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마음대로 되는 자식이 아무도 없다고 하지만, 한국에서는 정치와 담을 쌓은 케이팝이 되려 미국 정치에 휘말리는 아이러니를 예측한 케이팝 기획자가 있을까. 케이팝 팬덤은 올해 6월 오클라호마 털사(Tulsa)에서 개최된 트럼프 대통령의 유세에서 백만 건이 가까이 이루어진 가짜 참석 신청의 배후가 자신들임을 주장했고, 그 이전에도 백인우월주의나 극우 이념에 관련된 해시태그를 케이팝 이미지와 영상으로 도배하는 등 정치적 목소리를 거침없이 내고 있다. 예상치 못한 전개지만 케이팝 팬덤과 정치의 결합은 이미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 연결고리를 들여다보면 앞으로 케이팝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단서도 찾을 수 있다.
케이팝의 세계적 인기에서 유념할 점은, 그 시작점이 주변부였다는 사실이다. 방탄소년단이 빌보드 차트 1, 2위를 한 번에 차지하는 나날이 있기 전에도 케이팝 팬들은 존재했으나, 이들은 멸시나 조롱, 혹은 무시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일종의 마니아 문화로 시작한 탓도 있겠지만, 문화의 생산자나 소비자들에 대한 편견도 분명하게 작용했다. 클래식 음악이나 커피, 와인처럼 소수가 몰입해서 소비하는 문화가 무조건 천대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케이팝의 ‘성공’이 완성하는 언더독 서사는 이런 배제의 역사에서 설득력을 얻고 팬들을 결집시킨다.
미국 케이팝 팬덤은 크게 보면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코스프레 같은 긱(geek)들의 문화와 그 뿌리를 공유한다. 단적인 예시로 케이콘(KCON)이 있다. 한국의 대중음악을 사랑하는 수만 명의 팬들이 로스앤젤레스나 뉴욕으로 몰려드는 이 축제는 미국 케이팝 팬덤의 주요 행사 중 하나다. 만화 팬들의 코믹콘(Comic-Con)이나 게임회사 블리자드의 블리즈컨(BlizzCon) 같은 박람회와 비슷한 양상이다. 한류는 서브컬쳐를 소비하는 사람들의 활동 영역에 들어와 있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는 게임과 만화, 케이팝 같은 서브컬쳐 커뮤니티의 큰 축이다. 생각해보면 케이팝 팬들이 트위터나 틱톡을 통해 활동하는 것은 한국 케이팝 팬덤의 특성을 떠나서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면 케이팝이 정치나 사회정의(social justice)와 어느 지점에서 교차하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케이팝을 논할 때 그 음악이 가진 소구력의 실체를 부정한 채 인기를 괴현상 보듯 하는 시선들이나, ‘진보 성향의 요즘 애들이 이상하게도 한국의 음악을 좋아하더라’는 미국 보수진영의 해석이 이 수준에서 멈춰있다.
케이팝이 미국에서 인종과 나이, 성별을 초월한 공감대를 이끌어낸 이유는 일종의 문화적 대안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뻔하고 지루한 음악에 질린 미국 대중들에게 새로운 재미를 선사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그런 이유로 케이팝을 소비하기 시작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오히려 그 반대다. 케이팝 팬들은 미국 음악계, 연예계의 자극적이고 저질인(trashy) 논란으로 가득한 모습에 대한 대안으로 ‘착한'(wholesome) 한류 뮤지션을 소비한다.
칸예 웨스트는 2009년 MTV 비디오 뮤직 어워즈에서 수상소감을 말하는 테일러 스위프트의 마이크를 뺏었고, 저스틴 비버는 아이돌로 활동하던 2013년 식당의 걸레통에 소변을 봤다. 2015년의 아리아나 그란데는 도넛에 침을 발랐는가 하면, 도자 캣(Doja Cat)은 백인우월주의 채팅방에서 인종주의적 발언을 한 영상이 올해 공개됐다. 미국에서 차트 1위를 하는 슈퍼스타 뮤지션들에 대한 소식은 이들의 실력 못지않게 비대한 자아와, 이를 연료 삼아 끊임없이 논란에 불을 지피는 티엠지(TMZ)같은 가십 전문지가 내뱉는 황색 저널리즘의 온상이다.
아이돌을 필두로 한 한국의 대중음악이 미국에 알려지는 과정에서는 뮤지션의 비대한 자아도, 미국 유사 언론의 관심도 부재했다. 미국의 케이팝 팬들 중 주류사회에서 배척당하는 소수자들, 사회정의나 정치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의 실마리가 여기서 풀리기 시작한다. 자신들이 인식하고 있는 사회의 폭력적인 구조들을 그대로 재생산하는 미국의 주류문화에 염증을 느낀 이 사람들은, 타인을 깔보거나 하대하기는커녕 예의와 존중으로 무장한 한국 아이돌들의 페르소나를 보고 공론장을 정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투사한다. 이 ‘착함’의 실존 여부와 상관없이 말이다.
출발점이 어디였든 케이팝이 지금 미국 팬들에게 받는 기대는 선함 그 자체에 대한 것이다. 케이팝 팬덤이 커지면서, 기획사들이 팔고 있는 이미지와 그 뒤에 숨겨진 ‘본질’ 사이의 간극을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이젠 들려오고 있다. 문화전유나 뮤지션, 연습생의 인권에 대한 지적은 모두 이런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미국에서 ‘주류’와 ‘비주류’에 대한 기준을 독점하고 있는 사람들은 점점 소수가 되어가고 있다. 케이팝이 영미권에서 진정한 승리를 거두려면 멋진 음악과 영상 이상의 섬세함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억압받는 약자에 대한 담론 중에서 페미니즘은 오늘의 대중에게 가장 익숙한 단어 중 하나다. 그 의미나 정의에 대한 합의는 요원하지만, 일단 사람의 경험이나 정체성을 읽어낼 때 성별에 더 무게를 두고 해석하는 담론은 널리 퍼져있다. 뮤지션들 역시 자아를 음악에 담아내기에, 이들의 작품과 페르소나를 이해할 때도 페미니즘은 유용한 인식의 틀을 제공한다. 그러나 사람의 정체성은 입체적이기에, 성별이라는 단일차원에서 바라보면 반드시 놓치는 부분이 생긴다. 정체성의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을 이해하면, 음악에 담긴 이야기들과 이를 둘러싼 논란들의 맥락이 보다 명료하게 드러난다.
미투 운동이 세상을 휩쓴 후, ‘페미니스트 뮤지션’의 브랜드를 획득한 인물들이 몇 명 있다. 타임지가 미투 운동을 조명해 ‘침묵을 깬 사람들’을 2017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을 때 표지에 얼굴을 올린 테일러 스위프트가 그중 하나다. 2013년 MTV 비디오 뮤직 어워즈(VMA) 무대에서 로빈 시크(Robin Thicke)와의 무대에서 파격적인 트월킹을 선보이며 전통적인 여성상에 대한 반론을 내놓은 마일리 사이러스 역시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열렬한 페미니스트’라고 인터뷰했다.
팝스타의 반열이 아니더라도, 피오나 애플(Fiona Apple)은 8년 만에 내놓은 새 앨범 < Fetch The Bolt Cutters >에서 모두 ‘절단기를 들고 와’서 직접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라는 메시지를 보내 평단의 사랑을 받았다. 라나 델 레이(Lana Del Rey)는 2019년 발매한 후 그 내용이 ‘부드러운 페미니즘'(soft feminism)의 필요성을 강조한다고 말해 논란에 불을 지폈다.
