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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이브 마이 카 >에서 < 자산어보 >까지… 2021년의 영화 베스트 10(2편)

삼십 수년간 영화 관련 글을 써오며 지금껏, 한해의 베스트 영화 10편을 뽑는 데 이번처럼 공을 들인 적은 없다. 몇 개월에 걸쳐 이 작업을 계속하고 있으니 말이다. 한국 영화 (제작) 100주년이었던 2019년 ‘한국 영화 100선’을, 다음 해 ‘세계 영화 100선’을 선정했을 때 못잖다. 그만큼 2021년에 국내에서 선보인 일련의 영화들, 특히 외국영화들에 실린 무게감이 만만치 않은 것이다. 애초에는 가볍게, 한 번에 다 소개하려던 10편의 영화들을 두 차례, 나아가 세 차례로 나눠 제시하는 것은 그래서다.

3위.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리들리 스콧 

리들리 스콧이 왜 거장인지를 새삼 증거하는 ‘압도적 역작’이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들만 아니라면 별다른 주저 없이 2021년의 베스트 1로 선정했을 터. 실은 막판까지 정상 자리를 놓고 고심에 고심했음을 고백한다. <해피 아워>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드라이브 마이 카> 아닌 이 걸작을 1위로 선택했으나, <해피 아워>를 보고 나니 <드라이브 마이 카>가 한층 더 유의미하고 매혹적으로 다가서 끝내 그 순위를 바꿨다.

<라스트 듀얼>은 100년 전쟁 중인 14세기 후반의 프랑스를 무대로, 유서 깊은 카루주 가문의 장군‧기사 장 드 카루즈(맷 데이먼 분)와 그의 친구이자 라이벌 자크 르그리(아담 드라이버), 그리고 장의 아내 마르그리트(조디 코모), 세 중심인물을 축으로 펼쳐지는 휴먼 역사 대작이다. 일찍이 이 지면의 리뷰에서도 밝혔듯, 인물들의 성격화(Characterization)부터 주‧조연 배우들의 열연, 특히 전체적 ‘톤 앤드 매너’에서 다분히 마초적으로 비치는 영화를 주목할 만한 여성 영화로 비상시키는 조디 코모의 치명적 매력(Fatal Attraction), 장과 자크의 한판 승부를 그리는, 마지막 20분간의 숨 막히는 화룡점정적 결투 시퀀스, 그리고 동일한 사건을 세 주인공의 시선에 의해 반복적으로 제시하는 비주류적 화법으로 예상치 못한 몰입감을 선사하는 플롯 등, 영화의 전 층위에서 최상의 경지를 뽐낸다. 오슨 웰즈의 <시민 케인>(1941)이나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1950) 등 세계 영화사의 대표적 걸작들의 비통속적 탈-할리우드 내러티브와 친숙한 주류 영화적 스타일로 세계영화의 지형도를 새로 그렸다, 는 것이 내 총평이다.

4위. 퍼스트 카우, 켈리 라이카트(Kelly Reichardt)

<초원의 강>(1994), <웬디와 루시>(2008), <믹의 지름길>(2010) 등을 통해 미국 독립영화를 대표하는 여성 감독으로 부상한 켈리 라이카트가 빚어낸 문제적 걸작이다. 1820년대 서부 개척 시대의 미국 오리건주, 사냥꾼들의 식량을 담당하는 백인과 도망자 신세였던 중국인 이민자 두 남자를 축으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너무나도 아름다운 성찰과 감동의 휴먼 드라마다. 인종의 차이에도 아랑곳없이 서서히 형성돼 지속하다 죽음에 직면해서도 배신하지 않는 두 주인공의 변치 않는 우정을 지켜보는 맛이, 여간 강렬한 게 아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새에겐 새집이, 거미에겐 거미집이, 인간에겐 우정이”라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구절이 등장하는데, 우정의 최상급 극적 형상화로 손색없다. 여느 서부극의 총격전 대신 요리를, 총 아닌 빵을 선택한 감독의 방향‧지향성에서 영화는 서부극을 완전히 해체시킨 셈인바, 그 점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걸작 웨스턴 ‘<용서받지 못한 자>(1992) 그 이후’로 일컬어질 만하다. 수시로 편협하기도 하고, 자국 영화를 향한 애정에서는 종종 맹목적으로 치닫기도 하는, 프랑스 유명 영화 월간지 《카이에 뒤 시네마》는 이 역작을 2021년의 ‘톱 텐 영화상’(Top 10 Film Award) 정상에 등극시켰다. 레오스 카락스의 <아네트>(2위)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메모리아>(3위), <드라이브 마이 카>(4위) 등 쟁쟁한 경쟁작들을 뒤고 하고….

