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ies
Feature

[김도헌의 실감, 절감, 공감] 우상의 몰락

마릴린 맨슨의 음악을 좋아했다. ‘안티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외치며 도발적인 퍼포먼스를 펼치던 하얀 분장의 프론트맨이 세상이 싫었던 사춘기 소년에게는 그렇게 멋져 보일 수 없었다. 콜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 사건을 다룬 마이클 무어의 영화 < 볼링 포 콜럼바인 >을 보고 나서는 사회로부터 핍박받는 록스타의 환상까지 더해졌다. < Antichrist Superstar >, < Mechanical Animals >, 1997년 MTV 어워드에서의 ‘The beautiful people’ 라이브, 베스트 앨범 < Lest We Forget > 등등. 많이도 들었다.

안타깝게도 이젠 어디서도 마릴린 맨슨을 좋아했노라 이야기할 수 없다. 현재 그는 추악한 성폭행 범죄 의혹을 받고 있다. 2007년 당시 19세 나이로 맨슨과 교제하던 배우 에반 레이첼 우드가 지난해부터 맨슨의 그루밍과 학대, 성폭력을 폭로하고 있다. ‘Heart shaped-glasses’ 뮤직비디오 촬영 도중 성폭행을 가했고, 하루 152번 이상 전화를 걸었다는 등 집착이 심했다는 주장이다.

일방적인 내용도 아니다. < 왕좌의 게임 >에 출연한 배우 에스미 비앙코 역시 2009년부터 2013년까지 마릴린 맨슨에게 성적 학대와 폭행을 당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맨슨에게 성적으로 학대당했다고 주장하는 여성만 15명이다. 맨슨은 혐의를 부인했지만, 레이블에서 쫓겨났다.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맨슨은 새 친구의 도움을 받아 다시금 대중 앞에 섰다. 놀랍게도 그 친구는 카니예 웨스트였다.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하다 ‘생일이당’을 창당하여 대통령 선거에 뛰어든 래퍼, 악명 높은 강간범 빌 코스비의 무죄를 외치며 관심을 끌고 양극성 장애에 시달리며 망언을 내뱉다 아내 킴 카다시안에게 버림받은 래퍼, 카니예 웨스트였다.

카니예 웨스트는 소문만 무성하던 앨범 < Donda >의 2차 리스닝 파티에 마릴린 맨슨을 초대했다. 시카고 솔져 필드 한가운데 지어진 저택 세트장에서 난간에 기댄 채로 모습을 드러낸 맨슨은 수록곡 ‘Jail pt.2’에 참여한 상황이었다.

맨슨의 옆에는 래퍼 다베이비가 있었다. 2021년 초까지만 해도 메가 히트 싱글 ‘Rockstar’와 두아 리파와의 콜라보레이션 ‘Levitating’으로 세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아티스트였던 그는 7월 마이애미의 힙합 페스티벌 공연 도중 “에이즈, 성병에 걸려 2~3주 안에 죽을 일 없는 사람들, 게이, 문란한 여자들 제외하고 핸드폰을 높이 들어”라 발언하며 장내를 침묵에 빠트렸다.

논란이 된 후에도 다베이비는 소셜 미디어에 실언을 늘어놓고 조롱 격 뮤직비디오를 촬영하는 등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줄줄이 공연이 취소되고 엘튼 존, 마돈나, 릴 나스 엑스 등 아티스트들의 비판이 쏟아지자 마지못해 사과의 메시지를 내놓았다. 그도 ‘Jail Pt.2’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

마릴린 맨슨과 다베이비가 참여한 < Donda >는 ‘인디펜던트’지에게 0점을 받았다. 불공정하다고? ‘인디펜던트’ 지를 제외하고도 카니예 웨스트의 작품에는 문제가 많았다. 2020년부터 작업을 알렸던 앨범은 수차례 발매 연기된 끝에 8월 29일 기습 공개됐고, 그마저도 미완성본이라 두 번의 추후 수정을 거쳐야 했다.

