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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임진모 인터뷰

MBC 창사 60주년 특별 기획 라디오 프로그램 < 유행가, 시대를 노래하다 >는 임진모 진행으로 2021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매일 한 곡씩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한 유행가를 소개했다. 총 365곡이다. 1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유행가 하나를 통해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를 짚는 의의를 넘어 시대와 세대의 벽을 허물고 원활한 교류를 자아내는 순환의 장 역할을 수행했다.

그와 동행한 많은 청취자들이 감사와 공감을 보냈다. 한국방송협회 주관 ‘작품상’과 ‘이달의 PD 상’ 부문에서의 수상 소식 역시 임진모만의 다채로운 시각과 해석으로 세대 간 접점을 형성한 결과일 것이다. 어느 쌀쌀한 2022년의 초입, 서울 강서구에 위치한 그의 자택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꾸준하게 발자국을 남긴 < 유행가, 시대를 노래하다 >에 대한 감회를 나눴다.

지난 12월 31일, < 유행가, 시대를 노래하다 >가 365회의 대장정을 끝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본인이 주체적으로 진행하신 프로그램인 만큼 소회가 남다를 것 같아요.
사실 1년 내내 하루에 한 곡씩 한다는 게 재밌겠다 싶었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작업이더군요.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일이기도 했기 때문에 지금은 후련한 느낌도 들고 자랑스럽기까지 합니다. 뭐랄까, 시원섭섭하다고 할까요.

방송국 측에서 선생님을 진행자로 모신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더 매력적인 인물도 많겠지만, 아무래도 365곡이라는 범위가 굉장히 넓을뿐더러 해방 이후부터 오늘날까지의 노래라는 상당히 광범위한 범주이기 때문에 제가 그나마 적합하겠다고 판단한 것 아닐까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조금 전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일이라고 하셨는데요.. 어떤 의미일까요.
평론가라는 타이틀이 주어진 저에게는 국내 음악사를 한번 정리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적 정리와 관련한 제 롤 모델이 < 혁명의 시대 >, < 자본의 시대 >, < 폭력의 시대 >를 쓴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인데요, 어디를 가도 얘기하지만 대중음악의 덩치를 크게 통사, 작품(싱글과 앨범), 인물 세 가지로 분류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 유행가, 시대를 노래하다 >를 통해 그중 하나인 노래 즉 ‘작품’이 해결된 거죠. 이렇게 끝맺음 하고 나니 부분이긴 하지만 개인적인 뿌듯함이 있습니다.

365곡의 선정 작업 과정이 궁금합니다.
처음에는 조그맣게 선정위원회를 만들어 볼까도 고려했어요. 하지만 담당자인 MBC 라디오 하정민 PD는 진행자인 제 판단에 의한 선곡이 프로그램 제작에 가장 합리적일 거라는 의견을 표했습니다. 5분가량의 짧은 시간이니 부담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죠. 어찌 보면 저의 시각과 해석을 존중해 준 셈입니다. 이 대목에서 하PD께 감사드리고 싶은데요. 평면적인 원고를 입체적 라디오 프로그램으로 만들기 위해 온갖 자료를 다 찾아 곡 해설에 다큐적 역사성을 부여해 줬습니다.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죠.

그와 먼저 방향과 관련해 큰 틀을 잡았습니다. 우선 ‘유행가’라는 프로그램의 타이틀에 집중했어요. 한때 유행가라는 개념을 놓고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흔히 대중음악과 유사어로 사용되지만 명곡을 포함하는 대중음악이란 용어와 달리 유행가에는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노래가 꼭 포함되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예술적으로 미흡하더라도 특정한 시대 속에서 집단이나 대중과의 접점이 이뤄졌다면 유행가 아닐까요.

또 하나 롤링스톤, 빌보드와 같은 음악 매체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으나, 대중음악과 관련된 리스트나 앙케트는 흔히 ‘100곡’틀에 갇히곤 합니다. 그런 점에서 365곡은 수적으로도 많지만 오랜, 고정된 틀로부터 탈피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보통 어떤 조사이든 간에 평론가와 음악 관계자가 주도하거나 참여하게 되면 대부분 예술적으로 뛰어난 명곡과 수작들이 뽑히곤 합니다. 이러한 명곡들 사이에는 ‘저주받은 걸작’이란 수식이 웅변하듯 대중의 호감을 창출하지 못한 경우가 분명히 있습니다. < 유행가, 시대를 노래하다 >는 가능한 한 그런 명곡보다도 대중들이 오랫동안 흥얼거리고 사랑을 보낸 곡, 바로 ‘리얼’ 유행가들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예술성보다는 프로그램 타이틀인 ‘시대’성에 기준을 둔 셈이죠.

그럼에도 365곡은 양이 방대합니다. 힘들지는 않으셨나요.
전권을 가진 입장에서 부담이 없지는 않았죠. 그럼에도 모르는 노래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건방졌나요. (웃음) 365일 동안 진행되는 프로그램인 만큼 한 해를 기준으로 잡고 방영 날짜와 시점에 부합한 곡을 하나씩 찾아 나갔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있고 각각 철에 맞는 노래가 있죠. 여름 시즌 환영받는 쿨의 ‘해변의 여인’이나 걸그룹 f(x)의 ‘Hot summer’ 그리고 가을철 하면 떠오르는 김상희의 ‘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과 패티김의 ‘가을을 남기곤 간 사람’이 그렇습니다. 4.19 혁명, 두 차례의 오일쇼크, 5.18 광주항쟁, IMF 같은 역사적 사건도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겠죠.

아쉽게 빠진 곡이나 사정상 실리지 못한 곡도 많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모든 곡을 다루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방송국 관련 문제로 등장하지 못한 아티스트도 있고, 친일 전력이 있는 음악가의 곡도 대부분 제외했습니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을 거쳐 1960년대까지 맹활약한 작사가 반야월과 톱 가수 남인수는 친일인명사전에 올라있지만 그들 작품이라고 다 빼면 시대적 유행가를 고르기가 정말 힘들지요. 그러니까 중요한 역사적 맥락을 지닌 곡들은 예외로 한 거죠. 그래서 종전 후 부산에서 서울로의 환도라는 시대적 배경을 담은 남인수의 곡 ‘이별의 부산 정거장’은 리스트에 들어갔죠. 방송사에서 금지했거나 사실상 방송을 제한한 빅뱅(‘거짓말’), 룰라(‘날개 잃은 천사’), 김건모(‘핑계’, ‘잘못된 만남’), 휘성(‘안되나요’)의 노래들은 유행가에서 빠졌습니다. 하지만 출판계약이 이뤄진 상태에서 책으로 풀어낼 때는 이들 노래를 살려내려고 합니다. 음악사적으로 중요한 존재들이니까요.

자료 조사에 있어 힘드신 부분은 없었나요.
물론 지금 정보도 잘만 조합하면 좋은 자료가 될 수 있을 테지만, 해외에 비하면 많은 자료들이 유실된 것만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전설적인 옛날 뮤지션들이 상당수 돌아가셨어요. 따라서 지금은 기존 남아있던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워낙 부족한 탓에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아쉬운 게 하나 있다면 음반에 제작 발표 연도만 표시가 되어있어도 어느 정도 시점이 정리가 되는데 그게 없거든요. 이전과 이후 자료나 가수를 비롯한 관계자들의 기억을 조합해 추정해야만 한다는 거죠.

여러 시간대를 번갈아 여행하다가도, 가끔은 옛 음악만 나오는 주간이 있었습니다. 방영 순서는 어떤 기준으로 결정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기본적으로 순서는 다양하게 하려 했지만, 일부러 비슷한 연대의 노래를 겹치게 배치한 적이 분명히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농 시대를 이야기할 때라던가, ‘전선야곡’과 ‘단장의 미아리 고개’ 같은 6.25 전쟁 관련 노래를 다룰 때가 그랬죠. 젊은 친구들에게 재미가 반감될지라도, 창사 특집이라는 명목 상 역사적인 측면도 강조했어요.

