형태로, 깊숙한 공간 안에 나열된 화자의 스토리텔링이다. 그 안에 침투한 질투(‘자벌레’), 자격지심(‘네버코마니’)과 회피(‘겟어웨어’)같이 진솔함을 넘어 독살스럽기까지한 감정의 파편들은 꽤 빽빽하고 날카롭다.
그럼에도 개인의 서사에 몰입하고 점차 파고 들게 만드는 것은 종횡무진 달리는 래핑이다.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휘두르는 듯 더 치밀하고 더 악독하게 랩 퍼포먼스를 채워 넣었고, 피로감을 덜어낸 사운드로 친절함을 살짝 내비치곤 한다. 마침내 끝에 다다르면 < 가로사옥 >이 방대한 결말이 아닌 ‘그저 그의 여정 안의 조각’임을 알 수 있다. 쿤디판다는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갈 예정이다. (임선희)
김석준 < 20세기 소년 >
수려한 디자인과 포장, 마케팅, 시대 감수성, 상품 가치, 언론의 선동적 개입 그리고 글로벌 K팝이라는 말에 어른거리는 윽박지름과 현재적 ‘힙’이 요구하는 초조함이 없다. 압박도 느끼지 않지만 어떤 것에 대한 타협도 없다. 타협한 게 있다면 그의 취향이 머물고 있는 20세기 음악뿐이다. 1993년 유재하가요제의 금상 수상 경력, 하지만 이후 우리에게 선사한 음원이 거의 없어 무명에 가까운 음악가 김석준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제’ 정리에 고민했을 것이다. 오랜 시간이 흘러 앨범을 내는 지각 행위는 필시 과거에 얽매일 소지가 높다는 선입견에 웃으며 맞서려면 반드시 현재적 감성을 부여해야 한다는 것.
자기가 직접 노래한 다섯 곡 수록 앨범 < 나의 이름은 >에 이어 곧바로 내놓은 < 20세기 소년 >은 게스트 보컬과 밴드의 협조하에 작곡자로서의 세계를 전달하고 있다. 귀 기울이게 하는 건 과거와 현재를 버무리고 고저, 장단, 강약을 넘나드는 반(反) 고집의 실천이다. ‘나는 나일 뿐’, ‘버퍼링’, ‘함경도 혜숙이’는 이 판에서 ‘특히 근래’ 듣기 어려운 무적, 무소속 음악이다. 메시지가 있다면 결국 휴머니즘이다. 소박, 순결, 진심이 주는 공감이 따로 없다. 20세기 소년은 이런 사소 하나 숭고한 가치를 가슴에 담아 21세를 포옹한다. ‘난 달라질 거야/ 이제부터 내 자신을 찾아야지..’ 김석준은 기본의 우대가 뉴 노멀(음악)이 되기를 소망한다. (임진모)
스월비(Swervy) < Undercover Angel >
익지 않은 슬픔을 저며낸 젊은 아티스트의 자화상. 대중이 보내는 관심의 뒷면엔 가혹한 잣대와 시선이 숨어 있었고 날카롭게 가공된 언어의 칼날이 되어 그를 해체했다. 태양에 다가간 대가로 추락하게 된 스월비는 온갖 상처를 드러낸 채 쓰러져 있었다. 어쩌면 감추고 싶던 일면이 흐트러진 바닥 위. 그곳에서 그는 자신에게 향하는 희미한 사랑을 발견했고, 보답이란 투박한 이유로 붉게 물든 날개를 감싸 안고 지상에 머물길 선택한다.
자기 고백이란 주제 아래 늘어놓은 일지(日誌)가 어둡고 차갑다. 낮게 깔린 비트를 기반으로 읊조리는 랩은 마주한 상황을 기록하는 데 목적을 두기에 감정선은 높낮이를 그리지 않고 일정하다. 철저한 사실주의. 낡은 VHS 위로 덮어진 다양한 형태의 스월비가 혼란스럽지만, 그 속에서 뚜렷하게 빛나는 아티스트의 성장기에 대중은 분명한 감응을 느꼈다. 이제 첫 정규 앨범. 결국 자유를 찾아 희망으로 귀결된 < Undercover Angel >의 서사처럼 모든 걸 딛고 일어선 스월비의 자리가 이곳에 굳게 새겨졌다. (손기호)
거대한 원반을 빙 둘러싼 NCT 멤버들은 해산과 집합을 반복하며 소속사가 내건 ‘무한개방’과 ‘무한확장’의 기치를 수행해왔다. 목적은 경직된 형식 대신 신개념의 유연한 자유 변형이었고 표현 방식은 오래도록 도외시하여 트렌드에 뒤처진 힙합과 랩이었다. 복잡한 첫인상과 어수선한 도입기도 있었으나 네오(Neo)라는 수식어답게 새 시대의 SMP를 선보이며 세대교체를 수행해왔다. 심혈을 기울인 이 프로젝트는 이제 새 멤버들을 더해 보다 선명한 전환점을 새기고자 한다.
