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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획 ‘미국’] 2. 동양계의 미국, 아시안 아메리카

미국에서 흑인들이 겪는 차별에 대한 논의에서 흔히 마주할 수 있는 반응이 ‘동양인도 차별을 겪는다’는 말이다. 그 자체로는 틀린 말이 아니지만, 타인의 고통에 연대하지 않을 이유가 되지는 않다는 취지로 미국에 사는 동양인들 사이에서는 ‘Asians For Black Lives’ 운동이 전개되기도 했다. 반대로 얘기하면 그런 운동이 벌어져야 할 만큼 흑인들의 입장에 공감하지 않는 동양인들도 많았다는 뜻이다. 이 미묘한 갈등을 이해하는 실마리는 동양계 뮤지션들이 미국에서 차지해온 입지에서 찾을 수 있다.

흑인이나 동양인이나 유색인종으로 미국 사회에서 배제된다는 사실은 같지만 그 방식은 다르다. 동양인은 흑인들처럼 제도적인 폭력으로 목숨을 위협받기보다는 아예 담론에서 제외된다. 그리고 오래도록 만인의 사랑을 받아온 흑인들의 문화와는 다르게 동양 문화는 특이한 것, 타자의 것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더 강하다. 대중문화 속에서 동양인의 얼굴을 찾는 것 자체가 어렵고, 그나마 관심을 받는 경우에도 ‘모범 소수민족'(Model Minority)의 전형을 기준으로 이루어진다.

명예 백인과 광대의 이분법은 동양인을 옥죈다. 음악으로 예를 들어보자. 요요마(Yo-Yo Ma)와 싸이 모두 미국에서 사랑받는 인물이다. 그러나 전자는 별다른 논란을 일으키지 않고 모범생처럼 묵묵히 노력해 주류사회에 성공적으로 편입한 신화로 소비되고, 후자는 ‘모범생’을 온몸으로 거부하고 광대의 역할을 자처한것처럼 비친다. ‘강남스타일’ 속 물질만능주의를 풍자하는 뉘앙스는 지워진 채 ‘광대’의 이미지만 남아 세계로 퍼져나갔다.

미국에 살고있는 동양인들의 음악은 이분법을 벗어나 온전한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한 여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만 그 방식은 직설보다는 행동이다. 자신을 받아들여달라고 말로 항의하는 대신,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공론장으로 밀어 넣는다.

대표적으로 2018년 < Be The Cowboy >로 평단의 화제를 받은 미츠키(Mitski)가 있다. 서양에서 그려놓은 순종적인 동양인 여성의 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시니컬한 표정으로 강렬한 록 사운드를 앞세워 일본어로 ‘가슴이 터질 것 같다’며 노래한다. 그 누구도 이 모습을 보고 모범생이나 광대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재패니즈 브렉퍼스트(Japanese Breakfast)로 활동하는 미셸 조너(Michelle Zauner)의 노래 역시 동일 선상에 있다. 그의 음악은 한국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아래서 자란 특수한 가족관계에서 비롯되는 감정을 노래한다. 동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버리는 대신, 다른 문화권 사람들이 알 수 없는 특수한 경험에서 보편성을 얻어내는 과정이다. 한국말을 잘하지 못하는 그가 한국인 어머니와 함께 동양 식료품 마트에 가서 느낀 복잡한 심경은 잡지 뉴요커에 수필 형태로 실리며 수많은 경계인(境界人)들의 공감을 샀다.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미국 내의 동양인으로서 갖게 되는 타자성을 ‘특이한 매력’으로 치환해 무기로 삼는 뮤지션들도 있다. 인디밴드 슈퍼올가니즘(Superorganism)이 한국어로 ‘무엇인가 정신에 집어넣으세요’ 라고 노래하거나, 뉴욕의 디제이 예지(Yaeji)가 메이크업 튜토리얼 스타일의 뮤직비디오에서 창피했던 기억을 ‘내후년 옆에 도포’하라고 읊조리는 모습은 한국어를 못 하는 사람들은 물론 모국어가 한국어인 사람들이 보기에도 어딘가 조금 어긋나있다. 이들이 공략하는 것은 공감보다는 참신함이다. 주류사회에게 존재를 긍정 받기 위한, 다양한 전략이다.

