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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22 강혜연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스물두 번째 주인공은 K팝 아이돌과 트로트를 아우르는 뮤지션 강혜연이다.

오디션 프로그램 < 내일은 미스트롯 >의 등장은 기성세대 위주의 트로트 신에 젊음의 활기를 불어넣었다. 송가인, 임영웅을 비롯한 수많은 차세대 주자를 발굴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탄탄한 팬덤 문화가 형성된 덕분에 주요 음악 차트의 상위권에서도 트로트를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긍정적 성과와 달리 대부분의 젊은 층은 여전히 트로트를 즐겨 듣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기 장르의 현주소를 받아들이고 세대 간극을 좁히기 위해 힘쓰는 이가 있다. 걸그룹 이엑스아이디(EXID)의 초기 멤버이자 베스티(BESTie)의 리더로 활약한 강혜연은 아이돌 활동을 마친 2018년 ‘왔다야’를 발표하며 트로트 가수로 변신을 꾀했다. 급격한 노선 변경이었지만 트로트를 향한 진심 하나로 시장이 필요로 하는 본인만의 스타일을 잡아 나갔고 < 미스트롯 2 >를 기점으로 그 노력들이 조금씩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아이돌과 트로트, 양분화된 두 흐름 사이를 넘나들었던 10여 년의 시간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푸르른 여름의 기운을 몰고 나타난 강혜연과 함께 파란만장했던 그의 음악 인생을 되짚어 보았다. 

작년 정규 1집 < 선데이혜연 > 발매 이후 별다른 음악 행보는 없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일은 어느 때보다 열심히 하고 있었다. < 미스트롯 2 > 종영 이후 < 화요일은 밤이 좋아 >, < 6시 내고향 >에 출연하며 부지런히 인지도를 끌어올리는 중이다. 물론 음악 작업 또한 늘 생각하고 있다. 다만 아직 어떤 스타일의 곡을 내야 할지 정하지 못해서 완성도를 위해서라도 시간을 두고 신중하게 고민하는 중이다.

방송 출연 이후에 달라진 점이 있다면.

전에는 내가 트로트 한다고 해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요즘은 식당이나 길거리에서 많이 알아봐 주셔서 감사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스케줄도 많아졌다. 그전까지는 고정 일정이 별로 없어서 여행도 자주 다니고 외가인 제주도에도 종종 다녀오고 했었는데 지금은 따로 시간 내기도 어려울 정도다. 보내주시는 관심에 감사할 따름이다.

< 미스트롯 2 >에는 어떻게 참가하게 되었는지.

사실 시즌 1 때 연락이 오긴 했었다. 근데 그때는 트로트로 전향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트로트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나가봤자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만약에 시즌 2를 하게 된다면 나가겠다고 얘기를 했고 그전까지 트로트를 체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준비하는 동안 국악도 배웠다고 들었다.

세미 트로트만 잘해서는 성공할 수가 없다고 느꼈다. 그래서 전통 창법을 익히기 위해서 민요를 한 2~3개월 정도 배웠었다. 하지만 원래 국악을 했던 사람이 아니라 그런지 어설프게 흉내만 내다가 성대 결절 조짐이 보였다. 프로그램 참가 대비는 물론이고 가수 생활도 계속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그만두게 됐다.

기존에 익혔던 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영역인데 어려운 점은 없었는지.

정신없이 외우기 바빠서 뭐가 부족한지 느낄 새도 없었다. (웃음) 음계가 적힌 악보라도 있었으면 그나마 편할 텐데 민요에선 선생님이 불러 주시는 멜로디와 리듬을 따라 하고 그걸 녹음해서 집에서 연습하는 게 최선이었다. 새삼 국악 하시는 분들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 미스트롯 2 > 자기소개 당시 “아이돌 꼬리표는 싫다”라는 문구를 사용했다.

아이돌 출신 자체를 부정한 건 절대 아니다. 다른 친구들보다 방송 적응이 빨랐고 무대 매너도 금방 습득했기 때문에 오히려 아이돌 활동이 큰 도움이 됐다. 다만 아이돌을 하다가 트로트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트로트만 좋아하시던 팬분들께서 경계를 많이 하셨다. 단순히 아이돌 출신이란 꼬리표 때문에 트로트를 향한 내 진심이 왜곡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런 슬로건을 내걸었다.

아이돌 연습생은 어떻게 되었는지.

사실 처음부터 아이돌을 목표로 한 건 아니었다. 발라드나 알앤비를 즐겨 들었기 때문에 마야, 임정희, 다비치 같은 가수가 되고 싶어했고, 심지어 춤도 아예 출 줄 몰랐던 몸치라서 아이돌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실용음악과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브라운아이드걸스 회사에서 연습생을 뽑는다는 공고를 보게 되어 경험 삼아 한번 지원했다가 덜컥 합격이 됐다. 대학보다 연습생 쪽으로 운이 있었던 것 같다. (웃음)

연습생을 하면서도 입시 도전을 계속했다고 들었다.

아무래도 연습생 트레이닝과 입시 준비가 결이 다르다 보니 꾸준히 문을 두들겼음에도 줄줄이 고배를 마셨다. 4수 정도 한 걸로 기억한다. 그래도 항상 대학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캠퍼스 잔디밭에 앉아 기타 치고 노래 부르는 환상이 있었기 때문에, 휴학하는 한이 있더라도 대학만큼은 꼭 가보고 싶었다.

그룹 활동 중에도 종종 트로트에 대한 관심을 내비치곤 했다.

어렸을 때부터 동네 친목회에서 어른분들이 ‘찰랑찰랑’이나 ‘남행열차’ 같은 노래를 부르시니까 자연스럽게 많이 접하게 된 것 같다. 그리고 중학교 때 선생님께 장윤정 선배님 닮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때 마침 ‘어머나’, ‘짠짜라’ 같은 곡들이 한창 대박을 터트리던 시기라서 자주 듣고 따라 불렀다. 기본적으로 트로트란 장르에 대해 친근감이나 애정이 어느 정도 있었다.

베스티 활동 당시에도 대표님이 내가 트로트 좋아하는 걸 아니까 엠넷에서 방영한 < 트로트 엑스 >라는 프로그램을 소개해 주셨다. 그때부터 트로트를 많이 듣고 전문적인 레슨까지 받았었는데 알려주신 선생님께서도 잘한다고 칭찬해 주시면서 트로트 가수를 해보라고 하셨다. 실제로 받아 놓았던 곡들도 꽤 있었지만 회사 재정 문제로 앨범 제작은 무산되었다.

아이돌에서 트로트 가수로 전향하게 된 계기는.

사실 첫 팀이었던 이엑스아이디(EXID)에서 나오고 옮겼던 소속사 이사님께서도 트로트 솔로를 먼저 권유하셨다. 그런데 엄마랑 상의해 보면서 트로트는 나이가 들어서 해도 괜찮으니까 아이돌 활동을 더 해보자고 결론을 내렸고, 그렇게 재데뷔 하게 된 팀이 베스티였다.

활동을 이어가다가 베스티 계약도 생각보다 일찍 만료되고 나니 당장 뭘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혼자 음악 활동을 해봐야겠다고 결심하고 작곡도 배워보며 유튜브 개인 채널에 영상을 조금씩 올리고 있었는데, 지금 대표님께서 갑자기 연락을 주셨다. 베스티 때 라디오에 나가서 불렀던 트로트 커버 영상을 보고 오래전부터 염두에 두고 계셨다고 말씀하셨고 덕분에 지금의 길로 잘 넘어올 수 있었다.