짧은 러닝타임이 지닌 장단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방송에서의 5분은 생각보다 깁니다. 다만 < 유행가, 시대를 노래하다 >의 경우, 곡에 대한 설명과 역사적 사료를 포함해 약간은 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생각보다 노래가 나갈 시간이 적습니다. 대개 곡의 2절이 시작할 즈음 방송이 끝나곤 하죠. 예를 들어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처럼 90년대 이후 발라드들은 기본적으로 5분이 넘습니다. 노래를 좋아하는 청취자들 누구나 완곡을 듣고 싶어 하기에 지적을 많이 받은 부분이기도 합니다. 길거리에서 만난 한 60대 여성은 저를 보더니 대뜸 “음악에 관계하시는 분이 어떻게 노래를 그렇게 잘라요?”라며 호통을 치더군요.

종합적인 수치와 밸런스를 통해 산출된 이 지표에서 우리는 단순한 개별 곡의 나열이 아닌 대중음악사에서의 중요도와 영향력을 일견 엿볼 수 있다. 조사 결과 365개의 곡 가운데 최다 선정된 가수는 조용필(‘단발머리’, ‘돌아와요 부산항에’, ‘친구여’, ‘여행을 떠나요’, ‘킬리만자로의 표범’, ‘Bounce’)로 총 6곡이 선정되었다. 다음으로는 서태지와 아이들(‘Come back home’, ‘하여가’, ‘난 알아요’)와 BTS(‘피 땀 눈물’, ‘봄날’, ‘Dynamite’), 현인(‘신라의 달밤’, ‘럭키서울’, ‘굳세어라 금순아’)이 3곡으로 동률을 이뤘다.

최다 선정 작곡가의 타이틀은 50년대부터 60년대까지 많은 히트 유행가를 남긴 박춘석(11곡)이 차지했으며 그 뒤를 이은 작곡가는 40년대 후반에서 50년대 초까지 대표적 유행가를 독점적으로 써낸 박시춘이었다. 작사가의 경우 박시춘 시대부터 많은 대중가요의 노랫말을 쓴 레전드 유호(8곡)와 가사의 명인 반야월(7곡)의 이름이 차례로 등장했다. 무엇보다 아티스트, 작곡, 작사 세 가지 전 부문에 걸쳐 공히 상위권에 랭크된 인물은 한국 록의 영원한 대부 신중현이었다.

최다 선정자로 조용필이 뽑혔습니다. 조용필이라는 존재를 대중음악의 관점에서 어떻게 정의하시나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해방 이후의 최고 가수죠. 범접할 수 없는 ‘가왕’ 타이틀답게 대중에게 사랑받은 곡이 무척 많습니다. 사실상 안정애의 ‘대전 블루스’와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도 조용필의 지분이 큰 곡입니다. 국내 앨범 예술의 확립은 조용필의 공헌이 큽니다. 과거에는 타이틀 이외의 곡은 조명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하지만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가 수록된 1980년 < 조용필 1집 >은 수록곡 전곡이 히트하면서 대중이 앨범 단위의 가치를 의식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구축했습니다. 물론 조용필은 앨범뿐만이 아니라 단일 곡으로도 최강자였지요. ‘오빠부대’나 ‘가왕’이라는 수식은 이후가 아니라 그가 활동할 당시인 1980년대에 이미 완성된 단어인 거죠. 과거 < 우리 대중음악의 큰 별들 >에서 조용필은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영구 결번 1번이라는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솔직히 하다 보니 6곡도 부족했어요. 더 들어가야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PD와 공유했으니까요.

또 조용필 노래는 시기적으로 고르게 분포되어 있던데요…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나온 1975년부터 ‘Bounce’가 유행한 2013년까지 간격이 무려 38년입니다. 그동안 꾸준하게 히트곡을 창출한 것 자체가 독보적 펀치력 아닐까 싶어요. 심지어 ‘Bounce’는 가벼운 일렉트로니카, ‘Hello’는 힙합을 접목했습니다.

작곡가에서 박춘석과 박시춘이, 그리고 작사가 중에서는 유호와 반야월이 선두에 있습니다. 독보적인 결과만큼이나 이들의 음악이 사랑받을 수 있던 비결이 무엇일까요.
해방 직후의 음악 시장은 강자가 싹쓸이하는 시대였습니다. 그야말로 빼어난 재능을 가진 천재적 소수가 모든 작업물을 독점하던 시기였죠. 그런 의미에서 박춘석과 박시춘, 그리고 유호와 반야월을 빼고는 과거 음악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지금이랑 비교해 보면 현재는 굉장히 많은 가수가 활약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선 박춘석의 작법은 클래식의 영향 하에 있습니다. 그가 작곡한 박재란의 ‘밀짚모자 목장 아가씨’를 들어보면 알 수 있듯, 대중의 감성을 선율로 완벽하게 표현한 작곡가죠. 박시춘은 기타리스트 출신으로 감성적 멜로디가 특징입니다. ‘신라의 달밤’, ‘낭랑 18세’, ‘봄날은 간다’를 비롯해 리스트에 수록되지 않은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 등 유명한 곡을 많이 남겼습니다.

놀랍게도 모든 분야의 상위에 오른 음악가는 신중현입니다.
한국 록의 대부, 한국 대중음악의 진정한 시작이라는 오랜 수식이 말해주는 것 아닐까요. 작곡과 작사는 물론, 가수로도(에드포 때의 곡 ‘빗속의 여인’, 신중현과 더 멘 때의 ‘아름다운 강산’, 엽전들 때의 ‘미인’) 상위권에 존재하니 말이죠. 어떤 면에서 보면 대중음악의 기여도가 제일 높은 음악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재지요. 1970년대를 맞이해 포크 음악의 태동이 시작하면서 김민기, 이장희, 한대수와 같은 싱어송라이터가 대거 등장했는데요. 이때 전문적인 작사 작곡 집단에서 벗어나 스스로 곡을 만들어 노래하는 싱어송라이터 물결의 시작을 알린 인물이 바로 신중현입니다.

진행하면서 유독 인상 깊었던 곡이 있을까요.
녹음을 하던 도중 ‘아, 이게 유행가구나!’라는 깨달음을 내려준 곡이 바로 정난이의 ‘제7광구’입니다. 요즘 친구들은 모를 수도 있겠지만 과거 1973년과 1979년에 오일 쇼크가 터져 전 세계 경제가 얼어붙은 시기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석유 한 방울 안 나오는 상황이었기에 피해가 막심했죠. 그러던 어느 날 일본과 협조를 맺고 제7광구에서 석유 시추를 하게 되면서 국가적으로 산유국이 될 수도 있다는 부푼 희망을 갖게 됩니다. 이를 담은 노래가 바로 ‘제7광구’입니다. 유행가란 단순히 유명한 것을 넘어 ‘시대성’과 관련한다는 선정 기준을 제공해 준 곡입니다.

시대성의 예시를 또 하나 들자면 코미디언 서영춘이 불러 전국적인 유행을 가져온 ‘서울 구경(시골영감 기차놀이)’이라는 번안곡이 있습니다. 오늘날 랩의 효시로 언급되는 곡이기도 하죠. ‘시골 영감 처음 타는 기차놀이라 / 차표파는 아가씨와 실갱이하네’라는 가사에는 해학이 담겨있지만, 한국이 급격한 공업화와 도시화를 겪으면서 생긴 충돌을 다루는 곡이기도 합니다. 어른들의 새로운 문화에 대한 두려움이 표현된 거죠.

선정의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습니다. 만화 주제가가 수록되기도 했어요.
실제로 유행가에는 세대적인 차이가 존재합니다. 지코의 ‘아무노래’가 SNS 시대를 빛낸 빅 히트송임에도 어르신들은 잘 모르는 것처럼요. 하지만 이런 경우도 유행의 범주에 넣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KBS에서 방영한 < 날아라 슈퍼보드 >의 OST인 김수철의 ‘치키치키 차카차카’는 어린아이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 노래입니다. 산울림의 ‘산 할아버지’도 그런 경우죠. 특히 ‘산 할아버지’는 가사가 정말 이쁜 곡이죠. 당시 산울림이 아이들을 위한 대중음악이 없는 게 안타까워 동요 앨범을 세 장 연속으로 내는데요. 3형제 중 둘째 김창훈이 쓴 곡입니다. 최근에는 아이콘의 ‘사랑을 했다’가 유치원생과 초등학교 저학년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죠.

