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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모의 위대한 유산 Feature

마이클 잭슨 : 영상시대 이끈, 대중음악 현대화의 단일 주체

“음악의 영상시대를 열다”

마이클 잭슨의 위대함과 그 찬란한 역사적 위상을 이야기할 수 있는 접근법은 무수히 많습니다. 잭슨 파이브, 신동(神童), 마리아(Maria), 환상적 춤과 노래솜씨, 문워크, 블록버스터 스릴러(Thriller), MTV, 킹 오브 팝, 음반 판매량 등등 그와 직결된 여러 콘텍스트들 가운데 하나만을 골라 논해도 그를 설명할 수 있을 겁니다. 그의 댄스 문워크에서 이름 딴 아트 필름으로 올해로 30년이 된 < 문워커 >(Moonwalker)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당대 무려 2200만 달러라는 거액을 들여 제작한 이 영화는 그와 동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뮤직 비디오’를 쭉 연결해 장장 92분의 흥분, 걷잡을 수 없는 스릴과 서스펜스를 팬들에게 선사했지요. 일부 극장에서도 상영되었지만 주로 VHS와 레이저디스크를 통해 일반과 만났는데요, < Thriller > 이후 무려 5년의 학수고대 끝에 나온 새 앨범 < Bad >와 함께 만들어 영상의 측면에서 일대 회오리를 일으켰던 작품입니다.

특히 마이클 잭슨이 직접 스토리를 구성한 ‘Smooth criminal’은 압권이었고 마치 싱글처럼 별도로 소개된 ‘Leave me alone’의 경우는 그래미상을 수상하고 칸영화제에서도 최우수 특수효과 부문의 상을 받습니다. 이 작품이 나온 지 자그마치 30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너무나 빨리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그 30년을 다른 말로 한다면 ‘영상시대’겠지요. 이전의 ‘듣는 음악’ 시대와 분리선을 치는 ‘보는 음악’, 그 뮤직비디오 시대를 견인한 절대 선두가 바로 엠제이(MJ)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어떤 각론보다도 먼저 총론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도대체 마이클 잭슨이 갖는 의미망은 무엇일까요. 이 대목에서 마이클 잭슨은 단지 음악적 현상을 넘어 세상을 바꾼 ‘사회적 현상’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마이클 잭슨의 ‘월드 슈퍼스타덤’에는 백인지배 사회에서 신음한 아프로 아메리칸(Afro- American)들의 비상 욕구와 자긍심이 저변에 흐르고 있다는 거지요.

형편이 나아졌다고는 하나 얼마 전 차일디시 감비노(Childish Gambino)의 쇼킹한 노래와 영상 ‘이게 미국이야(This is America)’가 웅변하듯 지금도 미국 아니 전 세계 흑인들은 알게 모르게 차별과 억압의 불평등 구조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1980년대에는 오죽했겠습니까. 그런 암흑과 절망의 상황에서 지구촌을 뒤흔든 마이클 잭슨의 열풍은 흑인들에게 ‘우리가 빼어나고 우리가 아름답다’는 신념과 긍지를 제공했지요.

“마이클 잭슨과 오바마 대통령”

바로 대중문화의 사회적 영향력입니다. 마이클 잭슨과 함께 흑인들은 자신 있게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마이클 잭슨보다 세 살 밑인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스릴러’ 시절의 엠제이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해낼 수 있다!’ 그것 아닐까요. 결과적으로 마이클 잭슨과 같은 흑인스타의 분발로 미국은 우리 생애에 어려울 것 같던 흑인 대통령을 보게 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 최초의 아프로 아메리칸 대통령’ 오바마를 두고 마이클 잭슨에 대한 채무자, 즉 마이클 잭슨에게 빚을 졌다는 말까지 나오게 된 겁니다.

마이클 잭슨 이전에도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스 같은 엄청난 슈퍼스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엘비스 프레슬리나 비틀스는 영미 사회에서 주로 백인들에게 인기를 누렸던 반면 마이클 잭슨은 흑백 사회 모두에서 폭발적 반응을 이끌었습니다. 그래서 ‘흑백 크로스오버 시대’를 이끌었다는 평을 받는 거지요.

