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동료 알엠의 솔로 활동이 여러 인디 아티스트들과 협업해 특유의 지적인 면모를 강조했다면 슈가의 또 다른 자아 어거스트 디의 그것에 온기는 없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날 서 있고, 세다. 래퍼로서의 인정에 목마른 듯 그간 두 장의 믹스테이프를 발매해 왔으며 < D-DAY >는 그의 첫 번째 정규작이다.
힙합에 대한 열띤 연구와 현대적인 감각이 더해진 구성이 알차다. 최신 유행의 드릴과 편안한 알앤비, 무게감 있는 붐뱁으로 이어지는 트랙들은 두루 일정 이상의 완성도를 보장하고 있다. 반복되는 가사와 멜로디가 어색한 이모 힙합 트랙 ‘Amygdala’처럼 겉도는 구간도 있지만 매끈한 훅의 ‘D-Day’나 견고한 선율 감각을 뽐내는 ‘Life goes on’처럼 귀에 또렷이 맴도는 곡이 다수를 차지한다.
가사에서도 고민의 흔적이 역력하다. ‘대취타’의 잔상을 잇는 ‘해금’은 국악기 해금을 활용해 자유와 방종에 대해 설파하며 대중을 묶어놓는 사회의 사슬과 억압을 해체하는 ‘해금(解禁)’의 곡이다. 깊게 가라앉는 붐뱁 트랙 ‘극야’의 날 선 질문처럼 그의 컨셔스함은 날카롭지만 누군가를 할퀴지 않는 친절함에서 비롯된다. 냉소적인 래퍼와 불특정 다수를 보듬는 아이돌로서의 면모 사이를 절묘하게 줄타기하는 것이다.
힙합 신의 쟁쟁한 경쟁 상대들과 비교해 호불호를 내포하던 특유의 긁는 톤도 한결 가라앉혀 자연스러워졌고 ‘사람 Pt.2’와 ‘Sdl’에서는 보컬도 무리 없이 소화해 낸다. 일본 영화 음악 거장 고(故) 류이치 사카모토와 협업해 고풍스러운 비트를 완성한 ‘Snooze’처럼 그이기에 가능한 시도와 결과물이 현 케이팝 신에서 그가 올라있는 독보적인 위치를 각인시킨다.
< D-DAY >는 결코 가벼이 치부하기 어려운 랩 앨범이다. 그룹 활동이 잠정 중단된 그에게 솔로 행보의 청신호를 켜는, 두 장의 믹스테이프와 수련을 거쳐 탄생한 단단한 ‘오늘’이다.
– 수록곡 – 1. D-Day 2. 해금 3. Huh?! (Feat. j-hope) 4. Amygdala 5. Sdl 6. 사람 Pt.2 (Feat. 아이유) 7. 극야 8. Interlude : Dawn 9. Snooze (Feat. Ryuichi Sakamoto, 김우성 of The Rose) 10. Life goes on
2023년 4월 8일 자 빌보드 Hot 100 싱글 차트의 정상에 방탄소년단의 멤버 지민이 이름을 올렸다. 신곡 ‘Like crazy’가 발매 첫 주에 1위로 데뷔한 것이다. 팬들의 축하 속에 지민은 위버스 플랫폼에서 실시간 방송을 진행하며 소감을 나눴고, 이후 여러 언론이 K팝 솔로 아티스트 최초의 기록이라며 대서특필에 나섰다. 방탄소년단의 그룹 활동 휴식 선언 이후 진, RM, 제이홉 등 여러 멤버가 솔로 작업물을 발표했으나 그중에서 정상을 꿰찬 것은 지민이 최초다.
