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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37 전석환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서른일곱 번째 주인공은 1960-70년대 ‘다함께 노래 부르기’의 주역 전석환이다.

건전가요 보급운동, 싱어롱-Y, 레크리에이션, 캠프 송, 뮤직 테라피(Music Therapy) 등의 용어가 모두 그로부터 비롯되었다. 1960-70년대 ‘통기타의 전령’, 그와 함께 확산된 ‘포크송의 개척자’도 바로 그였다.

TV는 물론 라디오조차 대중적 보급이 이루어지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삼천여 곡에 달하는 레퍼토리를 보유한 전석환은 전혀 굴하지 않았다. 통기타 하나 들쳐메고 학교와 일터를 비롯한 일상 곳곳을 돌아다녔고, 대한민국 전체가 아름다운 멜로디로 물들기 시작했다. ‘다함께 노래 부르기’인 싱어롱(Sing Along)부터 ‘노래에 따라 생활이 움직인다’라는 개념의 뮤직 테라피까지, 음악의 순수한 힘을 강조했던 그가 범대중적 열풍의 중심에 섰던 것은 단순 우연이 아니었다.

최근 어린 시절 적을 두었던 인천으로 돌아와 음악 교육을 이어가고 있는 그를 만났다. 아흔의 춘추에도 그 의지와 열정은 여전히 뜨거웠다. 부정이 아닌 긍정, 겸손을 넘어선 겸공을 저지할 방법은 없었다. 지치지 않는 화술로 꽉 채운 3시간의 인터뷰, 한 세기에 가까운 한국 음악의 근현대사 그리고 전석환의 일대기를 체감해 보라.

연배가 무색할 정도로 발음이 정확하신데요, 첫 방송은 어떤 프로그램이었는지 기억하시지요.
방송 출연을 많이 한 관계로 아직도 몸이 그 시절을 기억하는 듯해서 그런 것 같다. 방송은 가장 먼저 했던 게 1964년 라디오 프로 < 삼천만의 합창 >이었고, TV에선 1965년 < 노래의 메아리 >가 처음이었다.

고향 황해도에서 인천으로 건너오게 된 계기는요.
황해도 벽성군 소재의 섬 용매도가 고향인데, 고립된 지역임에도 교회가 들어와 있어 문물을 빠르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동네도 잘 살았던 편이라 중학교부터는 섬을 떠나 서울에 있는 한성중학교로 갔다. 일종의 유학이었다. 그러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해 참전하게 됐고, 휴전이 조금씩 언급되던 1952년에 집안 소유의 배를 타고 가족 모두 인천으로 떠나오게 됐다.

육군사관학교 입학을 위한 시험도 치렀는데 배다리에서 우연히 재회한 국민학교 선배가 전쟁은 곧 끝나니까 공부를 택하라고 권했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선택지였지만 그게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됐다.

인천의 첫인상은 어땠는지요.
서울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도시 수준은 인천이 상대적으로 좋지 못했다. 특히 항구 노동자들이 많아서 거칠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어릴 적에 인천의 주파수와 잘 맞지 않았는데 그걸 달래 준 곳이 교회였다.

유독 교회와 연이 깊어 보이는데요.
대한민국은 민주 국가, 자유 국가를 논하기 전에 종교 국가가 됐다, 독립운동 때만 봐도 반 이상이 기독교인이었고 그들이 많은 사람을 이끌었다. 내가 살던 용매도는 북방 선교의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종교 생활’이 아닌 ‘생활 종교’를 추구했다. 내 음악인생에서 중요한 ‘생활 음악’, 즉 뮤직 테라피도 결국 다 여기서 파생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다함께 노래 부르기’ 이른바 싱어롱(Sing Along)은 우리의 유행가 풍토를 바꾸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어느 나라이든 민요야말로 가장 깊은 역사를 품고 있다. 아메리칸 포크 뮤직의 진수인 벌 아이브스(Burl Ives)는 물론 그를 본떠 나온 밥 딜런까지 전부 대대로 내려온 전승 가요였다. 목청이 좋아야 하거나 폼을 잡아야 하지 않았다. 쉽게 말하면 노말(normal) 사운드다. 민요라 하면 보통 한 옥타브 안에서 5음만을 가지고 오르내리는 경우가 많아 따라 부르기 쉬웠다. 독창, 중창, 합창을 넘어 제창에 가까웠다. 그런데 음악 대학이 들어서면서 테너, 소프라노라는 개념이 생겼고, 전문적인 7음 음계가 교과서에 실리기 시작하며 함께 노래하기 어려워졌다. 이를 타파하고자 싱어롱을 들여온 것이다.