실망이 컸음에도 나는 < Donda >를 동정했다. < Jesus Is King >부터 의아한 행보만 보여준 칸예지만, 호불호를 떠나 지난 20년을 지배한 시대의 아이콘이 정신을 차리고 멋진 모습을 보여주길 바랐다. 지난 1월 13일 사인을 요청한 남성 팬을 때려눕혀 LA 경찰에게 용의자로 지목됐다는 뉴스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방탕한 록스타들과 갱스터 래퍼들의 음악이 친숙했던 나는 예술가들의 경거망동에 관대한 편이었다. ‘예술과 인성은 별개’라 믿기도 했고, 대놓고 자랑할 순 없어도 일종의 길티 플레저처럼 아쉬움을 곱씹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점점 그들을 이해하기가 어려워진다.

인내심이 낮아진 것일까?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에 물들어버렸나? 아니다. 이것은 배신감이다. 나를 음악의 세계로 인도한 가수의 노래와 함께했던 소중한 기억이 사실은 추악한 과정의 결과물이었다는 당혹감과 분노다. 마릴린 맨슨, 카니예 웨스트, 다베이비의 음악을 좋아했노라 당당히 말할 수 없게 된 허탈함이다. 오랜 시간 동안 활동을 이어가면서도 논란 없이 만인의 존경을 받는 예술가들이 있다. 우상은 그런 이들에게 어울리는 영예다.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또 다른 우상이 몰락을 예고하고 있다. 지난해 < The Nearer Fountain, More Pure the Stream Flows >를 발표한 블러, 고릴라즈의 데이먼 알반은 ‘LA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테일러 스위프트는 스스로 곡을 쓰지 않는다”며 논란을 자초했다. 평가 절하, 여성 간의 비교, 어이없는 변명까지 현대 사회가 용납하지 않는 삼대 금기를 충족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기타 히어로에서 백신 반대 운동 투사로 직업을 변경한 에릭 클랩튼은 유튜브 라이브를 통해 “제약회사들에게 속아 백신을 접종”했노라며 접종자들은 ‘집단 최면 형성’ 이론의 희생자들이라 열변을 토했다. 과거의 유산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더는 애써 그들의 행동을 옹호하고 싶지도 않다. 스스로의 권위는 스스로가 지켜야 한다.

Categories
특집 Feature

제 63회 그래미 시상식 결산 편

다양성과 공정성이라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그래미 어워드가 범세계적인 전염병 때문에 행사 날짜까지 옮겼다. 붉은 융단 위에 별들이 쏟아지던 그때 한국은 3월 15일 아침 9시였다.

제 63회 그래미 시상식은 무관중인 상태에서 마스크를 착용했던 여타의 국내 시상식처럼 익숙한 방식으로 진행됐다. 지난 어워드에서 두 차례 연속으로 사회를 맡았던 앨리샤 키스를 대신해 이번에는 언변이 남다른 코미디언 트레버 노아가 마이크를 잡았다. 코로나로 인해 달라진 식순과 돌발상황에 대비함과 동시에 꾸준히 제기되고 있는 논란의 감정을 내려놓고 축제 자체를 즐기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코로나에 대응하는 방식

매년 특별한 협업 스테이지를 선보이던 그래미가 코로나의 영향으로 그 규모를 줄였다. 대편성의 무대가 압도하던 과거와 달리 대부분의 뮤지션이 간단한 구성으로 자신의 노래를 한 곡씩 부르고 마치며 ‘2020년’이라는 이름의 플레이리스트를 채웠다. 카메라를 다각도로 활용한 배드 버니와 제이 코르테즈의 ‘Dakiti’, 복고적인 색채와 조명이 잘 묻어난 실크 소닉(앤더슨 팩과 브루노 마스)의 ‘Leave the door open’ 무대가 무관중에 의한 중계의 이점을 적절히 살린 예다.

인상적인 부분은 공연 중간중간 카메라에 잡히는 뮤지션들의 얼굴이다. 관중이 없기에 공연자가 관객이 되고, 관객이 다시 공연자가 되는 이 모습은 마치 아티스트끼리 여는 뒤풀이 파티와 같았다. 자신의 차례가 끝난 뒤 술인지 물인지 모를 잔을 들고 앉아 있는 배드 버니부터 카디 비와 매간 더 스탈리온의 무대를 미친 듯 즐기는 포스트 말론까지 재밌는 장면이 아닐 수가 없다. 관중이 없다고 열기가 식지는 않았다.

