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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16 윤항기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관련한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그들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열여섯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한국 록 밴드의 레전드 ‘키보이스’ 출신의 톱가수 윤항기다.

‘한국의 비틀스’라는 수식이 말해주듯 국내 초창기 최고의 인기를 자랑한 밴드 ‘키보이스’는 1960년대 부평의 미군수지원사령부 애스컴(ASCOM) 등 미군 부대의 클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국내 무대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키보이스하면 떠오르는 이름 윤항기. 그는 이후에도 자신의 이름을 딴 ‘윤항기와 키브라더스’ 활동, 솔로 히트 넘버인 ‘별이 빛나는 밤에’‘나는 어떡하라고’‘장밋빛 스카프’ 등으로 한국 대중음악계에 굵직한 획을 남겼다.  

동생 윤복희가 불러 국민 위로곡이 된 ‘여러분’의 작곡자도 바로 윤항기다. 선친의 재능을 물려받아 그는 작사, 작곡, 노래, 연기 뿐 < 춤추는 함대 > 등의 뮤지컬 기획자로도 두각을 나타내 ‘만능 엔터테이너’로서의 위상도 구축했다. 한국 록의 씨앗을 뿌린 공로를 인정받아 최근에는 정부가 주는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윤항기는 애스컴을 가리켜 팝음악에 꿈을 갖고 있던 젊은이들이 모여 다양한 우리 대중음악을 일궈낸 ‘K팝의 중심지’라고 정의했다. 여기 미군 클럽무대를 선회하며 뿌린 당대 뮤지션들의 열정을 현 대중음악의 씨앗으로 일컫고 있는 것이다. 패기 넘치던 당대의 가수 생활과 목회자의 길을 걷는 계기가 된 ‘여러분’을 포함해 장대한 60년 음악 인생의 추억을 풀어놓았다.

이번‘2020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시상식에서 은관문화훈장을 받으셨어요. 축하드립니다.
옛날에 장관상을 받은 적은 있었는데 훈장은 처음이다. 요즘 활동을 많이 안 하다 보니 전혀 예상을 못 했는데 대한가수협회 이자연 회장이 나한테 얘기도 안 하고 추천했다고 한다. 고맙다. 수상자 연락을 받고 깜짝 놀랐다.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웃음)

은관문화훈장을 받으시게 된 역사적 공로를 뭐라고 생각하셨나요.
그날 수상 소감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내가 데뷔 60년 차고 처음 1959년에 미8군에서 김희갑 선생님 밑에서 공부하며 가요계에 데뷔했다. 그때 나는 남석훈이라는 가수하고 로큰롤 가수로 활동했다. 남석훈은 나중 완전히 빅스타가 되었고. 그때 미8군에서부터 음악활동을 시작해서 드럼도 배우면서 1963년에 한국의 최초의 록 밴드 ‘키보이스’를 결성했다. 그걸로 한국 대중음악의 한 장르를 우리가 만들어놓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로 인해서 한국에서도 1960, 70년대에 록의 전성기가 생기고. 그게 공로이자 자랑거린 것 같다.

키보이스 결성과정을 알려주세요. ‘한국의 비틀스’로 불리며 엄청난 인기를 누렸는데요..
키보이스가 1963년에 데뷔해서 1964년에 ‘정든 배’가 나왔다. 그게 나왔을 무렵이 한창 비틀스가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가서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때다. 우리도 악기를 다루는 팀인데 비틀스도 그러니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처음 우리가 그룹을 만들었을 때는 비틀스를 모방한 게 아니라 실은 비치 보이스(Beach Boys)에 많은 영향을 받았었다. 비치 보이스를 보고 한국에서도 저런 그룹을 만들어보자 해서 만든 그룹이 키보이스다.

선생님은 나중 솔로 활동을 하면서 ‘별이 빛나는 밤에’‘장밋빛 스카프’‘나는 행복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등 잊을 수 없는 노래를 많이 만드셨어요. 그런데 왜 그룹 활동을 할 때는 자작곡을 안 만드신 거예요?
좀 전 얘기한 것처럼 내가 데뷔했을 때가 1950년대 후반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위대한 작곡가이신 이봉조 선배님 등이 다 미 8군 쇼에서 활동하실 때였다. 그런데 사실 그 당시에는 그분들도 작곡 활동을 안 하셨다. 나중에 1960년대 중반에 들면서부터 이봉조 선생님도 작곡을 하셨고 김희갑 선생님도 뒤에 시작하셨다.

그 시절 작곡을 하겠다는 생각을 못 했던 것 같다. 1964년에 낸 키보이스의 ‘정든 배’라는 노래를 쓴 것도 김영광이라는 작곡가다. 그 친구가 우리랑 친구다 보니 우리한테 이 노래 같이해보자 그런 식으로 시작을 해서 덕분에 앨범도 내게 됐다. 물론 당시 김영광이라는 친구가 작사 작곡을 할 때 ‘왜 우리는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 하는 약간의 아쉬움도 있다. 분위기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내가 처음 만든 곡은 1969년에 쓴 ‘별이 빛나는 밤에’였다. 이어서 나온 곡이 ‘목이 메어’였고… 같이 1969년에 나왔다.