5위. 티탄, 쥘리아 뒤쿠르노  

2021년 제74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화제의 논쟁작이다. 어린 시절 교통사고로 뇌에 티타늄을 심고 살아가던 한 여성(아가트 루셀 분)이 기이한 욕망에 사로잡혀 연쇄살인을 저지르고, 어느 날 10년 전 실종된 아들을 찾던 아버지(뱅상 랭동)와 조우하게 되면서는 그들 관계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공포성 휴먼 스릴러다. 극적 설정도 그렇거니와 시청각적 묘사에서도 더 이상 자극적일 수 없을 정도로 자극적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전혀 선정적이지 않으며 묘한 페이소스까지 안겨주는데, 다름 아닌 그 미덕이 칸 심사위원들을 움직였지 않았을까 싶다.

일찍이 다른 지면에서도 말했듯, 국내 선두 OTT 업체인 왓챠에서 볼 수 있는 영화는 <드라이브 마이 카>, <아네트>와 함께 지난해 26회 부산국제영화제 최고 인기작 중 하나였다. 일반 관객 표는 일찌감치 매진됐고, 하루 전 구할 수 있는 프레스 및 게스트 표 또한 작심하고 발권 30분 전인 오전 7시부터 대기 줄에 서 기다린 뒤 신청했건만, 허탕을 칠 정도였다. 부산영화제 프로그램 노트를 빌려보자. “호러, SF, 스릴러, 범상치 않은 러브스토리…<티탄>은 분명 유례없는 영화다. 시나리오보다 더 놀라운 점은 강철과 피, 그리고 불꽃의 오페라라고 해야 마땅한 쥘리아 뒤쿠르노의 유니크한 영상 스타일이다. ‘괴물성은 규범이라는 벽을 밀어내는 무기이자 힘이다. 괴물들을 받아들여 준 심사위원들에게 감사한다.’ 영화만큼이나 인상적인 (중략) 수상 소감이다. 이 다재다능한 젊은 여성 감독의 황금종려상 수상은 다소 아카데믹한 프랑스 영화의 관습을 송두리째 흔들 것이다.”

<티탄>의 쾌거가 과연 “프랑스 영화의 관습을 프랑스 영화의 관습을 송두리째 흔들 것”인지 여부는 지켜봐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칸 역사상 가장 파격적이라고 평할 수 있을 그 선택이 단발성으로 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국제영화제 최고상을 안았건만 영화는 오는 27일(일) 열릴 94회 아카데미상에서 5편의 국제장편영화상(옛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조차 들지 못했다. 비용의 영화인 봉준호의 <기생충>에 국제장편영화상을 포함해 영예의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까지 4관왕을 몰아준 아카데미가 예의 보수성으로 회귀한 것일까?

1983년생인 감독 쥘리아 뒤쿠르노는 프랑스 국립영화학교 출신의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로, 단편 <주니어>가 2011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선정되며 큰 눈길을 끌었다. 가족 모두가 채식주의자인 주인공이 식인 욕망으로 치닫는 드라마를 극화한 충격의 장편 데뷔작 <로우>(2016)로 2016 칸 비평가주간에 초청돼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 상을 받으며, ‘무서운 신예’로 떠올랐다. 뒤쿠르노 감독은 1993년 제인 캠피온이 <피아노>로 첸 카이거의 <패왕별희>와 공동 수상한 이후 사상 두 번째로 칸을 정복한 두 번째 여성 감독이 됐다. 단독으로는 최초다.

