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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IZM 에디터들이 소개하는 ‘내 인생의 사운드트랙’

여름은 시끌벅적한 블록버스터의 계절이지만 2020년 여름은 조용하고 고요하게 지나갔다. 그놈의 코로나 19 바이러스 때문에 야외활동과 모임에 제약을 받는 현재의 팬데믹 상황을 슬기롭게 보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집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다. 다시 보고 싶은 영화나 아쉽게 못 보고 지나간 영화도 시간을 내서 본다면 일상이 지루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은 좋아하는 영화나 노래, 음식 중에서 하나만 뽑아달라는 것이다. 참으로 몰상식하고 잔인한 부탁이지만 동시에 행복한 고민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즘 필진에게 심리적 고통을 주기 위해 내 인생의 영화와 영화음악(오리지널 스코어)을 선정해서 공개한다. 그것도 딱 하나만. (소승근)

김도헌 – < 겨울왕국 > ‘For the first time in forever’ (2013) / < 겨울왕국 2 > ‘Some things never change’ (2019)

2014년 < 겨울왕국 >에 대한 첫 감상은 ‘그럭저럭 볼만하다’는 것이었다. 이후 < 겨울왕국 2 >까지 나는 이 ‘그럭저럭 볼만한’ 영화를 보러 대략 35번 정도 극장을 찾게 된다. 자막, 더빙, 아이맥스, 돌비 애트모스, 4DX, 싱어롱, ‘대관식’까지… 모든 가능한 상영 방식을 섭렵하고 태어나서 처음 ‘포토티켓’이라는 것도 모아봤다. 한정판 포스터를 얻기 위해 새벽 지하철을 타고, 딜럭스 버전 OST를 구하기 위해 해외 ‘직구’도 해봤다.

물론 본 영화를 또 보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언제나 이성보다 감성이 앞선다. 잠시 지루해하다가도 잠결의 안나가 “오늘은 대관식 날이야!”라 쾌활히 외치며 계단을 뛰어 내려가고, 녹지 않는 눈사람 올라프의 손을 잡고 “바람은 점점 쌀쌀해지고 우린 어른이 되지”라 노래하면 ‘얼어붙은 심장’이 어김없이 두근거린다. 사운드트랙과 OST 모두 버릴 곡이 없지만, 잠시 서울을 떠나 아렌델 왕국으로 들어가는 것만 같은 ’For the first time in forever’와 ‘Some things never change’를 추천해본다. 곡을 만든 로페즈 부부, 완벽한 더빙 버전을 선보인 성우분들께 감사, 또 감사!

박수진 – <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 (2017)

들려온다. ‘또 폼 나는 거 고르네…’라며 나를 다그치는 선배, 후배, 동료들의 잔소리들이. 하지만 어쩌랴. 고르고 골라 가장 엄격한 기준을 통과한 사운드 트랙이 바로 이 영화인 것을. 후보군에는 < 헤드윅 >을 비롯한 애니메이션 < 업 >, < 슈렉 >, < 캐롤 >, <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 등의 영화가 있었다. 나만의 힙한 선택을 하려 했으나 보이는 바와 같이 내 취향은 지극히 메이저다.

내가 만든 거름 막은 다음과 같다. 첫째, OST만을 따로 들으며 생긴 추억이 있다. 둘째, 요 근래 심정을 잘 대변해 준다. 셋째, 아 모르겠다. 사실 그냥 이 순간 제일 당기는 음악을 골랐다. 하나만 선정하라니 너무 잔인한 제안이다. 이 영화는 아름답고 기묘한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스토리만 보면 다소 진부할 수 있으나 주인공 엘라이자의 성적 욕망, 그의 사랑에 접근하는 방법이 내 기준에는 참 섬세했고 따뜻했다. 제목처럼 물이 작품에 큰 역할을 담당하는데 그 이음새를 신비한 음악이 잘 맺어준다. 잔잔한 물결처럼 울렁거리고 깊은 심연처럼 신비한 멜로디가 영화의 매력을 더욱 풍부하게 살렸다.

