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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 파이터스(Foo Fighters) ‘But Here We Are'(2023)

평가: 4/5

2022년 갑작스럽게 드러머 테일러 호킨스가 세상을 떠났다. 팀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그였기에 밴드의 이후 행보가 잠시 안개에 가려진 듯했으나 앨범의 제목처럼 푸 파이터스는 고난을 딛고 음악의 자리에 있길 선택했다. < But Here We Are >는 이처럼 큰 상실의 맥락 하에 있으며 그렇기에 슬픈 앨범이다. 하지만 이들의 음악은 과거에 매몰되지 않고 여전히 앞으로의 삶을 향한다. 이 의지는 그들이 딛고 일어설 고통만큼 강하다.

음반에 몰입감을 더하는 특유의 은유적인 표현들이 눈에 띈다. 심리적 고통이 해결되길 바라는 마음을 노래한 ‘Rescued’, 한계와 초월을 그린 ‘Beyond me’ 등에서 이러한 메시지가 도드라진다. 또한 누군가를 기리는 듯한 내용도 귀에 들어온다. 물론 이번 앨범의 모든 내용을 상실의 고통과 직접 연결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다만 ‘But here we are’, ‘The teacher’ 같은 곡에서 어떤 흔적들이 묻어날 뿐이다. 전작들에 비추어 생각해 본다면 이 모호함은 분명 의도된 결과다.

열 개의 트랙은 풀 레인지로 들었을 때 명확한 음악적 서사를 띈다. 장조 선율의 ‘Under you’와 이후 트랙들이 선명한 멜로디를 전달하다가 어쿠스틱 사운드의 ‘The glass’에서 숨을 고르고, 후반부 ‘The teacher’와 ‘Rest’의 절정까지 달리며 역동성이 가득한 감상의 순간을 연출하는 데에 성공한다. 이는 이 음반이 어떤 사건에 의해 갑작스럽게 주조된 것이 아니라 퍽 오랜 기간 완성도 있는 앨범을 만드는 것에 중심을 두고 작업한 결과물임을 방증한다.

2005년 이후 처음으로 리더 데이브 그롤의 이름이 올라간 드럼 크레딧은 밴드의 이전 작품들을 떠올리게 한다. 사운드 유사성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 But Here We Are >는 편곡적인 측면에서 < In Your Honor >나 < One By One >에서 시도된 음악적 결과물들에 터를 잡고 있다. 여기에 다소 신경질적인 감성이 덧입혀져 묘한 방식으로 밴드의 스트레스를 새롭게 승화한다. 다분히 록 뮤지션 다운 선택이다.

애석하게도 데이브 그롤에게 있어 주변인의 죽음은 늘 따라다니는 그림자였다. 커트 코베인의 죽음이 그랬고, 지금은 테일러 호킨스와 어머니의 죽음이 맴돈다. 이런 순간에도 그는 담담하게 음악으로 향한다. 밴드의 음악이 순전한 애도만으로 해석되는 것도 차분하게 거부하며 꿋꿋하게 할 수 있는 일을 행한다. 이는 그가 겪은 슬픔에 대한 나름의 극복 의지이며, 팬들에게 건내는 푸 파이터스만의 위로다.

-수록곡-
1. Rescued
2. Under you
3. Hearing voices
4. But here we are
5. The glass
6. Nothing at all
7. Show me how
8. Beyond me
9. The teacher
10. 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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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블레이크(James Blake) ‘Playing Robots Into Heaven’ (2023)

평가: 3.5/5

여러 매체에서 제임스 블레이크의 신보를 가리켜 “초창기 일렉트로닉 음악으로의 회귀”라 표현하지만 사실 음반은 커리어의 총집합에 가깝다. < Overgrown >의 ‘Retrograde’를 조금 더 극적으로 편곡한 듯한 두 번째 싱글 ’Loading’과 < Friends That Break Your Heart >의 보컬 중심 발라드 작법을 따르는 ‘Fire the editor’가 공존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심지어 마지막을 장식하는 고요한 타이틀 트랙은 지난해 발표한 수면 유도용 앰비언트 앨범 < Wind Down >과도 닮았다. 곳곳에서 기존 디스코그래피의 면면을 확인할 수 있다.