코로나 대응 공연보다 대단하고 놀라웠던 점은 따로 있다. 경영난에 처한 내슈빌의 스테이션 인, 뉴욕의 아폴로 시어터 등 총 4곳의 소규모 공연장 직원들이 주요 부문 후보를 소개하며 공연 업계의 실정을 알린 부분이다. 국내에서도 화제인 이 문제에 대해 대중음악의 본토인 미국, 그중에서도 권위 있다는 단체에서는 이를 어떻게 조명하고 고민하는지 엿볼 수 있었다. 이외에도 올해의 레코드 부문 후보의 인터뷰를 티저로 만들거나, 공연을 녹화본으로 대처하며, 화상으로 시상식에 참여하는 등 세심한 준비가 돋보였다.

역사의 절차를 밟아가는 방탄소년단

한국 가수가 그래미 어워드에서 단독 공연을 할 줄이야. 녹화 중계였지만 여의도 빌딩의 헬리패드까지 올라가서 노래하는 BTS를 전 세계가 지켜봤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무대 사이즈로만 보면 제 63회 그래미 시상식 무대 중에서는 최대 크기였다. 제 61회에서는 시상자로, 제 62회에서는 릴 나스 엑스와 함께 노래했던 이력을 생각하면 단계적으로 나아가고 있는 상황이다.

퍼포머로 참여한 것뿐만 아니라 베스트 팝 듀오/그룹 퍼포먼스 부문에도 ‘Dynamite’로 이름을 올렸다. ‘Rain on me’를 부른 레이디 가가와 아리아나 그란데에게 아쉽게 트로피가 넘어갔지만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큰 성과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해외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카디 비의 ‘WAP’ 같은 노래와 비교해 ‘건전’ 가요 & 가수로 불리고 있다니 생각도 못 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논란을 잠시 잠재우다.

인종차별부터 남녀차별까지 매년 습관처럼 욕을 먹던 레코딩 아카데미(레코드 예술 과학 아카데미, NARAS)가 심사위원단을 대폭 개편하면서 제 61회 그래미 시상식에서는 본상을 차일디시 감비노에게 2개, 두아 리파와 케이시 머스그레이브스에게 각각 1개씩 수여해 조금은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작년 빌리 아일리시에게 주요 부문 4개를 쓸어주며 ‘몰아주기’ 논란을 다시 가중했다. 

빌보드 HOT 100에서 ’Blinding lights’로 1년 동안 10위권을 지킨 대기록의 주인공 위켄드가 제 63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후보 무관에 그치자 그는 영원한 보이콧을 선언했다. 시상식 전부터 연일 얘깃거리였다. 이러한 여러 문제를 의식한 듯 이번에는 시상식의 주요 부문을 안전하게 ‘나눠주기’로 결정했다. 올해의 레코드, 앨범, 노래, 그리고 신인상을 빌리 아일리시의 ‘Everything I wanted’, 테일러 스위프트의 < Folklore >, H.E.R의 ‘I can’t breathe’, 그리고 메간 더 스탈리온이 수상하며 장내 가장 큰 갈채를 받았다.

후보만 봐도 반 이상이 여성이고 흑인과 백인이 반반이다. 그중 ‘I can’t breathe’는 BLM을 대표하는 노래다. 위켄드 개인과 팬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며, 그의 사건은 분명 레코딩 아카데미에 문제가 있음을 알려주고 있지만, 올해의 본상 결과는 아카데미 위원회도 이제 대중과 사회의 눈치를 보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제 63회 그래미 시상식의 주인공

진정한 주연은 따로 있었다. 9개 부문의 후보에 오르고 4개 부문을 수상한 그의 이름 비욘세. 제 63회 그래미 어워드 후보와 수상에서 최다를 기록했지만 이는 귀여운 수준이다. 올해 베스트 알앤비 퍼포먼스, 베스트 랩 퍼포먼스, 베스트 랩 송, 베스트 뮤직비디오를 거머쥐면서 그는 역대 총 28개의 그래미상을 따냈다. 여성 최다 수상자임과 동시에 남자를 포함하면 거장 프로듀서 퀸시 존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공동 2등이다.

