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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획 ‘미국’] 6. 케이팝 팬덤이 사회정의를 부르짖는 이유

부모 마음대로 되는 자식이 아무도 없다고 하지만, 한국에서는 정치와 담을 쌓은 케이팝이 되려 미국 정치에 휘말리는 아이러니를 예측한 케이팝 기획자가 있을까. 케이팝 팬덤은 올해 6월 오클라호마 털사(Tulsa)에서 개최된 트럼프 대통령의 유세에서 백만 건이 가까이 이루어진 가짜 참석 신청의 배후가 자신들임을 주장했고, 그 이전에도 백인우월주의나 극우 이념에 관련된 해시태그를 케이팝 이미지와 영상으로 도배하는 등 정치적 목소리를 거침없이 내고 있다. 예상치 못한 전개지만 케이팝 팬덤과 정치의 결합은 이미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 연결고리를 들여다보면 앞으로 케이팝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단서도 찾을 수 있다.

케이팝의 세계적 인기에서 유념할 점은, 그 시작점이 주변부였다는 사실이다. 방탄소년단이 빌보드 차트 1, 2위를 한 번에 차지하는 나날이 있기 전에도 케이팝 팬들은 존재했으나, 이들은 멸시나 조롱, 혹은 무시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일종의 마니아 문화로 시작한 탓도 있겠지만, 문화의 생산자나 소비자들에 대한 편견도 분명하게 작용했다. 클래식 음악이나 커피, 와인처럼 소수가 몰입해서 소비하는 문화가 무조건 천대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케이팝의 ‘성공’이 완성하는 언더독 서사는 이런 배제의 역사에서 설득력을 얻고 팬들을 결집시킨다.

미국 케이팝 팬덤은 크게 보면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코스프레 같은 긱(geek)들의 문화와 그 뿌리를 공유한다. 단적인 예시로 케이콘(KCON)이 있다. 한국의 대중음악을 사랑하는 수만 명의 팬들이 로스앤젤레스나 뉴욕으로 몰려드는 이 축제는 미국 케이팝 팬덤의 주요 행사 중 하나다. 만화 팬들의 코믹콘(Comic-Con)이나 게임회사 블리자드의 블리즈컨(BlizzCon) 같은 박람회와 비슷한 양상이다. 한류는 서브컬쳐를 소비하는 사람들의 활동 영역에 들어와 있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는 게임과 만화, 케이팝 같은 서브컬쳐 커뮤니티의 큰 축이다. 생각해보면 케이팝 팬들이 트위터나 틱톡을 통해 활동하는 것은 한국 케이팝 팬덤의 특성을 떠나서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면 케이팝이 정치나 사회정의(social justice)와 어느 지점에서 교차하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케이팝을 논할 때 그 음악이 가진 소구력의 실체를 부정한 채 인기를 괴현상 보듯 하는 시선들이나, ‘진보 성향의 요즘 애들이 이상하게도 한국의 음악을 좋아하더라’는 미국 보수진영의 해석이 이 수준에서 멈춰있다.

케이팝이 미국에서 인종과 나이, 성별을 초월한 공감대를 이끌어낸 이유는 일종의 문화적 대안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뻔하고 지루한 음악에 질린 미국 대중들에게 새로운 재미를 선사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그런 이유로 케이팝을 소비하기 시작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오히려 그 반대다. 케이팝 팬들은 미국 음악계, 연예계의 자극적이고 저질인(trashy) 논란으로 가득한 모습에 대한 대안으로 ‘착한'(wholesome) 한류 뮤지션을 소비한다.

칸예 웨스트는 2009년 MTV 비디오 뮤직 어워즈에서 수상소감을 말하는 테일러 스위프트의 마이크를 뺏었고, 저스틴 비버는 아이돌로 활동하던 2013년 식당의 걸레통에 소변을 봤다. 2015년의 아리아나 그란데는 도넛에 침을 발랐는가 하면, 도자 캣(Doja Cat)은 백인우월주의 채팅방에서 인종주의적 발언을 한 영상이 올해 공개됐다. 미국에서 차트 1위를 하는 슈퍼스타 뮤지션들에 대한 소식은 이들의 실력 못지않게 비대한 자아와, 이를 연료 삼아 끊임없이 논란에 불을 지피는 티엠지(TMZ)같은 가십 전문지가 내뱉는 황색 저널리즘의 온상이다.

