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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이브 마이 카 >에서 < 자산어보 >까지… 2021년의 영화 베스트 10(2편)

삼십 수년간 영화 관련 글을 써오며 지금껏, 한해의 베스트 영화 10편을 뽑는 데 이번처럼 공을 들인 적은 없다. 몇 개월에 걸쳐 이 작업을 계속하고 있으니 말이다. 한국 영화 (제작) 100주년이었던 2019년 ‘한국 영화 100선’을, 다음 해 ‘세계 영화 100선’을 선정했을 때 못잖다. 그만큼 2021년에 국내에서 선보인 일련의 영화들, 특히 외국영화들에 실린 무게감이 만만치 않은 것이다. 애초에는 가볍게, 한 번에 다 소개하려던 10편의 영화들을 두 차례, 나아가 세 차례로 나눠 제시하는 것은 그래서다.

3위.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리들리 스콧 

리들리 스콧이 왜 거장인지를 새삼 증거하는 ‘압도적 역작’이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들만 아니라면 별다른 주저 없이 2021년의 베스트 1로 선정했을 터. 실은 막판까지 정상 자리를 놓고 고심에 고심했음을 고백한다. <해피 아워>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드라이브 마이 카> 아닌 이 걸작을 1위로 선택했으나, <해피 아워>를 보고 나니 <드라이브 마이 카>가 한층 더 유의미하고 매혹적으로 다가서 끝내 그 순위를 바꿨다.

<라스트 듀얼>은 100년 전쟁 중인 14세기 후반의 프랑스를 무대로, 유서 깊은 카루주 가문의 장군‧기사 장 드 카루즈(맷 데이먼 분)와 그의 친구이자 라이벌 자크 르그리(아담 드라이버), 그리고 장의 아내 마르그리트(조디 코모), 세 중심인물을 축으로 펼쳐지는 휴먼 역사 대작이다. 일찍이 이 지면의 리뷰에서도 밝혔듯, 인물들의 성격화(Characterization)부터 주‧조연 배우들의 열연, 특히 전체적 ‘톤 앤드 매너’에서 다분히 마초적으로 비치는 영화를 주목할 만한 여성 영화로 비상시키는 조디 코모의 치명적 매력(Fatal Attraction), 장과 자크의 한판 승부를 그리는, 마지막 20분간의 숨 막히는 화룡점정적 결투 시퀀스, 그리고 동일한 사건을 세 주인공의 시선에 의해 반복적으로 제시하는 비주류적 화법으로 예상치 못한 몰입감을 선사하는 플롯 등, 영화의 전 층위에서 최상의 경지를 뽐낸다. 오슨 웰즈의 <시민 케인>(1941)이나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1950) 등 세계 영화사의 대표적 걸작들의 비통속적 탈-할리우드 내러티브와 친숙한 주류 영화적 스타일로 세계영화의 지형도를 새로 그렸다, 는 것이 내 총평이다.

4위. 퍼스트 카우, 켈리 라이카트(Kelly Reichardt)

<초원의 강>(1994), <웬디와 루시>(2008), <믹의 지름길>(2010) 등을 통해 미국 독립영화를 대표하는 여성 감독으로 부상한 켈리 라이카트가 빚어낸 문제적 걸작이다. 1820년대 서부 개척 시대의 미국 오리건주, 사냥꾼들의 식량을 담당하는 백인과 도망자 신세였던 중국인 이민자 두 남자를 축으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너무나도 아름다운 성찰과 감동의 휴먼 드라마다. 인종의 차이에도 아랑곳없이 서서히 형성돼 지속하다 죽음에 직면해서도 배신하지 않는 두 주인공의 변치 않는 우정을 지켜보는 맛이, 여간 강렬한 게 아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새에겐 새집이, 거미에겐 거미집이, 인간에겐 우정이”라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구절이 등장하는데, 우정의 최상급 극적 형상화로 손색없다. 여느 서부극의 총격전 대신 요리를, 총 아닌 빵을 선택한 감독의 방향‧지향성에서 영화는 서부극을 완전히 해체시킨 셈인바, 그 점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걸작 웨스턴 ‘<용서받지 못한 자>(1992) 그 이후’로 일컬어질 만하다. 수시로 편협하기도 하고, 자국 영화를 향한 애정에서는 종종 맹목적으로 치닫기도 하는, 프랑스 유명 영화 월간지 《카이에 뒤 시네마》는 이 역작을 2021년의 ‘톱 텐 영화상’(Top 10 Film Award) 정상에 등극시켰다. 레오스 카락스의 <아네트>(2위)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메모리아>(3위), <드라이브 마이 카>(4위) 등 쟁쟁한 경쟁작들을 뒤고 하고….

5위. 티탄, 쥘리아 뒤쿠르노  

2021년 제74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화제의 논쟁작이다. 어린 시절 교통사고로 뇌에 티타늄을 심고 살아가던 한 여성(아가트 루셀 분)이 기이한 욕망에 사로잡혀 연쇄살인을 저지르고, 어느 날 10년 전 실종된 아들을 찾던 아버지(뱅상 랭동)와 조우하게 되면서는 그들 관계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공포성 휴먼 스릴러다. 극적 설정도 그렇거니와 시청각적 묘사에서도 더 이상 자극적일 수 없을 정도로 자극적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전혀 선정적이지 않으며 묘한 페이소스까지 안겨주는데, 다름 아닌 그 미덕이 칸 심사위원들을 움직였지 않았을까 싶다.

일찍이 다른 지면에서도 말했듯, 국내 선두 OTT 업체인 왓챠에서 볼 수 있는 영화는 <드라이브 마이 카>, <아네트>와 함께 지난해 26회 부산국제영화제 최고 인기작 중 하나였다. 일반 관객 표는 일찌감치 매진됐고, 하루 전 구할 수 있는 프레스 및 게스트 표 또한 작심하고 발권 30분 전인 오전 7시부터 대기 줄에 서 기다린 뒤 신청했건만, 허탕을 칠 정도였다. 부산영화제 프로그램 노트를 빌려보자. “호러, SF, 스릴러, 범상치 않은 러브스토리…<티탄>은 분명 유례없는 영화다. 시나리오보다 더 놀라운 점은 강철과 피, 그리고 불꽃의 오페라라고 해야 마땅한 쥘리아 뒤쿠르노의 유니크한 영상 스타일이다. ‘괴물성은 규범이라는 벽을 밀어내는 무기이자 힘이다. 괴물들을 받아들여 준 심사위원들에게 감사한다.’ 영화만큼이나 인상적인 (중략) 수상 소감이다. 이 다재다능한 젊은 여성 감독의 황금종려상 수상은 다소 아카데믹한 프랑스 영화의 관습을 송두리째 흔들 것이다.”

<티탄>의 쾌거가 과연 “프랑스 영화의 관습을 프랑스 영화의 관습을 송두리째 흔들 것”인지 여부는 지켜봐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칸 역사상 가장 파격적이라고 평할 수 있을 그 선택이 단발성으로 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국제영화제 최고상을 안았건만 영화는 오는 27일(일) 열릴 94회 아카데미상에서 5편의 국제장편영화상(옛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조차 들지 못했다. 비용의 영화인 봉준호의 <기생충>에 국제장편영화상을 포함해 영예의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까지 4관왕을 몰아준 아카데미가 예의 보수성으로 회귀한 것일까?

1983년생인 감독 쥘리아 뒤쿠르노는 프랑스 국립영화학교 출신의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로, 단편 <주니어>가 2011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선정되며 큰 눈길을 끌었다. 가족 모두가 채식주의자인 주인공이 식인 욕망으로 치닫는 드라마를 극화한 충격의 장편 데뷔작 <로우>(2016)로 2016 칸 비평가주간에 초청돼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 상을 받으며, ‘무서운 신예’로 떠올랐다. 뒤쿠르노 감독은 1993년 제인 캠피온이 <피아노>로 첸 카이거의 <패왕별희>와 공동 수상한 이후 사상 두 번째로 칸을 정복한 두 번째 여성 감독이 됐다. 단독으로는 최초다.

