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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승근의 하나씩 하나씩 Feature

돌이킬 수 없는 꼰대 필자가 좋아하는 2010년대 케이팝 노래들

우리나라 가수들의 노래와 앨범이 빌보드 싱글차트와 앨범차트를 제 집 드나들 듯 진입하는 현재의 상황은 1980년대 초반부터 팝송을 들어오고 빌보드 차트를 신주단지 모시듯 절대적으로 생각해온 저에겐 정말 감격적인 일입니다. 마이클 잭슨과 마돈나, 프린스, 휘트니 휴스턴 같은 세계적인 스타들이 휩쓸던 그 인기차트를 대한민국 가수가 접수하다니. 2000년을 전후한 시기에 김범수의 ‘하루’가 빌보드 서브차트에 오른 것과 2009년에 원더걸스의 ‘Nobody’가 빌보드 싱글차트 76위에 올랐을 때만 해도 ‘와! 이런 날도 오는구나’했는데 지금은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 갓세븐, NCT, 트와이스, 몬스타 엑스, 세븐틴 등 많은 가수들이 빌보드를 < 가요 탑 텐 >으로 만들고 있네요.

사실 대부분의 팝 마니아는 가요를 무시하고 잘 듣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가요가 외국 팝을 받아들여 토착화된 노래고 늘 해외의 음악의 트렌드를 쫒아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팝송을 들어야 뭔가 앞서가고 세련된 것처럼 보일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세계 사람들이 케이팝을 들어야 그런 대리만족을 느끼는 가 봅니다. 또 여기에 우리만의 것과 다른 나라들이 시도하지 않았던 독창적인 방식을 접목시켜 대중음악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개척하고 있죠. 이중에는 저 같은 팝 마니아 꼰대도 반하게 만든 케이팝 노래들이 있는데요. 그래서 이번 < 하나씩 하나씩 >에서는 저에게 케이팝의 매력을 알려준 소중한 노래들을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비스트 ‘Fiction’

저는 텔레비전 예능에 자주 출연했던 이기광과 양요섭 밖에 몰랐습니다. 심지어 용준형을 ‘용준이 형’으로 알 정도로 비스트에 대해 무지했죠. 그룹 이름 때문에 멤버들이 우락부락하고 건장한 짐승돌인 줄 알았지만 실제로 본 그들은 앳된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팀 명을 잘못 지었다고 생각했으나 이들의 무대를 보고 깨달았죠. 그룹 비스트는 짐승이 아니라 야수라는 걸. 제가 비스트의 노래 중에서 가장 애정을 갖고 있는 곡은 2011년에 발표한 ‘Fiction’인데요. 물론 ‘아름다운 밤이야’도 좋아했지만 그래도 손을 주머니에 넣고 춤을 추는 안무는 인상적이었고 높은 고음도 안정적으로 소화하는 보컬 능력도 나쁘지 않은 ‘Fiction’을 더 사랑했습니다. 아이돌 그룹은 가창력이 좋지 않다는 제 선입견에 금이 가게 만들어준 노래죠.

에프엑스 ‘피노키오’

기성세대는 샹송 가수 다니엘 비달의 ‘Pinocchio’를 기억하겠지만 저는 에프엑스의 ‘피노키오’입니다. 이 노래를 듣자마자 마치 팝송처럼 느꼈는데요. 알렉스 캔트렐, 제프 호프너, 드와이트 왓슨 그리고 우리나라의 프로듀서 히치하이커가 공동으로 이 노래를 만들었으니 제 생각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었죠. 그래서 팝송을 많이 듣는 제 귀에도 어필했던 것 같습니다. 레이디 가가가 부른 ‘Bad romance’의 안무를 참고한 ‘피노키오’의 앙증맞은 춤은 귀여웠구요. ‘피노키오’는 연서화 된 인더스트리얼과 상큼한 뉴웨이브 신스팝이 케이팝과 만났을 때 어떤 시너지 효과를 내는지를 증명한 고급스럽고 실험적인 곡입니다. 슬픔과 불안을 감추고 억지로 밝은 미소를 만들어서 노래 부르던 설리를 추모합니다.  