아이돌과 트로트 가수의 가장 큰 차이점은.

아이돌 때는 멤버들이 있어서 서로 부족한 면을 채워줄 수 있지만, 트로트는 혼자 모든 걸 이끌어야 하고 관객과의 소통도 온전히 내 몫이다. 물론 잘하면 내가 돋보인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런 부담감 자체가 상당히 컸다. 그전에는 무대에서 긴장해 본 적이 없었는데 트로트 가수로 처음 무대에 올랐을 땐 마이크가 덜덜 흔들릴 정도로 매우 떨렸다.

트로트 가수로 데뷔하고 나서는 주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

데뷔 직후에는 별다른 스케줄이 없었다. 한 1년 동안 < 가요무대 >에 나가며 트로트를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지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감을 잡았다 싶었는데 이 때 코로나가 터져서 뭘 할 수도 없었다. 행사도 못하다 보니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떠올려보게 되었고 그때부터 유튜브에 트로트 영상을 꾸준히 올렸다. < 미스트롯 2 > 전에는 일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트로트를 하다 보면 자연스레 선배들의 노래를 많이 리메이크하게 된다. 원곡의 느낌을 살리려고 하는지 아니면 본인만의 스타일로 바꿔 부르는 편인지.

기존 트로트 팬층들은 보통 옛 노래를 그대로 불렀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계신다. 그런데 < 가요무대 > 같은 프로그램의 PD님들은 오히려 나의 상큼하고 통통 튀는 모습을 원했던 것 같다. 처음엔 ‘왜 내게 이런 곡을 추천하셨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지만 다른 출연진의 스타일을 보고 그제야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젊은 트로트 가수가 많이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얼굴과 소리가 필요했고, 그 후로는 선배님들의 무대를 마냥 따라 하기보단 나만의 장점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으로 무대에 올랐다.

그렇다면 트로트 가수 강혜연의 장단점은.

카메라에 비치는 모습이 중요한 아이돌을 겪어봤기 때문에 아무래도 무대 위 표정이나 동작은 기존 트로트 가수분들보다 자연스럽게 연출할 수 있는 것 같다. 물론 그만큼 소리 면에서 약점이 존재한다. 트로트를 오래 한 분들보다는 상대적으로 울림이 얕고, 다양하고 섬세함을 요구하는 기교 자체도 부족하다. 그래도 부단히 노력하면 자연스레 채워 나갈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작년에 한창 브레이브걸스가 역주행으로 시끌벅적했을 때 유정 씨가 절친한 가수로 강혜연 씨를 언급했다. 어떤 인연이 있는지.

KBS에서 방영한 아이돌 회생 프로그램 < 더 유닛 >에 같이 출연하면서 알게 됐다. 당시에 성격도 비슷하고 서로의 아픔을 너무 잘 아니까 금방 친해졌다. 프로그램이 끝나고도 자주 만나서 각자의 인생에 대한 얘기를 나눴고, 그때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정말 많이 고민했었다. 그렇게 방황의 시기를 겪고 있다가 나는 < 미스트롯 2 >에 나가서 잘 풀리기 시작했고 브레이브걸스도 딱 그때 역주행을 하며 부활했다.

‘척하면 척’의 작곡을 맡은 투챔프랑 연이 닿은 것도 혹시 유정 덕분인지.

맞다. 사실 ‘척하면 척’은 투챔프와 함께 작곡에 참여한 내 남동생 디웨일의 노래이기도 하다. 동생이 작곡한다는 사실을 알았던 유정이가 투챔프 오빠들과 연결을 시켜줬고 서로 음악적인 합이 잘 맞았는지 팀을 만든다고 했다. 내가 원하는 포인트나 어울리는 스타일도 잘 알아서 앞으로도 작업을 같이 해보면 좋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일반 대중가요 같은 느낌도 든다.

한동안 대중가요를 안 듣고 트로트만 들어서 그런지 처음 들었을 땐 확실히 낯설었다. 기존 트로트 곡들은 어른들도 따라 부를 수 있게 노랫말이나 멜로디가 쉬운 편인데 ‘척하면 척’은 아이돌 음악처럼 리듬감도 넘치고 가사도 많아서 다소 어렵게 느껴졌다. 그래서 단순한 방향으로 수정을 요청하려 했는데 계속 듣다 보니까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해서 그대로 가기로 했다.

물론 ‘트로트’라는 명칭과 특유의 분위기 때문인지 젊은 사람들은 여전히 잘 즐겨듣지 않는다. 요즘 차트에 트로트도 많이 올라와 있어서 길거리에서도 간간이 트로트가 들려오는데 대부분 바로 넘기거나 플레이리스트에서 제외해버린다. 앞으로 모든 세대가 즐길 수 있는 세련된 트로트를 만들어 보고 싶다.

나이가 조금 더 들고 나서 해보고 싶은 음악 스타일이나 장르가 있다면.

앞서 언급했듯이 발라드를 해보고 싶다. 특히 7080 시대를 겪은 어른분들이 공감할 수 있는 옛날 감성의 발라드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포크도 해보고 싶다. 옛날에 많이 즐겨 듣기도 했고 베스티 때 기타를 독학으로 배워서 김광석 선배님의 곡들을 많이 연습했을 정도로 잔잔한 음악에 관심이 있다.

고향이 인천이다. 쭉 인천에서 살아온 만큼 인천에 얽힌 추억도 많을 것 같다.

예전에 살던 용현동 집이 인하대학교 후문이랑 가까워서 매년 학교 축제에 놀러 가곤 했었다. 2002년엔 초대 가수로 마야 선배님이 오셨는데,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던 폭발적인 가창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할 정도다. 원래도 노래하고 춤추는 걸 좋아했지만 그 무대를 보고 나서 나도 저런 멋있는 가수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고, 고등학교 때부터 실용음악 학원을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꿈을 키워 나갔다.

무대에 서는 걸 워낙 좋아해서 고등학교 시절에 지역 가요제를 정말 많이 나갔었다. 한창 다닐 때는 하루에 2개도 참가해 봤을 정도였다. 부평 청소년 가요제에서 상을 탔었고 화도진 청소년 가요제에서도 입상해서 신포 문화의 거리에서 쓸 수 있는 상품권을 받기도 했었다.

동생도 음악인의 길로 빠졌다. 집안에 음악 DNA가 흐르는 건가.

꼭 그렇지도 않다. 우리 아빠는 음악 듣는 건 정말 좋아해도 완전 음치에 박치다. (웃음) 다른 건 모르겠지만 피아노나 기타 같은 악기를 배우는 속도는 확실히 빨랐다. 대신 춤만큼은 익히는 데 정말 오래 걸렸다.

음악을 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께서 바로 허락하셨는지.

엄마는 내가 하고 싶은 걸 지지해 주신 반면 아빠는 처음에 많이 반대했다. PD인 삼촌 친구분에게 연예계에 대한 이야기를 워낙 많이 들으셔서 그런지, 방송 연예인보다는 뮤지컬 배우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 성당에서 성가를 부르는 가수가 되길 바라셨다. 심지어 아이돌을 한창 하고 있을 때도 관두고 딴 거 해도 된다고 계속 말씀하셨다. 그래도 트로트 하고 나서부터는 유명해지고 용돈도 챙겨드려서 지금은 자랑을 하고 다니실 정도로 좋아하신다. (웃음)


확실히 수입이 늘어나긴 했는지.