자작곡을 만드시게 된 계기는요?
사실 한국 뮤지션을 보고 작곡을 시작한 건 아니었다. 당시는 송창식, 윤형주 등 포크 가수들도 번안 가요를 많이 할 때였다. 우리도 김영광 곡을 빼면 다 번안곡이었고. 그래서 차츰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이제는 우리 곡을 조금 해야 하지 않나’, ‘외국 곡 못지않은 우리 곡을 한번 써보자!’라는 생각. 왜냐하면 나는 또 시작이 외국 노래를 부른 팝 싱어였고 록 가수였으니까. ‘별이 빛나는 밤에’나 ‘목이 메어’는 그런 외국 밴드의 곡을 많이 커버하면서 이제는 번안곡에서 벗어나 우리 곡을 써야겠다는 마음가짐에서 쓴 곡이었다.

키보이스 활동하실 때도 이미 솔로로 전향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솔로로 나온 게 몇 년도였나요?
키보이스에서 1969년에 나왔다. 그러고서는 그룹을 하나 따로 만들었다. 왜냐하면 키보이스로 할 때는 내 이름을 많이 알리지 못해서. 또 그 당시는 월남으로 가는 게 붐이었는데, 나한테도 월남으로 갈 기회가 생겼다. 그래서 거기에 가서 쇼를 하기 위한 팀을 만들었는데 그게 ‘윤항기와 키브라더스’다.

그 팀이랑 함께 1년간 월남에 갔다가 한국 들어와서는 팀으로 처음 발표한 곡이 ‘고고 춤을 춥시다’였다. 그게 1971년이었다. 그게 나중에 희귀음반으로까지 올라갔다. 완전한 로큰롤 송이었다. 한 곡을 가지고 끊지 않고 계속 연결, 연결해서 라이브를 30분인가 연주를 했다. 그게 음반으로 나온 거다.

선생님이 슈퍼스타로 떠오른 때는 1973년의 ‘나는 어떡하라고’였어요. 그 곡도 그렇고 이후 ‘장밋빛 스카프’도 그렇고 분명 록을 하셨는데 당대의 트렌드인 포크송을 의식하셨는지 ‘록 + 포크’ 스타일이었어요. 록을 중심으로 주변 장르와의 퓨전을 생각하셨나 봅니다.
그렇다. 거기에 추가로 트로트도. ‘장밋빛 스카프’가 그렇지 않나. 사실 그때는 본래 윤항기의 음악 스타일보다는 빨리 대중화할 수 있는 걸 원했다. 키브라더스를 하면서 발매한 ‘목이 메어도’나 ‘별이 빛나는 밤에’ 같은 경우에는 마니아들 사이에 알려졌다. 돌아가신 DJ 이종환 선생님이 그 노래를 좋아하셔서 라디오 방송 시그널 음악으로도 쓰시기도 했고 아예 지금도 살아있는 프로그램 타이틀이 됐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 윤항기라는 이름으로 지금의 세종회관인 시민회관에서 리사이틀도 했다. 그게 방송 < 별이 빛나는 밤에 >의 오픈 기념 축하 공연이었을 거다. 그 덕에 윤항기라는 이름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하다가 키보이스 때부터 인연이 있던 신세계 레코드 간부가 와서 우리가 하는 걸 보더니 ‘이렇게 그룹으로 해서는 안 되겠다. 솔로로 해보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1973년에 ‘나는 어떡하라고’가 나오고 그 후 1975년에 나온 곡이 ‘장밋빛 스카프’였다. 

‘별이 빛나는 밤에’는 키보이스 활동할 때 썼던 곡인가요?
그건 키보이스 때 나온 게 아니라 ‘윤항기와 키브라더스’를 만들고 월남에 가서 만든 곡이다. 월남에서 만들고 한국 와서 키브라더스 음반이 나오기 전에 그걸 고고클럽에서 연주했다. 그 후에 키브라더스 데뷔 앨범, 아까 말한 1971년의 < 고고 춤을 춥시다 >에 수록됐다. 그리고 그 곡이 대중에게 인기를 얻기 시작할 무렵에 펄 시스터즈의 음반을 작업하던 분이 나에게 와서 펄 시스터스가 그 노래를 취입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내 음반이 나오기 전에 펄 시스터즈 버전의 ‘별이 빛나는 밤에’가 먼저 나왔다.

‘장밋빛 스카프’는 어떻게 쓴 곡인가요?
그것도 아주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날이 서울 스튜디오에서 ‘윤항기와 키브라더스’ 앨범 녹음을 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앨범에 수록할 곡 수(數)가 딱 한 곡이 모자랐다. 그날 스튜디오로 가서 마무리를 해야 하는데 한 노래가 모자랐던 거다. 가면서 고민을 했다. 그런데 그러다가 갑자기 악상이 떠올랐다. 멜로디가 아닌 가사가. 그게 또 스캔들이라면 스캔들인데, 1960년도 후반에 내가 좋아했던 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모티브로 해서 썼다. 당시에 그 여인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한동안 그 여인을 찾아서 전국을 미친 듯이 헤매 돌아다니기도 했다. 술도 많이 마셨고, 스케줄도 펑크 내고 그랬던 적이 있다.

