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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찬일의 영화수다 Feature

공생의 덕목을 새삼 일깨워 준 ‘위대한’ 스타, 장국영을 다시 추억하며

“공생의 덕목을 일깨워준 배우다. 우리는 연기를 잘한다고 하면 홀로 압도적 연기를 잘하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장국영은 어떻게 주변과 잘 어울리는가, 자기도 살지만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새로운 연기의 패턴을 보여준 특별한 배우였다. 장국영은 시대의 무게 중심이 여성성으로 가는 상황에서 마초적이지 않은, 부드러운 이미지의 선구자적 존재였다. 그가 맡은 캐릭터의 애틋함이 맞물리며 진정성 있는 팬들을 많이 확보하게 됐다. 진정한 팬들의 바탕에는 ‘생명력’이 있기에 세월과 함께 가는 것”이니까….

홍콩 출신의 최고 스타-배우이자 가수였던 (고)장국영(張國榮, Zhang Guorong, Leslie Cheung) 17주기를 맞이해, < 주간경향 > 2020년 4월 1372호에 보냈던 필자의 코멘트다. 올해로 사망 19년이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건만, 아직도 그를 추억하는 건 어찌 된 영문일까? (부끄러운 고백이나) 부친의 기일조차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고 있거늘 말이다.

그 계기는 이 사이트 < 이즘 >의 운영자 임진모 선배의 갑작스러운 요청이었다. 일찍이 페드로 알모도바르에 대한 원고―예고했던 두 번째 탄을 아직도 쓰지 않고 있다―를 청했듯, 장국영에 대해 써달라는 게 아닌가. 주지하다시피 그는 배우 이전에 가수였으며, 예술영화 전용관 아트나인에서 특별전을 한다면서….

‘의문의 자살’로 저세상으로 떠난 2003년 4월 1일 이후 줄곧, 고인을 가슴에 품고 살아왔기에 당장이라도 쓸 수 있었겠으나, 내 특유의 게으름 내지 여유를 부리며 일주일가량을 끌었다. 그러면서 장국영 그를 다시금 진지하게 소환‧추억했다. 유작 < 이도공간 >(異度空間/Inner Senses; 감독 나지량, 2002)도 넷플릭스에서 다시 한번 관람했다. 처음 볼 때보다 훨씬 더 흥미진진하게.

어쩌면 이 영화의 영향‧후유증(?)이 자살의 한 요인이 됐을 수도 있겠다, 싶다. 언뜻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의사 짐은, 사실 중학교 적 사랑이 남긴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처 가득한 캐릭터인바, 실제의 장국영과 적잖이 겹치기에 내려보는, 조심스러운 진단이다. 결국 그에게는, 애초엔 짐의 환자로 등장하나 그의 애정 어린 치료에 힘입어 완치된 후 짐을 문제의 트라우마에서 구원하는 얀(임가흔 분) 같은 ‘진정한 연인’이 부재했기에, 끝내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은 아닐까, 싶다.

뿐만 아니다. < 영웅본색 >(오우삼, 1986)의 ‘당년정’ 외에는 진중하게 음미한 적 없었던 장국영의 노래들도 찾아 들었다. 지금도 들으면서 이 원고를 쓰고 있는 중이다. < 영웅본색2 >(오우삼, 1987)의 ‘분향미래일자’, < 천녀유혼 >(정소동, 1987)의 ‘노수인망망’, < 첨밀밀 >(진가신, 1996)의 ‘월량대표아적심’, < 금지옥엽 >(진가신, 1994)의 ‘추’, < 백발마녀전 >(우인태, 1993)의 ‘홍안백발’, < 야반가성 >(우인태, 1994)의 ‘야반가성’ 등 그의 매혹적 노래들만이 아니다. 내친김에 여타 다른 홍콩영화들의 OST도 들었다. 결국 19년여의 세월에도 아랑곳없이 장국영 그는 내게 현재형의 존재로서, 함께하고 있는 셈이다.

내 첫 번째 영화 단행본 『영화의 매혹, 잔혹한 비평』(작가, 2008) 2부 「영화 인물 탐구」 장국영 편 “공생의 덕목을 새삼 일깨워 준 ‘위대한’ 스타”에 상술했듯, 나는 문제의 그 날에야 비로소 장국영에 대해 크고 깊은 관심을 갖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래 당시 연재 중이던 < 인천일보 > 4월 11일 자에 다음과 같은 소회를 피력했다. 다소 긴 감이 있으나, 일부 수정을 해가며 그 전문을 옮겨보자. 더 이상 잘 쓸 자신은 없으니….

이 시점에서 장국영을 추억하는 칼럼을 쓰는 건 다분히 때늦은 짓이다. 이렇게 쓸 거라면 지난주에 썼어야 했다. 그가 투신자살로 47년 가까운 생을 마감했던 지난 1일 밤 그 비보를 접해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그때 안타까움을 넘어 일말의 슬픔까지도 느꼈으니까.

그러면서도 그 이야기를 하지 않은 까닭은 그를 썩 좋아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지구를 지켜라! >를 강추하고픈 욕구가 워낙 컸기 때문이기도 했고. 하지만 그 이후 난 서서히 그에게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분명히 알았다. 비록 의식하고 있진 않았지만 난 그를 퍽 사랑하고 흠모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의 연기 세계의 깊숙이 매료되어 있었다는 걸….