비욘세에 이어 주인공이 또 있다. 본상을 2년 연속 수상한 빌리 아일리시다. 작년 주요 부문을 싹쓸이한 후 그가 받은 ‘레코드 오브 더 이어’의 타이기록은 U2와 로버타 플랙만이 가진 진기록이다. 빌리 아일리시에 이어 주인공이 또 있다. < Fearless >, < 1989 >, 그리고 2020년 포크를 시도하며 예술성을 인정받은 < Folklore >로 ‘앨범 오브 더 이어’를 3회나 수상한 테일러 스위프트다. 엔지니어를 제외한 뮤지션으로서는 프랭크 시나트라, 스티비 원더 등과 같은 레전드들과 동일한 선상에 섰다. 빌리 아일리시와 테일러 스위프트의 나이를 생각하면 이는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음악으로 치유하다.

코로나의 영향인지 지난 한 해도 우리의 곁을 떠나간 사람들이 많았다. ‘로큰롤의 왕’ 리틀 리처드, ‘갬블러’ 케니 로저스, 작년 그래미 평생 공로상을 받은 존 프라인, 코로나 위로송 ‘You’ll never walk alone’의 주역 제리 마스던 등 트리뷰트한 뮤지션만 이 정도다. 팬데믹 상황의 힘든 위기 속에서 우리가 그들의 음악으로 치유를 받고, 한데 모여 떠난 이들을 기리는 이런 자리는 그래미 어워드가 아니면 힘들었을 것이다. 집에서만 머무르던 2020년 ‘음악’은 가장 큰 치료제였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이번 시상식은 성공에 가까웠다. 본상 수상자와 각종 기록을 세운 뮤지션들이 이를 증명한다. 여성 컨트리 뮤지션 미란다 램버트, 마렌 모리스, 그리고 흑인 여성 컨트리 뮤지션인 미키 가이턴의 공연까지 집중 조명하며 형식적인 노력까지 놓치지 않았다. 아시아 가수 BTS도 빼놓을 수 없다.

물론 레코딩 아카데미 심사위원들은 다양성이라는 주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신경 쓰기도 전에, 흑인과 여성 뮤지션으로 대표되는 다양성의 세상이 이미 도래했다.

Categories
Album POP Album

테일러 스위프트(Taylor Swift) ‘evermore'(2020)

평가: 4/5

‘곡 쓰기를 멈출 수 없었다’는 수줍은 고백과 함께 테일러 스위프트는 해가 가기 전 < folklore >의 자매작(Sister Records)을 공개했다. 비틀즈, 엘튼 존, 톰 웨이츠, 브루스 스프링스틴 등 한 해 두 장의 정규 앨범을 발표했던 전설들의 발자취를 따르며, 고통스러웠던 지난날을 통해 더욱 단단해진 자아로 왕성한 창작욕을 증명하는 기록이다. ‘구전(口傳)’으로 스스로를 치유했던 테일러는 31세의 자신에게 주는 생일 선물과 같은 이 작품으로 ‘영원’을 꿈꾼다. 