소승근 – < 스타워즈 > ‘Main title’ (1977)

‘A long time ago in a galaxy far, far away…’

이 자막이 사라지고 등장하는 존 윌리엄스의 웅장한 메인 테마는 내 머리와 심장을 두들기는 천둥소리였다. 처음부터 선율이 확실하면서 웅장하고 비장한 영화음악 스코어는 그 이전까진 경험하지 못했다. 마치 베토벤의 ‘합창’이나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 혹은 바그너의 고전음악을 듣는 느낌이었으니까. 그 전율이 얼마나 강했는지 이후에 제작된 < 스타워즈 > 시리즈를 거의 다 챙겨보았지만 < 스타워즈 >의 오프닝만큼 뇌리에 남는 장면은 없다.

손기호 – < 월-E > (2008)

쓰레기로 멸망한 지구를 700년이란 시간 동안 홀로 청소한 로봇이 사랑을 동경하는 이질적인 모습은 ‘말’이란 꾸밈없이 눈과 손짓으로만 표현되는 진실한 묘사와 더불어 오래된 노래가 간직한 순수로 설득력을 얻는다. 1969년 개봉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주연 < 헬로 돌리 >의 OST가 다수 사용되며, 오마주의 뜻을 강하게 밝힌 < 월-E >. 월-E가 이브에게 첫눈에 반하게 되고 따라다니며 마음을 드러낼 때 나온 루이 암스트롱의 ‘La vie en rose’ 등 매력적인 노래가 가득하며 우주에서 다시 만난 두 로봇이 소화기를 뿜으며 춤을 추는 장면에 등장하는 ‘Define dancing’은 보편적인 감정이 주는 긍정적 변수에 대해 고민하게 했다.

토마스 뉴먼 아래 배열된 음악적 연출은 부족한 언어에 대한 여백을 메우며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에 낭만을 불어넣었고, 대화라곤 이름을 부르는 게 전부인 고철덩이에 애정을 느끼게 했다. 회색빛 가득한 지구에서 유일하게 따뜻한 불빛을 내는 월-E의 공간처럼 개봉한 지 10년이 넘은 지금도 < 월-E >의 사운드트랙은 내게 위로를 전달한다.

신현태 – < 헤드윅 > (2001)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날렵한 몸매의 주인공은 성전환 수술에 실패한 분노를 노래한다. 어느 곳에도 소속되기 어려운 캐릭터 헤드윅은 자신의 밴드 앵그리 인치(Angry Inch)와 투어를 떠난다. 말이 투어지 작은 카페나 음식점을 전전하는 개업 선전 내레이터나 다름없는 신세다. 몇몇 손님들은 그들의 공연이 불쾌한 듯 쳐다보고, 경멸의 언어로 ‘Faggot!’이라 외치며 난장판을 만들기도 한다. 작품의 전개 속에는 사랑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이 영화는 분노로 점철된다.

헤드윅은 자신의 기구한 삶을 펑크록으로 폭발해낸다. 성 정체성에 대한 소수자의 온당한 외침을 가감 없이 끌어와 뮤지컬 영화로 구성했고, 존 카메론 미첼(John Cameron Mitchell)의 음악은 이야기와 완벽한 합을 이룬다. 극의 전개도 뛰어날 뿐만 아니라 캐릭터에 맞는 화려한 의상, 아기자기한 애니메이팅은 감상의 덤이다. 그 쾌감은 오롯이 관객의 뇌리를 관통했다. 그녀의 외침은 여전히 나에게 강한 울림으로 남아있다. < 헤드윅 >이 뿜어내는 불량함과 분노, 저항은 펑크록이 가지는 미학을 고스란히 담아낸 사운드트랙이다.

이홍현 – < 인사이드 르윈 > (2013)

20살에 꿈을 이루러 서울에 올라왔다. 지방에 가족들을 두고 홀로. 처음 왔을 때는 내가 대단한 일을 해낼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약했고 세상은 친절하지 않았다.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준비되지 않은 도전은 객기였다. 여기저기 부서지고 망가져 외롭고 슬펐다. 부산한 도시에 나 혼자 떠 있는 기분. 미치도록 보고 싶은 가족. 반성과 뉘우침으로 얼룩진 나날이었다.