어떤 사람이나 발언이 ‘페미니스트’인지에 대한 대략적인 이미지는 이미 대중문화 속에 퍼져있다. 예컨대 자신의 욕망과 생각을 거침없이 이야기하는, ‘걸크러쉬’에서 조금 진화한 여성의 모습이다. 테일러 스위프트, 마일리 사이러스, 피오나 애플, 라나 델 레이 같은 뮤지션들이 페미니스트 아이콘으로 조명받는 이유 역시 이들이 그 이미지에 잘 들어맞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들은 여성성 이외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모두 포크 음악과 관련 있는 백인이라는 점이다.
이들 여성의 목소리가 의미 없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이들이 모든 여성을 대표하는 것으로 일반화하기엔 너무 많은 맥락이 지워진다. 예를 들어, 마일리 사이러스가 트월킹을 하면서 내놓은 ‘얌전하지 않은 여성’의 이미지는, 영미권에서 백인 여성들이 항상 가정적이고 수동적인 역할을 강요받아온 역사의 연장선이다. 반면 이세벨 스테레오타입(Jezebel stereotype), 옐로우 피버(yellow fever) 등의 시선으로 언제나 극한의 성적 대상화를 당해온 흑인이나 동양계 여성의 경험을 마일리 사이러스가 제대로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라나 델 레이가 ‘부드러운 페미니즘’을 옹호했을 때 논란이 일어난 것 역시 그가 이런 맥락을 무시하는듯한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 Norman Fucking Rockwell! >이 학대를 미화한다는 비판에 대해 그는 비욘세, 도자 캣(Doja Cat), 카밀라 카베요 등 유색인종 뮤지션들을 언급하며 이들이 ‘섹시’를 앞세워 차트 1위를 했고, 자신도 13년간 여성의 입장에 대해 노래해 왔는데 왜 자기만 욕을 먹어야 하냐는 반응이었다. 정체성의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에 대해 무감각한 언사다.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은 사실 법조계에서 처음 사용된 단어다. 그 계기는 1976년 자동차 제조사 제너럴 모터스(GM)가 흑인 여성에게 채용상 불이익을 준 일인데, 흑인에 대한 차별 금지법도, 여성에 대한 차별 금지법도 이를 막을 만한 근거가 되지 못했다. GM이 흑인 남성과 백인 여성을 채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별을 바라볼 때 모든 흑인, 모든 여성이 그룹별로 같은 방식으로 차별받는다고 생각한다면, 흑인 여성을 포함한 유색인종 여성의 경험들은 지워질 수밖에 없다. 형태주의에서 말하는, 전체는 그 부분의 합 이상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백 명의 사람이 있다면 백 가지의 페미니즘이 있기에, 모든 여성 뮤지션의 메시지가 저마다 의미 있다.
인종이나 사회, 경제적 배경 등을 고려하고 여성 뮤지션들의 음악을 보면 다채로운 페미니즘을 볼 수 있다. ‘Run the world (Girls)’가 흑인이자 걸어 다니는 대기업인 비욘세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곡이 실제로 전달하는 메시지는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다(과연 정말 세상을 주도하는 것은 여성인가, 아니면 비욘세인가?). 미츠키(Mitski)가 강렬한 기타 톤을 앞세워 외롭다고 소리치는 모습 역시 동양인 여성들은 얌전하고 가부장에게 복종하는 이미지가 있기에 훨씬 강렬하게 다가온다. 성 소수자자 Z세대인 킹 프린세스(King Princess)가 부르는 사랑 노래는 화자의 입장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뻔하게 들린다.
‘페미니스트 뮤지션’의 전형으로 다시 돌아와 보면, 이 단어의 실체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쩌면 오히려 여성의 목소리를 지켜내는 접근법일 수도 있겠다. 여성성 하나로 정의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음악에 담긴 이야기를 여성성 하나에 대한 이야기로 해석하면 당연히 많은 부분이 지워진다. 여성에 대한 이야기로 논리를 전개했지만, 상호교차성은 정체성 그 자체에 대한 인식의 틀이다. 그 어떤 개인도 절대적인 약자, 혹은 강자일 수 없다. 이분법을 벗어나 음악에 담긴 사람을 온전히 직시했을 때 그의 이야기가 더 또렷하게 들리지 않을까.
여름은 시끌벅적한 블록버스터의 계절이지만 2020년 여름은 조용하고 고요하게 지나갔다. 그놈의 코로나 19 바이러스 때문에 야외활동과 모임에 제약을 받는 현재의 팬데믹 상황을 슬기롭게 보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집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다. 다시 보고 싶은 영화나 아쉽게 못 보고 지나간 영화도 시간을 내서 본다면 일상이 지루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은 좋아하는 영화나 노래, 음식 중에서 하나만 뽑아달라는 것이다. 참으로 몰상식하고 잔인한 부탁이지만 동시에 행복한 고민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즘 필진에게 심리적 고통을 주기 위해 내 인생의 영화와 영화음악(오리지널 스코어)을 선정해서 공개한다. 그것도 딱 하나만. (소승근)
김도헌 – < 겨울왕국 > ‘For the first time in forever’ (2013) / < 겨울왕국 2 > ‘Some things never change’ (2019)
2014년 < 겨울왕국 >에 대한 첫 감상은 ‘그럭저럭 볼만하다’는 것이었다. 이후 < 겨울왕국 2 >까지 나는 이 ‘그럭저럭 볼만한’ 영화를 보러 대략 35번 정도 극장을 찾게 된다. 자막, 더빙, 아이맥스, 돌비 애트모스, 4DX, 싱어롱, ‘대관식’까지… 모든 가능한 상영 방식을 섭렵하고 태어나서 처음 ‘포토티켓’이라는 것도 모아봤다. 한정판 포스터를 얻기 위해 새벽 지하철을 타고, 딜럭스 버전 OST를 구하기 위해 해외 ‘직구’도 해봤다.
물론 본 영화를 또 보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언제나 이성보다 감성이 앞선다. 잠시 지루해하다가도 잠결의 안나가 “오늘은 대관식 날이야!”라 쾌활히 외치며 계단을 뛰어 내려가고, 녹지 않는 눈사람 올라프의 손을 잡고 “바람은 점점 쌀쌀해지고 우린 어른이 되지”라 노래하면 ‘얼어붙은 심장’이 어김없이 두근거린다. 사운드트랙과 OST 모두 버릴 곡이 없지만, 잠시 서울을 떠나 아렌델 왕국으로 들어가는 것만 같은 ’For the first time in forever’와 ‘Some things never change’를 추천해본다. 곡을 만든 로페즈 부부, 완벽한 더빙 버전을 선보인 성우분들께 감사, 또 감사!
박수진 – <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 (2017)
들려온다. ‘또 폼 나는 거 고르네…’라며 나를 다그치는 선배, 후배, 동료들의 잔소리들이. 하지만 어쩌랴. 고르고 골라 가장 엄격한 기준을 통과한 사운드 트랙이 바로 이 영화인 것을. 후보군에는 < 헤드윅 >을 비롯한 애니메이션 < 업 >, < 슈렉 >, < 캐롤 >, <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 등의 영화가 있었다. 나만의 힙한 선택을 하려 했으나 보이는 바와 같이 내 취향은 지극히 메이저다.
