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만나기 쉽지 않다. 지난 2년간 세상은 급속도로 바뀌었고 서로의 온기를 느끼는 대신 비대면 소통을 보편화했다. 마스크 없이 활짝 웃는 얼굴을 꿈꾸는 데서 시작한 에픽하이의 신곡은 방향을 틀어 익명성에 기대 더욱 기승을 부리는 악플러를 겨냥한다. 가시가 돋친 듯 날카로운 가사는 팬데믹이 야기한 위험 요소와 맞닿아있고 오는 12월에 발표될 < Epik High Is Here 下 >의 톤이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을 짐작하게 한다.
2014년 작 ‘Born hater’의 동생곡처럼 들린다. 곡의 스케일은 상대적으로 작지만, 베이스가 강조된 강력한 비트가 전반적으로 날 것의 록 사운드를 구현하며 직설적인 가사의 뒤를 받친다. 정교하게 설계된 타블로의 버스(verse)와 후렴 뒤 등장하는 저스디스의 스킬풀한 12마디는 묵직하고 반복적인 비트를 날카롭게 파고들며 곡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다만 미쓰라의 랩은 라이밍과 박자감 측면에서 단조롭고 밋밋하다. 오토튠에 트랩비트를 버무린 식케이의 훅은 그 자체로는 불균질하지만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곡의 흐름 덕에 큰 단점으로 작용하지 않고 투컷의 편곡과 비트 메이킹 능력이 다시 빛을 발한 지점이다.
3년 2개월 만의 컴백, 열 번째 정규 앨범. 20년 가까이 활동하고 있는 힙합 트리오 에픽하이의 귀환은 그들 스스로도 예상치 못한 대대적인 조명과 함께 이뤄졌다. 국내 주요 음원 차트 석권은 물론 애플 아이튠즈, 스포티파이 차트에서도 선전하며 여느 케이팝 그룹도 부럽지 않은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오랜 팬들을 결집하는 에픽하이의 고유 감성과 문법, 멜로디 등 핵심 요소는 굳건하다. 분명 변했으나 변하지 않은, 우리가 알고 있지만 또 새로운, < Epik High Is Here 上>. 에픽하이가 여기에 있다.
7년 만에 다시 만난 에픽하이는 < 신발장 > 발매 때보다 더욱 안정적인 모습이었다. 코로나 19로 온 세상이 멈춘 힘든 시기가 앨범에 영향을 주었음을 인정하면서도, 장난기 어린 대화와 진지한 설명에서는 베테랑의 여유가 느껴졌다. ‘마침표 같은 쉼표!’. 투컷의 표현처럼 에픽하이의 음악은 순간을 마감한다. 그리고 또 자연스레 다시 시작된다.
우울하면서도 독이 뻗친 듯, 가시가 뻗쳐 있는 앨범처럼 들린다. 전체적으로 톤도 다운되어 있고. 타블로 : 앨범을 만들기 시작한 건 코로나 19 범유행 전이었다. 2020년 전까지는 으쌰 으쌰 하던 게 있었고, 힘찬 작품을 만들자는 생각도 있었다. 초청받은 코첼라 페스티벌에서 선보이고 싶은 곡들도 많았다. 원래는 더 세고 더 자극적인 작품을 기획 중이었다. 하지만 누가 지금 같은 상황을 상상했겠나. 많은 노래들을 제외했고, 메시지와 가사도 다듬어 고쳤다. 에픽하이처럼 많은 앨범을 낸 팀에겐 ‘최고의 앨범을 만들자!’는 개념보다는 ‘맞아, 이런 일들이 있었지.’, ‘그때 코로나 19 팬데믹 상황이 있었지’라며 돌아볼 수 있는 작품을 만들자는 생각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었다. 결정적으로는 우리가 느끼는 대로 만들어야지 싶었고.
투컷은 이번 앨범을 어떻게 정의하나. 투컷 : 마침표 같은 쉼표! 마침표일수도 있지만 쉼표일 수도 있는. 아무래도 정규 10집이라 하면 꽉 찬 앨범처럼 보이지 않나. 작업 중에도 계속 그런 의미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타이틀이 부담되기도 했고.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였으면 좋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작업에 임했다.
미쓰라는 이 앨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미쓰라는 이모셔널한 사람 아닌가. 미쓰라 : 제가요? (웃음) 타블로 : 처음 듣는 얘긴데 (웃음) 미쓰라 : 앞서 멤버들이 이야기한 그대로다. 이런 예상치 못한 어려운 일을 겪은 것은 우리 셋 모두에게도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준비된 음악을 내고도 못 낼 수 있는 세상이 올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걱정이 많았다. 그래서 최대한 이번 앨범에는 최대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감정이나 시간을 모두 쓰고, 마지막이 될 수 있는 것까지 털어놓자는 생각이었다.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들으니 타블로가 쓴 앨범 속지가 떠오른다.
‘매 작품이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 생각하며 모든 것을 바친다. 언젠가는 반드시 마지막 작품이 될 테니까…(I gave my all to every single one of our albums thinking that it will be our last, because one day it inevitably will be.)’. 타블로 : 살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것 중 하나가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작별 인사를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항상 세상에 대한 두려움도 갖고 있고 불안감도 있다. 특히 ‘타진요’ 사건처럼 하루아침에 강제로 은퇴당한 경험도 있었고. 그래서 음악 하는 데 있어서는 적어도… 우리의 음악을 들어주는 팬들에게 제대로 된 작별 인사를 건네고 싶다는 생각으로 작업에 임하고 있다. 너무 부정적인 이야기로만 들어주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언젠가 어떤 작품이 마지막 앨범이 됐을 때 좋은 마무리, 좋은 작별 인사처럼 여겨졌으면 하는 거다.
타블로, 미쓰라, 투컷의 커리어에는 언제나 우울이 깃들어 있다. 물론 그 정서가 팬들에게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유명세를 가진 슈퍼스타에게 보통 이 정도 우울감은 찾기 힘든 감정이기도 한데. 타블로 : 그게 내 정서 같다. 성공하고 돈을 벌고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빠가 된다고 해서 갑자기 그런 게 모두 다 괜찮아지면 불행이라는 게 왜 있겠나. 투컷이 신나고 밝은 노래를 만들어와도 나랑 같이 팀을 하다 보니 내 목소리와 멜로디가 들어가면 우울해진다. 우리 앨범이 우울한 99%는 나 때문이다.