미국 내 ‘동양인’의 입지에 관해서 이야기한다고 했지만, 지금까지 언급된 뮤지션은 모두 동북아시아계 사람들이다. 아시아를 동북아시아로 국한해서 인식하는 기조는 미국 내 ‘아시안’에 대한 담론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에 대한 작은 혁명을 일으킨 것이 88라이징(88Rising)이다.

동양의 것을 당당하게 내세우는 이 크루의 얼굴은 인도네시아 출신의 래퍼 리치 브라이언(Rich Brian)이다. 아시아 문화 전체를 아우르겠다는 포부는 필연적으로 그 실현에 한계가 있다. 그러나 이들이 구현한, 너무 진지하거나 교조적이지 않으면서도 멋진 아시안의 이미지는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며 ‘아시안 아메리카’의 새로운 문화적 구심점이 됐다.

아시안 아메리카는 그 존재를 긍정 받기 위한 싸움을 하고 있다. 고향에서는 ‘교포’ 취급을 받고, 미국에서도 타자의 입장인 제3문화의 아이(Third Culture Kid)로 여겨지지만, 있는 그대로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한 투쟁을 진행하고 있다. 한 명이라도 더 목소리를 내고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

언뜻 부당하게 감옥으로 몰리고 죽임을 당하는 흑인들의 싸움과는 결이 달라 보이고, 이 때문에 동양계 뮤지션의 음악과 흑인 뮤지션의 음악이 다르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나 ‘코리아타운의 시장’으로 불리는 래퍼 덤파운데드(Dumbfoundead)가 괜히 앤더슨 팩의 ‘Lockdown’ 뮤직비디오에 출연하며 연대한 게 아니다. 한 소수자 집단이 살아남지 못하는 사회는 다른 소수자 집단들에게도 가혹한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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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획 ‘미국’] 1. BLM이 음악에서 중요한 이유

Anderson .Paak - Lockdown - YouTube

2020년 미국을 관통한 주요 키워드 중 하나는 흑인 차별 반대 (Black Lives Matter, BLM)다. 5월 25일 미니애폴리스 경찰에 의한 조지 플로이드 (George Floyd)의 살해는 미국 전역을 뒤흔든 시위로 이어졌고, 제도적 인종차별의 피해자들에 대한 연대는 음악계에서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비욘세, 앤더슨 팩 (Anderson. Paak)을 비롯한 흑인 가수들이 저마다 시위를 지지하는 싱글을 냈고, 음악산업 종사자들은 소셜미디어 해시태그를 통해 블랙아웃 튜스데이 캠페인 (#blackouttuesday)을 진행하며, 6월 2일 하루 동안의 침묵을 통해 BLM의 메시지와 자원들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돌아가도록 했다.

동시에 대중음악 속 흑인음악의 영향력은 전에 없는 전성기를 보내고 있다. 2019년에는 리조 (Lizzo)와 릴 나스 엑스 (Lil Nas X), 올 해에는 도자 캣 (Doja Cat), 메간 더 스탈리온 (Megan Thee Stallion), 로디 리치 (Roddy Ricch)등이 차트를 뒤흔들었다. 힙합과 알앤비는 미국은 물론이고 한국에서도 핵심 장르로 자리 잡아, ‘레트로 열풍’을 위시한 뉴 잭 스윙의 소비가 재점화된 지 오래다. 흑인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제도적인 차별과 폭력에 반대하는 목소리와, 대중음악을 점령하기 시작한 흑인음악의 영향력. 이 두 흐름은 무관하지 않다.

사회에서 비주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어김없이 겪게 되는 상황 중 하나가 바로 ‘지워짐’이다. 주류가 비주류의 문화를 차용하면 원래의 맥락이 지워지고 새로운 맥락이 생겨난다. 음악계의 BLM운동이 주목하는 지점이 여기다. 흑인들의 음악을 사랑한다면 흑인들도 사랑하는 사회가 되어야지, 음악만 남긴 채 흑인들을 지워내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다.

6월 말, BLM을 테마로 온라인에서 개최된 흑인 엔터테이너들의 축제 BET 어워즈는 “우리 문화는 없는 셈 치기엔 너무 크다(Our culture is too big to be cancelled)“는 오프닝 멘트로 그 에토스를 담아냈다. 피부색을 기반으로 한 차별과 억압도, 이에 대한 저항정신이 담긴 음악도 2020년 처음 세상에 나온 것이 아니다.

