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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피(LP) ‘Churches’ (2021)

평가: 3.5/5

‘희망의 찬가든 작고 슬픈 노래든 그것들은 모두 같은 장소에서 왔어요, 바로 제 마음. 여러 감정이 입가로 가닿아 목소리로 표출되는 거죠.’

미국의 음악 웹진 아이돌레이터(Idolator)와의 2018년도 인터뷰에서 뉴욕 롱아일랜드 출신의 뮤지션 엘피가 한 말이다. 기술 문명과 개인의 소외감 등 사회의 여러 부면을 소재 삼아 노래해온 그는 작가로서의 자의식이 유독 강해보이고, 이는 다른 뮤지션들의 히트곡으로 먼저 이름을 알린 이력과 묘하게 대비된다. 다양한 스타일을 팝 록에 녹여낸 < Hand To Mouth >로부터 3년 만에 나온 < Churches >는 송 라이팅의 강점과 진솔한 자기 고백을 융합해 엘피 고유의 날인을 완성한다.

빌보드 싱글차트 8위까지 오른 리아나의 ‘Cheers (drink to that)’ 와 조 월시의 ‘Hi roller baby’ 등 다양한 질감의 곡을 제공했던 그는 이번 앨범에서 베테랑 작곡가의 능력을 검증했다. 선명한 멜로디의 팝 록으로 대중적 노선을 꾀했지만, 곳곳에 스며든 실험성이 작가주의를 붙들었다. 공간감 있는 편곡으로 몽환성을 극대화한 ‘Goodbye’와 선율 뒤에 두터운 소리의 벽을 세운 ‘Angels’가 돋보인다.

본명 로라 퍼골리지에서 눈치 채듯 이탈리아계인 그는 미국의 컨트리 스타일에 라틴 계열의 리듬감을 엮어 가창이 독특하다. 얼핏 시아나 샤키라가 떠오르지만 트랙을 경유할수록 엘피 고유의 음색이 명징해진다. 구렁이 담 넘듯 박을 타는 유연함과 응축된 에너지를 폭발하는 후렴구가 장기.

터무니없이 솔직한 가사가 때때로 당황감을 안긴다. 느긋한 기타 톤과 알앤비 리듬을 자유롭게 뒤섞는 사이키델릭 팝 ‘How low can you go’는 , ‘지난번 너를 봤을 때 우리는 함께 코카인을 했지’로 전기 충격을 주고, 루 리드와 티 렉스의 글램 록을 소환하는 ‘My body’는 ‘내 몸은 누군가를 원하고 있지, 나는 혼자 만족하는 게 지겨워’라며 몸의 자주성을 주창한다. 임계선 따윈 없다는 양 자유로운 표현법 자체보다 사운드와의 조화로 발현되는 감정 혹은 분위기가 강점이다.

자신을 숨기지 않는 당당한 뮤지션은 18여 년간 다섯 장의 정규 앨범으로 경력을 쌓아갔으나 유럽에서 널리 사랑받은 컨트리풍의 팝 록 ‘Lost on you’를 제외하면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하지만 빼어난 멜로디 주조 능력과 감각적인 가창에 거침없는 노랫말이 더해져 ‘엘피 마니아’를 양산했고 이제는 언성 히어로의 지위에 올랐다. 차트 성적과 관계없이 지지자들의 열렬한 환호를 끌어낼 < Churches >를 통해 엘피는 조력자가 아닌 주연으로 우뚝 섰다.

– 수록곡 –
1. When we touch
2. Goodbye

3. Everybody’s falling in love
4. The one that you love
5. Rainbow
6. One last time
7. My body
8. Angels
9. How low can you go
10. Yes
11. Conversation
12. Safe here
13. Can’t let you leave
14. Churches
15. Po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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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 김도헌의 Twist And Shout

LP의 화려한 부활 그 아래 불안감

1980년대 오래된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레이첼 조이스의 소설 ‘뮤직 숍’은 시대의 흐름 속 왜 다시 엘피(LP)가 사랑받는지를 명쾌히 요약한다. (엘피는 음반 규격을 의미하는 용어로 아날로그 음반을 통칭하기 위해서는 ‘바이닐’이라 지칭하는 것이 맞다.)

“시디(CD)가 여러모로 편리하긴 하지만 엘피판의 그윽하고 멋스러운 느낌을 따라갈 수는 없어. 다들 두고 보면 알겠지만 시디의 유행은 그리 오래가지 않을 거야. 소장 가치가 없으니까.

‘뮤직 숍’의 예언대로 바이닐 판은 시디의 권위를 박탈했다. 지난해 미국에서 LP는 2,754만 장이 팔려나가며 1991년 이후 최다 판매량을 기록했다. 2006년 이후 꾸준한 판매 증가세를 보이더니 1986년 이후 34년 만에 시디 매출을 뛰어넘은 것이다. 피지컬 음반 소비가 나날이 줄어드는 가운데서도 시디 매출이 전년 대비 48%나 감소할 때 LP는 꾸준한 구매 상승률을 보여왔다.