내막을 들여다보면 사정은 많이 달라진다. 주요 스트리밍 사이트인 스포티파이에서 ‘Like crazy’의 미국 내 재생 횟수는 그가 빌보드에서 제친 마일리 사이러스, 모건 월렌, 시저(SZA)에 비하면 현저히 낮다. 3월 24일 발매 후 사흘 동안은 차트에서 6위-5위-9위로 선방하는 듯 보였으나 이 또한 눈속임이었다. 영어 버전과 한글 버전의 수치가 분리되지 않고 합산된 것. 실제로 두 버전이 나뉘어 계산되자 순위는 곧바로 50위 밑으로 내려가며 곤두박질쳤다. 4월 8일 자 차트에 반영되는 스포티파이의 3월 24일부터 30일까지의 주간 차트에서 영어 버전은 297만 건으로 83위를, 한국어 버전은 267만 건으로 103위를 기록했다.
또 다른 주요 스트리밍 플랫폼 애플 뮤직에서 ‘Like crazy’는 아예 100위 내에 진입하지도 못했다. 빌보드 차트의 공식 기사에 따르면 2위와 3위를 차지한 마일리 사이러스와 모건 월렌의 전 플랫폼 합산 스트리밍은 각각 2,290만 회, 3,580만 회를 기록했다. 같은 집계 기간 동안 지민은 1,000만 회에 불과했다.
2022년 미국 음반 산업 협회인 RIAA가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미국 내 음악 서비스 이용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스트리밍으로 그 점유율은 무려 84퍼센트다. 어떻게 스트리밍에서 현저히 낮은 수치를 기록한 ‘Like crazy’가 싱글 차트 1위로 데뷔할 수 있었을까? 답은 3퍼센트를 차지하는 디지털 다운로드, 11퍼센트를 차지하는 실물 음반에 있다.
현재 Hot 100 차트에 영향을 주는 요소는 셋이다. 첫 번째는 당연히 스트리밍이고 두 번째는 라디오 에어플레이, 세 번째는 음원 및 음반 구매다. 흔히 말하는 MP3 파일 또는 CD나 바이닐 등 실물 싱글 음반을 포함한다. ‘Like crazy’의 경우 발매 후 일주일 동안 25만 4천 건의 다운로드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동안 마일리 사이러스의 ‘Flowers’와 모건 월렌의 ‘Last night’이 약 만 건의 판매량을 올린 것과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숫자다.
이 수치는 팬들의 조직적인 구매, 이른바 ‘총공’ 문화의 결과다. 물론 지민의 경우 실물 음반의 판매도 있었으나 핵심은 디지털 다운로드에 있다. 빌보드 Hot 100 차트는 집계에 있어서 아이튠즈나 아마존 등 기존 음원 다운로드 플랫폼 외에도 가수 별 공식 사이트와 같은 경로를 반영한다. 꾸준한 논란으로 인해 개인당 구매 횟수를 4회에서 1회로 제한했으나 계정 생성에는 제한이 없어 여건만 된다면 원하는 대로 음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합산되어 반영되는 리믹스까지 여러 곡 존재하니 그 가짓수는 더 늘어난다.
이에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팬덤의 자발적인 구매가 무엇이 잘못이냐는 논리다. 다른 예시도 있다. 저스틴 비버의 경우 2020년 ‘Yummy’를 차트 1위에 올리기 위해 싱글 음반 판매를 적극적으로 홍보했으며, 니키 미나즈는 식스나인(6ix9ine)과의 콜라보레이션 트랙 ‘Trollz’를 실물 음반과 4종의 음원 다운로드에 힘입어 정상에 놓았다. 테일러 스위프트 또한 2021년에는 ‘Willow’와 여러 리믹스를 0.39달러까지 할인했고, 2022년 ‘Anti-hero’ 또한 여러 종의 리믹스를 발표하며 드레이크의 1위를 방어해 신경전을 벌인 적 있다. < Midnights >의 발매 직후 탑텐 장악을 위해 싱글 외 여타 수록곡을 개별 다운로드로 공식 사이트에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2~3위를 다투는 과정에서 확실한 승기를 잡기 위함이었지, 지민의 경우처럼 현저하게 낮은 스트리밍 수치를 판매량만으로 메꾸는 식은 아니었다.