그 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내가 그때 갑자기 홍콩으로 사라졌다고 기사가 나고. 당시 스캔들이 많았다. (웃음) 어쨌든 불현듯 그 생각이 난 거다. ‘내가 왜 이럴까/ 오지 않을 사람을/ 어디선가 웃으면서…’ 앞에 그 테마가 잡혔다. 그래서 그냥 부랴부랴 도착하자마자 멤버들은 스탠바이 하고 있는 상황에서 내가 잠깐 기다려보라고 하고 소파에 앉아서 가사를 생각나는 대로 정신없이 막 썼다. 그래서 그 곡이 가사가 짧다. 그다음은 이제 멜로디를 써야 하는데, 어떤 고급스러운 멜로디는 상황이 촉박하다 보니 안 나오고, 그냥 급하게 되는대로 가사에다가 써 붙인 멜로디가 그 뽕짝 스타일의 멜로디였다. ‘쿵짜작∼ 쿵짝’. 사실 그 멜로디의 영감을 받은 건 조영남 노래의 ‘불 꺼진 창’(이장희 작사 작곡)이었다. 나중 금지된 곡이다. 그 멜로디랑 리듬이 생각나더니 이 가사에 그런 스타일의 선율을 입혔다. 그게 또 운율에 딱딱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졌다. 

‘장밋빛 스카프’는 한때 노래방 애창곡 1위를 차지한 적도 있지요. 사람들이 이 노래를 좋아하는 이유가 못 이룬 사랑에 대한 애틋함 같은 것도 있지만 부르기 좋은 곡조이기도 해서인 것 같아요.
아주 쉽다. 키브라더스 앨범으로 나온 곡인데 그 노래가 처음 수록됐을 때는 타이틀이 아니고 밑에 깔려있는 곡이었다. 그런데 그 앨범이 라디오 쪽으로 갔는데, 라디오 측에서 앨범 전체를 들어보더니 타이틀곡보다는 밑에 있던 ‘장밋빛 스카프’가 더 좋다는 거였다. 동아방송(DBS)의 이해성 PD가 찾아내 거기서 틀기 시작하면서 반응을 얻기 시작했다.

‘나는 어떡하라고’는 KBS 가수왕상의 영예를 준 곡이죠?
맞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영화로도 나왔었다. 내가 주연을 맡았었고. 그래서 내 경력에 보면 영화배우라고도 나온다. (웃음)

이후 실세를 장악한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나는 행복합니다’가 나왔는데 전두환이 대통령이 됐을 무렵이라 ‘전두환 송’이라고도 불렸지요?
그렇다. 그거는 왜 그러냐 하면 신군부가 그런 밝은 노래, 희망적인 노래가 아니면 다 금지시켰다. ‘장밋빛 스카프’도 한때 금지가 됐었으니. 가사가 ‘오지 않을 사람을…’ 막 그러니깐 전(前) 정권을 이야기하는 거냐는 말도 있었고. 참 별의별 일이 다 있었다.

1983년 히트곡 ‘이거야 정말’은 걸작이라는 평을 받았어요. 가사도 심상치 않았고.
엄진 작곡가가 만들었다. 가사를 사계절에 빗대서 참 잘 만든 노래였다. 

윤항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노래가 전 국민 누구에게 물어봐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여러분’이지요. 윤복희 노래로 남매의 완벽한 협업을 선사했는데요, 1979년 서울국제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했지요. 선생님은 언제부터 목회자의 길을 걸으셨나요?
사실‘여러분’을 만들고 난 후였다. 그전에는 그냥 동생이랑 집사람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깊은 믿음 없이 약간 강제적으로 믿은 거고..  

‘여러분’을 만들고 본격적으로 신앙에 들어가셨던 거군요. ‘여러분’은 역사적인 명곡입니다. 선생님은 그 곡을 어떻게 생각하시고 평가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여러분’이라는 곡만 딱 놓고 보면 어떻게 저런 곡이 나올 수 있을까 싶은데, 사실 그 이전에서부터 내가 닦아온 결과였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1974년에 한국일보에서 주최한 < 제1회 한국 가요제 >에서부터 곡을 출품했었다. 그게 한국 최초로 열린 국내 가요제였는데 그때 곡이 ‘외로운 해바라기’였다. 그때 대상을 박경희의 ‘저 꽃 속에 찬란한 빛이’가 대상을 받고 내 곡이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걸 시작으로 가요제가 유행이 되면서 매년 가요제가 있었다. MBC 가요제, TBC 가요제 등등. 모든 가요제에 빠짐없이 출전 곡을 냈다. 그렇게 해서 ‘나그네’라는 곡도 나오고 ‘바늘과 실’도 나오고, 정은희가 부른 ‘누구 없소’까지. 다 가요제 참가곡이다. 결론해서 내 나름의 내공을 쌓아왔다고 할까. 1979년 ‘여러분’이 그냥 갑작스럽게 나온 게 아니라 그 이전에서부터 축적되어 온 경험의 산물이다.

