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무명 가수 생활을 딛고 유명 가수로 탈바꿈한 이승윤에게 < 싱어게인 > 우승은 한 챕터의 끝이 아닌 새로운 출발에 가깝다. 2023년 서울가요대상에서 < 올해의 발견상 >을 거머쥐며 전한 ‘물 들어올 때 노를 젓기보다는 물이 새지 않도록 배를 수리하며 지냈다’는 수상 소감처럼, 그는 자신을 둘러싼 급격한 상황 변화에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자신을 담금질하여 2집 < 꿈의 거처 >와 함께 돌아왔다.
녹진한 삶을 언어에 풀어내는 문장가이자 사회의 단면을 꼬집는 사상가로서 면모는 여전히 탄탄하다. 환희와 절망이 엉킨 삶을 해학적으로 짚어낸 < 폐허가 된다 해도 >처럼 그에게는 깊은 철학과 함께 밝은 유머도 빛나고 있었다. 다소 한산하고 여유로운 월요일 저녁의 홍대 거리와 묘하게 어울리는 이승윤은 어려운 질문에도 능글맞게, 가벼운 물음에는 또 진중하게 화답하며 본인의 뚜렷한 주관과 음악에 대한 묵은 궁금증을 해소해주었다.
정규 2집 < 꿈의 거처 >로 돌아왔다. 전작과 비교했을 때 전체적으로 음악이 ‘슬림’해졌다는 인상이 강하다. 태생이 맥시멀리스트인지라 음악적으로 늘 풍부한 소리를 지향한다. 다만 < 폐허가 된다 해도 >는 데드라인이 촉박했기 때문에 소리의 정돈이 다소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사운드가 잘 어우러질 수 있도록 배치하고, 고민할 시간이 충분했던 < 꿈의 거처 >가 더 완성도 높고 정갈한 소리를 들려주기에 그런 감상을 낳는 것 같다.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가려는 측면에서도 ‘슬림’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가사 역시 무게감을 던 느낌인데 이런 의도는 없었는지. 솔직하게 말하면 더 많은 사람에게 들려주기 위해 작품을 만들지는 않고 오히려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내 취향을 녹여내는 데 집중했다. 신보에는 기존에 비축해둔 곡과 최근에 쓴 곡들이 섞여 있다. 이전에 만든 곡들은 좋은 문장이 되도록 오랜 퇴고를 거친 편이지만, 너무 현학적인 가사에 얽매이는 건 아닌가 싶어 새로운 트랙들은 날 것으로, 떠오르는 감정에 집중했다. 그런 이유로 얼마 전에 만든 ‘비싼 숙취’나 ‘야생마’가 더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자기 생각을 온전히 가사에 녹여내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 것 같다. 음악을 구성하는 요소 중 언어를 특히 날카롭게 다듬는 이유가 무엇인가. 원래부터 말에 잘 휘둘리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성장기에 난립했던 캐치프레이즈와 슬로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당시에는 멋진 말을 들으면 무조건 수용했지만, 그 문장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사람들을 배격하는 행태에 어느 순간 괴리감을 느꼈다. 당연히 어떤 문장이 주는 교훈이 있고 행동 지침으로서도 의미가 있겠지만, 모든 사람이 그 뜻에 따라야 한다는 게 굉장히 폭력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2번 트랙인 ‘말로장생’에 이에 대한 반성의 의미를 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승윤의 언어에 영향을 끼친 문학가는 누구인가. 사고 측면에서는 소설가 톨킨의 < 반지의 제왕 >을 인상 깊게 읽었다. 존재하지 않는 3분 내외의 시공간을 만들어내는 음악가의 입장에서 수천 년의 장대한 서사를 만들어낸 < 반지의 제왕 >의 장대한 상상력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날카로운 텍스트에 피로해진 이승윤이 언어를 제거한 연주곡을 발표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상상도 해봤다. 언젠가 이루고 싶은 꿈이다. 가능하다면 47분 정도 길이의 연주곡을 내고 싶다. (웃음)
전작 < 폐허가 된다 해도 >는 이즘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서 굉장한 호평을 받았다. 평단의 반응이나 자기 음악에 대한 평가를 주의 깊게 보는 편인가. 어릴 때 들었던 CD 속에 늘 평론지가 꽂혀 있었기 때문에 비슷한 글들을 자주 읽어왔다. 평론은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처럼 창작물을 해석하여 더 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고 그 의미를 더 빛나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한다. 평단에서 좋은 음악으로 봐주시는 데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특히 삶에 절망하는 인간의 고뇌, 그런데도 희망을 잃지 않는 음악인의 환희를 함께 녹여낸 음반의 독특한 정서가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내 인생관을 소리로 담는다. 늘 삶의 필연과 당위에 대해 들으며 자랐지만 다들 알다시피 이 세계는 모순으로 가득하다. 그럴수록 점차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영역이 많아졌고, 나에게 있어서 음악은 이 뒤죽박죽인 세상을 표현하는 좋은 매개체다. 그렇게 인생의 딜레마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이런저런 질문과 답을 노래 안에 산발적으로 흩어놓았다.
자신과 음악 사이의 끊임없는 감정 교류야말로 진정한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그렇다면 스스로는 < 폐허가 된다 해도 >를 어떻게 정의하는지도 궁금하다. 시궁창 같은 현실에 빈정거리면서도 말할 수 있는 희망을 담아 ‘빈정거리는 희망’으로 정의했다. 소위 ‘사이다 발언’으로 아주 멋진 말을 하면 받는 호응과 지지가 있고 감정을 더 비극적으로 꾸며낼 때 얻는 만족감도 물론 있다. 그러나 멋진 문장만 늘어놓을수록 진정성을 잃어버린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 같았다. ‘코미디여 오소서’가 희극적인 면과 비극적인 면을 번갈아 가며 이야기하듯이 현실적인 이상주의자가 되고 싶었다.
이렇게 깊은 가치관을 음악과 어떻게 연결하는지. 보통 작업은 가사로부터 출발한다. 어떤 한 문장에서 영감을 받기도 하고, 이야기를 듣고 나면 단면과 그 뒷면까지 보고 음악이라는 콘텐츠로 재구성한다. 1집에 수록된 ‘구름 한 점이나’를 예로 들면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다 시킨다’라는 속담을 듣고 화가 나서 그 격언을 비꼬아 노랫말을 지었다. 보통 초안은 거칠게 쓰고 다듬어가며 하나의 곡을 완성해간다.
전개되는 철학뿐만 아니라 ‘코미디여 오소서’, ‘사형선고’, ‘교재를 펼쳐봐’는 음악적 진행도 상당히 독특하다. 후반부 맹폭하는 편곡 스타일이 매력적인데 원래부터 이런 음악을 지향했는가. 이론을 먼저 배운 게 아닌지라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작곡하는 편이다. 물론 혼자서만 만든 음악은 아니다. 보통 밴드 셋을 그려놓고 곡을 만들기 때문에 가까운 연주자 동료의 도움이 꼭 필요하고 그들이 있어야 완성된다. 음악 내외로는 밴드 오아시스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고 6집 < Don’t Believe The Truth >를 가장 좋아한다. 오아시스 곡을 따라 치며 기타 코드를 익혔고 사춘기 시절에는 그분들의 태도에도 매혹되었다.
이야기를 들어볼수록 오디션 프로그램의 퍼포먼스나 경쟁적인 요소와는 어울리는 면이 많지는 않은 것 같다. 어떤 계기로 < 싱어게인 >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방송 오디션은 음악을 그만두기로 결심한 시점까지 남겨둔 선택지였다. 말씀해주신 것처럼 내 음악을 들려주기에 적합한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내키지는 않았지만, 해보지도 않고 후회하기보다는 한번 도전이라도 해보고 장렬히 산화하자는 마음이었다.
막상 하고자 하는 음악을 연장하기 위해 선택한 프로그램에서 좋은 결과를 얻고 나니 다해야 할 책임과 의무도 많았다. 그것들을 다하고 난 후에는 가수로서 현재 위치가 예전에 그렸던 모습과는 달라 허탈하기도 했다. 어떤 목표나 지향점 없이 긴 호흡으로 앨범 작업에 열중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어쨌든 우승 이후에 음반을 내며 본격적으로 산업의 영역 안으로 들어왔다. 음악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경쟁력을 갖춰야 하는 지금, 이승윤만의 강점은 무엇인가. 표준화된 가창력 평가 기준에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노래 잘하는 보컬이 필요한 것처럼, 그냥 자기 노래를 하는 목소리도 중요하다고 보고, 이 관점에서 내가 만든 노래는 내가 가장 잘한다고 생각한다.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셔서 내 음악 안에서는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게 강점인 것 같다.