그런 의미에서 요즘 유행하는 곡은 세대 간의 교두보 역할보다는 오히려 분리의 느낌이 강한 것 같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대중음악의 주인은 ‘Young Generation’이지요. 1950년대의 남인수, 고복수, 황금심이 활약하던 시절 기록을 보면 수요층이 전부 20대들이었어요. 1980년대에는 조용필과 전영록 같은 가수가 틴 마켓을 만들어내고 88서울올림픽을 전후해 김승진 박해성 안혜지 이지연과 같은 ‘틴에이저 가수 집단’이 부상하면서 10대가 위력을 행사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옛날에는 20대를 중심으로 각각 나이가 많은 어른과 적은 아이로 퍼져나갔다면 지금의 유행가는 세대 간 확대로 이뤄지기는 어려운 시점입니다. 음악 자체가 확장성보다는 특정 세대나 더 정확을 기하자면 팬덤을 겨냥해 만들어지는 추세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는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무엇보다 대중가요도 역사가 오래되면서 어른들이나 아이들이나 들을 음악이 정말 많아졌어요. 옛날에는 민요밖에 없었죠.

그러고 보니 리스트 가운데 번안곡도 굉장히 많습니다.
‘산 할아버지’와 ‘사랑을 했다’가 어린 친구들의 사랑을 받은 이유는 아무래도 멜로디가 쉽고 개사에 용이하다는 점이죠. 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 일명 ‘노가바’는 옛날부터 꾸준히 이어져 온 현상입니다. 과거에는 상대적으로 어려운 팝송을 우리말로 바꿔 소화하려는 의도가 컸어요. 보니 엠의 ‘Rivers of Babylon’이나 올리비아 뉴튼 존의 ‘Physical’ 같은 곡들이 그렇습니다. 사실 365개의 곡 중 외국 원곡이 10곡이나 됩니다. 캔의 ‘내 생에 봄날은…’과 박효신의 ‘눈의 꽃’은 일본 곡이 원곡이고, 차중락의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은 오리지널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Anything that’s part of you’입니다.

물론 번안곡과 관련해 1970년대 초반 건전가요 노래 붐을 일으킨 전석환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미치 밀러(Mitch Miller)를 모델 삼아 합창의 개념을 가져와 전 국민이 다 부를 수 있는 노래로 번안해 보급하며 ‘싱어롱(Sing-along)’ 즉 ‘다 함께 노래 부르기’ 문화를 전파한 인물이죠. 당시 군사독재 시대에 짓눌려 있는 분위기 속 활기를 불어넣으며 포크 운동으로 연결시키는 데도 공헌하기도 했습니다. 전석환이 번안한 유명한 노래가 바로 교실에서 부른 ‘그리운 고향’이죠. 비치 보이스가 끄집어내 세계적으로 알린 ‘Sloop John B’를 번안한 곡입니다. 서수남, 하청일의 ‘동물농장’도 해리 벨라폰테의 ‘I do adore her’를 번안한 곡인데 냉정하게 비교해 보면 사실상 반은 창작곡이라 할 정도로 서수남의 아이디어가 빛나지요. 그리고 리스트에 수록되지는 않았지만 번안 곡 중 오정선의 ‘마음’은 참으로 창의적인데요. 한번 들어 보기를 바랍니다.

번안 곡에 대해 우호적 시선이신데요.
저는 번안 작업을 통해 현재 K팝이 세계적으로 상승할 수 있는 내공을 쌓았다고 규정합니다. 약소국 시절부터 영미 팝과 이탈리아의 칸초네와 프랑스의 샹송 등, 전 세계 각국의 민요와 문화를 흡수하고 받아들인 것이 지금 글로벌 성공의 자양분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요.

시기적인 배분에 있어서도 신경을 쓰셨나요.
하정민 PD와 합의를 본 부분이 통상적인 앙케트를 보면 옛 음악에 비해 요즘 음악이 홀대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를 최소화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시대별 비율을 신경 써서 해방 이후 음악부터 오늘날 사랑받는 음악까지 골고루 다루고자 했죠. 40-50년대 곡이 33곡, 60년대 곡이 42곡, 70년대 60곡, 80년대 96곡, 90년대 72곡, 2000년대 43곡, 2010년대 19곡의 분포였습니다. 70년의 세월을 관통한 겁니다. 마치 한 사람의 일생과도 같은 세월 동안 우리 대중음악이 이렇게 길게 호흡해왔구나 싶습니다.

최근 음악을 다룬 이유는 세대 접점의 측면에서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물론 리스트를 보면 1980~1990년대 곡이 제일 많은데, 이는 88올림픽을 기점으로 엄청난 장르가 쏟아져 나오면서 시장이 활성화되고 음악 산업의 규모가 커진 것을 이유로 들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황금기인 거죠. 그때는 국민 모두가 라디오로 음악을 듣고, 레코드점으로 가서 음반을 구입하던 시기였어요.

그런 의미에서 현재 국내 대중음악에 대한 소견이 궁금합니다.
누구나 다 똑같이 얘기하겠지만 지금의 글로벌 시장에서 K팝이 날갯짓할 수 있던 것은 어떤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미 8군 시절부터 등장한 모든 음악이 혼합과 겨루기를 거쳐 이어진 것이 지금의 세계적인 K팝입니다. 한국의 음악적 자산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 같이 이제 아이돌만이 아닌 다른 한국적인 음악들도 소개할 수 있는 단계에 진입한 거죠. 또한 빛과 소금, 김현철의 음악이 시티팝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번 소환되어 젊은이들에게 낡은 음악으로 들리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나라가 그 당시에도 미지의 영역에 도전하던 실험의 흐름이 명백히 있었다는 증거겠죠.

흥미롭게도 첫 곡이 BTS의 ‘Dynamite’고, 마지막은 브레이브걸스의 ‘롤린 (Rollin’)’이 장식했습니다. 이 두 곡을 양 끝으로 선정한 이유가 있을까요.
각각 시작과 끝의 의미를 상징합니다. < 유행가, 시대를 노래하다 >의 시작은 어느 누구보다도 세계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BTS의 첫 빌보드 넘버원 송인 ‘Dynamite’를 골랐고 마지막은 역주행의 신화를 기록한 ‘롤린 (Rollin’)’을 골라 많은 사람들이 상황이 어렵더라도 버틸 수 있는 힘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전 늘 강조하죠. 잘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버티는 것이라고요.

< 유행가, 시대를 노래하다 >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었다면 무엇일까요.
이 프로그램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염두에 둔 주제가 바로 세대와의 화합입니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현인과 박재란의 음악을 알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어른들은 요즘 애들의 음악은 어렵다고 하기도 하죠. 그런 의미에서 서로가 이런 음악이 과거에 존재했고, 지금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일 기뻤던 건 청취자들이 보내준 반응이었어요. 어르신들에게 ‘요즘 노래를 자꾸 들어보니 좋다’고, 그리고 젊은 친구들로부터 ‘우리나라 대중음악이 이렇게 역사가 깊은 줄 몰랐다’는 문자를 받았습니다. 음악은 달라질 수밖에 없지만 함께 공감할 수는 있다. 결국 세대 화합의 가장 훌륭한 재료가 음악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절감합니다.

만약 먼 훗날 후세가 또 한 번 유행가를 선정한다면 지금의 리스트 또한 많이 달라질까요.
그럼요. 시대는 흐르면서 반드시 일을 저지릅니다. (웃음)

약 한 시간 반가량의 치열한 인터뷰 끝에도 열정적인 대답을 거듭한 임진모의 입가에서는 행복의 미소가 그치지 않았다. 음악평론가의 길을 택한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 순수한 초심을 유지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인터뷰를 진행한 이들 역시 피곤함을 잊은 채 어느덧 그의 흥미로운 에피소드와 생생한 설명을 경청하고 몰입해 있었다. 그는 마치 음악이라는 불변의 매개체를 통해 다른 세대와 온도를 공유하고, 살아 숨 쉬는 감정을 느낄 수 있어 감사하는 듯 보였다.

< 유행가, 시대를 노래하다 >로 큰일을 끝낸 직후지만 그의 손은 좀체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인다. 본문에서도 미루어 볼 수 있듯 국내 대중음악에서 ‘노래’의 결을 매끄럽게 정리한 그는 ‘통사’와 ‘인물’에도 도전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어쩌면 그가 나이에 개의치 않고 음악평론가의 직함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칠 수 있던 것은 실력뿐만이 아닌 이러한 아가페적 열정에 기인하는 것 아닐까. 임진모에게 필요한 것이 음악이라 하지만, 음악 역시 그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다.

