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앞으로 나올 ‘Kick’ 4부작의 시작을 끊는 작품이라는 뜻에서 i(원)으로, 혹은 자신을 지칭하는 i(아이)의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겠다. 카니예 웨스트의 < Yeezus >와 FKA 트위그스의 < EP2 > 프로듀싱에 참여하며 이름을 알린 베네수엘라 출신 전자음악 아티스트 아르카(Arca)는 네 번째 정규 앨범 < KiCk i >로 두 가지 ‘i’의 면을 모두 담아낸다. 지극히 전위적이었던 사운드는 새 출발을 도모하듯 팝의 물결을 수용적으로 받아들였고, 앨범은 트렌스젠더 소재와 자국의 문화 등 본인이 주체가 되어 전개를 펼쳐 나간다.
비트의 무작위 분절과 형식 파괴의 불쾌한 골짜기를 형성한 < Xen >과 < Mutant >에서 애절하면서도 음침한 멜로디에 위태로운 보컬을 도입하기 시작한 아트팝 < Arca >로의 변천사를 집약해보면, < KiCk i >가 보여준 변화는 갑작스레 등장한 것이 아닌 난이도의 하강 곡선을 꾸준히 따라온 산물임을 알 수 있다. 아직 일반 정서에는 난해한 수준이지만, 찰리 XCX(Charli XCX) 같은 아티스트로 차트에서 유명세를 얻기 시작한 ‘버블검 베이스(Bubblegum Bass)’와 대중 친화적인 라틴 요소를 대거 투입하여 곳곳에서 기시감을 마련한 덕이다. 트랙 간 지점을 뚜렷하게 구분 지은 편성 또한 직관성을 높인다.
< Arca >에서 재료 정도로 배경에 묻어나던 보컬은 현작에 이르러 독자적 자리를 위임받았으며, 62분짜리 싱글 ‘@@@@@’와 같이 별다른 제약 없이 비정형성을 지향하던 사운드는 명확한 틀 아래 나름의 규칙적인 반복과 체계를 갖춘다. 거대한 조감도와 미세한 변칙성을 냉정하게 탐구하던 실험 위주의 초기 작품에 비해 좀 더 감정적이고 상투적이다. 이는 페이퍼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비친 “단순하게 팝을 하고 싶지도, 완전한 실험주의자가 되고 싶지도 않다”라는 아르카의 의지를 대변한다. 예전만큼 까탈스럽지도 않지만 다소 친절하지도 않은, 마치 함부로 규정할 수 없는 ‘Nonbinary’ 같은 음악인 셈이다.
개개의 음절, 더 나아가 텍스처의 연속성을 중시하던 < Xen >이 완성된 곡을 망가뜨리지 않는 선에서 뮤직비디오라는 부가적 장치를 이용해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면 현작은 자극적인 시청각 요소를 전부 동원하여 주제 의식을 직접 명시하고 강조한다. ‘네 소리를 스스로 내’라 거듭 외치며 성별 영역에 구애받지 않는 자아를 상징하는 첫 트랙 ‘Nonbinary’에서부터, 스페인어로 주책바가지라는 뜻을 달아 내면의 자신감과 부끄러움을 혼란스럽게 교차하고 고해하는 ‘Metrequefe’까지 아르카는 사운드를 침범하여 도발적으로 청자를 압도하고 계몽 정신을 주입한다.
물론 그가 구상한 글리치(Glitch)와 팝의 ‘절충안적 노선’을 증명하는 방식은 매끄럽다. 부드러운 신시사이저와 소음을 조화롭게 사용한 ‘Time’과 난폭함과 서정성을 넘나드는 ‘Metrequefe’의 기조 변화는 분명 그가 갈고 닦아온 내공과 형용할 수 없는 위기감을 전부 취하면서도 동시에 팝의 직관적 형태를 띤다. 같은 베네수엘라 출신이자 플라멩코 팝 뮤지션인 로살리아(Rosalía)가 피처링으로 참여해 레게톤 가운데 날카로운 소음과 파열음을 배치한 ‘KLK’는 정형화된 팝 노선을 거부함과 동시에 다음 세대 팝의 새로운 방향성을 진취적으로 제시한다.
다만 전자음악가 사이에서 기존 클럽 사운드가 가진 한계점을 벗어나려는 해체클럽(Deconstructed Club) 운동의 행보 가운데서도 전자음악 뮤지션 소피(Sophie)로 대표되는 인공적 웡키(Wonky) 스타일을 차용했다는 점과 성 소수자의 색채를 강하게 피력하는 것은, 그가 소피 소속의 레이블인 ‘PC 뮤직’에 영향받은 것을 크게 암시한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특유의 불쾌하고 우울한 아우라가 일련의 공정을 거쳐 상품화되고, 비범함마저 가공된다는 점이다. ‘Watch’나 ‘Rip the slit’, ‘La Chíqui’ 같은 곡은 단순 진보적이기보다는 사운드의 질감과 재료만 특이할 뿐 멜로디 라인이나 구성은 다분히 평범하고 타 아티스트의 색채가 짙게 묻어난다.
무거운 피아노 선율로 열기를 낮추고 이에 < Xen >의 ‘????? A’의 기괴한 비트를 절묘하게 삽입한 ‘Calor’의 기조 변화는 조금 의아스럽기는 해도 앞서 연속적으로 등장한 피로감을 줄이는 쉼터 역할을 수행하지만, 이어지는 뷰욕(Björk)과의 합작 ‘Afterwards’은 그의 대표곡 ‘Hyperballad’의 신묘한 기운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No queda nada’ 같은 경우에는 < Arca >의 성스러운 작풍을 답습, 혹은 조금 밝게 변조한 형태로 보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그가 펼쳐놓은 화려하고 장대한 ‘Nonbinary’한 주장에 비해 앨범 자체는 몇몇 곡을 제외하면 겉돌거나 편향된 위치에 갇힌다.
미래 음악의 전방을 이끌던 선두자가 콘셉트를 위해 뒤로 한 보 물러나는 행위는 두 보 전진을 위한 준비 과정일지라도 그 순간만큼은 후퇴를 의미한다. 차라리 탈선을 택한 시점에서 온전히 새 흐름을 제시할 팝 프로듀서 역할에 몰두하고 가능성을 제시했더라면 어땠을까. 비록 순수함은 퇴색될지라도 적어도 그를 후퇴하는 모습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가지를 뻗어 나가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 수록곡 –
1. Nonbinary
2. Time
3. Mequetrefe
4. Riquiquí
5. Calor
6. Afterwards (Feat. Björk)
7. Watch (Feat. Shygirl)
8. KLK (Feat. Rosalía)
9. Rip the Slit
10. La Chíqui (Feat. Sophie)
11. Machote
12. No Queda Nad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