늘었다기보단 생겼다고 하는 게 맞다. 가수로 데뷔하고 9년 동안 한 번도 정산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아이돌은 TV에 자주 나오고 화려한 모습으로 보이다 보니까 잘 버는 줄 아는 친구들이 많은데 현실은 그게 아니다. 주변에선 직장도 어느 정도 자리 잡아서 부모님께 용돈도 드리고 했지만, 나는 오히려 돈을 타서 쓰는 입장이었다. 그래도 < 미스트롯 2 >가 끝난 그해 가을에 처음으로 정산금이 들어왔다. 이제 내 밥벌이 정도는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다.

가수 생활 중 가장 안정적인 시기를 보내고 있는 지금, 강혜연의 목표는 무엇인가.

여기까지 오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긴 했지만 아직 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 나이에만 할 수 있는 음악적인 시도를 많이 해보려고 한다. 아마 그 중심엔 기존 트로트의 질감을 계승하면서도 대중가요의 트렌드도 적절히 반영할 수 있는 ‘세미 트로트’가 있을 것 같다. 장윤정, 홍진영 선배님의 뒤를 잇는 세미 트로트의 다음 주자는 물론이고, 아이돌 출신 트로트 가수의 선두에서 보다 더 젊은 후배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본보기가 되고 싶다.

진행: 소승근, 장준환, 정다열
사진: 정다열
정리: 정다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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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차트 역주행 특집 VOL 3. IZM 필자들이 뽑은 ‘역주행 되기를 바라는 곡’

‘역주행’이라는 키워드에 걸맞게 작년 5월 진행했던 차트 역주행 특집이 정확하게 1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는 조금 가볍게, IZM 필진들의 사심이 가득 담긴 ‘제발 한 번쯤 역주행했으면 하는 곡’을 소개한다. 숨겨진 명곡, 아쉬운 매치업, 앞서간 작법, 혹은 발굴의 의미까지… 필자마다 천차만별인 기준 만큼이나 장르와 시대를 아우르는 독특한 리스트가 탄생했다. 아직은 ‘희망 명단’에 불과하더라도, 언젠가 도약할 그날을 위해 같이 회고하는 것은 물론이요, 독자 역시 자신만의 선정을 떠올릴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오마이걸 ‘한 발짝 두 발짝’
설렘의 감정을 스트링 선율로 물들인 멜로디와 완성도 높은 멤버들의 하모니가 아련한 첫사랑의 기억을 소환한다. 소속사 선배 B1A4 진영이 선물해준 이 곡은 발매 당시 큰 파도를 일으키지 못했지만 점차 팬들의 입소문을 타고 일명 ‘갓 발짝 킹 발짝’의 칭호를 획득했다. 진가는 노랫말에 있다. 풋풋한듯 비장하게 건넨 ‘거리두기 완화 고백법’으로 가사의 미학과 시의성마저 겸비한 ‘한 발짝 두 발짝’은 지금 당장 컴백한다 해도 눈감아 줄 수 있을 정도. 2020년 전국에 물보라 주의보가 발령되기 4년 전부터 이미 오마이걸의 핑크빛 바다(Pink Ocean)는 일렁이고 있었다.

블로섬즈(Blossoms) ‘There’s a reason why (I never returned your calls)’
따스한 햇볕처럼 쏟아지는 신시사이저에 벚꽃 필 무렵의 1980년대가 아른거린다. 떠나간 연인을 향한 속앓이와 미련 섞인 투정은 사랑에 서툴렀던 모두의 지난날을 끄집어내 복잡한 감정을 안기다가도, 이 마성의 리프 앞에 곧장 추억으로 미화된다. 데뷔부터 노골적으로 과거 시제를 겨냥해온 블로섬즈의 집념이 끝내 열매를 맺은 것.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멜로디와 선배 그룹 스웨이드를 연상케 하는 톰 오그던의 고풍스러운 음색은 청취를 넘어 회상의 영역까지 안내한다. 향수, 계절성, 공감대, 그리고 뉴트로. 역주행의 모든 조건을 충족한 곡이다.

이박사 ‘몽키 매직-우주몽키(Feat. 윈디시티)’
어느 장르의 음악을 좋아하냐는 질문에 트로트라고 답하는 젊은이는 흔치 않다. 급격한 사회 변혁을 거치며 젊은 세대와 윗세대 사이에 취향의 장벽이 생긴 탓이다. 하지만 트로트계의 이단아 이박사에게 세대 간의 담은 대수롭지 않다. 그는 특유의 독창적인 매력을 소통의 열쇠로 삼아 록 페스티벌의 관중을 당당하게 호령한다. 빠른 템포의 고속도로 사운드로 일관했던 이박사의 ‘몽키매직’을 사이키델릭한 편곡으로 풀어낸 윈디시티의 역량이 곡에 매력을 더한다. 트로트에 대한 젊은 세대의 관심도가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아진 지금 이박사와 윈디시티의 ‘몽키 매직-우주몽키’는 트로트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할 수 있는 곡이다.

테빈 켐벨(Tevin Campbell) ‘Can we talk’
힙합과 알앤비가 손을 잡은 이래 서로의 장점을 한 음악에 녹여내는 시도가 많아지는 추세다. 둘 중 어느 장르인지 구분이 모호한 곡도 많다. 귀에 쉽게 들어오는 멜로디와 탄탄한 실력의 보컬, 낭만적인 가사의 1990년대 알앤비가 그리운 이들에게 ‘Can we talk’는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1993년에 이미 히트했던 이 곡은 비트에 약간의 세련미를 더한다면 분위기나 콘셉트에 경도된 음악에 지친 이들에게 충분한 휴식 시간을 제공할 수 있는 노래다. 지금의 경향이 좋아도 가끔은 알앤비는 알앤비대로 듣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땐 기본에 충실한 노래가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

이상은 ‘더딘 하루’
‘삶은 여행’, ‘언젠가는’ 등 따뜻한 온도의 곡과 동양적 색채를 중심으로 거침없이 장르를 배합하는 < 공무도하가 > 스타일. 이 양단의 끝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것이 뮤지션 이상은의 핵심이자 빼어난 강점이다. 인기의 정점을 누리던 중 돌연 활동 중단 및 유학을 선언한 뒤 1991년 발매한 동명 음반의 타이틀 ‘더딘 하루’는 그런 그의 과도기를 담고 있다. 잔잔하게 시작해 수직적 울부짖음으로 향하는 구성은 ‘담다디’로 인기를 끌어모았던 그 시절, 대중의 기대를 완벽하게 벗어났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만큼 폭발적이고 이만큼 반전의 충격을 안기는 곡은 잘 없다. 보시라, 들어 보시라. 어떤 식으로든 모창하거나 밈(meme)화 하게 될 것이니…

티건 앤 세라(Tegan and sara) ‘Make you mine this season’
경쾌하고 발랄한 분위기의 노래가 시작부터 귓가를 사로잡는다. 뒤이어 울려 퍼지는 한마디, ‘Make you mine’. ‘널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당찬 포부이자 언젠가 아니, 언제고 듣고 싶은 마음 설레는 문장이 짧은 러닝타임 내내 반복된다. 간지럽고 좋다. 곡은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한 영화 < 크리스마스에는 행복이 >의 수록곡이다. 작품이 담고 있는 유쾌함과 달콤함을 응축해 영화의 맛도 살리고 노래의 맛도 살렸다. 그러나 진가는 영상을 통해 곡을 만났을 때 드러난다. 국내에는 잘 없는 밝은 퀴어 로맨스를 그린 영화에 톡 떨어지는 곡이 참 중독적이다. 듣고 있으면 기분 좋아지고 보고 있으면 행복해지는 마성의 노래.