6위. 파워 오브 도그, 제인 캠피온

<피아노>(1993)만으로도 세계 영화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여걸 제인 캠피온이, 2009년 〈브라이트 스타〉 이후 12년 만에 선보인 화제의 수작이다. 영화는 1925년 광활한 미국의 몬태나 초원을 무대로 펼쳐지는, 로맨스 곁들인 미스터리물이자 서부극이다. 거대한 목장을 운영하는 필(베네딕트 컴버배치)은 막대한 재력은 물론 위압적이고 묘한 매력으로 사람들에게 공포와 경외를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어느 날 그의 동생 조지(제시 플레먼스)가 로즈(커스틴 던스트)와 그의 아들 피터(코디 스밋-맥피)를 가족으로 맞이하고, 동생의 갑작스러운 결혼 소식에 분노한 필은 로즈의 아들을 볼모로 삼아 그녀를 옭아매기 시작한다. 자신도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영화는 ‘마마보이’임이 분명한 주인공 소년의 흔치 않은 성장담이자 엄마를 위한 복수극으로도, 동성애적 성향을 지닌 주인공 필의 성장담으로도, 남편 없이 아들을 키우며 살아가야만 하는, 기구한 처지의 여인의 생존담으로도, 돈 때문에 자신과 결혼을 한 여자를 향한 조지의 순애보로도 읽힐 수 있다. 영화는 그만큼 해석에 열려 있으며, 그네들은 우리네 인생의 축약도적 캐릭터들일 수도 있다. 연기들이 매혹적이라는 건 두말할 필요 없을 테다. 네 중심인물이 죄다 올 아카데미상 연기상 후보에 올랐다. 어인 일인지 던스트는 여우 조연상에 올랐으며, 제시와 코디는 공동으로 남우조연상 후보에 지명됐다.

<파워 오브 도그>는 (3월 21 기준으로) 지난해 베니스영화제 감독상과 올해 골든글로브 드라마 부문 작품상과 영화 부문 감독상 등을 포함해 249개 상을 차지했으며, 오스카상 11개 부문 12개 등 무려 313개 상에 노미네이션돼 있다. <기생충>엔 다소 못 미쳐도, 그 못잖은 놀라운 성취다. 2022년 아카데미 시상식의 최대 관전 포인트는 따라서, 작품상 수상이 확실시되는 이 화제작이 과연 몇 개의 트로피를 가져갈 거냐 여부다. <드라이브 마이 카>가 네 개 부문 중 몇 개를 차지할 것인지 여부와 더불어. <파워 오브 도그>는 최근 미국 감독조합이 수여 하는 감독상과, 영국아카데미상 작품상, 감독상 등을 확보했다.

여담 하나. 한데 《카이에 뒤 시네마》는 이 영화를 베스트 10 안에 진입시키지조차 않았다. 영화 보기 및 평가에서 취향이 제아무리 중요하다고는 하나, 그 악명(?) 높은 잡지의 선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흥미롭지 않은가. (계속)

7위. 램, 발디마르 요한손

8위. 듄, 드니 빌뇌브

9위. 모가디슈, 류승완

10위. 자산어보, 이준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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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찬일의 영화수다 Feature

< 드라이브 마이 카 >에서 < 자산어보 >까지… 2021년의 영화 베스트 10(1편)

입춘(2월 4일)을 지나며 진짜 ‘검은 호랑이 해’(壬寅年)가 밝은지 한 달이 돼간다. 너무 때늦은 감은 있으나, 참고‧재미 삼아 이제라도 ‘2021년의 영화 베스트 10’을 엄선‧소개해보면 어떨까. 영화 보기 50여 년에 영화 스터디 40년 차, 영화 글쓰기 삼십 수년의 영화 비평가에게 그 어느 해보다 한층 더 크고 깊은 감흥‧자극을 안겨주고, 나아가 열광‧감탄시키기도 한 수‧걸작 10편을.

그간은 으레 한국과 외국 영화를 분리했으나, 이번에는 종합적으로 뽑았다. 최종적으로 2편 대 8편이다. 외국 영화 쪽으로 확연히 기울어졌다. 균형‧배분 차원에서 주목에 값하는 문제작 <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이태겸 감독)를 포함시키고 싶었으나, 끝내 선택하질 않았다. 선택하지 않은 외국 영화와의 형평성 등을 고려해서였다. 안소니 홉킨스에게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안긴 <더 파더>(플로리안 젤러)나 비르지니 에프라, 다프네 파타키아, 샬롯 램플링 세 여걸들의 활약상이 단연 돋보였던 칸 경쟁작 <베네데타>(폴 버호벤), 지난해 서서히 빠져든 멕시코 태생 명장 미셸 프랑코의 2020 베니스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작 <뉴 오더> 등이 그 몇몇 예들이다. 1위작도 그렇거니와 10편을 꼽는 데 이렇게 고심을 했던 적이 있었나, 싶다. 기억하건대 없다.

일찍이 동료 영화평론가이자 영화치료 전문가인 심영섭의 유튜브 방송 ‘심교수의 15분’(https://www.youtube.com/watch?v=FBRYif75R9Y&t=6s)에서 영화계 결산을 하며 베스트 10을 밝혔었는데, 순위도 그렇거니와 그 목록과 다소 차이가 난다. 그때의 녹화 이후 일련의 영화들을 더 챙겨보고, 그들 중 2편을 새로 선정해서다. < 해피 아워 >와 < 램 >이 그들이다.

공동 1위 : < 드라이브 마이 카 > & < 해피 아워 >(2015), 하마구치 류스케

2021년은 내게, 상기 미셸 프랑코와 더불어 일본이 낳은 젊은 거장 하마구치 류스케―이 두 감독은 1978년생으로 동갑내기다―에 푹 빠진 한해로 기록될 게 틀림없다. 작심하고 부산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에서 관람한 베를린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작 < 우연과 상상 >과, 칸 각본상 수상작 < 드라이브 마이 카 >가 그 결정적 계기였다.

일본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 어느 가족 >이 영예의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2018년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서 첫선을 보인 < 아사코 >를 볼 때만 해도 사실, 이 ‘젊은 거장’에게 별다른 주목을 하지 않았었다. 칸에서 무관에 그쳐서는 아니었다. 이창동 감독의 문제적 걸작 < 버닝 >도 빈손으로 돌아오지 않았는가. 그보다는 전작(前作)을 본 적이 없는 데다 감독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던 터라, 그저 ‘별난 러브스토리’쯤으로 치부하고 넘어갔던 것이다. 아사코 역 카라타 에리카―tvN 18부작 드라마 < 아사달 연대기 >(2019)에서도 조연으로 등장했던―의 치명적 매혹(Fatal Attraction)에 혹하긴 했어도…

이 포스트-고레에다에게 남다른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영화가 아니라 그가 봉준호의 < 기생충 >(2019)에 대해 쓴 어떤 글의 일부를 읽고나서였다. 감독으로서 자신의 영화 인생은 그 걸작을 기점으로 나뉘며, 봉준호와 홍상수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한국영화가 부럽다는 게 아닌가! 한-일 간의 고질적 갈등을 감안할 때, 전통 영화 강국 일본의 전도유망한 ‘미래의 거장’의 발언이라고 믿기 힘들었다. 그의 파격적 개방성‧수용성은 강렬한 인상을 넘어 일대 충격으로 다가섰다. 봉 감독과의 심층 인터뷰에서, 그의 견해를 굳이 전한 것도 그래서였다.

작년 3월 개봉한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 스파이의 아내 >(2020)를 보고는 하마구치를 향한 내 관심은 한층 더 깊어졌다. 영화미학‧예술적 수준은 말한 것 없고 무엇보다 여타 일본 감독에게서는 (거의) 목격한 적 없었던 그 세계시민적(Cosmopolitan)적 시각(Perspective)이 감탄스러웠다. 기요시 감독의 출세작 < 큐어 >(1997)를 비롯해 < 카리스마 >(1999), < 밝은 미래 >(2003), < 산책하는 침략자 >(2017) 등 이전 영화들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그 범세계적 무권력주의(Anarchism)적 아우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혹스러웠다. 그 답은 각본에 하마구치가 참여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었다. 결국 영화의 메인 작가는 하마구치 류스케였던 셈이다. 판단컨대 하마구치는 코스모폴리탄적 아나키스트임이 분명하다. 그 정체성을 파악하는 것이 ‘하마구치 월드’에 근접하기 위한 최우선적 첩경이(라는 것이 내 총평적 해석이)다.