그럼에도 행복한 순간들 역시 음악에 담아내지 않나. 타블로 : 행복한 순간들이 있다. 평소 내 기본 세팅이 어두운 거다. 다행히 노력해서 중간중간 그 좋은 순간이 많이 반복될 수 있도록 구성하고 있다. 내게 의지하는 가족 친구들 사람들까지 우울한 감정으로 끌어들일 수는 없지 않나.
결국 우울함은 에픽하이 음악의 페르소나라고 볼 수 있겠다. 타블로 : 행복을 느낄 때는 그 순간을 즐기느라 음악으로 만들 생각을 안 한다. 음악 앞에서는 가장 솔직한 나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에게도 가장 익숙한 내 모습… 어떻게 해도 이렇다면 그게 내 모습 아닐까? 투컷 : 그런 솔직함이 뭘 해도 우울한 정서로 발현되는 것 같다.
다시 앨범 속지 한 구절을 가져와보겠다.
‘불평과 비난, 반박과 철회, 알리바이와 사과 대신에 노래를 쓴다(I write songs because the alternative is to write complaints and accusations and retorts and retractions and excusses and explanations and alibis and apologies.)’. 타블로 : 문장 그대로다. 내 노래가 우울함의 극치, 부정적인 에너지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그런 감정을 세상에 보태지 않으려고 음악으로 만든다. 음악은 참 아름다운 예술 아닌가? 엄청나게 날카롭고 위협적이고 위험한 감정을 가져가도 완성되어 나올 때는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뭔가 아름다운 것으로 변한다. 아무리 분노가 담긴 이야기라도 음악으로 표현하면 누군가에게는 꼭 위로가 된다. 만약 내가 음악을 안 만들었으면 불평만 늘어놓거나, 화만 내거나, 싸움을 걸거나 했겠지.
이런 정서를 표현하는 노래를 꼽아줄 수 있나. 미쓰라 : 에픽하이의 음악에는 항상 그런 감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투컷 : 나는 ‘End of the world’. 타블로 : ‘Rosario’다.
‘Rosario’는 어떤 의미에서 그런 정서를 담은 곡인가? 미쓰라 : ‘Rosario’는 지금 같은 시기에 그냥 뭐… 그런 곡이다. (웃음) 타블로 : 그냥 뭐… 그런 곡이지. (웃음) 미쓰라 : 이런 메시지는 있는 것 같다. 지금은 모두가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떨어져 있는 시대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레전드가 아니지만 그렇게 믿고 싶다. 우리 모두 레전드가 되고 싶다’라는 독려와 위로의 메시지를 담고자 노력했다.
에픽하이 대부분의 음악의 벌스는 타블로가 시작한다. 이번 앨범의 ‘수상소감’은 미쓰라의 벌스부터 시작하는 것이 굉장히 신선하고 좋았다. 곡의 완성도를 위한 선정이었겠지만, 특별히 미쓰라의 벌스부터 시작한 이유가 있는지? 곡 작업 시 벌스 선정 기준이 있는지? 타블로 : 원래 ‘수상수감’도 내가 먼저였는데 바꿨다. 미쓰라 랩이 완성되고 나니 이 벌스로 시작하는 게 맞는 것 같더라. 내 벌스로 시작한 게 좀 더 강렬하게 느껴지고, 미쓰라로 출발하는 버전이 더 뭔가 진한 감성으로 느껴지더라. 인간적으로 들렸고. 투컷 : 타블로 말대로 블로 벌스가 앞이었고 미쓰라가 뒤였는데, 바꿔보니 독백처럼 내뱉는 미쓰라의 파트가 앞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상황에서 만든 곡인가. 타블로 : 투컷의 데모 비트 버전만 있었다. 거기다 가사를 쓰고 랩을 얹은 후 노래로 완성해나가는 단계가 되었는데, 당시만 해도 수상소감이라는 제목은 없었다. 당시 가제는 ‘안티 히어로’였다. 그런데 그 제목이 너무 직설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수상소감’이라는 제목을 떠올렸다.
새로운 제목 ‘수상소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달라. 타블로 : 수상소감을 말하는 자리는 대체로 기분 좋은 순간 아닌가. 사람들이 잘했다고 손뼉 쳐주고, 성과를 트로피라는 물리적인 소재로 전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시상식이라는 행사에는 굉장히 무서운 이면이 있다. 상을 줬다는 것은 언제든 그걸 빼앗을 수도 있다는 것이기에… 꼭대기 같은 높은 위치의 기분을 한 번 맛보면 그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것이 더욱 쉽지 않다. 여담이지만 그런 의미로 시상식에 불참하기 시작했다. 불러주시는 건 정말 감사하지만, 그게 족쇄처럼 느껴질 때도 많았다. 화려한 레드카펫 밟고 축하 공연하고, 각자 숙소로 가서 혼자 앉아있으면 그 감정의 편차가 너무 커서 가끔 견디기 힘들 때도 많았다.
이번 그래미 어워드에서 외면받은 위켄드(The Weeknd)가 떠오르는 대답이다. 타블로 : 그런 상황을 상상하며 쓴 곡이라 뉴스를 보고 더욱 공감이 가더라. 위켄드는 지금 정말 자유로울 것이다. 누군가에게 인정받아야 하고 예쁨 받아야 하는 강박에서 벗어난 것 아니겠나. 타인이 쳐주는 박수, 타인이 주는 것만이 타당한 보상이라고 느끼는 마음은 위험하다. 거기서 벗어나는 순간 어마어마한 자유를 느낄 수 있다.
우울한 ‘End of the world’의 작업기도 궁금하다. 타블로 : 미국에서 만들었다. 즉석에서 기타 리프를 만들었다. 즉흥 잼 하듯이 완성해두고 이 멜로디를 누가 부르면 좋을까 생각하다 지소울에게 연락했다. 어쩌면 이 곡이 가장 오래 작업한 노래일 수도 있다. 가사도 여기저기 바뀌었고 멜로디도 바뀌었다.
이 노래가 에픽하이가 지향하는 작품성의 표현인 것은 아닐까. 우울, 분노… 타블로 : 하지만!(웃음) 세상이 끝날 때까지 날 사랑해달라는 긍정의 표현도 숨겨져 있다. 없는 희망 얘기 못한다. 모든 에픽 하이 노래에서도 똑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Fly’ 예시를 들어볼까. 노래를 ‘힘들죠?’로 시작한다. 당신들이 힘들다는 것을 일단 이야기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을 꾸고 힘을 내보자는 메시지를 담는 것. 이게 에픽하이의 지향이다.