가수로 보면 빌리 할리데이, 레이 찰스, 샘 쿡, 아레사 프랭클린, 오티스 레딩, 마빈 게이, 스티비 원더 등등 마이클 잭슨 이전에도 흑인 스타가수는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스타들이었지만 그들이 미국사회에서 상기한 엘비스 프레슬리,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 엘튼 존, 믹 재거,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등 백인가수들을 누르고 진정한 1등을 차지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그때까지 명백히 백이 흑의 위에 있었지요.

흑인가수로서 백인을 뛰어넘어 진정으로 1등에 오른 인물은 마이클 잭슨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마이클 잭슨이 등장하면서 대중음악의 헤게모니가 백인에서 흑인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거지요. 1982년이 대중음악에서 전환점이란 말이 그래서 나옵니다. 바로 이 해에 백인음악의 대변자이자 상징인 이글스(Eagles)가 해산하고 아프로 아메리칸 스타 마이클 잭슨이 등장했으니까요. 한편으로 미국의 문화유산이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 노예들이 만들어낸 블루스와 재즈라고 한다면, 또 거기에서 로큰롤이 파생했음을 전제하면 흑인문화가 마이클 잭슨에 와서 비로소 본래의 주도적 위상을 탈환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상 최고의 앨범 판매량 기록”

이제 각론으로 가볼까요. 우선 기록적 측면에서 어떤 가수도 그에게 범접불허입니다. 잭슨의 별명은 ‘킹 오브 팝’입니다. 우리는 흔히 ‘팝의 황제’로 번역하는데, 마이클 잭슨은 그러한 수식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던 뮤지션이지요. 무려 13곡이 빌보드 싱글차트 1위에 올랐고 앨범 판매고는 7억 5000만장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기념비적인 앨범 < Thriller >는 미국 레코딩 산업협회(RIAA)의 집계에 따르면 미국에서 3200만장을 비롯해 세계 판매량6600만장으로 단일 앨범 최고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는데요, 불법복제를 포함한 실제 판매량은 1억2천만 장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단일 앨범으로 1억장 이상 추정된 것은 < Thriller > 밖에 없습니다. 비틀스, 아바, 이글스, 핑크 플로이드가 앨범을 많이 팔았다고 하지만 한 장의 독집으로만 따졌을 때는 마이클 잭슨의 근처에도 못 온다는 거지요. 게다가 공식적으로 2000만장 이상 판매한 앨범을 마이클 잭슨은 무려 5장을 보유, 이 부문 역시 최고입니다. 그 다섯은 다음과 같습니다.

Thriller >(6600만, 1982)
< Bad >(3500만, 1987)
< Dangerous >(3000만, 1991)
< HIStory: Past, Present and Future, Book 1 >(2000만, 1995)
< Off The Wall >(2000만, 1979)

성인이 되어 낸 전성기 시절 앨범 다섯이 모조리 2000만장 이상 팔린 거지요. 경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잭슨 다음의 아티스트는 비틀스, 마돈나, 셀린 디온으로 각 3장에 불과합니다. 기록에 관한 한 누구도 마이클 잭슨을 이기지 못합니다.

<Thriller>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지요. 이 앨범은 1982년 말에 발표되어 이듬해 시장과 인기차트를 석권했습니다. 이 무렵, 모타운 25주년 기념공연에서 소개된 ‘문워크’ 춤은 지구촌 전체에 탄성을 불렀지요. ‘Billie Jean’을 부르며 마치 달을 밟고 걷는 듯 유연하게 뒤로 걷는 춤을 선보였을 때 청소년들은 넋을 잃었습니다. 모방 본능에 충실한 나머지 젊은이들은 따라 해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뒤로 넘어지는 사고가 속출했지요.

오죽하면 너무 열심히 추다보니 신발이 너무 닳아 신발 판매량이 늘었다는 소식마저 나왔겠습니까. 하긴 전설적인 ‘춤의 배우’인 프레드 아스테어가 ‘경이적 춤꾼(wonderful mover)’이라고 격찬한 사람의 동작을 어찌 쉽게 재현할 수 있겠습니까. 여배우 제인 폰다는 “마이클 잭슨의 음악에 맞춰 춤출 수 있고, 일할 수 있고, 섹스할 수 있고, 노래할 수 있다. 그의 음악을 듣고 가만있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Wonderful mover, invincible singer!!!”