내가 만든 거름 막은 다음과 같다. 첫째, OST만을 따로 들으며 생긴 추억이 있다. 둘째, 요 근래 심정을 잘 대변해 준다. 셋째, 아 모르겠다. 사실 그냥 이 순간 제일 당기는 음악을 골랐다. 하나만 선정하라니 너무 잔인한 제안이다. 이 영화는 아름답고 기묘한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스토리만 보면 다소 진부할 수 있으나 주인공 엘라이자의 성적 욕망, 그의 사랑에 접근하는 방법이 내 기준에는 참 섬세했고 따뜻했다. 제목처럼 물이 작품에 큰 역할을 담당하는데 그 이음새를 신비한 음악이 잘 맺어준다. 잔잔한 물결처럼 울렁거리고 깊은 심연처럼 신비한 멜로디가 영화의 매력을 더욱 풍부하게 살렸다.
소승근 – < 스타워즈 > ‘Main title’ (1977)
‘A long time ago in a galaxy far, far away…’
이 자막이 사라지고 등장하는 존 윌리엄스의 웅장한 메인 테마는 내 머리와 심장을 두들기는 천둥소리였다. 처음부터 선율이 확실하면서 웅장하고 비장한 영화음악 스코어는 그 이전까진 경험하지 못했다. 마치 베토벤의 ‘합창’이나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 혹은 바그너의 고전음악을 듣는 느낌이었으니까. 그 전율이 얼마나 강했는지 이후에 제작된 < 스타워즈 > 시리즈를 거의 다 챙겨보았지만 < 스타워즈 >의 오프닝만큼 뇌리에 남는 장면은 없다.
손기호 – < 월-E > (2008)
쓰레기로 멸망한 지구를 700년이란 시간 동안 홀로 청소한 로봇이 사랑을 동경하는 이질적인 모습은 ‘말’이란 꾸밈없이 눈과 손짓으로만 표현되는 진실한 묘사와 더불어 오래된 노래가 간직한 순수로 설득력을 얻는다. 1969년 개봉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주연 < 헬로 돌리 >의 OST가 다수 사용되며, 오마주의 뜻을 강하게 밝힌 < 월-E >. 월-E가 이브에게 첫눈에 반하게 되고 따라다니며 마음을 드러낼 때 나온 루이 암스트롱의 ‘La vie en rose’ 등 매력적인 노래가 가득하며 우주에서 다시 만난 두 로봇이 소화기를 뿜으며 춤을 추는 장면에 등장하는 ‘Define dancing’은 보편적인 감정이 주는 긍정적 변수에 대해 고민하게 했다.
토마스 뉴먼 아래 배열된 음악적 연출은 부족한 언어에 대한 여백을 메우며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에 낭만을 불어넣었고, 대화라곤 이름을 부르는 게 전부인 고철덩이에 애정을 느끼게 했다. 회색빛 가득한 지구에서 유일하게 따뜻한 불빛을 내는 월-E의 공간처럼 개봉한 지 10년이 넘은 지금도 < 월-E >의 사운드트랙은 내게 위로를 전달한다.
신현태 – < 헤드윅 > (2001)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날렵한 몸매의 주인공은 성전환 수술에 실패한 분노를 노래한다. 어느 곳에도 소속되기 어려운 캐릭터 헤드윅은 자신의 밴드 앵그리 인치(Angry Inch)와 투어를 떠난다. 말이 투어지 작은 카페나 음식점을 전전하는 개업 선전 내레이터나 다름없는 신세다. 몇몇 손님들은 그들의 공연이 불쾌한 듯 쳐다보고, 경멸의 언어로 ‘Faggot!’이라 외치며 난장판을 만들기도 한다. 작품의 전개 속에는 사랑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이 영화는 분노로 점철된다.
헤드윅은 자신의 기구한 삶을 펑크록으로 폭발해낸다. 성 정체성에 대한 소수자의 온당한 외침을 가감 없이 끌어와 뮤지컬 영화로 구성했고, 존 카메론 미첼(John Cameron Mitchell)의 음악은 이야기와 완벽한 합을 이룬다. 극의 전개도 뛰어날 뿐만 아니라 캐릭터에 맞는 화려한 의상, 아기자기한 애니메이팅은 감상의 덤이다. 그 쾌감은 오롯이 관객의 뇌리를 관통했다. 그녀의 외침은 여전히 나에게 강한 울림으로 남아있다. < 헤드윅 >이 뿜어내는 불량함과 분노, 저항은 펑크록이 가지는 미학을 고스란히 담아낸 사운드트랙이다.
이홍현 – < 인사이드 르윈 > (2013)
20살에 꿈을 이루러 서울에 올라왔다. 지방에 가족들을 두고 홀로. 처음 왔을 때는 내가 대단한 일을 해낼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약했고 세상은 친절하지 않았다.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준비되지 않은 도전은 객기였다. 여기저기 부서지고 망가져 외롭고 슬펐다. 부산한 도시에 나 혼자 떠 있는 기분. 미치도록 보고 싶은 가족. 반성과 뉘우침으로 얼룩진 나날이었다.
< 인사이드 르윈 >을 봤다. 지독하리만큼 조용한 영화였지만 왜 마음이 움직였는지 나는 알았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한심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저 안에 나보다 더 못난 인간이 있다는 게 위안이었다. 추운 겨울 기타 한 대를 매고 뉴욕 시내를 떠돌던 르윈 데이비스. 난생처음 보는 그에게 친구 같은 연민을 느꼈다. 영화의 잔향에 주제가를 몇 달 내내 들었다. ‘Fare thee well (Dink’s song)’을 들으며 오후 도심을, ’Hang me, oh hang me’를 들으며 새벽 꿈속을 걸었다. 포크는 재미없는 음악이라며 줄곧 멀리해오던 내가 이 음반 이후 포크를 알게 됐다.
임동엽 – < 인셉션 > ‘Time’ (2010)
영화 음악가라면 존 윌리엄스밖에 몰랐던 나를 구제해준 아저씨와 노래가 있었다. 꿈으로 생각을 조종하는 영화 < 인셉션 >의 음악 감독인 한스 짐머 그 주인공이다. 대학 시절 친구가 카피하던 것을 듣고는 단순하고도 묵직한 매력에 반했다. 그날 이후 테마 중심의 클래식 스타일을 펼치던 존 윌리엄스는 나의 영화 음악 플레이리스트에서 웅장하고도 강렬한 곡풍(曲風)의 한스 짐머에게 왕위를 내주었다.
영화처럼 ‘눈물’이 기준이었다면 < Celebrating John Williams : 존 윌리엄스 영화음악 콘서트 >에서 실제로 질질 짜며 들었던 ‘Hedwig’s theme’을 뽑았을 것이다. 그러나 음악은 가장 충격받은 사건으로 정했다. < 다크 나이트 >의 ‘Why so serious?’, < 다크 나이트 라이즈 >의 ‘Why do we fall’, < 인셉션 >의 ‘Mombasa’도 좋지만 내 마음속 영원한 1등은 ‘Time’이다. 내한 공연 못 본 한을 이 글로 풀어본다.