< folklore >와 동일한 재료로 지어진 < evermore >의 세계는 언뜻 단순한 속편처럼 들리나 그 아래에는 훨씬 깊고 정교한 세계가 생동감 있게 호흡하고 있다. 자전적인 고백의 메시지가 주를 이루던 전작과 달리 본작에는  ‘Love story’의 하이틴 컨트리 로맨스와 ‘ivy’의 불륜, ‘no body, no crime’의 살인극, 대프니 듀모리에로부터 영감을 받아 조모의 이름을 붙인 ‘marjorie’ 등 다양한 설화가 21세기의 그레이트 아메리칸 송북을 꿈꾸는 태피스트리 위 수놓아진다. 다면의 페르소나를 규합하는 테일러 스위프트의 지휘 아래 전작의 설계도를 그린 더 내셔널의 아론 데스너, 본 이베어가 조력자의 역할에 충실하다. 실크처럼 부드러운 포크, 재기 발랄한 소녀의 컨트리, 1990년대 얼트 록의 반항기와 일말의 진지함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willow’의 ‘1990년대 트렌드보다 더 강하게 돌아왔다’라는 선언이 조곤조곤하나 굳은 확신으로 가득 찬 이유다. 글로켄슈필, 프렌치 혼, 첼로 등 클래식 악기와 아론 데스너의 미니멀한 정서를 교합하며 데뷔 초 과거의 자취를 가져온 뮤직비디오까지 직접 감독한 이 곡의 주도권은 온전히 테일러에게 있다. 현 연인 조 알윈의 가명 윌리엄 바워리(William Bowery)와 함께한 챔버 팝 ‘champagne problems’에서 캠퍼스 커플의 선택을 애틋하게 바라보다 잭 안토노프의 리듬감 있는 박동 위 부와 명예를 경계하는 ‘gold rush’로 자의식으로의 전환을 가져오며, ‘’tis the damn season’과 ‘cowboy like me’에서는 유년기 내슈빌의 베테랑들이 사사한 보편의 연애담을 읊는다. 

상상과 현실을 분주히 오가는 스토리텔링은 < folklore >의 보편보다 아티스트의 개인과 밀접히 맞닿아있다. 이는 앨범을 더욱 복합적이고 흥미롭게 구성하는 주요 요소다. 가슴 아픈 ‘exile’을 따라 여린 떨림으로 눈물을 삼키는 ‘tolerate it’까지 목가적인 무드 속 여류 시인의 면모에 안심할 때쯤 하임(HAIM) 세 자매와 함께한 ‘no body, no crime’으로 비정한 서부극의 한 장면을 가져온다. 더 내셔널을 초청한 ‘coney island’를 통해 ‘Blank space’로 서랍에 고이 넣어두었던 전 연인들의 명단을 다시금 슬쩍 꺼내보이기도 한다. 

테일러의 짓궂은, 또는 야심으로 가득한 구성은 앨범의 끝단에서 분명한 반전을 의도한다. 잘게 부서지는 노이즈로 충격을 안긴 다음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하게 5/4박자의 차분한 전반부로 돌아가는 ‘Closure’, 작품을 마무리하는 ‘evermore’에서는 전작에서 잔잔히 테일러와 호흡을 맞추던 본 이베어에게 소용돌이치는 혼란과 고독을 허락하며 짙은 흔적을 남긴다. 서두의 고백이 더 이상 수줍게 들리지 않는 지점이며, 지적인 < evermore >의 세계가 충동과 파토스 대신 정교하게 쌓아 올린 로고스와 야심의 건축물임을 체감하며 감화를 멈추게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 일말의 이질감은 전체적으로 < folklore >의 상징성과 견줄, 훌륭한 적응 및 확장의 면모를 보이는 이 작품 앞에서 덮고 넘어가도 될 정도의 흠이 된다. 아티스트가 완벽히 타인을 연기했다면 그 인공미가 두드러졌을 터나, 그는 분명히 수많은 등장인물들 속에 본인의 페르소나를 은은하면서도 선명하게 투영하고 있다. 빠른 노선 전환과 다작(多作) 속 풍부히 끌어안고, 섬세히 세공하며, 끝내 자신의 정체성으로 빚어내는 테일러 스위프트의 창작 과정은 그가 우리 시대 드문 탁월한 재능의 팝스타임을 증명하고 있다. ‘영원’을 위한 발걸음이 신중하고도 찬찬하다.