미국의 싱어롱을 보급해야겠다는 생각은 어떤 환경의 산물이었나요.
역시 교회의 영향이다. 연세대학교 종교음악과 1기생으로 입학해 작곡 공부를 할 때 박태준 박사님께서 가르쳐 주신 서양 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독창, 중창, 합창이 전부 가능하면 그야말로 좋은 거지만 그건 욕심이었다. 그러던 중 ‘I, My, Me’ 그리고 ‘We, Our, Us’의 개념이 머리를 스쳐 가면서 성가와 찬송가가 대응됐다. 내가 추구하는 건 비교적 대중적인 찬송가에 가까웠다.

전석환의 동의어나 다름없는 ‘싱어롱-Y’의 Y는 무엇을 상징하는지요.
YMCA의 Y, 당신(You)의 Y, 그리고 젊음(Youth)의 Y였다.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가요를 꿈꾸게 된 결정적 동기는 무엇이었나요.
부끄러운 얘기이긴 하지만 아버지의 영향이 크다. 아버지께서 인자하고 너그러우신 편인데 노래만 불렀다 하면 꼭 얼굴을 찡그리셨다. 눈을 감고 흐느끼고 어떨 땐 핏대를 올리기도 하셨다. 어릴 때부터 그게 너무 싫었는데 그렇게 흘러가던 노래, 당시의 유행가가 바로 일본의 엔카였다.

훗날 NHK가 연출의 연(演)자로 바꾸긴 했지만 엔카(연가)는 원래 연애의 연(戀)자를 썼던 사랑 노래였다. 술집에서 주로 불렀던 노래이기도 한데 사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에 나온 노래라고 한다. 그러니 당연히 한이 많을 수밖에 없다. 집단의식이 강한 조선인을 와해하기 위해 일제가 심어둔 일종의 염세 사상이라 본다.

그리고 예전에 재일교포들에게 아리랑을 가르치는데 어떤 분이 “왜 십 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나냐?”고 물어보면서 가사를 ‘십 리만 걸어도 행복해요’로 하면 안 되느냐고 했다. 뭐만 하면 너무 울고 짜는 느낌이라 창피하다는 얘기였다. 그 소리를 듣고 완전 쇼크에 빠졌다.

음악적으로 밝음, 명랑함을 추구할 수 있으려면, 실제적 경험도 작용했을 것 같은데요.
미8군에서의 무대 경험이 큰 자산으로 남았다. 1958년도부터 조선호텔 미 장교 클럽에서 전자 오르간 연주를 맡았는데 영어로 대화도 잘 되고 하다 보니 그들의 입맛에 맞춰 연주할 기회가 잦았다. 뮤지컬은 웬만하면 다 통했는데 대체로 시끄럽거나 느린 음악을 싫어했다. 어릴 적에 배워 익숙했던 ‘Old folks at home-Swanee river(스와니 강물)’나 ‘Old Black Joe(올드 블랙 조)’ 같은 노래가 그들의 슬픈 감정을 담은 걸 보고 학교 교과서의 정확성, 미래 지향성이 없다는 걸 깨달았고, 우리와 음악 세계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걸 느꼈다.

그런 중에도 무난하고 경쾌한 리듬의 노래 그러니까 ‘노말’한 곡들 예를 들면 벌 아이브스의 ‘Home on the range(언덕 위의 집)’ 같은 곡은 항상 반응이 좋았다. 소위 말해 노래로부터 플레져(Pleasure)를 얻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노래로 이 즐거움을 얻고자 해야지 신경 쓰고 심각해질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확실히 그때부터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1970년대 당시 음악적 존재감이 컸던 선생님께서 긍정을 강조하셨기 때문인지 예를 들어 ‘아침이슬’처럼 금지곡에 영향을 미쳤다는 시각도 존재하는데요.
실상 당대 금지곡과는 전혀 접점이 없었다. 방송에서 건전가요만 부르고 바른말을 하는 이미지로 나오다 보니 소문이 이상하게 와전되면서 이런저런 오해가 생긴 것이다. ‘아침 이슬’ 가사 속 ‘묘지’를 ‘대지’로 교체하면 어떻겠냐는 의견도 금지곡 처분을 받고 나서 꺼낸 얘기다. 실제로 김민기와 만났을 때 내가 가사를 바꿔 불러도 되겠냐고 물었더니 괜찮다고 했었다.