2003년 데뷔 앨범부터 이어져 온 ‘Lesson’ 시리즈도 < Epik High Is Here 上>에서 ‘Lesson zero’로 마무리되는 모습이다. 새로운 곡을 계획하고 있나. 타블로 : ‘Zero’로 돌아가버렸으니 새로운 시작처럼 여겨질 수도 있는데, ‘Lesson’이라는 제목으로 곡을 내는 건 그만하고 싶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 했고 새로 쓸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노래를 쓰던 ‘Lesson’ 시리즈처럼 쓰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 어느 순간부터 내가 뭔데 누군가에게 가르치나 싶기도 하고… 그런데 또 모르지?
헤이즈가 참여한 ‘내 얘기 같아’는 특히 독특하다. 투컷 : 앨범에서 가장 많이 공들인 곡이다. 가장 끝까지 갔던 편곡이었기 때문에 새로웠다. 힙합의 요소는 거의 없었다고 본다. 보컬 부분에서 힘들지는 않았다. 특히 헤이즈는 이야기할 때도 편했고 표현도 좋았고 베스트 게스트 중 한 명이다.
에픽하이의 정서가 우울로 수렴하는 데 반해 그들의 발화 방식은 상당히 다채롭다. 이미 힙합이라는 범주를 넘어 대중가요의 영역에 진입했다 봐도 무방하다. 라틴어쿠스틱 기타 리듬으로 출발하는 ‘Rosario’가 힙합 팬들에게 어필한다면 ‘내 얘기 같아’는 드럼 없는 오케스트라 구성이 귀를 잡아끈다.
최적의 파트너만 섭외한다는 게스트와의 호흡도 정점이다. 싱어송라이터 김사월부터 우원재, 넉살, 창모 등 래퍼까지 섭렵한다. 데뷔 초부터 끊임없이 장르 뮤지션의 덕목을 요구받았던 에픽하이의 도전 정신은 4집 < Remapping The Human Soul > 속 ‘노 장르, 저스트 뮤직(No Genre, Just Music.)’ 문구에 확고히 정립되어있다.
“어떻게 감히 힙합에 EDM을 넣냐, 어떻게 감히 힙합을 120 BPM으로 하냐… 공격을 많이 받았죠. 하지만 지금 모두가 그렇게 음악을 하고 있잖아요. 힙합 한다는 이유로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못하면 그게 오히려 힙합이 아니지 않나요?.”. 에픽하이로 데뷔하기 전 록 밴드를 꿈꿨다는 타블로가 웃으며 이야기를 건넸다. 에픽하이의 안정 아래에는 치열한 도전과 고민, 자유로운 창작의 노력과 뚝심이 있었다.
< Epik High Is Here 下 >도 다채로운 작품인가? 타블로 : 하편이 더욱 다양하다. 나는 진심으로 우리가 어떤 장르로 느껴지고 이런 논쟁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 내일 아침 일어났는데 컨트리 음악이 하고 싶다? 그럼 하는 거다. 왈츠를 하고 싶으면 그냥 한다. ‘한 번도 해보지 않았지만 해보자’는 생각이다. 물론 실수한 적도 있고 빗나간 적도 있다. 처음 시도하는 장르라 표현하는 데 있어 팬들에게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뭐지’ 싶었던 적도 있다. 그렇다고 포기해서 되겠나. ‘에픽하이가 왜 이런 음악을 해?’라고 한들 꾸준히 계속해야 어느 날 능숙해져서 ‘에픽이 이런 음악도 해줘서 고맙다’ , ‘언젠가 이런 음악도 해달라’ 얘기가 나오는 거다. 처음 해보는 건데 어떻게 잘하나. 완전히 색다른 걸 할 때 응원해줘야 한다. 투컷 : ‘트로트’도 있지 않나 (웃음). 지금 뒤 컴퓨터에 ‘하(下)’ 편이 있다. 미쓰라 : 안 들려 드릴 거다 (웃음).
이번 앨범을 빛낸 많은 게스트들에 대해 인상적이었던 에피소드가 있다면. 타블로 : ‘Rosario’의 지코는 입대 열흘 전에 다 해주고 뮤직비디오 촬영도 했다. 촬영장 와서 입대 소식을 알렸다. 쉬고 싶기도 했을 텐데 끝까지 열심히 열정적으로 해주는 모습이 너무 멋졌다. 뮤직비디오 나온 날 가장 먼저 문자 해주고… ‘정당방위’에서 창모가 마디 수 잘못 세서 여덟 마디 더 한 것도 기억에 남는다. 경쟁하자는 건 아니지만 많은 래퍼들이 참여하는 곡 같은 경우는 기본적으로 마디 수가 같아야 하지 않나. 그런데 창모는 느낌으로 작업을 해서인지 본인도 몇 마디인지를 모르고 우리에게 작업물을 보내줬다. 결과물을 들어보니 우원재, 넉살에게 이야기를 해줘야만 했다. 이렇게 됐다고 (웃음).
전체 커리어에서 가장 좋았던 게스트를 꼽아줄 수 있나. 타블로 : 김종완이랑 작업할 때가 정말 잘 맞다. 둘의 감성이 워낙 비슷하니까. 내가 그 친구가 부를 멜로디를 쓸 때는 정말 아무런 어려움 없이 쓴다. 그리고 내가 작곡한 곡을 너무 잘 표현해주고… 그런데 이 친구랑은 음악만 잘 맞다. 감수성이 잘 맞는 케이스. 나얼도 좋았다. 투컷 : 한 명만 뽑기 어려운 것 같은데… 아이유, 윤하, 헤이즈 모두 좋았다. 미쓰라 : 다 좋은데 나는 이하이와의 궁합이 너무 좋았다. 서로 잘 어울리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투컷 : 녹음할 때부터 느낌이 온다. ‘아 이건 됐다!’ 첫 소절 들었을 때 느낌이 안 좋은 곡은 꼭 빠지게 된다. 함께 작업한 모든 사람들이 좋았다.
