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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40 장미화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마흔 번째 주인공은 우리 일상에 밝은 에너지를 불어 넣었던 가수 장미화다.

1960년대 미8군을 시작으로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그룹사운드 ‘레이디버드’에서 보컬로 활약했던 장미화는 일찍이 해외 각지를 순회하며 풍부한 무대 경험을 쌓았다. 체계화된 공연 시스템 그리고 자유로운 문화 전반을 접하고 돌아온 그에게 한국 사회는 어딘가 삭막하게 느껴졌다. 그 얼어붙은 길거리에 화사함을 불어 넣은 게 바로 1973년 솔로 데뷔곡 ‘안녕하세요’다. ‘안녕하세요 또 만났군요’라며 해맑게 건넨 인사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전국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고, 그는 계속해서 우리 삶에 긍정을 불어넣으려 애썼다.

남양주 인근으로 찾아가 실제로 얼굴을 맞댄 장미화는 여전히 밝음 그 자체를 살고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호쾌한 웃음과 함께 풀어낸 그의 이야기는 분명 오래전 기억임에도 근래의 일처럼 선명했다. 동시대를 함께 했던 어른들에겐 재미난 회고록으로, 당대를 살지 못했던 젊은 친구들에겐 간접적인 과거 체험기로 남길 바란다.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뵙게 되어 기쁩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셨나요.
최근엔 TV 프로그램 녹화를 많이 하고 있다. < 스타다큐 마이웨이 >도 촬영 중이고. 얼마 전에 <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 >에도 나갔는데 시청률이 대박 날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내가 봐도 너무 재미있더라. 내가 녹화해 놓고 내가 그렇게 웃어본 건 처음이었다. (웃음)

그리고 얼마 전에 우리나라 1세대 그룹사운드 출신들이 모여 있는 예우회 분들과 용산에 다녀왔다. 일부 반환된 미군기지 부지에 최근 공원을 조성했는데, 거기 우리 세대 얼굴들을 다 전시해 놓은 기록관을 만들었더라. 옛날에 노래하던 자리에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으니까 감회가 깊었다.

1960년대 미8군과 여성 밴드 ‘레이디버드’로 가수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1965년 KBS < 아마추어 톱 싱어 선발대회 >에서 대상은 물론 연말 대상까지 받았고, 신중현 선생님이 나를 픽업해서 1966년 미8군 막내 싱어로 들어가게 됐다. 당시 대학교에 갓 입학한 상태였는데 맨날 레슨 받고 무대 한다고 밤새니까 학교 갈 틈이 없었다. 그러다 김시스터즈 매니저였던 맥맥퀸(Bob McMackin)이 나를 중심으로 여성 그룹사운드를 만들고 싶다 했고, 보컬 로지(장미화), 메인기타 앤젤라, 베이스 리사, 드러머 루비, 오르간 애니로 구성된 ‘레이디버드’가 탄생했다.

신중현 선생님을 따라 들어간 미8군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나요.
노래 연습을 굉장히 많이 하게끔 만들어 준 곳이었다. 그때는 신중현 선생님을 따라 눈만 뜨면 연습했었다. 또한 외국 노래에 대해서 몸이 익어갔던 장소였다. 한국 노래를 안 부르고 전부 팝송만 부르니까. 팝송 속에서 살았고 그러다 보니 외국 사람들과 사는 것 같고 그랬었다.

그래도 우리는 선배들보다 조금 나은 때에 들어갔다. 윤항기 오빠 때는 50년도 후반, 그러니까 막 6.25 전쟁을 겪고 그야말로 먹을 게 없던 시절이었다. 미8군에 딱 들어가면 식사부터 미국식으로 주곤 했는데 오빠들은 가족들과 나눠 먹기 위해 그걸 싸 갔다더라. 집에 있는 식구들이 생각나 도저히 밥이 안 넘어간다면서. 그만큼 너무나 어려운 시절이었다고 한다.

미8군 출신 가수들에 의해서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격이 올라갔다는 평이 많습니다. 의견에 동의하시나요.
당연하다. 가요계를 봤을 때 미8군 출신과 일반 가수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일단 오디션을 통과해야 했는데 그중에서도 더블 A 등급을 받아야만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어떤 노래를 한다 했을 때 싱어는 가사를 다 영어로 쓸 수 있어야 했다. 그때만 해도 영어를 할 줄 몰랐으니까 공연을 위해 무조건 외웠었다. 그만큼 열심히 노력을 했으니 난 자부심을 가진다. 음악적으로 봐도 그룹 출신은 솔로와 창법부터 다르고, 노래할 때의 감정 표현이나 무대 매너가 확실히 세련됐다.

우리나라보다 해외에서 먼저 무대를 가졌습니다. 머나먼 이국 땅에서의 생활은 어땠나요.
레이디버드 5명이 연습해서 처음 진출한 곳은 LA다. LA에 도착해서 한복을 입고 맥맥퀸을 기다렸는데 이 사람이 공항에 안 나왔더라. 근처 공중전화기에 동전을 넣고 전화를 걸었는데 전부 영어로 말하니까 우린 다 못 알아듣고 쩔쩔매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영사님을 만나게 돼서 맥맥퀸하고 대신 통화를 해주셨고 감사하게도 영사님 댁에서 잠시 머무르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 이후에 맥맥퀸은 우리를 픽업해서 라스베가스로 향했다.

당시 선생님과 레이디버드는 어떤 캐릭터였나요.
외적으로는 굉장히 예쁘장했다. 가랑머리 한 여자애들이 미니스커트랑 롱부츠 신고 나오니까 사람들이 너무 귀여워했다. 그들 눈에는 열네다섯 정도 되는 아이들로 보였을 거다.

그보다 대부분 오리지널 팝을 하던 때에 흑인 음악을 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신중현 선생님이 내 목소리가 다이애나 로스랑 너무 비슷하다고 해서 그런 노래를 주로 부르라고 하셨다. 중간에 페툴라 클라크 ‘Downtown’, 앤 마그렛 ‘Slowly’ 같이 섹시한 곡도 했는데 그때마다 난리가 났었다.

한 번은 내가 슈프림스의 히트곡 ‘Stop! in the name of love’를 불렀는데 맥 맥퀸이 나더러 다이애나 로스 노래를 할 때 목소리를 너무 똑같이 내지 말라고 하더라. 아무리 닮았다 해도 자연적으로 나오는 본인 목소리 그대로 해라. 똑같아서는 절대 성공할 수 없다. 그때부터 본연의 내 목소리를 따라 노래 부르게 됐다.

라스베가스에서도 인기가 괜찮았나요.
당시 센스 호텔이라고 있었는데 그 호텔 카지노에서 쇼를 열곤 했다. 홀 중앙에 원형 스테이지가 있는데 벽으로 반을 갈라서 두 팀이 동시에 공연을 펼쳤고 한 타임이 지나면 무대가 회전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때 우리 레이디버드와 같이 무대에 올랐던 게 바로 라이처스 브라더스였다. 얼굴이나 이름은 잘 몰라도 대표곡인 ‘Unchained melody’는 너무 잘 알았으니까 내 눈으로 직접 공연을 보고 싶었고, 막간을 활용해서 잠시 관람했던 적이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무대가 두 명이 깨지기 전에 가진 마지막 무대라더라. 카메라가 없었던 게 너무 아쉬웠다.

미국 다음으로 떠난 곳은 어디였나요.
라스베가스 이후엔 캐나다랑 동남아도 돌았다. 베트남 구정 공세가 일어났던 시기에 현지에 머물렀었는데 그때 공항이 완전 봉쇄됐다. 노래하던 클럽에서 끼니를 해결하곤 했는데 그 집이 문을 닫으니까 밥도 잘 못 먹었다. 그때 라디오에서 맹호부대에 도움을 요청하란 소리를 들었고 바로 연락을 취해 부대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해외에서 가장 힘들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베트남이 다시 문을 연 이후에 싱가포르, 태국, 홍콩 등 마저 공연을 돌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주변 반응은 어땠나요.
미8군을 거쳐 세계 순회공연을 하고 오긴 했지만 1973년 ‘안녕하세요’를 발표하기 전까지는 무명에 가까웠다. 장미화란 이름을 알릴 수 있었던 건 ‘안녕하세요’ 덕이 크다. 나는 잘 모르겠는데 다른 분들 말로는 그 인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미8군 때야 그냥 철모르고 노래할 때라 막연한 재미였지만, 솔로 데뷔 직후엔 인기는 물론 돈도 많이 벌며 진정한 전성기를 맞았다.

