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동안 이어졌던 ‘광기의 메타버스’ 시대가 주춤하고 있다. 수많은 영역에서 생소한 이름을 순식간에 트렌드로 드높였으나 지금은 본질에 대한 의문과 함께 기세가 살짝 꺼진 상황이다. 그리고 그 틈을 타 조상 격인 고릴라즈의 신보가 도착했다. 브릿팝을 이끈 주역 블러의 프론트맨 데이먼 알반과 일러스트레이터 제이미 휴렛의 합작 프로젝트인 가상 밴드의 새 무대는 < Cracker Island >. 과자처럼 산산이 부서질 위험이 도사린 현대 사회에 대한 은유다.
고릴라즈 하면 익히 떠오르는 구성을 유지했다. 쫀쫀한 베이스와 맛깔나는 리듬, 그리고 데이먼 알반의 건조한 음색이 탄탄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차별점은 나른한 분위기로 ‘섬’의 이미지를 구체화하는 적극적인 신시사이저 운용이다. 향락적 테마를 조성해 느긋하고 편안한 청취를 제공하지만 한편으로는 천천히 세상을 침공하는 디지털 문명을 섬뜩하게 암시한다. 비중이 줄어든 스토리텔링을 음악으로 대체했다.
트랙리스트의 절반 이상에 피처링 아티스트가 이름을 올렸음에도 앨범은 각 뮤지션의 성향에 크게 좌우되지 않고 일련의 ‘고릴라즈 스타일’로 귀결된다. 휘청거리는 일 없이 안전성을 담보하나 게스트의 활용도가 크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테임 임팔라와 부티 브라운에게 지분을 대거 넘겨준 ‘New gold’나 배드 버니가 라틴어로 노래하는 ‘Tormenta’ 정도를 제외하고는 썬더캣, 스티비 닉스, 벡 등 내로라하는 뮤지션의 존재감을 느낄 여지가 부족하다.
이러한 기조는 혼종성을 표방하던 초기 어두운 음악보다는 대중적 스타일로 노선을 튼 중반기 이후의 흐름을 따르기 때문일 테다. 그러나 위켄드의 < Dawn Fm >이 연상되는 ‘Silent running’과 같은 트랙은 독창성이 지나치게 묽어진 인상을 주기도 한다. 희망적인 것은 음반의 주제를 빌려 지금 세대에 대한 설교를 구태여 던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집착을 버려야 얻어낼 수 있는 동시대성의 지혜를 데이먼 알반은 알고 있다.
진부하지만 현상 유지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겠다. 밴드의 선구자적 위치를 생각하면 아쉬울 수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 Cracker Island >의 이런 ‘무난함’은 메타버스 후손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날린다. 특별하다는 감상을 대중에게 강요하지 말 것, 그리고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그 자체로 다가가야 성공한다는 것. 과격한 돌풍보다 따스한 햇살을 비추며 접근하는 방식이 더 무섭고 확실한 법이다. ‘별난 프로젝트’를 넘어 확고한 입지를 차지한 고릴라즈의 존재가 이를 말해준다.
-수록곡-
1. Cracker island (Feat. Thundercat)
2. Oil (Feat. Stevie Nicks)
3. The tired influencer
4. Silent running (Feat. Adeleye Omotayo)
5. New gold (Feat. Tame Impala, Bootie Brown)
6. Baby queen
7. Tarantula
8. Tormenta (Feat. Bad Bunny)
9. Skinny ape
10. Possession island (Feat. Be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