‘Like crazy’가 유독 문제인 이유는 ‘총공’ 수단이 순수 구매를 넘어 모금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K팝 팬덤이 주로 집결하는 소셜 미디어 플랫폼인 트위터를 보면 차트 반영을 위해 음원 다운로드 비용을 세계 곳곳의 BTS 팬덤인 아미가 후원했음을 볼 수 있다. 미국 내 IP 주소로 구매해야 Hot 100 차트에 반영되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함이다. 어디까지나 미국 로컬 현상을 반영하는 빌보드에 이런 손길이 미치는 현상은 기괴하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방탄소년단이 처음 ‘Dynamite’로 1위를 기록한 이후부터 ‘Life goes on’, ‘Butter’, ‘Permission to dance’ 등은 모두 전체 차트 반영 비율에서 음원 구매가 절반 이상을 이뤘다. 제일 황당했던 순간은 2021년 6월이었다. 계속되는 음원 총공으로 7주간 1위를 달리던 ‘Butter’가 순식간에 7위로 내려앉고 ‘Permission to dance’가 1위로 데뷔한 것이다. 그다음 주 차트에서는 두 곡의 위치가 뒤바뀌었다. 즉 팬덤의 모금 움직임에 따라서 순위가 마음대로 정해진 현상이다. 앞서 말했던 음원 구매 횟수 4회 제한이 1회로 깎인 것도 방탄소년단의 영향이 크다.
당연히 해외 여론은 좋지 않다. 제이슨 데룰로나 콜드플레이가 콜라보레이션 곡으로 마찬가지로 정상을 찍었을 때도 해외에서는 아미의 화력을 이용한 수법이라는 얘기가 빗발쳤다. 릴 나스 엑스의 ‘Industry baby’가 2위로 데뷔했을 당시 빌보드 지의 부편집장은 아미의 음원 구매 운동이 중단되지 않는 한 다른 곡이 1위로 올라오기는 힘들 것이라며 에둘러 비판하기도 했다. 이번에도 반응이 싸늘하기는 마찬가지다.
빌보드 측에서 이런 상황에 특별한 제재를 가하지 않는 이유는 K팝 팬덤 문화를 현재의 거대한 하위문화 이상으로 키우려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다. 이는 방탄소년단의 제작자이자 회사 하이브를 이끄는 방시혁 의장의 의견도 비슷해 보인다. 방시혁 의장은 3월 15일 관훈포럼에서 세계 3대 음반사인 유니버설뮤직, 소니뮤직, 워너뮤직과 비교했을 때 K팝의 매출 비율이 낮은 통계를 들어 ‘K팝 위기론’을 주장한 바 있다. SM, YG, JYP에 하이브까지 포함해 일명 4대 기획사의 매출이 전체 시장에서 6~7위에 달하는 것을 보면 절대 작지 않은 시장이나, 주류 문화를 꿈꾸는 입장에서는 아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역으로 K팝의 하위문화 탈출이 요원해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물론 비영어 작품에 관대하지 않은 미국 시장과 여전히 존재하는 아시아계 인종차별의 영향도 빼놓을 수 없지만, 기본적으로 K팝 팬덤의 이러한 움직임이 주류 진입에 있어 장벽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음반 사이트에 어느 순간부터 범람하게 된 ‘빌보드 차트 반영’ 문구가 이를 함축한다. 순수한 음악의 힘을 믿지 못하고 인정욕구에 시달리는 거대 팬덤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상황이다. 비단 방탄소년단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아이돌 그룹도 같은 문제를 공유한다.
여러 원인이 겹쳐 보인다. 숫자와 성과 위주로 돌아가는 한국 사회의 폐해와 영미권에 대한 선망 및 사대주의, 그리고 이른바 ‘국뽕’ 심리가 한데 모여 만들어진 참극일 것이다. 작년을 들쑤셨던 방탄소년단의 군 면제 논란도 이에서 비롯된 현상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주축이 팬덤이라지만 소위 ‘덤핑’이라 불리는 음원 반값 할인을 실시하며 이를 은연중에 방관 내지 유도하고 있는 회사와 아티스트에게도 책임의 화살을 돌릴 수밖에 없다.