인터뷰 : 김도헌, 박수진, 손기호, 임동엽, 장준환
정리 : 장준환
촬영 : 임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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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 필자를 모집합니다.

안녕하세요. 웹진 IZM 편집장 장준환입니다.
IZM에서 신규 에디터를 모집합니다.

1999년부터 2021년 지금까지 매주 토요일마다 IZM은 오프라인 소모임을 통해 대중음악의 역사와 이를 글로 풀어내는 과정을 심도 있게 배우고, IZM 기획에 대한 의견을 나눠왔습니다.

다가오는 2022년을 맞아 IZM은 콘텐츠 제작 및 기획 생산에 힘을 쏟아주실 필자분들을 새로이 모집합니다.

보다 깊이 음악을 배우고, 음악을 사랑하며 음악으로 콘텐츠를 생산하고 소통하고자 하는 분들께 IZM 필자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모집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출 서류
자유로운 자기 소개서
+ 최근 3개월 내 발표된 앨범 리뷰 1편 (A4 한 장 분량)
+ 최근 3개월 내 음악 이슈와 관련된 칼럼 1편 (A4 한 장 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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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수 및 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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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
1차 서류전형
2차 면접 및 음악 테스트

1차 서류전형에 합격하신 분들께는
개별 연락을 통해 2차 면접 일정과 장소를 공지해드립니다.

IZM 에디터 분들께서는 최종 합격 후 3개월의 수습 기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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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 공식 메일 : webzineiz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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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 스웨츠(Pink Sweat$) ‘Pink Planet’ (2021)

평가: 3/5

미국의 R&B 싱어송라이터 핑크 스웨츠(Pink Sweat$)는 첫 시작부터 성공적이었다. 2019년 발매된 데뷔작이자 첫 번째 미니앨범 < Volume 1 EP >를 발매하자마자 수록곡인 ‘Honesty’의 뮤직비디오 조회 수가 무려 4,589만 회를 기록, 스포티파이 바이럴 차트에 입성하며 국내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 Pink Planet >은 그의 첫 번째 정규 앨범이다. 그의 정체성인 분홍빛으로 사방이 칠해진 도시를 건설한다.

핑크 스웨츠는 이름처럼 분홍색 옷을 즐겨 입고, 앨범 재킷과 뮤직비디오 곳곳에도 분홍빛을 더한다. 언뜻 분홍색은 시각적 요소로 음악과는 무관해 보이지만, 단순히 캐릭터 구축을 위해 색채를 활용하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세상은 너무 어둡다. 서로에게 조금만 더 친절하면 얼마나 오래 살 수 있을지 상상해봐.“라고 이야기하듯, 핑크 스웨츠는 음악을 통해 자신이 받은 긍정적 에너지를 다시 표출하고자 한다. ‘너를 위해서라면 어떤 최악의 일도 한다’고 말하던 ‘At my worst’나 사랑을 믿지 못하는 연인에게 확신을 이야기하는 ‘Honesty’의 정서가 그렇다. 

앨범은 다양한 채도와 명도의 분홍빛 사이를 자유롭게 채색한다. 색깔의 확장이자, 역량의 증명이다. 세 장의 미니 앨범과 한 장의 정규 앨범 사이 간극은 좁아 보이지만, 분명 이전의 것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이전의 것이 아니기도 하다. 미묘한 변화가 핵심이다. 어쿠스틱 기타 기반의 기조를 이어가면서도 사운드 소스의 폭이 넓어졌다. 가벼운 질감의 오르간과 합창으로 가스펠과 알앤비를 적절히 조합해낸 ‘Pink city’가 그 예. 진득한 6/8박자의 전형적인 알앤비에 스트링을 더한 ‘Heaven’도 마찬가지다. ‘내가 너와 함께할 때 마치 천국같이 느껴져’라는 가사로 로맨스를 더한다. 

미니앨범 < The Prelude >에서 보였던 일렉트로닉 성향 또한 유지한다. 나지막한 속삭임이 담긴 ‘Interlude’로 분위기 전환을 유도한다. 강렬한 신시사이저가 시작을 알리는 ‘Beautiful life’, 그루브 있는 비트의 힙합 알앤비 ‘Pink money’‘, 묵직한 신스 베이스로 감각적인 리듬감을 선사하는 ‘Icy’는 따지자면 채도 짙은, 강렬한 분홍빛에 가깝다. 밝고 잔잔한 어쿠스틱에 한정되지 않고 본인의 색깔 안에서 영역을 넓혀간다.

기분 좋은 음향 사이로 그려내고자 하는 건 앞서 언급했듯 긍정의 언어, 분홍빛 에너지다. ‘When we are ninety-two, the same as seventeen(우리가 92살이 될 때에도, 17살일 때와 같을 거야).’라는 사랑의 순수가 담긴 ‘17’, ‘Just know forever, I’ll be there for you(이것만은 평생 알아줘, 내가 네 곁에 평생 있을 거라는 걸)’라는 고백의 ‘Lows’는 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사랑의 정의다. 잠시라도 마음 편히 사랑을 노래할 수 있는 핑크 스웨츠의 낙원이 바로 < Pink Planet >이다.

-수록곡-
1. Pink city
2. Heaven

3. Paradise
4. Magic
5. So sweet
6. Chains
7. Interlude
8. Beautiful life
9. Pink money

10. At my worst
11. 17
12. Lows

13. Not alright
14. Give it to me
15. Icy
16. Pink family
17. At my worst (Feat. Kehlani)
18. Hone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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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10곡 특집 Feature

라디오 PD들의 ‘내 인생의 음악 10곡’ – #20 이선아 PD

이즘이 2021년 개설 20주년을 맞아 지난해부터 특집 기획으로 연재해온 라디오 방송 프로듀서 20인의 < 내 인생의 음악 10곡 > 이 어느덧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마친다니 참 아쉽습니다. 15년 이상 이력의 방송 프로듀서들이 전한 신선한 선곡과 해설이 모처럼 독자들의 관심을 모으면서 호평이 이어졌습니다. 원고 작성에 애쓰셨을 PD 분들에게 다시 한 번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마지막 스무 번째는 SBS 이선아 프로듀서가 장식해주셨습니다.

‘그가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 필요했던 유일한 증거는 음악이었다’. 오래전 커트 보니것의 에세이를 읽다가 마주친 문구였는데, 여태껏 이보다 음악의 신비로운 힘을 근사하게 표현한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강산이 두 번 바뀌어도 변함없이 라디오PD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듣는 귀가 뛰어나지도 않고, 내세울 만한 음악적 식견 따위는 없다. 다만, 한 가지 ‘부심’이 있다. 음악 안에서 일하는 나는 보통 직장인보다 훨씬 더 자주, 더 즐겁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신의 존재’를 느끼며 살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 < 사운드 오브 뮤직 > ‘Do re mi’
정신분석 상담을 시작할 때  ‘생애 최초의 기억이 뭔가요?’ 라는 질문을 던진다고 한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기억의 퇴적층을 주의 깊게 살펴보게 하는 준비운동 같은 질문이다. 비슷한 방식으로 음악에 대해 자문해봤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Do re mi는 유년시절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마들렌 같은 곡이다. TV에서 처음 ‘사운드 오브 뮤직’을 봤는데, 유치원에서 배운 동요가 알아들을 수 없는 꼬부랑 언어로 흘러나와 큰 충격을 받았다. 게다가 마리아 수녀와 일곱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화음은 처음 들어보는 종류의 아름다움이었다.

영화가 끝난 후 어머니에게 도레미송이 다시 듣고 싶다고 떼를 쓰자, 어머니는 방송국에서 영화를 틀어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타이르셨다. 하염없이 기다렸지만 허사였다. 많은 시간이 흐른 뒤 OST를 선물 받고 나서야 이 노래를 질릴 때까지 들을 수 있었다. 음악이란 쉽게 얻을 수 없는 귀한 대상이라는 인식을 심어준 최초의 경험이었다. 음악이 흔해 빠진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지만, 이 노래를 방송에 틀 때마다 그 첫 마음이 떠올라 기분이 풍선처럼 날아오른다.