임선희 – < 록키 호러 픽쳐 쇼 > (1975)
고등학교 3학년 수능이 끝난 후 인생에서 가장 무료한 시기를 보내던 도중, 영화 사이트를 뒤적이다 한 포스터에 눈길이 머물렀다. 피 묻은 글씨체 그리고 검은 배경과 대비되는 새빨간 입술. 홀린 듯이 클릭한 그 짧은 순간은 지금도 생생하다. 70년대 영화라고 믿기 어려운 성 혁명적인 캐릭터와 이렇다 할 게 없는 난해한 스토리 라인도 너무나 취향 저격이었으나 결국 이 글을 쓰게 된 결정적 이유는 음악이다.
펑크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차츰 사그라들던 글램 록을 숭앙하는 스코어답게 미친 듯이 강렬하고 자극적이다. 아무 생각 없이 춤추며 즐기는 ‘The time warp’, 성(性)의 경계를 허물어 버리는 ‘Sweet transvestite’, 기존의 질서에 대한 도전을 과감히 드러내는 ‘Rose tint my world’와 ‘Don’t dream it, be it’. 모두 처음부터 끝까지 혼을 쏙 빼놓는 마약 여행이다. 세상이 내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고, 우울감이 나를 집어 삼켜버린 날이면 < 록키 호러 픽쳐 쇼 > OST와 함께 자유로운 쾌락의 공간으로 잠시 도피하곤 한다.
아날로그 신시사이저가 유행하던 1980년대, 전자음을 통해 여러 실험을 펼친 뮤지션으로 ‘Chariots of fire’로 유명한 그리스 출신의 음악가 반젤리스(Vangelis)를 빼놓을 수 없을 테다. 그런 그의 선지적 작법을 엿볼 수 있는 곳을 뽑으라면 단연 영화 < 블레이드 러너 >(1982)의 사운드트랙. 리들리 스콧의 연출이 영화에 누아르적 사이버펑크 분위기를 담아냈다면, 이를 극대화한 것은 반젤리스의 미래적이고 몽환적인 사운드 프로듀싱이었다.
의미심장한 해리슨 포드의 뒷모습이 지나가고 이 곡이 크레디트 위로 등장하는 순간의 감정을 이루 말할 수 있을까. 긴박한 전자음과 오케스트라의 울림은 여전히 재생할 때마다 나의 심장을 뛰게 만든다. 엄밀히 말하자면 앨범에 삽입된 다른 곡 ‘Tears in rain’을 뽑고 싶었지만, 명대사가 그대로 포함되어 있어 자칫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눈물을 머금고 보류. 아, 영화를 본 이들은 이해해 주시길.
정민재 – < 친절한 금자씨 > (2005)
< 친절한 금자씨 >는 충격이었다. 스토리, 캐릭터, 연기, 촬영, 미술 모든 게 놀라웠다. 그중 제일은 음악이었다. 명대사 “너나 잘하세요.” 후에 따라 나오는 메인 테마곡을 비롯해 한 곡 한 곡이 전부 강렬했다. 왠지 불길하고도 신비로운 멜로디, 순간 간담이 서늘해지는 다이내믹에 흠뻑 빠져들었다. 음악과 화면의 앙상블은 마치 한 편의 뮤지컬을 보는 듯했다. 그중 상당수가 비발디, 파가니니의 곡이었음을 알았을 때 그 기분이란. 내게 < 친절한 금자씨 >는 음악 영화가 아님에도 음악으로 기억되는 특이한 영화다.
정연경 – < 기쿠지로의 여름 > (1999)
여름 냄새를 좋아한다. 매미 울음소리, 더위, 설렘, 초록색 따위의 이미지를 사랑한다. 그러니 여름을 가장 여름답게 보낸 기쿠지로와 마사오의 여정 그리고 그들의 여정을 가장 여름답게 그린 영화의 오리지널 스코어야말로 내 인생 최고의 ‘여름’일 수밖에.
히사이시 조가 작곡한 오리지널 스코어의 각 사운드트랙은 다시 메인 테마 ‘Summer’로 환원된다. 스코어의 의미는 간단하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는 것. 불량배 아저씨 기쿠지로가 제법 듬직한(?) 어른이 되었듯 마사오 역시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날을 보내며 그렇게 성장할 테다. 나이를 초월해 서로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어주었던 1999년의 여름. 마사오와 기쿠지로는 일어나는 방법을 배웠다.
정효범 – < 피아니스트의 전설 > (1998)
음악 엔니오 모리꼬네, 감독 쥬세페 토르나토레. 조합만 보고 벌써 심장이 뛰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를 꼭 보기를 바란다. < 피아니스트의 전설 >은 여객선 버지니아 호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며 살아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곳에서 피아노는 주인공의 감정을 탁월하게 표현해내는 장치로 등장한다. 이제는 피아노 영화에서 빠지면 왠지 섭섭한 배틀 신도 있어, 화려한 연주를 들을 수 있다.
주인공이 처음으로 사랑하게 된 여성을 보며 연주한 ‘Playing love’는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고, (정확히는 엔니오 모리꼬네 음악이 아니지만) 폭풍우 속에서 피아노 고정 장치를 풀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연주하는 ‘Magic waltz’도 잊지 못할 곡이다. 한 사람의 인생을 음악으로 풀어냈기에 그 여운이 쉽게 사라지질 않는다.
조지현 – < 미드나잇 인 파리 > ‘Si tu vois ma mère’ (2011)
음악 공부를 할 때는 재즈를 참 많이도 들었다. 오스카 피터슨(Oscar Peterson), 빌 에반스(Bill Evans)부터 시작해서 브래드 멜다우(Brad Mehldau)와 허비 핸콕(Herbie Hancock)까지. 피아니스트들의 음악을 주로 들었다. 좋아서 들은 것보다도 피아노 연주를 잘하기 위한 주입식 감상에 가까웠다. 재즈를 처음 접했을 때의 짜릿함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닥치는 대로 재즈를 욱여넣던 입시생 시절을 지나 대학생이 되었다. 수업이 없던 날 < 미드나잇 인 파리 >를 보았다. 파리의 로맨틱한 광경이 담긴 첫 장면 속 ‘Si tu vois ma mère’에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여유로운 템포의 낭만적인 색소폰 연주! 아, 이 음악은 주의 깊게 들어야 할 피아노 연주도 없다. 하물며 과거로의 시간여행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처럼 느껴졌다. 언젠간 파리에 간다면 이 곡을 들으며 비 내리는 센강을 걸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촌스럽다 놀려도 별수 없다. 그 순간만큼은 나도 헤밍웨이와 차를 마시고, 콜 포터의 노래를 바로 옆에서 듣고 있을지도 모를 테니!
한동윤 – < 델타 포스 >(1986)
총과 미사일이 나가는 오토바이로 악당들을 처치하는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 시퀀스들에 흐르던 앨런 실베스트리의 테마곡은 가슴속에 더욱 깊게 파고들었다. 공중으로 떠오르는 기분을 들게 하는 키보드 연주, 선명하게 울리는 전자드럼 소리, 분위기가 고조된 후 나오는 신스 브라스, 모든 게 근사했다. 나에게 < 델타 포스 >의 테마곡은 < 비버리 힐스 캅 >의 ‘Axel F’를 능가하는 최고의 신스팝 스코어였다. 척 노리스 아저씨는 늙었지만 테마곡은 여전히 쌩쌩하다.