< 천국은 아직 멀어(天国はまだ遠い) >(2016)는 하마구치를 향한 내 관심을 애정으로, 나아가 열광으로 비상시켰다. 2019년 제2회 짧고 굵은 아시아영화제에서 선보였던 그 단편을 보며 감독의 기발한, 너무나도 기발한 천재적 상상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제 소갯글을 빌려보자.

AV 영화 모자이크 작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주인공 유조는 어느 날, 한 여인에게서 인터뷰 제안을 받는다. 그는 17세에 죽은 동급생 유령과 기이한 공동생활을 하고 있는데, 의뢰자는 다름 아닌 그녀의 여동생이었다. 그녀는 죽은 언니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다 유조에게 언니가 빙의되었다는지 그 여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유조의 증언을 믿지 않지만, 그에게 빙의된 언니의 말에 반응하면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제목이 암시하는 ‘천국과의 거리’는 유령과 신체에의 빙의,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스크린에 비치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만질 수 없는 접촉 불가, 증언의 불확실성의 테마를 보여준다.

그 외연에서는 적잖이 다르나 내포적 의미에서 < 천국은 아직 멀어 >는, 그 전후의 두 장편 < 해피 아워 >와 < 드라이브 마이 카 >를 잇는 가교로 손색없다. < 해피 아워 >는 모든 것을 공유하며 서로를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해왔으나 실은 서로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고민을 지니고 있는, 30대 후반의 네 동창생을 축으로 펼쳐지는 여성 드라마다. 영화는 제 68회 로카르노영화제 국제경쟁 부문 여우주연상을 안았다. 놀랍게도 연기 워크숍에서 만난 비직업적 초짜 배우 넷이 공동 수상을 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영화의 상영시간이, 단일 영화로는 일본영화 사상 가장 긴 5시간 28분이라는 것이다. 대체 그렇게까지 길어야 했던 이유가 있을까. 그에 대해 감독의 입을 통해 직접 들어보자.

“지금도 캐스팅이 가장 어려워요. 비직업 배우와 전문 배우와의 작업은 각각의 장점과 어려움이 있는데요…물론 제가 일부러 길게 찍으려고 한 건 절대 아닙니다. (웃음) < 해피 아워 > 찍을 때까지만 해도 재밌는 걸 찍으려고 하면 길게 찍는 방법밖에 없더라고요…8개월간 촬영했고 시나리오 수정 작업도 꽤 여러 차례 진행했어요. 기본적으로 비직업 배우들과의 작업이다 보니 대본을 누가 읽더라도 쉽게 이해되게끔 계속 수정해야 했죠. 초고로는 2시간 30분 분량의 영화였는데 대본 수정을 거듭할수록 내용을 하나씩 풀어쓰다 보니 분량이 점점 늘어나는 거예요. 네 명의 캐릭터가 일상에서 어떤지를 자세히 묘사했어요…길어진 대본 분량을 그대로 다 찍었어요. 2시간 정도로 편집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막상 다 만들어놓고 보니 5시간 36분―왓챠에서 볼 수 있는 국내 개봉은 5시간 28분―이 되더라고요. 근데 그걸 보는데 정말 재밌는 거예요. 출연한 분들이 그만큼 시간을 투자해 자신들의 캐릭터를 이해했던 것이잖아요. 관객도 이 시간 동안 영화 속 캐릭터를 마주하다 보면 캐릭터를 이해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요.”(http://reversemedia.co.kr/article/189)

감독이 역설한 ‘재미’는 빈말이 아니다.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는바, 5시간 반에 가까운 그 긴 시간이 마치 1시간처럼 순식간에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다면 수긍이 갈까. 그 느낌은 < 드라이브 마이 카 >에도 해당된다. 여느 영화치고는 결코 짧지 않은 3시간이 훌쩍 흘러가는 ‘경이의 영화!’ 2014년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집  《 여자 없는 남자들 》  에 실려 있는 7편 중 하나인 동명 단편을 영화화했다. < 버닝 >이 그랬듯 하루키 원작은 그러나 일종의 맥거핀(MacGuffin), 즉 속임수 내지 미끼에 지나지 않는다.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램 노트도 말하듯, “마음 한구석에 꾹 눌러둔 어둠과 외로움을 간직한 주인공을 그린다는 점에서 하루키 소설의 핵심을 담고 있으면서”도 하마구치 그가 아니라면 도저히 불가능했을, 그만의 내러티브‧연출 스타일로 압도적이면서도 독보적인 영화 세계를 구축해내기 때문이다.

영화는 크게 두 파트로 이뤄진다. 전체 3시간 가운데 몇십 분이 채 안 되는 전반부는 언뜻 남부러울 것 없는 멋진(Cool) 부부 사이의 사건‧사연이다. 인기 배우이자 연출가인 가후쿠와, 역시 인기 있는 TV 드라마 작가 오토다. 여자는 남편과 섹스를 하면서 이야기를 지어내 들려주는 버릇이 있는데, 그 이야기로 대본을 만들어 작가로서 성공을 일궈내 구가하고 있는 것이다. 남자는 어느 날 우연찮게 아내의 외도를, 그것도 자신의 집에서 목격하나 그 자리를 회피한다. 그것도 모자라 끝내 그 이유를 묻지 않고, 그런 상태로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

아내가 죽은 지 2년 후, 가후쿠는 히로시마연극제에 초청돼 안톤 체호프의 희곡 < 바냐 아저씨 >를 올릴 준비를 한다. 그곳에서 그에게는 주최 측의 강권으로 마지못해, 전속 드라이버 미사키와 함께 하게 된다.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 두 번째 파트는 또 다시 두 부분으로 나뉜다. < 바냐 아저씨 >의 공연에 이르는 과정과, 가후쿠-미사키 간에 서서히 서로의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이다. 그 두 과정이 유기적으로 연관돼 있음은 물론이다.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최종 성사 여부조차 불투명한 < 바냐 아저씨 > 공연 연습을 통해 가후쿠는 자기 내면의 심연을 성찰할 기회를 맞는다. 일본어를 비롯해 러시아어, 영어, 중국어, 한국어, 심지어 침묵의 언어인 수화 등 다양한 언어로 소통하며, 한 편의 연극을 완성해가는 연기자들을 통해 삶의 비밀에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간다고 할까. 그 과정에서 묵묵히 운전에만 열중하는 미사키와, 습관적으로 죽은 아내가 녹음한 < 바냐 아저씨 > 녹음 테이프를 들으며 대사 연습을 하는 가후쿠 사이에 소통의 기회가 찾아오고, 마침내 둘 다 공히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관계맺음이 이뤄진다.

< 드라이브 마이 카 >는 2월 말 기준, 전 세계 영화제 및 영화상에서 62개 수상에 100개 부문에 후보지명돼 있다. 그 중 4개는 오는 3월 27일(일) 개최되는 제 94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노미네이션이다.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국제장편영화상(옛 외국어영화상)이다. 미국의 로컬 영화상에서 영어가 아닌 영화로 작품상과 감독상 등에 후보로 지명되다니, < 기생충 >에 이은 일대 파란이라 평하지 않을 길 없다. 올 아카데미의 주요 관전 포인트는 < 드라이브 마이 카 > 와, 11개 부문 12개 후보에 오른 < 파워 오브 도그>가 과연 어떤 상을 가져가냐 일 테며, 세 부문에서는 양파전이 될 공신이 크다. 수상 결과에 상관없이 < 드라이브 마이 카 >는 이미 ‘포스트-기생충’으로 일컬어질 만하다.

이렇듯 하마구치 영화들에서 중시되는 것은, 캐릭터와 캐릭터를 이어주는 어떤 ‘사이’요, 그 사이의 채움을 통해 드러나는 개별 캐릭터들의 어떤 존재감들이다. 캐릭터가 인간 자체로 바뀌어도 무방하리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장, 단편 불문 그의 영화들은 인간에 대한 이해, 즉 삶과 죽음에 대한 이해를 비교의 예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심화‧제고시켜준다. 그에게 영화는 철저히 우리네 인류 사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여느 영화광들처럼 그 반대가 아니라…

그 점에서 하마구치는 천상 휴머니스트다. 어느 모로는 작금의 포스트-휴먼, 트랜스-휴먼 시대, 달리 말해 디지털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아날로그적 고전주의자랄까. 그렇지 않다면, 스승 구로사와 기요시도 그렇거니와 프랑스 누벨바그의 돌연변이적 주자 에릭 로메르나 심심치 않게 그와 비교되곤 하는 홍상수, 그리고 선배 봉준호를 향해 어찌 그렇게 대놓고 크고 작은 오마주를 바칠 수 있겠는가. 난 정말이지 하마구치의 그 겸손한 자신감과, 자신감 어린 겸허함을 사랑한다.