6위. 파워 오브 도그, 제인 캠피온

<피아노>(1993)만으로도 세계 영화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여걸 제인 캠피온이, 2009년 〈브라이트 스타〉 이후 12년 만에 선보인 화제의 수작이다. 영화는 1925년 광활한 미국의 몬태나 초원을 무대로 펼쳐지는, 로맨스 곁들인 미스터리물이자 서부극이다. 거대한 목장을 운영하는 필(베네딕트 컴버배치)은 막대한 재력은 물론 위압적이고 묘한 매력으로 사람들에게 공포와 경외를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어느 날 그의 동생 조지(제시 플레먼스)가 로즈(커스틴 던스트)와 그의 아들 피터(코디 스밋-맥피)를 가족으로 맞이하고, 동생의 갑작스러운 결혼 소식에 분노한 필은 로즈의 아들을 볼모로 삼아 그녀를 옭아매기 시작한다. 자신도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영화는 ‘마마보이’임이 분명한 주인공 소년의 흔치 않은 성장담이자 엄마를 위한 복수극으로도, 동성애적 성향을 지닌 주인공 필의 성장담으로도, 남편 없이 아들을 키우며 살아가야만 하는, 기구한 처지의 여인의 생존담으로도, 돈 때문에 자신과 결혼을 한 여자를 향한 조지의 순애보로도 읽힐 수 있다. 영화는 그만큼 해석에 열려 있으며, 그네들은 우리네 인생의 축약도적 캐릭터들일 수도 있다. 연기들이 매혹적이라는 건 두말할 필요 없을 테다. 네 중심인물이 죄다 올 아카데미상 연기상 후보에 올랐다. 어인 일인지 던스트는 여우 조연상에 올랐으며, 제시와 코디는 공동으로 남우조연상 후보에 지명됐다.

<파워 오브 도그>는 (3월 21 기준으로) 지난해 베니스영화제 감독상과 올해 골든글로브 드라마 부문 작품상과 영화 부문 감독상 등을 포함해 249개 상을 차지했으며, 오스카상 11개 부문 12개 등 무려 313개 상에 노미네이션돼 있다. <기생충>엔 다소 못 미쳐도, 그 못잖은 놀라운 성취다. 2022년 아카데미 시상식의 최대 관전 포인트는 따라서, 작품상 수상이 확실시되는 이 화제작이 과연 몇 개의 트로피를 가져갈 거냐 여부다. <드라이브 마이 카>가 네 개 부문 중 몇 개를 차지할 것인지 여부와 더불어. <파워 오브 도그>는 최근 미국 감독조합이 수여 하는 감독상과, 영국아카데미상 작품상, 감독상 등을 확보했다.

여담 하나. 한데 《카이에 뒤 시네마》는 이 영화를 베스트 10 안에 진입시키지조차 않았다. 영화 보기 및 평가에서 취향이 제아무리 중요하다고는 하나, 그 악명(?) 높은 잡지의 선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흥미롭지 않은가. (계속)

7위. 램, 발디마르 요한손

8위. 듄, 드니 빌뇌브

9위. 모가디슈, 류승완

10위. 자산어보, 이준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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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찬일의 영화수다 Feature

< 드라이브 마이 카 >에서 < 자산어보 >까지… 2021년의 영화 베스트 10(1편)

입춘(2월 4일)을 지나며 진짜 ‘검은 호랑이 해’(壬寅年)가 밝은지 한 달이 돼간다. 너무 때늦은 감은 있으나, 참고‧재미 삼아 이제라도 ‘2021년의 영화 베스트 10’을 엄선‧소개해보면 어떨까. 영화 보기 50여 년에 영화 스터디 40년 차, 영화 글쓰기 삼십 수년의 영화 비평가에게 그 어느 해보다 한층 더 크고 깊은 감흥‧자극을 안겨주고, 나아가 열광‧감탄시키기도 한 수‧걸작 10편을.