Nirvana ‘Come as you are’
또 너바나야? 하시겠지만, 너바나를 빼고 간다면 스스로를 속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너바나의 명반 < Nevermind >에 수록돼 있는 ‘Come as you are’는 내 기억 속에 ‘불가항력’이라는 단어로 저장돼 있다. 아무리 뿌리치려 해도 더 깊숙이 빠져드는 개미지옥 같은. 10대 시절, 주말이면 MTV Asia 케이블 채널을 틀어놓고 각종 뮤직비디오를 섭렵하는 데 몰두했다. 그러다 너바나의 언플러그드 공연을 보게 됐다. ‘Come as you are~’ 떡 진 머리의 커트 코베인이 쇳소리로 내뱉는 첫 소절을 듣는 순간, 너바나의 음악으로부터 영영 도망칠 수 없음을 직감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후렴구 ‘I don’t have a gun~’을 따라 부르면서 보냈는지 모른다. 이 노래는 침대에 대자로 누워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불러야 제맛이었다. 니체가 ‘근육으로 음악을 듣는다’고 했는데, 이 음악이 딱 그랬다. 음악이 몸을 통과할 때, 감정은 물론 표정, 자세, 생각, 태도까지 바꿀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깨달았다.

패닉 ‘기다리다’
불온하고 어두운 앨범 재킷 디자인에 끌려 패닉 2집을 사서 들은 이후, 패닉의 음악에 빠져들었다. 1집 앨범은 뒤늦게 샀는데, 1집에 비해 2집의 완성도와 실험정신이 업그레이드된 걸 확인하고선 팬으로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1,2집을 통틀어 가장 많이 들었고, 기회가 날 때마다 선곡하는 노래는 1집의 ‘기다리다’이다. 단순한 기타 반주에 이적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차분하게 톤 다운 되어 ‘익숙해진 손짓과 앙금 같은 미소만 희미하게 남은’ 기다림을 읊조린다. 이 노래는 언제 들어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과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장소를 그리워하게 되는 묘한 경험을 안겨준다.

이 세상엔 매력적인 뮤지션이 넘쳐난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믿고 듣는 뮤지션’이 된다는 건 결코 평범한 관계가 아니다. 이적은 내게 그 평범치 않은 곁을 내준 아티스트다. 얼마 전 이적의 새 앨범 <흔적>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으면서, 그와 동세대인으로 함께 나이 들어갈 수 있어 참 고맙다는 생각을 다시금 했다. 새 앨범에 수록된 ‘준비’라는 곡을 듣고선 내 속을 들켜버린 느낌이었는데, 푸른 마음으로 들었던 ‘기다리다’에 대한 세월의 화답 같기도 해서 혼자 서글퍼졌더랬다.  

어떤날 ‘하늘’
신입 PD 시절, 한 선배가 어떤날을 좋아하냐 물었다.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고 답했더니 선배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훌륭한 음악이니 꼭 한번 찾아 들어보라 했다. 나는 음반실에서 CD를 찾아 방송에 트는 마지막 세대였고, 음반실은 참새 방앗간 같은 공간이었다.

그날도 음반실에서 퇴근길에 빌려 갈 앨범들을 뒤적거리고 있었는데, 어떤날 1집 < 1960ㆍ1965 >가 눈에 들어왔다. 선배의 추천이 생각나 얼른 대출을 신청했고, 지금은 사라진 30번 좌석버스 안에서 이어폰을 끼고 1번 트랙 ‘하늘’을 들었다. 마지막 트랙인 ‘오후만 있던 일요일’까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조동익과 이병우가 들려준 세계는 맑고 섬세했다. 완전히 새로운 감수성의 발견!

누구에게나 원형의 음악이 있다. 특정 감성에 눈뜨게 하고, 취향의 밑그림을 그리는 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음악 말이다. 2001년 어느 겨울날 ‘하늘’이 활짝 열어젖힌 감수성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장필순, 토이, 재주소년, 루시드폴, 옥수사진관, 언니네이발관, 브로콜리너마저, 팻 매스니(팻 매스니가 어떤날 멤버들에게 영향을 준 것이겠지만, 내겐 순서가 뒤바뀌어 있다) 등 수많은 아티스트와 연결을 가능케 해주었다.    

U2 ‘I still haven’t found what I’m looking for’
U2의 정규 5집 < The Joshua Tree >는, 내게 U2의 세계를 알려준 동시에 록음악을 본격적으로 찾아듣게 한 기념비적인 음반이다. (이 음반이 발매된 지 10년 후인 1997년에서야 처음 듣게 되었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U2가 드디어 2019년 첫 내한공연을 했다. 그것도 < The Joshua Tree > 음반 발매 30주년을 기념하는 콘셉트로 말이다.

앨범에 수록된 순서와 똑같이 공연에서도 ‘Where the streets have no name’에 이어 ‘I still haven’t found what I’m looking for’ 전주가 흘러나왔다. 이 노래를 라이브로 듣다니, 온몸에 전율이 일어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완벽한 몰입의 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공연을 보다가 흥분에 휩싸인 현기증을 느꼈던 게 언제였던가. 공연 관람은 업무의 연장선이 될 때가 많았다. 프로그램 게스트를 응원하기 위해, 대중음악계 트렌드 파악을 위해, 이번에 못 보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온갖 이유가 덧대어졌다. 아무 이유 없이 무조건 좋은 느낌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날 선 똑똑함보다 따뜻한 친절함에 끌리고, 다른 곳을 꿈꾸기보다 내 자리를 성실하게 지키는 것의 미덕을 아는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이 노래를 들을 때만큼은,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고 욕망으로 허기졌던 스무 살의 나로 돌아갈 수 있어 반갑고, 애잔하다.  

David Bowie ‘Space oddity’
우주에 가면 상하, 종횡, 고저의 개념이 통하질 않는다고 한다. 우주에서 유효한 방향은 오직 안쪽과 바깥쪽이다. 나와 나 아닌 세계가 있을 뿐이다. 외부와 연결되고 싶은 갈망과 완벽한 고독의 추구가 길항하는 텅 빈 공간. 데이비드 보위는, 인간이 달에 착륙하기 며칠 전에 ‘Space oddity’를 발표했다.

그가 이미 우주에 다녀온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우주의 적막과 우주인의 고립감을 기가 막히게 표현했다. ‘Space oddity’는 가상의 캐릭터 우주비행사 톰 소령과 지구 관제소 간의 교신 내용을 담고 있다. 텅 빈 공간을 떠도는 톰 소령은 ‘지구는 푸르고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마지막 메시지를 남기고 사라진다.

이 노래가 각별한 이유는, 내 일의 아름다운 면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꼭 우주에 가야만 톰 소령을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 모두에겐 바깥세상과 소통하고 싶으면서도 자신만의 세계에서 달팽이처럼 웅크리고 싶은 톰 소령의 이중성이 있다. 라디오방송은 뭐랄까. 특정할 순 없지만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이 분명한 톰 소령들에게 교신을 시도하고, 그들의 외로운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 아닐까 싶다. 물론,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하는 게 포인트다.

장기하와 얼굴들 ‘그때 그 노래’
2012년 봄, < 장기하의 대단한 라디오 >라는 심야 프로그램을 론칭했다. DJ 장기하와 함께 동틀 때까지 술도 많이 마시고, 공개방송과 요상한 특집도 참 많이 했다. CP가 적당히 눈감아 준 덕분에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쉰, 조이 디비전, 토킹 헤즈, 도어즈, 세인트 빈센트 류의 ‘비대중적인’ 음악을 마구 틀어댔다. 열정과 체력이 콸콸 넘치던 때였다.

장기하와 얼굴들 2집 ‘그때 그 노래’는 장기하도 좋아하고, 나도 좋아해서 방송에 정말 많이 튼 노래다. 산울림의 ‘너의 의미’를 듣다가 단숨에 써 내려간 곡이라는데, 장기하 특유의 힘을 뺀 창법이 관조적인 응시와 어우러져 여백의 미를 극대화한다. 무방비 상태로 들었다간 ‘그 많고 많은 밤들이 한꺼번에 생각나’  잠 못 이룰지도 모른다.

내가 겪은 장기하는, 황량한 사막에서도 자신만의 북극성을 올려다보며 길을 찾아갈 흔치 않은 고집의 뮤지션이다. 가장 나답게 살기 위해 아무것도 안 할 수 있는 사람. 무언가를 더하기보다 무언가를 빼는 게 중요하다는 걸 잘 이해하고, 삶과 음악에 적용하는 고수. 그와 함께한 시간은 어느덧 이 노래와 함께 내 인생의 ‘화양연화’가 되었다.  