< 꿈의 거처 >에 직접 쓴 소개 글을 인용하면 ‘삶을 공허에 전부 빼앗기기 전에 선수를 치고’ 결국 살아남았다. 지금도 공허에 맞서 투쟁하고 있을 청년들에게 경험에서 비롯된 조언과 위로 한마디를 부탁한다. 현대 사회엔 분명 공허가 주는 매혹이 있다. 그 유혹에만 머무르지 않고 어떤 것이 되었든 집중하고 몰입하는 경험, 그리고 이를 통해 인생을 논하겠다는 마음가짐도 한번씩은 의미 있지 않을까 싶다. 나 역시 이번 앨범에서 한계까지 쏟아보자는 의지로 달려왔고, 그러다 보니 정말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 생각하며 작업을 마쳤다. 이런 과정에서 얻어지는 힘겨움과 즐거움이 삶을 충만하게 만들어 줄 수도 있다. 물론 이건 철저히 개인적인 사례다.
언젠가 다시 이즘과 함께 인터뷰하게 될 날이 올 것 같다. 그때를 위해 지금, 이 순간 이승윤은 어떤 사람인지 대답해준다면. 그저 2집 앨범을 발매한 지 3일이 지난 사람이다. 아직 어떤 음악을 한다는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고, 음반 작업 이후에 음악적 정체성을 가다듬으며 계속해서 어떤 음악인으로 살아야 할지 계속해서 고민하고자 한다.
진행 : 임진모, 장준환, 임동엽, 정다열, 손민현, 한성현 정리 : 손민현 사진 : 임동엽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서른다섯 번째 주인공은 현대 사회를 음악으로 그려내는 4인조 혼성 밴드 배드램이다.
절대적인 권위에 괜한 반항심이 피어오른 적이 있지 않은가. ‘나쁜 산양(Bad Lamb)’과 ‘난리, 대혼란(Bedlam)’, 중의를 품고 있는 밴드 배드램은 가끔씩 관성처럼 터져 나오는 이 위험한 기질을 억누르지 않는다. ‘거친 사운드를 표방하되 절대 존재를 향한 믿음을 조소하겠다’라고 말하는 이들의 핵심은 어떤 대상에 대한 맹신을 지양하고 나아가 자기 자신이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시대정신을 전파하기 위해 배드램은 오늘도 발걸음을 재촉한다. 정규 앨범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EP < Frightful Waves >(2020)를 시작으로 2년 연속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록 부문 후보에 이름을 올리고 있고, 찬란한 기세를 몰아 올해 10월 말에 정규 1집 < Universal Anxiety >를 발표했다. 물론 이번에도 쉽지 않다. 쌀쌀한 사색에 잠기게 되는 가을의 끝, 현학적 음악 저널리즘을 펼치고 있는 네 명의 현대인과 함께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다각적으로 바라보았다.
▶왼쪽부터 이동원(보컬, 기타), 편지효(기타), 김소연(베이스)
첫 정규작의 주제는 ‘보편적 불안’이다. 앨범 소개글에 ‘고립계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한다’라는 열역학 제2법칙을 적어두기도 했는데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작품인가. 이동원 : 일단 나는 문과다. (웃음) 엔트로피에서 집중한 건 무질서 상태로 돌아가려는 비가역적인 방향성이다. 시간이 지나 무질서에 수렴할 때 결국 마주하게 되는 것을 불안이라 보고, 현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감정을 ‘보편적 불안’이라는 표현으로 축약했다. SNS 아이디로 썼을 정도로 오래도록 구상해 온 개념이다.
곡 작업은 보통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편지효 : 배드램은 동원이 형과 내가 이끌어 가는 듀얼코어 시스템인데 둘의 작업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 동원이 형은 퀄리티가 조금이라도 성에 차지 않으면 일정에 관계없이 멈추는데 나는 스케줄을 연, 월, 주 단위로 짜놓고 기한에 맞춰 최선의 근사치를 만드는 편이다. 서로 다른 관점이 공존하면서 적절히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팀이 유지되고 있다.
이동원 : 누구 하나 톡 튀지 않고 정확히 4분의 1씩 각자의 방향으로 당겨서 아슬아슬한 듯하면서도 팽팽하게 밸런스가 잡혀있다. 그리고 우리 팀은 따로 앨범 기획 회의를 하지 않을 정도로 규칙이나 규율 같은 게 없다. 대부분 체계를 갖춰야 나름의 결과물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밴드 안에서만큼은 그렇지 않다.
현대 사회를 투영하는 가사만큼 이를 전달하는 언어도 눈여겨보게 된다. 대부분 영어로 부르다가도 몇몇 곡에선 한글로 메시지를 전하는데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하다. 이동원 :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은 변함없다. 어떤 음악 내에서 말의 맛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익숙한 질감에 맞춰서 쓴 편이다. 살면서 들어온 음악 대부분이 영미권 쪽이다 보니 아직 한글 특유의 분절되는 느낌을 자연스럽게 끌고 가기가 힘들다. 차차 극복해 나가야 하는 부분이다.
타이틀곡 ‘Love, lies, bleeding’은 6분짜리인데다 전주만 1분 40초다. 길이를 늘려 드라마틱한 구성을 취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이동원 :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 대부분 러닝타임이 2시간 내외인데 만약 1시간밖에 못 즐겼다면 지불한 금액이 매우 아까울 것이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소비자들이 시간을 들여서 곡 하나를 듣는데 아쉬운 감상으로 끝나지 않길 바란다. 보통 그 시간을 3~4분으로 정하겠지만 내 기준엔 5분 정도가 합당하다.
김소연 : 꼭 우리 노래라서가 아니라 배드램 음악을 들으면 5분이 넘는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뒤의 핵심을 위한 예열 과정이 아닐까. 덕분에 후반부에 더욱 폭발적인 울림이 전해진다고 본다.
편지효 : 숏폼 콘텐츠 시대다 보니 몇 초 안에 결판내야 하는 게 너무 많다. 근데 우리의 얘기는 짧게 할 수 없을뿐더러 가능하더라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정리하면 곡이 긴 이유는 하이라이트에 더 설득력을 주기 위함이다. 모든 구간이 맡은 기능을 충실히 이행한다면 6분도 지루하지 않다. 배드램의 음악은 분명 그렇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과거 ‘Blessing of Ganesha’나 이번 ‘Valley of the Pharaohs’처럼 배드램의 음악에선 종종 오리엔탈 풍의 주술 색채가 강하게 드러난다. 편지효 : 주술에 관한 트랙은 내 담당이다. ‘파라오의 협곡’은 강남역 한복판이나 미국 대도시처럼 무너지지 않는 거대 자본의 산물을 비유한 표현이다. 자본주의 관점에서 인간이 두려워하는 절대 존재를 드러내고 싶었고 힘없는 예술가가 무너뜨릴 수 없는 견고한 철옹성을 떠올렸다. 그 과정에서 처음엔 곡 제목을 메트로폴리스라고 지었는데 세련된 느낌으로 한 번 꼬아서 시각화한 것이다.
이동원 : 이런 이색적인 요소를 끌어왔을 때 하는 우리도 즐겁고 듣는 청자도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트랙 순서를 배치할 때 좋은 징검다리 역할을 해줬다. 너무나 이질적인 두 곡 사이를 윤활성 있게 이어주는 식으로 활용했다.
이동원은 앨범 아트 크레디트에 항상 이름을 올리고 있다. 어떤 방식으로 참여하고 있는 건지. 이동원 : 대부분의 인디밴드들처럼 가성비를 추구하다 보니 전문 일러스트레이터를 고용하는 방향보다는 우리끼리 해낼 수 있는 방법을 찾곤 한다. 이번 앨범 아트는 요즘 유행하는 AI가 대신 그려준 그림이다. 우리가 설정한 핵심 키워드들을 입력하면 인공지능이 나름의 계산을 거쳐 결과물을 보여주는데, 그렇게 한 30~40번을 돌려보면서 마음에 드는 조각들을 모아 포토샵으로 아트워크 콜라주를 만들었다.