이엑스아이디(EXID) ‘데려다줄래’
이엑스아이디에게 날개를 달아 준 신사동호랭이의 그늘에서 벗어나 팀의 래퍼 엘이가 작사, 작곡하여 마련한 무대이다. ‘위아래’ 이후 역주행 신화를 잇기 위해 도발적인 모습을 앞세운 ‘아예’, ‘덜덜덜’ 등이 자기복제를 벗어나지 못했던 데에 비해 안정된 속도감이 이들의 실력을 조명한다. 과거 언더그라운드 힙합 크루 지기펠라즈에 속해 이미 검증된 바 있는 랩과 보컬트레이너로서의 경력이 있는 솔지의 목소리, 각자의 자리를 알고 움직이는 멤버들의 역량은 관능적인 춤이 하나의 무기에 불과했음을 증명한다. 짙은 색깔에 묻혀 빛을 보지 못한 음악은 그들을 ‘한 때 돌풍을 일으킨 섹시 심볼’로 보내주기 힘든 이유이다.

88라이징(88rising) ‘Midsummer madness’
아시아계 아티스트만을 영입하며 확고한 방향성을 정립한 88라이징의 목표는 글로벌 시장에 깃발을 꽂는 것이다. 리치 브라이언(Rich Brian), 조지(Joji) 등 이미 검증된 이들을 등에 업고 꾸준히 세계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레이블은 2018년 컴필레이션 앨범 < Head In The Cloud >를 발매하며 다음 단계를 도모했다. 곡의 도입부터 ‘떼창’을 유도하며 여름의 더위를 식혀 줄 명확한 의도를 가진 ‘Midsummer madness’의 중독성은 단연 돋보인다. 짧지 않은 러닝타임에도 반복적인 구성 탓에 금세 감흥이 줄지만, 우리의 기억 속에 하나쯤 남아 있는 아련한 오뉴월의 저녁을 떠오르게 만든다. 아카데미와 그래미로 영역을 넓히는 동양 문화의 한 축을 차지할 집단의 한여름 열기는 아직 뜨겁다.

푸 파이터스(foo fighters) ‘Learn to fly’
움츠러든 시대가 기지개를 켜고 있다. 서로 멀어지기를 명했던 세계가 집합하기 시작했고 이에 굳어있던 심장이 거친 호흡을 내뱉었다. 이제 앞을 보고 뛸 일만 남았다. 너바나의 음울했던 그림자를 벗겨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결국 누구보다 밝은 고유 형체를 갖게 된 푸 파이터스의 ‘Learn to fly’는 그런 점에서 현세대에 필요한 최고의 음악적 격려였다. 빌보드 싱글 차트 19위, 모던록 차트 1위 등 밴드에게 최초로 대중적 영예를 안긴 곡이기도 하지만, 어떤 분노와 슬픈 감정 하나 없이 경쾌한 연주와 보컬로 전달하는 직선적 쾌감이 물들이는 희망은 분명 시제를 관통할 보편성을 지녔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드러머 테일러 호킨스와 함께 그들이 전파한 ‘힘’이 다시금 울려 퍼지길 기대하며 지금이야말로 ‘하늘을 나는 법’을 배워야 할 때라고.

라붐 ‘아로아로’
2021년 브레이브걸스가 ‘롤린’으로 보여준 기적은 팬데믹 시대에 지친 대중을 위로했다. 우연히 마주한 희망에 모두는 자연스레 다음 페이지를 이어갈 타자를 기대했고 따스한 흐름 속 언급된 여러 후보 중 유력한 그룹은 단연코 라붐이었다. 데뷔 해였던 2014년부터 꾸준히 군부대를 중심으로 활동한 이력도 비슷했지만, 무엇보다 음악이 있었다. 대표곡 ‘상상더하기’가 한차례 반등에 성공한 지금 그들의 세 번째 싱글이었던 ‘아로아로’는 라붐의 재각인을 도울 확실한 촉진제다. 레트로를 기반으로 한 신스팝 장르의 경쾌한 편곡과 기억하기 쉬운 멜로디, 후렴구의 ‘치키차’란 포인트 가사까지. 기분 좋게 갖춰진 중독성은 이미 역전 시나리오의 긍정적 결말을 그리고 있다.

보이즈 라이크 걸즈(Boys Like Girls) ‘The great escape’
단번에 꽂히는 멜로디와 단순한 구성에 탄산음료 한 잔의 청량감이 담겨있다. 팝 펑크 특유의 경쾌함을 살린 ‘The great escape’는 국내에서 각종 게임 대회와 TV광고 배경음악으로 자주 등장해 2010년대 초반까지 큰 인기를 끌었다. ‘던져 버려, 어제는 잊고. 우리는 위대한 탈출을 감행할 거야!’라며 반항적으로 외치는 노랫말과 톡쏘는 절정은 학업에 지친 학생들의 아드레날린을 분출하며 답답함을 날려버렸다.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되어 마주한 그들의 스트레스도 단숨에 해소해줄 만큼 여전히 강렬하고 통쾌하다.

브로콜리 너마저 ‘보편적인 노래’
아프니까 청춘이다. 그 씁쓸한 말을 일삼던 시기에 브로콜리너마저는 방황하던 젊은 마음들을 어루만졌다. 단출하고 편안한 기타 선율 위에 보편적인 이야기를 읊조렸을 뿐이지만 흔하디 흔한 위로가 건넨 온기는 아직도 따뜻하게 남아있다. 특히 후미에 등장한 계피의 목소리에는 누구나 갖고 있는 소중한 기억으로 역주행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추억 속 포크 음악이 주는 진솔한 감상을 잠시 음미하기조차 어려워진 오늘날, 각박한 현대사회를 다정하게 물들일 추억 속 책갈피를 펼쳐본다.

데프콘(Defconn) ‘길’
각종 예능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며 인지도를 쌓은 데프콘은 20세기에 첫 앨범 < Kapital G >를 발표할만큼 경력이 길다. 하드코어 랩 ‘독고다이’나 버벌진트와 함께한 ‘Sex drive pt.2’ 처럼 거친 초기작은 친근한 이미지로 희석되기 아쉽다. 거침과 부드러움을 배합한 2003년 작 정규 1집 < Lesson 4 The People >에서 ‘길’은 후자에 속했다. 초등학생 시절이 끝날무렵 접한 푸근한 멜로디와 쏙쏙 들리는 가사는 지오디의 동명의 히트곡과는 다른 매력이었고, ‘슈퍼스타’란 곡으로 잘 알려진 불독맨션의 이한철이 피처링을 맡아 밴드풍 사운드가 완성되었다. 삶의 기로에 놓인 무명 래퍼의 솔직담백한 곡이다.