황선업 – < 무지개 여신 > ‘The rainbow song’ (2006)
토모야가 아오이의 유품으로 남겨진 핸드폰의 전원을 끄는 순간 영화는 끝을 맺는다. 남은 시간엔 단순히 스태프 롤과 함께 이 노래가 흐를 뿐. 하지만 이 영화를 감명 깊게 본 이라면, 그 여운으로 하여금 노랫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쉽사리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짝사랑으로 힘겨워한 여주인공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듯한 이 노래는 사실 1980년대부터 활약해 온 싱어송라이터 타네 토모코가 1990년에 발표한 노래. 그럼에도 마치 이 영화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듯 정서적 측면에서 높은 싱크로율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사고로 죽은 후에야 자신에 대한 사랑을 뒤늦게 확인하고 슬퍼하는 러브 스토리로, 이와이 슌지가 제작, 기획, 각본을 맡고 이치하라 하야토, 우에노 쥬리, 아오이 유우 등이 참여한 덕분에 한국에서도 나름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던 영화다. 조금은 상투적일지언정, 잔잔하게 스며들어 잊히지 않는 여운을 남기는 작품의 감정선은 많은 이들이 가진 감수성이라는 풀에 촉촉한 수분을 제공해주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이 노래가 있었기 완성되었다. 음악, 그리고 닫는 곡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만드는 명 OST.
황인호 – < 베이비 드라이버 > (2017)
영화 전체가 감독의 음악 취향을 자랑하기 위한 뮤직비디오다. 선곡과 연출의 승리다.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 영화를 보면서 ‘아, 이 노래!’ 싶었던 순간은 배리 화이트(Barry White)의 ‘Never, never gonna give ya up’이 나왔던 때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어떤 기성곡이나, 박자에 딱딱 맞춘 편집과 연출보다도 기억에 남는 것은 아마추어 프로듀서인 주인공 베이비가 스스로 다른 사람들의 대사를 리믹스해서 곡을 만드는 장면이다. 헤드폰 속 자신만의 세계에 사는 그의 내성적인 자아를 가장 온전하게 담아냈다.
이때 흘러나오는 ‘Was he slow?’는, 실제로는 DJ 키드 코알라(Kid Koala)가 그 장면을 위해 만든 오리지널 스코어다. 마그네틱 카드로 스크래치를 하고, 펜으로 미디 드럼을 치는 베드룸 프로듀서의 모습에는 일종의 낭만이 있다. 창작의 고뇌를 그림에서 싹 지워버렸지만, 애초에 그게 영화의 주제는 아니니까. 겉보기에 찌질한 주인공이 만들어낸 자신만의 ‘멋’에 함께 취할 수 있었던 1분이다.
댄스음악은 현재 대중음악의 주요 문법이다. 딥하우스나 디스코처럼 클럽 문화에서 탄생한 비트들에 기반한 음악이 인기를 끄는 흐름은, 비주류의 문화가 주류사회로 흘러나오는 흐름이기도 하다. 혐오를 피해 언더그라운드에서 모일 수밖에 없었던 퀴어 커뮤니티는 이 맥락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 사회정의(social justice)가 갈수록 큰 화두로 작용하면서 많은 퀴어 뮤지션들의 목소리가 주목받고 있고, ‘퀴어 코드’는 이제 유행의 한 요소로 작용하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이 현상들은 어느 날 갑자기 발현된 것이 아니다. 퀴어 커뮤니티의 문화는 알게 모르게 오랫동안 대중의 사랑을 받아왔다.
퀴어 문화의 요소를 읽어내려면 그 기저에 깔린 정서를 알아야 한다. 그 출발점은 미스핏(misfit)의 입장이다. 성 소수자는 성 정체성이나 역할에 대한 사회의 통념 속에 깔끔하게 들어맞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 사회는 이런 ‘부적응자’들, 특히 성 소수자들을 향해서는 노골적으로 혐오와 폭력을 휘두른다. 그렇기에 많은 성 소수자들은 생존을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다른 자아를 연기한다. 일상이 일종의 퍼포먼스인 셈이다. 자아를 억누르지 않고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열망은 퀴어 예술의 중요한 테마다.
하우스와 디스코에 맞춰 보그를 추며 잠시나마 자신을 내려놓던 퀴어 커뮤니티의 문화는 주류사회의 외면 속에서 피어났지만, 그 정서는 대중음악 깊숙이 침투해있다. 아바의 ‘Dancing queen’이나 글로리아 게이너의 ‘I will survive’ 등 1970년대 디스코곡들로 대표되는 퀴어 찬가(anthem)의 계보는 마돈나의 ‘Vogue’, 레이디 가가의 ‘Born this way’를 거쳐 두아 리파의 ‘Physical’까지 내려온다. 모두 화려한 조명과 반짝이는 의상이 어울리는, ‘글램'(glam)이 있는 음악이다. 이런 강렬한 비주얼은 오직 클럽에서만 ‘정상’ 취급 받는다는 점에서 퀴어 커뮤니티와 입장을 같이한다.
맥락이나 정서와 별개로, 퀴어 문화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힙’해진 세상이 왔다. 퀴어 커뮤니티가 주류 담론에서 낼 수 있는 목소리가 커지기도 했고, 언더그라운드의 문화는 언제나 주류의 문화보다 한발 앞서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성 소수자의 문화를 전유하는 현상도 나타나고, 이 문화를 ‘제대로’ 대표하고 전파하는 게 뭔지에 대한 논란도 보다 크게 불거진다.
케이티 페리의 2008년 싱글 ‘I kissed a girl’을 보자. 빌보드에서 7주 연속 1위 했던 이 곡은 얼핏 보면 동성애를 지지하는 노래 같지만, 막상 성 소수자들은 자신을 대상화하는 시선이라며 반발했다. 케이티 페리 본인이 퀴어 커뮤니티에 기여한 맥락이 없는데 갑자기 이런 노래를 냈고, 가사 내용에서도 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찾아볼 수 없다. 다른 행보나 발언에 비추어 봤을 때 이 노래는 그저 ‘여성끼리 키스하면 섹시하다’라는 일차원적인 사고로 읽힌다는 것이다. 실제로 케이티 페리는 곡이 나온 10년 뒤, 가사 내용이 부적절했음을 인정하고 곡을 지금 냈다면 ‘일부 수정’했을 것이라고 인터뷰했다. 실제로 곡을 다시 내지는 않았다.
반면 공개적으로 커밍아웃했고, 성 소수자로서의 경험을 음악에 꾸준하게 담아온 프랭크 오션도 문화 전유에 대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는 1980년대의 HIV 패닉을 화두로 삼아, ‘만일 퀴어 커뮤니티와 그 문화가 사회적으로 내몰리지 않았다면’을 상상하는 클럽 파티 프렙(PrEP+)을 2019년 개최했다. 그러나 소수의 인원에게만 초대장이 주어졌고, 그 구성원들도 대다수가 백인에 성 소수자도 아니었다고 전해져 파티는 실패로 평가된다. 힙스터 무리에 매몰되어 막상 성 소수자들이 자유롭게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는 ‘안전한 공간'(safe space)은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저 경제적 이익을 취하기 위해 성 소수자의 문화를 다루는 퀴어 베이팅(queer-baiting)과, 실제로 커뮤니티를 지지하기 위한 협력자(ally)로서의 노력은 한 끗 차이다. 이를 구분해낼 때 중요한 것은 무대의 중심을 어떤 캐릭터와 서사가 차지하고 있는지다. 정답은 없고 오답은 많은 영역이지만, 소수자들이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사회 전반으로 확대하려면 필요한 시행착오다. ‘퀴어 코드’ 역시 한순간의 유행이어서는 안 된다.