기타리스트 편지효가 사운드 메이킹에서 중점을 두는 부분은. 편지효 : 확신이다. 확신이 없으면 안 치거나 치고 버린다. 확신이 있는 줄 알았는데 실상이 그게 아니었다면 스스로에게도 거짓말을 한 셈이라 화가 난다. 그래서 공연 전에 항상 내 컨디션을 알아야 하고, 그에 따른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하다. 가장 연출하기 쉬운 게 분노다. 내게 상처 줬던 사람이나 기분 나빴던 일을 억지로 생각해가면서 감정을 끌어올릴 때도 꽤 있다.
팀 색깔만 봤을 때 여성 베이시스트 김소연의 존재가 상징적으로 다가온다. 베이스의 매력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김소연 : 주관적이지만 밴드에서 여성이 제일 많은 포지션은 베이스라고 본다. 왠지는 나도 정확히 모르겠지만 톤의 대비가 아닐까 싶다. 발성 음역대가 높은 여자들이 그에 반대되는 저음에 더 끌리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왼쪽부터 이동원(보컬, 기타), 김소연(베이스), 편지효(기타), 최주성(드럼)
아쉽게도 드럼을 맡고 있는 최주성이 본업 때문에 자리에 함께 하지 못했다. 네 명 모두 일과 음악을 겸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일정은 보통 어떤 식으로 조율하는지. 편지효 : 중요한 공연이 있을 때마다 반차 혹은 휴가를 낸다. 보통 낮부터 리허설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까 불가피한 선택이다. 언제 어떤 공연이 잡힐지 몰라서 연차랑 휴가를 아껴놓고만 있다가 연말에 다 못 쓰고 지나갈 때도 있다.
본업과 음악 사이의 균형은 어떻게 잡고 있는지. 이동원 : 모든 뮤지션들이 별도의 직업을 가졌으면 좋겠다. 양질의 창작물을 꾸준히 만들기 위해선 결국 안정적인 일자리가 필요하다. 직장에서 쓰는 에너지를 최대한 아끼고 그 힘을 열심히 모아서 하고 싶은 것에 투자하려고 노력 중이다.
최주성 : 일도 중요하지만 우선 가정에 시간을 맞춰야 밴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어느 정도 금전적으로 안정이 되어야 음악 생활을 하는데 지장이 없다. 물론 지금의 내가 그렇지는 못해서 많은 애로사항이 뒤따른다.
음악적으로 영향을 준 아티스트나 앨범은 무엇인가. 이동원 : 내가 밴드에서 맡고 있는 역할 별로 나눠서 정리한다면 보컬 쪽은 미국 얼터너티브 메탈 밴드 툴의 보컬리스트인 메이너드 제임스 키넌, 그리고 하드 록 그룹 사운드가든과 오디오슬레이브의 보컬 크리스 코넬을 뽑는다. 작·편곡 면에선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라디오헤드가 최고다. 마지막으로 태도에 있어 펄 잼의 에디 베더와 브리더스의 프론트우먼 킴 딜을 음악적 부모로 삼고 있다.
김소연 : 음악 하는 사람으로서 롤 모델은 포 겟 미 어 낫츠(Four Get Me A Nots)라는 일본 밴드의 기타리스트 타카하시 치에다. 얼마 전에 오사카까지 직접 가서 공연도 보고 왔다. 요즘 내 삶의 주제는 무언가를 힘껏 하는 거다. 노래를 못 해도, 춤을 못 춰도 뭐든 최선을 다해 있는 힘껏 하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데 내가 본 사람 중에선 최고로 열심히 하는 분이라 생각한다.
편지효 : 어렸을 때 기타리스트 팻 메시니와 베이시스트 찰리 헤이든이 같이 작업한 < Beyond the Missouri Sky >를 듣고 서사를 풀어가는 화법을 배웠다. 음악은 점이 아닌 선이다. 지나온 지점들을 잇는 순간 여정에 스토리가 생기는데 이 앨범을 통해 그런 방식들을 익혔다. 연주적인 측면에선 밴 헤일런을 굉장히 좋아한다. 서커스 이상의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와중에 호흡이 예술이다. 극한의 테크닉보다 적절한 타이밍에 소리를 꽂아 넣는 게 중요하단 걸 알려준 아티스트다.
최주성 : 엑스 재팬의 기타리스트인 히데와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드러머 채드 스미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동원과 최주성은 인천 출신이다. 인천과 부평에 대한 기억은 어떻게 남아 있는지. 이동원 : 부평구민으로 지낸 지 30년이 넘어가고 있는데 부평의 자랑거리로 매년 열리는 부평 풍물 축제를 빼놓을 수 없다. 락캠프 같은 클럽들이 있는 줄 몰랐던 학창 시절에 내가 라이브 음악을 접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장소였다. 그때 또래 친구들의 공연은 물론이고 페루 출신 뮤지션들의 전통 레퍼토리도 관람할 수 있었다. 여러모로 마음이 따뜻해지는 행사다.
최주성 : 유년 시절엔 음악을 전혀 안 좋아해서 특별히 남아있는 기억은 없다. 대신 밴드 건아들의 객원 드러머였던 선생님께 드럼을 배울 때 인천이 살아있는 음악의 성지라고 말씀해 주신 적이 있고, 인천을 대표하는 드러머인 노호현 님께서도 메탈과 록의 시작점이라고 언급해 주셨다.
인천 지역이 유독 록 음악에 강한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이동원 : 동인천과 주안에서 성장한 밴드들부터 음악 감상실을 통해 퍼진 커뮤니티까지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세대임에도 선배들이 남긴 유산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주한미군이 주둔했던 부평 애스컴이다. 미국에 뉴올리언스와 멤피스가 있다면 한국 대중음악이 태동한 도시로 인천을 빼놓을 수 없다.
편지효 : 항구 도시는 기본적으로 기가 부딪히는 곳이다. 다양한 문물들이 오고 가며 섞이게 되는데 거기서 우수한 것들만 살아남아 발전하게 된다. 미8군을 중심으로 전달된 문화가 우리에게 계속 축적되면서 지금의 한국 음악이 정착할 수 있었다고 본다.
인천 출신이 아닌 김소연과 편지효는 2019 펜타포트 무대를 통해 그 열기를 느낀 적이 있다. 김소연 : 내 인생에서 제일 처음으로 관람했던 공연이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이다. 시골에서 살던 아이가 그렇게 큰 규모의 축제에 가서 즐겼던 것도 신기한데 어쩌다 보니 10년 정도 후 내가 그 무대에 올라가게 됐다. 쨍한 햇빛 아래서 관객분들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참 묘했다.
편지효 : 요즘 탁 트인 공간이 거의 없다. 그런 면에서 인천은 이런 뜻깊은 공간, 문화생활에 돈을 아끼지 않는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리고 이모 댁이 동인천 신포동 쪽이다. 인근 차이나타운을 비롯해서 그 동네엔 아직 개화기의 향기가 남아있다. 오래된 양식의 건물들을 보면서 그때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는 건 인생을 살아가고, 또 음악을 하는데 굉장한 도움이 된다.
2020년 팬데믹으로 인해 근 2년간 공연계가 많이 움츠러들었었다. 한국대중음악상 후보에도 이름을 올리면서 활동을 이어가기 좋은 타이밍이었을 텐데 아쉬움은 없었는지. 이동원 : 아쉬움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고무됐었다. 여태까지 음악 활동을 해오면서 공허함을 느낄 법한 시간들이 있었는데 그걸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우리를 따뜻하게 품어주는 사람들은 음악을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그 관심이 조금씩 모이다 보면 몸집도 자연스레 커져 있을 것이다.
어쨌든 코로나가 비교적 잠잠해지면서 공연계도 활력을 되찾고 있다. 앞으로의 활동 계획은. 이동원 :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내년 1월에 이번 앨범 쇼케이스를 단독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그래서 그 기획에 최대한 중점을 두고 있고 음원에 담긴 느낌 그대로 라이브로 전달해 드리기 위해 열심히 준비 중이다. 연말에 클럽 공연도 많이 준비되어 있고 특히 12월 30일엔 부평아트센터에서 공연을 한다. 내 홈타운에 함께 살고 있는 동네 이웃분들께서 많이 찾아주셨으면 좋겠다.
앞으로 배드램이 들려줄 이야기는 어떤 내용으로 채울 예정인가. 이동원 : 저널리즘의 생명은 시간, 즉 현재에 달려 있다. 물론 우리가 따끈따끈한 특종을 주제로 앨범을 낼 수는 없으니 차기작이 발매될 시점에 우리 눈으로 바라본 세상을 그리게 될 것 같다.
