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8년부터 1991년까지 픽시스는 절륜했다. 이 시기에 내놓은 넉 장의 스튜디오 앨범 < Surfer Rosa >(1988), < Doolittle >(1989), < Bossanova >(1990), < Trompe le Monde >(1991)는 미국 인디록의 보석으로 남았다. 사나운 소리에 아름다운 선율을 버무린 이들의 음악은 청춘과 공명했고 예술성에 고취된 마니아들까지 사로잡았다.
무려 23년의 공백을 갖고 2014년에 발표한 < Indie Cindy >는 전성기 파괴력에 못 미칠지언정 밴드의 구심점 블랙 프랜시스(Black Francis)의 저력을 확인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만회하듯 꾸준한 음반 발매로 얼터너티브 록의 자존심을 지켜가는 이들은 영국의 록 듀오 로열 블러드와 작업했던 젊은 프로듀서 톰 달거티와 2016년 작 < Head Carriers >와 2019년 작 < Beneath The Eyrie >에 이어 신작 < Doggerel >을 합작했다.
‘Debaser’와 ‘Velouria’ 의 파괴력을 억하는 이들에게 신작은 밋밋하지만, 작금의 픽시스는 지난 시절의 분노를 성찰로 풀어낸다. 엉터리 시(Doggerel)이라는 음반 제목처럼 특유의 난해한 노랫말이 가득하나 잘 다듬은 사운드와 편곡으로 변화를 타진한다. 황량한 분위기에 빔 벤더스(Wim Wenderrs)의 영화가 그려지는 ‘Thunder and lightning’ 속 ‘일단 그게 사라지고 나면 조수와 달이 함께 간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이교도 남자여 당신은 멀리 떨어져 있노라니(Once it’s gone you’ll know, tides and moons go, pagan man, you re miles away)’처럼 가사는 문학적이고 함축적이다.
픽시스는 분명 블랙 프랜시스의 팀이지만 훗날 얼터너티브 록 밴드 브리더스(The Breeders)를 이끄는 베이시스트 겸 보컬 킴 딜의 존재는 무시할 수 없었고 ‘Gigantic’과 ‘Silver’와 같은 대표곡에 발자취를 남겼다. < Head Carriers >부터 본격적으로 밴드에 승선한 새 여성 멤버 파즈 렌찬틴(Paz Lenchantin)은 딜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악기를 다룰 뿐만 아니라 ‘Vault of heaven’, ‘You’re such a saduccee’같은 펑크(Punk), 하드록 사이에 발랄한 코러스를 흩뿌렸다.
한 곳에 매몰되지 않고 감정의 여러 부면을 아우르는 블랙 프랜시스만의 능력은 가사와 사운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고 신보도 얼터너티브 록의 틀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인다. 첫인상을 강하게 심는 ‘Nomatterday’와 전성기의 흔적을 드리운 펑크(Punk) 록 ‘There’s a moon’, 나른한 기타 톤과 아프리칸 퍼커션이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Doggerel’가 다채로운 사운드스케이프를 확립했다.
블랙 프랜시스로부터 발현하는 밴드 특유의 냉소적인 톤은 여전하나 사운드스케이프의 전환을 꾀한다는 점에서 프로듀서 톰 달거티와의 동행은 실로 새롭다. 날선 펑크에 팝 록을 더한 2016년 작 < Head Carriers >와 고딕 록을 품었던 2018년도 음반 < Beneath The Eyrie >에 이은 여덟 번째 정규 앨범 < Doggerel >은 풍성한 편곡과 감성적인 사운드로 어쩌면 그간 닿지 못했던 신대륙에 기착한다. 그토록 혁명적이었던 픽시스는 사반세기를 지나 부드러움과 낭만의 세계에 진입했다.
-수록곡-
1.Nomatterday
2.Vault of heaen
3.Dregs of the wine
4.Haunted house
5.Get simulated
6.The lord has come back today
7.Thunder and lightning
8.There’s a moon on
9.Pagan man
10.Who’s more sorry now?
11.You’re such a sadducee
12.Dogger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