앨범은 ‘일곱 번째 감각’부터 굳게 지켜온 랩과 힙합 기조에 ‘소방차’, ‘영웅’에서의 저돌성, ‘Boss’의 안정적인 운영, ‘Cherry bomb’의 서사까지 다채롭게 버무려낸다. 그룹의 중심에는 태용과 마크, 루카스 등 랩 멤버들이 위치하며 힙합 팀의 성격을 강조하나 전위적인 일렉트로닉 샘플같이 차가운 성격부터 빈티지한 록과 재즈, 그루비한 댄스 곡, 부드러운 알앤비 등 온화함까지 성공적으로 품어낸다. 슈퍼엠이 거대함을 상당수 가져가며 더욱 깔끔하고 모던하며 날렵한 노래를 채택할 수 있게 된 것도 팀에게는 호재다.
휘파람 소리와 함께 앨범을 열어젖히는 ‘Make a wish (Birthday song)’부터 깊은 인상을 남긴다. 안정적인 랩과 보컬 파트의 주고받기부터 후렴부 신스 리프를 더하고 후반 BPM을 떨어트리는 등 기본 틀을 끊임없이 용해하면서도 만듦새는 안정적이다. 종잡을 수 없이 부수고 깨트리며 우아하게 종결됐던 ‘Cherry bomb’만큼은 아니지만 유쾌하고 자연스럽게 미니멀한 훅 중심으로 회전하는 짜임새가 남다르다.
‘Boss’의 모범적인 후속작 ‘Volcano’와 앳된 NCT 드림의 변신을 꾀하는 ‘무대로’ 역시 신선한 루프를 중심으로 쿨 톤의 열정을 적극 표출한다. 서정적인 무드로 진행되는 비트 위 랩과 발라드를 교차하는 트랙 ‘백열등’, 재즈 기타 터치로 시작해 로파이 무드를 깔끔하게 구성한 ‘Dancing in the rain’ 역시 강성 트랙 사이의 훌륭한 이음새다. ‘피아노’와 ‘From home’까지 전체적으로 멜로디 감도가 좋고 담백한 구성이 과하지 않다.
흥미로운 것은 ‘네오’로 무장한 이들에게서 언뜻 그들의 세기말 선배들이 겹쳐간다는 사실이다. 로킹한 비트와 인더스트리얼 스타일의 비트를 적극 활용하고, 쉬지 않고 랩을 몰아치면서도 보컬 파트와 교류하는 것이 HOT와 신화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굳이 나누자면 여기서 비판적 메시지를 줄이고 감미로운 발라드 트랙들을 배치했다는 데서 HOT보다는 신화와 가깝다. ‘Jam #1’이 겹쳐가는 기타 사운드의 ’Misfit’이 대표적이고 파워풀한 댄스 트랙 ‘Music, dance’ 역시 그 영향이 짙다.
동시에 이 두 곡은 앨범에서 큰 의미를 차지하는 트랙들이다. 빈틈없이 꽉 찬 ‘Misfit’은 비록 그 정치성은 희석됐을지 몰라도 NCT가 지향하는 새로운 스타일이 아주 오래전부터 유지된 SM의 모범 양식임을 주지시킨다. 여기에 127 멤버들의 유일한 트랙 ‘Music, dance’가 ‘탈 SM’ 주자였던 샤이니의 색을 품으며 NCT는 과거의 정수를 취하면서도 언제든 자유자재로 실험적인 스탠스를 취할 수 있음을 넌지시 보이기도 한다.
그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 균질한 결과물에 대한 의구심으로 이어지기도 하나 < NCT Resonance Pt. 1 >는 적어도 현재 NCT가 정점의 궤도에 올라섰음을, 그리고 그 기세가 쉬이 꺾이지 않을 것 같다는 단단한 인상을 전달한다. 옥석을 가려 잘 만든 케이팝 앨범이다. 2020년대를 시작하는 SM의 자신감이 ‘Make a wish’ 속 ‘I can do this all day’ 읊조림에 압축되어 있다.
-수록곡- 1. Make a wish (Birthday song) 2. Misfit 3. Volcano 4. 백열등 (Light Bulb) 5. Dancing in the rain 6. Interlude: Past to Present 7. 무대로 (Déjà Vu; 舞代路) 8. 月之迷 (Nectar) 9. Music, dance 10. 피아노 (Faded in my last song) 11. From home 12. From home (Korean Ver.) 13. Make a wish (Birthday song) (English Ver.)