< 인사이드 르윈 >을 봤다. 지독하리만큼 조용한 영화였지만 왜 마음이 움직였는지 나는 알았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한심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저 안에 나보다 더 못난 인간이 있다는 게 위안이었다. 추운 겨울 기타 한 대를 매고 뉴욕 시내를 떠돌던 르윈 데이비스. 난생처음 보는 그에게 친구 같은 연민을 느꼈다. 영화의 잔향에 주제가를 몇 달 내내 들었다. ‘Fare thee well (Dink’s song)’을 들으며 오후 도심을, ’Hang me, oh hang me’를 들으며 새벽 꿈속을 걸었다. 포크는 재미없는 음악이라며 줄곧 멀리해오던 내가 이 음반 이후 포크를 알게 됐다.

임동엽 – < 인셉션 > ‘Time’ (2010)

영화 음악가라면 존 윌리엄스밖에 몰랐던 나를 구제해준 아저씨와 노래가 있었다. 꿈으로 생각을 조종하는 영화 < 인셉션 >의 음악 감독인 한스 짐머 그 주인공이다. 대학 시절 친구가 카피하던 것을 듣고는 단순하고도 묵직한 매력에 반했다. 그날 이후 테마 중심의 클래식 스타일을 펼치던 존 윌리엄스는 나의 영화 음악 플레이리스트에서 웅장하고도 강렬한 곡풍(曲風)의 한스 짐머에게 왕위를 내주었다.

영화처럼 ‘눈물’이 기준이었다면 < Celebrating John Williams : 존 윌리엄스 영화음악 콘서트 >에서 실제로 질질 짜며 들었던 ‘Hedwig’s theme’을 뽑았을 것이다. 그러나 음악은 가장 충격받은 사건으로 정했다. < 다크 나이트 >의 ‘Why so serious?’, < 다크 나이트 라이즈 >의 ‘Why do we fall’, < 인셉션 >의 ‘Mombasa’도 좋지만 내 마음속 영원한 1등은 ‘Time’이다. 내한 공연 못 본 한을 이 글로 풀어본다.

임선희 – < 록키 호러 픽쳐 쇼 > (1975)

고등학교 3학년 수능이 끝난 후 인생에서 가장 무료한 시기를 보내던 도중, 영화 사이트를 뒤적이다 한 포스터에 눈길이 머물렀다. 피 묻은 글씨체 그리고 검은 배경과 대비되는 새빨간 입술. 홀린 듯이 클릭한 그 짧은 순간은 지금도 생생하다. 70년대 영화라고 믿기 어려운 성 혁명적인 캐릭터와 이렇다 할 게 없는 난해한 스토리 라인도 너무나 취향 저격이었으나 결국 이 글을 쓰게 된 결정적 이유는 음악이다.

펑크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차츰 사그라들던 글램 록을 숭앙하는 스코어답게 미친 듯이 강렬하고 자극적이다. 아무 생각 없이 춤추며 즐기는 ‘The time warp’, 성(性)의 경계를 허물어 버리는 ‘Sweet transvestite’, 기존의 질서에 대한 도전을 과감히 드러내는 ‘Rose tint my world’와 ‘Don’t dream it, be it’. 모두 처음부터 끝까지 혼을 쏙 빼놓는 마약 여행이다. 세상이 내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고, 우울감이 나를 집어 삼켜버린 날이면 < 록키 호러 픽쳐 쇼 > OST와 함께 자유로운 쾌락의 공간으로 잠시 도피하곤 한다.

장준환 – < 블레이드 러너 > ‘Blade runner (end title)’ (1982)

아날로그 신시사이저가 유행하던 1980년대, 전자음을 통해 여러 실험을 펼친 뮤지션으로 ‘Chariots of fire’로 유명한 그리스 출신의 음악가 반젤리스(Vangelis)를 빼놓을 수 없을 테다. 그런 그의 선지적 작법을 엿볼 수 있는 곳을 뽑으라면 단연 영화 < 블레이드 러너 >(1982)의 사운드트랙. 리들리 스콧의 연출이 영화에 누아르적 사이버펑크 분위기를 담아냈다면, 이를 극대화한 것은 반젤리스의 미래적이고 몽환적인 사운드 프로듀싱이었다.