말씀하신 데뷔곡 ‘안녕하세요’는 물론 ‘봄이 오면’, ‘내 마음은 풍선’, ‘어떻게 말할까’ 등 수많은 노래가 우리 사회에 밝은 기운을 불어넣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왔을 때 다들 얼굴이 우울해 보였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미국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끼리도 인사를 나누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꼭 싸우다가 나온 사람들 같았다. 그래서 ‘안녕하세요’가 인기를 끌었을 때 “좀 웃고 삽시다. 안녕하시죠?” 내가 막 그러면 사람들이 웃더라. 그다음에 낸 노래가 ‘웃으면서 말해요’였는데 그때 노란색 스마일 스티커를 내가 처음으로 만들어서 택시 같은 데 붙이고 그랬었다. 다 같이 웃고 살자고. 참 좋은 노래다. 힘들고 어려울 때 그런 노래 좀 불러줘야 하는데 부를 데가 없다.

‘안녕하세요’, ‘웃으면서 말해요’ 모두 MBC 악단장을 맡았던 여대영 선생님의 곡입니다.
그런데 나는 막상 MBC에서 출연 정지를 당했던 사람이다. 활동 당시에 집시 스타일의 옷을 많이 입었는데 등을 너무 팠다고 1년 정지를 시키더라. 같은 날 출연한 여가수 중에 가슴 쪽을 판 사람도 있었는데 거긴 정지를 안 당했다. 너무 열받아서 내가 직접 사장실에 올라가서 엄청 따졌다. 지금이야 다 품고 사는데 그때는 아니면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하는, 소위 성깔이 좀 있었다.

실제로는 TBC에 더 많이 출연했다. < 쇼쇼쇼 >에서 무지 키워줬다. 매일 같이 나갔으니까.

TV에 나올 때마다 항상 춤을 추셨습니다. 본인의 아이디어였나요.
내 아이디어다. 무슨 노래를 하라 그러면 내가 집에서 거울을 보고 이 노래는 이렇게 해야지 하고 무대를 떠올리며 안무를 구상했다.

가수로도 최고지만 예능 스타로 활동했어도 최고였을 것 같아요.
코미디언 구봉서 씨, 서영주 씨 이런 분들이 너는 이쪽에 종사했어도 잘 됐을 거라고 하셨다.

1973년부터 전성기를 보냈지만 이후 긴 공백을 가지기도 하셨습니다.
1983년에 컴백을 했는데 이 시기가 꽤 마음에 남는다. 이혼하고 난 다음이니까. 아픈 엄마와 3살 난 아기를 데리고 나와서 살 때 통 허무했었다. ‘내 인생 바람에 실어’라는 노래 속에 그 가슴앓이가 다 들어있다.

그때만 해도 대한민국에서 음악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곳은 야간 업소뿐이었다. 미국의 큰 호텔에서 체계적인 공연을 하다가 이상한 술집에서 노래를 부르려 하니 적응이 안 됐다. 현미 언니 같은 선배들도 우리나라에선 어쩔 수 없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돈을 버는 건 좋았다. 다만 꼭 술 먹고 무대로 음식을 던지는 사람들이 문제였다. 원래는 누가 뭐라 그러거나 욕을 들으면 무서워하면서 울고 그랬었는데 이 엉망인 분위기에 동화되면서 굉장히 사나워졌다. 나중엔 도저히 못 참고 뛰어 내려가서 그대로 얼굴에 던져주기도 했었다. 이런 게 내 가치관하고 너무 안 맞으니까 그냥 이럴 때 결혼이나 해서 가정집 안에 들어앉아 조용히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만난 사람이 전 남편이었다. 처음엔 매너도 너무 좋고 뭐 하나를 해도 고급스러운 젠틀맨이었다. 그래서 식을 올렸는데 결혼 첫날부터 사람이 달라졌다. 이 사람은 내 사람, 그러면서 딱 날 잡기 시작하더라. 내 기가 눌려 기분이 영 찜찜했지만 우리 엄마 말을 듣고 그냥 참으며 지냈는데 살다 보니 일이 그렇게 됐다. 그래도 큰아들이 곁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내 모든 재산과 우리 아들을 바꿨다. 아이가 내 보물이다.

복귀 이후에도 많은 히트곡으로 가요계를 수놓았습니다. 기억에 남는 순간들을 간단히 짚어볼 수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봄이 오면’, ‘내 마음은 풍선’ (1973) / ‘웃으면서 말해요’ (1974) / ‘그 누가 뭐래도’ (1976) / ‘어떻게 말할까’, ‘푸른처녀’, ‘해뜰날’ (1977) / ‘애상’ (1985) / ‘내 인생 바람에 실어’, ‘서풍이 부는 날’ (1988)

그런데 인기에 비해 상복은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7대 가수상처럼 돈 주고 받는 상 이런 거는 맨날 받았다. 그런데 정작 가수왕 상같이 큰 상들은 탈 법한데도 못 탔다. 그때는 매니저들이 다 알아서 처리했으니까. 그래서 난 맨날 떨어졌다.

개인적으로 뽑는 장미화의 베스트 트랙은 무엇인가요.
옛날엔 ‘여름의 훈장’이었다가 ‘쓸쓸한 연가’로 제목을 바꾼 곡이 있다. 동아방송 드라마 주제가로도 썼다. ‘안녕하세요’보다 더 히트할 거라 예상했는데 그때 분위기와는 안 맞는 노래였던 것 같다. 최고로 맘에 드는 노래다. ‘사랑, 그 그리움’이란 곡도 정말 아끼는데 주목받지 못해 너무 아깝다.

장미화의 음악 인생에 가장 큰 도움을 주신 분은 누구입니까.
신중현 선생님이 나의 길을 열어줬다. 창법이나 매너도 그렇지만 연습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걸 몸소 보여주셨다. 추운 겨울날 선생님 댁에서 따뜻한 차 한 잔 마실 겸 함께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덜덜 떨면서 걸어온 후에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안에 들어가 기타 연습을 하시더라. 선생님처럼 일 없는 날에도 매일같이 연습하는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겠다고 느꼈다.

신중현 선생님 외에 우리나라 가수 중에서 기억에 남는 인물이 있을까요.
선배 중에선 패티김 언니가 제일 멋있었다. 후배는 같은 그룹사운드 출신인 조항조나 김상배가 기억에 남는다.

최근 해외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우리 K팝에 대해선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나요.
너무나도 자랑스럽다. 우리가 예전에 해외로 다닐 때 그런 무대를 원했었다. 왜 우리는 세계적으로 나가서 노래를 못 부르나. 우리는 뭐가 모자라서 이게 안 되나. 그런데 요즘 우리 후배들이 나가서 당당하게 1위 하는 모습을 보면 가슴 벅찬 감동을 느낀다. 참 감사하다.

그 친구들이 우리를 모를 수 있다. 그럼에도 미8군 쪽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바탕이 되고, 디딤돌이 되었다는 사실만큼은 알아줘야 한다. 그 부대 안에서 힘들게 고생하면서 피나는 노력으로 쟁취했던 무대 경험이 모이고 모여 지금의 K팝이 되었다는 걸 인지해 주면 좋겠다. 더욱더 발전하기를 기원하며 항상 뒤에서 박수와 응원을 보내고 있다.

끝으로 장미화 선생님은 우리 가요계에서 어떤 가수로 남기를 바라시나요.
참 착하고 활달하고, 언제 봐도 기분 좋은 여자로 기억되고 싶다.

진행 : 임진모, 정다열, 이승원
정리 : 정다열
사진 : 이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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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37 전석환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서른일곱 번째 주인공은 1960-70년대 ‘다함께 노래 부르기’의 주역 전석환이다.

건전가요 보급운동, 싱어롱-Y, 레크리에이션, 캠프 송, 뮤직 테라피(Music Therapy) 등의 용어가 모두 그로부터 비롯되었다. 1960-70년대 ‘통기타의 전령’, 그와 함께 확산된 ‘포크송의 개척자’도 바로 그였다.

TV는 물론 라디오조차 대중적 보급이 이루어지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삼천여 곡에 달하는 레퍼토리를 보유한 전석환은 전혀 굴하지 않았다. 통기타 하나 들쳐메고 학교와 일터를 비롯한 일상 곳곳을 돌아다녔고, 대한민국 전체가 아름다운 멜로디로 물들기 시작했다. ‘다함께 노래 부르기’인 싱어롱(Sing Along)부터 ‘노래에 따라 생활이 움직인다’라는 개념의 뮤직 테라피까지, 음악의 순수한 힘을 강조했던 그가 범대중적 열풍의 중심에 섰던 것은 단순 우연이 아니었다.

최근 어린 시절 적을 두었던 인천으로 돌아와 음악 교육을 이어가고 있는 그를 만났다. 아흔의 춘추에도 그 의지와 열정은 여전히 뜨거웠다. 부정이 아닌 긍정, 겸손을 넘어선 겸공을 저지할 방법은 없었다. 지치지 않는 화술로 꽉 채운 3시간의 인터뷰, 한 세기에 가까운 한국 음악의 근현대사 그리고 전석환의 일대기를 체감해 보라.