‘여러분’은 약간 가스펠적인 터치가 있었어요.
멜로디는 그냥 팝 발라드인데 아무래도 가사 때문일 거다. 그 곡은 내가 동생의 아픔을 위로해주기 위해서 쓴 곡이기도 했다. 오빠로서 동생의 아픔을 달래주기 위해 만든 내용이다. 그때 윤복희가 광신자라고 할 정도로 신앙에 빠져있을 때였는데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담은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 ‘내’가 너를 위한 것이 아닌 ‘하나님’이 너를 위한 것이라는 그런 마음으로 노래를 만들었다고 하면 동생에게 위로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곡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전체적인 모티브를 미리 동생에게 이야기했는데 아주 좋아했었다. ‘네가 만약 괴로울 때면 내가 위로해줄게 / 네가 만약 서러울 때면 내가 눈물이 되리..’. 그 가사가 그렇게 해서 나온 가사다.

많은 세월이 흘러서 2011년 임재범이 < 나는 가수다 >에서 불러 ‘여러분’이 재(再)유행했지요. 그 곡을 듣고 어떠셨는지?
그 곡이 30년 만에 다시 살아났다. 30년 만에 ‘여러분’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감동적이었다. 윤복희가 부른 것과는 또 달랐다. 한창 ‘여러분’ 터지면서 인기를 얻을 때 임재범이 나를 찾아오기도 했었다. 와서 나한테 간증을, 신앙 고백을 했다. 그러면서 우리 학교(한국예술사관실용전문학교)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학생들에게 나눠주고 싶다면서 한동안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기도 했다.  

선생님 어렸을 적 이야기인데 그때 많이 소개된 것처럼 정말 말을 더듬으셨어요?
엄청 더듬었다. 나중에 커서 활동하면서도 더듬었다. 물론 희한한 게 노래를 할 때는 말을 안 더듬었다. (웃음) 말더듬이가 고쳐진 게 성직자가 되면서부터다. 어떤 물리적인 방법으로는 치료가 되지 않았는데, 성령에 의해서 나아진 거로 생각한다.

한때 뮤지컬 기획자로 활동하신 것도 기억납니다. 한창 화제였던 < 춤추는 함대 >도 선생님이 기획하셨죠?
그렇다. 그때 내가 키보이스로 미8군에서 패키지 쇼를 할 때는 코미디도 하고 다 했다. 드럼도 치고 노래도 하고. 뮤지컬 기획도 했으니 ‘만능’이란 찬사를 많이 받았다.

음악 인생에서 가장 영예롭고 자랑스러운 노래를 꼽으신다면.
한 곡으로 압축하자면 역시 ‘여러분’일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윤항기를 만든, ‘여러분’ 같은 곡을 만들 수 있도록 해준 원동력은 역시 ‘별이 빛나는 밤에’다. 내가 처음 쓴 곡이기도 하고 가장 ‘윤항기다운’ 곡이다. ‘나는 행복합니다’, ‘이거야 정말’ 등등 다른 곡도 많지만 진짜 내 본래 스타일은 ‘별이 빛나는 밤에’ 그리고 ‘목이 메어’, ‘장밋빛 스카프’ 같은 노래들이다. 

키보이스 때부터 전국 미군 부대를 돌아다니셨는데, 부평 애스컴에 대한 기억은 어떠세요?
미 8군 쇼하는 분들에게 애스컴은 가장 큰 무대였다. 가장 클럽이 많은 데이기도 했고. 서울하고도 가까운 데다가 그 당시에 미 8군 기지 보급창이다 보니 거기서 쇼를 하게 되면 먹고 마시는 거는 아주 풍족했다. 그때가 한국에는 콜라도 모르고 햄버거도 없을 때인데 애스컴에서는 물자가 풍부하니 쇼 단체에게 미군들이 이것저것 바리바리 싸줬다. 그러니까 다른 부대 가는 거보다 애스컴 스케줄 잡히는 게 좋았다. 그날은 이제 가방 들고 가는 거였다. 먹을 거 챙기러. (웃음)

한창 애스컴 클럽무대에 서셨을 때가 1964~1966년 즈음일 텐데요.. 당시 멤버가 윤항기, 옥성빈, 김홍탁, 차도균, 차중락이었죠. 그때 선생님은 드럼을 치셨는데 노래는 어느 정도 하셨나요?
그때는 거의 다 같이 했다. 혼자 솔로로 하는 거는 (차)중락이가 한 ‘Mr. Tambourine man’ 정도고 그거 말고 나머지는 다 함께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드럼 치면서 노래한 사람이 나다. 그거를 우리가 ‘쎄시봉’에서 하는 걸 보고 나중에 또 드럼 치면서 노래를 한 가수가 배호다.  