루나 ‘Free somebody’

루나는 에프엑스에서 다른 멤버에 비해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높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2016년에 솔로활동을 시작하자 저는 루나의 새로운 모습을 보고야 말았죠. 딥하우스를 기반으로 한 솔로 데뷔곡 ‘Free somebody’에서 루나는 연체동물처럼 유연한 댄스와 폭포 같은 가창력을 과시했는데요. 아쉽게도 그 이후의 후속곡이 없어서 지금까지는 단발의 성공으로 끝났지만 ‘Free somebody’는 2016년에 발표된 곡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노래였습니다.

방탄소년단 ‘봄날’

이 노래는 처음부터 끝까지 감동입니다. 전주만 들어도 가슴이 먹먹해지죠. 가사는 물론이고 뮤직비디오, 소리의 조율, 보컬의 어레인지, 녹음 그리고 후반부의 코러스까지 거의 모든 것이 벅찬 감정을 절정으로 끌어올립니다. 개인적으로 레너드 스키너드의 ‘Simple man’이나 피터 가브리엘의 ‘Solsbury hill’처럼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게 만드는 마음의 노래죠. 방탄소년단을 그저 잘 생긴 멤버들이 춤만 추는 보이밴드로만 생각했던 저에게 생각의 전환을 가져다 준 이 숭고하고, 아름답고, 슬픈 ‘봄날’은 대한민국의 대중가요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명곡 중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브레이브걸스의 ‘옛 생각’, ‘운전만 해’

2017년에 발표한 미니앨범 < Rollin’ >이 뜨지 못한 건 남사스런 음반표지도, 그 시기성도 아닙니다. 매너리즘에 빠진 방송국 사람들과 저처럼 음악 평론가랍시고 잘난 체하며 대중적인 댄스음악을 얕잡아 보는 집단의 무시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당시 무명에 재정이 넉넉하지 않은 중소기획사 소속인 브레이브걸스는 방송국과 음악 관계자 집단에 의한 직무유기의 희생양입니다. < Rollin’ > 앨범에는 모두 4곡이 수록되어 있는데요. 역주행 후 다시 주목을 받은 ‘하이힐’과 1980년대의 어반 알앤비 발라드 ‘서두르지 마’ 그리고 1980년대 프리스타일 풍의 ‘옛 생각’ 같은 양질의 노래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직무유기 평론가’ 중 한 명인 저도 뒤늦게 브레이브걸스의 노래를 다 들어봤는데요. 그 중에서도 ‘운전만 해’와 ‘옛 생각’이 제일 좋았습니다. 확실히 용감한 형제는 1980, 1990년대 팝송을 21세기 케이팝에 맞게 이식하는데 탁월한 수완을 보여주네요.

악동뮤지션의 ‘Dinosaur’

예전에 악동뮤지션에 대해 검색을 하다가 이수현의 보컬에 대한 글이 있는 블로그를 보게 됐습니다. 그 블로거는 이수현의 가창력을 극찬하면서 링크를 건 영상이 바로 ‘Dinosaur’였고 그때 이 노래를 처음 들었죠. 듣자마자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캘빈 해리스와 리아나가 함께 한 ’This is what you came for‘랑 비슷하네?’였지만 녹음 기술과 사운드 엔지니어링은 절대 밀리지 않았습니다. 2010년대 후반 전 세계적으로 붐을 이룬 딥하우스 스타일을 성공적으로 이식한 ‘Dinosaur’는 제가 느낀 첫 인상처럼 팝적인 곡이기 때문에 제가 더 좋아했던 것 같아요. 동생 이수현의 투명한 고음에 밀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이찬혁의 목소리도 이 곡에서만큼은 신선했답니다.  

마마무의 ‘넌 is 뭔들’

2016년에 이런 복고적이고 구닥다리 스타일로 인기를 얻었다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댄스팝의 바탕 위에 1970년대 미국의 소울과 디스코를 가미해 듣기 좋고 부담스럽지 않은 대중음악이 탄생했는데요. 마치 미국의 소울 보컬 그룹 라벨의 1975년도 빌보드 넘버원 ‘Lady marmalade’처럼 마마무는 이 곡을 자신만만하고 당차게 불렀습니다. 연약하고 예쁘게만 보이려는 기존 걸 그룹들과 달리 씩씩하고 당당한 마마무가 등장한 겁니다. ‘넌 is 뭔들’은 흑인의 자부심을 표현한 소울을 우리나라의 정서에 맞게 비교적 잘 이식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노래의 제목이 뭔 뜻인지 몰랐다가 후배한테 그 뜻을 듣고는 저도 ‘넌 is 뭔들’ 같은 남자가 되고 싶었지만….

