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ies
내 인생의 10곡 특집 Feature

라디오 PD들의 ‘내 인생의 음악 10곡’ – #5 김홍철 PD

내년 개설 20주년을 앞두고 이즘은 특집 기획의 일환으로 라디오 방송 프로듀서 20인의 ‘내 인생의 음악 10곡’ 편을 마련한다. 이즘 필자들과 독자들의 글을 공개하면서 이즘 편집진은 음악과 동의어라고 할 라디오 방송의 PD들이 갖는 미학적 시선과 경험을 들어보기로 의견을 모았다.

각 방송사의 라디오국에서 음악 프로를 관장하며 15년 이상의 이력을 가진 20인이 뽑은 ‘인생 곡 톱10’을 순차적으로 공개한다. 다섯번째 순서는 KBS 라디오 김홍철 프로듀서다.

시작하며..

임진모 선배님이 인생 열 곡을 달라고 하신다. 응? 인생? 그러고 보니 한 번도 내 인.생.을 제대로 돌아보지 않은 것 같다. 딱히 돌아볼 뭐가 없어서 그랬을 거다. 50대 중반의 나이이니 인생이란 단어가 그리 어색할 것도 없을 터인데 워낙 찌질한 삶을 살아온 터라 부담스럽긴 하다. 그저.. Everything happens to me의 가사처럼 좀 모질란 라디오PD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던 노래들을 인생시간 순으로 추려본다.

#충격

산울림 /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거야

충격이었다. 이게 뭐지? 무슨 노래가 이러냐? 1978년.. 중학교 2학년이었을 거다. 이 앨범은 대중가요의 이미지를 단박에 걷어 차버렸다. 기타 퍼즈음이 잔뜩 들어간 ‘아니 벌써’도 신기한 노래였지만 특히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는 묘한 중독성이 있었다. 뭔가 하기 싫은 듯.. 어설픈 듯.. 6분이 넘게 흥얼흥얼 읊조리는 김창완의 목소리는 무심한 가사(사랑 노래인지, 계절 노래인지,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와 어우러져 사춘기 소년의 마음을 뒤집어 놓았다. 이후로 나는 산울림의 신보를 손꼽아 기다리며 동네 판(LP)가게를 매일 들르는 ‘판가게 죽돌이’가 되었다. 한 마디 덧붙이자면.. 나는 둘째 김창훈의 베이스 연주를 참 좋아한다. 그의 베이스는 단단하고 리드미컬 하다. 산울림에게 특유의 록음악 색깔을 칠해 주었다.

벗님들 / 또 만났네

산울림이 주었던 충격 만큼은 아니지만 사춘기 소년의 마음속에 종을 울린 또 하난의 앨범은 벗님들 1집이다. 그 중에서도 ‘또 만났네’. 타이틀곡은 ‘그런 마음이었어’였지만 나는 이 곡이 더 좋았다. 시작부터 다짜고짜 들이대는 세련된 화음이라니. 가요의 화음이라면 아주 어릴적의 ‘봉봉사중창단’이나 ‘금과은’만 기억하던 당시의 나로서는 충격적인 음악이었다. 난생 처음듣는 경쾌한 화음이 뭔가 고급진 팝의 느낌을 주었던 것 같다. 게다가 이들의 음악은 나름 펑키(funky)하다. 산울림과는 다른 종류의 그루브가 있다. 이치현의 기타연주는 지금 들어도 일품이다. 앞으로 선뜻 나서지 않고 간질 간질 봄바람 같은 연주가 흥을 돋운다.

가사 내용도 중3 사춘기 소년의 맘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또 만났네 어제 본 그 아가씨. 미소짓네 주고받은 말 없어도. 사귀어보고 싶은 마음 하늘만 한데 왜 이렇게 말 못 하고 눈치만 보나..” 송창식의 ‘담배가게 아가씨’나 이상우의 ‘그녀를 만나는 곳 100미터 전’으로 이어지는 유쾌한 사랑 노래이다.

#설렘

올리비아 뉴튼 존(Olivia Newton-John) / Come on over

내 인생엔 두 분의 올리비아 누님이 계신다. Newton-John 누님과 하세(Olivia Hussey) 누님이 바로 그분들이시다. 아.. 두 분 만큼은 아니어도 실비(Sylvie Vartan) 누님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긴 하다.