의미심장한 해리슨 포드의 뒷모습이 지나가고 이 곡이 크레디트 위로 등장하는 순간의 감정을 이루 말할 수 있을까. 긴박한 전자음과 오케스트라의 울림은 여전히 재생할 때마다 나의 심장을 뛰게 만든다. 엄밀히 말하자면 앨범에 삽입된 다른 곡 ‘Tears in rain’을 뽑고 싶었지만, 명대사가 그대로 포함되어 있어 자칫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눈물을 머금고 보류. 아, 영화를 본 이들은 이해해 주시길.

정민재 – < 친절한 금자씨 > (2005)

< 친절한 금자씨 >는 충격이었다. 스토리, 캐릭터, 연기, 촬영, 미술 모든 게 놀라웠다. 그중 제일은 음악이었다. 명대사 “너나 잘하세요.” 후에 따라 나오는 메인 테마곡을 비롯해 한 곡 한 곡이 전부 강렬했다. 왠지 불길하고도 신비로운 멜로디, 순간 간담이 서늘해지는 다이내믹에 흠뻑 빠져들었다. 음악과 화면의 앙상블은 마치 한 편의 뮤지컬을 보는 듯했다. 그중 상당수가 비발디, 파가니니의 곡이었음을 알았을 때 그 기분이란. 내게 < 친절한 금자씨 >는 음악 영화가 아님에도 음악으로 기억되는 특이한 영화다.

정연경 – < 기쿠지로의 여름 > (1999)

여름 냄새를 좋아한다. 매미 울음소리, 더위, 설렘, 초록색 따위의 이미지를 사랑한다. 그러니 여름을 가장 여름답게 보낸 기쿠지로와 마사오의 여정 그리고 그들의 여정을 가장 여름답게 그린 영화의 오리지널 스코어야말로 내 인생 최고의 ‘여름’일 수밖에.

히사이시 조가 작곡한 오리지널 스코어의 각 사운드트랙은 다시 메인 테마 ‘Summer’로 환원된다. 스코어의 의미는 간단하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는 것. 불량배 아저씨 기쿠지로가 제법 듬직한(?) 어른이 되었듯 마사오 역시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날을 보내며 그렇게 성장할 테다. 나이를 초월해 서로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어주었던 1999년의 여름. 마사오와 기쿠지로는 일어나는 방법을 배웠다.

정효범 – < 피아니스트의 전설 > (1998)

음악 엔니오 모리꼬네, 감독 쥬세페 토르나토레. 조합만 보고 벌써 심장이 뛰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를 꼭 보기를 바란다. < 피아니스트의 전설 >은 여객선 버지니아 호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며 살아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곳에서 피아노는 주인공의 감정을 탁월하게 표현해내는 장치로 등장한다. 이제는 피아노 영화에서 빠지면 왠지 섭섭한 배틀 신도 있어, 화려한 연주를 들을 수 있다.

주인공이 처음으로 사랑하게 된 여성을 보며 연주한 ‘Playing love’는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고, (정확히는 엔니오 모리꼬네 음악이 아니지만) 폭풍우 속에서 피아노 고정 장치를 풀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연주하는 ‘Magic waltz’도 잊지 못할 곡이다. 한 사람의 인생을 음악으로 풀어냈기에 그 여운이 쉽게 사라지질 않는다.

조지현 – < 미드나잇 인 파리 > ‘Si tu vois ma mère’ (2011)