에픽하이의 행보에서 독특한 것은 홍보 방식의 최신화다. 스포티파이와 더불어 틱톡 챌린지 등 다양한 SNS 홍보 수단을 통해 과거와 또 다른 재미있는 행보 및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타블로 : 테크놀로지에 대해 관심이 많다. 과거 트위터 할 때도 똑같은 개념으로 받아들였다. 남들보다 빨리 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트렌드를 따라가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테크놀로지를 어떻게 활용하는지는 항상 주의 깊게 바라본다. 아빠가 된 게 가장 결정적이었다. 내 아이가 어른이 되어 살아가야 할 세상은 훨씬 발전해 있을 텐데, 그 미래를 어느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나. 이런 방식으로 한 번 해보는 게 재밌겠다는 생각이었다.
열 장의 정규 앨범을 작업하며 가장 트러블이 적었던 작품은 무엇이었나. 타블로 : < 열꽃 > 만들었을 때 트러블이 없었다. 혼자서 다 만들면 되니까… 농담이다. 미쓰라 : 안 싸운지는 꽤 됐다. < We’ve Done Something Wonderful > 때부터 안 싸웠다. 투컷 : < 신발장 > 때는 미쓰라가 안 좋았지만 개인적인 문제였고, 예전부터 의견 충돌은 있었어도 싸우진 않았다. 그리고 최근 작품들에서는 의견 충돌도 없었다. 이젠 서로를 너무 잘 안다. ‘저런 작품을 만드는 데는 이유가 있다’ 싶더라.
마지막으로 에픽하이의 < Epik High Is Here 上 >를 듣는 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해달라. 타블로 : 모든 관심이 정말 고맙다. 10장의 정규 앨범을 낸 팀이라 관심이 떨어질 수도 있는데 핏대를 세워 누군가는 옹호하고 응원하고 누군가는 비판하는 모습이 행복하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관심을 가져준다는 사실이 좋다. 투컷 : 당부하자면 이번 작품으로 앨범이 완성된 게 아니다. < Epik High Is Here 下 >를 생각하며 애피타이저처럼 즐겨달라. 미쓰라 : 애피타이저는 좀 아닌 것 같은데… (웃음) 타블로 : ‘에픽하이가 좋아서 음악을 듣는다’라는 반응을 더 이상 바라진 않는다. 우리 음악을 여러분들의 삶에 어떤 용도로 사용했으면 좋겠다. 에너지가 필요할 때, 면접을 앞두고 있을 때 ‘Rosario’를 듣다가 모든 걸 잊고 싶어 질 때는 ‘수상소감’이나 ‘내 얘기 같아’ 같은 노래를 듣듯이. 생활에 자연스레 녹아들었으면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곡과 가사를 외워주시는 것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이 감사하지만… 당신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그런 음악이 되었으면 좋겠다.
인터뷰 : 임진모, 김도헌, 임동엽, 김성욱 정리 : 김도헌 촬영 : 김도헌, 임동엽, 김성욱 편집 : 김도헌, 정수민
“자신의 유년을 에픽하이와 보냈다.”는 어느 팬의 말처럼 2003년 데뷔 이래 그들의 음악이 대중의 기억에 파고들 수 있었던 것은 그룹이 만들어낸 고유의 감성 때문이다. 한 부분에 매몰되지 않고 문학적으로 풀어내는 감정의 형태는 인간의 체온과 닮아 있었고, 우울과 명랑 등 높낮이를 오가며 위로를 전달했다.
동시에 흐려졌다. 익숙해진 문법은 클리셰가 되어 오히려 과거를 돋보이게 만드는 지점이며, 개인의 상처를 소재 삼아 깎아 내려간 자기 고백의 일지 역시 반복된 난도질로 듣기 싫은 투정이 되어 버렸다. 따스한 온도를 지녔던 에픽하이조차 시간이 지나며 생긴 수많은 생채기에 마음이 마모되었고, 조금은 무표정하게 됐다. 세상과 선을 긋기로 다짐한 어른의 말로. 에픽하이의 열 번째 앨범, < Epik High Is Here 上 >이다.
‘Lesson Zero’가 메시지를 드러낸다. 레슨이라는 제목 아래 꾸준하게 에픽하이의 세계관을 관통하던 시리즈는 천재를 지칭했던 한 아티스트의 시선을 담고 있다. 어쩌면 거만하게 시스템을 비판해왔던 화자는 ‘이제 보여, 모든 답을 향한 내 질문은 나를 무릎 꿇게만 할 것이고 나를 0으로 되돌리기만 할 것을’이라며 패배를 선언했고, 그 무기력증은 앨범의 전반에 걸쳐 주요 서사로 작동한다.
명백한 주제 의식 아래 세련된 신진 세력을 녹여낸 프로듀싱도 주목할 만하다. 씨엘과 지코가 참여한 라틴풍의 ‘Rosario’부터 프로듀서 코드쿤스트가 주조한 ‘정당방위’도 우원재, 넉살, 창모란 신선한 재료에 걸맞은 결과물이 되었고, 이는 낮게 깔린 분위기를 중심으로 꾸려진 비트와 조화를 해치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다한 미쓰라 진의 도움이 크다.
특히 ‘수상소감’이 눈에 띈다. 희망, 좌절의 해소 등 유효한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했던 그들의 행동은 물거품이 됐고, 타인과 벽을 쌓는 행위로 이제야 진짜 모습을 찾게 된 심경 변화가 흥미롭다. 무엇보다 후렴구에서 비아이가 표현하는 ‘먹구름도 구름이었지, 쓴웃음도 웃음인 거지’란 글귀는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포기에 가까운 심정처럼 여겨져 공허하다. 1인칭부터 3인칭까지 특정 대상을 상대로 했던 그들의 시점이 더는 뚜렷하지 않은 이유다.
그런 점에서 ‘내 얘기 같아’가 아쉽다. ‘연애소설’, ‘우산’, ‘헤픈 엔딩’ 등 서정적인 선율 위로 보컬이 다수의 지분을 차지하는 전형적인 에픽하이의 타이틀로써 이번 곡 또한 헤이즈의 힘을 빌려오지만 선을 이탈한 이별이란 재료에 딱히 몰입할 여지가 없다.