런 더 쥬얼스 (Run The Jewels)는 이번 BLM 시위를 지지하며 신보 < RTJ4 >를 예정보다 일찍, 무료로 배포하며 백인들이 모든 권력을 쥐고 있는 사회를 ‘눈 속을 걷고 있’ 는듯한 기분에 빗대어 노래했지만, 5년 전 2015년에 켄드릭 라마가 < To Pimp A Butterfly >로 먼저 ‘우린 모두 괜찮을 것’이라며 공권력의 부당한 위력 행사에 신음하는 동포들을 위로했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흑인 음악계 저항의 역사는 1980년대에 ‘Fuck tha police’라며 분노를 폭발시킨 N.W.A를 지나서도 계속된다.

흑인은 범죄자일 확률이 높다는 편견이 피부색이 다르다는 타자성과 합쳐져 불공평한 검문과 과잉진압으로 이어지고, 흑인 음악과 문화에는 그 설움이 묻어난다. 파고 들어가 보면 제도적인 인종 차별이 모습을 드러낸다.

일례로 1970년대까지만 해도 레드 라이닝 (Red Lining), 즉, 특정 구역에는 흑인이 부동산을 구매하거나 거주하는 것을 금지하는 행태가 합법적으로 행해졌다. 돈이 있어도 흑인이라면 백인들과 함께 살 수 없고, 교육을 포함한 지역 예산 배분 및 집행이 백인들의 동네 위주로 돌아가면서 흑인들이 사는 동네는 점점 낙후되어 가난의 악순환에 갇힌다. 갱스타 랩의 성지 콤프턴도, 이사 오는 흑인들을 피한 백인들의 교외 이주 (White Flight)에서 탄생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런 더 쥬얼스의 활동이 의미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래퍼 킬러 마이크 (Killer Mike)는 구조적인 차원에서 흑인 사회의 재기를 위해 노력해왔다. 자신이 살고 있는 애틀란타에서 낙오된 구직자들에게 커리어의 발판을 마련해주기 위해 미용실을 운영 중이고, 갱 단원들의 갱생을 돕고자 이들의 이름을 딴 콜라 (Crip-a-Cola, Blood Pop)를 출시해 판매했다. 자본과 사회로부터의 소외를 방지해 근본적으로 폭력을 근절하려는 노력이다. < RTJ4 >의 가격을 자율 지불로 설정해 배포하고, 모든 수익을 BLM 관련 단체에 기부하는 건 이 맥락에서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Run The Jewels – 'Run The Jewels 4' review
Kendrick Lamar – “Alright” Video - Stereogum

켄드릭 라마의 음악 역시 구조적인 소외의 현실을 수면 위로 끌어내 묘사했기 때문에 강력하다. 콤프턴에서 자라면서 목격한 동네의 경제적 소외와 만연한 폭력, 그리고 여기서 비롯된 고향에 대한 애증의 감정들은 백인들 듣기 좋으라고 노래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비슷한 처지의 흑인들에게 그들의 경험과 감정이 정당하다는, 공감을 통한 위로를 건넨다.

그 증거로 BLM 시위대들은 ‘Alright’의 가사를 외치며 행진하고, 흑인을 대상으로 한 폭력이 공론화될 때마다 이 곡의 스트리밍수가 폭등한다. 대대적인 BLM 시위가 벌어질 때면 ‘켄드릭은 어디 있냐’고 찾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그와 그의 음악은 저항과 연대의 상징이다.

인종차별에 대한 저항은 비단 킬러 마이크와 켄드릭 라마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차일디쉬 갬비노 (Childish Gambino)가 노래했듯, ‘이게 미국이다.’. 바다 건너에서 휘몰아치는 격한 감정들이 남의 일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남의 음악을 들으려면 남의 일을 알아야 한다. BLM이 이야기하는 억압과 차별은 흑인 뮤지션들도 예외 없이 겪어온 현실이다. 저항과 연대의 정서가 2020년에만 반짝 떴다가 질 유행이 아닌 이유다.

This Is America': Breaking down Childish Gambino's powerful ne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