키보이스 때 가장 기억나는 곡은요.
역시‘정든 배’다. 또 아이러니한 게 키보이스는 분명 록 그룹인데 그 곡은 또 완전 뽕이다. 그런데 그때 당시에 그게 뽕이 아니었으면 히트 못 쳤을 거다. 작곡가 김영광이 그걸 노렸다. ‘그녀 입술은 달콤해’도 같은 앨범 수록곡이었는데 실은 그게 타이틀곡이었다. ‘정든 배’는 밑에 깔린 노래였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취입해서 ‘정든 배는 떠난다’로 내기도 했고.  

애스컴 클럽 공연에서 미군들 앞에 노래할 때 레퍼토리는 어떤 곡들이었나요?
다 팝송이었다. 비틀스 초기 곡들은 거의 다 연주했다. ‘I want to hold your hand’, ‘She loves you’, ‘A hard day’s night’ 등등. 비치 보이스도 했고.. 

미군들은 어떤 곡을 가장 좋아하던가요?
그때‘이미테이션’이라고 해서 미국 가수들 모창을 많이 했었다. 그때 내가 레이 찰스(Ray Charles)랑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 모창을 하고, 차중락이 엘비스 프레슬리, 차도균이 팻 분을 했다. 특히 내가 레이 찰스랑 루이 암스트롱 모창을 할 때는 미군들이 자지러졌다. 거의 졸도 수준이었다. (웃음) 일어나서 기립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그때 불렀던 노래가 ‘I can’t stop loving you’랑 ‘Hello, Dolly’였는데 다 까무러쳤다.

부평 애스컴의 우리 음악계에 남긴 의미는 뭘까요?
애스컴은 우리 키보이스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에 록 음악을 추구하고 그 세계에 꿈을 가지고 있던 젊은이들이 가장 쉽게 모이고 그 문화를 접할 수 있던 곳이었다. 왜냐하면 동두천 문산은 멀었고 부평은 서울과 가까웠다. 그래서 더 자주 갔다. 어떻게 보면 오늘날 K팝의 뿌리가 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전국에서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다양한 팝음악을 시도했던 곳이고 그 음악들이 우리 음악의 다양성에 기여했다고 본다.  

선생님에게 음악은 뭐였을까요, 대중에게 윤항기의 음악은 무엇을 의미했을까요?
나는 팝 음악을 할 때는 나 자신에 대해서 ‘앞으로 이렇게 되어야겠다!’는 그런 생각을 안 했다. ‘그게 아니면 할 게 없다’는 마음으로 임했다. 내가 가진 재능이 그거다 보니. 그래서 그냥 음악을 죽기 살기로 하기도 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해오다 보니 나중에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부터는 앞으로 내가 음악인으로서 무언가를 남길 수 있는 바를 해봐야 하지 않겠나 싶어서 곡을 쓰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변화가 왔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윤항기의 곡은 거의 다 그 당시 나의 삶에 대한 표현이었다. ‘라이프 뮤직(Life Music)’이 아닐까. 그걸 또 대중이 동의를 해주셨다. 그 삶을 인정해주셔서 ‘별이 빛나는 밤에’, ‘장밋빛 스카프’, ‘나는 행복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사랑해준 게 아닐까 싶다. 항상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다.

인터뷰 : 임진모, 임동엽, 신현태, 이홍현
사진 : 임동엽
정리 : 임진모, 이홍현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추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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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11 차승우 X 차중용 인터뷰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관계한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그들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열한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밴드 노브레인, 문샤이너스, 모노톤스를 거쳐 새 프로젝트 밴드 ‘조카들’을 이끌고 있는 로큰롤 기타리스트 차승우다.  

차승우의 새 밴드 기획 ‘차승우와 조카들’은 막 저 옛날 1968년에 발표된 노래 ‘그대는 가고’의 녹음을 마쳤다. 이 노래의 주인공은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으로 유명한 국내 로큰롤 초기 역사의 레전드인 밴드 ‘키보이스’의 차중락이다. 스물네 살에 요절한 차중락은 차승우의 아버지 차중광의 형으로, 차승우에게는 큰아버지다. 차중락의 노래를 리메이크하니 프로젝트 팀명을 ‘조카들’로 한 이유를 알 만하다.