편지효 : 다음 앨범을 언제 발표할지는 우리도 모르기 때문에 사회에서 무슨 일이 발생하는지 지켜보면서 떠오른 단상들을 차곡차곡 모아둘 예정이다.
돌아온 걸그룹 전성기, 자신만의 정체성으로 건강한 경쟁구도를 만들어가는 아티스트들 사이에서 트라이비는 발랄함과 패기를 앞세운다. 2021년 2월 < Tri.be Da Loca >로 데뷔하여 이제 막 600일을 넘긴 신인 그룹은 < Leviosa >활동으로 성장의 발판을 마련해 다양한 국적의 팬들을 흡수하고 있다. 희미한 햇빛이 때를 맞아 무지개가 되듯 일곱 명의 밝은 에너지는 서서히 빛을 발하며 더 너른 세상으로 자신들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준비 중이다.
이즘에서 진행한 특집 ‘2010년 이후, 당신이 기억해야 할 K팝 댄스 트랙’의 마지막은 트라이비였다. 그 성장세를 기록한 프로그레시브 하우스 ‘In the air’에는 기존의 강렬함 뒤에 감춰 놓았던 청량함과 순수함이 담겨있다. 평균 나이 18.6세 소녀들의 현재 진행형인 도전과 이루고 싶은 꿈에 대해서 묻기 위해 직접 청담동에 위치한 티알엔터테인먼트 사무실을 찾았다. 아쉽게도 멤버 진하는 건강상의 이유로 참석하지 못했지만 약 두 시간 가량의 긴 대화 중에도 이들의 얼굴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국적도 다르고 자라온 환경도 다른 멤버들의 데뷔 과정이 궁금하다. 송선 : 직접 오디션을 보기도 했지만 감사하게도 여러 회사에서 직접 캐스팅을 해주셨다. 다양한 곳에서 연습생 생활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는 분들이 늘어났고 신사동 호랭이 피디님과도 연이 닿았다. 최종적으로 지금 회사와 잘 맞아 이곳에서 데뷔하게 됐다.
현빈 : 처음에는 아이돌이 아니라 댄서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팀의 단장님이 뜬금없이 오디션을 권해주셨다. 처음에는 부담스러워서 사양했지만 끈질긴 설득에 용기를 얻어서 여러 기획사의 오디션을 봤고 기회를 얻어서 트라이비에 합류했다.
지아: 대만에서 오디션을 보고 한국으로 넘어왔다. 처음에는 취미로만 노래를 했었는데 아는 분이 오디션을 보라고 말씀해 주셨다. 도전에 망설임은 없었지만 학업을 중시하는 부모님을 설득하는 것이 힘들었다. 반대가 심하셨는데 여러 번 말씀 드리니까 기회를 주셨다. 덜컥 붙어버렸을 때 가족 모두가 놀랬다.
켈리 : K팝 아이돌 가수들의 춤을 따라 하다가 가수의 꿈을 키우게 됐다. 대만에서 댄스 학원을 통해 오디션을 봤고 한국으로 와서 2년간 연습생 생활을 했다.
소은 : 학원을 통해서 다양한 기획사의 오디션을 봤다. 여러 곳에서 1차만 합격했는데 아쉽게 최종에서 여러 번 떨어졌다. 그러던 중 감사하게도 지금 회사에서 피디님을 만나 기회를 얻었다.
미레 : 일본에서 학교생활을 하다가 케이팝에 관심이 생겨서 한국의 댄스학원으로 유학 왔다. 한 두 달 수업을 듣다가 당시 학원에서 지금 회사의 오디션 기회를 마련해 줬고 합격해서 이곳 연습생으로 들어왔다. 연습 기간은 제일 짧았던 것 같다. 딱 1년 걸렸다.
가수의 꿈을 심어준 아티스트나 노래가 있다면. 미레 : 초등학교 6학년 때 블랙핑크 선배님을 좋아해서 매일 뮤직비디오나 무대 영상을 찾아봤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국에서 가수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알게 된 블랙핑크 선배님의 노래는 ‘붐바야’고 가장 좋아했던 노래는 ‘마지막처럼’이다.
켈리 :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 소녀시대 선배님의 ‘I got a boy’ 춤을 췄다. 당시에는 너무 못해서 완전히 익히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힘들었지만 연습하는 과정이 너무 즐거워서 춤 자체를 좋아하게 됐다. 가수의 꿈을 키우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다.
소은 : 초등학교 6학년 때 졸업 공연으로 레드벨벳 선배님의 ‘피카부(Peek-A-Boo)’를 췄다. 잘하진 못했지만, 당시 친구들이 열렬히 응원해줬다. 그 희열이 컸던 것 같다. 무대 자체로도 즐거웠지만 당시의 호응이 가수라는 꿈을 심어줬다.
지아 : 서너 살 때 샤이니 선배님의 ‘누난 너무 예뻐’ 무대를 보고 행복을 느꼈다. 언젠가 나도 저런 무대 위에 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빈 : 부모님께서 음악을 좋아하셔서 금요일마다 뮤직뱅크를 봤다. 덕분에 어려서부터 방송을 통해 많은 선배님의 무대를 접했다. 처음 꿈을 심어준 분들은 원더걸스 선배님들이다. 부모님께서는 적극적인 지지를 해주셨다. 감사하게도 늘 하고 싶은 일을 하게끔 도와주신다. 부모님 덕에 꿈을 키울 수 있었다.
송선 : 어렸을 때부터 소녀시대 선배님의 콘서트나 음악 방송을 많이 보러 다녔다. 당시에는 자리에 계신 많은 팬분이 신기했었다. ‘어떻게 사람이 노래하는 것만 보고 이렇게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지?’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니까 나도 화려한 무대 위에서 사랑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부모님 몰래 가수의 꿈을 키웠다. 혼자 연습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예고 입시에 대해서 알아본 것도 그 때문이다. 지원을 위해 처음 부모님께 진로를 말씀드렸을 땐 당황하셨다. 평소에 가족에게 무뚝뚝한 편인데 당시에는 간절하게 말씀을 드렸던 것 같다.
송선 씨는 긴 시간 동안 데뷔를 하지 못했다. 사촌 언니인 소녀시대 유리 씨에게 도움을 부탁을 하고 싶었던 적은 없었는지. 송선 : 그런 부탁을 하기 전에 캐스팅이 된 적도 있었지만 누구를 통해서 들어왔다거나 사적인 연줄을 이용했다는 둥의 이야기를 듣기 싫었다. 입시를 통해 다니게 된 학교에서도 비슷한 소문이 돌았던 적이 있어서 그런 것들에 신물이 났다. 오히려 당시에는 비교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압박이 더 컸던 것 같다.
본격적으로 음악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트라이비의 음악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송선 :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스타일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둠둠타’라는 곡은 완벽함을 추구하는 트라이비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 준다. 안무가 숨 쉴 틈 없이 박자 하나하나에 동작이 담겨 있다.
지금까지 발표한 음반 제목이 < Da Loca >, < Conmigo >, < Veni Vidi Vici >, < Leviosa >처럼 모두 라틴어이다. 송선 : 라틴 계열의 이국적 사운드는 트라이비를 차별화한다고 생각한다. 열정적인 음악 스타일을 표현하기 위해 라틴어를 사용했다. 판소리를 외국에서 리메이크 한다면 추임새를 먼저 떠올릴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취지이다.
트라이비의 기존 음악들에 비해 최근 발매한 < Leviosa >의 수록곡 ‘In the air’는 상대적으로 멜로디가 명확하고 대중적이다. 트라이비 변화의 신호탄인지. 송선 : ‘In the air’는 프로그레시브 하우스의 일환으로 최근에 다시 활발하게 제작되고 있는 스타일의 음악이다. 변화의 신호탄이라기보다 트라이비의 음악들과 달리 명확한 멜로디와 떼창을 유도하는 곡의 콘셉트를 강조하기 위한 선택이다.
이전까지는 후렴에 힘을 준 구성보다 비트가 잠깐 멈추는 드롭 부분에서의 퍼포먼스를 강조했다. 뭄바톤과 아프리카 비트 위주의 곡을 주로 선보인 것도 그 때문이다. 트라이비의 다른 곡들이 조금 덜 선명한 선율로 생소하게 비춰질 수 있지만 그룹의 색깔을 더 보여드리고자 한 선택이니 다른 노래들도 많이 좋아해 주셨으면 좋겠다. 물론 ‘In the air’ 같은 곡들 또한 앞으로 더 만들어 갈 예정이다.