-수록곡-
1. willow
2. champagne problems
3. gold rush
4. ’tis the damn season
5. tolerate it
6. no body, no crime (feat. HAIM)
7. happiness
8. dorothea
9. coney island (feat. The National)
10. ivy
11. cowboy like me
12. long story short
13. marjorie
14. closure
15. evermore (feat. Bon Iver)

Categories
특집 Feature

[특별 기획 ‘미국’] 6. 케이팝 팬덤이 사회정의를 부르짖는 이유

부모 마음대로 되는 자식이 아무도 없다고 하지만, 한국에서는 정치와 담을 쌓은 케이팝이 되려 미국 정치에 휘말리는 아이러니를 예측한 케이팝 기획자가 있을까. 케이팝 팬덤은 올해 6월 오클라호마 털사(Tulsa)에서 개최된 트럼프 대통령의 유세에서 백만 건이 가까이 이루어진 가짜 참석 신청의 배후가 자신들임을 주장했고, 그 이전에도 백인우월주의나 극우 이념에 관련된 해시태그를 케이팝 이미지와 영상으로 도배하는 등 정치적 목소리를 거침없이 내고 있다. 예상치 못한 전개지만 케이팝 팬덤과 정치의 결합은 이미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 연결고리를 들여다보면 앞으로 케이팝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단서도 찾을 수 있다.

케이팝의 세계적 인기에서 유념할 점은, 그 시작점이 주변부였다는 사실이다. 방탄소년단이 빌보드 차트 1, 2위를 한 번에 차지하는 나날이 있기 전에도 케이팝 팬들은 존재했으나, 이들은 멸시나 조롱, 혹은 무시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일종의 마니아 문화로 시작한 탓도 있겠지만, 문화의 생산자나 소비자들에 대한 편견도 분명하게 작용했다. 클래식 음악이나 커피, 와인처럼 소수가 몰입해서 소비하는 문화가 무조건 천대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케이팝의 ‘성공’이 완성하는 언더독 서사는 이런 배제의 역사에서 설득력을 얻고 팬들을 결집시킨다.

미국 케이팝 팬덤은 크게 보면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코스프레 같은 긱(geek)들의 문화와 그 뿌리를 공유한다. 단적인 예시로 케이콘(KCON)이 있다. 한국의 대중음악을 사랑하는 수만 명의 팬들이 로스앤젤레스나 뉴욕으로 몰려드는 이 축제는 미국 케이팝 팬덤의 주요 행사 중 하나다. 만화 팬들의 코믹콘(Comic-Con)이나 게임회사 블리자드의 블리즈컨(BlizzCon) 같은 박람회와 비슷한 양상이다. 한류는 서브컬쳐를 소비하는 사람들의 활동 영역에 들어와 있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는 게임과 만화, 케이팝 같은 서브컬쳐 커뮤니티의 큰 축이다. 생각해보면 케이팝 팬들이 트위터나 틱톡을 통해 활동하는 것은 한국 케이팝 팬덤의 특성을 떠나서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면 케이팝이 정치나 사회정의(social justice)와 어느 지점에서 교차하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케이팝을 논할 때 그 음악이 가진 소구력의 실체를 부정한 채 인기를 괴현상 보듯 하는 시선들이나, ‘진보 성향의 요즘 애들이 이상하게도 한국의 음악을 좋아하더라’는 미국 보수진영의 해석이 이 수준에서 멈춰있다.

케이팝이 미국에서 인종과 나이, 성별을 초월한 공감대를 이끌어낸 이유는 일종의 문화적 대안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뻔하고 지루한 음악에 질린 미국 대중들에게 새로운 재미를 선사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그런 이유로 케이팝을 소비하기 시작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오히려 그 반대다. 케이팝 팬들은 미국 음악계, 연예계의 자극적이고 저질인(trashy) 논란으로 가득한 모습에 대한 대안으로 ‘착한'(wholesome) 한류 뮤지션을 소비한다.

칸예 웨스트는 2009년 MTV 비디오 뮤직 어워즈에서 수상소감을 말하는 테일러 스위프트의 마이크를 뺏었고, 저스틴 비버는 아이돌로 활동하던 2013년 식당의 걸레통에 소변을 봤다. 2015년의 아리아나 그란데는 도넛에 침을 발랐는가 하면, 도자 캣(Doja Cat)은 백인우월주의 채팅방에서 인종주의적 발언을 한 영상이 올해 공개됐다. 미국에서 차트 1위를 하는 슈퍼스타 뮤지션들에 대한 소식은 이들의 실력 못지않게 비대한 자아와, 이를 연료 삼아 끊임없이 논란에 불을 지피는 티엠지(TMZ)같은 가십 전문지가 내뱉는 황색 저널리즘의 온상이다.