연배가 무색할 정도로 발음이 정확하신데요, 첫 방송은 어떤 프로그램이었는지 기억하시지요.
방송 출연을 많이 한 관계로 아직도 몸이 그 시절을 기억하는 듯해서 그런 것 같다. 방송은 가장 먼저 했던 게 1964년 라디오 프로 < 삼천만의 합창 >이었고, TV에선 1965년 < 노래의 메아리 >가 처음이었다.

고향 황해도에서 인천으로 건너오게 된 계기는요.
황해도 벽성군 소재의 섬 용매도가 고향인데, 고립된 지역임에도 교회가 들어와 있어 문물을 빠르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동네도 잘 살았던 편이라 중학교부터는 섬을 떠나 서울에 있는 한성중학교로 갔다. 일종의 유학이었다. 그러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해 참전하게 됐고, 휴전이 조금씩 언급되던 1952년에 집안 소유의 배를 타고 가족 모두 인천으로 떠나오게 됐다.

육군사관학교 입학을 위한 시험도 치렀는데 배다리에서 우연히 재회한 국민학교 선배가 전쟁은 곧 끝나니까 공부를 택하라고 권했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선택지였지만 그게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됐다.

인천의 첫인상은 어땠는지요.
서울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도시 수준은 인천이 상대적으로 좋지 못했다. 특히 항구 노동자들이 많아서 거칠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어릴 적에 인천의 주파수와 잘 맞지 않았는데 그걸 달래 준 곳이 교회였다.

유독 교회와 연이 깊어 보이는데요.
대한민국은 민주 국가, 자유 국가를 논하기 전에 종교 국가가 됐다, 독립운동 때만 봐도 반 이상이 기독교인이었고 그들이 많은 사람을 이끌었다. 내가 살던 용매도는 북방 선교의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종교 생활’이 아닌 ‘생활 종교’를 추구했다. 내 음악인생에서 중요한 ‘생활 음악’, 즉 뮤직 테라피도 결국 다 여기서 파생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다함께 노래 부르기’ 이른바 싱어롱(Sing Along)은 우리의 유행가 풍토를 바꾸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어느 나라이든 민요야말로 가장 깊은 역사를 품고 있다. 아메리칸 포크 뮤직의 진수인 벌 아이브스(Burl Ives)는 물론 그를 본떠 나온 밥 딜런까지 전부 대대로 내려온 전승 가요였다. 목청이 좋아야 하거나 폼을 잡아야 하지 않았다. 쉽게 말하면 노말(normal) 사운드다. 민요라 하면 보통 한 옥타브 안에서 5음만을 가지고 오르내리는 경우가 많아 따라 부르기 쉬웠다. 독창, 중창, 합창을 넘어 제창에 가까웠다. 그런데 음악 대학이 들어서면서 테너, 소프라노라는 개념이 생겼고, 전문적인 7음 음계가 교과서에 실리기 시작하며 함께 노래하기 어려워졌다. 이를 타파하고자 싱어롱을 들여온 것이다.

미국의 싱어롱을 보급해야겠다는 생각은 어떤 환경의 산물이었나요.
역시 교회의 영향이다. 연세대학교 종교음악과 1기생으로 입학해 작곡 공부를 할 때 박태준 박사님께서 가르쳐 주신 서양 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독창, 중창, 합창이 전부 가능하면 그야말로 좋은 거지만 그건 욕심이었다. 그러던 중 ‘I, My, Me’ 그리고 ‘We, Our, Us’의 개념이 머리를 스쳐 가면서 성가와 찬송가가 대응됐다. 내가 추구하는 건 비교적 대중적인 찬송가에 가까웠다.

전석환의 동의어나 다름없는 ‘싱어롱-Y’의 Y는 무엇을 상징하는지요.
YMCA의 Y, 당신(You)의 Y, 그리고 젊음(Youth)의 Y였다.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가요를 꿈꾸게 된 결정적 동기는 무엇이었나요.
부끄러운 얘기이긴 하지만 아버지의 영향이 크다. 아버지께서 인자하고 너그러우신 편인데 노래만 불렀다 하면 꼭 얼굴을 찡그리셨다. 눈을 감고 흐느끼고 어떨 땐 핏대를 올리기도 하셨다. 어릴 때부터 그게 너무 싫었는데 그렇게 흘러가던 노래, 당시의 유행가가 바로 일본의 엔카였다.

훗날 NHK가 연출의 연(演)자로 바꾸긴 했지만 엔카(연가)는 원래 연애의 연(戀)자를 썼던 사랑 노래였다. 술집에서 주로 불렀던 노래이기도 한데 사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에 나온 노래라고 한다. 그러니 당연히 한이 많을 수밖에 없다. 집단의식이 강한 조선인을 와해하기 위해 일제가 심어둔 일종의 염세 사상이라 본다.

그리고 예전에 재일교포들에게 아리랑을 가르치는데 어떤 분이 “왜 십 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나냐?”고 물어보면서 가사를 ‘십 리만 걸어도 행복해요’로 하면 안 되느냐고 했다. 뭐만 하면 너무 울고 짜는 느낌이라 창피하다는 얘기였다. 그 소리를 듣고 완전 쇼크에 빠졌다.

음악적으로 밝음, 명랑함을 추구할 수 있으려면, 실제적 경험도 작용했을 것 같은데요.
미8군에서의 무대 경험이 큰 자산으로 남았다. 1958년도부터 조선호텔 미 장교 클럽에서 전자 오르간 연주를 맡았는데 영어로 대화도 잘 되고 하다 보니 그들의 입맛에 맞춰 연주할 기회가 잦았다. 뮤지컬은 웬만하면 다 통했는데 대체로 시끄럽거나 느린 음악을 싫어했다. 어릴 적에 배워 익숙했던 ‘Old folks at home-Swanee river(스와니 강물)’나 ‘Old Black Joe(올드 블랙 조)’ 같은 노래가 그들의 슬픈 감정을 담은 걸 보고 학교 교과서의 정확성, 미래 지향성이 없다는 걸 깨달았고, 우리와 음악 세계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걸 느꼈다.

그런 중에도 무난하고 경쾌한 리듬의 노래 그러니까 ‘노말’한 곡들 예를 들면 벌 아이브스의 ‘Home on the range(언덕 위의 집)’ 같은 곡은 항상 반응이 좋았다. 소위 말해 노래로부터 플레져(Pleasure)를 얻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노래로 이 즐거움을 얻고자 해야지 신경 쓰고 심각해질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확실히 그때부터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1970년대 당시 음악적 존재감이 컸던 선생님께서 긍정을 강조하셨기 때문인지 예를 들어 ‘아침이슬’처럼 금지곡에 영향을 미쳤다는 시각도 존재하는데요.
실상 당대 금지곡과는 전혀 접점이 없었다. 방송에서 건전가요만 부르고 바른말을 하는 이미지로 나오다 보니 소문이 이상하게 와전되면서 이런저런 오해가 생긴 것이다. ‘아침 이슬’ 가사 속 ‘묘지’를 ‘대지’로 교체하면 어떻겠냐는 의견도 금지곡 처분을 받고 나서 꺼낸 얘기다. 실제로 김민기와 만났을 때 내가 가사를 바꿔 불러도 되겠냐고 물었더니 괜찮다고 했었다.

찢어지게 가난했고 힘든 삶을 살았으니 사고 방식이 나처럼 낙관적일 수만은 없는 환경이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여러분 세대에서는 우리 시대의 과오를 그대로 답습하지 말고 융합과 화합의 덕목을 길렀으면 한다.

스스로가 인정하는 전석환의 가장 큰 공헌은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공이라고 할 건 없다. 다만 음악 산업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음악계가 세계적으로 커졌는데 그 옛날부터 국제화, 글로벌을 꿈꿨던 게 바로 나다. 과거 경제적 빈곤기에 기본적인 의식주도 해결이 안 되던 나라였으니 노래뿐만 아니라 우리 문화 전체를 우습게 보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아 다행이다.

최근 K팝이 글로벌 무대에서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싱어롱의 개념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갈등이 오는 건 당연하다. 그럼에도 고마운 건 국경, 언어, 문화와 상관없이 세계인과 소통할 수 있는 공통 분모가 생겼다는 사실이다. 순수 음악적 요소만 아니라 소위 말하는 율동이나 동작, 퍼포먼스가 그 다리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나왔을 적에 전 세계가 흔들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건전가요 보급에도 앞장섰지만 통기타 붐의 시작을 알린 선구자이시기도 합니다.
2015년 남이섬 노래박물관에서 열린 < 대한민국 통기타음악 50년사 & 방송DJ 50년사 특별전 >에 초대된 적이 있다. 함께 자리했던 ‘통기타 군단의 교장선생님’ 이백천에게 “내가 왜 통기타의 선구자냐”고 했더니 나 때문에 우리나라에 대학 가요제가 생겨났다고 하더라. 당시에 세고비아 기타 재고가 없어서 못 팔 만큼 통기타 인기가 상당했던 건 사실이다.