위안의 성질은 아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 Epik High Is Here 上 >의 손끝은 분명 우리에게로 뻗어있다. ‘Leica’의 ‘이러면 어때 저러면 또 어때’란 가사처럼 무감각해진 에픽하이만큼 불투명해진, 흘려보내는 것이 친근한 이 시대의 ‘성인’에게 보내는 편지인 것이다. 당장 현실을 살아가는 모두의 이야기이자 아직 이곳에 살아 있다는 외침이 거대하다.
– 수록곡 – 1. Lesson Zero 2. Rosario (Feat. CL, ZICO) 3. 내 얘기 같아 (Feat. 헤이즈) 4. 수상소감 (Feat. B.I) 5. Leica (Feat. 김사월) 6. 정당방위 (Feat. 우원재, 넉살, 창모) 7. True crime (Feat. Miso) 8. Social distance 16 9. End of the World (Feat. GSoul) 10. Wish you were
< 열꽃 >은 타블로 혼자였고, 아직 아파보였다. < 99 >도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어색했다. 이후 TV, 라디오에서 근황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에픽하이’는 보기 어려웠다. 데뷔 10주년(2013)에도 큰 이벤트가 없었다. 알 수 없었다, 돌아오긴 하는 것 인가. 지난 9월에서야, 타블로는 녹음이 완료되었다고 알렸다. 그리고 10월, 길었던 공백을 보란 듯 박살냈다. 완전한 복귀작 < 신발장 >. 평단도, 대중도 돌아온 그들을 반겼다. Well Comeback을 향한 Welcome Back, 뜨거웠다.
인터뷰는 그 유명한 YG 사옥에서 진행됐다. 녹음실이 있는 3층, 그들은 자리를 정리하며 분주하게 맞이했다. 친근했다. 평소처럼 몰입과 장난을 오가며 다양한 질문에 답변해주었다.
에픽하이 음악에는 세 사람의 멘탈 파노라마, 수없는 심정의 흐름이 담겨있습니다. 타블로 씨의 상황은 국민 모두가 알고 있었고요. 이번 앨범 같은 경우 미쓰라 씨가 힘들었다고 들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나요? 일종의 성장통이었나요? 아니면 음악적 회의였나요?
타블로 : 이게 굉장히 멋있는 문제가 되었군요. ‘아티스트의 고뇌’로 미화됐네요.(웃음) 다행이에요.
미쓰라 : 제가 음악적인 활동에 있어 게을렀던 점이 커요. 열심히, 꾸준히 못하던 시기가 있었죠. 그리고 제 결과물들이 저를, 듣는 분들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힘들었어요.
디스(Diss)나 안티가 많았나요?
미쓰라 : 디스라기보단 팀 내에서 비교가 많았죠.(웃음) 또 힙합 신에 여러 래퍼들과 비교한 글을 보고, 들었어요. 그런 지나쳤던 것들이 쌓여서 부담으로 온 거죠. 즐겁게 하자고 한 건데 부담이 돼서 가사를 못 쓰던 시기도 있었어요. 다행히 옆에서 많이 도와줬고, 지금은 다 회복됐어요.
친구들은 이미 랩 거물인데 그 사이에 난 떠있는 기름 최고 아닌 최악부터 순서를 매길 때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이름 – ‘BORN HATER’ 중 미쓰라의 벌스 그를 늪에 빠트린 힙합 팬들의 멸시를 담았다. 이어지는 가사에서 반격한다.
회복되었다고 하시지만 이번 앨범에서 미쓰라 씨의 참여도는 낮습니다. 팬들 입장에서 아쉬운 부분인데요.
미쓰라 : 앨범 초반, 중반까지 제가 없었어요. 제 참여가 부진한 곡들은 그때 두 멤버가 거의 완성한 곡들이에요. 블로 솔로 곡도 있었고요. 사실 제가 함께 가는 게 맞지만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었어요. 또 제 스스로도 완성도 있는 곡을 저 때문에 망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힘든 시기에 두 멤버가 잘 끌어줘서 마지막에 합류하게 됐죠.
타블로 : 저는 어린 시절부터 글을 써왔기 때문에 Writer’s block에 대해 교수들이, 작가들이 얘기한 걸 들었어요. 그때는 안 믿었죠. ‘잘’ 안 써질 때는 있어도, 그냥 안 써지는 건 노력 부족이라고 생각했어요. 항상. 안 써지면 써질 때까지 노력해야죠. 저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 개념을 미화된 핑계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우리 팀 멤버가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니 정말 있구나 싶더라고요.
한번은 쓰라를 가둬놓기도 했어요. “너 여기서 걸어 나가는 순간 에픽하이에서도 걸어 나가는 거다. 여기서 먹고 자고, 뭘 하든 나도 있을 테니 해라!” 그렇게 정말 한 달이 지나도 한 단어도 못 쓰는 그런 경우가 있더라고요. 그 때, 우습게도 11년 만에 처음 든 생각이 ‘이래서 우리가 팀인 거지, 이럴 때를 위해서 팀을 만든 거였지.’였어요. 우리는 솔로 뮤지션들이 모인 크루가 아니라 팀이잖아요. 타블로, 투컷, 미쓰라가 있기 전에 ‘에픽하이’ 네 글자를 내세워서 음악 하는 사람들이잖아요. 팀원 누군가가 걸어갈 힘이 없다면 안고, 업고서라도 뛰어야죠. 계속 했어야하는 생각인데 그걸 이번에 깨달았어요.
투컷 씨는 두 멤버의 공백 기간이 길어져, 개인 활동을 했을 법도 한데 별도의 외부 작업이 없었습니다. 혹시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투컷 : 기본적으로 제 음악의 베이스는 에픽하이로 표현하는 게 옳다고 생각해요. 외부 작업을 왜 안 하냐는 질문이 많은데 타블로와 미쓰라의 주제, 가사가 빠지면 제 음악은 완성이 안 되는 것 같아요.
우리가 생각할 때 ‘의리’네요.
투컷 : 의리라고 생각해주시면…
타블로 : 감사하죠. (웃음)
본격적으로 새 앨범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타이틀곡, ‘스포일러’는 타블로 씨 개인적인 작품인데요, 투컷 씨가 에픽하이로 발표하자고 설득하셨다 들었습니다.
투컷 : 두세 번 밖에 안 들어봤는데, 2년 동안 잊을 수 없었어요. 이 노래는 뭔가 있구나 느꼈죠. 에픽하이와 타블로 솔로 중 무엇으로 내야 할지 고민 많았지만, 제가 우겼어요.(웃음)
에픽하이는 타블로의 작품 세계와 어떻게 선 그어야 하나요? 확실한 ‘분간’은 아니더라도 납득할 수 있는 기준이 필요해 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스포일러’는 맞지 않는 트랙 아닌가요?