아미 내의 개인 팬 간 갈등을 비롯한 여러 논란에 힘입어 지민의 1위 전략에 대한 비판이 점차 새어나오는 중이다. 그럼에도 아직 언론은 추켜세우기에 바쁘고 대부분의 팬덤은 쉬쉬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위기는 소리 없이 찾아온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이미 찾아왔는지도 모른다.
말하고자 하는 욕망과 전하고자 하는 욕심이 가득하다. 2022년 방탄소년단의 단체 활동 중단 선언 이후 내놓은 리더 RM의 정규 음반 < Indigo >에는 인간 김남준의 생각과 사고가 빼곡하게 적혀있다. 팝스타로서 느끼는 외로움과 불안함 혹은 평온한 일상의 필요성과 타인에게 전하는 위로가 동시에 교차하는 식이다. 지난 솔로작 < Mono. > 역시 직접 가사를 쓰며 ‘나’를 적극 드러냈지만 이번 음반만큼의 ‘듣는 맛’은 부족했다. 전작이 모노톤의 단조로운 사운드를 바탕으로 감정을 토해냈다면 신보는 적소에 록, 일렉트로닉, 포크 등을 배치해 듣는 즐거움을 높였다.
이 같은 장르의 다양성은 ‘Still life’, ‘건망증’, ‘들꽃놀이’와 같은 트랙에서 빛을 발한다. 펑키한 힙합곡 ‘Still life’는 클랩 사운드, 관악기 등을 밀도 있게 배합해 ’94 livin’ in 한남대로 91 look at my 탄탄대로 / 갈 일이 없어 이젠 강남대로 월세 밀린 넌 빨리 당장 방 빼고’ 노래하며 스웨그 넘치는 삶을 그린다. 어쿠스틱 기타 반주 위에 포근한 멜로디를 얹은 ‘건망증’은 자칫 건조할 수 있는 노래에 맑고 청아한 뮤지션 김사월의 보컬과 따뜻한 가사를 엮어 매력을 높이고, 빌보드 싱글 차트 83위까지 오른 록 트랙 ‘들꽃놀이’는 힘 있는 곡 전개로 작품의 중심을 단단히 묶어낸다.
여러 장르를 끌어왔지만 핵심은 치우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 앞서 언급한 < Mono. >를 비롯한 RM의 이전 작품과 슈가(Agust D), 제이홉이 발표한 솔로 음반 등이 강렬한 음악적 이미지 제공에 일차적 목표를 뒀다면 신보는 음악 청취의 난이도를 낮추고 ‘이지 리스닝’을 대표 키워드로 내세운다. 그 결과 현재의 상념을 표현한 작품의 메시지가 생생히 귀에 걸린다. 해외 팬들을 고려한 듯 영어 가사로 전반을 채색한 ‘Closer’가 전형적인 팝송의 부드러움을 따라가고, 날카로운 전자음이 부서지는 ‘Change pt.2’가 다소 이질적 인상을 전하기는 하나 이를 상쇄할 대중성이 이 음반엔 있다.
월드 스타로 자리매김한 이후 방탄소년단의 음악적 행보는 ‘대중 지향적’이었다. ‘Dynamite’, ‘Butter’, ‘Permission to dance’, ‘Yet to come’ 등 근래 그들의 히트곡은 분명 쉬웠고, 편했으나 음악적으로 평이했다. RM의 이번 음반은 쉽고, 편함 사이 적절한 음악성까지 겸비한다. 정신없이 바쁜(‘Hectic’) 삶 속에서 호텔에 혼자 떠 있는 것 같은 외로움(‘Lonely’)을 견디며 살아가는 이 시대 대표 팝스타가 전하는 이야기가 좋은 음악 위 쉬운 선율을 타고 전해진다.