각설하고.. 이 곡에는 감히 인생이란 단어를 붙여도 좋다. 팝음악사에 획을 긋지 않았어도.. 명반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어도.. 나에게는 인생음악이다. 55년 살아오면서 내게 가장 큰 설렘을 준 음악이니 그럴 만도 하지 않을까. 이유는? 없다. 말할 필요 없다. 그냥 두근두근 설렜고 무조건 최고였다. 자켓 사진 속의 푸른 물과 파란 눈동자.. 늦가을의 새벽 안개 같은 신비로운 목소리.. Come on over. 듣고 있으면 왈칵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노래였다. 같은 앨범의 Greenleaves, Blue eyes crying in the rain도 나를 한 없는 감상으로 이끌어 잠 못 이루게 하곤 했다. 이후로 나는 군 위문공연에서 여 가수의 무대위로 뛰쳐 올라가는 군바리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질풍노도

유라이아 힙(Uriah Heep) / July morning

1980년 고1 때였을 거다. 형이 모아 놓은 ‘빽판(해적판)’들 속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듣게 되었다. 당시에 친구들과 음악 얘기를 할 때면 ‘먹어주는 한 방’이 필요했는데 그건 바로 “니들 유라이어힙의 줄라이모닝이라고 들어는 봤냐?”였다. 맘껏 잘난 척 할 수 있게 해준 고마운 곡이다. 일단 10분이 넘는 길이로 먹고 들어간다. 도입부의 압도적인 키보드 사운드를 들려주면서 ‘어때? 니들과는 수준이 좀 다르지?‘하는 시선으로 그들을 여유있게 바라볼 수 있었다.

떠오르는 순간부터 강렬한 빛을 뿜어내는 7월의 태양과 같은 노래. 감히 클래식으로 치자면 Richard Strauss의 교향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일출‘ 도입부나 생상스의 오르간교향곡 4악장에 비견할 수 있다 하겠다(오바 아이가?). 아무튼 나는 Uriah Heep의 July Morning과 Look at yourself, Easy Living 등을 들으며 반항기 가득한 10대 후반의 에너지를 분출했던 것 같다.

#떨림

스탄 게츠 & 주앙 지우베르투(Stan Getz & João Gilberto) / Corcovado

연애할 때.. 차가 있고 없고는 많은 유의미한 차이를 만든다. 1990년의 여름밤.. 서울대공원 미술관 올라가는 길이었던가. 세워둔 차 밖은 캄캄했고 계기판의 불빛만 아른거렸다. 풀벌레 소리가 들렸고 차안은 조용했으며 꼴깍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야릇한 긴장감.. 뭔가 해야하는 순간이 아니던가.

그녀(그 때의 그녀는 지금의 나의 아내가 되었다)가 부스럭거리며 가방에서 뭘 꺼낸다. “이거 듣자. 이거 되게 좋아” 카세트테입이다. ’응? 뭐 이런건.. 나중에 들어도 되는데..‘ 내키지 않았지만 주섬주섬 카세트를 꽂았다. 철컥.. 윙~ 테입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Quiet nights and quiet star.. quiet chords from my guitar..” 서툰 영어 발음의 여성보컬이 차안을 가득 채우고.. 우리의 떨림을 달래주었다. 고요한 밤.. 고요한 별.. 내 기타의 고요한 울림. 내 인생의 사랑노래는 바로 그 순간의 Corcovado.

#가을.. 알싸함과 청명함

음악프로그램을 하는 라디오 PD에게 고마운게 몇 가지 있다. 시간대로는 밤이요 날씨로는 비이고 계절로는 가을이다. 한 마디로 음악이 ’들리는‘ 조건들이다. 다음 두 곡은 1993년 라디오PD가 된 후 초창기에 ’눈이 부시게‘ 높푸른 하늘의 가을 아침에 종종 선곡표에 올렸던 노래이다.

챕터 투(Chapter Two) / Only love can break your heart

눈이 시린다. 스웨덴 듀오 Chapter Two가 부른 이곡을 들으면 그런 느낌이 든다. 시리도록 아름답고 시리도록 슬픈 노래. Johan Norberg의 기타와 어우러지는 Nils Landgren의 트럼본과 목소리는 따뜻하지만 듣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북구의 사랑노래는 알싸한 가을하늘 만큼 퍼렇다.

이브 뒤떼이 & 엔조 엔조(Yves Duteil & Enzo Enzo) / Au Parc Monceau

몽소공원에서. 프랑스.. 빠리(파리가 아니라 빠리..라고 읽어줘야 느낌이 산다).. 그리고 몽소공원. 이름만으로도 낭만이고 사랑이다. 맑은 가을날의 햇살 속에 잔디밭을 뛰노는 아이들과 산책하는 어른들과 벤치의 연인들. 청명한 하늘을 닮은 엔조 엔조의 목소리와 편안한 햇살같은 이브 뒤떼이의 음색을 들으며 걷는 가을날의 몽소공원. 코로나가 끝나야 갈 수 있겠지.

#밤과 술.. 찌질남의 절대고독

쳇 베이커(Chet Baker) / Everything happens to me

남자는 여자에게 채였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래 난 원래 되는 일이 없었어. 골프 예약하면 비오고.. 친구 불러 파티하면 이웃이 시끄럽다고 항의하고.. 아 맞다! 나 홍역에도 걸린 적 있다구. 그리고 딱 한 번 사랑에 빠졌는데.. 이것도 채여버렸어 엉엉~.’.