나는 그의 영화를 볼 때마다, 별다른 액션도 없이 주고받는 인물들의 대사가 얼마나 역동적일 수 있는지 감탄하곤 한다. 그 어떤 액션 영화도 그렇게 다이나믹하지 않다. 뿐만 아니다. 그의 영화들은 소위 ‘예술영화’의 범주에 들어가야 마땅하나, 여느 예술영화들과는 달리 난해하긴커녕 접근 불가한 요소들이 거의 없다. 그 지점에서 그는 장 뤽 고다르,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등 서구의 대표적 작가 감독들은 물론이거니와 여로모로 비교될 법한 태국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이란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등과도 판이하게 다른 자기만의 독자적 영화 세계를 구축해내는 데 성공했다. 고작 40대 초반의 이른 나이에…

나는 확신한다. 머잖아 세계 영화사는 하마루치 류스케 이전과 그 이후로 나뉘게 될 거라고. 헛소리라고? 과장이라고? 그렇게 비칠 수 있다. 하지만 나부터 그 작업을 향해 나아갈 참이다. 긴 호흡으로, 멀리 내다보면서 말이다. < 드라이브 마이 카 >와 < 해피 아워 >, 이 두 역사적 걸작은 비단 2021년만이 아니라, 21세기 나아가 올해로 127년을 맞이한 공식 세계 영화역사의 손꼽히는 으뜸 문제작들로 평가돼 마땅하다.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 우연과 상상 >도 마찬가지고…

이어질 3위부터 10위작 리스트는 아래와 같다.(계속)

3위.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리들리 스콧

4위. 퍼스트 카우, 켈리 라이카트

5위. 티탄, 쥘리아 뒤쿠르노

6위. 파워 오브 더 도그, 제인 캠피온

7위. 램, 발디마르 요한손

8위. 듄, 드니 빌뇌브

9위. 모가디슈, 류승완

10위. 자산어보, 이준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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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Splash of the Year 2021

Splash of the Year : 한 해를 조각내 음악 신의 주목해 볼 사건을 뽑는 이즘 내 연례행사.

스플래시가 벌써 9회차를 맞이했다. 1년은 과연 그간의 일들을 톺아내기에 충분한 시간일까? 우리의 스플래시에 어떤 경향성을 띤 시선이 자리하지는 않았을까? 돌아보며 올해는 조금 색다른 스플래시를 준비했다. 오랜 시간, ‘더불어올해 역시음악계에 벌어진 사건을 뽑아 그것의 내면을 한 번 더 찔렀다. 사건의 전시와 생각거리를 동시에 제시하려 했달까. 음악. 어떻게 들었고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함께 얘기 나누고자 한다.

1. 오디션 프로그램

잘 봐, 언니들 싸움이다

라고 했지만 어디에도 패자는 없었다. 올해를 반추할 때 < 스트릿 우먼 파이터 >, 일명 ‘스우파’는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맨 앞에 선다. 2009년 엠넷의 < 슈퍼스타K > 이후 오랜 시간 대중의 곁을 ‘스친’ 오디션 프로그램의 적나라한 수법에 지쳐버린 지금. 기 센 언니들의 “자존심을 건 생존경쟁”은 전례 없이 화끈했다. 거침없는 직언, 거리낌 없는 춤사위, 여기에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숨겨졌던) 서사까지. 열광, 열풍을 만들 요소가 넘쳤다.

여성이 전면에서 주도권을 쥐었다는 점 역시 중요하지만 스우파가 견인한 ‘댄스’ 열풍은 대단했다. 각종 숏폼 플랫폼에는 2차 계급 미션 때 췄던 ‘Hey mama’를 패러디한 영상들이 넘쳤다. 또한 서브컬쳐로 큰 관심을 받지 못한 왁킹과 보깅.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진 비보잉(브레이킹) 혹은 (걸스) 힙합 등이 수면 위로 떠 오른다. 모두 여성들의 손길을 거쳤다. 특히 레이디 가가의 ‘Born this way’, 질 스콧의 ‘Womanifesto’를 차용해 섹스(Sex) 아닌 젠더(Gender)를, 성 너머 개인의 가치를 다룬 것은 단연 올해의 베스트 모먼트.

쇼미더머니가 세상을 망치는 중이야

라고 < 쇼미더머니10 >에 출연한 악뮤(AKMU) 찬혁은 노래했다. 몇 마디 앞서 뱉은 “이건 하나의 유행 혹은 TV 쇼”라는 가사 역시 그저 실소에 그칠 비유가 아니다. 2012년 출발한 ‘쇼미’는 이후 < 고등래퍼 >, < 언프리티 랩스타 > 등으로 가지 쳐졌다. 오늘날 은 그리고 힙합은 그야말로 2010년대를 강타한 선 굵은 유행이며 십 대와 이십 대의 감수성을 품고, 푸는 핵심 장르. 날 서고 거친 정서를 대변하고 때론 아픈 상처에 연고를 발라버리며 스웨그(SWAG)까지 챙긴다. 어느덧 10년을 맞이한 ‘쇼미’의 인기로 미뤄볼 때 ‘쇼미더머니가 세상을 (어떤 지점에서) 뭉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2. 트로트와 케이팝

힙합 댄스 락 발라드도 좋지만 슬플 땐 what?”

2019년 TV조선에서 방영한 < 내일은 미스트롯 >에 이어 2020년 < 내일은 미스터트롯 >의 대흥행은 2000년대 초 장윤정, 박현빈 이후 모처럼 트로트의 재림을 이끌었다. 이찬원, 영탁, 정동원 그리고 임영웅 등 ‘트로트계의 아이돌’들이 중장년층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올해 9월 대장정의 막을 내린 < 사랑의 콜센타 >가 이들의 인기를 대변했고 코로나19로 상황이 여유롭지 않았음에도 < 미스터트롯 >발 콘서트가 전국을 누볐다. 12월의 끝 ‘테스형’ 나훈아, 심수봉에 이어 임영웅이 공중파에서 단독 콘서트를 선보인다는 점 역시 트로트의 열기를 가늠케 한다.

“I’m on the next level”

K팝, K팝, K팝! 힘차게 외연을 확장 중인 오늘날의 K팝은 비단 벽에 걸린 그림이 아니다. 오히려 또 다른 가능성을 잇는 창문. 올해에도 방탄소년단은 한국 너머 전 세계를 순항했다. 수많은 효자곡이 있었지만 가장 큰 성과를 안긴 건 ‘Butter’. 자그마치 빌보드 싱글차트 10주간 1위를 거머쥐며 역사를 썼다. 뒤이어 ‘Permission to dance’, 콜드플레이와 함께한 ‘My universe’가 정상에 올랐고 미국 3대 음악 시상식인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AMA)의 ‘올해의 아티스트’ 부문 수상 역시 BTS의 것이었다.

선배 그룹의 성장에 힘입어 4세대 아이돌로 칭해지는 ‘뉴’ 세대의 성장도 돋보였다. 그중 ‘가상의 아바타와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다’는 독보적인 콘셉트로 활동한 에스파가 일찌감치 자리를 잡았다. ‘세상을 혼란에 빠뜨린 블랙맘바(Blackmamba)를 찾으러 광야로 떠난다’는 설정의 싱글 ‘Next level’이 다소 난해한 설정과 별개로 세상을 달궜다. ‘디귿댄스’에 자유로울 사람은 없었다. 뒤이어 발매한 첫 번째 EP < Savage >의 성공은 에스파식 21세기형 혼종성의 확실한 한방.