여름은 시끌벅적한 블록버스터의 계절이지만 2020년 여름은 조용하고 고요하게 지나갔다. 그놈의 코로나 19 바이러스 때문에 야외활동과 모임에 제약을 받는 현재의 팬데믹 상황을 슬기롭게 보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집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다. 다시 보고 싶은 영화나 아쉽게 못 보고 지나간 영화도 시간을 내서 본다면 일상이 지루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은 좋아하는 영화나 노래, 음식 중에서 하나만 뽑아달라는 것이다. 참으로 몰상식하고 잔인한 부탁이지만 동시에 행복한 고민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즘 필진에게 심리적 고통을 주기 위해 내 인생의 영화와 영화음악(오리지널 스코어)을 선정해서 공개한다. 그것도 딱 하나만. (소승근)
좌상부터 시계 방향-네트워크/죠스/포레스트 검프/어벤져스: 엔드게임/그녀/리틀 미스 선샤인
김도헌 – < 네트워크 > (1976)
음악도 부족한데 영화까지 추천하려니 얕은 식견을 드러낼까 조심스럽다. “< 겨울왕국 >으로 두 편 써!”라는 모 에디터의 추천도 있었지만 나를 오래 봐온 사람들은 “쟤는 또 엘사, 안나 얘기하네….”라며 식상해 할 것이 분명. < 겨울왕국 >은 노래 영역으로 넘기고, 이번에는 비평의 시선 대신 온전히 취미로만 하고 있는 영화 별점 애플리케이션에 2천 개 리뷰를 등록한,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대로 영화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텔레비전은 진실이 아냐!” “세상은 비즈니스지!”. 중3 때 우연히 보게 된 시드니 루멧 감독의 1976년 작 < 네트워크 >는 매스미디어의 잔혹한 현실을 가감없이 풍자하는 영화다. 시청률 압박에 시달리며 해고 통보를 받은 노년의 앵커가 광기에 휩싸이고, 그 폭주가 인기를 끌자 방송국은 그 분노를 아이템 삼아 인기 토크쇼를 론칭한다.
더 깊고, 더 아름다운 영화가 많지만 < 네트워크 >의 날카롭고 냉소적인 시선은 지금까지 삶의 태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너무도 화가 나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라 외치는 피터 핀치의 열연은 언제 봐도 소름이 돋는다. 끝없이 의심하고 분노하라.
박수진 – < 미스 리틀 선샤인 > (2006)
현실은 퍽퍽해도 위트.. 위트, 위트만은 잃지 말자고 다짐하는 편이다. 그렇지 않나. 힘들 때 힘든 생각 하면 더 힘들다. 그런 면에서 내게 영화는 늘 밝아야 한다. 아프게 슬프고 힘들게 아픈 것들을 되도록 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편향된 취향과 지식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나는 떳떳하다. 삶의 애환을 멋지게 에둘러 그럼에도 행복은 현실에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들. 멋지게 짜릿하고 우아하다.
< 미스 리틀 선샤인 >은 내게 그런 작품이다. 20살 무렵 우연히 본 뒤에 이후 적어도 10번은 넘게 돌려봤다. 집안의 통통한 막내딸 올리브가 미인 대회를 나가게 되고 이 과정에 자격지심 가득한 아빠, 마약에 중독된 할아버지, 게이 삼촌을 비롯해 엄마와 오빠까지 동참한다.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고 사회 속 루저로 보이는 캐릭터들을 계속해서 무너지고 부딪힌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이들이 함께 무대에 올라 선보이는 그 어떤 말 할 수 없는 불건전(?) 댄스의 한바탕은 그 호오에 상관없이 값진 쾌감을 던져준다. 인생의 고단함. 유쾌 앞에 무릎 꿇다!
소승근 – < 죠스 > (1975)
상어가 사람을 잡아먹는 장면이 궁금해서 < 죠스 >를 보고 싶었지만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이 영화를 볼 수 없었다. 시간이 흘러 텔레비전에서 < 죠스 >가 방송됐을 때 그 소원을 풀었지만 미완의 경험이었다. 보고 싶었고 궁금했던 장면들은 여지없이 가위질당했고 심지어 방송국은 시간 관계상 불필요하다고 판단한 내용을 극악무도하게 잘라냈다. 결국 나중에 비디오 대여점에서 < 죠스 >를 빌려서 다시 감상했을 때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발견했다.
물을 두려워하는 경찰 서장이 상어를 잡으러 바다로 떠나기 전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어린 아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다. 심란해하는 아빠를 본 꼬마는 그의 행동을 따라 하기 시작했고 이를 눈치챈 아빠는 아들에게 얼굴을 가까이 대고 말한다.
“뽀뽀해 줄래?” “왜요?” “네 뽀뽀가 필요하니까”
지금 초등학생인 딸이 유치원에 다닐 때 이 상황을 부탁했더니 딸아이는 억지로 들어주긴 했다. 이제 뽀뽀만 해주면 된다. 나는 최대한 자상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딸에게 “아빠한테 뽀뽀해 줄래?”라고 말했더니 딸은 단호하게 외쳤다.
“싫어! 냄새나!”
< 죠스 >는 내 인생의 영화다.
손기호 – < 그녀 > (2013)
오랜 짝사랑으로 지쳐있을 때 견뎌보고자 늦은 시간 홀로 영화관에서 보게 된 < 그녀 >는 어떤 위로도 전해주지 않았다. 모두가 실체 없는 컴퓨터 운영체제와 대필 작가의 이야기에 집중할 때 나는 주인공 테오도르가 타인을 대신해 감정을 전달해주며 느꼈을 고독에 공감했다.
진심이 필요한 상황에 대한 회피로 자신을 가두게 된 그가 유일하게 마음을 드러낸 ‘사만다’가 사라지고 맞이하게 된 공허 혹은 두려움. 나는 엔딩을 멍하게 쳐다볼 수밖에 없었고 무기력한 그때가 기억나 아직도 < 그녀 >를 보지 못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도망치고 있다.
신현태 – < 포레스트 검프 > (1994)
2차 세계대전 이후 초강대국으로 우뚝 선 미국의 1950년대부터 주인공인 포레스트는 주요한 사건을 어슷하게 스쳐 지나간다. 근데 이게 참 웃긴다. 그의 이름은 KKK 단원이었던 포레스트 장군의 이름에서 따왔고, 다리가 불편해 관절 보행기를 찬 그의 어리숙한 춤을 보던 잘생긴 청년 손님은 TV에 출연해 포레스트 검프의 춤을 따라 추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는 설정이다. 잘생긴 투숙객은 바로 엘비스 프레슬(Elvis Presley)리다. 그 밖에도 베트남 전쟁 영웅이 되어 돌아와 존 레논(John Lennon)에게 ‘Imagine’ 가사에 힌트를 주기도 한다. 또한 케네디의 암살, 닉슨의 워터게이트 등 20세기 미국의 정치, 경제의 주요 사건들을 영화에서는 희화와 풍자로 녹여냈다.