춤만이 사람들을 홀린 것은 아니었지요. 천재적 감정표현과 비트 감각에다 어릴 적 잭슨 파이브(Jackson 5) 활동 시절부터 노래한 풍부한 이력은 가창력 측면에서도 그를 발군으로 만들었습니다. 특히 14살 때 히트 친 노래 ‘Got to be there’와 ‘Rockin’ robin’가 수록된 1972년 솔로 앨범의 또 다른 곡 ‘Maria(you were the only one)’에서 자유자재로 음을 타고 지르며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솜씨는 달리 천재가 아니었지요. 신동이었습니다. 영혼으로 노래해야 이렇게 나온다지만 타고난 역량과 재기가 아니면 도무지 부를 수가 없는 거죠. 정말이지 ‘Maria hey hey heh hey Maria/ Maria don’t you hear me calling Maria…’ 시작 몇 초에 모든 게 끝납니다. 느린 노래 ‘She’s out of my life’, ‘You are not alone’이든 빠른 노래 ‘Beat it’, ‘The way you make me feel’이든 마이클 잭슨의 히트 넘버들을 자세히 들어보십시오. 그는 가수로도 역사가 인정한 특급 소울가수, R&B가수입니다.

녹음기술의 측면에서도 마이클 잭슨의 음악은 언제나 유행을 선도했습니다. 녹음할 때 완벽한 소리가 나올 때까지 ‘어게인(다시!)’이란 말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고 하니 사운드 측면에서도 그는 혁신적이었습니다. 1990년대 후반까지 국내는 물론 세계 어디 녹음스튜디오의 엔지니어 책상에는 언제나 마이클 잭슨의 음반이 비치되어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아마 ‘Heal the world’나 ‘Earth song’을 들어보시면 다들 고개를 끄덕이실 겁니다.

다시 춤으로 돌아가 그의 출중한 댄스 역량은 1980년에 시작된 음악전문채널인 MTV 시대와도 맞물려 폭발했습니다. 유선방송 MTV가 종일 마이클 잭슨의 ‘Thriller’ 뮤직비디오를 틀면서 전 세계가 그의 춤과 음악에 빠져들었지요. 지금은 너무도 당연한 ‘보는 음악’, ‘비주얼 댄스’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어찌 보면 마이클 잭슨은 ‘대중음악 현대화’의 주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영향 아래 국내에서도 1980년대 중후반 소방차, 박남정, 김완선 등의 댄스가수가 잇달아 나왔습니다. 서태지도 어릴 적에 마이클 잭슨을 동경하면서 댄스음악의 무한 파괴력을 가슴속에 담아뒀을 것입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어느새 9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고인이 됐지만 ‘문워커’를 비롯한 영상 그리고 음악으로 아직도 우리 곁에 살아있는 듯합니다. ‘리빙 레전드’지요. 누가 뭐래도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스처럼 마이클 잭슨의 음악사적 위상은 견고합니다. 그의 빼어난 음악과 명반 그리고 새 음악시대의 창조라는 위업이 있기에 ‘팝의 황제’라는 타이틀은 앞으로도 영원할 것입니다. < Moonwalker >만 봐도, ‘Black or white’ 한 곡만 들어도 왜 그가 위대한지 증명됩니다. 그는 현재진행형의 음악위인입니다. 그가 있어서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며 앞으로도 행복할 것입니다.

(20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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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흑인의 살 권리를 노래하다

자타가 공인하는 자유와 평등의 국가, 미국의 이면에는 흑인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과 멸시의 역사가 존재한다. 강제 이주 및 노예제로 건국 초기부터 고통을 받았던 흑인들은 노예제가 철폐된 이후에도 오랜 기간 백인들과 동등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전설적 여가수 빌리 홀리데이는 1939년 ‘Strange fruit’에서 적나라한 비유를 통해 참혹한 현실을 드러냈다. 노예제 폐지는 명목상의 해방이었을뿐, 실질적 차별은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짐 크로우 법’을 두고 각층의 목소리가 충돌하고, 말콤 엑스와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등장했던 격동의 1960년대 전후, 혼란스러운 흑인들을 위로한 것은 음악이었다. 샘 쿡은 ‘A change is gonna come’으로 따뜻한 격려를 건넸고, 제임스 브라운의 ‘Say it loud – I’m Black and I’m Proud’는 흥겨운 펑크(funk)로 사람들을 독려했다. 