찢어지게 가난했고 힘든 삶을 살았으니 사고 방식이 나처럼 낙관적일 수만은 없는 환경이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여러분 세대에서는 우리 시대의 과오를 그대로 답습하지 말고 융합과 화합의 덕목을 길렀으면 한다.

스스로가 인정하는 전석환의 가장 큰 공헌은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공이라고 할 건 없다. 다만 음악 산업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음악계가 세계적으로 커졌는데 그 옛날부터 국제화, 글로벌을 꿈꿨던 게 바로 나다. 과거 경제적 빈곤기에 기본적인 의식주도 해결이 안 되던 나라였으니 노래뿐만 아니라 우리 문화 전체를 우습게 보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아 다행이다.

최근 K팝이 글로벌 무대에서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싱어롱의 개념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갈등이 오는 건 당연하다. 그럼에도 고마운 건 국경, 언어, 문화와 상관없이 세계인과 소통할 수 있는 공통 분모가 생겼다는 사실이다. 순수 음악적 요소만 아니라 소위 말하는 율동이나 동작, 퍼포먼스가 그 다리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나왔을 적에 전 세계가 흔들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건전가요 보급에도 앞장섰지만 통기타 붐의 시작을 알린 선구자이시기도 합니다.
2015년 남이섬 노래박물관에서 열린 < 대한민국 통기타음악 50년사 & 방송DJ 50년사 특별전 >에 초대된 적이 있다. 함께 자리했던 ‘통기타 군단의 교장선생님’ 이백천에게 “내가 왜 통기타의 선구자냐”고 했더니 나 때문에 우리나라에 대학 가요제가 생겨났다고 하더라. 당시에 세고비아 기타 재고가 없어서 못 팔 만큼 통기타 인기가 상당했던 건 사실이다.

전국의 학교, 음악감상실, 심지어 한강의 모래사장을 찾아 사람들에게 합창 지도에 나섰던 시절, 한해 15만 명이 참여하는 센세이션이 야기되었다는 엄청난 인파를 몰고 다녔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은 뭐였나요.
부산 해운대에서 약 30만 명에 달하는 인원이 몰린 적이 있는데 해수욕장 전체가 그야말로 인파로 덮였다. 처음엔 해수욕을 즐기던 사람들만 모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아지니까 깔려 있던 파라솔과 텐트를 치워야 하는 사태까지 갔다. 여러모로 미안한 마음이 컸는데 음악적 보상으로 ‘노을’이란 곡을 작곡했다.

창작 가요도 많이 썼지만 해외 각국의 수많은 민요를 번안해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전석환 번안가요 베스트는요.
아무래도 ‘그리운 고향’이 아닐까. ‘Sloop John B’를 번안한 곡으로, 오래도록 바다에 나와 있는 뱃사람이 고향의 사계절을 그리워하는 내용을 담았다. ‘날이 밝으면 멀리 떠날/ 사랑하는 님과 함께..’하는 ‘석별의 정’도 널리 알려졌고… 창작곡으로는 ‘정든 그 노래’와 ‘앵카-송(Anchor song)’, ‘좋아졌네’를 고를 수 있겠다.

지금 시대에 다시 울려 퍼졌으면 하는 노래는 없는지요.
아버지께 배웠던 노래 ‘부모은공’을 추천한다. 길지 않고 무엇보다 가사가 간단해서 나이 든 노인부터 어린아이까지 누구나 따라 부르기 쉬운 곡이다. 율동과 함께 배우기 딱 좋다.

인천시민들에게 기쁘게도 작년 5월 다시 인천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지금은 인천과 잘 맞는지 궁금합니다.
작년 5월에 자리를 잡으면서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 각계 인사들과 대화를 나눴는데 아직도 조금 거친 면이 남아있더라. 작년에 송년회만 12군데 참석했는데 쭉 돌고 나니까 비로소 인천의 주파수가 잡히기 시작했다.

다시 터를 잡은 인천에서 현재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신가요.
우리는 예술적 음악적 기록이 많이 남기지 못했다. 올해 안으로 인천의 저명인사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같이 노래를 만들고 녹음도 진행할 계획이다. 이젠 창작 의욕만 있으면 얼마든지 팀을 이뤄 무언가를 만들 수 있으니 그 창의력과 의지를 발휘해 다양한 방면으로 소개하려 한다.

진행 : 임진모, 염동교, 정다열, 신하영
정리 : 정다열, 임진모
사진 : 신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