5년 전쯤만 해도 레코드 숍에 들러 바이닐을 구입하는 이들은 이른바 ‘레트로 마니아’들이었다. 벌집 같은 박스 속 가늠할 수 없는 시간과 수없이 많았을 공간의 이동을 거쳐 도착한 중고 판들 가운데 나만의 보물을 찾아 나서는 ‘디깅(digging)’ 족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관심은 사뭇 다르다. 코로나 19로 한 풀 꺾이기 전 ‘서울 레코드페어’와 같은 레코드 행사장은 인산인해를 이뤘고, 지금도 한정반을 구하기 위해 매장 앞에서 줄을 서고 인터넷 예약을 기다리는 이들이 많다.

바이닐의 위상 변화를 체감할 수 있는 두 가지 키워드가 있다. 첫째는 감성이다. 바이닐을 통해 음악을 듣는 행위 자체가 MZ세대에게 쿨한 것으로 여겨진다. 고민 없이 터치 몇 번이면 평생 들어도 모자랄 수의 노래를 추천받는 스트리밍 시대의 음악 감상은 익숙하고 건조하다. 바이닐 감상은 다르다. 오래도록 판을 고르고, 턴테이블을 세팅하고, 오디오 시스템을 만든 다음 바늘을 올리기까지의 섬세한 과정이 필요하다. 다시 한번 ‘뮤직 숍’의 한 구절을 가져온다.

나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음악이 좋아요. 엘피판을 들으려면 제법 번거로운 과정이 있죠. (…) 엘피판은 반드시 손으로 들고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의도치 않게 흠집이 나 판이 튀기도 해요. 엘피판은 세심하게 신경 써주어야 깊고 그윽한 음질로 보답하죠. (…) 삶을 축복해 주는 음악을 들으려면 기꺼이 그 정도 수고쯤은 감수해야죠.

과장 좀 보태 신세대 음악 팬들에게 바이닐 감상은 경량화된 형태로만 존재했던 음악 감상을 신성한 의식으로 끌어올리는 새로운 경험이다. 음악을 듣지 않아도 좋다. 세워두기만 하면 인테리어 소품, 인스타그램 계정을 장식할 좋은 도구가 된다. 심미적인 차원에도 타 매체에 앞선다. 제작사들도 이를 파악하여 레코드판에 색을 입힌 컬러 바이닐을 제작하고, 일반 앨범 커버와 다른 감각적인 새로운 디자인을 채택하며 음악 감상 이상의 가치를 부여한다. ‘어떤 음악을 듣느냐’보다 ‘어떻게 음악을 듣느냐’가 중요해진 시대에 LP의 강점이다.

두 번째 이유는 래플(raffle)과 리셀 문화다. 복권 혹은 응모권을 의미하던 래플은 선착순 판매 드롭(Drop) 마케팅과 반대되는 추첨식 판매 마케팅이다. 기업들은 고급 운동화 혹은 한정판 패션 아이템 구매의 기회를 응모와 추첨으로 진행하고, 당첨된 소비자들은 제품을 구매한 다음 직접 사용하거나 구매한 물건을 되파는 리셀을 선택한다. 래플 마케팅을 가장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신발 시장에서는 신발과 재테크의 합성어인 ‘슈테크’, ‘스니커 테크’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정도로 ‘리셀’ 문화가 일반화되어있다. 

최근 레코드판의 소비 유형도 이와 유사한 흐름을 보인다. 바이닐 레코드를 제작하는 공장의 수가 줄어들며 긴 제작 기간과 한정된 수량의 리스크를 감당해야 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품귀 현상’을 불러오며 희소가치를 높였다. 오래전 제작된 데다 보존 상태까지 좋은 제품이 빈티지 숍에서의 상품처럼 비싸게 거래되고, 인기 가수들은 그들의 신보를 한정판으로 제작해 일반 시장에서 구할 수 없는 제품임을 강조한다.

일련의 흐름에 힘입어 한국 엘피 시장은 작지만 탄탄한 구매층을 확보하며 저변을 넓히고 있다. 2016년 28만 장에 그쳤던 국내 엘피 판매량은 2019년 60만 장까지 증가했다. 특히 지난해에는 2019년 대비 73.1% 성장세를 보였다. 세월의 흐름에 사라진 공장이 다시 문을 열고, 유명 아티스트들부터 케이팝 아이돌까지 한정반부터 일반반까지 다양한 판을 발매하고 있다. 

2,000장 한정 제작된 백예린의 첫 정규 앨범 < Every letter I sent you. > 한정판이 발매와 동시에 품절됐고, 16년 만에 바이닐 판으로 재발매된 이소라의 < 눈썹달 > 한정판 3천 장이 예약 판매 1분 만에 매진됐다. 이외에도 듀스의 < Deux Forever >, 이승환의 < Fall To Fly >, 김동률의 < 오래된 노래 > 등이 레코드판으로 다시 등장해 화제를 모았다. 중고 거래도 만만치 않다. 일례로 유재하의 < 사랑하기 때문에 > 담배 연기 디자인의 초반 엘피는 중고 시장에서 1,000만 원에 거래된다. 아이유의 < 꽃갈피 > 미개봉 한정 LP는 중고가가 무려 200만 원이다. 