모든 사건과 상황들에서 포레스트 검프는 늘 진지하지만, 그의 우직함과 우연한 활약에 나는 끊임없이 폭소했다. 무엇보다도 좋았던 점은 음악에 있었다. 50년대부터 70년대를 아우르는 미국 대중음악의 명곡들이 작품 전반 요소요소 흘러나온다. 비단 한두 장면을 꼽을 것이 아니고 흘러나오는 모든 곡의 배치는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로 훌륭했다. 이 많은 사건은 포레스트 검프를 중심으로 흘러가지고 독립된 다양한 이야기는 보는 이를 어렵지 않게 사로잡는다. 영화 < 포레스트 검프 >는 미국 근대사와 대중음악사가 녹아있는 명랑하고 경쾌한 희극(喜劇)이다.
이홍현 – < 인사이드 아웃 > (2015)
나는 감성적이고 감정적인 사람이다. MBTI 성향도 감정 기복 심한 ENFP다. 이런 성격 덕에 작은 기쁨도 배로 느낄 수 있어 좋을 때도 있지만 사소한 일에 예민하게 스트레스 받아 괴로울 때도 많다. 아마 내 안의 ‘기쁨이’와 ‘슬픔이‘는 다른 사람들의 그것보다 두 배 정도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 같다. 이리저리 휘둘리는 산만한 머릿속. < 인사이드 아웃 >은 그런 나에게 더없이 흥미로운 영화였다.
내가 본 최고의 영상물이었다. 인간의 감각을 총괄하는 장치 뇌를 기저 삼아 우리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현상을 표현하는데, 그 내용이 기가 막힌다. 작품 전반에 깔린 공감 가는 유머에 생각 없이 웃다가도 ‘붙잡지 못한 유년 시절의 기억’ 빙봉의 희생을 지날 때면 가슴 한편에 무거운 돌이 내려앉았다. 예고 없이 찾아온 쓸쓸함이 마음의 굴곡으로 이어져 무감정의 상태로 전락하는 어린 소녀 라일리의 지독한 ‘인생 첫 슬픔’ 과정에 덩달아 코끝이 찡해졌다.
영화의 모든 102분이 소중하지만 마지막 10분을 가장 사랑한다. ‘울어도 돼, 슬플 때는 마음껏 슬퍼해도 돼’. 누구나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쉽게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는 그 눈물의 가치를 슬픔이가 멋지게 전하기에. 희로애락에 따른 감정의 지각변동으로 성장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 앞으로도 나와 평생 함께할 영화는 이뿐이지 않을까 싶다.
임동엽 – < 어벤져스: 엔드게임 > (2019)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스타일도 좋아하지만 그런 이유로 이 작품을 고른 것은 아니다.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한 차례 경험했으며, 윗세대에게는 ‘스타워즈 시리즈’가 그러했을 영화와의 우정이 그 답이다. 유년기보다 기억이 온전했던 청소년 시절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마블의 영화 속 세계관)’에 발을 들인 뒤로 실현 불가능한 상상을 11년 동안이나 현실처럼 누리고 살았다.
애국심을 자극하는 장면에서나 터지던 눈물샘이 처음으로 거대 상업 영화인 < 어벤져스: 엔드 게임 >에서 폭발했다. 긴 세월의 추억이라는 감성적인 선택과 특별한 경험으로 좋아하는 영화의 기준을 잡았다. 사실 단 하나를 고르는 특집에서 이 영화를 골랐다는 것은 반칙이다. 20편이 넘는 기록이 단 한편에 담겼으니까. 이즘, 어셈블!
초콜릿 천국 / 상-큐브, 하-괴물
임선희 – < 초콜릿 천국 > (1971)
어릴 때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몇 안 되는) 점이 있다면 초콜릿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부끄럽지만 아직까지도 초콜릿 바를 살 때마다 혹시 모를 황금 티켓을 상상하며 포장을 천천히 뜯는 습관이 있다. 달큰한 향기를 풍기는 오프닝 장면부터 뭐든 먹을 수 있는 공장, 지붕을 뚫고 날아가는 엘리베이터를 통해 환상의 정의를 내릴 수 있었다. 특히 윌리 웡카가 부르는 ‘Pure imagination’의 멜로디는 기분 좋은 날이면 절로 흥얼거릴 정도로 머릿속에서 반짝거린다.
2005년 개봉한 팀 버튼의 작품도 인상적이지만 조금은 광기가 서린 아날로그 감성의 1971년 작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어른이 되면 초콜릿을 쌓아 두고 먹겠다는 ‘나만의 로망’ 그 자체이니까. 용돈을 모아서 혹은 부모님을 졸라 초콜릿을 고르며 기뻐하던, 황금 티켓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던, 초콜릿 하나에 온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행복을 누릴 수 있었던 그 어린 시절이 그립다.
장준환 – < 큐브 > (1997)
우선 이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를 초등학생 때 봤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고 싶다. (부모님께는 죄송하다) 그렇기에 < 큐브 >는 내 인생을 빛낸 한 편의 영화라기보다 일상생활을 뒤흔들어 놓은 충격적인 분기점에 가깝다. 일단 영화를 보고 난 뒤 여파부터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혈흔이 낭자하고 하드코어한 상상력의 결정체를 직접 두 눈으로 마주하고 큐브에 갇히는 악몽을 얼마나 꿨는지 모르겠다.
어린이는 모든 걸 스펀지처럼 흡수한다는 말이 있던가. 영화는 끝났어도 정체불명의 암호와 폐쇄된 기계 장치의 퍼즐 요소는 뇌리에 선명히 남아 있었고, 이후로도 미궁과 수수께끼 장르를 찾아다니게 된 계기가 되었으니. 그때 영향인지 모르겠지만, 현재의 나는 ‘카이지’의 애독자이자 ‘레이튼’ 게임의 컬렉터이며 방 탈출 카페의 지독한 마니아가 되어버렸다. 이래서 유년기에는 행복하고 좋은 것만 보고 자라야 한다.
정민재 – < 괴물 > (2006)
어릴 때부터 공룡과 괴수 영화를 좋아했다. < 쥬라기 공원 > 시리즈는 물론, < 티라노의 발톱 >, < 용가리 >마저 사랑했던 내게 봉준호 감독의 < 괴물 >은 제목만으로 설레는 영화였다. 손꼽아 기다린 개봉일에 영화를 보며 가슴이 두근대던 기억이 선명하다. 대낮 한강에 괴물이 나오다니! 나는 한동안 원효대교를 지날 때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괴물의 그림자를 찾곤 했다.
다른 영화와는 달리, < 괴물 >은 성인이 되어서도 생각이 났다. 볼 때마다 새로웠다. 어려서는 괴물 그 자체만 보였다면, 어느 순간부턴 괴물 같은 우리 사회가 보였다. 책임을 회피하고 서로를 탓하기 바쁜 어른이 보였고, 허망하게 희생된 우리네 이웃이 눈에 밟혔다. 인간의 오만으로 태어난 괴물은 불쌍하기까지 했다. 나는 아직도 가끔 현서의 마지막 모습이, 먼저 가라며 손짓하던 희봉이, 소동이 끝나고 새 가족이 된 강두와 세주의 저녁상이 떠오른다. < 괴물 > 같은 괴수 영화는 단연코 없다.