아이돌을 필두로 한 한국의 대중음악이 미국에 알려지는 과정에서는 뮤지션의 비대한 자아도, 미국 유사 언론의 관심도 부재했다. 미국의 케이팝 팬들 중 주류사회에서 배척당하는 소수자들, 사회정의나 정치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의 실마리가 여기서 풀리기 시작한다. 자신들이 인식하고 있는 사회의 폭력적인 구조들을 그대로 재생산하는 미국의 주류문화에 염증을 느낀 이 사람들은, 타인을 깔보거나 하대하기는커녕 예의와 존중으로 무장한 한국 아이돌들의 페르소나를 보고 공론장을 정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투사한다. 이 ‘착함’의 실존 여부와 상관없이 말이다.

출발점이 어디였든 케이팝이 지금 미국 팬들에게 받는 기대는 선함 그 자체에 대한 것이다. 케이팝 팬덤이 커지면서, 기획사들이 팔고 있는 이미지와 그 뒤에 숨겨진 ‘본질’ 사이의 간극을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이젠 들려오고 있다. 문화전유나 뮤지션, 연습생의 인권에 대한 지적은 모두 이런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미국에서 ‘주류’와 ‘비주류’에 대한 기준을 독점하고 있는 사람들은 점점 소수가 되어가고 있다. 케이팝이 영미권에서 진정한 승리를 거두려면 멋진 음악과 영상 이상의 섬세함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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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획 ‘미국’] 5. Intersectionality: 여러겹의 정체성이 교차하는 음악

억압받는 약자에 대한 담론 중에서 페미니즘은 오늘의 대중에게 가장 익숙한 단어 중 하나다. 그 의미나 정의에 대한 합의는 요원하지만, 일단 사람의 경험이나 정체성을 읽어낼 때 성별에 더 무게를 두고 해석하는 담론은 널리 퍼져있다. 뮤지션들 역시 자아를 음악에 담아내기에, 이들의 작품과 페르소나를 이해할 때도 페미니즘은 유용한 인식의 틀을 제공한다. 그러나 사람의 정체성은 입체적이기에, 성별이라는 단일차원에서 바라보면 반드시 놓치는 부분이 생긴다. 정체성의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을 이해하면, 음악에 담긴 이야기들과 이를 둘러싼 논란들의 맥락이 보다 명료하게 드러난다.

미투 운동이 세상을 휩쓴 후, ‘페미니스트 뮤지션’의 브랜드를 획득한 인물들이 몇 명 있다. 타임지가 미투 운동을 조명해 ‘침묵을 깬 사람들’을 2017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을 때 표지에 얼굴을 올린 테일러 스위프트가 그중 하나다. 2013년 MTV 비디오 뮤직 어워즈(VMA) 무대에서 로빈 시크(Robin Thicke)와의 무대에서 파격적인 트월킹을 선보이며 전통적인 여성상에 대한 반론을 내놓은 마일리 사이러스 역시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열렬한 페미니스트’라고 인터뷰했다.

팝스타의 반열이 아니더라도, 피오나 애플(Fiona Apple)은 8년 만에 내놓은 새 앨범 < Fetch The Bolt Cutters >에서 모두 ‘절단기를 들고 와’서 직접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라는 메시지를 보내 평단의 사랑을 받았다. 라나 델 레이(Lana Del Rey)는 2019년 발매한 후 그 내용이 ‘부드러운 페미니즘'(soft feminism)의 필요성을 강조한다고 말해 논란에 불을 지폈다.

어떤 사람이나 발언이 ‘페미니스트’인지에 대한 대략적인 이미지는 이미 대중문화 속에 퍼져있다. 예컨대 자신의 욕망과 생각을 거침없이 이야기하는, ‘걸크러쉬’에서 조금 진화한 여성의 모습이다. 테일러 스위프트, 마일리 사이러스, 피오나 애플, 라나 델 레이 같은 뮤지션들이 페미니스트 아이콘으로 조명받는 이유 역시 이들이 그 이미지에 잘 들어맞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들은 여성성 이외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모두 포크 음악과 관련 있는 백인이라는 점이다.