이런 걸 두고 재탄생이라고 하는 것 아닐까. 비록 오래된 곡이지만 현대적 감성을 녹여낸 편곡 덕에 지금 들어도 깔끔하다. 원래 차승우는 이 고전을 부친 차중광과 함께 다시 만들려고 했다. 아버지는 과거 형 중락과 같이 키보이스로 8군 무대를 누비던 추억을 환기하며 부평구 문화재단의 기획 ‘부평사운드’에 맞춰 곡도 ‘그대는 가고’로 직접 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암 투병 중 지난 8월 27일 별세하면서 부자(父子)의 콜라보레이션은 완성되지 못했고 작업은 아들 혼자 떠맡게 되었다. 차승우의 부담과 책임감은 클 수밖에 없었다. 어린 조카로서, 아들로서 선대에 누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음악 인생 중 가장 무겁게 마음을 먹고 녹음한 노래”라고 했다.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 ‘밤하늘의 연가’, ‘나는 혼자다’ 그리고 ‘사랑의 종말’ 등등 지금도 사랑받는 차중락의 유작이 많다. 그 중에서 하필 ‘그대는 가고’를 리메이크한 이유는?
차승우: 이 ‘부평사운드’ 프로젝트에 참여할 즈음만 해도 아버지(차중광)께서 노래를 하실 수 있다고 하셨고 아버지께서 굳이 형 차중락 곡 가운데 ‘그대는 가고’를 하시길 원하셨어요. 아버님의 선택인 셈이죠. 하지만 작업이 진척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안타깝게도 아버지의 건강이 안 좋아지셨어요. 전에 워낙 건강하셨기 때문에 더 그러네요.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새로 녹음된 ‘그대는 가고’를 들어 봤는지.
차승우: 들으셨어요. 완성된 음원에 다 만족하시진 않으셨는데 ‘편곡이 재밌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제 기타를 유심히 들으시곤 1960년대 영국 밴드 섀도우즈(Shadows) 같다고 하시는 거예요. 제가 실제 그런 느낌을 의도했던 거거든요. 기분도 좋았고 오래 음악을 하신 분이라 역시 보통 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프(surf) 기타를 부여하는 것이 기타편곡의 핵심이었는데 곧바로 알아차리신 거죠.

막상 ‘그대는 가고’ 녹음에 들어갈 때 기분이 남달랐을 것 같다.
차승우: 편곡, 녹음할 때 책임감이 느껴졌죠. 차씨의 이름을 물려받은 가장 나이 어린 조카, 아들로서 임하게 된 것이 크게 다가왔습니다. 적어도 누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20대부터 해온 음악 인생 중 가장 무겁게 마음을 먹고 녹음한 음원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아픈 와중에 녹음해서 더 그렇고… 아버지가 건강하셨다면 ‘함께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도 큽니다.

‘그대는 가고’ 재해석은 어디에 중점을 뒀나?
차승우: 오리지널 버전은 스탠더드 팝 요소가 강하고 큰아버지(차중락)께서 워낙 음색이 절제된 상태고 고운 편이시잖아요. 이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해서 나의 식대로 해석했습니다. 좀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또 다른 복고적인 서프 기타 풍에 중점을 두었죠. 시간에 제약이 있어서 하고 싶은 것을 다 하진 못했으나 대체적으로 만족합니다.

인터뷰에는 차중락과 함께 차중광의 친동생인 차중용 님도 자리했다. 가요계의 레전드라고 할 ‘귀빈’의 출현에 모두들 놀랐다. 친형의 노래를 연주한 조카 차승우를 응원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차중용이 누구인가. 키보이스를 뒤잇는 밴드이자 역시 전설인 ‘가이즈 앤 돌즈’에서 보컬을 맡아 활약한 바 있는 인물이다.

과거를 회상하며 그는 차중락의 고전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 어떻게 녹음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알려졌는지를 비롯해서 차중락, 차중광, 키보이스, 가이즈 앤 돌즈의 음악에 대해서 상세히 들려주었다. 이야기보따리는 풀어도, 풀어도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전직 가수와 얘기하는 게 아니라 매 순간이 마치 ‘역사와의 대화’ 같았다.

차중용 선생님은 ‘그대는 가고’를 들어보셨는지요. 그리고 또 조카가 오래전부터 음악을 했는데 음악가 출신으로서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차중용: 병상에서 형님을 뵈어 잠깐 듣고 다음에 듣자 하고 제대로 들을 겨를은 없었어요. 이제 자세히 들어봐야지요. 당연히 조카가 밴드 해오고 있던 것도 알고 노래도 들어봤죠. 그 전에 ‘노브레인’ 할 때는 미친놈들인 줄 알았어요. (웃음)

차승우: (이 말에 파안대소하며) 적절한 표현이십니다!!

차중락에 대한 기억을 환기해보지요. 어렸을 적 TV를 통해 본 차중락 선생님은 체구도 훤칠하시고 인물도 출중하셨던 게 기억납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를 번안(‘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한 것도 있지만 비주얼 때문에도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고 그 별명이 차중광 선생님께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알아요.  
차중용: 맞아요. 우리 집안 형제들이 다 잘생겼어요. 큰형 차준경(37년생), 차중덕(39년생), 차중락(42년생) 차중광(44년생) 그리고 저 차중용(47년생)..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 타이틀은 중락이 형, 중광이 형에게 다 붙었죠.