“No lookin’ back, no / 이젠 니가 널 지켜줄 거야”
끝 곡 ‘No.2’의 뒤돌아보지 말고 뮤지션인 ‘내’가 아닌 ‘너’ 스스로가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는 외침까지 작품엔 선명한 위로가 스친다. 조타를 쥐고 움직일 줄 아는 뮤지션 RM의 현재를 매끄럽게 녹이며 그가 지닌 음악성, 대중 감각을 증명했다.
– 수록곡 – 1. Yun(with Erykah Badu) 2. Still Life (with Anderson .Paak) 3. All Day (with Tablo) 4. 건망증 (with 김사월) 5. Closer (with Paul Blanco, Mahalia) 6. Change pt.2 7. Lonely 8. Hectic (with Colde) 9. 들꽃놀이 (with 조유진) 10. No.2 (with 박지윤)
Splash of the Year : 한 해를 조각내 음악 신의 주목해 볼 사건을 뽑는 이즘 내 연례행사.
명쾌하게 정리하기 힘든 1년이 지나갔다. 코로나19를 딛고 일어난 국내 문화계가 서서히 부활의 움직임을 보이기도, 동시에 안타까운 사건 사고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음악은 계속되고 삶은 흘러가니까. 어느덧 10주년을 맞이한 스플래시와 함께 2022년 가요계를 돌아본다.
배신 또는 오해, 표절 논란 시작은 유희열이었다. ‘생활음악’ 프로젝트로 발표한 ‘아주 사적인 밤’이 류이치 사카모토의 ‘Aqua’와 유사하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 관련 의혹이 빠른 속도로 불거졌다. 그가 작곡한 성시경의 ‘Happy birthday to you’, < 무한도전 > 가요제 프로젝트 곡인 ‘Please don’t go my girl’ 등도 연이어 도마 위에 올랐다. 이후에도 이무진 등 여러 뮤지션에게 표절 의혹이 지속적으로 제기되며 2022년 상반기는 여러모로 시끄러웠다.
일련의 사태에 대해 ‘레퍼런스’나 정확하게 판정할 수 없는 문제라는 반론도 곳곳에서 등장했고, 논란을 조회수 삼으려는 각종 유튜브 채널이 다소 억지 프레임을 씌우는 현상도 나타났다. 예술의 특성상 문제를 깔끔하게 종결하긴 힘든 노릇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제 ‘표절’이라는 키워드가 모두의 의식 속에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드디어 돌아온 페스티벌과 공연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았던 공연 문화가 서서히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언택트 공연 등 대체 수단이 등장했지만 현장의 맛을 대신할 수는 없는 법. 서울 재즈 페스티벌부터 인천 펜타포트, 부산 록 페스티벌 등 각종 행사가 개최되었고, 빌리 아일리시와 잭 화이트를 비롯해 여러 굵직한 뮤지션의 공연도 이뤄졌다. 풀리지 않은 규제로 마스크의 답답함은 있었으나 열정과 사랑으로 극복한 순간이었다. 아직은 완전한 정상화를 위한 예열과 시동 단계일 테지만, 억눌렀던 마음만큼 열기도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트렌드의 중심이 된 1990년대 2010년대 초중반부터 시작된 1980년대 신스팝과 디스코, 펑크(Funk) 열풍은 2020년대 본격적인 폭발을 통해 국내에도 유입되었다. 변화를 촉발한 것은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 사이 팝 펑크(Pop Punk)다. 2021년 블링크 182의 드러머 트래비스 바커를 주축으로 영미권의 머신 건 켈리, 올리비아 로드리고 등이 이끈 장르의 재부흥을 K팝 또한 재빠르게 수용했다.
태연의 ‘Can’t control myself’와 최예나의 ‘Smiley’, 우즈(WOODZ)의 ‘난 너 없이’ 등이 강렬한 기타 사운드와 더불어 이모(Emo) 감성을 일부 벤치마킹한 비주얼을 내세웠다. 정점은 단연 (여자)아이들의 ‘Tomboy’. 앨라니스 모리셋 등 록 여성 뮤지션의 정신을 받아들여 매혹적인 팝 선율, 거침없는 펑크(Punk)의 태도를 모두 끌어안았다. 음원에는 삭제된 욕설까지 함께 소리치던 대학 축제 풍경은 화끈함의 극치였다.