전국의 학교, 음악감상실, 심지어 한강의 모래사장을 찾아 사람들에게 합창 지도에 나섰던 시절, 한해 15만 명이 참여하는 센세이션이 야기되었다는 엄청난 인파를 몰고 다녔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은 뭐였나요.
부산 해운대에서 약 30만 명에 달하는 인원이 몰린 적이 있는데 해수욕장 전체가 그야말로 인파로 덮였다. 처음엔 해수욕을 즐기던 사람들만 모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아지니까 깔려 있던 파라솔과 텐트를 치워야 하는 사태까지 갔다. 여러모로 미안한 마음이 컸는데 음악적 보상으로 ‘노을’이란 곡을 작곡했다.

창작 가요도 많이 썼지만 해외 각국의 수많은 민요를 번안해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전석환 번안가요 베스트는요.
아무래도 ‘그리운 고향’이 아닐까. ‘Sloop John B’를 번안한 곡으로, 오래도록 바다에 나와 있는 뱃사람이 고향의 사계절을 그리워하는 내용을 담았다. ‘날이 밝으면 멀리 떠날/ 사랑하는 님과 함께..’하는 ‘석별의 정’도 널리 알려졌고… 창작곡으로는 ‘정든 그 노래’와 ‘앵카-송(Anchor song)’, ‘좋아졌네’를 고를 수 있겠다.

지금 시대에 다시 울려 퍼졌으면 하는 노래는 없는지요.
아버지께 배웠던 노래 ‘부모은공’을 추천한다. 길지 않고 무엇보다 가사가 간단해서 나이 든 노인부터 어린아이까지 누구나 따라 부르기 쉬운 곡이다. 율동과 함께 배우기 딱 좋다.

인천시민들에게 기쁘게도 작년 5월 다시 인천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지금은 인천과 잘 맞는지 궁금합니다.
작년 5월에 자리를 잡으면서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 각계 인사들과 대화를 나눴는데 아직도 조금 거친 면이 남아있더라. 작년에 송년회만 12군데 참석했는데 쭉 돌고 나니까 비로소 인천의 주파수가 잡히기 시작했다.

다시 터를 잡은 인천에서 현재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신가요.
우리는 예술적 음악적 기록이 많이 남기지 못했다. 올해 안으로 인천의 저명인사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같이 노래를 만들고 녹음도 진행할 계획이다. 이젠 창작 의욕만 있으면 얼마든지 팀을 이뤄 무언가를 만들 수 있으니 그 창의력과 의지를 발휘해 다양한 방면으로 소개하려 한다.

진행 : 임진모, 염동교, 정다열, 신하영
정리 : 정다열, 임진모
사진 : 신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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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36 신연아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서른여섯 번째 주인공은 4인조 알앤비 그룹 빅마마의 리더이자 호원대학교 교수로 활동 중인 신연아다.

명품 보컬 그룹의 귀환, 2021년 빅마마의 재결합 소식은 유난히 반가웠다. 급작스러운 해체 이후 9년 만에 용기 내 얼굴을 마주한 이들에게 그 시절을 함께 했던 팬은 물론 빅마마를 전혀 모르는 신세대까지 뜨거운 관심으로 화답했다. 외모 지상주의를 향한 도전으로 출중한 가창 실력을 앞세웠던 2000년대 초중반의 당찬 하모니가 다시금 생명력을 회복하는 순간이었다.

올해로 빅마마 데뷔 20주년을 맞았지만 멤버들은 오히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팀의 리더 신연아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강의실. 오랜 기간 호원대학교 교수로 재직한 그에게 교정은 무대만큼 친숙하고 편안한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인터뷰 역시 평소 학생들이 사용하는 연습실에서 진행했다. 잔잔히 깔리는 제자들의 피아노 연주를 따라 담화를 이어간 신연아 교수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만이 번졌다.

2003년 빅마마로 가요계에 정식 데뷔해 올해로 20주년을 맞았다. 소감이 어떤지.
건너뛴 시간이 길어서 살짝 양심에 찔리지만 (웃음) 데뷔한 지 20년 됐다는 걸 누군가 기억해 주고 기다려 준다는 것만으로도 참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냥 20년이구나. 사람으로 치면 성인이 되는 시기인 만큼 빅마마란 팀도 어느 정도 무르익었는지 돌아보게 되는 지점인 듯하다.

2021년 재결합을 알린 후 딩고 킬링보이스, odg, it’s live 등 유튜브 콘텐츠를 중심으로 모습을 비췄다. 일련의 과정이 계획된 움직임이었나.
재결합 자체가 그해 4월에 갑자기 진행된 얘기다. 처음엔 거절했다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압력 센 노래를 소화할 수 있을까 싶어서 더 힘들어지기 전에 후다닥 하게 됐다. 그래서 5월에 만나 음원 하나를 거의 바로 녹음해 발매했고 첫 스케줄로 딩고 라이브가 잡혔다. 20분 넘는 시간을 원테이크로 부르는 데 정말 사람 잡는 일이더라. 9년 만에 만나서 맞추려니 걱정도 되고 떨리기도 했는데 조용한 환경 조성을 위해 에어컨도 끄고 녹화해서 리허설 한 번에 땀이 확 났다. 그래도 다들 한가락 하던 사람들이라 그런지 간만에 모였는데도 몸이 기억해서 나오더라.

천만 조회수를 기록할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대중들이 많이 기다렸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직도 우리를 그렇게 계속 찾아주고 좋아해 준다는 거는 진짜 선물 같은 일이라고 본다. 그런 중에 또 희한한 건 젊은 친구들이 새로운 팬층으로 유입됐다는 것이다. 20대 친구들이 언니라고 부르면 참 기분이 묘하다. (웃음)

작년에 빅마마 전국투어 < ReBorn >을 성공리에 마쳤다. 20주년을 맞이하여 올해에도 예정된 대규모 공연 계획이 있는지.
물론이다. 사실 데뷔 앨범이 나왔던 2월도 고려했었지만 공연 대목인 연말에 하는 게 더 좋겠다는 의견이 나와서 아마 올해 말 정도에 음원 하나 발표하며 찾아 뵙지 않을까 싶다.

정식 데뷔는 2003년이지만 1990년대부터 3인조 코러스 팀 ‘빈칸 채우기’로 활약하며 당대 발매된 수많은 앨범에 이름을 남겼다. 코러스 활동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
시작은 인하대학교 창작가요 동아리 ‘꼬망스’다. 데뷔곡 ‘Break away’를 써준 (이)현정 언니는 동아리 2년 선배고, 함께 했던 (김)효수는 2년 후배다. 어느 날 현정 언니가 소찬휘 선배 앨범에 곡을 수록하게 되면서 셋이 같이 코러스를 해보자고 제안해서 한 곡 녹음을 해봤는데 반응이 좋았다. 그때부터 프로듀서분께서 앨범 전체를 맡겨 주셨고 나아가 광화문 스튜디오에서 진행한 대부분의 작품에 코러스로 참여했다. 입소문이 나다 보니 그렇게 한 6~7년 정도를 하게 됐다. 셋 모두 톤이 다름에도 배음 효과를 통해 서로를 더욱 풍성하게 채워줄 수 있다는 걸 이때 느꼈다.

‘꼬망스’는 인하대학교에서 하나의 단과로 치부될 만큼 유명 뮤지션들이 거쳐 간 모임으로 잘 알려져 있다. 대학교 시절 기억에 남는 동아리 에피소드가 있다면.
그 시절 가요제에 많이 출전했는데 성과가 나름 괜찮았다. 1995년 MBC 강변가요제 은상을 수상했을 때도 같이 나갔던 친구와 그 곡을 써주신 선배 모두 동아리 멤버였다. 한 기수에 10명도 채 안 되는 인원이었지만 걸출한 음악인들이 많이 탄생한 걸 보면 다들 열정이 대단했었다.

인천의 음악이 유독 강점을 보였던 이유는 무엇이라 보는가.
항구 도시 특성상 문물을 빠르게 흡수했다는 설도 있지만 그 전에 기본적으로 바다 주변 사람들은 파도처럼 감정의 출렁임이 큰 것 같다. 일반인으로 살기는 불편할지라도 음악처럼 감성적인 예술을 하기엔 더없이 좋은 환경이다. 어느 정도의 우여곡절이 음악의 깊이를 더해주는 밑거름이 되지 않았나 믿고 있다.