팀발랜드(Timbaland) ‘Give it a go (feat: Veronica)’
팀발랜드는 2000년대 중후반 뮤지션과 프로듀서 등 다양한 직함을 내걸고 히트곡을 쏟아냈다. 휴 잭맨 주연의 영화 < 리얼 스틸 >에 수록된 ‘Give it a go’는 주인공 소년과 격투 로봇이 함께 춤을 추는 장면에서 흥겨움을 선사했다. 팀발랜드 특유의 전진하는 편곡에 배우 겸 가수 베로니카의 목소리가 힘을 보탰다. 따라부르기 쉬운 후렴구로 히트 공식도 성립하지만 비슷한 제목의 ‘Give it to me (Feat. Justin Timberlake, Nelly Furtado)’가 빌보드 1위까지 오른 것에 비해 싱글 커트 조차 하지 않았다. 안젤리나 졸리의 아버지 존 보이트가 나온 1979년작 < 챔프 >의 21세기 버전 같은 < 리얼 스틸 >의 사운드트랙엔 이 곡을 비롯해 푸 파이터스의 ‘Miss the misery’와 에미넴의 ”Till I collapse (Feat. Nate Dogg) 같은 강력한 곡들이 수록되어 있다.

싸이 ‘비오니까’
우리의 ‘연예인’에서 모두의 ‘연예인’이 된 싸이는 댄스 가수다. ‘챔피언’, ‘연예인’, ‘Right now’, 그리고 ‘강남 스타일’까지 결정적인 대표곡들이 전부 신나는 춤곡인 탓에 바꿀 수 없는, 바꾸지 않을 선입견이 그에게 잡혀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서정적인 음악을 좋아한다. 선정적인, 성적인을 잘못 쓴 것이 아니다. ‘친구놈들아’, ‘아름다운 이별 2’, ‘예술이야’, 그리고 이 특집에 넣은 ‘비오니까’ 같은 작품을 더 자주 듣는다. 음악도 음악이지만 가사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김광석 정도를 빼면 내가 노랫말을 유심히 보는 몇 안 되는 가수 중 한 명이다. ‘비오니까/그러니까/그래서/그랬어요’. 운(韻)이 단순해서 좋다. 싸이를 발라드 가수로 만들자.

지미 잇 월드(Jimmy Eat World) ‘The middle’
약 10년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록의 봄이 돌아오기를. 올리비아 로드리고, 머신 건 켈리, 태연, (여자)아이들 등 그 문법을 활용한 뮤지션이 활약하는 요즘 펑크(funk)와 디스코 이후 새 과거 유산을 찾듯 신복고 물결을 타고 고개를 내미는 록이 정말 반갑다. 걸걸한 기타 사운드로 가득한 나의 애청목록에 반해 국내 싱글 차트에서는 정제된 신시사이저만이 울리고 있어 쉬이 눈길이 가지 않아 이를 정화하고자 록 음악을 준비했다. 인간적인 매력이 살아 있는 20세기 노래를 소개하기에는 역주행에 ‘역’자도 꺼내기 전에 실패할 것 같아 2001년 빌보드 HOT100 탑10에서 5위에 올라 딱 중간을 차지했던 팝 펑크의 정석 ‘The middle’을 추천하고 떠난다.

공원소녀 ‘Bazooka!’
좋은 음악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빛을 본다는 운명론을 믿는 편이다. 공원소녀를 두고 ‘아직 발화의 순간이 찾아오지 않았을 뿐, 기회만 주어진다면 언제든지 도약할 팀’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일삼던 것 역시, 그들이 꾸준히 선보인 양질의 결과물에서 리스너의 확신을 도출했기 때문이었다. 현란한 멜로디와 모범적인 드롭 활용으로 트로피컬 하우스 계열의 K팝 사운드를 정립한 ‘밤의 공원’ 시리즈와 더불어 대중성까지 고루 버무린 웰메이드 트랙 ‘Bazooka!’를 그저 과거의 산물로 남겨두기에는 이제 아쉬움보다 죄책감이 앞설 정도다. 역주행 워너비의 영순위로 이 곡을 뽑은 이유는 간단하다. 과장을 조금 보태, 그 누구에게 들려주더라도 단번에 사로잡을 자신이 있으니까.

스카이 페레이라(Sky Ferreira) ‘Everything is embarrassing’
매체와 기기의 거듭된 발전으로 국가 간 장벽은 허물어진지 오래. 이미 전 세계를 뜨겁게 달군 두아 리파와 빌리 아일리시는 물론, 이제는 마니아 감성의 찰리 XCX와 FKA 트위그스까지 국내에서 입지를 꽤나 얻은 상태다. 그렇기에 더더욱 짙은 스모키 화장과 공허한 삼백안의 뮤즈, 스카이 페레이라의 언급은 빼놓을 수 없다. 비교적 주목은 덜하더라도 이들 못지않은 만능 플레이어기 때문. 대표곡 ‘Everything is embarrassing’을 보자. 자욱한 몽환경 속 덧없는 애가(哀歌)는 취향의 영역을 가혹하게 요구하지만, 기어코 빠져들면 헤어 나오기 힘든 모진 매력을 지닌다. 게다가 대중의 호응을 얻기 위한 필수 조건인 팝의 기본 질서를 탄탄하게 충족하고 있으니 뭘 더 바라겠는가. 만약 이 글을 읽고 호기심이 생겼다면, 새벽 시간의 퇴폐와 습기를 가득 머금은 그의 앨범 < Night Time, My Time >까지도 필청을 권한다.

소나무 ‘넘나 좋은 것’
행사 공연 ‘직캠’ 하나로 메이저 반열에 올라선 이엑스아이디, 전국 곳곳의 군부대를 누비며 ‘젊은 장병들의 선택’을 받았던 브레이브걸스, 낙수 효과 덕분에 ‘좋은 음악’을 재조명 받을 수 있었던 라붐까지. 이들의 모든 역주행 공식을 따랐지만 걸그룹 소나무만큼은 그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철 지난 속어 제목을 실패 이유로 들기엔 곡 구성과 멜로디가 결점을 완벽히 상쇄한다. 아카펠라로 출발해 신시사이저와 스트링을 비롯한 악기들이 펼치는 협연은 한 편의 뮤지컬 같은 감상을 이입하고, 끊임없는 변주의 끝엔 메인보컬 하이디의 환상적인 5단 고음이 펼쳐진다. 음원엔 이들의 활기찬 에너지가 온전히 담기지 못했다. 언젠가는 다시 무대 위에 올라 늘 푸른 기운을 담은 라이브로 관객을 놀라게 할 2010년대 슈가맨.

탑독 ‘애니’
유독 남자 아이돌에겐 이 짜릿한 역행의 순간이 찾아오지 않는다. 노래가 좋아도 팬덤 위주로 소비하는 경향이 강해 널리 퍼지기 힘든 구조가 한몫한다. 13인조 보이그룹 탑독 역시 초기의 난감한 콘셉트가 꽤나 큰 진입장벽을 세워 활동 반경을 크게 넓히지 못했다. 하지만 데뷔 1주년이란 ‘기념일(Anniversary)’을 맞아 발표한 팬송만큼은 대중적으로 회자될 만한 요소가 다분하다. 1990년을 상징하는 미국의 두 래퍼 MC 해머와 바닐라 아이스를 모티브로 한 뉴 잭 스윙 장르의 댄스곡이라는 점부터 특색 있다. 세련된 기타 리프와 신나는 비트 사이에서 개성 넘치는 랩과 보컬이 쉴 틈 없이 호흡을 주고받고, 후렴구에선 LP를 들고 현란한 안무를 소화하며 보는 재미까지 선사한다. 높은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청취를 막아서는 것은 멤버들을 다닥다닥 정렬해놓은 앨범 커버. 우연히 재소환 당할 기회가 찾아온다면 브레이브걸스의 ‘롤린’처럼 사진 교체가 시급하다.