특히 Savage 즉, 맹렬한 혹은 ‘쎈’의 뜻을 가진 단어는 에스파와 같은 4세대 걸그룹의 핵심이다. 블랙핑크의 ‘Pretty Savage’, 있지(ITZY)의 ‘달라달라’, 이외에도 (여자) 아이들, 전소미 등 여성 아이돌의 방향성은 확연히 과거와 다르다. 그것이 시대상을 반영한 속셈 있는 처세술일 지어도 이 변화는 분명 어렴풋하게나마 ‘넥스트 레벨’로의 도약을 그린다.

3. 역주행

상상에 상상에 상상을 더해서 / 그대여 내게 말해줘 사랑한다고

올해도 꿋꿋이 역주행이 찾아왔다. 4년 만에 빛을 본 브레이브걸스 ‘Rollin’’ 앞에 불순물은 감히 엉겨 붙지 못한다. 군통령. 오랜 무명 기간 동안 쉬지 않고 찾아간 군대 위문공연이 브레이브걸스에게 드디어 형형 빛깔 색을 입혔다. 특별한 홍보는 없었지만 한 유튜버가 올린 ‘롤린 댓글 모음 영상’이 역주행의 불을 지폈다. 기다리고 있었단 듯 롤린롤린롤린, ‘Rollin’’이, ‘운전만 해’가 역주행했고 이후 발매한 ‘치맛바람’이 정주행에 성공, ‘브걸’은 대세 가수가 됐다.

유튜브란 뉴미디어가 만든 역주행도 있었지만 작년과 같이 올드미디어의 대표 격인 TV 방송이 만든 역주행도 있었다. < 놀면 뭐하니? >가 놀지 않고 성실히 만든 ‘부캐’ MSG 워너비 TOP8이 부른 바로 그 노래. 라붐의 ‘상상더하기’가 차트를 뒤집었다. 2016년에서 2021년으로. 발매 5년 만에 음원 순위 상위권 진입이란 상상은 현실이 됐다.

4. 코로나

그리고 코로나. 벌써 횟수로 3년째 전 세계를 굳게 만든 코로나가 올해도 어김없이 음악 신을 옭아맸다. 실시간 스트리밍 서비스를 활용한 ‘온택트(Ontact) 콘서트’가 성행했다. 대면 콘서트에서는 함성 대신 박수로, 혹은 소리 나는 인형 등을 통해 마스크에 갇힌 흥겨움을 토하는 진풍경도 있었다. 11월경 규제가 완화되며 공연계가 활기를 되찾는가 했지만 변이 바이러스의 등장으로 무대의 열기는 짧게 오르고 빠르게 식었다.

활동이 제한되며 시선은 메타버스, NFT(대체 부가능한 토큰)으로 이동했다. 현실보단 가상이, 온라인상의 저작권이 화두가 됐다. 블랙핑크, 트와이스, 방탄소년단이 메타버스 플랫폼 ‘제페토’를 통해 팬들과 소통했다. NFT 또한 음악 산업의 자본가들을 움직였다. JYP, 빅히트, YG 등의 거대 기획사가 NFT로 눈을 돌렸고 며칠 전 브레이브걸스의 NFT 상품 400개가 1분이 채 안 돼 완판된다.

그리하여 결론. 숏폼 플랫폼, 유튜브, 뉴미디어, 메타버스, NFT. 음악은 이제 단순히 귀로 듣는 차원을 넘어 숏폼 플랫폼을 통해 자신을 뽐내고, 유튜브, 뉴미디어 등으로 재밌게 즐길 거리로 만들어진다. 이 과정에서 메타버스, NFT 등의 거대 자본, 새로운 기술은 이 음악들의 산업적 가치를 튼튼하게 지탱, 우리 음악의 세계화에 발판이 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듣는 음악에 우리의 취향은 얼마나 반영될 수 있는가. 결국은 모두 누군가의 손길을 거쳐 ‘들리는 대로 듣게 된 음악’. 혹은 ‘들렸기에 즐기게 된 음악’인 것은 아닐까? 이 사이 힘을 잃는 건 어쩌면 자신의 음악을 독립적으로 쓰고 있는 많은 인디 뮤지션이 될 것이다.

비슷하게 십 대, 이십 대가 열렬히 힙합을 따라부를 때 최신 취향과 멀어진 중장년층이 트로트에 몰두하는 세대 간의 격차, 음악 청취 층의 이분화 속 ‘음악의 다양함’, ‘음악이 주는 여러 가지 감정들’, ‘음악이 묘사하는 여러 상황’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대 알고리즘의 시대. 음악으로 표현되고, 표출될 수 있는 문화가 더 자주 그리고 더 쉽게 세상에 흐를 수 있기를 바란다. 내년 스플래시에는 보다 새로운 이야기와 사건들을 더 뾰족하게 담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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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2021 올해의 팝 앨범

팝의 태동이 심상치 않다. 진부함과 고립에 질린 저마다의 아티스트가 파격적인 변신을 거듭하고, 곳곳에서 새로운 문화의 흐름이 연달아 터져 나오는 추세다. 바다 건너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솔깃한 소식에 귀가 쉴 새 없는 한 해다. IZM이 2021년을 일목요연하게 간추릴 팝 앨범 10장을 소개한다. 글의 순서는 순위와 무관하다.

재패니즈 브렉퍼스트(Japanese Breakfast) < Jubilee >

뜻밖의 변화였다. < Psychopomp >의 곤두선 감정이나, < Soft Sounds From Another Planet >식 심연의 소음이 이어질 줄 알았다. 그러나 예측을 깼다. 그루브 넘치는 ‘Be sweet’이 선공개되는 순간 앨범의 비범함을 감지했다. 어머니와의 사별에서 파생된 비극적인 감수성을 깊게 가라앉은 소리로 토해내던 그가 보다 다채롭고 밝은 색감의 노래들로 펼친 변신은 예상 밖이지만 아름다웠다. 비로소 재패니즈 브렉퍼스트 팔레트의 확장이었다.

사랑과 상실 등 복잡다단한 감정 전개에도 음악에 귀가 번뜩 뜨인다는 점이 변화의 성공을 천명한다. 치열한 내면의 심상을 가다듬으면서도 난해하지 않은 건 한 곡 한 곡 자체의 매력에 충분히 집중한 덕이다. 드라마틱한 멜로디의 정교한 버무림에 홀린 듯 스며들고 주류 음악 신에서 쉽게 접하기 힘든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보컬의 매력은 듣는 이로 하여금 쉽사리 앨범을 떠나지 못하게 한다. 아물지 않은 트라우마 그 너머 음악으로 되찾은 용기와 자긍심이다. (이홍현)

빌리 아일리시(Billie Eilish) < Happier Than Ever >

2019년 청소년기의 불안정한 심리를 대변한 소녀는 ‘Bad guy’로 유튜브를 비롯한 소셜 미디어를 점령했고, 곡이 실린 < When We All Fall Asleep, Where Do We Go? >로 62회 그래미 어워드 본상을 휩쓸었다. 가수에게 음악으로 주목받는 것만큼 행복한 일도 없지만 도를 넘어선 관심은 노래가 아닌 외양을 향했다. 어린 시절 정신 질환의 주범이었던 ‘침대 밑의 괴물’이 허상에 불과했다면 실재하는 ‘익명의 누군가’는 유명인이 떠안아야 하는 새로운 트라우마를 선사한다. 그러나 Z세대 팝스타는 물러서지 않는다.

명예에 뒤따른 희생을 들여다보는 단위는 싱글이 아닌 앨범으로 규정한다. ‘Bad guy’나 ‘Bury a friend’ 같은 히트곡으로 그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낯설 수 있다. 그럼에도 포근한 재즈를 공유하고, 익히 들은 고딕 하모니를 재소환하고, 록 사운드로 희망 섞인 비명을 토해낼 때 예술가의 암울한 현실을 온전히 전한다. 내면 깊은 곳부터 끌어올린 울부짖음에 디지털 시대의 명암이 깜빡이는 순간, 빌리 아일리시는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 (정다열)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Tyler, the Creator) < Call Me If You Get Lost >

개인적 비극과 사회 문제, 물질적 욕구, 사랑 등 공통점 없는 소재가 공존하기에 어쩌면 일관되지 못한 가치관이 혼란스럽다. 그렇기에 < Call Me If You Get Lost >는 한 창작자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전기(傳記)다. 그를 규정짓는 보편적인 것들로부터 싸워온 타일러의 행보가 널브러진 작품의 문법은 ‘랩’. 래퍼로서의 특정을 거부했던 전작 < Igor >란 족쇄에 묶인 예술가가 2000년대 중반 믹스테입 시대의 형식을 빌려와 또 다른 해방을 갈망한다. 어느 때보다 창작 욕구를 불태웠던 당시의 순수로 회귀하며.