타블로 : 처음에는 어느 정도 분리하고 싶었어요. 고민하다 언젠가는 ‘왜 나누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에픽하이도 저고, 저도 에픽하인데 굳이 나눌 필요가 있나. 그리고 이번 앨범 같은 경우는 미쓰라의 부재로 작업이 미뤄졌었어요. 주변 뮤지션 동료들은 저와 투컷, 둘이서 하라고 했죠. “둘은 가장이기도 하고 장기 공백도 팬들에게 실례다.”, “그냥 솔로 앨범을 내라”고 했었어요. 그래도 저는 이 작업의 끝이라는 무대에 에픽하이, 세 명이 함께 서 있고 싶었어요, 어떻게 되든 간에. 또 아직 제 두 번째 앨범을 하고 싶지 않았고요.
투컷 : 굳이 구분을 지어야 하냐고 하지만 저는 구분이 돼요. (전원웃음) 솔로 앨범은 한 장 뿐이지만, 감정과 표현 방법이 더 짙어요. 에픽하이 음반에 타블로 솔로 곡들도 많았잖아요. ‘낙화’나, ‘Nocturne’이나. 이런 곡들에 미쓰라의 목소리가 첨가되면서 짙음이 약간 희석되고 새로운 색으로 표현되는 것 같아요.
‘스포일러’와 더불어 더블 타이틀곡, ‘헤픈엔딩’이 큰 인기입니다. 롤러코스터 조원선 씨의 참여로 더욱 화제가 되었는데요. 기본적으로 곡을 만들 때 주안점이 있었다면요? 그리고 멜로디 측면에서 피쳐링 할 상대를 생각하며 작업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타블로 : 저희가 롤러코스터의 팬이에요. < 꿈꾸는 라디오 >에서 가장 많이 튼 노래 중 하나가 ‘습관’. 너무 틀어서 그만 틀라는 얘기도 들었을 정도에요. 활동안하신지는 오래됐는데 그분들 공백은 아무도 채울 수 없어요. 그래도 누군가는 채워줘야 하거든요, 저를 위해서라도. 듣고 싶으니까 제가 만들어야겠다는 생각했어요. 성공한 팬의 예인 거죠.(웃음)
지선, 윤하, 이소라 등 많은 여성 보컬리스트들과 콜라보레이션 작업을 해왔습니다. 조원선 씨만의 차이점이 있다면요?
타블로 : 무심한 보컬이 매력이잖아요. 맞춰서 무심한 노래를 만들었어요. 노래의 주제도 그렇고요. 그 분 아니었으면 노래를 만들지 않았을 거예요. 제가 섭외할 때도 노래를 보내드리고, 만약 안하시면 노래 안 만들 거라고 말씀드렸어요. 저는 만들면서 조원선 선배님께서 부르고 있는 게 들렸으니까요. 애들은 극단적이라고 말했지만 다행히 선배님께서도 좋다고, 함께 하자고 해주셔서 완성하게 됐죠.
이렇게 타블로가 선배에게 패기 넘치는 부탁을 한 경우는 처음이 아니다. 솔로 앨범 수록곡, ‘집’을 작업할 때도 마찬가지, 처음부터 이소라를 염두에 두고 작사 작곡 했다. 그리고 불러주지 않으면 곡을 쓰지 않겠다고 전해, 이소라는 협박이라며 방송에서 재미나게 회상했다.
콜라보레이션에 있어 무조건 아티스트 중심이군요. 원곡이 있었던 ‘EYES, NOES, LIPS’같은 경우는 어떻게 작업하셨나요? 인상적인 수록곡 중 하나입니다.
타블로 : ‘눈, 코, 입’이 한창 붐일 때, 커버곡이 나왔었죠. 사실 저희도 별 생각 없이 만들었어요. 회사에서 만들어 볼 생각 없냐 했는데, 저는 가족 여행 때문에 급하게 하고 갔거든요. 끝내 놓고 제주도 갔는데 양 사장님께서 좋다고 완곡으로 만들어달라고 하셔서 돌아왔죠. 그렇게 완성되었어요. 때로는 엉성하게 만든 습작 같은 작품이 잘되는 것 같아요.
투컷 : 저는 전화나 문자로 확인하지도 않았어요.(전원웃음) 식탁 위에 올려져있는 핸드폰에 양 사장님께서 보낸 문자를 아내가 읽어줘서 알았죠. 샤워하는 도중에 어떻게 만들면 되겠다는 생각이 한 번에 왔어요. 작가들에게 영감이 떠오르듯이. 곧바로 작업실 가서 머릿속 그대로 그렸고 타블로와 함께 완성했죠.
타블로 : 아, 그리고 원곡자인 테디 형이 정말 좋아하셨어요. 뒷부분 영어 버전 보컬도 원래 녹음해 놨었는데 태양이 다시 불러서 재녹음할 정도로 커버 버전에 애착을 갖고 계시더라고요. 원곡자가 만족하는 결과물이 나와서 저희도 되게 좋았어요. 큰 찬사죠.
에픽하이는 YG 엔터테인먼트 소속이면서도 탈 YG 성향이 짙습니다. 양 사장님이 그러한 매력을 위해, 회사 밖 스튜디오에서 작업할 것을 권유했다고 들었습니다.
타블로 : 권유라기 보단 회사 스튜디오를 사용 못하게, 아예 스케줄 못 잡게 만들어 놓으셨었어요. 처음에는 괜한 YG 엔지니어들과 싸웠어요. 녹음 잡으려고 하면 계속 시간이 안 된다고 하니까. 화를 많이 냈었는데, 양 사장님께서 밖에서 작업하라고 하셨죠. 이게 의외였던 게 제작비가 배로 들거든요. 그건 회사 돈이고요. 왜 굳이 이래야하나, 어이없다는 생각으로 1집부터 함께한 엔지니어와 얀키의 ARK스튜디오로 갔어요. 첫 녹음 날부터 느꼈어요. 아, 이래서 보냈구나.
투컷 : 이거지.