자칫 뻔할 수 있는 구성을 뒤흔드는 것은 새로운 수용에 있다. 2011년 스튜디오 앨범 < James Blake >로 시작한, 알앤비와 소울 스타일 보컬에 짙푸른 우울함을 흠뻑 끼얹은 그의 화풍이 < Klavierwerke > EP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 Playing Robots Into Heaven >에서 강조되는 기계적 질감과 극적인 터치는 평단의 주목을 받는 계기였으나 정작 정사(正史)에 편입되지는 못한 전사(前史) 격의 작품인 두 EP < The Bells Sketch > 그리고 < CMYK >와 일부 맞닿아 있다. 반복적인 리프 위를 오직 라가 트윈스(Ragga Twins)의 랩 샘플로만 채운 ‘Big hammer’를 첫 싱글로 택한 그의 결정이 곧 음반의 방향성을 함축한다.

앨범 대부분은 침울한 고립을 주도하던 기존 음악의 인상과는 달리 소극적으로나마 움직임을 유도한다. 차가운 음색의 피아노와 제임스 블레이크의 희뿌연 목소리라는 익숙한 조합이지만 그 아래에 깔린 리듬의 존재감이 미세한 역동성을 덧붙이는 첫 트랙 ‘Asking to break’가 그 신호탄. 레이저 건처럼 신시사이저 비트를 쏘아대는 ‘Tell me’, 개러지 스텝에 기초한 ‘Fall back’과 기묘한 그루브를 자아내는 ‘He’s been wonderful’ 등이 곰팡이 핀 눅눅한 방구석에서 캄캄한 지하실 기괴한 레이브 파티로 장소를 옮긴다.

갑작스럽게 보여도 변화의 개연성은 충분하다. 먼저는 젊은 유령처럼 막을 올린 그의 디스코그래피가 세상에 점차 스며들면서 신체를 획득하는 서사를 완료했음이 그 원인이다. 환경적 측면에서도 아웃사이더의 지위에서 뱉어낸 멜랑콜리의 안개가 트래비스 스캇과 비욘세 등 여러 뮤지션과의 교류를 거쳐 대중음악의 대기를 구성하는 주 성분으로 등극한 상태. 물론 창시자 격이긴 하나 그의 음악적 특색 또한 기존의 독보적인 지위에서는 많이 물러났을 뿐더러 스스로도 < Assume Form >을 기점으로 우울증과 자기혐오의 세계에서 거리를 두고 있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뒤흔들기를 요구받는 시점이다.

물론 제임스 블레이크의 음악은 그때나 지금이나 대중적 장벽이 있기에, 코로나19를 거쳐 댄스 음악의 지위가 격상한 판세에 마냥 영합하는 움직임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음반을 아우르는 무질서와 도취의 기운은 < Playing Robots Into Heaven >이 흑인 음악 기반의 여성 중심 댄스 트렌드에 맞서는 고상한 백인 남성의 구도, 즉 쾌락주의에 반기를 든 이성주의의 항거로 보일 여지를 차단한다. 그가 늘 고집스럽게 내면의 소리를 좇은 뮤지션이었음을 고려하면 신보는 지극히 개인적인 자아 탐구의 연장이다. 몸의 대변자인 목소리를 삭제하고 사운드라는 영혼만을 남긴 이원론적 구조와 동적 감각을 중시하는 반이성주의적 관점의 역설적 합치는 그 어떤 미래도 아닌 스스로의 과거와 연결되며 총체적인 순환의 그림을 그린다.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 < 제7의 봉인 >의 결말에서는 끝을 맞이한 인물들이 손을 잡고 ‘죽음의 춤’을 춘다. 언뜻 비슷하게 보이나 앨범 커버 속 제임스 블레이크는 행렬 속에 홀로 언덕을 오르고 있다. 그렇기에 아직 그가 걷는 경로 또한 종말 대신 삶의 길이다. 묵묵히 수행을 거듭하는 음악가는 어쩌면 기독교적 구원 세계의 신자가 아니라 그리스 신화의 시시포스에 더 가까울 것이다. 고뇌와 발걸음, 그리고 그 속에 피어나는 무아지경을 향한 갈망. < Playing Robots Into Heaven >는 결과가 아닌 수단으로서의 회귀다.