고양이를 부탁해 / 상-이터널 선샤인 하-태풍태양 / 문라이트
정연경 – < 고양이를 부탁해 > (2001)
태희: 난 그냥 계속 돌아다니고 싶어. 계속 배를 타고 그 어디서도 멈추지 않고, 물처럼 흘러 다니면서 사는 거야
혜주:야, 그럼 난 강 옆에 아주 그림 같은 전원주택을 짓고 살고 있을 테니까 지나가다 들러,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스무 살이 된 후부터 지금까지 매년 12월이 되면 이 영화를 본다. 영화의 주인공은 혜주, 태희, 지영 그리고 비류와 온조 자매. 고등학생 시절 ‘절친’이었던 네 사람은 갓 성년이 되어 각자 다른 태도로 삶에 임한다. 부딪치고 깨지며 좌절하는,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던 이들의 청춘을 보며 어쩌면 난 자기 위로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영화는 답을 제시해 주지 않는다. 그저 넷의 선택을 먼발치서 지켜볼 뿐. 내 인생도 여전히 선택의 연속이다.
정효범 – < 이터널 선샤인 > (2004)
우선 인생 영화 하나를 정하는 일은 참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럴수록 단순해야 하는 법. 올해 자주 꺼내 들었던 영화가 뭐였을까 생각해보니 < 이터널 선샤인 >이었다. 연애도 어려운 이 시국에 괜히 마음이 복잡해서 꺼낸 건 ‘절대’ 아니다. 어쨌든 이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이별이 주는 고통을 지우기 위해 기억을 삭제해버린 남녀가 재회하는 신이다. 우리가 다시 만나 똑같은 이유로 헤어지게 되더라도 ‘괜찮다’ 말하는 바로 그 부분. 워낙 유명해 영화를 안 봤더라도 어디선가 접한 적은 있을 것이다.
누군가와 연인이 되면 사실 다른 점을 더 많이 목격하게 된다. 공통점이 많아 시작한 연애이지만, 결국은 차이점 때문에 끝을 맺는다. 감정의 보증 기간은 서로 달라서 상처를 줄 수도 있고, 내 세상에서 상대를 지워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럼에도 다시 이어지는 사랑, 유지되는 인연은 서로를 온전히 마주하려는 노력에서 시작된다는 걸 알려준 영화다. 연인이 있거나, 없더라도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은 분에게 추천한다.
조지현 – < 500일의 썸머 > (2009)
‘사랑은 소리 없이 찾아와’라는 노랫말이 있듯이 이별도 가끔은 소리 없이 찾아온다. 나와는 너무 달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대와 끝끝내 이별하고 마는 것은 꽤 잔혹하다. 동화 속에서나 나오는 영원한 사랑이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래서일까. 남녀 주인공이 수많은 위기를 함께 견디고 결국엔 평생을 함께한다는 이야기보다, 절체절명의 위기 끝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버린다는 이야기가 오히려 위로된다. 마치 < 500일의 썸머 >처럼!
결국 여름은 가고 가을이 왔다. 톰은 썸머와 헤어지고 어텀을 만났다. 헤어짐에 죽을 것 같다가도 새로운 사랑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사랑을 해본 이들은 썸머가, 해보지 않은 이들은 톰이 이해된다는데 어째서인지 나는 톰도 썸머도 모두가 짠하다. 사랑 앞에서는 누구나 어쩔 도리가 없는 불가항력적 인간이 된다.
한동윤 – < 태풍태양 > (2005)
초등학교 시절 만화 < 날아라 슈퍼보드 > 덕에 아이들 사이에서 스케이트보드가 인기를 끌었다. 동네 아이들이 하나둘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다니는 모습을 보니 나도 갖고 싶다는 욕망이 점점 커졌다. 우리 집이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버지한테 떼를 부려 기어코 스케이트보드를 장만했다. 머리에는 날렵하게 보드를 타는 장면이 자리했으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운동신경이 떨어지는 나에게 스케이트보드는 엉덩방아를 잘 찧기 위한 보조 기구일 뿐이었다. 몇 번 타다가 집 어딘가에 처박아 뒀다.
그때의 미련이 남았던 걸까? 성인이 된 후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이 부럽고, 멋있게 느껴졌다. 하지만 해 볼 용기는 생기지 않았다. 다치는 것이 너무 두려웠던 탓이다. 나와 달리 그들은 목표로 삼은 기술이 성공할 때까지 몇 번이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도전하니 대단해 보일 수밖에 없다. 어그레시브 인라인 스케이팅을 소재로 한 < 태풍태양 >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위해 노력하는 청춘을 그린다. 이 영화로 어린 시절부터 이어지는 아쉬움을 달랜다.
황선업 – < 다크 나이트 > (2008)
개인적으론 내 고정관념에 균열을 일으킨 작품에 감명을 많이 받는 편이다. 무신론과 종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심어 준 리처드 도킨슨의 < 만들어진 신 >을 인생서적으로 꼽는 맥락과 동일하게, < 다크 나이트 > 또한 히어로 무비의 클리셰를 깨부수고 전혀 다른 타입의 해석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나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던 영화다.
끝내는 배우의 자의식까지 침식해 갔던 희대의 악당 조커에 맞서 싸우는 배트맨의 모습은, 내가 여태껏 봐왔던 영웅의 화려한 이미지와는 크게 달랐다. 선과 악 사이에서 갈등하며, 거대한 힘 앞에선 나약하기까지 했다. 영광과 칭송을 포기함으로써 고담시티를 지켜내는 결말은 특히 인상적.
시민들의 환호나 여주인공과의 달콤한 키스 같은 여유 대신, ‘인간’으로서의 영웅을 재조명하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생각과 철학으로 완성된 새로운 ‘배트맨’과 새로운 ‘히어로 무비’. 늘 바라보던 시각에서 벗어나야만 보이는 세계가 있음을 이 영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 나에게 < 다크 나이트 >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황인호 – < 문라이트 > (2016)
구더기가 무서워 장을 못 담그는 심정으로, 영화를 자주 보지는 않는 편이다. 영화를 좋아하는 주제에 까탈스러워서, 취향에 맞지 않는 영화를 보면 그 시간이 그렇게 아깝다. 대신 입맛에 맞는 영화를 보면 세계관이 바뀔 정도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데, < 문라이트 >를 보고 딱 그랬다. 사회, 경제, 문화적 배경이 나와는 전혀 다른 인물들이 등장하고, 내가 살아갈 일이 없을 인생을 살아간다.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난 사람들의 삶과 고민들이 구체적으로 묘사되며 서사를 이끈다. 영화를 보고 나면 세상이 한층 다채로워진 기분이다.
주인공은 빈민가에서 마약을 팔고, 흑인 남성으로서 자신의 정체성과 성 지향성에 대해 고뇌한다. 개인이 어쩔 도리가 없는 요인들에 의해 정체성을 부여받고, 이를 수행하며 느끼는 감정들이 보인다. 특수한 이야기에서 보편성이 흘러나온다.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의 일부를 억눌러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서글픔이 선명히 보일 것이다. 나와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사람과도 영혼이 공명할 수 있음을 느끼게 해준, 아름다운 영화다. 전체를 관통하는 은은한 푸른 빛과 파도 소리는 아직도 강렬한 이미지로 뇌리에 박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