두서없이 펼쳐지는 서사는 프랑스 시인 샤를 보를레르에서 따온 페르소나 ‘타일러 보를레르 경’의 단단한 래핑으로 예술성을 획득한다. 고전적인 힙합 작법을 중심으로 재즈부터 하드코어, 알앤비, 보사노바 등 그동안의 타일러를 응축한 트랙들이 개연성을 무시한 채 각자의 존재를 드러낼 법하지만, 이를 억제하고 유기적으로 이어가는 정제 능력도 단연코 뛰어나다. 미로처럼 얽힌 구성에 지향하는 목표를 쉽게 알 수 없지만 애초에 정해진 출구는 없다. 행하는 방식이 곧 길이 되오니. 이에 타일러 자신을 집대성한 앨범은 오히려 그를 하나의 영역으로 정의할 수 없다는 아이러니를 남기며 대중과 평단에 자유를 선언한다. (손기호)

저스틴 비버(Justin Bieber) < Justice >

올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울려 퍼진 팝송 중 하나는 누가 뭐래도 ‘Peaches’일 것이다.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간결한 비트와 독자적인 감성으로 이상적인 대중성을 발현하는 가창. 처음엔 별 반응 없던 이들이 어느덧 이 노래를 흥얼거릴 정도로,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중독성은 국경을 넘어 전 세계 대중들을 사로잡았다. 그렇게 그는 지난 앨범 < Changes >(2020)의 부진한 성적을 단번에 만회하며 팝스타의 지위를 탈환했다.

그렇다고 앨범에 이 곡만 있는 것은 아니다. ’Peaches’ 외에도 들을 거리가 산적하다. 리드미컬한 가스펠을 의도한 ‘Holy’, 1980년대의 신스팝 스타일을 활용한 ‘Die for you’, 마치 파워 발라드를 듣는 듯한 의외성이 돋보이는 ‘Anyone’ 등 어색하지 않은 한도 내에서 음악적인 변주 또한 충실히 이행했다. 무엇보다, 신앙심에 기반한 자기반성과 각오가 노래에 진정성을 배가시키고 있다는 점이 크다. 감상이 거듭될수록 가랑비에 옷 젖듯 그의 서사에 동화되어 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만큼 음악과 자아의 일체감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겨우내 찾은 내면의 평화가 많은 음악 팬들의 행복으로 이어지는 그 경이로운 광경. 이 작품을 통해 생생히 체험할 수 있을 터. (황선업)

도자 캣(Doja Cat) < Planet Her >

세련되고 화려하지만 복작거리지는 않는 쇼핑몰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도자 캣의 세 번째 정규 앨범 < Planet Her >는 팝, 알앤비, 힙합을 큰 줄기로 하면서 아프로비트, 레게톤, 멈블 랩, 트랩 등 여러 스타일로 가지를 뻗는다. 꽤 다채롭게 구성했음에도 곡들의 사운드가 매끈해서 조금도 어수선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군살 없는 프로듀싱이 앨범을 한층 말쑥하게 만들어 줬다.

도자 캣의 보컬 또한 음반의 세공을 거든 주역이다. 묵직하지 않은 음성 덕분에 앨범은 내내 살랑거리는 모양을 띤다. 느린 템포, 잠잠한 곡에서는 미성이 부드러움과 어둑한 분위기를 증대한다. 이와 더불어 곳곳에서 박력과 탄력 있는 래핑을 펼침으로써 생기, 리드미컬함도 충분히 확보하고 있다. 도자 캣의 능란한 보컬과 유행의 선두에 위치한 곡들이 만나 바로 체감 가능한 상승효과를 몰고 왔다. (한동윤)

리틀 심즈(Little Simz) < Sometimes I Might Be Introvert >

메간 더 스탈리온, 도자 캣, 카디 비 같이 현재 차트의 소유권을 차지한 대다수의 주류 여성 래퍼만큼이나, 동시에 매년 언더그라운드에서 묵직한 실력으로 두각을 드러내는 여성 랩 스타가 등장하고 있다. 서정성을 무기 삼으며 상징적인 키워드를 하나씩 점유한 이 아티스트들이 그렇다. ‘익명’ 아래 행해지는 무소불위의 폭력을 노래한 노네임, ‘헌정’을 기반으로 갈등과 차별 앞에 목소리를 내세운 랩소디, 그리고 치장된 껍질에 가려진 진실 어린 ‘내향성’에 초점을 둔 올해의 주인공 리틀 심즈다.

장대한 오프닝 트랙 ‘Introvert’부터 ‘Miss understood’의 개운한 해방까지 이어지는 한 시간의 러닝타임 전부가 하이라이트다. 유연한 움직임 속 꽉 찬 펀치를 뻗는 ‘Woman’, 뮤지컬적인 연출로 몰입감을 획득하는 ‘I love you, I hate you’와 ‘Standing ovation’, < Grey Area >의 날카로움을 계승한 ‘Speed’ 등 수많은 킬링트랙이 고점을 거듭 갱신한다. 웅장한 현악 세션과 정교한 샘플링을 배가한 프로덕션은 감정의 광활한 폭을 따스하게 포용하고, 날렵하고 탄탄한 래핑이 그 이음새를 이어붙인다. 정통성을 극한으로 다듬어 대중과 평단을 모두 포획한 올라운더 < Sometimes I Might Be Introvert >가 쟁취한 것은, 한 아티스트의 입지적 작품이라는 영예만이 아닌 2020년대 명반의 새로운 바이블로 장식되었다는 선포다. (장준환)

알로 파크스(Arlo Parks) < Collapsed In Sunbeams >

데뷔 싱글 ‘Cola’로 영국의 신인 등용문 BBC 사운드 오브 시리즈에 이름을 올린 2000년생 시인 겸 싱어송라이터 알로 파크스는 매체에 구애받지 않는 뛰어난 창작가다. 은유적, 압축적인 시와 달리 음악에서 그의 섬세한 시선은 명징한 언어로 치환된다. 특히 우정, 양성애, 인간관계에 대한 혼란 등 노랫말에 녹아든 일상적인 감정의 편린은 듣는 이의 마음에 가닿으며 빛을 발한다.

카메라 필름의 한 종류인 마지막 트랙의 이름 ‘Portra 400’이 시사하듯 앨범에는 보편적인 노스탤지어도 녹아있다. 소울과 재즈를 적절히 버무린 ‘Hurt’, 트립합 스타일의 비트를 사용한 ‘For violet’ 등 다채로운 재료는 신인 뮤지션의 개성을 집약적으로 표현한다. 알로 파크스의 목소리는 햇살이 쏟아지는 하늘처럼 맑지만 예리한 시선과 고찰은 천진하지 않다. 거리두기로 사람들과 체온을 나누기 어려운 시대에 걸맞은 따뜻하고도 첨예한 앨범이다. (정수민)

블랙 컨트리 뉴 로드(Black Country, New Road) < For The First Time >

2018년 런던에서 결성되어 발매한 그들의 데뷔 작은 현 포스트 록 신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자유로운 타 장르간 이합집산은 록 밴드 기본 구성에 바이올리니스트와 색소폰 편성을 더해 더욱 유기적으로 다가온다. 이들의 전위적인 스타일은 프리 재즈(Free Jazz)에서 감지되는 확장성과 매쓰 록(Math Rock)의 복잡다단한 리듬에서 온다. 이 독창적인 조합의 결과물은 록 신 ‘올해의 발견’이다. (신현태)

레미 울프(Remi Wolf) < Juno >

트렌드를 반영한 뮤지션을 ‘발견’하는 것은 즐겁다. 레미 울프. 아직 이름이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한 유명 광고에 그의 노래가 쓰였고 음악 디깅을 좀 한다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반향이 생기고 있다. 특징은 자신을 잘 꾸밀 줄 안다는 것. 다양한 컬러를 조합해 옷을 입고 그 형형색색의 빛깔이 그대로 뮤직비디오를 수놓는다.