티아라의 ‘러비 더비’

여타 걸 그룹에 비해 상대적으로 ‘뽕끼’ 많은 곡들을 자주 부른 티아라의 다른 노래들과 달리 ‘러비 더비’는 전형적인 미국의 댄스팝 스타일입니다. 신사동 호랭이의 대중적 감각이 뛰어나다는 걸 다시 한 번 증명한 노래라고 할 수 있는데요. 잘게 쪼갠 비트와 그 위의 멜로디 라인은 자유롭게 어울리고 그에 맞는 안무 역시 인상적이었죠. 당시 유행하던 셔플 댄스를 바탕으로 한 춤은 9년이 지난 지금 봐도 촌스럽지 않네요.  

위너의 ‘Really really’

트로피컬 사운드를 사용한 우리나라 노래 중에 단연 최고 중 하나라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흑백으로 처리한 뮤직비디오 영상도 멋졌고 네 멤버들의 스타일링도 뛰어났죠. 코드가 바뀌면서 ‘널 좋아해 Really x 4, 내 맘을 믿어줘 Really x 4’부터 쉴 새 없이 두들기며 비트를 좁쌀처럼 쪼개는 하이해트 소리는 곡의 숨은 매력 중 일부입니다. ‘보통 사람이 향유하는 음악이자 넓은 호소력을 갖는 음악’이라는 대중음악의 정의에 잘 어울리는 노래이자 강승윤도 춤을 잘 춘다는 걸 증명한 2010년대의 명곡 중 하나입니다.

오마이걸의 ‘돌핀’

“상큼하고 시원한 노래 같아.” ‘돌핀’에 대한 초등학생의 이 말은 정확한 것 같습니다. 신시사이저를 줄이고 리듬 기타를 중심으로 비트를 최대한 살려 미니멀리즘을 실행한 이 곡은 바다 위를 뛰어오르는 돌고래처럼 투명하고 가벼우며 시원했죠. 기존의 케이팝 곡들과 차별화에 성공한 오마이컬은 이 지점에서 한 단계 더 도약합니다. 기존의 여리고 귀여운 이미지에서 조금 더 성숙해졌고 음악도 10대와 20대 초반뿐만 아니라 30대까지도 커버할 수 있는 그룹이 됐으니까요. 그리고 2021년에 발표한 디스코 풍의 ‘Dun dun dance’로 기성세대의 입맛까지 확보했으니 그들의 성장 스토리는 현재까지도 진행 중에 있죠. ‘돌핀’은 이 돌이킬 수 없는 꼰대 필자를 살짝 설레게 했습니다.

아이유의 ‘Eight’

솔직히 말씀드리면 ‘잔소리’와 ‘좋은 날’이 인기를 얻으면서 아이유가 국민 여동생으로 등극했을 때도 저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후에도 아이유의 활발한 활동은 저는 매력을 느끼지 못했죠. 그러다가 제가 일하는 프로그램 앞에 하는 가요 프로그램에서 이 곡을 처음 듣고 작가분한테 가수와 제목을 물어봤습니다. 왜냐하면 전혀 아이유의 노래답지 않았다고 생각했거든요. 선율과 리듬은 볼빨간 사춘기를, 노래를 둘러싼 전반적인 사운드는 1980년대의 뉴웨이브와 펑크를 다시 화제의 중심으로 올려놓은 미국 밴드 에코스미스를 참고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에잇’의 매력 포인트는 가사와 음악의 조화입니다. 수필 보듯 그냥 읽으면 낯설고 생경하지만 선율과 리듬 위에서 노랫말은 잘 어울리면서 세련되고 그루브한 느낌을 유지합니다. 음악의 승리죠. 천하의 방탄소년단 멤버 슈가가 랩 피처링으로 참여했지만 ‘에잇’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아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