< 영웅본색 >(1986)에서 출발해 < 색정남녀 >(1999)에 이르는 열 편의 대표작들을 다시금 되돌아보면서, 그만의 매혹적 연기 세계에 취하는 건 따라서 당연했다. 그때부터 줄곧 난 장국영과 ‘더불어’ 지내고 있다. 강의에서든 사석에서든 늘 그를 말했다. 그러니 어찌 여기서 그를 기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의 영화들을 다시 보거나 기억하며 새삼 발견한 사실은, 장국영 그는 여느 출중한 스타·배우들과는 달리 작품 속에서 함께 연기한 동료 연기자들을 압도하는 연기를 펼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출세작이라고는 하지만 < 영웅본색 >에서는 주윤발의 강렬한 카리스마에, < 천녀유혼 >과 ‘연지구'(88)에서는 왕조현과 매염방의 황홀한 매력에 가려 빛이 바랜다. < 동사서독 >(1994)에서도 양가휘, 장만옥, 양조위, 임청하 등 화려한 출연진의 열연은 물론 감독 왕가위의 ‘튀는’ 스타일에 가린다. 심지어는 흔히 최고의 연기를 구현했다고 간주되는 < 패왕별희 >(1993)서도 갈우와 공리를, < 해피 투게더 >(1997)에서는 왕조위를 압도하진 못한다. 거의 유일한 예외는 장만옥을 비롯해 류덕화·장학우·류가령 등 여타 주연 배우들의 연기 총합을 능가하는 < 아비정전 >(1990) 정도랄까,

그렇다면 그의 연기가 시원치 않다는 의미? 천만의 말씀, 그 정반대다. 단언컨대 그는 거의 항상 최고 수준의 연기를 선사한다. 여전히 빛을 발한다. 평범한 배역일 때조차도. 그 빛은 그러나 여느 훌륭한 배우의 카리스마에서 비롯되는 강렬한 빛이 아니라 동료 배우들과 완벽하게 공존하는 은은한 조화의 빛이다. 그건 뜨겁지 않고 온화하다. 나른하고 편하다. 행복하기조차 하다. 그럼으로써 영화를 한층 더 풍성하게 하고 더욱 볼만한 것으로 승화시킨다.

세상의 숱한 좋은 배우들 중 과연 그런 이가 있었던가, 싶기도 하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그 이름을 자신 있게 떠올리질 못하겠다. 이건 그야말로 연기의, 배우의 발견이다. 물론 과장이 섞였겠지만, 향후 영화 연기 역사는 이렇게 나뉠지도 모른다. ‘장국영 이전’과 ‘장국영 이후’로.

이젠 찾아볼 순 없어도, < 이즘 >에도 비슷한 취지의 원고를 보낸 바 있다. 추모성 원고를 청탁해온 모 주간지에는, 장국영의 출연작 베스트 10을 연대기 순으로 선정해 간략하게 리뷰를 곁들이기도 했다. (5점 만점 기준) 평점을 겸해 참고삼아 밝히면 그 10편은, < 영웅본색 >(3점)을 필두로 < 천년유혼 >(3.5점), < 연지구 >(관금붕, 5점), < 아비정전 >(왕가위, 5점), < 백발마녀전 >(3.5점), < 패왕별희 >(첸 카이거, 4.5점), < 금지옥엽 >(3.5점), < 동사서독 >(왕가위, 4점), < 해피 투게더 >(왕가위, 4.5점), < 색정남녀 >(이동승, 3점)이다. 이 목록은 다시 선정한다 해도 거의 변할 게 없다. 딱 한 편 < 색정남녀 >를 다시 본 < 이도공간 >으로 바꾸는 정도랄까. 이미 말했듯 유작으로서 그 함의가 한층 더 각별하게 다가서기 때문이다.

그때로부터 19년이 흐른 현재, 장국영에 대한 내 진단‧평가는 변한 게 전혀 없다. 최근 넷플릭스 OTT 6부작 드라마 < 지옥 >(연상호)의 유아인 연기를 설명할 언어를 못 찾겠다고 했고, 여전히 그 당혹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도, 그렇다. 고로 장국영을 향한 내 사랑은, “1999년도에 개설 이래 꾸준히 장국영을 기억하고 그리는 활동을 이어 오고 있는 국내 대표 팬클럽”으로, “홍콩, 중국 팬클럽과의 교류를 통해 매년 홍콩 현지 추모 행사에 참여 중이며, 국내 장국영 관련 방송, 신문, 영화제, 전시회 등의 행사에 참여하는 등 장국영이 여전히 사랑받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활동 중”인 ‘장국영사랑’의 팬들 못잖을 거라고 감히 자부한다, 한들 핀잔을 들을 것 같지는 않다. 장국영 열혈 팬들이 상기 주간지에 실렸던 내 원고를 1주기를 기념해 맞춰 출간한 the One and Only……Leslie Cheung에 영문으로 번역(A Great Actor Makes Me Realize the Virtue of Symbiosis)해 실었으니, 왜 안 그렇겠는가.

그렇다면 장국영 그는, 죽었으되 사라지지 않고 팬들과 더불어 영원히 살아가고 있는 거 아닐까. 그 팬 가운데 나 역시 포함돼 있음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