씨아이엑스 (CIX) ‘Cinema’
워너원으로 활동했던 배진영 그룹이라는 별명보단 데뷔 무대가 기억에 남았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 야외무대에 선 신인 아이돌은 풋풋하고 열정적이었다. 소형 기획사지만 송 캠프 시스템을 도입하여 음악에 큰 비용을 투자한다는 사실에 또 한 번 주목했다. 데뷔 초의 무거운 콘셉트와 음악을 씻어내고 산뜻하게 다가온 ‘Cinema’는 팀의 잠재력을 확인한 결정적 순간이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밝지만 선명하진 않다. 사이다처럼 톡 터지는 한 구절 대신 일정한 리듬과 편안한 멜로디로 상투적인 청량 K팝과 거리를 둔다. ‘Ready and action!’이라는 사인 뒤, 맥동하는 기타와 함께 시작하는 도입부와 코러스에서 쭉 뻗어 나가는 승훈의 보컬도 매력적이다. 내 필름 위에 씨아이엑스를 선명히 각인한 테이크다.

코난 그레이 (Conan Gray) ‘Generation why’
‘Maniac’의 전세계적인 히트로 국내에도 많은 팬을 보유한 코난 그레이의 매력은 순수한 미성으로 부르는 냉소적인 가사다. 아일랜드-일본 혼혈로서 시달린 선입견과 부모님의 이혼으로 12번 이사한 과거가 공허하고 우울한 음악의 저변을 형성하고 있다. Z세대 팝스타로 떠오르기 이전에 발매한 ‘Generation why’는 더욱 몽환적이고 내밀하다.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소년은 ‘우린 무기력하고 이기적이고 유별난 데다가 모두 죽고 싶어 하는 밀레니엄 세대니까’라며 비꼬고 수백 번은 들었을 ‘너희 세대는 도대체 왜 그런 거야’라는 잔소리를 떨쳐내려 한다. 그 모습이 세대 갈등을 겪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이 노래가 울려 퍼지면 어른들도 조금은 우리를 이해하려 하지 않을까.

나인뮤지스 ‘Wild’
달샤벳, 레인보우와 함께 ‘나달렌’으로 묶이며 늘 더 뜨지 못해 안타깝다는 시선을 받았던 걸그룹 나인뮤지스. 그들의 노래 중 가장 아까운 건 역시 2013년에 발표한 ‘Wild’다. 차가운 건반 사운드와 화려한 전자음을 뚫고 나오는 멤버들의 목소리는 단번에 강렬한 흔적을 남기고, 자극적인 콘셉트에 가려진 사랑하는 이에게 외치는 가사 ‘늘 함께 함께 가야만 해’가 퍼뜨리는 울림 또한 폭발적이다. 분열로 가득한 지금 시대에 더욱 각별하게 다가오는 문장이다. 지난해 SBS < 문명특급 > ‘다시 컴백해도 눈감아줄 명곡’ 특집의 무대 곡으로 가장 흥행했던 ‘Dolls’를 선택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지만, 학창시절 방송반 선곡표를 짜며 이 노래를 듣고 감탄에 빠졌던 나는 여전히 ‘Wild’와 함께 가고 있다.

칼리 래 젭슨(Carly Rae Jepsen) ‘Run away with me’
‘Call me maybe’의 돌풍 이후 가볍고 반복적인 훅을 내세운 ‘I really like you’는 복귀작 < Emotion >에 대한 대중의 기대를 이끌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앨범은 평단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상업적으로는 실패를 거뒀다. 두 번째로 발표한 ‘Run away with me’ 또한 빌보드 차트에는 진입조차 못했으나 팬들의 열렬한 지지 덕에 어느덧 그의 상징적인 곡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 도입부의 색소폰과 따스함을 머금은 멜로디, 간결하면서도 확실한 메시지 ‘나와 함께 달아나자!’까지 흠잡을 곳 하나 없는 노래가 흥행하지 못한 것에는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다. 1980년대 풍 레트로 유행을 5년가량 앞섰다는 점에서도 더더욱 그렇다. 칼리 래 젭슨은 바쁜 틴 팝 스타를 벗어나 팬들과 소통할 수 있는 소탈한 뮤지션이 된 삶에 만족한다지만 적어도 이 노래 만큼은 지금보다 더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

정리 : 장준환
이미지 디자인 : 정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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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OP Single Single

혜린 ‘알아주길 바랬어’ (2021)

평가: 2.5/5

본격적인 홀로서기를 시작한 혜린의 선택은 어쿠스틱 발라드다. 그룹 내 숨겨진 가창력의 소유자로 평가받던 과거 이력에서도 알 수 있듯, 댄스 위주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보컬 역량을 부각하는 방향으로 EXID의 타이틀이 아닌 오롯이 본인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은유적인 제목이나 곡 작업에 직접 참여한 사실 역시 본격적인 주체로 거듭나기 위한 의도에 가깝다.

화제성을 고려한 흥행 코드나 화려한 기교보다는 담백함으로 승부수를 내건다.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가 얼핏 떠오르는 구성 아래 편안하고 정직하게 곡을 풀어나간다. 비록 완급을 고려하지 않은 일관된 악기 편성 때문에 4분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인트로처럼 들리는 경향이 있지만, 섣부르지 않고 조심스레 첫 걸음을 뗐다는 점. 그 사실만으로도 앞으로의 순항이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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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차트 역주행 특집 VOL 1. 가요 10곡

역주행의 역사는 되풀이 된다. 방송, SNS 등 다양한 매체와 더불어 밈(Meme), 추억, 감성 등 그 의미 또한 가지각색인 이 현상에 음원 시장과 유행이 급변한다. 대중의 취향과 기호가 과거만 맴돌며 현재를 살아가지 못하는 씁쓸한 실정이지만, 기억 속으로 사라질 뮤지션에게 생명을 불어넣거나 몰랐던 노래의 진가를 발견한다는 장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옛 노래가 굽이치는 물결을 타고 지금 우리의 곁으로 몰려온다. < 슈퍼스타 K >, < 나는 가수다 >, < 복면 가왕 >, < 투유 프로젝트 – 슈가맨을 찾아서 > 등의 TV 프로그램을 통해 자연스럽게 과거의 음악과 추억을 되새김질했지만, ‘역주행’이라는 이름으로 살아 돌아온 곡은 인터넷을 떠도는 ‘작은 영상 하나’에서 비롯한 경우가 적지 않다. 이는 MZ세대가 만든 디지털 문화가 그 중심에 있음을 뜻한다.

2021년 상반기만 해도 벌써 브레이브 걸스와 SG워너비 두 팀이 어떤 연어보다 힘차게 차트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왔다. 매년 찾아오는 연금과 시즌 송처럼 연례행사에 가까운 이 현상을 이즘에서도 두고 볼 수만은 없다. 차선을 반대로 달리는 노래가 다시 나오기 전에 이즘 필자들이 대표곡 10개를 선정했다.