아케이드 파이어(Arcade Fire) ‘Wake up’
음악은 다양한 정서를 일으킨다. 어떤 마음의 상태로 들어가고 싶을 때 음악을 적극 활용하는 편이다. 실력보다 의욕이 앞서던 십수 년 전, 새 프로그램을 준비하다가 실패를 겪고 자존감과 자존심이 동반 추락해 우울감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때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준 노래가 바로 아케이드 파이어의 ‘Wake up이다.

지금까지도 관성에 젖어 나태해질 때, 일을 하다가 조직의 쓴맛을 볼 때, 심기일전하고 전투태세를 갖춰야 할 때 이 노래를 반복적으로 들으면서 마음을 다잡는다. 도입부의 ‘아~ 아’  부분만 들어도 온몸의 세포가 바짝 긴장하는 듯하다. 음악의 주술적인 힘이 이런 건가 싶다. 이 노래가 실려 있는 < Funeral > 앨범은 버릴 곡이 하나도 없다.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낸 밴드 멤버들의 이별의 경험을 밑바탕에 깔고 있는데, 슬픔, 애도, 그리움, 희망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들이 듣는 이의 마음에 스며들어 묘한 고양감을 자아낸다.

글렌 굴드 ‘골드베르크 변주곡 아리아’
‘클알못’이지만 자주 손이 가는 클래식 음반이 몇 장 있다. 그중에서도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앨범(1981년)을 가장 아낀다. 글렌 굴드는 생전에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을 두 장 냈다. 그를 20세기를 대표하는 천재 피아니스트 반열에 올려준 첫 앨범도 골드베르크이고,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마지막으로 녹음한 앨범도 골드베르크이다. 1981년 버전은 1955년의 것보다 느리게 연주되었다. 생기는 덜하지만 좀 더 명상적이고 묵직한 통일성이 느껴진다.

주체할 수 없다는 듯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글렌 굴드의 허밍은 비를 부르는 먹구름 같기도 하고, 밤하늘을 긋는 유성우 같기도 하다. ‘아리아’부터 ‘아리아 다 카포’까지 한 바퀴 듣고 나면, 종교적인 체험을 한 것 같은 기분이라 영원과 소멸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윤상 소년’
두 살 터울의 언니는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초등학생이었던 나와 구별짓기를 시도하기 위해 방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방에 몰래 침입해 책상을 기웃거리고 나서야 그녀가 윤상의 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언니가 하는 건 다 좋아 보이던 시절이었기에, 나도 윤상의 음악에 입문했다. 윤상의 사운드와 박창학의 노랫말의 조합은, 알듯 모를 듯해서 더욱 매혹적인 어른의 세계를 엿보게 해주었다. 지금도 가끔 그때를 돌이켜 보며, 일찌감치 탁월한 뮤지션을 알아본 언니의 선구안에 감탄하곤 한다.

윤상 2집에 수록된 ‘소년’은 E.O.S 보컬로 활동 중이던 김형중이 불렀다. 기교는 불완전하나 무구함이 느껴지는 김형중의 목소리가 어른의 세계를 탐하던 내 마음과 공명을 일으켰다. 흠… 그러고 보니 이 노래는 삶은 거대한 농담이란 내 오래된 믿음을 증명하기도 했다.

*프로필
SBS 이선아PD (porfavor@sbs.co.kr)
2001년 라디오PD로 SBS 입사 < 장기하의 대단한 라디오 > < 정지영의 스위트뮤직박스 > < 이숙영의 파워FM > < 박선영의 씨네타운 > < 최화정의 파워타임 > 등 다수 연출. 2021년 2월부터 < 박소현의 러브게임 >을 10년 만에 다시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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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10곡 특집 Feature

라디오 PD들의 ‘내 인생의 음악 10곡’ – #18 조정선 PD

내년 개설 20주년을 앞두고 이즘은 특집 기획의 일환으로 라디오 방송 프로듀서 20인의 ‘내 인생의 음악 10곡’ 편을 연재 중입니다. 라디오는 음악과 동의어라는 편집진의 판단에 따라 기획한 시리즈로 모처럼 방송 프로듀서들이 전해주는 신선한 미학적 시선에 독자 분들이 좋은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각 방송사의 라디오국에서 음악 프로를 관장하며 15년 이상의 이력을 가진 20인 PD의 ‘인생 곡 톱10’입니다. 열여덟 번째 순서는 MBC 조정선 프로듀서입니다.

성재희 ‘보슬비 오는 거리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인 1965년 무렵이다. 친척들이 집에 모이면, 아이들에게 어깨너머로 배운 유행가를 한 번 불러 보라고 시키거나, 아니면 당시에 유행하던 트위스트를 좀 춰보라고 해서, 흥을 유발시키던 문화 빈곤의 시절이었다. 당시에 즐겨 불렀던 노래가 바로 ‘성재희’의 ‘보슬비 오는 거리’였으니, 내게는 첫 번째 유행가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이 노래를 할 때마다, 환호의 강도가 꽤 커서, 나조차 어느 순간, 마치 지존인 양 착각하게 됐던 모양이다. 요즘 말하면 미스터트롯의 정동원 어린이가 된 것처럼 말이다. 명절이 끝나고 친척들에게 받은 돈이 꽤 두둑했던 어느 날, 동네에 노래자랑이 열린다는 소식이 내 귀에도 들어왔다. 1등상은 바로 ‘금반지!’ 장소는 지금의 중랑구 신내동 어딘가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 때부터 가족과의 실랑이가 시작됐다. 금반지를 타 오겠다는 나를, “다 사기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라며 다들 말렸다. 그것도 실실 웃어가면서. 아마 그 웃음 속에 ‘어리석은 놈’이란 뉘앙스가 들어있어서, 내가 더 떼를 썼는지 모른다.

어쨌거나 힘으로, 논리로, 당장 주머니에 없던 참가비 문제로(친척에서 받은 돈은 일단 몰수인 시절이었으니), 결국 노래자랑에 나갈 수 없게 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마냥 목 놓아 우는 일 뿐이었다. 그 이후에 얼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내게는 ‘금반지 사건’이 제일 듣기 싫은 과거가 됐다. 금반지의 ‘금’자만 나와도 내빼기 바빴다.

이 노래는 라디오에서는 거의 들을 수 없고, 가끔 가요무대에서나 나오는데, 당시의 가슴 아픈 추억(?)을 소환한다. KBS라디오악단을 이끌던 김인배 단장이 관악기 주자라서 그런지, 서주와 간주를 장식한 트렘펫 솔로가 멋들어지다.

이미자 ‘섬마을 선생님’
나는 베이비붐 세대의 한 가운데인 1960년에 태어났다. 전쟁 이후에 한 가정에는 최소한 아이가 네댓 명은 있었고, 예닐곱인 경우도 흔했다. 우리 집도 여섯이나 됐으니, 공무원이던 아버지의 벌이로는 아무래도 가족을 건사하는 게 힘들었을 거다. 그에 대한 단기적인 해결책이라면 아이 중 하나쯤은 친가나 외갓집에 맡기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젖먹이나 학교에 입학한 자식을 내려 보낼 수 없었을 터이니, 자연스럽게 6, 7세의 아이가 제격이었을 것이며, 영광스럽게 내가 선발된 거다.

이렇게 해서 1966년 9월 무렵부터 이듬해 2월까지 나는 경기도 용인의 외갓집에서 지냈다. 당시에도 시골에는 아이가 많지 않아서, 나는 꽤 심심하게 보내야 했는데, 그나마 위로가 됐던 게, 외할머니와 함께 듣는 라디오드라마였다.

그 중에서 ‘섬마을 선생님’이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시작과 끝에 나오는 주제곡이 특히 좋았다.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에, 철새 따라 찾아온 총각선생님. 열아홉 살 섬 색시가 순정을 바쳐 사랑한 그 이름은 총각선생님. 서울엘랑 가지를 마오 떠나지 마오”

지난 11월 친구와 동해안 해파랑길 750km를 함께 걸으며, 해당화를 참 많이 봤다. 늦가을이라 꽃은커녕, 야들야들한 잎사귀마저 말라있거나,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홍자색이기는 하나 꽃빛깔이 연하고, 단풍이 짙게 들지 않으니, 장미과의 열등생이지만, 곁에 두기에 부담 없는 친구 같은 존재가 아닌가 싶었다. 북한 땅 원산의 명사십리 해수욕장의 해당화가 특히 유명하다고 하는데, 꼭 가보고 싶은 곳 중 하나다.