그간은 으레 한국과 외국 영화를 분리했으나, 이번에는 종합적으로 뽑았다. 최종적으로 2편 대 8편이다. 외국 영화 쪽으로 확연히 기울어졌다. 균형‧배분 차원에서 주목에 값하는 문제작 <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이태겸 감독)를 포함시키고 싶었으나, 끝내 선택하질 않았다. 선택하지 않은 외국 영화와의 형평성 등을 고려해서였다. 안소니 홉킨스에게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안긴 <더 파더>(플로리안 젤러)나 비르지니 에프라, 다프네 파타키아, 샬롯 램플링 세 여걸들의 활약상이 단연 돋보였던 칸 경쟁작 <베네데타>(폴 버호벤), 지난해 서서히 빠져든 멕시코 태생 명장 미셸 프랑코의 2020 베니스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작 <뉴 오더> 등이 그 몇몇 예들이다. 1위작도 그렇거니와 10편을 꼽는 데 이렇게 고심을 했던 적이 있었나, 싶다. 기억하건대 없다.

일찍이 동료 영화평론가이자 영화치료 전문가인 심영섭의 유튜브 방송 ‘심교수의 15분’(https://www.youtube.com/watch?v=FBRYif75R9Y&t=6s)에서 영화계 결산을 하며 베스트 10을 밝혔었는데, 순위도 그렇거니와 그 목록과 다소 차이가 난다. 그때의 녹화 이후 일련의 영화들을 더 챙겨보고, 그들 중 2편을 새로 선정해서다. < 해피 아워 >와 < 램 >이 그들이다.

공동 1위 : < 드라이브 마이 카 > & < 해피 아워 >(2015), 하마구치 류스케

2021년은 내게, 상기 미셸 프랑코와 더불어 일본이 낳은 젊은 거장 하마구치 류스케―이 두 감독은 1978년생으로 동갑내기다―에 푹 빠진 한해로 기록될 게 틀림없다. 작심하고 부산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에서 관람한 베를린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작 < 우연과 상상 >과, 칸 각본상 수상작 < 드라이브 마이 카 >가 그 결정적 계기였다.

일본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 어느 가족 >이 영예의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2018년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서 첫선을 보인 < 아사코 >를 볼 때만 해도 사실, 이 ‘젊은 거장’에게 별다른 주목을 하지 않았었다. 칸에서 무관에 그쳐서는 아니었다. 이창동 감독의 문제적 걸작 < 버닝 >도 빈손으로 돌아오지 않았는가. 그보다는 전작(前作)을 본 적이 없는 데다 감독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던 터라, 그저 ‘별난 러브스토리’쯤으로 치부하고 넘어갔던 것이다. 아사코 역 카라타 에리카―tvN 18부작 드라마 < 아사달 연대기 >(2019)에서도 조연으로 등장했던―의 치명적 매혹(Fatal Attraction)에 혹하긴 했어도…

이 포스트-고레에다에게 남다른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영화가 아니라 그가 봉준호의 < 기생충 >(2019)에 대해 쓴 어떤 글의 일부를 읽고나서였다. 감독으로서 자신의 영화 인생은 그 걸작을 기점으로 나뉘며, 봉준호와 홍상수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한국영화가 부럽다는 게 아닌가! 한-일 간의 고질적 갈등을 감안할 때, 전통 영화 강국 일본의 전도유망한 ‘미래의 거장’의 발언이라고 믿기 힘들었다. 그의 파격적 개방성‧수용성은 강렬한 인상을 넘어 일대 충격으로 다가섰다. 봉 감독과의 심층 인터뷰에서, 그의 견해를 굳이 전한 것도 그래서였다.