타블로 : 다른 뮤지션들도 그렇고, 환경을 흡수하는 것 같아요. 사람들과 같이 생활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들의 영향 받기도하고요. 흔히 저희에게 YG 색이 입혀진다고 생각하는데, 잘 들어보면 YG에도 우리의 색이 점점 묻어나고 있거든요. 예를 들자면 이번 태양 앨범도 그랬죠.
그럼에도 에픽하이에게 YG 느낌이 들어간 트랙은 무엇이 있을까요? ‘Eyes, Noes, Lips’?
타블로 : 그건 원곡이 YG 노래잖아요.(전원 웃음) 하지만 ‘눈, 코, 입’을 YG 스타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솔직히 편견이에요. 태양이 불렀을 뿐이에요. 크래딧을 보지 않는다면 테디 형이 만들었을 거라고 누가 알겠어요. YG 색이라는 게 존재하는지조차 모르게 만들어버린 노래인거죠.
투컷 : 기존의 YG 곡과 가장 반대로 간 곡이죠.
타블로 : 음악적인 색깔에 대한 편견이 차지하는 부분이 굉장히 큰 것 같아요. 다만 이게 재밌게도 볼 수 있는 것이, 사람들의 편견이 있어야 깨질 때의 쾌감, 희열이 또 따르거든요. ‘BORN HATER’가 그런 경우죠. 힙합 팬들에게 에픽하이, 버벌진트, 빈지노는 친숙하지만 바비, 비아이, 송민호는 불편하거든요.(웃음) 그리고 노래 주제가 ‘Hater’. 편견에 휩싸여 남을 욕하는 사람들이잖아요. 라인업만 공개했을 때도 반응이 폭발적이었어요. ‘싫다’, ‘별로다’, 혹은 ‘기대 된다’, ‘대박이다’. 저는 그런 반응들이 마음에 들었어요. 노래 자체가 그것에 대한 노래였으니까요.
과거 베스트 리믹스 앨범, 책 형식의 북 앨범 등 주어진 틀이 아닌 다양한 활동을 지속해왔는데요, YG에 들어간 이후 살짝 움츠러든 것은 아닌가 생각도 듭니다.
타블로 : 다양한 활동 많이 하고 있어요. ‘Born Hater’의 뮤직비디오가 꽤 새로운 시도였고, ‘또 싸워’의 노래방 버전도 있죠. 맵더소울은 없어진 게 아니에요. 이번 앨범에도 로고가 박혀있듯 YG 안에 맵더소울이 있는 것처럼 여럿 활동할 것 같아요. 예를 들어 ‘Map TV’도 계속 하게 될 것 같고요. 하고 싶어서 했던 것들, 재미있어서 했던 것들, 다양한 활동의 출발점은 이번 앨범이에요. 시동을 건다고 할 수 있겠죠.
‘Tomorrow’부터 태양과 합이 잘 맞습니다. 미쓰라 씨는 태양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미쓰라 : 음악적으로 당연히 인정하고, 음악 외적으로도 항상 준비 되어있어요. 또 가진 에너지가 좋아요. 피쳐링인데도 주변 사람들을 함께 끌고 올라가잖아요.
타블로 : 능력 이전에 사람 자체가 음악에 잘 맞아요. 제가 11년 동안 음악하면서 수많은 뮤지션들을 만나봤는데, 창작을 100% 행복으로 느끼는 사람은 처음이었어요. ‘Tomorrow’ 작업할 때 굉장히 반성했어요. 내가 음악을 만들 때 얼마나 많은 한숨을 쉬고, 녹음하는데 에러가 나서 지워졌을 때 짜증내고, 귀찮아하고 그랬던 순간들이 떠올랐죠. 우리는 꿈을 이룬 사람들인데 매순간을 행복하게, 축복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할망정 누군가가 던져준 직책처럼 느끼고 있는 제가 한심스럽더라고요.
태양은 정말 음악을 사랑하는 친구에요. 저번 앨범 작업하는데 4년 걸렸어요. 9곡이 수록되어있지만 그 앨범을 위해 저와 작업한 노래가 14, 15곡정도 돼요. 다른 프로듀서들 곡까지 총 60곡, 믹스까지 한 건 30곡정도 돼요. 트리플 CD를 내도 될 곡 수죠. 한국의 투팍이에요.(전원웃음) 그런 상황에서 앨범이 미뤄지고 완성이 잘 안되는데 한 번도 미소를 잃지 않더라고요. 그런 에너지가 좋아요. 덕분에 저희도 그렇게 됐어요. 뜻대로 안 풀려도 그 자체에 감사하고 즐기는 법을 태양에게 배웠어요.
엄청난 찬사네요. 그렇다면 에픽하이 멤버는 어떤가요? 투컷 씨, 미쓰라와 타블로에게 태양과 같은 찬사를 보내주실 수 있나요?
타블로 : 투컷을 선택하시다니.(웃음)
투컷 : 이거 정말 어려운건데, 이거 연결해서 이야기 해볼게요. 11년의 커리어 동안, 미쓰라는 굉장히 힘들었을 거예요. 타블로가 엄청나잖아요. 멜로디나 곡 작업도 좋지만 ‘문학적으로’. 제가 볼 때는 세상에서 제일 글을 잘 쓰는 사람 중 하나에요. 그런 사람 옆에서 미쓰라는 같은 분량의 랩을 써야 하는 거예요. 그 작업이 정말 고되죠. 제가 자주하는 혼잣말이 “래퍼 안하길 잘했다”에요. 플로우도 짜야하고, 말이 되게 써야하고, 그 안에 라임, 펀치라인, 또 주제에서 벗어나면 안 되죠. 한정적인 룰 안에서 문학적으로 뛰어나야 한다는 게 힘든 일이잖아요. 힘들었을 거예요. 그래도 그동안, 팀 내에서 균형을 잘 맞춰줘 왔어요. 그것만으로도 저는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와, 한 방에 두 명 다 했어!(전원웃음)
에픽하이 멤버들만으로도 훌륭한데, 콜라보레이션이 잦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타블로 : 저희는 결과물이 중요해요, 개인의 욕심보다 월등히. 누구의 파트가 들어가나, 안 들어가나, 크레딧이 드러나나, 안 드어나나 이런 건 부수적인 거예요. 누구 한 명이 주목받고 싶어서 퀼리티를 떨어트리는 일은 절대 있어선 안 돼요. 만약 우리가 밴드라면 미쓰라는 드럼, 제가 기타, 투컷이 베이스에요. 멤버 한 명이 연주를 잘 못한다면, 전 과감하게 다른 밴드의 멤버를 데려와서 녹음할거에요. 그런 부분에서 에픽하이는 힙합 그룹이지만, 토이나 공일오비 같은 오픈 형식의 팀이라 생각을 해요. 그렇게 하는 게 음악 듣는 사람에 대한 예의 같기도 하고요. 실제 비틀즈도 그랬었죠. 물론 저희를 비틀즈와 비교하는 건 아니에요.