밥 말리의 ‘Redemption song’퀸시 존스가 주도한 1980년대 인기 가수들의 대형 프로젝트 ‘We are the world’는 더 넓은 메시지를 함의했지만, 흑인들에게는 연대의 송가와도 같았다. 1990년대에 들어 마이클 잭슨은 ‘Black or white’로 흑백의 화합을 노래했고, 1993년 슈퍼볼 하프타임 쇼에서는 대규모 카드 섹션으로 미국 사회에 경종을 울리기도 했다.

‘Strange fruit’으로부터 70년이 흐른 지난 2009년, 미국은 건국 이래 최초로 흑인 대통령을 맞이했다. 척 베리와 리틀 리차드, 마빈 게이와 제임스 브라운을 거쳐 1980년대 마이클 잭슨에 이르자 음악계 최전선에 서는 흑인 아티스트들도 다수 등장했다. 1990년대를 전후로 힙합과 뉴잭스윙, 알앤비 등 흑인 음악이 시장에 돌풍을 일으켰고, 어셔와 비욘세, 알리시아 키스 등 걸출한 팝스타들이 연속으로 등장하며 블랙 뮤직은 최전성기를 맞았다. 불과 150여년 전만 해도 ‘민스트럴시'(우스꽝스러운 흑인 분장을 한 백인들의 엔터테인먼트 쇼)가 선풍적 인기를 모았던 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감개무량이며 천지개벽이다.

많은 부분에서 인종의 평등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지만, 여전히 미국을 관통하는 주요 키워드는 흑백 갈등이다. 트레이본 마틴 살인 사건 등 2012년 이후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미국 내 잔존하는 흑인에 대한 편견과 멸시를 수면 위로 끌어 올렸고, 흑인 사회는 ‘흑인도 살 권리가 있다'(‘Black lives matter’)며 외치기 시작했다. 음악인들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50여년 전 샘 쿡이 그랬듯, 오늘 날을 살아가는 뮤지션들은 음악으로 흑인들을 독려하는 동시에 끈질기게 남아있는 인종간 반목을 없애기 위한 노래를 내놓았다.

2013년 말 개봉한 영화 < 노예 12년 >은 비인간적 인종 차별이 얼마나 비극적인 역사를 만들었는지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 일깨움이 채 가시기도 전인 2014년 8월, 퍼거슨 시에서 비무장 흑인 소년이 백인 경찰 총에 숨지는 사태가 일어나자 흑인 사회의 집단 움직임은 뚜렷해졌다. 연말까지 평화 집회와 폭력이 수반된 소요가 계속되며 좀처럼 진정되지 않던 분위기에 커먼(Common)과 존 레전드의 ‘Glory’는 새로운 앤썸(anthem)이 됐다. 1960년대 흑인 민권 운동을 조명한 영화 < 셀마 >의 사운드트랙으로 사용된 노래는 성가를 연상케하는 진행과 현실을 녹여낸 가사로 뜨거운 반응을 모았다.