디지털의 시대 아날로그의 가치가 ‘뉴 노멀’로 자리 잡아가는 광경은 분명 흥미롭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최근의 바이닐 생산 및 소비 시장이 마냥 긍정적으로 보이진 않는다. 

우선 비용 문제다. ‘음악에 돈 쓰는 것을 두려워하다니!’라 비판한다면 할 말 없다. 하지만 과거 아날로그 방식으로 제작된 음원을 담은 판이라면 모를까 디지털 방식으로 제작된 음원을 마스터링만 한 최근 생산품의 가격이 5~10만 원 사이에서 형성되는 것은 의아하다. 가격이 높으면 그만큼의 품질이 보장되어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다. 내부 구성이 충실한 것도 아니며 판의 만듦새도 좋지 못하다. 한정판이라는 이름으로 높은 가격을 책정하지만 수요는 넘치고 생산은 제한되어 있으니 질적 검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단적으로 백예린의 < Every letter I sent you. > 일반반과 이소라의 < 눈썹달 > 한정반의 경우 제작 불량으로 인한 음질 문제가 불거지며 제작사에서 불량판에 대한 교환을 진행해야 했다. 제작 단계부터 마스터링 과정까지의 변수가 상당한데도 가격은 언제나 높다. ‘뮤직 숍’의 주인공이 말하는 ‘깊고 그윽한 음질’을 듣기 위해 턴테이블, 스피커, 기타 장비들을 세팅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재 엘피 가격은 너무 비싸다. 

리셀이 여기서 다시 한번 문제가 된다. 최근 한국 바이닐 시장에는 한정반만 있을 뿐 일반반이 드물다. 신보나 재발 매반의 경우 굳이 ‘한정’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할 이유가 없는데도 희소성을 강조한다. 물론 바이닐 수요층의 규모가 확실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제한적인 생산 및 판매 방식을 진행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높은 가격과 어려운 구매 과정만큼 품질도 좋아야 하는데 바로 위에서 말한 것처럼 만족스러운 경우가 거의 없다. 심미성을 위해 음질이 떨어지는 컬러 바이닐을 택하고, 몇 가지 추가 구성품을 더한 것으로 높은 가격의 이유를 대신한다. 

그럼에도 대부분 한정반들은 발매와 동시에 품귀 현상을 빚으며 원래 가격의 4~5배 상당으로 중고 거래가 이루어진다. 중고 거래를 위해 판을 구입한 후 비싼 ‘플미(프리미엄)’을 붙여 판매하는 ‘리셀러’들의 횡포에 음악을 듣고 싶은 대중은 기회를 놓치거나 울며 겨자 먹기로 비싼 중고반을 구입한다. 백예린, 김동률, 이승환 등이 중고 거래의 횡포를 지적하며 ‘리셀 금지’를 호소했지만 근본적인 마케팅과 생산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양심에 호소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유명 레코드 숍 ‘김밥레코즈’는 지난 26일 공식 인스타그램을 통해 청하의 < Querencia > 한정반 엘피 발매 소식에 개인 의견을 전개하며 “일반적인 커팅, 일반적인 프레싱, 그리고 특별할 것 없는 패키지인데 가격만 특별한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라 주장했다. 수요가 늘어난 만큼 한정반뿐 아니라 일반반, 디럭스 등 다양한 옵션을 제공하여 소비자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야 한다는 주장이다. (< Querencia > 엘피는 기본 가격이 114,900원, 할인가 95,800원이다.)

바이닐 시장은 계속 성장할 것이다. 음악이 머천다이즈(MD)화 되는 것을 개탄하는 일부 음악 팬들의 시선도 있지만 음악 감상의 물리적 주 매체를 바이닐로 인식하고 있는 현세대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음악을 ‘구입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치가 있고, 그 인원의 증가는 늘어나는 판매량과 꺼지지 않는 수요로 증명되고 있다. 하지만 최근의 흐름 속에서 ‘뮤직 숍’처럼 음악을 소중하게 듣고자 하는 팬들을 위한 자리가 점차 좁아지는 듯한 일말의 불안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바이닐 판을 일부 소수 마니아들의 취향, 시디나 스트리밍과 구분되는 고급 매체로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소중히 용돈을 모아 청계천 세운상가에서 소위 ‘빽판’을 구입해 밤새 턴테이블 위 돌아가는 레코드판을 바라보던 경험의 세대라면, 레트로에 열광하는 신세대에게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할 생각을 하는 대신 음악의 신비로운 경험을 보다 손쉽게 제공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음악의 진입장벽은 낮아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