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을 시작하며 세 가지 질문을 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우선 ‘술 드실래요?’다. 세상 모든 사람이 음주를 즐기는 건 아닌데도 언젠가부터 항상 술을 권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두 번째로 아무나 붙잡고 ‘음악 좋아하세요?’라고 묻지 않기로 했다. 모두가 음악에 지대한 관심을 두고 있지는 않다. 그리 궁금하지 않은 음악계 소식을 지루하게 듣고 있어야 하는 상대의 고충을 고려했다. 마지막으로 이 질문만큼은 반드시 줄여야 함을 절감했다. ‘야구 좋아하세요?’
나는 야구광이다. 매일 저녁 여섯 시 삼십 분, 주말 낮 두시만 되면 웬만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반드시 야구 중계를 켠다. 영어 공부를 핑계로 10년째 시즌권을 결제하고 있는 메이저리그 중계까지 더하면 새벽 두 시 십 분과 오전 아홉 시까지 야구의 시간으로 할당된다. 오랜 친구들과는 반드시 야구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하고 오랜만에 가족이 모일 때면 항상 야구 중계를 켜 둔다. 어젯밤 꿈에서도 나는 호쾌하게 초구 스트라이크를 던지는 에이스 투수가 되어 경기를 즐기다 팔을 머리 위로 올리는 것도 찌뿌둥한 현실로 돌아오고 말았다.
아버지 손에 이끌려 신문지 모자를 쓰고 찾은 야구장, 푸르른 그라운드가 눈 앞에 펼쳐지던 그 순간부터 야구는 세상을 이해하는 문법이자 공감대를 형성하는 중요한 문화 요소가 되었다. 돌아보면 아버지께서는 야구에 미쳐있는 나의 고향에서 살아남기 유리한, 나름의 사회생활 조기 교육을 일찌감치 해주신 셈이었다. 야구 학원 가는 봉고차 안에서도, 저녁거리 심부름하러 지폐 몇 장을 쥐고 들어선 슈퍼마켓에서도, 마른안주를 주워 먹던 호프집에서도 야구 중계가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시내 초등학생들이 모두 모인 교육청 영재 캠프에서 어색한 분위기를 깨 준 것도 야구 이야기였고, 영어를 잘하고 싶어 학교 원어민 선생님과 친해질 구석을 찾은 곳도 야구장이었다.

결정적으로 야구가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음악이었다. 2013년 이즘에 처음 들어와 팝의 고전 강의를 들을 때 나는 내가 의외로 선배들이 이야기하는 가수와 노래가 낯설지 않다는 점이 의아했다. 알고 보니 그들은 야구장에서 내가 열심히 따라 부르던 응원가의 주인공들이었다. 야구장에 가기 전 나는 항상 모든 응원가를 숙지하여 가곤 했는데, 운이 좋게도 내가 응원하는 구단은 주로 유명한 팝 노래를 번안하여 활용하는 팀이었다.
캐롤 킹과 제리 고핀의 명작 ‘The Loco-motion’은 거액의 FA 계약을 따냈으나 부진을 거듭하다 음주 문제로 커리어를 접은 선수의 상징 곡이었다. 긴 무명 시간을 떨치고 주장으로 거듭난 선수의 응원가는 도널드 분의 ‘Beautiful Sunday’였고, 앞날이 창창한 신인 내야수였으나 끔찍한 수비 탓에 중견수로 자리를 옮긴 선수의 주제가는 터틀스의 ‘Happy Together’였다. 지금은 다른 팀의 스타가 된 타자가 나올 때면 팬들은 보니 엠의 ‘Riverside of Babylon’을 소리 높여 불렀고, 나중에는 이럽션의 ‘One Way Ticket’까지 응원가가 되었다. 올드 팝만 나온 건 아니었다. 콰이어트 라이엇의 ‘Cum on Feel the Noize’와 트위스티드 시스터의 ‘We’re Not Gonna Take It’을 처음 들은 곳도 야구장이었다.
그냥 노래를 부르고 싶어서였을까, 또래보다 음악을 더 많이 안다는 허세를 부리고 싶어서였을까. 야구장 응원가로 나름 음악 공부를 열심히 했다. 리틀 에바가 부른 ‘Locomotion’으로부터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와 카일리 미노그의 리메이크 버전을 찾아 듣고, 캐럴 킹과 제리 고핀의 빛나는 브릴 빌딩 틴 팬 앨리 명곡을 찾아 노트에 써 내려갔다. 콰이어트 라이엇, 트위스티드 시스터로 알게 된 1980년대 헤비메탈의 휘황찬란한 시대로부터 머틀리 크루, 건스 앤 로지스, 밴 헤일런, 데프 레퍼드의 이름을 발견했다.
시간이 흘렀다. 노래의 주인공들이 은퇴를 선언하고, 응원하는 팀은 단 한 번도 정상에 서지 못했다. 2017년부터는 노래 원작자들이 KBO에 응원가 편곡에 대한 저작권을 요구하며 유명 팝송 응원가가 구단 자체 제작 노래로 대체되었다. 선수도, 응원가도 사라졌다. 그러나 음악만큼은 기억에 남았다. 아직도 백스트리트 보이스의 ‘Straight Through My Heart’를 접하게 되면 팀을 옮긴 프랜차이즈 선수에 대한 감정이 되살아나고, 노래방에서 노브레인의 ‘넌 내게 반했어’를 선곡하면 중간중간 이름을 넣어 소리 질러야 할 것만 같다. 고령의 닐 세다카가 음악 다큐멘터리에 등장할 때마다 나는 ‘날려버려!’를 외치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지난 3월 한국갤럽의 조사에 따르면 20대의 18%만이 프로야구에 관심이 있다고 한다. 80% 이상이 야구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이다. 일부 선수들의 방종과 구단의 태만한 운영, 올림픽 참사로 만천하에 드러난 실력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야구에 열 내는 사람이 희귀한 요즘 굳이 다른 사람에게 재미없는 이야기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음악, 술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야구를 보면 음악이 생각나고, 음악을 듣다 보면 야구를 떠올린다. 그리고 야구에 몰입하다 보면 술이 당긴다. 시원한 맥주 한 잔을 손에 든 채로 옆자리 처음 만난 아저씨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힘차게 견제 응원을 하고 싶다. 그렇게 음악을 체험하고 익힌 경험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음악을 글로 쓰고 말로 전할 수 있다.
강요는 아니더라도, 모르는 사람에게 친절하고 재미있게 권하는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게 오늘도 넌지시 질문을 던져본다. ‘음악 좋아하세요? 그리고 야구도 좋아하시나요? 술 한 잔 하실까요?’. 혹시 내가 응원하는 이 팀까지 좋아한다면 금상첨화인데… 여기까지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