지금의 신연아를 만든 가수 혹은 음악이 있다면.
블루스에 빠져 지내던 대학 시절엔 허스키한 중저음의 프랑스 여성 보컬 파트리샤 카스를 즐겨 들었다. 그러다 졸업할 때쯤 인천대 출신인 낯선 사람들의 데뷔를 마주하고 크게 충격을 받았다. 동아리 멤버들과 둘러앉아 앨범을 듣고 이렇게 훌륭한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상당한 좌절감이 몰려왔다. 그 정도로 낯선 사람들 1집은 내게 최고의 명반으로 남아있다. 베이비페이스 같은 알앤비에 관심을 두다가도 프랑스에서 재즈와 월드 뮤직에 끌리고, 맨하탄 트랜스퍼부터 스테이시 켄트까지 변했던 것처럼 그때그때 꽂힌 장르와 아티스트에 귀가 가는 편이다.

프랑스 유학은 어떻게 결정하게 된 건가.
코러스 활동을 오래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스스로가 노래 자판기 같다는 회의감이 들었다. 그러다 한 작곡가분의 추천으로 유학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는데 마침 나와 똑같은 불문과였던 친언니가 프랑스 어학연수를 준비하고 있어서 나도 겸사겸사 따라가게 됐다. 잠시 코러스 생활을 접고 도망치듯 떠나갔던 상황이라 마땅한 계획은 없었다.

타지에서의 유학 생활은 할 만했는지.
대학생 때 노래만 하느라 불어 실력이 초보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보니 현지에서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음악을 접을 생각까지 하며 방황기를 겪다가 우연히 한국에서 가져온 테이프 하나를 탁 틀었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음악을 안 하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자만이었다는 걸 느끼고 그때부터 학교를 알아보고 C.I.M 음악학교에 입학하게 됐다.

학교에선 음악 용어를 쓰다 보니 어학원에서 배운 단어는 무용지물 수준이었다. 제일 어려운 수업이 화성학이었는데 학기 전에 불어 화성학책을 살짝 봐둔 게 그나마 도움이 됐다. 그렇게 눈치껏 하루하루 배워가긴 했지만 주변 친구들과 깊숙한 대화를 나누긴 힘들었다. 물론 의지할 곳이 필요해서 사귀게 되었던 친구가 지금의 남편이 됐다.

당시의 추억들이 한국에 돌아온 이후 음악 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 같다.
어학원과 학교에서 만났던 친구들은 시선이 본인에게 맞춰져 있었다. 내가 뭘 좋아하고, 뭘 하고 싶은지 분석이 전부 끝난 상태였는데 그게 참 부러웠다. 나도 그때부터 주변 환경에 개의치 않고 온전히 나를 바라보는 훈련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유행에 크게 휘둘리지 않는 사람으로 성장했고 각자의 개성을 인정하며 다양성을 존중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훗날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큰 양분이 되어 돌아왔다. 입시만 봐도 우리는 어떤 선을 넘기 위한 단점 보완에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그 시간에 나만의 장점을 발굴해 더욱 발전시키는 게 훨씬 경쟁력으로 작용한다. 학생들이 스스로가 가장 빛날 수 있는 포인트를 뽑아내는 게 교육자의 임무라 생각하고, 그런 면에서 항상 옆 친구 노래 따라 부르지 말라고 강조한다.

2009년부터 호원대학교 실용음악학부에서 보컬 전공 교수를, 그리고 K-POP학부에서 학과장을 맡고 있다. 교수직은 어떻게 맡게 되었는지.
교수를 하기 전만 해도 가수 활동에 대한 의욕이 남아있던 때라 교수직을 거절했었다. 그런데도 정원영 교수님은 학교에 있으면 음악을 더 잘하고 많이 하게 될 거라며 불굴의 의지로 계속 설득하셨다. 그냥 믿어 보자 하고 시작했는데 정말 다른 즐거움, 다른 행복감을 느끼게 되었다.

가수와 교수 활동의 연차가 거의 비슷하다. 단상과 무대에 오를 때 차이가 있다면.
가수로 활동할 때는 온전히 나 자신과의 싸움이라 시선이 나에게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학교에 있으면서 나보다 남을 더 많이 바라보니까 사람 자체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다. 타인의 인생에, 특히 가치관을 정립해 나가는 성장기에 내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 거니까 모든 말과 행동을 조심하게 되더라.

그 과정에서 나 역시 스스로를 더 솔직하게 바라보게 됐다. 막말로 애들한테 하는 만큼 내가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다. 예전엔 무대에서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서 잘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는데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조금은 마음을 내려놓고 됐고 음악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볼 여유가 생겼다. 가르치면서 노래한다는 것 자체가 나를 겸손함으로 이끌었다.

강의할 때 중점을 두는 교육 방침이 있다면.
모든 게 다 그렇겠지만 노래도 결국 몸으로 하는 거라 마음에 따라 소리 내는 게 달라진다.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내 환부를 다 보여줘야 치료가 가능한 것처럼, 개선에 도달하기 위해선 나와의 시간이 즐거워져야 한다. 그래서 친구들이 나부터 편하게 느끼고 다가올 수 있게끔 내 고민도 스스럼없이 털어놓고, 그들의 걱정 또한 최대한 이해하고 들어주려 한다. 과거의 내가 배울 곳이 많지 않아서 느꼈던 답답함을 제자들에게까지 물려주고 싶진 않다.

기억에 남는, 눈길이 가던 친구가 있다면 간단히 소개 부탁한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긍정적인 친구들이 참 많다. 정채원이란 친구는 대학원이나 유학을 통해 더 나아갈 수 있었는데 여력이 충분하지 않아 배움을 포기했는데, 그렇다고 불만도 없더라. 그 모습을 보고 이 친구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막연한 기대로 주변 친구들과 함께 앨범을 제작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줬고 올해 초에 EP < Attention >을 발매했다. 최근 연락을 해보니 본인이 나왔던 예고에 선생님으로 가게 됐다면서 그 월급으로 유럽으로 공부하러 가겠다고 말하는데 내가 다 뿌듯하고 행복했다.

K-POP학과장 신연아는 해외에서 성과를 거두고 있는 글로벌 K팝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매우 긍정적인 입장이다. 프랑스에 머물렀던 2000년과 비교해 보면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완전히 뒤바뀌었고, 크게 일조한 게 바로 K팝이다. 2016년에 학교에서 해외 6개국을 돌며 K팝을 알려주는 K팝 아카데미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외국인 친구들이 들고 오는 음악이 단순히 아이돌에 국한되어 있지 않았다. 방탄소년단 같은 그룹을 시작으로 아이유부터 이적, 박효신, 성시경까지 다양하게 소비하면서 그것 때문에 한국어를 배우고 있더라. 그야말로 엄청난 문화적 파장이다.

물론 우리 스스로 아이돌 음악을 경시하던 시기도 있었다. 춤만 잘 추고 노래는 못 한다는 비판을 듣기도 하지만 춤이라도 잘 추는 게 어딘가라는 생각을 한다. 가만히 서서 노래해도 상당한 근력을 요구하는데 춤까지 추려면 체육인만큼 체력 단련이 되어 있어야 한다. 결과를 내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고 나아가 자체적으로 만들어 내는 영역까지 도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박수받아 마땅하다.

음악을 하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인지.
연습이 잘 되는 매 순간순간이 행복하다. 대부분 사람 앞에서 노래할 때가 행복할 거라 생각하지만 무대에서 늘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기 때문에 감사한 일이지 혼자 마음껏 행복한 것과는 살짝 거리가 있다. 그래서 컨디션이 잘 안 돌아오면 나이가 들어서 그런 게 아닌가 불안해하다가도 노래가 잘 되고 내가 쓴 곡이 제법 괜찮을 땐 뿌듯하다. 결국 나 자신과의 콘서트인 셈이다.

빅마마 그리고 솔로 활동을 통틀어서 꼽는 신연아의 Best 5는 무엇인가.
빅마마 ‘거부’ (2003) – 사회에 대한 분노 지수가 한창일 때 가사를 썼다. 지금 보면 그때 왜 그렇게 썼을까 싶다가도 당시의 반항 정신을 어느 정도 대신해 주지 않았나 싶어 뿌듯한 면도 있다.

빅마마 ‘Thanks to..’ (2006) – 팬들을 향한 감사함을 담아 가사를 써 내려간 곡인데, 최근에 다시 활동을 시작하면서 참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빅마마 ‘사랑’ (2010) – 개인적으로 좋아하던 작곡가분께서 써주신 곡이다. 클래시컬한 멜로디 위에 사랑의 이면을 철학적으로 담았는데 빅마마 5집에 담겨서 무대에서 보여드릴 기회가 거의 없었다.

신연아 ‘Cosmos’ (2014) – 사랑을 주고받을 존재 하나면 우주를 다 가진 기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작업했다. 절대적인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 그런지 가사가 아름답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다.

