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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Blur) ‘The Ballad Of Darren'(2023)

평가: 4/5

8년 만의 신보 < The Ballad Of Darren >은 어느덧 50대를 훌쩍 넘긴 블러의 현재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때 그 시절 블러의 실험정신이나 재기발랄한 매력은 찾기 어렵다. 상실과 고독, 공허함에 사무친 감정이 작품을 감싼다. 프런트맨 데이먼 알반은 본인이 원하지 않은 여러 이별을 겪었다. 기타리스트 바비 워맥, 드러머 토니 앨런 등 친한 동료 뮤지션들이 세상을 떠났고, 20년간 동거생활을 유지한 연인 수지 윈스탠리와의 관계를 정리했다. 그렇기에 블러는 그에게 있어 시간이 갈수록 더욱 소중하며 결코 잃고 싶지 않은 존재다. 그는 블러와 함께 현재의 자신을 차분하게 들여다본다. 그것이 이번 앨범의 첫 트랙, ‘The ballad’의 시작이다.

‘The ballad’는 과거에 대한 추억으로 가득한 데이먼의 쓸쓸한 보컬로 시작해 멤버들이 하나둘 합류하며 풍성해지는 점진적인 진행으로 비로소 블러가 돌아왔음을 알린다. 다시 한 곳으로 집결한 그들은 옛날처럼 통통 튀는 록을 연주해 본다. 1980년대 뉴웨이브로 초기 블러가 연상되는 ‘St. Charles square’와 데이먼 알반의 주력 프로젝트가 된 고릴라즈의 향취가 배인 ‘Barbaric’은 각자 신나는 멜로디 사이에 슬픔과 절망이 묻어 나온다.

우울에 빠진 그들은 후반부로 갈수록 기타 노이즈를 더 키우며 극복하려 한다. ‘The narcissist’는 앨범의 변곡점이다. ‘거울을 보니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첫 구절은 그들이 대중 뮤지션으로서 살아온 삶을 은유한다. 오랫동안 넘어지기 쉬운 굽잇길을 걸어온 그들은 서로가 서로의 빛이 되었다. ‘The narcissist’를 지난 뒤의 감정은 대체로 낭만적이다. 왈츠 리듬에 맞춰 홀로 춤을 추는 ‘Far away island’는 쓸쓸함을 덮는 황홀한 사운드로 가득하고, ‘Avalon’은 혼란 속에서도 상대의 행복을 바란다. 마지막 트랙 ‘The heights’는 아름다운 오케스트라 세션과 귀를 찢는 노이즈의 융합으로 이 애처롭고도 아름다운 삶을 표현한다. 고독은 여전하나 눈부신 이상에 도달하려는 여정은 계속되며 그 끝은 혼자가 아닐 것임을 소망한다.

6번째 앨범 < 13 >이 연상된다. 그 앨범은 멤버들을 괴롭히는 심적 고통이 끊이질 않는 상황에서 만들어져 전체적으로 가라앉은 분위기에 각종 실험적인 사운드를 도입해 복잡한 마음을 표현했다. 20여 년이 지나 다시 찾아온 고통의 시간 위에서 연주하는 < The Ballad Of Darren >은 그때보다는 훨씬 정갈하고 실험보다는 밴드 자체의 합에 집중한다. 베이시스트 알렉스 제임스와 드러머 데이브 로운트리는 늘 그랬듯, 기교를 최소화하고 탄탄하게 뒤를 받친다. 그레이엄 콕슨도 이번에는 대체로 데이먼 알반에게 주도권을 내줬다. 그 결과, 각 트랙의 개성이 덜하고 음악적으로는 고릴라즈와 다소 맞닿아 있으나 트랙 간 유기적인 연결과 감정표현이 뛰어난 작품이 되었다.

블러는 젊지 않다. 1990년대의 기성세대를 풍자하고 비판했던 그들은 이제 2020년대의 기성세대다. 과거의 에너지를 재현하기에는 그 시절만큼의 기력이 없다. 이별의 슬픔도 이전보다 더 자주 겪으며 점점 무뎌지지만 무감하지는 않다. 음악의 기술에는 통달했으나 신선함은 이와 반비례한다. 그런데도 블러니까, 블러기에, 블러라는 이름으로만 할 수 있는 음악이 있다. 작품에 담긴 이야기들은 고릴라즈나 누군가의 솔로 명의로는 절대 노래할 수 없다. 브릿팝의 종말 이후 음악적 실험실에 가까웠던 블러는 돌고 돌아 즐거운 고향이 되었다. 먹구름 낀 광야에서도 수영을 즐기는 앨범커버처럼 우울과 낭만 사이에서 행복을 포착한다.

– 수록곡 –
1. The ballad
2. St. Charles square
3. Barbaric
4. Russian strings
5. The everglades (for Leonard)
6. The narcissist
7. Goodbye Albert
8. Far away island
9. Avalon
10. The heigh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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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Blur) ‘The narcissist’

평가: 4/5

블러답다. 음악도, 데이먼 알반의 나른한 보컬도, 무난한 팝 록 스타일도, 모든 면에서 블러다. 하늘에 먹구름이 낄지라도 수영장에서 여유로운 한때를 즐기는 모습을 포착한 앨범아트는 지극히 1990년대 브릿팝의 정서와 닮았다. 당황스러울 정도의 유쾌함과 스산함이 공존하는 전작 < The Magic Whip >과는 결이 다르다. 거칠게 뛰노는 ‘Song 2’, 통통 튀는 ‘Girls & boys’, 나른한 ‘Coffee & tv’와도 다른 모양새다. 그럼에도 낯설지 않다.

데이먼 알반의 음악 세계는 실험과 도전의 연속이었다. 어쩔 때는 강박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The narcissist’는 편안하다. 조급한 마음, 특별한 걸 만들어야겠다는 압박감은 전혀 없다. 그 대신 밴드의 정석만을 들려준다. 무심한 듯 감정을 쌓는 보컬, 그 뒤에서 같이 무던하게 얹는 코러스, 기억하기 쉬운 멜로디, 노이즈를 키워 천천히 공간감을 넓혀나가는 세션, 휘몰아치는 후반부, 짧은 여운까지, 평범한 밴드 음악을 범상치 않게 해낸다.

이제 블러는 블러를 실험실로 쓰지 않는다. 그들이 그토록 하고 싶었던 음악의 고향이다. 이제 블러는 새로움보다 익숙함이 더 중요하다.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어떻게든 앞으로 뻗어 나갔던 멤버들은 30여 년이 지나서야 < Leisure >의 수영장에 다시 모였다. 어린 날들의 어설픔과 불안은 사라졌다. 그 자리에 관록이 새롭게 뿌리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