SM의 세계화 전략은 자본과 물량, 그리고 자신감이다. 캐피톨 레코즈와 손을 잡고 스스로를 ‘케이팝 어벤저스’라 자청하는 슈퍼엠(SuperM)은 긴 시간 숱한 시행착오를 거쳐 확립한 그룹 브랜드가 세계 시장에 통할 수 있다는 자의식을 한껏 부풀린다. 그렇기에 이들은 반드시 거대해야 한다. 샤이니, 엑소, NCT, 웨이브이로부터 차출된 일곱 멤버들에게는 미국 시장에 기획사의 성격과 지향점을 분명히 각인해야 할 임무가 주어진다.
‘무한대’와 ‘괴물’을 한 데 융합한 ‘One (Monster & Infinity)’은 제목부터 비장하다. 2012년 샤이니 ‘셜록’에서 선보인 바 있는 두 곡의 조합 전략을 가져와 지각 충돌을 벌인다. 거친 워블 베이스로 꿈틀대는 ‘Infinity’에서 부드러운 후렴 멜로디를, ‘Monster’에서는 긴장감 있는 메인 베이스 리프를 추출하여 이식한 결과물이 매끈하다. 다만 어딘지 모르게 과한 것이 SM 사가(Saga)의 대표작에 알맞다.
이 ‘대표’라는 의무 아래 앨범은 SM 남성 아이돌의 계보를 압축한 프로토타입이 된다. 다채로운 멤버들이 뭉쳤으나 엑소, 샤이니, NCT의 성공 사례들을 집약하여 미국 시장 친화적인 변주만을 더했기에 각각의 개성보다는 일관된 익숙함이 먼저다. 사이버펑크 풍의 싸늘한 무드와 현대적인 사운드 소스로 일관되게 달려 나가는 ‘100’은 NCT 프로젝트에 백현의 폭발하는 보컬을 더했고, 정적인 무드에 꿈틀거리는 베이스와 오리엔탈 무드를 얹은 ‘호랑이’는 엑소 ‘으르렁’의 유니즌 코러스에 NCT의 랩 멤버들을 추가한다. ‘Ko ko bop’을 간결하게 다듬어낸 ‘Wish you were here’도 유사한 경우다.
개별 그룹에서도 가능했을 운용을 콜라보레이션으로 확장한지라 새로운 무언가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외 수록곡들은 팝의 규격에 적응하는 과정인데 여기서도 태민과 카이의 퍼포먼스, 마크 태용 루카스의 신진 랩 세력, 백현의 알앤비 무드는 파편화된 면모로만 존재한다.
교통정리의 어려움도 있다. 보컬 라인의 매력이 드러날 때 랩 멤버들이 등장하고, 랩 멤버들이 저돌적으로 나아갈 때 섬세한 보컬이 더해지는 식이다. 가령 ‘Drip’의 경우 곡을 이끌어가야 할 마크의 랩이 길게 이어지지 못하고 보컬 멤버들에게 바통을 넘기며, ‘Step up’은 반대로 태민과 백현의 보컬 라인 호흡이 랩 멤버들의 개입으로 불규칙하다는 인상을 준다.
여러 어려움이 있으나 세계 시장에 도전장을 던진 만큼 완성도에 소홀하진 않다. 유니즌 코러스로 시작하는 두 곡 중 ‘Big chance’는 차분한 딥 하우스로 확장되고 ‘Dangerous woman’은 트랩 비트 위 선 굵은 포인트를 심으며 2010년대 후반부의 팝 트렌드를 정확히 겨냥한다. 선 굵은 베이스와 신스 리프, 피아노 연주를 교차하며 후렴부 합창까지 매끄럽게 이어지는 ‘Together at home’도 근사하고 선명한 기타 리프 위 하우스 트랙 ‘With you’도 군더더기가 없다. 그룹의 첫 발라드 곡 ‘Better days’ 같은 곡은 근래 저스틴 비버의 차트 히트곡이라 해도 이질감이 없을 정도다.
슈퍼엠을 바라보는 시각은 복합적이다. 미국 시장 진출을 위한 야심작이나 소속 아티스트들의 활동 시간까지 소모해가며 기획한 작품치고 ‘모였다’는 상징성 외 새로움이나 흥미 요소는 부족하다. 그러나 소속사의 정수를 반복 노출하여 교두보를 확보하겠다는 목적에는 충실하다.
따라서 슈퍼엠의 ‘케이팝 어벤져스’는 영웅 군단의 시작보다 마무리 < 어벤져스 : 엔드게임 >에 더 가깝다. < Super One >의 시작은 창조의 개념이 아니다. 과거를 갈무리하여 현재와 미래의 SM에게 새로운 문법과 가능성을 열어주는 충격 전술로 그 의의가 있다. 일대일 대결구도보다 다대다의 장기전을 내다본다.
– 수록곡 – 1. One (Monster & Infinity) 2. Infinity 3. Monster 4. Wish you were here 5. Big chance 6. 100 7. 호랑이 8. Better days 9. Together at home 10. Drip 11. Line ’em up 12. Dangerous woman 13. Step up 14. So long 15. With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