‘그대는 가고’는 정확히 취입, 발표 년도가 어떻게 되나요.
차중용: 1968년일 거예요. 그해 중락이 형이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바로 전에 취입했던  것으로 기억해요. 몇 달 전일 겁니다. 차중락의 또 다른 히트곡 ‘사랑의 종말’은 이봉조 선생 곡인데 그 전해인 1967년이 맞을 거예요.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은 그 훨씬 전이고..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 훨씬 전이에요? 히트는 돌아가시고 나서인 1968년 이후 아닌가요?
차중용: 아니에요. 물론 사후 추모 분위기에서 대대적인 히트는 맞고 승우 아버지 차중광의 노래로도 널리 알려졌죠. 하지만 그것은 재조명이고 히트는 엄연히 그 전입니다. 근데 중락 형의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 어떻게 히트했는지 알아요? 그 당시 키보이스는 차중락(보컬), 윤항기(드럼), 김홍탁(기타), 옥성빈(키보드)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바쁜 가운데도 신세계 레코드사 주선으로 당대 미8군 라이브 쇼 무대의 최고이자 레전드인 남석훈 씨의 음반 취입 때 반주를 해주게 됐어요. 남석훈 씨 노래로 다 채울 수가 없으니까 나머지를 키보이스의 번안곡으로 LP를 채운 겁니다.

거기에 엘비스 프레슬리 노래인 ‘Anything that’s part of you’를 번안한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 들어가게 됐지요. 앨범에 키보이스보다 차중락의 이름이 크게 표기되어서 차중락의 노래가 되어버린 거예요. 키보이스노랜데… 임 선생도 이 곡, 색소폰 버전의 노래로 알고 있지요? 실은 남석훈 씨 음반에 녹음된 이게 오리지널, 일렉트릭 기타 버전이요. 이게 감이 더 좋아요. (그게 언제였나요 묻자 차중용 님은 1964년이라고 답했다)

차중락의 곡이 아니라 원래는 밴드 키보이스의 노래네요. 근데 음반의 주요 곡이 아닌데 어떻게 히트가 됐을까요?
차중용: 그 무렵 부산에서 제일 유명한 초원다방에 한번 LP를 돌렸는데 여기서 반응이 시작됐어요. 그 후 인기가 퍼지면서 부산의 여성분들이 지속적으로 최동욱, 이종환 등 당대 최고의 인기 디제이가 진행하는 서울의 라디오 프로에 전화해서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신청하는 거예요. 당시 전화 요금이 무척 비싼 시절이었거든요. 한마디로 인기가 부산에서 서울로 북상한 경우지. 당시에는 그런 사례가 거의 없었어요. 음반이 수급도 안 된 상황이었는데…

차중용 선생님이 노래하신 밴드 가이즈 앤 돌즈를 소개해주시죠.
차중용: 중락이 형은 밴드 키보이스에 이어 가이즈 앤 돌즈(Guys And Dolls)를 하게 됐는데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의 히트로 바빠지면서 제대로 가이즈 앤 돌즈 활동을 할 수 없어서 내가 오디션을 봐서 대신 들어가게 됐지요. 미8군 클럽 대상의 연예기획사가 급히 만든 셈이죠. 가이즈 앤 돌즈 멤버는 차중락, 조용조(기타), 이수영(세컨드 기타), 차도균(베이스) 그리고 저였습니다.  

부평의 미군기지 애스컴, 정말 컸어요. 거기도 공연을 자주 갔었죠. 키보이스, 가이즈 앤 돌즈 다 여기 무대에 섰지요. 부대마다 클럽이 몇백 개나 되었는데 클럽 이름은 기억나지는 않고 우리 음악이 로큰롤이라 무대는 장교 클럽이 아닌 주로 사병이나 하사관 클럽이었죠.    

그럼 8군 클럽 가이즈 앤 돌즈 공연에서 대표적인 레퍼토리는 뭐였나요?
차중용: 엘비스 프레슬리 노래들도 많이 했지만 롤링 스톤스의 ‘(I can’t get no) satisfaction’, ‘Paint it, black’이 기억나고… 그리고 애니멀스(Animals)의 ‘We gotta get out of this place’를 피날레로 했어요. 관객들 다들 미쳐했지. (웃음)

동생 입장에서 형 차중락 보컬과 음악을 평가하신다면?
차중용: 최근 중광이 형도 세상을 떠나면서 형들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어요. 밴드의 시작이자 국내 대중음악의 뿌리가 됐다는 점에 자랑스러운 마음도 있지만 한편으로 가만히 생각해보면 화가 나기도 해요. 가수를 하려면 음악 공부를 했어야 하잖아요. 이왕 할 거라면 제대로 해야지 하는 아쉬운 마음이 크죠. 그래서 좀 더 멋있는 노래를 남겼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작곡가가 가수가 가진 장점에 맞춰 곡을 써야 하는데 작곡가가 만들고 나서 노래를 주었으니 중락 형에게 맞는 노래가 없었지요. 진정한 차중락의 노래가 아니었던 거죠. 쉽게 말하면 양복을 입고 갓을 쓴 것이라고 할까. 음악적 역량이 반영이 전혀 안 됐어요.