아이돌을 필두로 한 한국의 대중음악이 미국에 알려지는 과정에서는 뮤지션의 비대한 자아도, 미국 유사 언론의 관심도 부재했다. 미국의 케이팝 팬들 중 주류사회에서 배척당하는 소수자들, 사회정의나 정치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의 실마리가 여기서 풀리기 시작한다. 자신들이 인식하고 있는 사회의 폭력적인 구조들을 그대로 재생산하는 미국의 주류문화에 염증을 느낀 이 사람들은, 타인을 깔보거나 하대하기는커녕 예의와 존중으로 무장한 한국 아이돌들의 페르소나를 보고 공론장을 정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투사한다. 이 ‘착함’의 실존 여부와 상관없이 말이다.

출발점이 어디였든 케이팝이 지금 미국 팬들에게 받는 기대는 선함 그 자체에 대한 것이다. 케이팝 팬덤이 커지면서, 기획사들이 팔고 있는 이미지와 그 뒤에 숨겨진 ‘본질’ 사이의 간극을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이젠 들려오고 있다. 문화전유나 뮤지션, 연습생의 인권에 대한 지적은 모두 이런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미국에서 ‘주류’와 ‘비주류’에 대한 기준을 독점하고 있는 사람들은 점점 소수가 되어가고 있다. 케이팝이 영미권에서 진정한 승리를 거두려면 멋진 음악과 영상 이상의 섬세함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Categories
특집 Feature

[특별 기획 ‘미국’] 5. Intersectionality: 여러겹의 정체성이 교차하는 음악

억압받는 약자에 대한 담론 중에서 페미니즘은 오늘의 대중에게 가장 익숙한 단어 중 하나다. 그 의미나 정의에 대한 합의는 요원하지만, 일단 사람의 경험이나 정체성을 읽어낼 때 성별에 더 무게를 두고 해석하는 담론은 널리 퍼져있다. 뮤지션들 역시 자아를 음악에 담아내기에, 이들의 작품과 페르소나를 이해할 때도 페미니즘은 유용한 인식의 틀을 제공한다. 그러나 사람의 정체성은 입체적이기에, 성별이라는 단일차원에서 바라보면 반드시 놓치는 부분이 생긴다. 정체성의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을 이해하면, 음악에 담긴 이야기들과 이를 둘러싼 논란들의 맥락이 보다 명료하게 드러난다.

미투 운동이 세상을 휩쓴 후, ‘페미니스트 뮤지션’의 브랜드를 획득한 인물들이 몇 명 있다. 타임지가 미투 운동을 조명해 ‘침묵을 깬 사람들’을 2017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을 때 표지에 얼굴을 올린 테일러 스위프트가 그중 하나다. 2013년 MTV 비디오 뮤직 어워즈(VMA) 무대에서 로빈 시크(Robin Thicke)와의 무대에서 파격적인 트월킹을 선보이며 전통적인 여성상에 대한 반론을 내놓은 마일리 사이러스 역시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열렬한 페미니스트’라고 인터뷰했다.

팝스타의 반열이 아니더라도, 피오나 애플(Fiona Apple)은 8년 만에 내놓은 새 앨범 < Fetch The Bolt Cutters >에서 모두 ‘절단기를 들고 와’서 직접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라는 메시지를 보내 평단의 사랑을 받았다. 라나 델 레이(Lana Del Rey)는 2019년 발매한 후 그 내용이 ‘부드러운 페미니즘'(soft feminism)의 필요성을 강조한다고 말해 논란에 불을 지폈다.