가지는 다른 곳으로도 뻗어나갔다. 아이브의 ‘After like’는 댄스 음악 장르인 하우스 리듬을 기반 삼았고, 뉴진스의 ‘Attention’과 ‘Cookie’는 비슷한 시기의 힙합과 알앤비 장르를 채택했다. 큰 유행이 된 Y2K 콘셉트를 여러 팀이 전격 채택한 것은 덤. 윤하의 ‘사건이 지평선’이 역주행한 원인도 비슷하다. 일본 애니메이션 오프닝을 연상케 하는 아련한 분위기가 2000년대 초 TV 만화 채널을 추억하는 젊은 층의 향수를 자극한 것이다. 1990년대생의 문화가 차츰 향수의 대상으로 편입되고 있는 현상을 음악에서도 목격할 수 있었다.
중요한 건 마인드 셋, 거장의 귀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적어도 음악에서는 그렇다. 베테랑 뮤지션들이 돌아오면서 오랜 세월 쌓은 관록만큼이나 식지 않은 에너지로 대중을 놀라게 했다. 먼저 꾸준한 바이닐과 시티팝 유행에 힘입어 5월에는 빛과 소금이 26년 만에 새 정규 앨범 < Here We Go >를 발표했다. ‘공유’의 시대를 거슬러 음악을 ‘소유’하려는 자연적인 수요와 맞닿은 점에서 의미가 깊다. 송골매 또한 ‘열망’ 콘서트로 전국을 누비며 기성세대 못지않게 젊은 세대까지 관객석으로 초대했다. 7월 서울 공연을 시작으로 11월 인천 공연까지 성행하며 곳곳에서 환호성이 이어졌다.
방송 업계에서도 컴백은 이어졌다. KBS의 < 불후의 명곡 >이 2012년 은퇴 선언을 했던 패티김을 초청해 3부에 걸쳐 특집을 꾸렸고, 그 또한 무대에 올랐다. 이미자 또한 TV조선의 러브콜을 받아 데뷔 63주년 기념 특별 공연을 개최했고, MBN의 트로트 프로그램에서는 심수봉을 심사위원으로 캐스팅하기도 했다.
그리고 역시 ‘가왕’은 ‘가왕’. 조용필이 스무 번째 정규 앨범의 예고편으로 신곡 ‘찰나’와 ‘세렝게티처럼’을 선보인 데에 이어 KSPO 돔에서 밴드 위대한 탄생과 함께 압도적인 규모의 콘서트를 개최했다. 전혀 늙지 않은 음악으로 돌아온 그, ‘영원한 오빠’ 수식어는 2020년대에도 공고했다. ‘물리적 나이보다 마인드 셋이 중요’해진 오늘날의 새로운 가치를 느껴본다. 어찌 보면 키워드는 ‘귀환’이 아니라 ‘소통’이다.
여성 아이돌 르네상스 엠넷 < 프로듀스 > 시리즈의 성공 이후 여러 그룹이 팀 단위보다는 개별 멤버 위주의 팬덤 구축과 세계화에 힘을 서서히 쏟기 시작했다. 쉽게 읽히지 않는 ‘세계관’과 가끔 난해하기도 한 콘셉트에 여성 아이돌이 예전만큼 대중적 지지를 받기는 힘들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흐름을 깨고 돌아온 2022년 걸그룹 르네상스는 그래서 더욱 반갑다.