음악 역시 외적 차림과 닮았다. 짧은 러닝타임의 수록곡들이 전자음을 중심으로 펑키하고 발랄하게 울려 퍼진다. 그의 음악 안에 팬데믹의 흔적은 없으며 되레 우리의 머리를 끄덕이며 뛰게 할 것들이 가득하다. 올리비아 로드리고, 더 키드 라로이, 릴 나스 엑스 등 19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 출생의 뮤지션들이 음악계를 뒤흔드는 와중 1996년생의 레미 울프가 당차게 출사표를 냈다. 쫀쫀하고 촘촘하게 엮인 유기적인 음반 속 요새 음악의 매력 포인트들이 빽빽하다. (박수진)

애벌랜치스(The Avalanches) < We Will Always Love You >

대중음악사에서 음악 만들기의 문법은 시시각각 변화했다. 한 땀 한 땀 자기 손으로 짓는 정공법부터 기존의 음악을 이어붙인 사운드 콜라주까지. 과거의 시선으로 어쩌면 사파 취급받았을 호주 밴드 애벌랜치스는 외려 과거 소스의 사용을 극한으로 밀어붙인 후 고유한 음악성을 더한다. 재활용의 미학. 그렇게 플런더포닉스의 권위자가 된 이들은 전작들에 이어 또 한 번 사이키델릭하고도 우주적인 소리샘을 구현한다.

그들의 금광은 마르지 않는다. 복고풍 전자음악 ‘Born to lose’는 미니멀리즘의 거장 스티브 라이히의 ‘Electric counterpoint: I. fast’ 속 반복성을 낚아챈다. 반면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의 ‘Eye in the sky’가 진두지휘하는 ‘Interstellar love’나 버트 바카락의 멜로디를 품은 ‘The divine chord’는 대중과의 접점이다. 샘플링 음원의 지지직 바늘 튀는 소리는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접속 신호. 음원 속 예술가들의 숨결과 애벌랜치스의 프로덕션, 초호화 피처링 진의 지원사격은 시공간을 무색게 하는 합종연횡이다. (염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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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2021 올해의 가요 앨범

2020년대의 추세가 희망차다. 코로나 급풍이 한차례 휩쓸고 간 황량한 대지 위에도 여전히 수많은 아티스트가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다. 그 속에서 태어난 앨범들은 장르와 작법, 하물며 가사의 필압조차 세세히 다르지만, 모두 기세에 꺾이지 않고 본인의 역량을 가감 없이 담아낸 단단한 작품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IZM 선정 2021년을 대표할 가요 앨범 10장을 소개한다. 글의 순서는 순위와 무관하다.

엔하이픈(ENHYPEN) < Border : Carnival >

아이랜드라는 공간이 갖는 의미는 하이브의 곡 스타일 분배와 CJ 이엔엠의 시각적 역동성이라는 우월적 합이다. 그걸 지반으로 몇 개월도 안 된 신인은 단숨에 ‘기득권’자로 폭발성장을 기했다. 팬덤 ‘엔진’의 가속 페달을 밟아 숨 가쁘게 올해의 신인, 음원 밀리언 셀링, 미 NBC 켈리 클락슨 쇼 출연 등을 이어가며 글로벌 팬들의 번식을 꾀한 결과. 이 두 번째 ‘미니’앨범이 초고속 하사된 4세대 아이돌 타이틀을 굳혀준 ‘맥시’펀치다.

음악의 승리라고 해야 한다. 인트로와 아웃트로에 떠들썩한 예술적 소란을 장벽으로 쌓고 중간에 ‘Drunk-dazed’, ‘별안간 (Mixed up)’ 등 대중그룹다운 들을만한 싱글 넷을 가지런히 배치해 제대로 곡 승부를 걸고 있다. 이를 위해 동원한 도구는 폭넓은 장르분산, 바로 다양성이다. 시대적 명령인 아이돌스런 음악패턴을 따르되 시도, 도전, 변화로 에워싸는 음악선동이 가상하다. 아이돌 수다, 그 상투적 어법 타파가 남았다. (임진모)

지올 팍(Zior Park) < Syndromize >

빛 하나 들지 않는 어두운 방, 끊임없이 필름을 구동하는 영사기의 소음이 들렸다. 벽에 맺힌 원형의 무대 위로 그림자는 계속해서 모습을 바꾸며 서로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어딜 둘러봐도 환영뿐인 작은 공간에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의미하게 섞였고 그렇게 탄생한 잔혹하고도 아름다운 장소를 < Syndromez >라고 명명했다. 창조주는 지올 팍. 경쾌하게 삶을 난도질하는 한 예술가의 보금자리였다.

각각의 주제에 맞게 꾸려진 놀이기구가 관람객을 맞이한다. 랩을 버렸다는 농담 섞인 인터뷰처럼 특정 장르에 매몰되지 않고 여러 갈래로 뻗어가는 상상력이 중성적 목소리, 음악, 영상 등 한계를 규정하지 않고 ‘지올 팍’이란 아티스트를 양분 삼아 유일한 형태로 조형된다. 그가 화려하게 꾸며낸 세상은 포장지를 뜯어낼수록 깊은 상처를 드러내지만 선홍빛을 띠는 속살마저 찬란하다. 완벽하게 제작된 극의 폐막이 어느 때보다 쓸쓸하기에, 이 포근한 악몽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않기를. (손기호)

마인드 컴바인드(Mind Combined) < Circle >

힙합, 일렉트로니카처럼 비트 중심의 음악이 득세함에 따라 비트메이커들의 가치는 공고해졌다. 다양한 뮤지션의 리듬을 책임지며 베테랑 프로듀서가 된 피제이는 마인드 컴바인드라는 플랫폼에 올라 조금 더 자유롭게 역량을 펼쳤다. 단짝 진보는 피제이의 비트 위를 유영하며 농익은 기량을 선보였다. 11년 전 발표한 첫 번째 앨범 < The Combination >과 마찬가지로 과정의 즐거움이 양질의 결과물로 이어졌다.

그들의 소리엔 과거와 현재, FX와 리얼 밴드가 교묘하게 교차하며, 장기인 소울과 펑크(Funk)부터 록과 하우스 등 다채로운 스타일이 어우러진다. 변화가 잦은 곡조를 버텨내는 건 정교한 리듬 트랙이지만 섬세한 기타가 돋보이는 ‘Can you understand’와 라틴음악의 즉흥성을 포착한 ‘Purple sky’처럼 힙합 비트 이외의 미덕이 가득하다. 소리와 메시지에 지향점을 고스란히 반영한 ‘Singularity’(특이성)와 ‘Multiverse’(다중우주론)로 마인드 컴바인드의 인장을 단단히 새긴다. (염동교)

이랑 < 늑대가 나타났다 >

한 해를 회고할 때 가장 뾰족하게 튀어나온다. 물길을 거슬러 오르듯 요새 흐름에 영합하지 않았고 투명하게 ‘나’의 이야기를 썼다. 중요한 건 그의 시선이 비단 나에게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를 투영하고, 나를 지나 사회로 가닿는 ‘늑대가 나타났다’, ‘환란의 세대’와 같은 곡은 이 음반이 얼마나 현재를, 현대를, 지금을 찌르고 있는가를 증명한다.

동시에 과감한 터치가 돋보인다. ‘아는 언니들’이란 합창단과 손을 잡고 기이하고 기괴하게 덧붙인 ‘환란의 세대(Choir ver.)’의 코러스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는 그 누군가의 감정을 대신 토해낸다. ‘대신’. ‘빵을 먹었어’에선 앞장서서 목청을 높이고 ‘의식적으로 잠을 자야겠다’에선 죽음과 삶을 툭툭 말한다. 거침없는 연대와 거리낌 없는 고백으로 올해를 끌어안았다. (박수진)

양진석 < Barn Orchestra >

양진석은 가창력으로 승부하는 가수가 아니지만 작곡 능력과 편곡 실력은 그 미진한 보컬을 채우고도 남는다. 10년 만에 발표한 여섯 번째 에피소드 < Barn Orchestra >가 이 주관적인 가설을 객관적으로 증명한다. 각 곡에 맞는 보컬리스트의 초빙과 세미클래식부터 팝, 재즈까지 스며든 도회적인 컨템포러리 음악은 멜로디와 리듬, 화음을 하나하나, 차곡차곡 쌓아올린 아름다운 건물처럼 빛난다. 막대한 시간 투자, 소리에 대한 고집, 음악에 대한 그의 자신감은 이 앨범이 정갈하고 세련되게 태어날 수 있는 탄탄한 지반공사였다.