샤를르 트레네(Charles Trenet) ‘라 메르(La Mer)’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프랑스의 샹송, 이탈리아의 칸초네가, 영미의 팝과 황금비율로 라디오음악 프로그램을 장식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중에서 La Mer(라 메르=바다)라는 샹송은 아련한 심정으로 접했던 음악이다. 특히 이 곡을 작곡하고 부른 아티스트 Charles Trenet(샤를르 트레네)의 오리지널 음반이 아주 오래된 것(1946년)이라, 음질은 필터가 걸린 듯 먹먹했으며(심지어는 찌걱찌걱 축음기 돌아가는 소리가 나는 듯하다), 먼 듯 가깝고 가까운 듯 멀게 들릴 만큼 음량 또한 전혀 고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이 묘하게도 넘실대는 파도를 연상하게 하고, 저 멀리 해안선 밖의 꿈의 장소로 나를 안내한다는 느낌을 주었다. 기타 코드나 피아노 코드를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 곡을 연주하면서 화성이 계속 바뀌는 것에 불편해하면서도 큰 재미를 느낄지 모른다. F Dm Gm C7 F Dm Gm C7 F A7 Dm C7 F Dm Bb D7 Gm C7 F Dm G G7 C C7 … 정말 쉴 새 없이 새로운 코드를 잡도록 채근하는 이 곡을, 무려 75년 전에 만들어 불렀다니 믿기지가 않는다.

La Mer는 1950년대에 일찌감치 미국으로 건너가 Beyond The Sea라는 다른 제목의 영어버전으로 여러 가수의 노래로 히트한 바 있다. 바비 다린(Bobby Darin),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 조지 벤슨(George Benson)도 리메이크 했으며, 최근에는 로비 월리엄스(Robbie Williams)의 노래가 히트했다.

항해가 자유롭지 못 했던 시절에 사람들은 해안가에서 바다 저편을 보며 많은 상상을 했을 것이다. “저 바다 건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기다리고 있을 거다. 언젠가 배를 타고 가서 그녀를 만나야지. 그리고 날 거기에 데려다 준 선장에게, 난 더 이상 배를 탈 일이 없으니, 당신만 떠나면 되! 이러고 말 할 거야” 세상에 이렇게 낭만적인 노래가 다 있다니!! 오리지널 샹송가사는 좀 다르겠지만, 나는 샤를르 트레네의 노래를 들으며, 영어가사를 음미하곤 한다.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버닝 러브(Burning Love)’
초등학교 6학년 때인 1972년으로 기억한다. 우리 집에 독수리마크가 선명한 성우전자의 스테레오 전축이 들어왔다. 덩치가 웬만한 장식장 크기는 족히 됐을 전축이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카세트 녹음이 가능한 데크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AM와 FM 수신, LP음반을 들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 요즘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조악한 제품이었다.

통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던 큰 형은 음악에 꽤 관심이 있어서, 매일 밤 라디오 다이얼 이곳저곳을 돌리며, 어떤 때는 자못 심각하게 또 다른 때는 낄낄거리며 음악과 진행자의 얘기를 듣곤 했다. 당시에 가장 즐겨 들었던 프로그램은 MBC-FM <박원웅의 밤의 디스크쇼(후에 <박원웅과 함께>로 바뀜)>였다.

어느 날 형이 내게 부탁을 하나 하고 외출을 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 ‘Burning Love’를 엽서로 신청해 놨으니, 노래가 나올 낌새가 보이면 재빨리 녹음을 해 두라는 얘기였다. 물론 노래보다는 자신의 이름이 불러지기를 원했던 거다. 전축에 동시 녹음기능이 없었던 지라, 마침 집에 있었던 일본제 납작 녹음기를 준비해 놓고, 포인트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 ‘엘비스가 그 날도 <밤에 디스크쇼>에 출연하여 ‘사랑을 불태웠음’에도 불구하고, 형의 이름은 끝내 나오지 않았고, 나는 동작이 굼뜨다는 이유로 두고두고 억울한 원망을 들어야 했다. 이렇게 한동안 이 FM 음악프로그램은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거의 빼놓아서는 안 될 잠자리의 파트너가 되었다.

하지만 Burning Love를 통해 알게 된 <밤의 디스크쇼>가 결정적인 위력을 발휘해준 것은 바로 MBC입사의 계기를 마련해 준 일이 아닌가 한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마지막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까지 나는 그저 어지간한 기업의 무역관련 업무나 사무직의 평범한 직장생활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다가 일간지에 실린 MBC 공채시험 공고를 봤고, 라디오PD란 직종에 호기심을 느꼈던 거다.

“MBC-FM을 듣고 자랐습니다. 좋은 음악 프로그램을 하고 싶습니다” 이런 면접시험에서의 당당한 태도가 내게 합격의 영광을 가져줬으니 말이다.  

폴 모리아(Paul Mauriat) ‘Love Is Blue’
지금은 BTS의 열풍이 세계를 휩쓸고 있어서 K팝의 기세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여러 해 전에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미국 빌보드차트에서 2위까지 오르며 돌풍을 일으킬 때 문득 프랑스의 악단 지휘자인 폴 모리아를 떠올리게 됐다.

젊은 댄스가수와 이미 세상을 떠난 대중음악 연주자가 어떻게 오버랩이 됐는가 하면, 이 둘은 공통되게 고유의 언어와 표현수법으로 누구도 예측하지 못 한 성공을 미국에서 거두었다는 이유에서였다. 경음악이라는 일본식 표현에 어울릴 만큼, 이지 리스닝(Easy Listening) 계열의 무드음악으로 멸시 받던 폴 모리아가 어떻게 미국에서 차트 1위(Love Is Blue가 1968년 2월 10일, 빌보드 No.1)에 올랐는가 하면, 그것은 거대 미국시장 진출을 노리고 그들이 정서에 맞추려는 작위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1970년 무렵부터 라디오에서 폴 모리아의 음악을 접해왔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동양적인 선율에다 탐미적인 연주 표현수법이라고 생각하며 감동했다. 그러니 수많은 라디오 프로그램이 폴 모리아의 음악으로 문을 열었고 문을 닫았을 것이다.

동아방송의 <밤의 플랫폼>에 흘렀던 이사도라(Isadora), 동양방송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에 나왔던 ‘시바 여왕(La Reine De Saba)’, <박원웅과 함께>의 ‘한여름 밤의 세레나데(Serenade To Summertime)’ <강석, 김혜영의 싱글벙글쇼>의 테마송 ‘돌아와요 부산항에’까지 아마 폴 모리아가 없었더라면, 70~80년대 우리나라 라디오 방송은 과연 무엇으로 타이틀 음악을 했을지 의문이다. 물론 그 대표곡이자, 그의 인기에 불을 당긴 것은 Love Is Blue일 거다.

뜬금없이 드는 또 한 가지 생각이 있다. 1970년대 말 무렵에는 웬만한 가정에 전축이 한 대씩 있었다. 당시로 봐서는 획기적인 컬러풀한 색상의 LP전집에서 흘러나오던 폴 모리아의 산뜻한 음악이 실은 거의 해적판이었다는 사실이다. 1975년부터 네 차례나 한국을 다녀갔던 폴 모리아는 자신이 한국에서 인기가 그렇게 높았지만, 음반인세는 제대로 받지 못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나는 알았으리라 본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음악이 동양 저 변방에서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뻐했을 것 같다. 그러니 천길 마다않고 한국을 다녀가지 않았을까.

이문세 ‘파랑새’
1984년 1월, MBC에 라디오PD로 들어와 수습기간을 거쳐 제일 먼저 맡았던 프로그램이 <이종환의 디스크쇼>였다. 입사한지 8개월 밖에 되지 않는 내게, 당시로 봐서는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 떨어졌던 건, 실은 프리랜서 DJ로 있던 이종환 선배와 담당PD의 다툼 때문이었다.