‘Love dive’와 ‘After like’를 연속 히트시킨 아이브가 선두 주자로 올라선 가운데 같은 아이즈원 파생 그룹 르세라핌은 데뷔 초 여러 논란을 딛고 ‘Antifragile’을 흥행에 성공시키며 재빠르게 입지를 굳혔다. 남다른 방식으로 첫선을 보인 뉴진스 또한 ‘Attention’과 ‘Hype boy’로 동시에 돌풍을 일으키며 대세 자리를 놓고 전투를 벌였다. 스테이씨의 ‘Run 2 u’, 있지의 ‘Sneakers’, (여자)아이들의 ‘Tomboy’와 ‘Nxde’ 등 신세대 걸그룹의 치열한 각축전으로 바쁜 1년이었다.
선배들도 만만치 않았다. 레드벨벳이 ‘Feel my rhythm’으로 클래식 샘플링 트렌드를 이끌며 여전한 저력을 보여준 한편 블랙핑크는 미국과 영국 앨범 차트 1위에 모두 올라 글로벌 시장 점령을 이어 나갔다. 트와이스의 나연은 숏폼 플랫폼에서 안무 챌린지를 적극 활용해 첫 솔로 싱글 ‘Pop!’을 화려하게 터뜨렸다. ‘Forever 1’으로 15주년을 풍성하게 기념했던 소녀시대와 7년 만에 다시 모인 카라까지, 신예들과 익숙한 이름의 공존에 2022년 K팝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이에 반해 타겟층이 일반 대중에서 구매력이 높은 팬덤으로 많이 기울어진 남성 아이돌은 상대적으로 싱글 차트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물론 각종 콘텐츠의 범람으로 소비자층이 세분화됨에 따라 ‘국민가수’나 ‘국민가요’가 만들어지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고, 애초에 보이그룹의 목표가 공연이나 음반으로 옮겨간 지도 오래다. 그러나 이를 감안하더라도 보이그룹의 목소리가 예전처럼 거리에서 울려 퍼지던 시절이 그리워지는 것은 사실이다.
꺾이지 않는 장기 지배, 힙합 정권 40년 얼마 전, 요즘 초등학교에서 여학생들이 걸그룹 안무를 따라 한다면 남학생들은 지코의 ‘새삥’ 챌린지에 열심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국내 음악 시장에서 힙합이 이제 하나의 별종이 아니라 굳건한 주요 장르가 되었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올해 무려 열한 번째 시즌을 방영 중인 < 쇼미더머니 >와 여러 밴드가 나선 경연 프로그램 < 그레이트 서울 인베이전 >의 시청률 차이만 봐도 명확하다. 해외 못지않게 국내에서도 주도권은 힙합에게 완전히 넘어왔다.
1980년대 중반 국내에 처음 알려진 이후로 서태지와 아이들을 타고 본격 유입을 겪은 힙합/알앤비는 40여 년 동안 꾸준히 자리를 넓히며 세력을 키웠다. 비오의 ‘Love me’, 빅 나티의 ‘정이라고 하자’, 그리고 크러쉬의 ‘Rush hour’ 등 차트에는 아직도 여러 히트곡이 포진해 있다. 록 페스티벌의 부활 사이 함께 돌아온 대구 힙합 페스티벌까지, 어느덧 익숙해진 힙합 강국의 면모다.
BTS 병역 논란 엄밀히 말하면 ‘가요’계 사건은 아니지만, 방탄소년단의 병역 문제가 올 한 해 계속해서 화두에 올랐다. 국위선양의 공로를 높게 사 병역 면제를 논하는 입장과 형평성을 거론하며 반대하는 측의 논쟁이 활발히 벌어지며 일반 대중에게도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유승준과 MC몽 등 남성 뮤지션의 입대 문제로 여러 차례 논란을 겪었기에 어쩔 수 없이 떠오른 문제였다.
사안은 결국 방탄소년단의 입대로 끝을 맺었다. 맏형인 진이 12월 13일 최전방인 연천 지역 신병교육대에 입소한 것. 같은 날 솔로곡의 가사가 도마 위에 올랐던 멤버 슈가는 어깨 수술을 근거로 공익 판정을 받았다. 나머지 멤버들의 계획은 아직 미정이나 그룹 활동의 중단 이후 여러 멤버가 솔로 음반을 발표하면서 개인 커리어를 확장해가는 중이다.