신연아 ‘늙은 어미의 노래’ (2014) – 죽음을 앞둔 어머니가 남겨둔 자식들을 걱정하는 내용의 노래다. 멜로디도 좋지만 가사에 집중해서 듣는다면 처음 접한 분들도 쉽게 감동할 수 있는 좋은 곡이다.

끝으로 신연아는 어떤 음악인으로 남고 싶은지.
나 자신은 물론 환경으로부터 자립하기 위해선 일단 스스로 해낼 수 있는 것이 많아야 한다. 곡 작업은 물론이고 각국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여서 자유롭고 독립적인 음악인으로 기억되고 싶다.

진행 : 장준환, 정다열, 김태훈
정리 : 정다열
사진 : 정다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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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이승윤 인터뷰

오랜 무명 가수 생활을 딛고 유명 가수로 탈바꿈한 이승윤에게 < 싱어게인 > 우승은 한 챕터의 끝이 아닌 새로운 출발에 가깝다. 2023년 서울가요대상에서 < 올해의 발견상 >을 거머쥐며 전한 ‘물 들어올 때 노를 젓기보다는 물이 새지 않도록 배를 수리하며 지냈다’는 수상 소감처럼, 그는 자신을 둘러싼 급격한 상황 변화에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자신을 담금질하여 2집 < 꿈의 거처 >와 함께 돌아왔다.

녹진한 삶을 언어에 풀어내는 문장가이자 사회의 단면을 꼬집는 사상가로서 면모는 여전히 탄탄하다. 환희와 절망이 엉킨 삶을 해학적으로 짚어낸 < 폐허가 된다 해도 >처럼 그에게는 깊은 철학과 함께 밝은 유머도 빛나고 있었다. 다소 한산하고 여유로운 월요일 저녁의 홍대 거리와 묘하게 어울리는 이승윤은 어려운 질문에도 능글맞게, 가벼운 물음에는 또 진중하게 화답하며 본인의 뚜렷한 주관과 음악에 대한 묵은 궁금증을 해소해주었다.

정규 2집 < 꿈의 거처 >로 돌아왔다. 전작과 비교했을 때 전체적으로 음악이 ‘슬림’해졌다는 인상이 강하다.
태생이 맥시멀리스트인지라 음악적으로 늘 풍부한 소리를 지향한다. 다만 < 폐허가 된다 해도 >는 데드라인이 촉박했기 때문에 소리의 정돈이 다소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사운드가 잘 어우러질 수 있도록 배치하고, 고민할 시간이 충분했던 < 꿈의 거처 >가 더 완성도 높고 정갈한 소리를 들려주기에 그런 감상을 낳는 것 같다.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가려는 측면에서도 ‘슬림’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가사 역시 무게감을 던 느낌인데 이런 의도는 없었는지.
솔직하게 말하면 더 많은 사람에게 들려주기 위해 작품을 만들지는 않고 오히려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내 취향을 녹여내는 데 집중했다. 신보에는 기존에 비축해둔 곡과 최근에 쓴 곡들이 섞여 있다. 이전에 만든 곡들은 좋은 문장이 되도록 오랜 퇴고를 거친 편이지만, 너무 현학적인 가사에 얽매이는 건 아닌가 싶어 새로운 트랙들은 날 것으로, 떠오르는 감정에 집중했다. 그런 이유로 얼마 전에 만든 ‘비싼 숙취’나 ‘야생마’가 더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자기 생각을 온전히 가사에 녹여내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 것 같다. 음악을 구성하는 요소 중 언어를 특히 날카롭게 다듬는 이유가 무엇인가.
원래부터 말에 잘 휘둘리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성장기에 난립했던 캐치프레이즈와 슬로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당시에는 멋진 말을 들으면 무조건 수용했지만, 그 문장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사람들을 배격하는 행태에 어느 순간 괴리감을 느꼈다. 당연히 어떤 문장이 주는 교훈이 있고 행동 지침으로서도 의미가 있겠지만, 모든 사람이 그 뜻에 따라야 한다는 게 굉장히 폭력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2번 트랙인 ‘말로장생’에 이에 대한 반성의 의미를 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승윤의 언어에 영향을 끼친 문학가는 누구인가.
사고 측면에서는 소설가 톨킨의 < 반지의 제왕 >을 인상 깊게 읽었다. 존재하지 않는 3분 내외의 시공간을 만들어내는 음악가의 입장에서 수천 년의 장대한 서사를 만들어낸 < 반지의 제왕 >의 장대한 상상력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날카로운 텍스트에 피로해진 이승윤이 언어를 제거한 연주곡을 발표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상상도 해봤다.
언젠가 이루고 싶은 꿈이다. 가능하다면 47분 정도 길이의 연주곡을 내고 싶다. (웃음)

전작 < 폐허가 된다 해도 >는 이즘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서 굉장한 호평을 받았다. 평단의 반응이나 자기 음악에 대한 평가를 주의 깊게 보는 편인가.
어릴 때 들었던 CD 속에 늘 평론지가 꽂혀 있었기 때문에 비슷한 글들을 자주 읽어왔다. 평론은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처럼 창작물을 해석하여 더 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고 그 의미를 더 빛나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한다. 평단에서 좋은 음악으로 봐주시는 데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특히 삶에 절망하는 인간의 고뇌, 그런데도 희망을 잃지 않는 음악인의 환희를 함께 녹여낸 음반의 독특한 정서가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내 인생관을 소리로 담는다. 늘 삶의 필연과 당위에 대해 들으며 자랐지만 다들 알다시피 이 세계는 모순으로 가득하다. 그럴수록 점차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영역이 많아졌고, 나에게 있어서 음악은 이 뒤죽박죽인 세상을 표현하는 좋은 매개체다. 그렇게 인생의 딜레마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이런저런 질문과 답을 노래 안에 산발적으로 흩어놓았다.

자신과 음악 사이의 끊임없는 감정 교류야말로 진정한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그렇다면 스스로는 < 폐허가 된다 해도 >를 어떻게 정의하는지도 궁금하다.
시궁창 같은 현실에 빈정거리면서도 말할 수 있는 희망을 담아 ‘빈정거리는 희망’으로 정의했다. 소위 ‘사이다 발언’으로 아주 멋진 말을 하면 받는 호응과 지지가 있고 감정을 더 비극적으로 꾸며낼 때 얻는 만족감도 물론 있다. 그러나 멋진 문장만 늘어놓을수록 진정성을 잃어버린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 같았다. ‘코미디여 오소서’가 희극적인 면과 비극적인 면을 번갈아 가며 이야기하듯이 현실적인 이상주의자가 되고 싶었다.

이렇게 깊은 가치관을 음악과 어떻게 연결하는지.
보통 작업은 가사로부터 출발한다. 어떤 한 문장에서 영감을 받기도 하고, 이야기를 듣고 나면 단면과 그 뒷면까지 보고 음악이라는 콘텐츠로 재구성한다. 1집에 수록된 ‘구름 한 점이나’를 예로 들면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다 시킨다’라는 속담을 듣고 화가 나서 그 격언을 비꼬아 노랫말을 지었다. 보통 초안은 거칠게 쓰고 다듬어가며 하나의 곡을 완성해간다.

전개되는 철학뿐만 아니라 ‘코미디여 오소서’, ‘사형선고’, ‘교재를 펼쳐봐’는 음악적 진행도 상당히 독특하다. 후반부 맹폭하는 편곡 스타일이 매력적인데 원래부터 이런 음악을 지향했는가.
이론을 먼저 배운 게 아닌지라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작곡하는 편이다. 물론 혼자서만 만든 음악은 아니다. 보통 밴드 셋을 그려놓고 곡을 만들기 때문에 가까운 연주자 동료의 도움이 꼭 필요하고 그들이 있어야 완성된다. 음악 내외로는 밴드 오아시스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고 6집 < Don’t Believe The Truth >를 가장 좋아한다. 오아시스 곡을 따라 치며 기타 코드를 익혔고 사춘기 시절에는 그분들의 태도에도 매혹되었다.

이야기를 들어볼수록 오디션 프로그램의 퍼포먼스나 경쟁적인 요소와는 어울리는 면이 많지는 않은 것 같다. 어떤 계기로 < 싱어게인 >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방송 오디션은 음악을 그만두기로 결심한 시점까지 남겨둔 선택지였다. 말씀해주신 것처럼 내 음악을 들려주기에 적합한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내키지는 않았지만, 해보지도 않고 후회하기보다는 한번 도전이라도 해보고 장렬히 산화하자는 마음이었다.