이선희가 ‘J에게’란 노래로 대상을 받았던 1984년 강변가요제 때의 일이다. 결선 전야제로 <디스크쇼>가 공개방송을 가졌는데, 진행방식을 놓고 둘이 크게 다퉜다. 지금 같았으면 둘의 잘잘못을 가려서 한 쪽은 징계, 한 쪽은 속투(續投) 쪽으로 결론이 났으련만, 당시에 FM부장이 내린 결정은 둘은 떼어놓고, 신참PD인 나를 붙이기로 한 거다. 졸지에 입봉을 하게 된 나는, 대선배에게서 일찍 라디오PD로서의 감각을 익히게 됐고, 지금 생각해도 그게 37년 PD생활에 가장 큰 행운이었다고 느낀다.

그해 가을에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주말마다<FM스페셜 이종환의 디스크쇼 공개방송>을 만들어 큰 인기를 누렸다. 그 때 자주 나왔던 가수가 이문세였는데, 청중의 반응도 반응이려니와, 마침 그가 옆방(MBC표준FM)에서 <별이 빛나는 밤에>의 별밤지기로 있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섭외가 편해서 자주 출연시켰던 거다.

이종환 선배와 이문세는 티격태격 입씨름으로 화제를 낳았다. “이문세씨가 TV에 못 나오는 이유가 얼굴이 길어 화면에서 위아래로 잘리기 때문이라면서요?” 이러고 시비를 걸면, 이문세는 “이종환 선배는 화면 밖으로 코가 튀어나온다면서요?” 이런 식의 응수다. 당시에는 ‘난 아직 모르잖아요’라는 걸출한 히트곡이 나오기 전이라, 이문세에게 노래를 시키면서 이종환 선배는 또 한 방 먹이곤 했다. “이문세씨가 또 삐리삐리 파랑새를 부릅니다. 이 노래 밖에는 부를 만한 노래가 없습니다” 참 즐겁고 행복한 시절이었다.

디온 워윅(Dionne Warwick) ‘A House Is Not A Home’
우리나라에서 가요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건 1980년대부터가 아닌가 한다. 외국에는 결코 쓰지 않을 ‘발라드’라는 장르가 생기면서 가요가 본격적으로 영미의 팝송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고 본다. 이런 가요들은 멜로디가 아름답고, 연주 실력이 뒷받침 되면서 음악팬들을 모았지만, 거기에 빠뜨려서는 안 될 게 ‘가사’다. 가요의 장점은 팝과 달리, 들으면 가사가 바로 이해가 된다는 점, 한 편의 시로 내놔도 손색없는 가사들 덕택에 가요는 업그레이드 됐다.

나는 라디오PD가 되기 전에 팝송을 들으면서, 거기에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은 거의 없다. 하지만 음악을 트는 일을 직업으로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팝송의 가사를 파악하게 됐다. 하기야 뭔 주장을 펼치는 지, 어떤 애틋한 사랑얘기를 담았는지 알아야, 청취자에게 정확히 소개할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몇몇 작사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됐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할 데이비드(Hal David)다. 그가 어딘가에 써놓은 작사 잘 하는 법까지 읽어 봤는데, 나도 한 번 작사가로 나서볼까 슬쩍 유혹도 받아봤다.

가사는 세 가지 요소에 충실하면서 쓰라고 한다. ‘그럴듯함(Believability)’ ‘단순함(Simplicity)’ ‘정서적 충격(Emotional Impact)’가 그것이다. 1964년 Dionne Warwick이 노래한 ‘집은 집이 아니랍니다’(A House Is Not A Home)은 할 데이비드의 작품 중에서 백미가 되는 가사로 내용이 감동적이다.

“의자는 여전히 의자일 뿐이지요. 거기에 아무도 앉아 있지 않더라도. 그러나 의자는 집이 아니지요. 그리고 집은 집이 아니랍니다. 그곳에 당신을 안아줄 사람이 없을 때, 그리고 당신이 굿나잇 키스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때. (중략) 그러니 이 집(House)을 집(Home)으로 바꾸어주세요. 제가 계단을 올라가 문을 열면, 제발 거기 있어주세요. 당신이 아직 나를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조이(Joy) ‘Touch By Touch’ 그리고 비틀스(Beatles)의 ‘Yesterday’
1986년 가을 무렵, MBC라디오가 정동에서 여의도로 이사를 오고 얼마 안 있어 있었던 일이다. 당시에 회사에서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이란 여론조사를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실시했다. 아마 MBC-FM 개국 15주년 행사의 일환으로, FM 음악방송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서 기획했을 것이다.

실은 어느 앙케이트든 대강의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바로 ‘너’)라는 게 있지 않은가 말이다. 팝송 프로그램에서 청취자에게 받는 올타임 리퀘스트 순위가 바로 조사결과일 것이라고 모두들 생각했다. Beatles의 Yesterday나 Let It Be, Simon And Garfunkel의 Bridge Over Troubled Water나 Sound Of Silence, Queen의 Bohemian Rhapsody, Deep Purple의 Soldier Of Fortune, 그리고 비교적 신곡이라면 마이클 잭슨의 노래들 따위 말이다.

이를 기획한 PD들 모두가 회심의 미소를 띠며 앙케이트지를 수거했는데 다들 크게 놀라고 말았다. 누구도 예상 못 하게 Joy의 Touch By Touch가 압도적으로 1위를 차지했을 뿐 아니라 그들이 부른 다른 노래들이 상위를 싹 점한 거다. 다시 한 번 확인하건대 당시의 행사 타이틀은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이었다. 한국인이 ‘최근에 좋아하게 된’이랄지, ‘좋아하는 팝송 신곡’이 아니었단 말이다.

나를 포함한 우리부서 PD들 모두 크게 당황해서 회의에 회의를 거듭한 결과, 궁여지책으로 이렇게 결론을 봤다. 애초에 우리가 기획한 건, ‘한국인의 올타임 리퀘스트곡 베스트’였지만, 이렇게 신곡들이 상위를 차지했으니, 부문을 둘로 나눌 수밖에 없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올드팝> <한국인이 좋아하는 최신팝>으로 분리하자. 이렇게 하고 보니 애초의 의도와는 달랐지만 단숨에 해결은 됐다. 결국 Joy는 Touch By Touch와 Beatles의 Yesterday가 나란히 1위에 올랐다. 이 사건이 내게는 잊을 수 없는 기억 하나 더 남긴 셈이다.

폴 사이먼(Paul Simon) ‘Duncan’
내가 대학에 다니던 때는 ‘기타를 못 치는 사람을 간첩’으로 여기던 무서운 시절(?)이었다. 최소한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랄지 버블껌의 ‘연가’, 윤형주의 ‘우리들의 이야기’ 같은 포크송 몇 개는 꿰고 있어야 사람취급(?)을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남녀가 유별한 시절을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내내 겪어온지라, 이성을 자연스럽게 만날 기회도 적었으니, 여학생과 소통하는 기쁨을 누리기에는 통기타만 한 매개거리도 없었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무렵부터 기타를 치기 시작했으니 좀 이른 편이었지만, 형이 치다 팽겨 쳐둔 걸 제대로 된 교본 없이 독학했으니 실력이 그다지 늘지 않았다. 다만 음감이 좋아졌다고 할까? 대중가요의 화성이 별로 복잡한 게 없으니, 어느 곡이라도 악보가 없이 코드만큼은 대충 잡아 칠 수준은 됐다.

그 실력은 대학의 MT에 가서 큰 빛을 발했고, 나는 자주 주목을 받았다. 통기타 잘 치는 아티스트로 내가 꼽는 사람이 바로 폴 사이먼이다. Simon And Garfunkel 시절부터 많은 곡들의 기타 반주를 보노라면, 다양하고 멋진 코드를 접하게 된다. 아름답고 신기한 하이코드를 포함해서 말이다. 그의 노래 중에서 쓰리핑거링(Three Fingering) 주법의 대표곡이 바로 Duncan이다. 팝 차트에 높은 순위에 오르지는 못 했지만, 그가 공연을 통해서 자주 선보였으며, 나도 한 소절 빠지지 않고 다 외우며 기타를 치며 부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곡이다.

* MBC라디오 조정선PD
1984년 1월 MBC라디오PD로 입사
<이종환의 디스크쇼> <한경애의 영화음악> <배철수의 음악캠프>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 <두시의 데이트> 등을 연출했으며 <조PD의 새벽다방> <조PD의 비틀즈라디오> <조PD의 레트로팝스>의 DJ 겸 PD로 활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