EXID ‘위아래'(2014)
아이돌 역주행의 역사를 새로 쓴 브레이브걸스의 ‘롤린’이 등장하기 이전, 전국을 위아래로 들썩이게 했던 원조 역주행 걸그룹이 있다. 팬 한 명이 촬영한 직캠의 파급력은 놀라웠다. ‘위아래’는 2년의 공백을 가진 무명 걸그룹이 존폐를 논의하던 시점에 사활을 내걸었던 곡이다. 활동 당시의 반응은 미진했으나 발매 3개월이 지난 후 SNS를 통해 멤버 하니의 안무 직캠이 입소문을 타면서 뒤늦게 대중의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들의 역주행 열차는 쾌속으로 질주하며 그해 연말 음원차트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한다. 우연히 영상 하나에서 시작된 이 드라마는 해체 위기의 걸그룹을 완연한 대세로 탈바꿈해 주었다.

포화한 아이돌 시장에서 대중에게 각인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와 같고 일찍이 기회를 잡지 못한 팀들에게 성공의 벽은 높기만 하다. 3년이 꼬박 걸렸던 EXID의 역전은 새로운 성공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이들의 역주행 공식에는 방송 출연도, 유명인의 홍보도 없다. 오로지 팬이 만든 2차 창작물의 힘으로 일어섰다. 이는 아이돌 그룹이 주목받을 수 있는 제 3의 경로가 되었으며 아직 빛을 보지 못한 후배 그룹들에게는 포기하지 않고 활동할 수 있는 희망을 주었다. 아이돌 최초의 역주행을 이뤄낸 EXID의 발자취는 새로운 역주행 스타들이 탄생하고 있는 지금까지도 영향력이 닿고 있다. (김성엽)

볼빨간사춘기 ‘우주를 줄게'(2016)
‘하늘만큼 땅만큼’은 사랑의 척도에서 가장 유구한 관용어지만 볼빨간사춘기는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며 우주를 안겨줬다. ‘난 그대 품에 별빛을 쏟아 내리고 / 은하수를 만들어 어디든 날아가게 할 거야’라는 귀여운 고백은 모두의 공감을 이끌어냈고 ‘고막 여친’ 안지영의 애교 섞인 목소리와 대학 축제를 비롯한 많은 공연에서 보여준 사랑스러운 모습이 대중을 사로잡았다.

< 유희열의 스케치북 > 출연을 계기로 SNS에서 입소문을 타며 1개월 만에 10위권에 진입한 ‘우주를 줄게’ 뿐만 아니라 이 곡이 수록된 < Red Planet >의 전곡이 한 해 동안 엄청난 인기를 구가했다. 특히 사춘기의 우울하고 의기소침한 면에 주목한 ‘나만 안되는 연애’나 ‘X Song’은 폭넓은 감정선을 드러냈다. 볼빨간사춘기는 역주행의 수혜를 받은 원 히트 원더에 머무르지 않고 여전히 ‘썸 탈꺼야’, ‘여행’으로 20대 청춘의 찰나를 포착하고 있다. (정수민)

신현희와김루트 ‘오빠야'(2015)
시작은 인터넷 방송가다. ‘오빠야’를 배경음으로 차용한 한 리액션 영상이 우연히 화제를 끌어 각종 SNS의 파고에 탑승하고, 이후 수많은 패러디를 낳으며 젊은 층을 상대로 급속도로 퍼져 나간 것이 열풍의 시초다. 전파 과정만 본다면 다른 이유가 컸을지 모르지만 영상에 대한 관심은 곧 음악으로 이어지기 마련. 결국 그 기세는 영상의 업로드 일자 기준 16일 만에 차트 정상이라는 가시적인 기록으로 환산되었다.

반등의 기회는 생각보다 많이 찾아오지만 정작 제대로 거머쥐는 이는 소수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오빠야’의 성공 요인은 단박에 꽂히는 강렬한 인트로다. 한번 들으면 도통 잊기 힘든 신현희의 이 한 마디는 영상 너머 노래에도 관심을 가지게 했고, 뒤이어 등장하는 ‘썸’의 관계를 재치 있는 랩으로 풀어낸 코러스는 남녀노소를 막론한 노래방 애창곡 파트로 부상하며 상승 곡선에 박차를 가했다. ‘오빠야’가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기까지 걸린 시간, 인트로의 첫 2초였다. (장준환)

마크툽, 구윤회 ‘Marry me'(2014)
신호를 기다리며 서 있는 차 안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르는 사랑 노래가 은은하게 울려 퍼진다. 바로 옆에서 불러 주는 듯 가공하지 않은 음원, 이게 승부수였다. 이 영상이 페이스북의 인기 페이지 < 일반인들의 소름 돋는 라이브 >에 올라왔고 일명 ‘신호대기남’이 큰 관심을 일으키며 영상 속의 곡도 덩달아 주목받았다.

노래의 인기를 살갗으로 느낄 수 있었던 곳은 결혼식장 안이었다. 음원 순위 상위권을 차지했을 당시 예식장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원곡 가수의 음원보다 말 그대로 ‘일반인들의 소름 돋는 라이브’를 더 많이 들었을 것이다. 축가 타이밍엔 어김없이 ‘Marry me’가 흘러나왔고 한동근의 ‘그대라는 사치’와 함께 결혼식의 단골 레퍼토리가 되었다. 프러포즈 대표곡으로 안착한 노래는 역주행시점 음원 시장에서 일위를 달성한 베스트셀러였고 결혼 시장에서는 스테디셀러가 되면서 그때나 지금에나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김도연)

김연자 ‘아모르 파티'(2013)
수 없이 겪어낸 고난에도 김연자는 제 운명을 사랑했다. 4년의 시간이 흘러 재조명된 윤일상표 EDM으로 기존의 트로트 작법을 과감히 탈피한 이 ‘인생 찬가’는 실로 위력적이었다. ‘연애는 필수 / 결혼은 선택’이 형성한 공감의 힘은 가벼운 세대 통합을 일궈냈고 대학가 축제에 출연한 최초의 트로트 가수라는 이변을 낳았다. BTS, 엑소, 트와이스 등 최정상 위치의 글로벌 케이팝 스타들이 백댄서를 자처한 2018년 KBS가요대축제 엔딩 무대는 이 곡의 위치를 상징하는 장면이다.

젊은 감성과 화려한 후렴구 멜로디는 역주행의 존재감을 높이는데 빼놓을 수 없는 조연이다. 진가는 시대를 꿰뚫은 노랫말에 담겨있다. ‘작사의 신’ 이건우의 역작으로 가사 한 줄, 한 마디가 우리의 근원적 스트레스에 구원자 역할을 자처한다. ‘자신에게 실망 하지마 / 모든 걸 잘할 순 없어’라며 진심 어린 위로를 건네고 ‘나이는 숫자 / 마음이 진짜 / 가슴이 뛰는 대로 가면 돼’는 용기를 북돋으며 스스로 실현한 김연자식 명언에 방점을 찍는다. 찰나의 반짝임으로 끝나지 않을 주옥같은 격언들이 시대를 대변한다. 어쩌면 ‘아모르 파티’의 역주행은 당연한 절차였다.(김성욱)

윤종신 ‘좋니'(2017)
역주행 신화를 쓰기 가장 유리한 장르는 역시 발라드일 것이다. 호불호가 크게 갈리지 않는 범대중적인 장르인 데다 노래방에서 부르기도 좋으며, SNS에 올라오는 보컬 실력자들의 커버 영상을 통해서도 인기가 쉽게 번지기 때문이다. 2017년 미스틱엔터테인먼트의 음악 플랫폼 ‘리슨'(LISTEN)을 통해 발매된 ‘좋니’는 대표적인 성공 사례다. ‘부를 노래가 없다’는 젊은 세대의 수요를 공략한 아티스트는 유튜브 음악채널 ‘딩고 뮤직’의 ‘세로라이브’로 신세대와 교류를 형성했고,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한 라이브 영상이 성공을 판가름하며 노래는 가장 많이 들리고, 가장 많이 불리는 곡이 됐다. ‘애청’과 ‘애창’의 동시 포획이었다.