그럼에도 승우 씨는 아까 큰아버지 보컬을 미성으로 표현했다. 이번 ‘그대는 가고’를 비롯해 살아 남아 있는 차중락의 곡이 많은데‘그대는 가고’말고 또 탐나는 곡이 있나?
차승우: (1초도 고민 없이 즉각) ‘사랑의 종말’을 해보고 싶어요. 이번에도 이 곡을 고려했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못했거든요. 가사가 단도직입적이고 센 편이라 요즘 세대에게도 잘 먹힐 수 있다고 봅니다. 탱고 사운드도 정말 멋있고. 지금까지도 사랑받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요.

노브레인이나 문샤이너스 활동 때 아버지 생각을 했나?
차승우: 네 그럼요. 문샤이너스 당시에는 < 천변풍경 2009 Unforgettable > 콘서트를 아버지와 함께하기도 했어요. 큰아버지(차중락) 히트곡과 엘비스 프레슬리 커버도 하고 이것저것 하면서 1시간 정도 공연했습니다. 즐거웠어요. 이 생각을 하니 이번 ‘그대는 가고’를 아버님과 못한 안타까움이 더더욱 큽니다.

차승우가 갖고 있는 로큰롤 유전자는 큰아버지나 아버지에게 물려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한국 록 밴드의 시효인데…
차승우: 저는 그렇다고 확언합니다. 음악을 하라고 종용하시진 않았지만 환경적인 혜택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도 제 음악 취향이 고색창연하기도 하고, 그런 면에서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을 부인하기 어렵지요.  

부평문화재단에서 기획하고 있는 ‘부평사운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차승우: 감사하고 너무 멋있다고 생각해요. 이런 시기에, 특히나 홍대 중심의 음악 신이 거의 고사 직전인데 밴드 중점이라서 의미도 있고… 좋은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차중용 선생님은 지금 젊은이들의 음악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차중용: 한 마디로, 한 곡 들으면 다 들은 느낌이랄까요. 그 노래가 다 그 노래예요. 앞으로 40대, 50, 60대가 소비중심이 될 시장이 더 커질 텐데 고려를 안 하는 것 같이 보여요. 장르 측면에서도 예전에는 록이 있고 포크, 탱고도 있고 왈츠 트로트, 민요 등 다양하지 않았나요. 지금은 획일화돼버렸어요. (외국도 그렇다고 말씀드렸더니) 거기는 그래도 아델(Adele)이 있잖아요.

요즘 음악도 들으시나 봅니다.
차중용: 요즘도 계속 음악을 듣고 마인드가 프레쉬해져서 그런지 몰라도 젊은 세대와 별 어려움 없이 소통이 됩니다. 음악의 힘이라고 봐요. (차승우는 여기서 “작은아버지는 지금도 라디오헤드(Radiohead)를 들으세요”라고 덧붙였다)

돌이켜보면 음악이 무시 받던 60년대에 모든 가족이 음악을 했습니다.
차중용: 아버지가 큰 사업을 하다 보니 굉장히 유복하게 자랐습니다. 부자들이 많이 살던 장충동이 집이었죠. 그러니 우리 집에 가수가 나오리라고 상상도 못했죠. 중락이 형 위인 둘째 중덕이 형은 비즈니스로 미국이나 일본에 갈 때 연회석에서 잠깐 노래 불러도 가수인 줄 알고 사인해 달라는 사람들이 있었으니까요. 그만큼 차씨 집안이 노래를 잘했어요.

‘노브레인’ ‘문샤이너스’를 이었던 밴드 모노톤즈는 어떻게 되는 건가.
차승우: 완전히 끝난 게 맞아요. 밴드로 커리어를 시작했고 나에게 있어 노래 만드는 게 중요하긴 하지만 2018년부터 의도적으로 음악적 휴지기를 가지고 있다고 할까요. 야인 생활에 들어간 거죠. 일단 개인적으로 슬럼프가 왔고 밴드 말미에 마무리도 좋지 않았고.. 음악적 아이디어도 없다 보니 뒤죽박죽이 되면서 쉬자는 마인드가 생겼죠.

어떻게 보면 지금 한국의 환경에서 오래 밴드하기 어렵다는 것을 실감한다.
차승우: 거의 총체적 난국이죠. 제가 처음에 밴드로 시작했을 때는 인디라든지 서브 컬처가 태동하던 시기라 젊은 사람과 잘 맞물렸죠. 하지만 이후 밴드 신에서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고 트렌드가 걷히면서 록과 밴드가 부진한 상태로 들어가게 되었죠. 어렵게 시선을 끄는 데 성공했지만 지금은 분산되었다고 봅니다.

세계적으로도 록이 퇴조하는데 우리의 경우도 록과 밴드 그리고 인디 분야에서 좋은 음악이 이어지지 않은 것 같다.
차승우: 일관성도 없었고 작가주의로 작업을 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다고 봐요. 이번 ‘부평사운드’의 작업이 스스로 환기하는 계기가 됐거든요. 저도 분발해야 하구요. 어깨가 참 무겁습니다.

인터뷰 : 임진모, 신현태, 김도헌, 임선희, 임동엽
정리 : 임진모
사진 : 임동엽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추진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