막상 하고자 하는 음악을 연장하기 위해 선택한 프로그램에서 좋은 결과를 얻고 나니 다해야 할 책임과 의무도 많았다. 그것들을 다하고 난 후에는 가수로서 현재 위치가 예전에 그렸던 모습과는 달라 허탈하기도 했다. 어떤 목표나 지향점 없이 긴 호흡으로 앨범 작업에 열중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어쨌든 우승 이후에 음반을 내며 본격적으로 산업의 영역 안으로 들어왔다. 음악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경쟁력을 갖춰야 하는 지금, 이승윤만의 강점은 무엇인가.
표준화된 가창력 평가 기준에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노래 잘하는 보컬이 필요한 것처럼, 그냥 자기 노래를 하는 목소리도 중요하다고 보고, 이 관점에서 내가 만든 노래는 내가 가장 잘한다고 생각한다.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셔서 내 음악 안에서는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게 강점인 것 같다.

< 꿈의 거처 >에 직접 쓴 소개 글을 인용하면 ‘삶을 공허에 전부 빼앗기기 전에 선수를 치고’ 결국 살아남았다. 지금도 공허에 맞서 투쟁하고 있을 청년들에게 경험에서 비롯된 조언과 위로 한마디를 부탁한다.
현대 사회엔 분명 공허가 주는 매혹이 있다. 그 유혹에만 머무르지 않고 어떤 것이 되었든 집중하고 몰입하는 경험, 그리고 이를 통해 인생을 논하겠다는 마음가짐도 한번씩은 의미 있지 않을까 싶다. 나 역시 이번 앨범에서 한계까지 쏟아보자는 의지로 달려왔고, 그러다 보니 정말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 생각하며 작업을 마쳤다. 이런 과정에서 얻어지는 힘겨움과 즐거움이 삶을 충만하게 만들어 줄 수도 있다. 물론 이건 철저히 개인적인 사례다.

언젠가 다시 이즘과 함께 인터뷰하게 될 날이 올 것 같다. 그때를 위해 지금, 이 순간 이승윤은 어떤 사람인지 대답해준다면.
그저 2집 앨범을 발매한 지 3일이 지난 사람이다. 아직 어떤 음악을 한다는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고, 음반 작업 이후에 음악적 정체성을 가다듬으며 계속해서 어떤 음악인으로 살아야 할지 계속해서 고민하고자 한다.

진행 : 임진모, 장준환, 임동엽, 정다열, 손민현, 한성현
정리 : 손민현
사진 : 임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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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35 배드램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서른다섯 번째 주인공은 현대 사회를 음악으로 그려내는 4인조 혼성 밴드 배드램이다.

절대적인 권위에 괜한 반항심이 피어오른 적이 있지 않은가. ‘나쁜 산양(Bad Lamb)’과 ‘난리, 대혼란(Bedlam)’, 중의를 품고 있는 밴드 배드램은 가끔씩 관성처럼 터져 나오는 이 위험한 기질을 억누르지 않는다. ‘거친 사운드를 표방하되 절대 존재를 향한 믿음을 조소하겠다’라고 말하는 이들의 핵심은 어떤 대상에 대한 맹신을 지양하고 나아가 자기 자신이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시대정신을 전파하기 위해 배드램은 오늘도 발걸음을 재촉한다. 정규 앨범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EP < Frightful Waves >(2020)를 시작으로 2년 연속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록 부문 후보에 이름을 올리고 있고, 찬란한 기세를 몰아 올해 10월 말에 정규 1집 < Universal Anxiety >를 발표했다. 물론 이번에도 쉽지 않다. 쌀쌀한 사색에 잠기게 되는 가을의 끝, 현학적 음악 저널리즘을 펼치고 있는 네 명의 현대인과 함께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다각적으로 바라보았다.

▶왼쪽부터 이동원(보컬, 기타), 편지효(기타), 김소연(베이스)

첫 정규작의 주제는 ‘보편적 불안’이다. 앨범 소개글에 ‘고립계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한다’라는 열역학 제2법칙을 적어두기도 했는데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작품인가.
이동원 : 일단 나는 문과다. (웃음) 엔트로피에서 집중한 건 무질서 상태로 돌아가려는 비가역적인 방향성이다. 시간이 지나 무질서에 수렴할 때 결국 마주하게 되는 것을 불안이라 보고, 현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감정을 ‘보편적 불안’이라는 표현으로 축약했다. SNS 아이디로 썼을 정도로 오래도록 구상해 온 개념이다.

곡 작업은 보통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편지효 : 배드램은 동원이 형과 내가 이끌어 가는 듀얼코어 시스템인데 둘의 작업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 동원이 형은 퀄리티가 조금이라도 성에 차지 않으면 일정에 관계없이 멈추는데 나는 스케줄을 연, 월, 주 단위로 짜놓고 기한에 맞춰 최선의 근사치를 만드는 편이다. 서로 다른 관점이 공존하면서 적절히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팀이 유지되고 있다.

이동원 : 누구 하나 톡 튀지 않고 정확히 4분의 1씩 각자의 방향으로 당겨서 아슬아슬한 듯하면서도 팽팽하게 밸런스가 잡혀있다. 그리고 우리 팀은 따로 앨범 기획 회의를 하지 않을 정도로 규칙이나 규율 같은 게 없다. 대부분 체계를 갖춰야 나름의 결과물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밴드 안에서만큼은 그렇지 않다.

현대 사회를 투영하는 가사만큼 이를 전달하는 언어도 눈여겨보게 된다. 대부분 영어로 부르다가도 몇몇 곡에선 한글로 메시지를 전하는데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하다.
이동원 :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은 변함없다. 어떤 음악 내에서 말의 맛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익숙한 질감에 맞춰서 쓴 편이다. 살면서 들어온 음악 대부분이 영미권 쪽이다 보니 아직 한글 특유의 분절되는 느낌을 자연스럽게 끌고 가기가 힘들다. 차차 극복해 나가야 하는 부분이다.

타이틀곡 ‘Love, lies, bleeding’은 6분짜리인데다 전주만 1분 40초다. 길이를 늘려 드라마틱한 구성을 취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이동원 :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 대부분 러닝타임이 2시간 내외인데 만약 1시간밖에 못 즐겼다면 지불한 금액이 매우 아까울 것이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소비자들이 시간을 들여서 곡 하나를 듣는데 아쉬운 감상으로 끝나지 않길 바란다. 보통 그 시간을 3~4분으로 정하겠지만 내 기준엔 5분 정도가 합당하다.

김소연 : 꼭 우리 노래라서가 아니라 배드램 음악을 들으면 5분이 넘는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뒤의 핵심을 위한 예열 과정이 아닐까. 덕분에 후반부에 더욱 폭발적인 울림이 전해진다고 본다.

편지효 : 숏폼 콘텐츠 시대다 보니 몇 초 안에 결판내야 하는 게 너무 많다. 근데 우리의 얘기는 짧게 할 수 없을뿐더러 가능하더라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정리하면 곡이 긴 이유는 하이라이트에 더 설득력을 주기 위함이다. 모든 구간이 맡은 기능을 충실히 이행한다면 6분도 지루하지 않다. 배드램의 음악은 분명 그렇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과거 ‘Blessing of Ganesha’나 이번 ‘Valley of the Pharaohs’처럼 배드램의 음악에선 종종 오리엔탈 풍의 주술 색채가 강하게 드러난다.
편지효 : 주술에 관한 트랙은 내 담당이다. ‘파라오의 협곡’은 강남역 한복판이나 미국 대도시처럼 무너지지 않는 거대 자본의 산물을 비유한 표현이다. 자본주의 관점에서 인간이 두려워하는 절대 존재를 드러내고 싶었고 힘없는 예술가가 무너뜨릴 수 없는 견고한 철옹성을 떠올렸다. 그 과정에서 처음엔 곡 제목을 메트로폴리스라고 지었는데 세련된 느낌으로 한 번 꼬아서 시각화한 것이다.

이동원 : 이런 이색적인 요소를 끌어왔을 때 하는 우리도 즐겁고 듣는 청자도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트랙 순서를 배치할 때 좋은 징검다리 역할을 해줬다. 너무나 이질적인 두 곡 사이를 윤활성 있게 이어주는 식으로 활용했다.

이동원은 앨범 아트 크레디트에 항상 이름을 올리고 있다. 어떤 방식으로 참여하고 있는 건지.
이동원 : 대부분의 인디밴드들처럼 가성비를 추구하다 보니 전문 일러스트레이터를 고용하는 방향보다는 우리끼리 해낼 수 있는 방법을 찾곤 한다. 이번 앨범 아트는 요즘 유행하는 AI가 대신 그려준 그림이다. 우리가 설정한 핵심 키워드들을 입력하면 인공지능이 나름의 계산을 거쳐 결과물을 보여주는데, 그렇게 한 30~40번을 돌려보면서 마음에 드는 조각들을 모아 포토샵으로 아트워크 콜라주를 만들었다.