‘Got your back’에는 송선 씨가 작곡에 참여했다. 작곡가 입장에서 어떤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송선 : 귀에 잘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래를 들을 때 도입부를 중요하게 여기는 편이어서 인트로부터 1절 까지를 가장 힘줘서 제작했다. ‘Got your back’도 마찬가지다. 더불어 이전에는 보여드리지 않았던 부드러운 면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알앤비스러우면서 팬 분들에게 위로를 드릴 수 있도록 비교적 서정적인 멜로디로 구성했다.
신사동 호랭이 대표는 다수의 히트곡을 제작한 유명 작곡가인데 다른 멤버들도 작사나 작곡에 관심이 있는지 궁금하다. 소은 : 관심을 해소할 수 있도록 피디님께서 자주 기회를 주신다. 어느 날 송선 언니와 점심으로 요거트를 먹고 있었는데 언니가 비트를 틀더니 노래를 불러 보라고 했다. 장난스럽게 곡을 만들어서 피디님께 보내드렸더니 얼마 후에 직접 편곡해서 곡을 주셨다. 팬분들에게 보여드리기 위해 SNS에 업로드도 했다.
현빈 : 언제든 기회가 된다면 꼭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 ‘In the air’의 떼창 파트를 녹음을 할 때도 피디님께서 따로 디렉팅 없이 원하는 대로 하라고 하셨다. 크고 작은 기회를 많이 주신다. 수록곡 ‘-18’도 소은이랑 내게 써보고 싶은 가사가 있으면 적어 보라고 먼저 권하셨다. 우리가 성인이 되면 하고 싶은 일들을 담아서 나온 노래가 ‘-18’ 이다.
‘-18’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다.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현빈, 미레, 소은의 유닛 곡인데 모두 성인이 됐을 때 하고 싶은 음악이 있다면. 현빈 : 지금의 자신감 넘치는 메시지도 좋지만 성인이 되면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우리가 아직 어리다보니 대표님은 그런 곡은 잘 주려고 하지 않는다. 표현하기 어려울 수 있겠지만 트라이비만의 색다른 느낌을 담아 보고 싶다.
소은 : 20대에만 가능한 트라이비의 느낌을 표현하고 싶다.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무엇이든 도전하고 싶다. ’10대의 트라이비가 이런 느낌이었다면 20대의 트라이비는 이런 느낌을 낼 수 있습니다’라는 인상을 주고 싶다.
미레 : 발라드도 좋지만 평소에 잘 듣는 장르가 아니어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섹시하면서 그루브 있는 음악에 도전해보고 싶다. 비비 선배님의 음악처럼.
트라이비의 무대는 역동적인 퍼포먼스가 눈에 띈다. ‘In the air’는 미레 양이랑 현빈 양이 안무를 제작했는데 먼저 나서서 해보겠다고 제안한 것인지 궁금하다. 현빈 : 연습생 때부터 미레와 안무 짜면서 노는 걸 좋아했다. 회사에서도 그걸 알았는지 1주년 기념으로 팬 분들을 위해 수록곡의 안무를 만들어보라고 제안했다. 처음에는 반대했다. 트라이비의 안무는 파워풀하고 화려하기 때문에 그 정도를 해 낼 자신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회사는 신경 쓰지 말고 할 수 있는 대로 만들어 보라고 해서 진행하게 됐다.
데뷔 후 짧은 시간 만에 프로젝트 송을 두 곡이나 참여했다. 코카콜라와 협업해 퀸 노래를 리메이크 한 ‘A kind of magic’과 애니메이션 < We Baby Bears >의 오프닝곡 ‘The bha bha song’의 제작 경위가 궁금하다. 현빈 : ‘A kind of magic’의 제작 뒷얘기를 나중에 들었는데 그쪽해서 트라이비의 메시지가 코카콜라 캠페인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내용과 같다고 들었다. 평소 우리가 무대에서 발산하는 에너지를 좋게 본 것 같다.
퀸의 노래를 리메이크하는 것이 부담되지는 않았는지. 현빈 : 퀸의 원곡을 다 같이 모여서 들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못 따라잡을 것 같아서 오히려 쉽게 접근하자고 생각했다. 트라이비만의 ‘A kind of magic’을 보여주고 싶었다.
‘The bha bha song’의 제작 과정과 소감이 궁금하다. 미레 : 너무 좋은 기회로 < We Baby Bears >와 함께 하게 돼서 일본어와 중국어, 영어, 한국어 이렇게 4개 국어로 녹음했다.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애니메이션의 주제곡을 부르는 것이 즐거웠지만 다른 나라의 언어로 녹음하는 것은 조금 힘들었다. 서로 발음을 조언하면서 도왔다.
4개 국어로 녹음했다고 했는데 제일 어려운 발음은 어느 나라였는지. 현빈 : 랩을 했는데 각 언어별로 음절수가 맞지 않아서 힘들었다. 발음 같은 경우에는 각 나라의 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멤버들조차 어려운 단어도 있었다. 심지어 중국어는 성조 때문에 조금만 틀려도 다시 녹음을 했다. 피디님께서 “우리 노래인데 왜 굳이 다른 언어로 노래해야 돼?”라고 하셔서 랩 파트는 모두 한국어로 녹음했다.
다양한 나라에서 사랑 받고 있다. 한편으로 국내에서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것이 아쉬운데 그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송선 : 데뷔 당시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국적으로 유행했기 때문에 국내 팬들을 직접 만날 기회가 없었다. 이번 < Leviosa > 활동을 통해 처음으로 대면 활동을 시작했는데 직접 팬들과 마주하는 시간이 늘면서 더 많은 분들이 조금씩 관심을 가져주시는 것 같다. 앞으로 그런 기회가 더 많아지면 국내에서도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연습생 기간까지 포함하면 짧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지금까지 가장 행복했던 순간 그리고 가장 좌절했던 순간은 언제인가. 미레 : 가장 힘들었던 시간은 비활동 기간이다. ‘우주로’ 활동이 끝나고 10개월 정도였는데 그 사이 연습실에서 연습만 했다. 팬들을 만날 수 없다보니 슬럼프까지 왔다. 잘하고 싶은데 잘 안 되니까 스스로에게 화도 났고.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이번 < Leviosa > 쇼케이스다. 처음 트루(팬덤 이름)분들을 직접 만나니까 새로 데뷔한 느낌이었다. 드디어 내가 원했던 아이돌이 된 것 같았다.
지금까지 트라이비로 활동하면서 이룬 크고 작은 목표들이 있을 것 같다. 소은 : 별거 아닐 수 있지만 백스테이지 뒤에서 인이어를 체크하고 마이크를 차는 것이 꼭 이루고 싶었던 것 중 하나다. 데뷔 전에는 무대 뒤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경험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꿈 꿔왔던 방송국 대기실도 쓰고 가수들이 사용하는 인이어와 마이크를 사용한다. 행복한 일이다.
여러분들 노래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트라이비 노래와 그 이유가 궁금하다. 미레 : ‘-18’이다. 현빈, 소은과 함께한 유닛곡이지만 트라이비 전체의 색깔을 잘 표현한 노래라고 생각한다. 춤추기에도 좋아서 정말 좋아한다.
현빈 : ‘Got your back’을 뽑고 싶다. 작곡에 참여한 송선 언니에게 음원이 나오기 전부터 곡이 너무 좋다고 여러 번 말했다. 서정적인 진행이 취향에 맞고 가사가 마음에 와 닿아서 지친 날에는 항상 ‘Got your back’을 듣는다.
켈리 : ‘Lobo’라는 노래를 가장 좋아한다. 각 파트별로 멤버들의 음색이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처음 들었을 때부터 우리 노래라고 느꼈다.
소은 : ‘In the air’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다. 처음 아이돌을 꿈꿨을 때부터 이 곡처럼 밝은 분위기의 노래로 데뷔하고 싶었다. 트라이비의 이전 음악들은 대부분 힘 있는 노래들이어서 조금만 무대에서 흐트러져도 카리스마가 무뎌지곤 했다. 그래서인지 좋은 곡들인데도 노는 듯 노래하고 싶은 마음을 충족해주지는 못했다. 반면 ‘In the air’는 즐기듯이 무대 할 수 있어서 좋다. 이 곡을 들으면 나도 모르게 행복해진다.