-수록곡-
1. Asking to break
2. Loading
3. Tell me
4. Fall back
5. He’s been wonderful
6. Big hammer
7. I want you to know
8. Night sky
9. Fire the editor
10. If you can hear me now
11. Playing robots into hea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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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Blur) ‘The Ballad Of Darren'(2023)

평가: 4/5

8년 만의 신보 < The Ballad Of Darren >은 어느덧 50대를 훌쩍 넘긴 블러의 현재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때 그 시절 블러의 실험정신이나 재기발랄한 매력은 찾기 어렵다. 상실과 고독, 공허함에 사무친 감정이 작품을 감싼다. 프런트맨 데이먼 알반은 본인이 원하지 않은 여러 이별을 겪었다. 기타리스트 바비 워맥, 드러머 토니 앨런 등 친한 동료 뮤지션들이 세상을 떠났고, 20년간 동거생활을 유지한 연인 수지 윈스탠리와의 관계를 정리했다. 그렇기에 블러는 그에게 있어 시간이 갈수록 더욱 소중하며 결코 잃고 싶지 않은 존재다. 그는 블러와 함께 현재의 자신을 차분하게 들여다본다. 그것이 이번 앨범의 첫 트랙, ‘The ballad’의 시작이다.

‘The ballad’는 과거에 대한 추억으로 가득한 데이먼의 쓸쓸한 보컬로 시작해 멤버들이 하나둘 합류하며 풍성해지는 점진적인 진행으로 비로소 블러가 돌아왔음을 알린다. 다시 한 곳으로 집결한 그들은 옛날처럼 통통 튀는 록을 연주해 본다. 1980년대 뉴웨이브로 초기 블러가 연상되는 ‘St. Charles square’와 데이먼 알반의 주력 프로젝트가 된 고릴라즈의 향취가 배인 ‘Barbaric’은 각자 신나는 멜로디 사이에 슬픔과 절망이 묻어 나온다.

우울에 빠진 그들은 후반부로 갈수록 기타 노이즈를 더 키우며 극복하려 한다. ‘The narcissist’는 앨범의 변곡점이다. ‘거울을 보니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첫 구절은 그들이 대중 뮤지션으로서 살아온 삶을 은유한다. 오랫동안 넘어지기 쉬운 굽잇길을 걸어온 그들은 서로가 서로의 빛이 되었다. ‘The narcissist’를 지난 뒤의 감정은 대체로 낭만적이다. 왈츠 리듬에 맞춰 홀로 춤을 추는 ‘Far away island’는 쓸쓸함을 덮는 황홀한 사운드로 가득하고, ‘Avalon’은 혼란 속에서도 상대의 행복을 바란다. 마지막 트랙 ‘The heights’는 아름다운 오케스트라 세션과 귀를 찢는 노이즈의 융합으로 이 애처롭고도 아름다운 삶을 표현한다. 고독은 여전하나 눈부신 이상에 도달하려는 여정은 계속되며 그 끝은 혼자가 아닐 것임을 소망한다.

6번째 앨범 < 13 >이 연상된다. 그 앨범은 멤버들을 괴롭히는 심적 고통이 끊이질 않는 상황에서 만들어져 전체적으로 가라앉은 분위기에 각종 실험적인 사운드를 도입해 복잡한 마음을 표현했다. 20여 년이 지나 다시 찾아온 고통의 시간 위에서 연주하는 < The Ballad Of Darren >은 그때보다는 훨씬 정갈하고 실험보다는 밴드 자체의 합에 집중한다. 베이시스트 알렉스 제임스와 드러머 데이브 로운트리는 늘 그랬듯, 기교를 최소화하고 탄탄하게 뒤를 받친다. 그레이엄 콕슨도 이번에는 대체로 데이먼 알반에게 주도권을 내줬다. 그 결과, 각 트랙의 개성이 덜하고 음악적으로는 고릴라즈와 다소 맞닿아 있으나 트랙 간 유기적인 연결과 감정표현이 뛰어난 작품이 되었다.

블러는 젊지 않다. 1990년대의 기성세대를 풍자하고 비판했던 그들은 이제 2020년대의 기성세대다. 과거의 에너지를 재현하기에는 그 시절만큼의 기력이 없다. 이별의 슬픔도 이전보다 더 자주 겪으며 점점 무뎌지지만 무감하지는 않다. 음악의 기술에는 통달했으나 신선함은 이와 반비례한다. 그런데도 블러니까, 블러기에, 블러라는 이름으로만 할 수 있는 음악이 있다. 작품에 담긴 이야기들은 고릴라즈나 누군가의 솔로 명의로는 절대 노래할 수 없다. 브릿팝의 종말 이후 음악적 실험실에 가까웠던 블러는 돌고 돌아 즐거운 고향이 되었다. 먹구름 낀 광야에서도 수영을 즐기는 앨범커버처럼 우울과 낭만 사이에서 행복을 포착한다.