작년 3월 개봉한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 스파이의 아내 >(2020)를 보고는 하마구치를 향한 내 관심은 한층 더 깊어졌다. 영화미학‧예술적 수준은 말한 것 없고 무엇보다 여타 일본 감독에게서는 (거의) 목격한 적 없었던 그 세계시민적(Cosmopolitan)적 시각(Perspective)이 감탄스러웠다. 기요시 감독의 출세작 < 큐어 >(1997)를 비롯해 < 카리스마 >(1999), < 밝은 미래 >(2003), < 산책하는 침략자 >(2017) 등 이전 영화들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그 범세계적 무권력주의(Anarchism)적 아우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혹스러웠다. 그 답은 각본에 하마구치가 참여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었다. 결국 영화의 메인 작가는 하마구치 류스케였던 셈이다. 판단컨대 하마구치는 코스모폴리탄적 아나키스트임이 분명하다. 그 정체성을 파악하는 것이 ‘하마구치 월드’에 근접하기 위한 최우선적 첩경이(라는 것이 내 총평적 해석이)다.

< 천국은 아직 멀어(天国はまだ遠い) >(2016)는 하마구치를 향한 내 관심을 애정으로, 나아가 열광으로 비상시켰다. 2019년 제2회 짧고 굵은 아시아영화제에서 선보였던 그 단편을 보며 감독의 기발한, 너무나도 기발한 천재적 상상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제 소갯글을 빌려보자.

AV 영화 모자이크 작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주인공 유조는 어느 날, 한 여인에게서 인터뷰 제안을 받는다. 그는 17세에 죽은 동급생 유령과 기이한 공동생활을 하고 있는데, 의뢰자는 다름 아닌 그녀의 여동생이었다. 그녀는 죽은 언니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다 유조에게 언니가 빙의되었다는지 그 여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유조의 증언을 믿지 않지만, 그에게 빙의된 언니의 말에 반응하면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제목이 암시하는 ‘천국과의 거리’는 유령과 신체에의 빙의,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스크린에 비치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만질 수 없는 접촉 불가, 증언의 불확실성의 테마를 보여준다.

그 외연에서는 적잖이 다르나 내포적 의미에서 < 천국은 아직 멀어 >는, 그 전후의 두 장편 < 해피 아워 >와 < 드라이브 마이 카 >를 잇는 가교로 손색없다. < 해피 아워 >는 모든 것을 공유하며 서로를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해왔으나 실은 서로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고민을 지니고 있는, 30대 후반의 네 동창생을 축으로 펼쳐지는 여성 드라마다. 영화는 제 68회 로카르노영화제 국제경쟁 부문 여우주연상을 안았다. 놀랍게도 연기 워크숍에서 만난 비직업적 초짜 배우 넷이 공동 수상을 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영화의 상영시간이, 단일 영화로는 일본영화 사상 가장 긴 5시간 28분이라는 것이다. 대체 그렇게까지 길어야 했던 이유가 있을까. 그에 대해 감독의 입을 통해 직접 들어보자.

“지금도 캐스팅이 가장 어려워요. 비직업 배우와 전문 배우와의 작업은 각각의 장점과 어려움이 있는데요…물론 제가 일부러 길게 찍으려고 한 건 절대 아닙니다. (웃음) < 해피 아워 > 찍을 때까지만 해도 재밌는 걸 찍으려고 하면 길게 찍는 방법밖에 없더라고요…8개월간 촬영했고 시나리오 수정 작업도 꽤 여러 차례 진행했어요. 기본적으로 비직업 배우들과의 작업이다 보니 대본을 누가 읽더라도 쉽게 이해되게끔 계속 수정해야 했죠. 초고로는 2시간 30분 분량의 영화였는데 대본 수정을 거듭할수록 내용을 하나씩 풀어쓰다 보니 분량이 점점 늘어나는 거예요. 네 명의 캐릭터가 일상에서 어떤지를 자세히 묘사했어요…길어진 대본 분량을 그대로 다 찍었어요. 2시간 정도로 편집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막상 다 만들어놓고 보니 5시간 36분―왓챠에서 볼 수 있는 국내 개봉은 5시간 28분―이 되더라고요. 근데 그걸 보는데 정말 재밌는 거예요. 출연한 분들이 그만큼 시간을 투자해 자신들의 캐릭터를 이해했던 것이잖아요. 관객도 이 시간 동안 영화 속 캐릭터를 마주하다 보면 캐릭터를 이해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요.”(http://reversemedia.co.kr/article/189)