비슷한 시기에 디안젤로가 14년 만에 ‘검은 구세주’라는 뜻의 < Black Messiah >를 발표하자 분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거창한 음반 제목과 달리 수록곡 다수가 보편적 사랑 노래로 채워졌지만, ‘우린 그저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원했다’고 읊조리는 ‘The charade’와 인트로부터 1분 30초간을 1960, 70년대의 급진, 과격주의 흑인 운동조직 ‘흑표당’의 유명 연설들로 채운 ‘1000 deaths’가 흑인 사회를 결집시켰다. 팝의 요소를 차용해 수용 범위를 넓힌 피비알앤비(PBR&B) 등이 주류로 부상한 것과 관계없이 정통의 흑인 음악에 충실하는 완강한 스탠스를 보인 것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이듬해인 2015년 3월 발매된 켄드릭 라마의 < To Pimp A Butterfly >는 이 모든 것의 정점이었다. 블루스와 재즈, 펑크(funk)와 알앤비 등 흑인 음악을 총 망라해 자양분 삼고, 거대한 스토리텔링 안에 흑인으로서의 자부심과 고통을 녹여낸 걸작에 흑인 사회는 뜨겁게 응답했다. 그는 돈과 섹스, 마약에 몰두하는 여타 랩퍼와는 확연히 달랐다. ‘피부색으로 적이 될 수 없다’고 일갈하는 ‘Complexion(A Zulu Love)’, 뼈 아픈 노예의 역사와 상술한 트레이본 마틴 살인 사건을 각각 언급한 ‘Wesley’s theory’‘The blacker than berry’ 등 앨범의 모든 곡이 가려운 곳을 긁어냈다. ‘마틴 루터 킹의 환생’이라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 To Pimp A Butterfly >의 충격파가 한창이던 2015년 4월, 백인 경관에 의해 흑인 청년이 목숨을 잃는 사건이 일주일 사이에 2회 연속으로 벌어지자 흑인 사회는 분노에 휩싸였다. 사건이 벌어진 곳 중 하나인 볼티모어에서는 대규모 폭력 시위가 벌어졌고, 비욘세와 아이스 큐브(Ice Cube) 등 많은 흑인 아티스트가 경찰을 규탄하고 시위대를 지지한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인종과 무관하게 지치고 상처입은 볼티모어를 음악으로 위로한 것은 록 레전드 프린스였다. 평소 저작권에 엄격해 유튜브에 동영상 게시도 꺼리던 그는 ‘모두 총을 치워버리고 서로 사랑하자’는 인류애적 메시지를 담은 흥겨운 펑크(funk)곡 ‘Baltimore’를 무료로 공개하며 평화와 화합을 노래했다.

“정의가 없는 곳에는 평화도 존재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또 다시 피 흘리는 날을 겪어야 하나요?
우는 것도, 사람들이 죽는 것에도 지쳤습니다.
모두 총을 치워버립시다.”
– ‘Baltimore’, 프린스(Prince)

지난 2월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50회 슈퍼볼 하프타임 쇼는 콜드플레이의 몫이었으나, 정작 언론과 SNS를 달군 것은 단 3분간 무대에 오른 비욘세였다. 주체적 여성상을 강조하던 기존 기조에 흑인으로서의 자긍심을 더한 신곡 ‘Formation’을 슈퍼볼 하루 전에 기습 발매하며 관심을 독차지한 그는, 음원 공개 이튿날 하프타임 쇼에서 선보인 신곡 무대로 단숨에 논란의 중심이 됐다.

검은 제복과 베레모 차림을 한 댄서들의 의상과, 주먹을 쥔 채 하늘로 팔을 뻗는 등의 안무가 1960년대 ‘흑표당’을 떠오르게 한다는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을 비롯, 비욘세를 향한 보수세력의 맹공이 이어졌고 급기야 SNS에서는 반(反)비욘세 시위를 도모하는 움직임까지 생겨났다. 노래는 특정 음원 서비스 업체(TIDAL)에서만 판매되었고 뮤직비디오 역시 링크가 없으면 감상이 불가능했지만 사회적 파급력은 상당했다.

자유와 평등의 국가 미국은 정작 백인을 제외한 다른 인종에게 온전한 자유, 평등을 허용하지 않았다. 버스의 좌석 구분은 없어졌지만 고질적인 편견에서 비롯된 멸시와 기저에 깔린 백인 우월주의는 아직 남아있다. 빠르게 바뀐 세상에 비하면 지독하게 오래 지속된 갈등이다.

70년 전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로 위안을 얻었을 세대의 손자, 손녀들이 이제는 켄드릭 라마와 비욘세의 격려를 받는다. ‘Black lives matter’ 슬로건이 한창 펄럭이는 지금, 미국은 가던 길과 새로운 길, 그 기로에 서있다.

(201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