– 수록곡 –
1. The ballad
2. St. Charles square
3. Barbaric
4. Russian strings
5. The everglades (for Leonard)
6. The narcissist
7. Goodbye Albert
8. Far away island
9. Avalon
10. The heigh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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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마리(Anne Marie) ‘Unhealthy’ (2023)

평가: 2.5/5

시대의 순풍을 탄 아티스트가 필연적으로 거쳐야 할 통과의례다. 일렉트로닉 팝이 시장을 휩쓸던 10년 전쯤 함께 등장한 앤 마리에게 이번 시험이 요구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전자음악의 슬하에서 성장했으나 장르의 열기는 차츰 식었고, 몇몇 히트곡 이후 그의 후속작은 성공 공식을 다소 납작하게 반복하는 데 그쳤기 때문. 시장의 논리는 비정하지만, 화려한 조명이 옮겨간 지금 점검의 시기는 가장 적절하다.

새 판을 짜겠다는 의도가 돋보인다. 초장부터 ‘Sad b!tch’가 새드 걸 팝(Sad Girl Pop)에 일침을 날리고, 대신 팝 펑크에 실마리를 얻은 ‘Haunt you’가 강하고 주체적인 자의식을 불어 넣는다. 본인의 병명을 드러낸 ‘Cuckoo’나 재치 있게 단어 중 앞 글자만 뗀 ‘Ick’ 등 실감 나는 노랫말도 옹골찬 성장의 단면을 써내리는 데 일조한다. 실제 경험을 빼곡하게 수록한 덕에 건강하지 않은 모습, 결점까지도 온전히 내비치겠다는 타이틀 < Unhealthy >는 설득력을 가진다. 

준수한 표현력을 청각에 연결 짓기 위해 보컬리스트로서 놀라운 장르 적응력도 발휘한다. 한 우물만 파기보다는 각각에 맞는 옷을 입혀 그가 지닌 최대 장점이 잘 드러나는 전략이다. 래퍼 라토부터 케이팝 그룹 세븐틴까지 교류했던 경험을 양분 삼아 어쿠스틱과 록, 심지어 컨트리까지 폭넓게 선보인 것이다. 돌아온 여성 컨트리 팝의 대가 샤니아 트웨인(Shania Twain)의 허스키한 음색을 만끽할 ‘Unhealthy’에서 마저 전설의 명성에 크게 뒤지지 않았다.

매무새는 그럴듯해 보이나 알맹이는 부실하다. 입체적인 서사와 다르게 대부분의 구성이 평면적인 탓으로, 비교적 준수한 곡은 음미하기에는 너무 짧고 이전 히트곡만큼의 파급력을 지니지도 못해 그 인상이 미약하다. 송 캠프에서 기억에 남는 멜로디만 단순 나열한 트랙리스트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고, 수수한 품으로 몇 곡 정도는 완성도를 높였으면 어떨까 아쉬워지는 지점이다. 

인기 싱글 ‘2002’는 순탄한 성공 가도를 펼쳤지만 이를 유지하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은 높았다. 험난한 길 중간에 거울을 비춰본 순간, 앤 마리는 불완전한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고 힘겨운 돌파를 택했다. 그렇게 탄생한 < Unhealthy >는 하나의 인격체로서, 그리고 가수로서 도약의 발판으로 충분히 기능할 것이다. 물론 결과를 중시한다면 모든 종류의 초석이 그러하듯 크게 눈에 띄지는 않겠지만, 과정에 의미를 둔다면 자랑스러운 흔적이다.

– 수록곡 –

1. Sucks to be you
2. Sad b!tch
3. Psycho
4. Haunt you 
5. Trainwreck
6. Grudge
7. Obsessed
8. Kills me to love you
9. Unhealthy (Feat. 샤니아 트웨인) 
10. Irish goodbye
11. Cuckoo
12. You & I (Feat. 칼리드) 
13. Never loved anyone before
14. Better off
15. Ick
16. Expect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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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아 로드리고(Olivia Rodrigo) ‘Guts’ (2023)

평가: 3.5/5

지난 2021년 9월 멧 갈라(Met Gala) 행사에 등장한 올리비아 로드리고의 새까만 깃털 의상을 보고 불과 4개월 전 발매한 데뷔 앨범과는 너무나도 다른 패션에 적잖이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이제 보니 ‘디즈니 소녀’ 꼬리표를 재빨리 떼려는 시도이자 차기작에 대한 예고가 아니었나 싶다. 전 남자친구를 제물로 바쳐 뒤틀린 신데렐라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뮤지션이 돌아왔다. 완전한 성숙 이전, 혼란스러운 성장 단계에 선 채로.