기타리스트 편지효가 사운드 메이킹에서 중점을 두는 부분은.
편지효 : 확신이다. 확신이 없으면 안 치거나 치고 버린다. 확신이 있는 줄 알았는데 실상이 그게 아니었다면 스스로에게도 거짓말을 한 셈이라 화가 난다. 그래서 공연 전에 항상 내 컨디션을 알아야 하고, 그에 따른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하다. 가장 연출하기 쉬운 게 분노다. 내게 상처 줬던 사람이나 기분 나빴던 일을 억지로 생각해가면서 감정을 끌어올릴 때도 꽤 있다.

팀 색깔만 봤을 때 여성 베이시스트 김소연의 존재가 상징적으로 다가온다. 베이스의 매력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김소연 : 주관적이지만 밴드에서 여성이 제일 많은 포지션은 베이스라고 본다. 왠지는 나도 정확히 모르겠지만 톤의 대비가 아닐까 싶다. 발성 음역대가 높은 여자들이 그에 반대되는 저음에 더 끌리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왼쪽부터 이동원(보컬, 기타), 김소연(베이스), 편지효(기타), 최주성(드럼)

아쉽게도 드럼을 맡고 있는 최주성이 본업 때문에 자리에 함께 하지 못했다. 네 명 모두 일과 음악을 겸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일정은 보통 어떤 식으로 조율하는지.
편지효 : 중요한 공연이 있을 때마다 반차 혹은 휴가를 낸다. 보통 낮부터 리허설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까 불가피한 선택이다. 언제 어떤 공연이 잡힐지 몰라서 연차랑 휴가를 아껴놓고만 있다가 연말에 다 못 쓰고 지나갈 때도 있다.

본업과 음악 사이의 균형은 어떻게 잡고 있는지.
이동원 : 모든 뮤지션들이 별도의 직업을 가졌으면 좋겠다. 양질의 창작물을 꾸준히 만들기 위해선 결국 안정적인 일자리가 필요하다. 직장에서 쓰는 에너지를 최대한 아끼고 그 힘을 열심히 모아서 하고 싶은 것에 투자하려고 노력 중이다.

최주성 : 일도 중요하지만 우선 가정에 시간을 맞춰야 밴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어느 정도 금전적으로 안정이 되어야 음악 생활을 하는데 지장이 없다. 물론 지금의 내가 그렇지는 못해서 많은 애로사항이 뒤따른다.

음악적으로 영향을 준 아티스트나 앨범은 무엇인가.
이동원 : 내가 밴드에서 맡고 있는 역할 별로 나눠서 정리한다면 보컬 쪽은 미국 얼터너티브 메탈 밴드 툴의 보컬리스트인 메이너드 제임스 키넌, 그리고 하드 록 그룹 사운드가든과 오디오슬레이브의 보컬 크리스 코넬을 뽑는다. 작·편곡 면에선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라디오헤드가 최고다. 마지막으로 태도에 있어 펄 잼의 에디 베더와 브리더스의 프론트우먼 킴 딜을 음악적 부모로 삼고 있다.

김소연 : 음악 하는 사람으로서 롤 모델은 포 겟 미 어 낫츠(Four Get Me A Nots)라는 일본 밴드의 기타리스트 타카하시 치에다. 얼마 전에 오사카까지 직접 가서 공연도 보고 왔다. 요즘 내 삶의 주제는 무언가를 힘껏 하는 거다. 노래를 못 해도, 춤을 못 춰도 뭐든 최선을 다해 있는 힘껏 하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데 내가 본 사람 중에선 최고로 열심히 하는 분이라 생각한다.

편지효 : 어렸을 때 기타리스트 팻 메시니와 베이시스트 찰리 헤이든이 같이 작업한 < Beyond the Missouri Sky >를 듣고 서사를 풀어가는 화법을 배웠다. 음악은 점이 아닌 선이다. 지나온 지점들을 잇는 순간 여정에 스토리가 생기는데 이 앨범을 통해 그런 방식들을 익혔다. 연주적인 측면에선 밴 헤일런을 굉장히 좋아한다. 서커스 이상의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와중에 호흡이 예술이다. 극한의 테크닉보다 적절한 타이밍에 소리를 꽂아 넣는 게 중요하단 걸 알려준 아티스트다.

최주성 : 엑스 재팬의 기타리스트인 히데와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드러머 채드 스미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동원과 최주성은 인천 출신이다. 인천과 부평에 대한 기억은 어떻게 남아 있는지.
이동원 : 부평구민으로 지낸 지 30년이 넘어가고 있는데 부평의 자랑거리로 매년 열리는 부평 풍물 축제를 빼놓을 수 없다. 락캠프 같은 클럽들이 있는 줄 몰랐던 학창 시절에 내가 라이브 음악을 접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장소였다. 그때 또래 친구들의 공연은 물론이고 페루 출신 뮤지션들의 전통 레퍼토리도 관람할 수 있었다. 여러모로 마음이 따뜻해지는 행사다.

최주성 : 유년 시절엔 음악을 전혀 안 좋아해서 특별히 남아있는 기억은 없다. 대신 밴드 건아들의 객원 드러머였던 선생님께 드럼을 배울 때 인천이 살아있는 음악의 성지라고 말씀해 주신 적이 있고, 인천을 대표하는 드러머인 노호현 님께서도 메탈과 록의 시작점이라고 언급해 주셨다.

인천 지역이 유독 록 음악에 강한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이동원 : 동인천과 주안에서 성장한 밴드들부터 음악 감상실을 통해 퍼진 커뮤니티까지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세대임에도 선배들이 남긴 유산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주한미군이 주둔했던 부평 애스컴이다. 미국에 뉴올리언스와 멤피스가 있다면 한국 대중음악이 태동한 도시로 인천을 빼놓을 수 없다.

편지효 : 항구 도시는 기본적으로 기가 부딪히는 곳이다. 다양한 문물들이 오고 가며 섞이게 되는데 거기서 우수한 것들만 살아남아 발전하게 된다. 미8군을 중심으로 전달된 문화가 우리에게 계속 축적되면서 지금의 한국 음악이 정착할 수 있었다고 본다.

인천 출신이 아닌 김소연과 편지효는 2019 펜타포트 무대를 통해 그 열기를 느낀 적이 있다.
김소연 : 내 인생에서 제일 처음으로 관람했던 공연이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이다. 시골에서 살던 아이가 그렇게 큰 규모의 축제에 가서 즐겼던 것도 신기한데 어쩌다 보니 10년 정도 후 내가 그 무대에 올라가게 됐다. 쨍한 햇빛 아래서 관객분들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참 묘했다.

편지효 : 요즘 탁 트인 공간이 거의 없다. 그런 면에서 인천은 이런 뜻깊은 공간, 문화생활에 돈을 아끼지 않는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리고 이모 댁이 동인천 신포동 쪽이다. 인근 차이나타운을 비롯해서 그 동네엔 아직 개화기의 향기가 남아있다. 오래된 양식의 건물들을 보면서 그때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는 건 인생을 살아가고, 또 음악을 하는데 굉장한 도움이 된다.

2020년 팬데믹으로 인해 근 2년간 공연계가 많이 움츠러들었었다. 한국대중음악상 후보에도 이름을 올리면서 활동을 이어가기 좋은 타이밍이었을 텐데 아쉬움은 없었는지.
이동원 : 아쉬움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고무됐었다. 여태까지 음악 활동을 해오면서 공허함을 느낄 법한 시간들이 있었는데 그걸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우리를 따뜻하게 품어주는 사람들은 음악을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그 관심이 조금씩 모이다 보면 몸집도 자연스레 커져 있을 것이다.

어쨌든 코로나가 비교적 잠잠해지면서 공연계도 활력을 되찾고 있다. 앞으로의 활동 계획은.
이동원 :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내년 1월에 이번 앨범 쇼케이스를 단독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그래서 그 기획에 최대한 중점을 두고 있고 음원에 담긴 느낌 그대로 라이브로 전달해 드리기 위해 열심히 준비 중이다. 연말에 클럽 공연도 많이 준비되어 있고 특히 12월 30일엔 부평아트센터에서 공연을 한다. 내 홈타운에 함께 살고 있는 동네 이웃분들께서 많이 찾아주셨으면 좋겠다.

앞으로 배드램이 들려줄 이야기는 어떤 내용으로 채울 예정인가.
이동원 : 저널리즘의 생명은 시간, 즉 현재에 달려 있다. 물론 우리가 따끈따끈한 특종을 주제로 앨범을 낼 수는 없으니 차기작이 발매될 시점에 우리 눈으로 바라본 세상을 그리게 될 것 같다.

편지효 : 다음 앨범을 언제 발표할지는 우리도 모르기 때문에 사회에서 무슨 일이 발생하는지 지켜보면서 떠오른 단상들을 차곡차곡 모아둘 예정이다.

진행: 정다열, 장준환, 염동교, 손민현
정리: 정다열
사진: 장준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