현대사회의 외로움을 여러 형식으로 변조한 수록곡들은 살아있는 생명체이면서 건물 구조물에 사용된 유기적인 원자재다. 양진석은 케이팝과 네오 트로트 열풍에 가려져 한동안 잊고 있었던, 젊은 세대도 편하게 감상할 수 있는 21세기 한국형 어덜트 컨템포러리 음악을 완공해냈다. (소승근)

최엘비 < 독립음악 >

힙합 오디션 < 쇼미더머니 5 >에서 비와이와 씨잼이 1,2등 자리에 나란히 설 때, 친구인 최엘비는 예선 탈락 후 TV로 결승 무대를 시청했다. 찬란히 빛나는 두 주연에 비해 음지가 익숙했던 조연은 슬퍼하지 않으려 애써 눈물을 감췄다. 그 반짝임에라도 묻어가야 크레디트 어딘가에 이름이 남는 걸 알았기 때문. 하지만 어느덧 20대의 마지막에 다다른 청년은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더 이상 숨어 살 수 없다. 늘 배경으로 찍히기만 했던 엑스트라는 직접 조명과 카메라를 들여와 시점을 180도 전환시킨다. 주연과 조연의 역전으로 그간 묵혀두었던 응어리를 낱낱이 고백한다.

장면 하나하나가 가슴 깊은 곳을 아리게 찌른다. 스스로를 딸려오는 사은품이나 브랜드 이름을 뗀 무지 티에 비유할 정도로 완전히 내려놨다. 비교와 동정으로 물든 열등감의 서사는 부와 명예를 좇는 작금의 힙합 신과 다름을 인정하고 같아지기를 포기한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존중하는 < 독립음악 >의 주인공은 험난한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최엘비이며 그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이기도 하다. 세대와의 교감을 넘어 시대와 공명하는 앨범, 그야말로 올해 최고의 ‘대중음악’이다. (정다열)

파란노을(Parannoul) <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 >

신원미상의 음악가 파란노을이 일으킨 파급력은 거셌다. 잠룡의 일렁임을 일찍이 포착한 곳은 국내가 아닌 해외다. 순간이었지만 <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 >은 영미권 슈게이즈 팬들의 큰 지지를 얻어 미국의 음악 커뮤니티 레이트 유어 뮤직에서 올해 발매한 앨범 중 평점 1위를 기록했다. 소규모 음악가들을 대상으로 한 디지털 플랫폼 밴드캠프에서부터 저명한 음악 비평 사이트 피치포크와 스테레오검의 각광을 받기까지 이 드라마틱한 실화는 언어의 장벽을 가뿐히 뛰어넘었다.

스스로를 낮추며 자신의 치부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파란노을의 패배주의 텍스처는 생생하다. 거친 노이즈와 투박한 가상 악기로 연출한 음압은 포스트 록과 이모코어(Emocore)를 난폭하게 품어내고, 열등감으로 뭉그러뜨린 보컬은 타오르는 화자의 내적 분노를 겨우 삼킨다. 우울감과 외로움으로 범벅된 어두운 터널에서도 끝끝내 탈출구를 발견하고자 한 원시적 울부짖음이 격변의 시대를 관통한다. 2021년, ‘흰 천장’만을 바라보던 골방 외톨이가 주도한 ‘청춘 반란’의 실황. 이제는 더 이상 막연한 동경이 아닌 빛나는 ‘꿈의 다음 부분’으로 넘어간 듯하다. (김성욱)

유라(youra) < Gaussian >

유라는 자신이 음악을 하며 지켜온 ‘개똥철학’을 잘라낸 것이 < Gaussian >이라고 했다. 스스로 깎아내리는 듯한 단어로 설명했지만, 그의 세계는 조금씩 덜어내지 못하고 한 번에 잘라내야 할 만큼 견고하다. 데뷔부터 지속해온 내면 탐구는 단단한 결정체로 거듭났고 싱어송라이터는 그것을 자신으로부터 떼어내며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마련했다.

부드럽고 흐리게 표현하는 효과를 뜻하는 앨범의 이름처럼 가사는 은유적이나 선율은 또렷하고 그가 전하는 감각은 선명하다. 간결하게 배치된 악기들은 범람하지 않고 제 위치에서 역할을 다하며 그 중심의 유라는 전자음을 가미한 듯한 독특한 목소리로 곡을 이끈다. 최소한의 의미만 전달하는 개인적인 음반에서도 헤이즈와 함께한 마지막 넘버 ‘하양’은 대중성을 드러내며 뮤지션의 넓은 가능성을 제시한다. 작년에 이어 올해를 뒤덮은 연대와 위로의 물결 속에서 내면 깊숙이 파고드는 침잠의 미학이 돋보였던 앨범이다. (정수민)

아이유(IU) < Lilac >

‘젊은 날의 기억’이란 꽃말처럼 < Lilac >은 아이유의 20대 마지막 순간을 장식한다. 10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그를 거쳐 간 모든 것들이 일련의 꽃잎처럼 곡 사이사이로 책갈피처럼 수놓아진다. 그만큼 앨범에는 유독 다양한 맛과 멋이 자유롭게 존재한다. 마치 대중음악가의 소명을 잠시 접어두고 30대를 앞둔 한 명의 인간으로서, 개인적인 염원과 열망을 한데 모아 전부 성취하는 것으로 다음 10년을 위한 에너지를 충전하려는 듯이 말이다.

명확한 선율로 대중성을 고려한 히트 메뉴 ‘라일락’ 사이로, 독특한 영감을 버무린 ‘Coin’이 도발 한 스푼을 첨가한다. 이에 재치 있는 비유를 가미한 ‘Flu’와 ‘어푸’가 각각 가벼운 에피타이저와 디저트를, 차분한 발라드 트랙 ‘봄 안녕 봄’과 ‘빈 컵’이 담백한 뒷맛을 담당한다. 아이유의 과거와 미래를 망라한 앨범이다. 오랜 전성기를 구가해온 아티스트가 여전히 과감함과 노련함을 보일 수 있다는 점이 놀라울 뿐. ‘Blueming’이 예고한 푸른 개화는 보랏빛 라일락으로 이제 막 피어난 듯하다. (장준환)

언오피셜보이 & 하이프하이프(unofficialboyy & HAIFHAIF) < 그물,덫,발사대기,포획 >

언오피셜보이는 각성한다. < 쇼미더머니 10 >에서 스스로 밝혔듯 ‘예능캐’로 가벼이 소비되던 과거와 선을 긋고, 진중한 태도로 음악가로서의 인정을 원한다. 그간 익살맞은 리액션이나 화끈한 패션, 특유의 거들먹거리는 스웨그로 더 주목받은 그였기에 솔직히 앨범의 빼어남은 의외였다. 프로듀서 하이프하이프(HAIFHAIF)의 철저한 지원이 빛을 발했고, 그의 역량을 최대치로 끌어올렸으며, 그 결과 많은 장르 애호가를 자신의 편으로 포획했다.

진가는 다양성과 치밀함에서 비롯한다. 2000년대 힙합의 계승 의지로 낳은 ‘돈내’와 ‘누가왔게’, 화끈한 댄스플로어의 ‘Unofficialboyy pt.2′, 최신 팝 문법의 ‘Mmm’ 등을 한데 엮어내는데 그 흐름은 유려하다. 신예답게 신선하고 동시에 높은 장르적 유연성을 보여준 셈이다. 풋내기 티가 나지 않는 탄탄한 플로우와 중독성 강한 훅(Hook)은 흡인력을 극대화했으며, 재치 있는 입담과 인간관계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는 가슴 시큰한 메시지는 작가적 성취를 담당했다. ‘근거 있는 자신감’이란 무엇인지 보여준 앨범이다. (이홍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