‘배짱’을 뜻하는 제목처럼 청승맞은 데뷔 앨범에 비해 조금 더 과감해졌다. 첫 트랙 ‘All-American bitch’는 미디어가 그리는 미국 여성의 이상향을 조롱하고, “그저 발이 걸려 침대에 넘어진 것뿐이야”(’Bad idea right?’), ”넌 밤에만 모습을 드러내지“(’Vampire’) 등 섹슈얼한 표현도 스스럼없이 내뱉는다. 웃음기 빠진 디즈니 하이틴에서 파스텔톤 HBO 드라마로의 장르 변경. 한 끗 차이지만 뉘앙스에 분명한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Good 4 u’의 성공으로 팝 펑크 리바이벌의 주축이 되었지만 사실 < Sour >에서 그러한 트랙의 비중은 극히 낮았다. 두 배 넘게 증가한 신보의 일렉트릭 기타 함유량은 세 가지를 목표로 한다. 덜컥 얻어버린 수식어에 부합하기 위한 보강공사, 전작과의 차별화 조성 및 성장의 은유, 그리고 좀비 상태인 록 장르의 부흥을 꿈꾸는 평단의 호감 얻어내기다. 속 보이는 전략임에도 포스트 펑크의 털털한 허세와 화끈한 2000년대 팝 록 기타 리프를 재현하는 솜씨에 음악이 결코 밉지 않다.

너무 빨리 무게를 잡은 탓에 퇴행을 택할 수밖에 없던 에이브릴 라빈의 선례를 의식했는지 여전히 나머지 절반은 일기장을 눈물로 적실 10대 백인 소녀 계층을 위한 발라드로 채웠다. 과거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그랬듯 소녀와 성인 사이 회색지대에 발을 딛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관습적인 끼워 넣기로 보인다. 목소리부터 울먹이기 바쁜 ‘Logical’, ‘The grudge’ 등은 마땅한 존재 가치를 찾기 어려울뿐더러 고음의 답답한 음색이 테일러 스위프트와의 유사성을 한층 부각한다.

해답은 양극을 달리는 구성 가운데 제3의 길을 제시하는 ‘Pretty isn’t pretty’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1980년대를 신스팝과 펑크(funk), 디스코로 추억하는 천편일률적 양상에서 살짝 벗어나 블론디(Blondie)나 아웃필드(The Outfield)의 서정적 선율과 선선한 뉴웨이브 기타 톤을 결합했다. 감정과 에너지의 과잉 모두 억제한 절충의 미학은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는 날것의 언어에 통찰력의 아우라를 부여한다. 앨범 후반부에서 가장 번뜩이는 트랙이다.

보편성의 추구로 대중의 지지를 얻었기에 올리비아 로드리고는 끊임없이 독창성의 증명을 요구받는 처지에 있다. 곳곳을 빼곡하게 채운 주석은 그를 기존 데이터를 끌어와 배합하고 요약하여 내놓는, 마치 챗GPT와 같은 가수로 보이게끔 한다. 그렇다면 원본 대신 그의 음악을 들어야 할 근거는 무엇일까? < Guts >는 이 물음에 정면으로 답하는 대신 나이를 무기 삼은 뻔뻔한 태도로 거침없이 밀고 나간다. 눈치 보지 않는 맹랑한 가수를 목도하고 있으면 점차 의심은 호기심으로, 불신의 시선은 업데이트에 대한 기대로 바뀐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지금 추세라면 언젠가는 기술적 특이점에 도달할 날이 분명 찾아올지도 모른다.

-수록곡-
1. All-American bitch
2. Bad idea right?
3. Vampire
4. Lacy
5. Ballad of a homeschooled girl
6. Making the bed
7. Logical
8. Get him back!
9. Love is embarrassing
10. The grudge
11. Pretty isn’t pretty
12. Teenage dre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