이들 여성의 목소리가 의미 없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이들이 모든 여성을 대표하는 것으로 일반화하기엔 너무 많은 맥락이 지워진다. 예를 들어, 마일리 사이러스가 트월킹을 하면서 내놓은 ‘얌전하지 않은 여성’의 이미지는, 영미권에서 백인 여성들이 항상 가정적이고 수동적인 역할을 강요받아온 역사의 연장선이다. 반면 이세벨 스테레오타입(Jezebel stereotype), 옐로우 피버(yellow fever) 등의 시선으로 언제나 극한의 성적 대상화를 당해온 흑인이나 동양계 여성의 경험을 마일리 사이러스가 제대로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라나 델 레이가 ‘부드러운 페미니즘’을 옹호했을 때 논란이 일어난 것 역시 그가 이런 맥락을 무시하는듯한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 Norman Fucking Rockwell! >이 학대를 미화한다는 비판에 대해 그는 비욘세, 도자 캣(Doja Cat), 카밀라 카베요 등 유색인종 뮤지션들을 언급하며 이들이 ‘섹시’를 앞세워 차트 1위를 했고, 자신도 13년간 여성의 입장에 대해 노래해 왔는데 왜 자기만 욕을 먹어야 하냐는 반응이었다. 정체성의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에 대해 무감각한 언사다.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은 사실 법조계에서 처음 사용된 단어다. 그 계기는 1976년 자동차 제조사 제너럴 모터스(GM)가 흑인 여성에게 채용상 불이익을 준 일인데, 흑인에 대한 차별 금지법도, 여성에 대한 차별 금지법도 이를 막을 만한 근거가 되지 못했다. GM이 흑인 남성과 백인 여성을 채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별을 바라볼 때 모든 흑인, 모든 여성이 그룹별로 같은 방식으로 차별받는다고 생각한다면, 흑인 여성을 포함한 유색인종 여성의 경험들은 지워질 수밖에 없다. 형태주의에서 말하는, 전체는 그 부분의 합 이상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백 명의 사람이 있다면 백 가지의 페미니즘이 있기에, 모든 여성 뮤지션의 메시지가 저마다 의미 있다.

인종이나 사회, 경제적 배경 등을 고려하고 여성 뮤지션들의 음악을 보면 다채로운 페미니즘을 볼 수 있다. ‘Run the world (Girls)’가 흑인이자 걸어 다니는 대기업인 비욘세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곡이 실제로 전달하는 메시지는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다(과연 정말 세상을 주도하는 것은 여성인가, 아니면 비욘세인가?). 미츠키(Mitski)가 강렬한 기타 톤을 앞세워 외롭다고 소리치는 모습 역시 동양인 여성들은 얌전하고 가부장에게 복종하는 이미지가 있기에 훨씬 강렬하게 다가온다. 성 소수자자 Z세대인 킹 프린세스(King Princess)가 부르는 사랑 노래는 화자의 입장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뻔하게 들린다.

‘페미니스트 뮤지션’의 전형으로 다시 돌아와 보면, 이 단어의 실체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쩌면 오히려 여성의 목소리를 지켜내는 접근법일 수도 있겠다. 여성성 하나로 정의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음악에 담긴 이야기를 여성성 하나에 대한 이야기로 해석하면 당연히 많은 부분이 지워진다. 여성에 대한 이야기로 논리를 전개했지만, 상호교차성은 정체성 그 자체에 대한 인식의 틀이다. 그 어떤 개인도 절대적인 약자, 혹은 강자일 수 없다. 이분법을 벗어나 음악에 담긴 사람을 온전히 직시했을 때 그의 이야기가 더 또렷하게 들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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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획 ‘미국’] 4. PRIDE: 팝 음악 속 ‘퀴어 코드’의 이면

댄스음악은 현재 대중음악의 주요 문법이다. 딥하우스나 디스코처럼 클럽 문화에서 탄생한 비트들에 기반한 음악이 인기를 끄는 흐름은, 비주류의 문화가 주류사회로 흘러나오는 흐름이기도 하다. 혐오를 피해 언더그라운드에서 모일 수밖에 없었던 퀴어 커뮤니티는 이 맥락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 사회정의(social justice)가 갈수록 큰 화두로 작용하면서 많은 퀴어 뮤지션들의 목소리가 주목받고 있고, ‘퀴어 코드’는 이제 유행의 한 요소로 작용하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이 현상들은 어느 날 갑자기 발현된 것이 아니다. 퀴어 커뮤니티의 문화는 알게 모르게 오랫동안 대중의 사랑을 받아왔다.