음악 공부를 할 때는 재즈를 참 많이도 들었다. 오스카 피터슨(Oscar Peterson), 빌 에반스(Bill Evans)부터 시작해서 브래드 멜다우(Brad Mehldau)와 허비 핸콕(Herbie Hancock)까지. 피아니스트들의 음악을 주로 들었다. 좋아서 들은 것보다도 피아노 연주를 잘하기 위한 주입식 감상에 가까웠다. 재즈를 처음 접했을 때의 짜릿함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닥치는 대로 재즈를 욱여넣던 입시생 시절을 지나 대학생이 되었다. 수업이 없던 날 < 미드나잇 인 파리 >를 보았다. 파리의 로맨틱한 광경이 담긴 첫 장면 속 ‘Si tu vois ma mère’에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여유로운 템포의 낭만적인 색소폰 연주! 아, 이 음악은 주의 깊게 들어야 할 피아노 연주도 없다. 하물며 과거로의 시간여행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처럼 느껴졌다. 언젠간 파리에 간다면 이 곡을 들으며 비 내리는 센강을 걸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촌스럽다 놀려도 별수 없다. 그 순간만큼은 나도 헤밍웨이와 차를 마시고, 콜 포터의 노래를 바로 옆에서 듣고 있을지도 모를 테니!

한동윤 – < 델타 포스 > (1986)

총과 미사일이 나가는 오토바이로 악당들을 처치하는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 시퀀스들에 흐르던 앨런 실베스트리의 테마곡은 가슴속에 더욱 깊게 파고들었다. 공중으로 떠오르는 기분을 들게 하는 키보드 연주, 선명하게 울리는 전자드럼 소리, 분위기가 고조된 후 나오는 신스 브라스, 모든 게 근사했다. 나에게 < 델타 포스 >의 테마곡은 < 비버리 힐스 캅 >의 ‘Axel F’를 능가하는 최고의 신스팝 스코어였다. 척 노리스 아저씨는 늙었지만 테마곡은 여전히 쌩쌩하다.

황선업 – < 무지개 여신 > ‘The rainbow song’ (2006)

토모야가 아오이의 유품으로 남겨진 핸드폰의 전원을 끄는 순간 영화는 끝을 맺는다. 남은 시간엔 단순히 스태프 롤과 함께 이 노래가 흐를 뿐. 하지만 이 영화를 감명 깊게 본 이라면, 그 여운으로 하여금 노랫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쉽사리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짝사랑으로 힘겨워한 여주인공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듯한 이 노래는 사실 1980년대부터 활약해 온 싱어송라이터 타네 토모코가 1990년에 발표한 노래. 그럼에도 마치 이 영화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듯 정서적 측면에서 높은 싱크로율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사고로 죽은 후에야 자신에 대한 사랑을 뒤늦게 확인하고 슬퍼하는 러브 스토리로, 이와이 슌지가 제작, 기획, 각본을 맡고 이치하라 하야토, 우에노 쥬리, 아오이 유우 등이 참여한 덕분에 한국에서도 나름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던 영화다. 조금은 상투적일지언정, 잔잔하게 스며들어 잊히지 않는 여운을 남기는 작품의 감정선은 많은 이들이 가진 감수성이라는 풀에 촉촉한 수분을 제공해주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이 노래가 있었기 완성되었다. 음악, 그리고 닫는 곡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만드는 명 OST.

황인호 – < 베이비 드라이버 > (2017)

영화 전체가 감독의 음악 취향을 자랑하기 위한 뮤직비디오다. 선곡과 연출의 승리다.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 영화를 보면서 ‘아, 이 노래!’ 싶었던 순간은 배리 화이트(Barry White)의 ‘Never, never gonna give ya up’이 나왔던 때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어떤 기성곡이나, 박자에 딱딱 맞춘 편집과 연출보다도 기억에 남는 것은 아마추어 프로듀서인 주인공 베이비가 스스로 다른 사람들의 대사를 리믹스해서 곡을 만드는 장면이다. 헤드폰 속 자신만의 세계에 사는 그의 내성적인 자아를 가장 온전하게 담아냈다.

이때 흘러나오는 ‘Was he slow?’는, 실제로는 DJ 키드 코알라(Kid Koala)가 그 장면을 위해 만든 오리지널 스코어다. 마그네틱 카드로 스크래치를 하고, 펜으로 미디 드럼을 치는 베드룸 프로듀서의 모습에는 일종의 낭만이 있다. 창작의 고뇌를 그림에서 싹 지워버렸지만, 애초에 그게 영화의 주제는 아니니까. 겉보기에 찌질한 주인공이 만들어낸 자신만의 ‘멋’에 함께 취할 수 있었던 1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