다른 예술/체육 분야의 병역 특례와 엮이며 제도 자체의 존폐 여부까지 나왔던 주제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풀리지 않는 숙제를 끄집어냈다. 성별과 세대 갈등까지 연결되는 두 글자, ‘군대’. 그러나 병역이 아직까지 ‘의무’인 국가에서 이를 일종의 ‘형벌’의 차원으로 보는 시선도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다. < 100분 토론 > 임진모 평론가의 말처럼, ‘대중에게서 기억되고, 인정과 사랑을 받는 것이 가장 큰 특혜’ 아닐까.
사각지대 속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아티스트 착취 ‘연예인 걱정은 하는 게 아니’라는 말도 있지만 최근 뉴스에서 떠오른 헤드라인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먼저 11인조 보이그룹 오메가엑스의 갑질 피해 소식이었다. 소속사 대표에게 멤버들이 폭행당했다는 사실이 해외 소셜 미디어를 통해 알려졌고, 이후 온갖 피해 내역에 대해 직접 입을 열었다. 성희롱부터 시작해 코로나19 감염에도 불구하고 강압적으로 무대를 섰다는 사실, 온갖 폭언과 협박 내역이 밝혀졌다.
‘내 여자라니까’로 데뷔해 한때 ‘국민 남동생’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던 이승기 또한 소속사 후크 엔터테인먼트에게서 음원 수익을 전혀 정산받지 못한 사실이 언론에 드러났다. ‘적자 가수’라는 비하 발언을 했던 대표는 현재 수익 횡령 의혹까지 불거졌다. 상황이 채 식기도 전에 이번에는 한창 여러 방송에서 활약 중인 가수 츄가 소속 그룹 이달의 소녀에서 강제로 퇴출되는 일이 벌어졌다. 큰 물의를 일으켰던 연예인이라 하더라도 대부분 중립적인 언어로 계약 해지 사실을 밝혔던 여러 선례에 비하면 ‘제명’과 같은 언어를 사용한 블록베리 엔터테인먼트의 글은 다소 악의적으로 보인다. 소속사의 입장문이 주변인들의 증언으로 반박되며 나머지 이달의 소녀 멤버들이 계약 해지 소송에 들어갔다는 소문도 퍼진 사이, 1월로 예정된 그룹의 컴백 소식이 갑작스레 공개되어 혼란을 야기했다.
한때 범람했던 가요계 계약 문제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라지만 음악과 뮤지션이 돈의 논리에 의해 지나치게 좌지우지되는 모습은 착잡함을 안긴다. 정녕 음악이 순수한 존재로 남을 수는 없을까, 바란다면 너무 비현실적인 것일까. 다가오는 2023년에는 조금 더 깨끗하고 공정한 음악 산업 소식이 많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어본다.
‘Dynamite’로 시작한 세계적 희망 전하기에 마침표를 찍다. 활동 9년을 축약하는 선별집 < Proof > 발매 이후 잠정적 휴지기를 발표한 방탄소년단이 연일 화젯거리에 올랐다. 갑작스러웠지만 예상했던 결과. 타이틀 곡 ‘Yet to come’은 이 모든 것을 아우르며 함축한다. 과거의 영광을 추억하면서도 다가올 최고의 순간을 위해 최선을 약속한다.
노래는 아련한 분위기를 바탕으로 무난한 힙합 사운드를 들려준다. 평범한 음악 안에서도 멤버들은 화려했던 삶에 겸손을 표하고, 다시 초심을 다지며 팬들을 위로한다. RM이 언급했던 K팝 아이돌과 그 시스템에 대한 비판이 여기서 크게 와닿지는 않는다. 과도한 업무에 시달려 뱉은 토로일지, 새 시대를 향한 선언일지 이 곡으로도 알 수는 없지만, 어찌 됐든 마침표 뒤에 문장은 다시 시작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