타블로의 말대로 비틀즈는 결과물을 위해 부분적으로 다른 연주자에게 의뢰했었다. 외부 밴드가 아닌 내부에서도 링고 스타를 대신해 폴 매카트니가 드럼 녹음한 경우가 있었다. < White album >에 수록된 ‘Back in the U.S.S.R.’, ‘Dear Prudence’와 비틀즈 마지막 UK 넘버원 싱글, ‘The Ballad of John & Yoko’가 그렇다.
투컷 : 아무래도 표현의 폭이 넓어지죠. 피쳐링뿐 아니라 편곡적인 부분에서도 저희가 어떤 주제나 가사를 받쳐줄 수 없을 경우, 과감히 외부 프로듀서를 영입해요. 이번에도 그런 경우가 있었죠.
타블로 : ‘Lesson 5’는 제가 비트 만들고 녹음, 믹스까지 끝냈었어요. 이대로라면 제 노래 하나 더 들어가는 거지만, 저는 부족하다는 생각에 아카펠라를 피제이(Peejay)에게 보냈어요. 멤버들은 좋은데 왜 그러냐며 말렸지만 저는 더 좋아질 수 있다는 확신에 의뢰한 거예요. 듣는 사람에겐 음악이 우선이기 때문에 자기를 희생하더라도 그렇게 하는 게 옳은 것 같아요.
‘막을 올리며’는 드레이크의 ‘Tuscan leather’가 떠오릅니다. 혹시 이번 트랙 제작에서 누군가를 참고하거나 영감을 받은 경우가 있나요?
타블로 : 투컷이 드레이크 정말 싫어하는데.
투컷 : 전 그 사람 인정 안 해요.(전원웃음) 저는 원곡인, The Miracles의 ‘I didn’t realize the show was over’에 꽂혀서 손을 대기 시작했어요. 가사와 멜로디가 정말 마음에 들어서 최대한 원곡 느낌을 살렸죠. 거기에 최근 유행하는 808 붐 킥을 이용한 브레이크 비트를 섞으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해서 만들게 되었어요. 특별한 레퍼런스는 딱히 없어요.
타블로 : 오히려 저희 1집의 ‘막을 내리며’가 레퍼런스죠. 그 앨범에 소울 샘플링이 좀 많아서, 이어지는 느낌을 내고 싶었어요. 그래서 일부러 첫 곡으로 한 거고요.
각자 < 신발장 >의 베스트 트랙을 꼽아 주세요.
미쓰라 : 저는 ‘스포일러’요. 계속 기억에 남아요.
타블로 : 저는 ‘헤픈 엔딩’과 ‘BORN HATER’. ‘스포일러’는 제가 타이틀하지말자고 얘기했었어요. 그런데 멤버들과 스탭들, 모두가 타이틀곡으로 ‘스포일러’를 꼽았어요. 저만 ‘헤픈 엔딩’을 생각하고 있었고요. 그래서 더블 타이틀로 냈지만 ‘헤픈 엔딩’에 사람들이 더 끌리는 걸 보니 제가 대중에게 더 필요한 노래를 잘 가져온 것 같아요. 라디오 DJ의 영향이 컸죠. 개인적인 생각인데, ‘스포일러’는 못생긴 사람이 옷 잘 입은 그런 경우 같아요. ‘헤픈 엔딩’은 잘생긴 사람이 대충입고 편의점 가는.
투컷 : 슬리퍼 끌고 람보르기니 타는 거지. ‘스포일러’는 차려입고 지하철 타는.
타블로 : 지하철이 뭐가 문젠데. 이런 싸가지 없는. (전원웃음) 전 ‘Amor Fati’에도 애착이 가요. 사실 빼려고 했었어요. 이건 나중에 제 솔로 앨범에 넣으려고 했던 곡이에요.
투컷 : 타이틀 둘 중에 따지자면 ‘스포일러’가 더 좋았어요. 헤픈 엔딩과 더블 타이틀하기를 원하기도 했었고, 수록곡 중에선 ‘BORN HATER’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 신발장 >의 키워드와 출발점, 그리고 어떤 앨범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궁금합니다.
타블로 : ‘스포일러’에서 ‘This is our last parade.’라는 표현이 나와요. 저희 콘서트 제목도 ‘Parade’에요. 그래서 ‘혹시 ‘스포일러’ 가사 내용이 에픽하이의 미래에 대한 스포일러였나’라는 추측도 있나 봐요. 미래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장담할 수는 없지만요. 하고 싶었던 말은 매 순간이 마지막 축제라는 생각으로, 음악 하고 행복하게 하루하루를 살자는 거죠. 저희는 예측하지 못했을 때 마지막이 될 뻔했던 순간들이 많았으니까요. 영원할 줄 알고 충분히 즐거워하지 않고, 행복해하지 않았던 때에 뺏겨버리니까, 이제는 인생 전반적으로 마지막 축제인 것처럼 살게 되었어요. 앨범의 궁극적인 메시지도 마찬가지에요. 삶도, 이별도, 사랑도, 역경도 모두 축제다. 언제든 마지막일 수 있으니, 축제답게 순간순간을 살아가자. 이런 의미였어요.
미쓰라 : 많은 감정이 섞여있는 앨범이에요. 미안함도 있고, 감사도 있고, 후회, 깨달음… 그것들이 한 번에 와서 지금도 진행 중이고요. 또 이를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숙제도 남겨준 앨범 같아요.
투컷 : 또 한 번 앨범을 할 수 있구나, 이런 즐거움으로 가득한 작업이었어요. 나오고 나서는 그 즐거움이 몇 만 배가 됐죠. 앨범 또 했는데 이렇게 잘 됐구나, 살면서 이런 날이 또 오는구나. < 신발장 >은 제게 큰 의미에요. 진정한 에픽하이의 복귀작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