어떤 사람이나 발언이 ‘페미니스트’인지에 대한 대략적인 이미지는 이미 대중문화 속에 퍼져있다. 예컨대 자신의 욕망과 생각을 거침없이 이야기하는, ‘걸크러쉬’에서 조금 진화한 여성의 모습이다. 테일러 스위프트, 마일리 사이러스, 피오나 애플, 라나 델 레이 같은 뮤지션들이 페미니스트 아이콘으로 조명받는 이유 역시 이들이 그 이미지에 잘 들어맞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들은 여성성 이외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모두 포크 음악과 관련 있는 백인이라는 점이다.

이들 여성의 목소리가 의미 없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이들이 모든 여성을 대표하는 것으로 일반화하기엔 너무 많은 맥락이 지워진다. 예를 들어, 마일리 사이러스가 트월킹을 하면서 내놓은 ‘얌전하지 않은 여성’의 이미지는, 영미권에서 백인 여성들이 항상 가정적이고 수동적인 역할을 강요받아온 역사의 연장선이다. 반면 이세벨 스테레오타입(Jezebel stereotype), 옐로우 피버(yellow fever) 등의 시선으로 언제나 극한의 성적 대상화를 당해온 흑인이나 동양계 여성의 경험을 마일리 사이러스가 제대로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라나 델 레이가 ‘부드러운 페미니즘’을 옹호했을 때 논란이 일어난 것 역시 그가 이런 맥락을 무시하는듯한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 Norman Fucking Rockwell! >이 학대를 미화한다는 비판에 대해 그는 비욘세, 도자 캣(Doja Cat), 카밀라 카베요 등 유색인종 뮤지션들을 언급하며 이들이 ‘섹시’를 앞세워 차트 1위를 했고, 자신도 13년간 여성의 입장에 대해 노래해 왔는데 왜 자기만 욕을 먹어야 하냐는 반응이었다. 정체성의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에 대해 무감각한 언사다.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은 사실 법조계에서 처음 사용된 단어다. 그 계기는 1976년 자동차 제조사 제너럴 모터스(GM)가 흑인 여성에게 채용상 불이익을 준 일인데, 흑인에 대한 차별 금지법도, 여성에 대한 차별 금지법도 이를 막을 만한 근거가 되지 못했다. GM이 흑인 남성과 백인 여성을 채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별을 바라볼 때 모든 흑인, 모든 여성이 그룹별로 같은 방식으로 차별받는다고 생각한다면, 흑인 여성을 포함한 유색인종 여성의 경험들은 지워질 수밖에 없다. 형태주의에서 말하는, 전체는 그 부분의 합 이상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백 명의 사람이 있다면 백 가지의 페미니즘이 있기에, 모든 여성 뮤지션의 메시지가 저마다 의미 있다.

인종이나 사회, 경제적 배경 등을 고려하고 여성 뮤지션들의 음악을 보면 다채로운 페미니즘을 볼 수 있다. ‘Run the world (Girls)’가 흑인이자 걸어 다니는 대기업인 비욘세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곡이 실제로 전달하는 메시지는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다(과연 정말 세상을 주도하는 것은 여성인가, 아니면 비욘세인가?). 미츠키(Mitski)가 강렬한 기타 톤을 앞세워 외롭다고 소리치는 모습 역시 동양인 여성들은 얌전하고 가부장에게 복종하는 이미지가 있기에 훨씬 강렬하게 다가온다. 성 소수자자 Z세대인 킹 프린세스(King Princess)가 부르는 사랑 노래는 화자의 입장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뻔하게 들린다.

‘페미니스트 뮤지션’의 전형으로 다시 돌아와 보면, 이 단어의 실체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쩌면 오히려 여성의 목소리를 지켜내는 접근법일 수도 있겠다. 여성성 하나로 정의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음악에 담긴 이야기를 여성성 하나에 대한 이야기로 해석하면 당연히 많은 부분이 지워진다. 여성에 대한 이야기로 논리를 전개했지만, 상호교차성은 정체성 그 자체에 대한 인식의 틀이다. 그 어떤 개인도 절대적인 약자, 혹은 강자일 수 없다. 이분법을 벗어나 음악에 담긴 사람을 온전히 직시했을 때 그의 이야기가 더 또렷하게 들리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