송선 : ‘In the air’다. 무대에서 이 곡을 하고 나면 왜인지 모르게 벅차오른다. 청명하고 밝은 곡이지만 춤을 추면서 노래를 들었을 때 가슴 한 켠이 뭉클하다.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느껴지는 음악이다.
지아 : 팬송 ‘True’라는 곡을 좋아한다. 데뷔 때부터 팬송을 만들고 싶다고 여러 번 얘기했는데 바람을 이루게 돼서 좋다. 내가 선호하는 장르이기도 하고 팬들에게 전하고 싶은 가사도 담겨 있다.
그 외에 살면서 힘이 되었거나 좋게 들었던 인생곡이 있을 것 같다. 송선 : 보아 선배님의 ‘아틀란티스 소녀’가 생각이 난다. 첫 입시 곡이기도 하고 이 노래를 통해서 아이돌이라는 꿈을 키웠다.
지아 : 샤이니 종현 선배님의 ‘하루의 끝’이라는 노래다. 연습생 생활을 하면서 힘들 때마다 많은 위로를 받았다.
소은 : 팬들한테 자주 추천했던 아리아나 그란데의 ‘Santa tell me’다. 평소에도 크리스마스의 특유의 분위기를 좋아하는데 이 노래에는 그런 느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들을 때마다 벅차고 희망찬 느낌을 받는다.
켈리 : 블랙핑크 선배님의 ‘휘파람’을 정말 좋아한다. 언제 들어도 강렬하다.
현빈 : 영화 < 국가대표 > OST의 ‘Butterfly’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졸업한 중학교에서 매년 졸업생을 위해 후배들이 이 노래를 불러줬다. 부를 때는 감정이 없는데 3학년이 돼서 듣는 입장이 되니까 가사가 와 닿으면서 눈물이 났다. 우연이겠지만 그때 노래를 듣고 난 이후로 일이 잘 풀렸다.
미레 : 일본 가수 아이(Ai)의 ‘Story’라는 노래가 있다. 영화 < Big Hero 6 >의 일본 버전 엔딩곡인데 오래된 노래지만 정말 좋아해서 오디션 볼 때도 그 노래를 불렀다. 지금도 재생할 때마다 열심히 노력했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다양한 감정과 개인적인 경험이 담겨 있어서 가끔 울컥할 때도 있다.
마지막 질문이다. 가수로서 음악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미레 : 좋아해서 한 것 같다. 늘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겠다고 생각했다. 트라이비로 데뷔하고 목표를 이룰 수 있어서 행복하다. 가수라는 직업을 오랫동안 하고 싶다.
현빈 : 인생을 즐기고 싶어서다. 원치 않은 일을 평생 해야 한다면 한 번뿐인 인생이 아까울 것 같다. 꼭 이루고 싶었던 꿈이 현실이 됐으니 내 삶의 즐거움을 위해서라도 앞으로 더 열심히 할 생각이다. 꼭 트라이비의 팬이 아니어도 행복을 드릴 수 있는 좋은 음악을 하고 싶다.
켈리 : 다른 멤버도 모두 비슷할 것 같다. 노래 부를 때나 음악을 들을 때 항상 행복했기 때문에 이 일을 시작했다. 이렇게 가수라는 직업을 가질 수 있게 돼서 감사하다.
소은 : 누군가와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힘을 합쳐 무언가를 성취했을 때 말로 표현하기 힘든 행복을 느낀다. 누군가는 혼자 모든 일을 해내기도 하지만 트라이비의 음악은 많은 사람들의 손길이 닿았을 때 더 멋있는 노래가 완성된다. 팬들을 포함한 다양한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가수라는 직업의 매력 때문에 음악을 하고 있다.
지아 : 내가 샤이니 선배님의 모습 보고 행복 했듯이 트라이비의 무대와 음악을 통해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싶다. 긍정적인 에너지를 드리고 싶어서 음악을 한다.
송선 : 평소에 노래를 통해 위로받는다. 나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분들께 우리 노래로 병들고 지친 마음을 위로해드리고 싶다.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서른 번째 주인공은 대한민국 대표 록밴드 체리필터의 프론트우먼 조유진이다.
코로나로 주춤했던 공연계가 다시금 기지개를 켜면서 수많은 축제 마니아들이 각지의 스테이지로 몰려들고 있다. 특히 그 부활의 신호탄으로 작용한 <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은 무더운 날씨에도 엄청난 인파를 끌어모으며 억눌려있던 음악팬들의 갈증을 해소했다. 다채로운 라인업 가운데 가장 눈에 띈 팀은 단연 체리필터. 2000년 데뷔해 지금까지 멤버 변동 한번 없이 무대에 오를 수 있었던 건 탄탄한 보컬로 그룹의 정체성을 지탱하는 조유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와 이즘이 20년 만에 다시 만났다. ‘낭만고양이’로 대히트를 친 이후에도 가수로서 맹렬한 소신을 드러냈던 과거 인터뷰만 봐도 이번 만남은 예견된 재회였다. 위치는 달랐지만 음악 하나로 굳건히 자리를 지켜온 가수 조유진과 평론가 임진모는 서로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며 회포를 풀었다. 호쾌한 웃음소리만 가득했던 그날의 인터뷰를 공개한다.
페스티벌 무대에서 정말 오랜만에 만난 느낌이다. 희한하게 큰 규모의 록 페스티벌과는 연이 없었다. 한창 활동하던 때엔 주류 시장과 더 많이 엮여서 그쪽 공연이나 행사를 많이 뛰었다. 물론 1년에 1~2번씩은 계속 단독 공연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꾸준히 와주셨던 분들에겐 익숙한 그림이었을 것이다.
체리필터 하면 떠오르는 레퍼토리를 선보였다. ‘이물질’, ‘오리 날다’, ‘피아니시모’, ‘Happy day’, ‘달빛소년’, ‘낭만고양이’. 이렇게 여섯 곡을 준비했다. 처음엔 리스트가 좀 달랐다. 비사이드도 조금씩 넣어서 하려다가 시간이 초과되면 안 되니까 다 걷어내고 단독 공연에서 자주 하는 엑기스들만 추렸다. ‘오리 날다’ 때는 관중분들이 다 정신없이 뛰셨는데 그 에너지에 압도 당해서 우리도 같이 광분하게 됐다.
열기가 엄청났나 보다. 체력적인 부담은 없었는지. 연출 분들이랑 몇 번 얘기했을 정도로 해가 쨍한 시간대에 공연하는 게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너무 뜨거워서 일사병으로 사망했다고 뉴스에 나오는 거 아닌가. (웃음) 뭔가 록밴드로서 낮에 하는 페스티벌 무대에 대한 로망이 있긴 했는데 막상 실제로 하려니까 살짝 겁이 났다.
무대에서 인천 출신이라 언급할 정도로 고향을 향한 애정이 큰 것 같다. 완전히 인천 토박이다. 지금의 차이나타운인 동인천 북성동, 송월동 쪽에서 나고 자랐고 초중고도 다 여기서 나왔다. 조부모님들께서 이북 분이셨는데 아버지 어릴 적에 인천 쪽에 정착하셨다고 한다. 엄마는 서울 분이셔서 매번 서울로 이사 가기를 희망하시는데 아버지께선 인천에 살아온 세월도 있고 친구, 직장 동료분들도 많고 하셔서 벗어나기를 싫어하신다.
살아오면서 느낀 인천의 이미지는 어떤가. 록적인 인상이 굉장히 강하다. 한때 동인천, 주안 쪽은 완전 록의 메카였다. 당시에 콜라나 커피를 팔면서 록 음악만 틀어주는 음악 방 같은 데가 있었다. 소파에 앉아서 온종일 뮤직비디오만 봤었는데 그때 들었던 음악의 영향이 크다. 저녁 시간대는 DJ가 나와서 직접 노래도 틀어줬다고 하는데 어릴 땐 늦게까지 남을 수가 없어서 밤 분위기까진 잘 모른다.
일찍이 록의 세례를 받았다. 집에서 라디오로 팝송을 듣기보다 현장에서 앰프가 쏘아대는 울림을 온전히 몸으로 받아서 그런지 헤비메탈 같은 강렬한 음악도 굉장히 좋아했다. 사실 제대로 음악을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1990년대 이전의 노래들은 거의 몰랐다. 한동안 얼터너티브 중심으로 메이저 성향만 듣다가 점점 폭을 넓혀갔다. 애초에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해서 일본 애니메이션 음악, 트로트 같은 장르들도 가리지 않고 듣는다.
