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난기를 덜어내고 본연의 스모키한 음색으로 깊은 재즈와 알앤비를 선보이는 미노이의 신곡이다. 온기를 가득 머금은 제철 재료로만 버무린 ‘마치’는 래퍼 키드밀리와 밀고 당기듯 주고받는 멜로디 라인으로 떠날 준비를 마친 봄의 끝자락을 붙잡고자 한다.
색감과 향, 빠진 것 없이 보기 좋게 차려진 음식이지만 조리 순서의 문제일까? 곱씹을수록 조화를 이루지 못한 구성품들이 귓가에서 충돌한다. 따로 두었을 땐 더할 나위 없는 보컬과 랩은 서로의 주장이 너무 강해서 절이 교차되는 사이마다 거칠게 어깨를 부딪치며, 결국 둔탁해진 선율은 시작부터 끝까지 반복되는 후렴구만을 각인한다. 찾아올 여름의 열기를 뚫기엔 부족하지만, 잠시동안 곁에 머물 계절의 여운이다.
몇 년 전부터 방송 프로그램과 음악계에 ‘부캐 놀이’ 유행이 휘몰아쳤다. 트렌드의 맥이 끊기기 직전, 프로듀싱 팀 그루비룸의 휘민은 ‘Achoo remix’에서 래퍼의 면모를 드러냈던 릴 모쉬핏으로 다시 등장했다. 갑작스러운 데뷔 앨범 발매 소식이 만우절 장난이라는 추측도 있었으나 이번엔 예상했던 래퍼가 아닌 힙합 프로듀서로서 < AAA >를 내놓았다.
새 페르소나로 음반을 발매한 것은 두 자아를 근본적으로 구분 짓기 위한 선언이다. 릴 모쉬핏은 그루비룸을 대표하는 감각적이고 대중적인 팝 대신 음울하고 거친 분위기와 해외 유행을 이식한 세련미를 장착했다. 나아갈 방향을 알리듯 서두부터 조준점이 명확하다. 인트로 ‘Moshpit only’는 피에르 본식의 트랩 비트와 폴 블랑코의 자신감 넘치는 랩으로 마초 이미지를 불러온다.
본체의 그림자를 완전히 거둬들이지는 않았다. 단짝 박규정과 함께 프로듀싱하며 듀오의 정체성을 유지하되 전체적인 콘셉트 설정은 단독 권한으로 가져왔다. 래퍼 혹은 프로듀서 이상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고 싶다는 인터뷰처럼 릴 모쉬핏은 국내 힙합 플레이어들을 조명하고 외국 힙합의 트렌드를 끌어와 큐레이터의 역할을 맡았다.
키드밀리, 소코도모 등 국내 래퍼부터 미국의 에이셉 앤트, 스트릭까지 힙합 본토와의 연결고리를 마련했다. 유명세를 묻지 않고 기용한 신예 프로듀서들의 신선한 사운드도 든든하다. 특히 비엠티제이와 구스범스가 만든 ‘Yooooo’의 중독적인 신시사이저와 ‘Bo$$’의 분위기 전환은 히트메이커의 번뜩이는 직감을 보여준다. 하트코어 레디와 스월비의 호흡에 세사미의 비트를 더한 ‘Die hard’ 역시 킬링 트랙.
흑인 음악 뮤지션으로 채워 넣은 크레디트와 내적 요소 모두 국내 힙합의 최전선을 포착한다. 최신 경향을 보여주는 모범적인 지표지만 균열 또한 같은 지점에서 일어난다. 앨범의 제목인 ‘All Arena Access’의 개척적인 의미와 달리 외국 힙합의 규격을 넘어서는 대범함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시너지를 일으킬 모험적인 시도는 없었지만 스타와 신예, 국내와 해외를 결합한 영역 확장에는 성공했다.
-수록곡- 1. Moshpit only (Feat. Paul Blanco) 2. Gotta lotta shit (Feat. Dbo, Sokodomo, Kash Bang) 3. Yooooo (Feat. 키드밀리, Sokodomo, Polodared) 4. A-Team freestyle (Feat. A$ap Ant, Bill Stax, Strick, 미란이) (추천) 5. Slatty slut (Feat. 식케이) 6. On the block (Feat. 쿠기, Ourealgoat, Leellamarz) 7. Die hard (Feat. Reddy, Swervy) (추천) 8. Bo$$ (Feat. Saay, Big Naughty, Goosebumps) (추천) 9. Back in my area (Feat. Ggm Lil Dragon, Lil Gimchi, Skinny Brown, June One)
국내 힙합 신의 트렌드세터 키드 밀리는 변화를 겁내지 않는다. 올해 < Cliché >로 빼어난 협업을 이룩한 프로듀서 드레스와의 연이은 상승효과를 목표한 ‘Kitty’는 전작의 견고한 구성과 상반된다. 서사의 전개를 잠시 멈추고 반려묘에 대한 애증을 담은 일상적 소재로 한결 힘을 뺐다.