감독이 역설한 ‘재미’는 빈말이 아니다.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는바, 5시간 반에 가까운 그 긴 시간이 마치 1시간처럼 순식간에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다면 수긍이 갈까. 그 느낌은 < 드라이브 마이 카 >에도 해당된다. 여느 영화치고는 결코 짧지 않은 3시간이 훌쩍 흘러가는 ‘경이의 영화!’ 2014년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집  《 여자 없는 남자들 》  에 실려 있는 7편 중 하나인 동명 단편을 영화화했다. < 버닝 >이 그랬듯 하루키 원작은 그러나 일종의 맥거핀(MacGuffin), 즉 속임수 내지 미끼에 지나지 않는다.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램 노트도 말하듯, “마음 한구석에 꾹 눌러둔 어둠과 외로움을 간직한 주인공을 그린다는 점에서 하루키 소설의 핵심을 담고 있으면서”도 하마구치 그가 아니라면 도저히 불가능했을, 그만의 내러티브‧연출 스타일로 압도적이면서도 독보적인 영화 세계를 구축해내기 때문이다.

영화는 크게 두 파트로 이뤄진다. 전체 3시간 가운데 몇십 분이 채 안 되는 전반부는 언뜻 남부러울 것 없는 멋진(Cool) 부부 사이의 사건‧사연이다. 인기 배우이자 연출가인 가후쿠와, 역시 인기 있는 TV 드라마 작가 오토다. 여자는 남편과 섹스를 하면서 이야기를 지어내 들려주는 버릇이 있는데, 그 이야기로 대본을 만들어 작가로서 성공을 일궈내 구가하고 있는 것이다. 남자는 어느 날 우연찮게 아내의 외도를, 그것도 자신의 집에서 목격하나 그 자리를 회피한다. 그것도 모자라 끝내 그 이유를 묻지 않고, 그런 상태로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

아내가 죽은 지 2년 후, 가후쿠는 히로시마연극제에 초청돼 안톤 체호프의 희곡 < 바냐 아저씨 >를 올릴 준비를 한다. 그곳에서 그에게는 주최 측의 강권으로 마지못해, 전속 드라이버 미사키와 함께 하게 된다.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 두 번째 파트는 또 다시 두 부분으로 나뉜다. < 바냐 아저씨 >의 공연에 이르는 과정과, 가후쿠-미사키 간에 서서히 서로의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이다. 그 두 과정이 유기적으로 연관돼 있음은 물론이다.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최종 성사 여부조차 불투명한 < 바냐 아저씨 > 공연 연습을 통해 가후쿠는 자기 내면의 심연을 성찰할 기회를 맞는다. 일본어를 비롯해 러시아어, 영어, 중국어, 한국어, 심지어 침묵의 언어인 수화 등 다양한 언어로 소통하며, 한 편의 연극을 완성해가는 연기자들을 통해 삶의 비밀에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간다고 할까. 그 과정에서 묵묵히 운전에만 열중하는 미사키와, 습관적으로 죽은 아내가 녹음한 < 바냐 아저씨 > 녹음 테이프를 들으며 대사 연습을 하는 가후쿠 사이에 소통의 기회가 찾아오고, 마침내 둘 다 공히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관계맺음이 이뤄진다.