조유진을 뮤지션으로 이끈 음악은 무엇인지. 지금 들어도 촌스럽지 않은 멜로디의 팝 록이 1990년대에 꽃을 피웠다. 주류 시장에서도 성공한 세미소닉, 라디오헤드, 너바나를 좋아했고, 앨라니스 모리셋, 셰릴 크로우 같은 여성 로커들도 엄청 동경했다. 밴드적인 측면에선 셜리 맨슨이 프론트우먼으로 활약한 가비지의 ‘Push it’을 즐겨 들었다. 윤복희 선생님, 한영애 선생님, 이선희 선생님 같은 우리나라 대선배들도 너무 존경한다.
요즘엔 나이 들어서도 계속 무대에 서는 분들은 다 멋있어 보인다. 아직까지도 활동하는 하트의 앤 윌슨이 라이브 하는 걸 들으면 너무 잘해서 눈물이 난다. 사생활 다 배제하고 보면 에어로스미스의 스티븐 타일러가 제일 멋있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로커 특유의 각이 살아있다. 미친 것 같다. (웃음) 나도 치밀하고 섬세하게 준비해서 더 나이 들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유지하고 싶다.
추구하는 음악 스타일은 어떤지. 특별히 무언가로 규정하고 있진 않지만 단순하게 스트레이트를 꽂으려고 한다. 굳이 따지자면 복잡하지 않은 팝 얼터너티브를 추구하는 편이다. 점점 큰 시장에 몸담으면서 가사나 악곡 형태에 완급 조절을 가하긴 했지만 대중들과 멀어지는 걸 바라진 않았기 때문에 공연에서 다 같이 질러댈 수 있는 음악으로 초점을 맞췄다.
지금까지의 작업물 중에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곡은. 직접 곡을 쓴 사람에겐 다 소중한 작품들이다. 전체적인 완성도로 봤을 땐 ‘Happy day’가 실린 4집 < Peace N’Rock N’Roll >을 가장 아낀다.
차기작은 언제쯤 만나볼 수 있을지. 곧 나올 거다. 노래는 산더미처럼 있어서 빨리 내보려고 발악 중이다. 이제는 음악, 앨범 하나하나에 성격을 규정하기 보다 그냥 체리필터의 노래를 남긴다는데 의미를 두고 싶다.
많은 후배들이 체리필터의 뒤를 이어 열심히 활동 중이다. 선배 입장에서 현재 우리나라 음악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하다. 아날로그가 아닌 디지털을 지향하면서 확실히 곡 쓰기가 편해졌다. 드래그 앤 드롭으로 보컬, 랩 녹음은 물론이고 각종 효과들까지 자유자재로 배치할 수 있게 되면서 모두가 쉽게 음악을 만들고 있다. 접근성이 좋아진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지만 이런 싱어송라이팅의 세계는 굉장히 절망적이다. 잊을만하면 터지는 표절 의혹들도 어느 정도 유사한 맥락에서 발발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비전 자체는 굉장히 좋다고 본다. 인디 뮤지션들이 대기업의 자본에 의존하지 않고도 자신만의 색깔을 표출할 수 있는 방법이 많아졌다. 풀 렝스 앨범이 아닌 싱글로 자주 소통하고, 아예 외국 기업과 계약해서 해외 중심으로 활동하는 등 가수 생활의 반경이 확실히 넓어졌다.
세월이 흐르면서 달라진 게 있는 걸까. 옛날에는 좀 까칠하고 성격도 모난 구석들이 있었는데 요즘은 자취를 감췄다. 먹고살기 괜찮고 남들처럼 살면 확실히 음악을 오래 하기 힘든 것 같다. 그렇다고 일부러 어려울 필요는 없으니까 남들과는 다르게 사고할 수 있는 사람들, 철없는 사람들이 하는 게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조유진에게 음악은 무엇인지. 이제는 되게 ‘치사한 것’. 뭔가 친구 같다가도 자꾸 삐져서 안 풀리고, 친절한 것 같으면서도 불친절하고 그러더라. 옛날에 이때쯤 되면 호텔에 살면서 월드 투어하자고 했었는데 맘처럼 쉽지 않았다. 그래도 음악 하는 사람은 남한테 굳이 안 들려주고 본인이 만든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도 성취감이 엄청나다. 그런 면에서 예나 지금이나 항상 진심으로 임했다는 건 자부할 수 있다.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스물아홉 번째 주인공은 우렁찬 목소리로 가슴 깊은 곳까지 울리는 파워 보컬리스트 권인하다.
천둥 같은 포효로 좌중을 압도하는 뮤지션 권인하는 1980년대를 대표하는 언더그라운드 스타다. 1984년 이광조 ‘사랑을 잃어버린 나’의 작사·작곡을 맡아 우리나라 다운타운 카페 시대를 화려히 열어젖혔고, 음악이 흐르던 그 카페엔 프로젝트 그룹 마로니에의 ‘동숭로에서'(1989), 강인원, 김현식과 함께 한 ‘비 오는 날의 수채화'(1989), 솔로 곡으로 발매한 ‘계절처럼 음악이 흐를 때'(1990) 같은 노래들이 나긋이 전해졌다.
시대를 풍미한 명곡만 지금까지 울려 퍼지는 건 아니다. 라디오 DJ부터 연기자, 교수까지 넘나들던 엔터테이너 권인하는 나아가 가요계 동료들의 작품을 본인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하며 음악이란 캔버스에 꾸준히 덧칠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 그와 조우한 9월의 어느 날, ‘천둥호랑이’의 방문을 알리듯 하늘은 비를 쏟아냈다. 40년 가까운 그의 음악 인생을 추적추적 내리는 빗방울에 풀어 또 한 편의 수채화를 조심스레 구상해 봤다.
권인하만큼 젊은 세대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베테랑 가수가 없는 것 같다. 20여 년 전 TV 라이브 콘서트에서 (박)효신이랑 ‘그것만이 내 세상’을 부른 적이 있었는데 누군가 그 영상을 편집해서 SNS에 공유해 줬고 주변 분들이 젊은 세대 사이에서 난리가 났다고 알려줬다. 그래서 댓글을 봤더니 목소리가 천둥소리 같다, 호랑이 같다는 반응이 많더라. 그때부터 ‘천둥호랑이’라는 별명이 생겼고 다른 무대들도 회자되면서 내 이름을 아는 친구들이 많아졌다.
태연의 ‘만약에’를 비롯해서 정말 많은 후배들의 곡을 커버했다. 50대 초까지만 해도 가수라면 자기 노래를 불러야 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그런데 2011년 컬러스(the Colors)라는 팀을 하면서 보니까 가수가 노래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전설들도 리메이크 곡으로 활동한 것처럼 말이다. 그동안 한심한 생각하며 살았구나 뉘우쳤고 무슨 노래든 내 스타일로 표현할 때 가수로 살아있음을 느끼고 있다.
남의 노래를 부르며 배운 점은 없는지. 젊었을 때는 강약의 밸런스, 특히 약(弱)에 대한 조절이 잘 안됐는데 세월이 흘러 감정적인 측면에서 그 중요성을 깨달았다. 젊은 후배들의 여린 감성도 조금씩 흡수하다 보니 같은 노래를 불러도 그들의 강약과 내가 표현하는 강약의 깊이가 다르다는 걸 많이 체감한다.
기억에 남는 커버가 있다면. 닐로의 ‘지나오다’는 아들이 추천해 줘서 부르게 됐다. 발매한 지 조금 지난 노랜데 요즘 차트에서 역주행하고 있다면서 1위 올라가기 전에 빨리 불러야 한다고 조언해 줬다. 그래서 비 오는 날 차에 앉아서 핸드폰으로 촬영한 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는데 반응이 꽤 좋았다.