차이는 ‘깊이’였다. 꼭 모은 두 손, 잔뜩 찌푸린 미간으로 열창하는 베테랑 가수의 라이브는 대중의 가슴 한편에 간직하고 있던 아날로그 감성을 자극했고, 이별한 이의 심정을 대변하는 현실적인 노랫말은 결정적이었다. 원곡을 리메이크한 민서의 ‘좋아’로 차트 정상을 다시 꿰차며 발라드계 ‘답가 유행’을 일으키기도 했다. 음악인으로서 그의 영향력을 다시 한번 각인한 제2의 전성기의 서막이었다. (이홍현)

비 ‘깡 (GANG)'(2017)
허세와 거리가 멀다면서도 ‘백 달러 지폐(Hundred dollar bills)’, ’30 sexy 오빠’를 흥얼대며 여전히 9년 전 ‘레이니즘(Rainism)’에 도취되어 있었다. 향수에 젖어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던 2000년대 슈퍼스타는 이후 영화 < 자전차왕 엄복동 >까지 혹평을 받으며 ‘비’급 연예인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이미지 타격에 쐐기를 박았던 이 실패작이 컬트적인 역행을 일으킨 ‘나.비 효과’였다.

작품이 별로일 수 있다는 주연의 취중진담과 그를 뒷받침하는 누적 관객 수. 성적은 처참했지만 놀림거리로 이만한 흥행도 없었다. 망작에서 비롯한 각종 패러디는 과거를 들추기에 이르렀고 발매 당시에도 잡음이 많았던 ‘깡’이 그 중심을 차지했다. 비록 조롱이 만들어낸 관심이지만 본인도 밈의 인기를 즐겼고 오히려 광대를 자처하며 열풍에 불을 지폈다. 비주류의 인터넷 유행을 대중의 영역으로 견인한 40대 꾸러기의 깡다구는 급변한 콘텐츠 시장을 대변하는 희귀한 역주행 사례다. (정다열)

블루 ‘Downtown baby'(2017)
음과 음 사이의 작은 낙차로 덤덤하게 흐르다가도 ‘너는 나의 다운타운 베이비야’란 훅을 던지는 모습은 과장보다 쿨함을 견지하는 Z세대의 사랑법과 닮아있다. 어쿠스틱 기타가 주도하는 감미로운 소리는 연인과의 추억을 환기하고 ‘너의 눈은 밤하늘에 별이야’란 구절은 라라랜드(로스앤젤레스)의 푸른 밤을 형상화하며 낭만성을 확보한다.

린다G(이효리)가 < 놀면 뭐하니? >에서 불러 스트리밍 차트 정상까지 도달한 ‘다운타운 베이비’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활동하는 래퍼 블루가 2017년 말에 발매한 곡으로 2년 6개월 만에 빛을 보게 되었다. 이효리의 허스키한 저음은 멜로디의 좁은 폭을 구원하고 기교보다 감각으로 노래하는 가창이 곡에 잘 달라붙는다. “결국 뜰 곡은 뜬다.”는 운명론으로 접근할 수 있지만 실은 대중을 아는 이효리의 감과 공중파 프로그램의 위력이 작용한 결과다. (염동교)

브레이브걸스 ‘롤린 (Rollin’)'(2017)
역주행의 힘을 여실히 증명한 곡. 수익이 거의 없음에도 자식 키우는 심정으로 군부대 공연을 보낸 프로듀서 용감한 형제부터 “음악을 떠나 평범하게 살자고 이야기를 나눴다.”던 유정의 인터뷰처럼 팀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은 멤버들까지 해체를 앞두고 터진 대박 뒤에는 감동 실화가 숨어있다. 2021년을 뒤집은 이 흥행의 시작은 유튜브 알고리즘이었지만, 실질적 원인은 전심으로 아이돌 그룹을 응원하며 군통령, 군인픽, 밀보드라는 신조어까지 만든 ‘군인들’에게 있었다. 힘든 군 생활 중의 위문에 대한 보답은 상상 이상으로 컸다.

이들의 성공 형태에서는 특이하게도 영상을 통한 현시대의 홍보 방식과 소자본 인디 뮤지션의 활동 양식이 함께 보인다. 무명의 독립 뮤지션이 길거리와 홍대 클럽을 전전하며 공연하는 모습이 군부대를 도는 브레이브 걸스의 모습과 닮았다. 이는 대형 미디어도, 유명인의 언급도 없이 멤버들 스스로가 일궈낸 노력의 결과임을 증명한다. 이엑스아이디가 팬들에 의한 2차 창작물의 중요성을 알렸다면 브레이브 걸스는 무대 하나하나의 소중함을 일깨운, 사실상 역주행이 아닌 ‘정주행’인 셈이다. (임동엽)

SG워너비 ‘Timeless'(2004)
역시 < 놀면 뭐하니? >는 강력했다. 프로그램에서 부르기만 했을 뿐인데 또 다수 음원차트의 정상에 올랐다. SG워너비가 출연한 이번 방송은 영향력이 더 셌다. ‘Timeless’, ‘내사람: Partner for life’, ‘라라라’, ‘살다가’ 등 여러 곡이 동시에 차트를 휩쓸었다. 톱스타 아이유, 대세 걸 그룹으로 등극한 브레이브걸스도 MBC 예능 < 놀면 뭐하니? >의 정기를 받은 노래들 앞에서 추풍낙엽이 됐다. 특히 ‘Timeless’는 SBS < 인기가요 > 1위 후보로 오르기까지 했다. < 놀면 뭐하니? >는 십수 년 전 나온 노래에 새 생명을 안겨 줬다.

전적으로 방송에 의해 다시 히트가 이뤄진 것은 아니다. 차트에 들어선 노래들은 모두 발매 당시에 큰 사랑을 받았다. 2000년대를 경험하고, 그 시절의 추억을 간직한 세대로서는 SG워너비와 그들의 노래가 반가울 수밖에 없다. 보컬 그룹이 요즘 얼마 없는 현실도 SG워너비를 돋보이게끔 했다. 가창력이 뛰어난 멤버들이 서로 눈을 맞춰 가며 하모니를 만드는 모습은 많은 시청자에게 근사하고 살갑게 다가갔다. 인기 미디어, 과거를 향한 대중의 향수, 희소한 체제, 번듯한 가창이 합쳐진 힘이 ‘Timeless’를 비롯한 노래들을 한 번 더 유행의 궤도에 들여놨다. (한동윤)

정리 : 임동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