좀 과장해서 살 붙이면 노래 내용이 이렇다. 머피의 법칙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고독한 찌질남의 넋두리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쳇 베이커의 달관한 듯 읊조리는 목소리로 부르니 심오한 인생이 느껴진다. 있어 보인다. 술 한 잔 먹고 밤에 들으면 울컥하고 올라온다. 쳇 베이커니까. 술 없이 쳇 베이커를 듣는다는건 너무 잔인한 일이다. 오늘 밤도 핑계 김에 한 잔!

그리고.. 이 노래를 들으면 임희구님의 시가 생각난다.

-소주 한 병이 공짜-

금주를 결심하고 나섰는데
눈앞에 보이는 것이
감자탕 드시면 소주 한 병 공짜란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
삶이 이렇게 난감해도 되는 것인가
날은 또 왜 이리 꾸물거리는가

(중략)

불혹의 뚝심이 이리도 무거워서야
나는 얕고 얕아서 금방 무너질 것이란 걸
저 감자탕 집이 이 세상이
훤히 날 꿰뚫게 보여줘야 한다
가자, 호락호락하게

#단순함에 대하여

시릴 에메 & 디에고 퍼규레도 (Cyrille Aimee & Diego Figueiredo) / Just the two of us

단순함, 미니멀리즘이 주목받는 시대이다. 그래서 하는 일이 1일1버. 하루에 하나씩 버린다. 옷도 버리고 책도 버리고 욕심도 버리고. 이렇게 단순한 삶을 추구하다 보면 사고는 오히려 깊어져서 무소유 같은 철학적 깨달음 비스무리한 것에라도 가까이 가야 하는데.. 나는 그냥 사고 자체가 단순해져 버렸다.

하루끼가 그랬던가? 중년 이후 두 가지 말만 기억하면 잘 살 수 있다고. 그건 “그래서 뭐?!” “다 그런거지 뭐” 이 두 가지다. 하루끼를 좋아하는 분들에게는 실례겠지만 사실 이게 하루끼가 말해서 위트있어 보이는 거지 “아 어쩌라고?!!” “배째!” 같은 중년의 단순 뻔뻔함 외에 다름 아니지 않나? 딱 내가 바라는 바다. 복잡한 건 개나 줘버리고 단순하게 살고 싶다.

음악도 그렇다. 예쁜 목소리에 악기 하나. 딱 좋다. Cyrille Aimee의 매력적인 보컬과 Figueiredo의 기타. 모자람이 없다. 뭐가 더 들어오면 이 맛이 아닐 것 같다. 감각적 색감의 자켓 사진까지 노래의 맛을 더해준다. Grover Washington Jr.와 Bill Withers의 명연주를 어디 근본도 없는 애들한테 갖다 대냐고 버럭하실 분들에게 한마디 하자면.. “그래서.. 뭐?!”

#시간에 대하여

닉 케이브 앤 더 배드 시즈(Nick Cave & Bad Seeds) / Into my arms

어머니는 현재를 사신다. 점심때 뵈었는데.. 저녁에 전화 드리면 “요즘 왜 이리 뜸하냐” 하신다. 식사 중에 바로 직전에 드신 음식을 기억하지 못하시고 “내가 언제 만두를 먹었다 그래?”하시며 역정을 내시기도 한다. 지금 어머니는 매 순간 현재만을 사신다. 그런데.. 내 어린 시절 얘기를 하면 정말 좋아하신다. 환하게 웃으시며 당시를 기억하신다. 어머니는.. 지금 과거의 한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때로 가고 싶으실까. 과거를 현재로 소환할 수 있으면 그 또한 현재가 된다. 아주 행복한.

Into my arms. 영화 에서 아들이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고향집을 방문하는 장면에 흐르는 음악이다. 아버지의 죽음과 Nick Cave의 심오하고 처절한 사랑노래. 인간은 시간과 죽음을 거스르지 못하나 사랑을 통해서 평화를 얻고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얘기일까. Into my arms, oh Lord, into my arms.

#마치며

마지막 곡은 비워놓고 싶었다. 내 인생의 진짜 마지막 순간에 채워 넣어야 할 곡이 무엇일지.. 아직은.. 모르기 때문이다.

■ 프로필

김홍철 | kimpd33@naver.com

여러 직장을 전전한 후 1993년 1월 KBS 라디오 PD로 입사했다.

<차태현의 FM인기가요>, <박수홍 박경림의 FM인기가요>, <안재욱 차태현의 미스터라디오>, <당신의 아침 박은영입니다> 등을 만들어 연출했고 ‘KBS Cool FM’의 어울리지 않는 관리자 노릇을 잠깐 할 때 <김승우 장항준의 미스터라디오>를 기획했다.

현재는 ‘KBS 클래식FM’에서 고전음악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