권인하 음악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순간은. ‘계절이 음악처럼 흐를 때’나 마로니에로 발표한 ‘동숭로에서’도 제법 히트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비 오는 날의 수채화’가 아닐까. 결혼 후에 아이까지 가졌을 때라 가족 부양을 위해 음악을 그만두고 큰 형의 사업체를 맡아 운영했었다. 그러다 강인원 씨가 동명의 영화를 제작하는데 같이 OST를 불러보자고 제안했고 거기에 (김)현식이도 참여한다고 하니까 너무 반가웠다. 노래를 다시 부를 수 있다는 사실 자체로도 행복했는데 그게 내가 가수로 재기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가수가 아닌 작곡가로 먼저 데뷔했다. 이광조의 ‘사랑을 잃어버린 나’는 어떤 곡인지. 군 제대 후 훗날 그룹 위(WE)에서 함께 몸담은 정수연의 소개로 포크 트리오 풍선의 엄인호 형이 작업하던 스튜디오에 같이 드나들며 연습하게 됐다. 얼마 뒤엔 피아노를 치던 이영훈도 들어왔는데 옆에서 영훈이가 부지런히 작곡하는 걸 보고 나도 곡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 하루는 인호 형의 동료인 광조 형이 방문하셔서 우리 둘이 써둔 곡을 가져와 달라고 했다. 그때 나는 ‘사랑을 잃어버린 나’와 ‘상처’를 들려드렸는데 바로 본인이 가져가서 부르겠다고 하셨다. 당시 음악 하던 사람들끼리도 노래로 알아주는 형이 불러준다는 사실만으로 너무 행복했다.
많은 분들이 로커로 기억하지만 차분한 팝이나 리듬감 있는 재즈에도 강점이 있다. 비틀스의 ‘Yesterday’를 초등학교 때 라디오에서 처음 접했는데, 중학교 때 레이 찰스의 리메이크를 접하고 ‘이렇게도 부를 수 있구나’하며 감탄했다. 그리고 또 20대에는 마이클 볼튼이 부른 걸 들었는데 현대적인 편곡 덕분에 세련된 질감이 느껴졌다. 세 개 버전에서 각기 다른 감상이 떠오르는 걸 보고 30대부터는 여러 스타일을 권인하화 시키려고 노력했다. 코드까지는 못 바꾸더라도 리듬 패턴을 만져가며 다양한 장르적 접근을 도모했다.
존경하는 선배가 있다면. 학교에서 강의하다 보면 우리나라 음악사가 김정호 이전과 이후로 나눠진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존재는 위대하다. 과거엔 장르 구분할 것 없이 대부분 카피 음악에 가까웠는데 1970년대 김정호와 남성 듀오 어니언스의 등장 이후 드디어 한국적인 발라드의 기본 틀이 짜였다. 뒤따라 쏟아져 나온 해바라기, 이영훈, 유재하가 발라드를 완성한 것도 다 그의 영향이라고 본다.
서울에서 성공한 사람 치고 인천을 거쳐가지 않은 이가 없다. 당시 인천에 대한 기억은 어떤가. 1960년대에는 미8군 부대 주변, 특히 동두천 쪽에서 많은 그룹들이 인근 창고를 아지트 삼아 연습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서는 서울하고 가까운 부천, 소사, 부평으로 몰리게 됐고 그때부터 인천의 음악적 수준이 올라가지 않았나 싶다. 학창 시절을 더듬어 보면 지방에서 싼 하숙집이 많은 오류동 근처로 유학 오는 애들도 많았다.
인천이 파고다 공원 쪽만큼이나 록이 셌던 지역이지 않았나. 확실히 서울과 가깝고 클럽 문화가 발달되어 있어서 근처 지방 도시보다도 음악을 흡수하는 빠르기 자체가 남달랐다. 다른 지역에선 트로트 같은 음악을 불러야 호응이 좋고 다소 무거운 록에는 밋밋한 반응을 보였다. 인천 객석의 느낌은 정반대에 가까웠다. 록을 중심으로 팝에 친숙한 지역이라 선곡할 때도 음악의 폭을 다채롭게 구사할 수 있었다.
주로 불렀던 팝송 레퍼토리엔 어떤 곡들이 있었는지. 저니(Journey)의 ‘Separate ways’나 ‘Open arms’, 시카고(Chicago)의 ‘Hard to say I’m sorry’ 같은 곡들을 즐겨 불렀다. 그때는 로큰롤을 부르면 다들 좋아할 시기라 로드 스튜어트의 ‘Da ya think I’m sexy?’, ‘Sailing’ 같은 곡들도 인기를 끌었다.
오래 활동한 만큼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도 많을 것 같다. 1991년 < 가요톱텐 >에서 10개 분야를 대표하는 가수들을 초청하는 특집을 기획했는데 나도 여기에 언더그라운드 대표로 섭외됐었다. 밴드로 해달라는 요청이 와서 라이브로 하면 참여하겠다 협의했고 이색지대라는 팀과 함께 공연을 준비했다. 그런데 당일 현장에서 멀티 오케스트라를 다 따다 보니까 채널이 부족해 MR로 가야 한다고 말을 바꾼 것이다. 약속과 달랐기 때문에 안 한다고 했지만 우리 사무실 직원들이 하도 사정해서 어쩔 수 없이 무대에 오르기로 했다.
기분이 많이 상했을 텐데 무대는 어떻게 마무리했는지. 그러고 말았으면 다행인데 관계자들이 끝내 불을 키웠다. 당시에 남북 고위급 회담이 열렸는데 북한의 연형묵 총리가 KBS에 시찰을 온다는 소식을 듣고 방송국에서 그분이 도착할 때까지 계속 리허설을 돌렸다. 어디쯤 왔다는 연락을 받고 맞춰서 해도 될 텐데 참 답답했다. 어쨌든 연 총리가 내 앞 순서에 도착해서 내 차례 즈음 나갔는데, 내가 한창 클라이맥스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반주가 끊겼다. 무슨 멘트라도 해줄 줄 알고 기다리다 저 위를 봤는데 VIP 떠났다고 자기들끼리 수고했다며 박수 터지고 난리가 났더라. 그 자리에서 욕하면서 마이크를 바닥에 메다꽂고 나왔다.
그때만 해도 PD의 권력이 세던 시절이라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을 텐데. 나가는 걸 스태프 한 명이 붙잡긴 했는데 이런 홀대받으면서 가수할 바엔 출연 안 하면 그만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잘못된 건 잘못됐다고 얘기를 해야 동료들은 물론이고 후배들도 편해지지 않겠는가. 그 후에 회의가 열렸다는데 주변에서 내가 이유 없이 그럴 사람이 아닌 걸 아니까 1년 출연 정지로 일단락됐다. 그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만 했어도 이해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나도 사건·사고는 좀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내 잘못을 부인하거나 인정하는 시기를 미룬 적은 없다. 전부 내 책임이고 나로 인해 마음 상하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올렸다. 이렇게 해야 기자들도 물어볼 게 없고 뒷말이 안 생겨서 듣는 분들도 비교적 너그러이 용서해 주신다. 뭐든 그렇겠지만 음악만큼은 머리가 아닌 가슴, 자존심 하나로 해야 한다.
음악 하면서 가장 어려웠을 때는 언제인가. 그룹 음반을 준비할 때 돈이 넉넉하지 못해서 아버지께 용돈을 받아 생활하곤 했다. 그러다 대학교 마지막 학기에 복학하게 됐는데 등록금을 학교에 납부하지 않고 개인 생활비와 밴드 운영비로 돌려썼다. 학교에서 등록하라고 계속 고지서가 왔는데 그때마다 거짓말을 해가면서 돈을 받았다. 세 번째 되니까 등록 안 하면 제적된다는 최후통첩이 날라왔다.
인생 삼세번이라지만 너무하긴 했다. (웃음) 아버지가 ‘뭐 하고 다니냐’며 엄청 꾸짖었지만 그 세 번째 돈마저도 다 썼다. (웃음) 결국 제적되었다가 1990년대 중반 구제 기간에 맞춰 재입학했고 근 17~18년 만에 졸업하게 됐다. 다행히 학제가 바뀌면서 이수해야 할 학점이 크게 줄어 큰 부담 없이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를 음악가로 이끈 아티스트나 노래를 꼽는다면. 앞서 얘기했듯이 레이 찰스의 ‘Yesterday’를 들으면서 내가 알고 있던 원곡과 너무 달라서 충격을 먹었던 게 음악에 발을 내디딘 첫 계기라고 본다. 그리고 한 번은 고등학교 채플 시간에 어떤 흑인 여성 소울 가수가 정동교회에서 피아노 하나에 마이크도 없이 ‘Amazing grace’를 불러준 적이 있었다. 덩치가 큰 아주머니께서 건물 전체를 울려대는데 완전히 멜로디 라인에 쇼크를 먹고 나중에 꼭 저런 음악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졸업하고 나서 가스펠이라는 걸 알았지 그때는 그냥 찬양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 두 번의 소울 음악이 나한테 엄청난 충격을 안겨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