< 드라이브 마이 카 >는 2월 말 기준, 전 세계 영화제 및 영화상에서 62개 수상에 100개 부문에 후보지명돼 있다. 그 중 4개는 오는 3월 27일(일) 개최되는 제 94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노미네이션이다.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국제장편영화상(옛 외국어영화상)이다. 미국의 로컬 영화상에서 영어가 아닌 영화로 작품상과 감독상 등에 후보로 지명되다니, < 기생충 >에 이은 일대 파란이라 평하지 않을 길 없다. 올 아카데미의 주요 관전 포인트는 < 드라이브 마이 카 > 와, 11개 부문 12개 후보에 오른 < 파워 오브 도그>가 과연 어떤 상을 가져가냐 일 테며, 세 부문에서는 양파전이 될 공신이 크다. 수상 결과에 상관없이 < 드라이브 마이 카 >는 이미 ‘포스트-기생충’으로 일컬어질 만하다.

이렇듯 하마구치 영화들에서 중시되는 것은, 캐릭터와 캐릭터를 이어주는 어떤 ‘사이’요, 그 사이의 채움을 통해 드러나는 개별 캐릭터들의 어떤 존재감들이다. 캐릭터가 인간 자체로 바뀌어도 무방하리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장, 단편 불문 그의 영화들은 인간에 대한 이해, 즉 삶과 죽음에 대한 이해를 비교의 예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심화‧제고시켜준다. 그에게 영화는 철저히 우리네 인류 사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여느 영화광들처럼 그 반대가 아니라…

그 점에서 하마구치는 천상 휴머니스트다. 어느 모로는 작금의 포스트-휴먼, 트랜스-휴먼 시대, 달리 말해 디지털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아날로그적 고전주의자랄까. 그렇지 않다면, 스승 구로사와 기요시도 그렇거니와 프랑스 누벨바그의 돌연변이적 주자 에릭 로메르나 심심치 않게 그와 비교되곤 하는 홍상수, 그리고 선배 봉준호를 향해 어찌 그렇게 대놓고 크고 작은 오마주를 바칠 수 있겠는가. 난 정말이지 하마구치의 그 겸손한 자신감과, 자신감 어린 겸허함을 사랑한다.

나는 그의 영화를 볼 때마다, 별다른 액션도 없이 주고받는 인물들의 대사가 얼마나 역동적일 수 있는지 감탄하곤 한다. 그 어떤 액션 영화도 그렇게 다이나믹하지 않다. 뿐만 아니다. 그의 영화들은 소위 ‘예술영화’의 범주에 들어가야 마땅하나, 여느 예술영화들과는 달리 난해하긴커녕 접근 불가한 요소들이 거의 없다. 그 지점에서 그는 장 뤽 고다르,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등 서구의 대표적 작가 감독들은 물론이거니와 여로모로 비교될 법한 태국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이란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등과도 판이하게 다른 자기만의 독자적 영화 세계를 구축해내는 데 성공했다. 고작 40대 초반의 이른 나이에…

나는 확신한다. 머잖아 세계 영화사는 하마루치 류스케 이전과 그 이후로 나뉘게 될 거라고. 헛소리라고? 과장이라고? 그렇게 비칠 수 있다. 하지만 나부터 그 작업을 향해 나아갈 참이다. 긴 호흡으로, 멀리 내다보면서 말이다. < 드라이브 마이 카 >와 < 해피 아워 >, 이 두 역사적 걸작은 비단 2021년만이 아니라, 21세기 나아가 올해로 127년을 맞이한 공식 세계 영화역사의 손꼽히는 으뜸 문제작들로 평가돼 마땅하다.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 우연과 상상 >도 마찬가지고…

이어질 3위부터 10위작 리스트는 아래와 같다.(계속)

3위.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리들리 스콧

4위. 퍼스트 카우, 켈리 라이카트

5위. 티탄, 쥘리아 뒤쿠르노

6위. 파워 오브 더 도그, 제인 캠피온

7위. 램, 발디마르 요한손

8위. 듄, 드니 빌뇌브

9위. 모가디슈, 류승완

10위. 자산어보, 이준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