퀴어 문화의 요소를 읽어내려면 그 기저에 깔린 정서를 알아야 한다. 그 출발점은 미스핏(misfit)의 입장이다. 성 소수자는 성 정체성이나 역할에 대한 사회의 통념 속에 깔끔하게 들어맞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 사회는 이런 ‘부적응자’들, 특히 성 소수자들을 향해서는 노골적으로 혐오와 폭력을 휘두른다. 그렇기에 많은 성 소수자들은 생존을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다른 자아를 연기한다. 일상이 일종의 퍼포먼스인 셈이다. 자아를 억누르지 않고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열망은 퀴어 예술의 중요한 테마다.

하우스와 디스코에 맞춰 보그를 추며 잠시나마 자신을 내려놓던 퀴어 커뮤니티의 문화는 주류사회의 외면 속에서 피어났지만, 그 정서는 대중음악 깊숙이 침투해있다. 아바의 ‘Dancing queen’이나 글로리아 게이너의 ‘I will survive’ 등 1970년대 디스코곡들로 대표되는 퀴어 찬가(anthem)의 계보는 마돈나의 ‘Vogue’, 레이디 가가의 ‘Born this way’를 거쳐 두아 리파의 ‘Physical’까지 내려온다. 모두 화려한 조명과 반짝이는 의상이 어울리는, ‘글램'(glam)이 있는 음악이다. 이런 강렬한 비주얼은 오직 클럽에서만 ‘정상’ 취급 받는다는 점에서 퀴어 커뮤니티와 입장을 같이한다.

맥락이나 정서와 별개로, 퀴어 문화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힙’해진 세상이 왔다. 퀴어 커뮤니티가 주류 담론에서 낼 수 있는 목소리가 커지기도 했고, 언더그라운드의 문화는 언제나 주류의 문화보다 한발 앞서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성 소수자의 문화를 전유하는 현상도 나타나고, 이 문화를 ‘제대로’ 대표하고 전파하는 게 뭔지에 대한 논란도 보다 크게 불거진다.

케이티 페리의 2008년 싱글 ‘I kissed a girl’을 보자. 빌보드에서 7주 연속 1위 했던 이 곡은 얼핏 보면 동성애를 지지하는 노래 같지만, 막상 성 소수자들은 자신을 대상화하는 시선이라며 반발했다. 케이티 페리 본인이 퀴어 커뮤니티에 기여한 맥락이 없는데 갑자기 이런 노래를 냈고, 가사 내용에서도 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찾아볼 수 없다. 다른 행보나 발언에 비추어 봤을 때 이 노래는 그저 ‘여성끼리 키스하면 섹시하다’라는 일차원적인 사고로 읽힌다는 것이다. 실제로 케이티 페리는 곡이 나온 10년 뒤, 가사 내용이 부적절했음을 인정하고 곡을 지금 냈다면 ‘일부 수정’했을 것이라고 인터뷰했다. 실제로 곡을 다시 내지는 않았다.

반면 공개적으로 커밍아웃했고, 성 소수자로서의 경험을 음악에 꾸준하게 담아온 프랭크 오션도 문화 전유에 대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는 1980년대의 HIV 패닉을 화두로 삼아, ‘만일 퀴어 커뮤니티와 그 문화가 사회적으로 내몰리지 않았다면’을 상상하는 클럽 파티 프렙(PrEP+)을 2019년 개최했다. 그러나 소수의 인원에게만 초대장이 주어졌고, 그 구성원들도 대다수가 백인에 성 소수자도 아니었다고 전해져 파티는 실패로 평가된다. 힙스터 무리에 매몰되어 막상 성 소수자들이 자유롭게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는 ‘안전한 공간'(safe space)은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저 경제적 이익을 취하기 위해 성 소수자의 문화를 다루는 퀴어 베이팅(queer-baiting)과, 실제로 커뮤니티를 지지하기 위한 협력자(ally)로서의 노력은 한 끗 차이다. 이를 구분해낼 때 중요한 것은 무대의 중심을 어떤 캐릭터와 서사가 차지하고 있는지다. 정답은 없고 오답은 많은 영역이지만, 소수자들이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사회 전반으로 확대하려면 필요한 시행착오다. ‘퀴어 코드’ 역시 한순간의 유행이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