폭넓은 장르 스펙트럼을 보유한 듀오의 작법이 감지된다. 록 문법을 장착한 비트는 조이 디비전이 연상되는 베이스라인을 내세우고 그 위에 얹은 세련된 랩 스킬은 바짝 날이 서 있다. 여기에 걸그룹 (여자)아이들의 메인 보컬 미연이 준수한 음색을 선보이며 이질감 없이 스며든다. 호흡을 고르며 재단한 곡에 큰 감흥은 없어도 예상 밖의 주제와 조합으로 기대를 충족한다.
2010년 데뷔작 < Afterwork >부터 2019년 3집 < Don’t think too much >까지 꾸준한 수작을 내놓으며 힙합, 알앤비 신에서 입지를 다져온 진보가 최근 새 레이블로 둥지를 옮겼다. 새로운 활동지는 스윙스가 중심을 잡고 있는 ‘저스트뮤직’. 동료의 합류를 축하하는 자리에 스윙스가 세운 ‘인디고 뮤직’의 키드 밀리까지 함께 힘을 보탰다.
변화보다 기존 스타일에 집중하며 세 번째 정규 앨범에서 선보였던 넵튠스와 엔이알드의 퍼렐 윌리엄스식 사운드를 꺼내와 자신의 강점을 강조한다. 음향적으로 여유 있는 비트 위에서 악기들은 과하지 않게 펑키한 리듬을 뽐내고, 진보의 목소리는 개성을 완성하며 곡에 마침표를 찍는다. 탄탄한 피처링진 앞에서도 자신 위치를 확고히 다지는 보이스가 화룡점정. 바뀐 점이라고는 레이블뿐, 진보는 여전하다.
‘트렌드세터’. 인디고 뮤직 소속 키드 밀리는 현 국내 힙합 신에서 이 별칭과 가장 잘 어울리는 래퍼다. 전자음을 적극 가미한 정규 앨범 < AI, The Playlist >가 슈퍼 루키의 열정으로 자신이 일으킬 파장을 예고한 뒤, 그는 음악뿐 아니라 패션 등의 외적인 영역에서도 유행을 주동해왔다. < 쇼미더머니 >에 지원자와 프로듀서로 출연하면서도 보여준 성실한 작업량도 놀라웠다. 신의 주목 너머 튼튼한 신뢰도를 이끈 그는 미니멀한 비트에 특화된 나른한 톤, 촘촘하게 쪼개지는 스타일리쉬한 플로우가 특장점이다.
< Maiden Voyage II > 싱글 ‘Home’의 ‘난 앨범마다 다른 것도 하고 싶어’라는 선언을 증명하듯, < Beige 0.5 >에서 감성적인 싱잉 랩을 시도하는 등의 변화도 그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키워드다. 프로듀서 드레스와 합작한 이번 앨범 역시 그러한 확장의 태도를 이어간다. ‘1 MC, 1 프로듀서’ 구성임에도 그간 힙합, 일렉트로니카, 얼터너티브 알앤비 등의 장르를 아울러온 프로듀서가 역량을 제한하지 않고 전면으로 피력해 폭넓은 들을 거리를 확보하는 게 특징이다.
드레스의 활동반경은 두 외관을 연결한 전위적인 다수 곡에서 돋보인다. 켄드릭 라마 ‘Alright’이 연상되는 ‘Face & mask’와 오케이션이 함께한 ‘Bankroll’이 그렇고, ‘Cliché’ 후반부의 먹먹한 비트는 이전 절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며 래퍼의 감정선을 끌어올린다. 밴드 끝없는잔향속에서우리는이 참여한 ‘Midnight blue’와 ‘Citrus’에서 끌어온 록 문법으로 인간미를 회복하기도 한다. 특히 ‘Citrus’의 자연스럽고 정갈한 밴드 사운드 타격은 비상하는 새처럼 자유롭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형상화하는 백미다.
이렇게 상투성을 거부하는 두 뮤지션의 합작을 ‘클리셰’라 칭한 것에서부터 일종의 도발을 감지하는데, 이 뿐만 아니라 작품에는 하나의 변칙이 더 자리하고 있다. 차례를 흩트려놓은 트랙 리스트가 그것이다. 음원 사이트상의 곡 순차가 청자의 흥미를 유도하는 자극적인 뱅어를 초반에 배치했다면, 음반 소개에 언급한 번호 나열은 키드 밀리의 스토리텔링을 확인할 수 있는 내러티브 순서다.
랩 스타의 삶에 느낀 회의, 성공 이후의 과시, 그 끝의 회한과 고민을 마주하는 키드 밀리의 서사는 다단하게 얽히다가도 유기적이고 명징한 아티스트의 고백을 피워낸다. 시국에 대한 사유와 예술에 대한 의구심을 담은 ‘Face & mask’의 메시지가 특히 와닿는다. 내면 깊숙이 가라앉는 후반부에서 일종의 동정심을 유발한다는 점도 흥미롭다. 그의 개인적 결핍과 인간적 면모는 사랑에 목마른 ‘Cliché’와 조곤조곤 랩을 읊조린 ‘Outro’의 가족과 타자를 향하는 시선에서 빛난다.
수준급 음악적 요소들에도 약간의 까다로움은 있다. 뱅어 ‘Vision 2021’과 ‘Bittersweet’는 자신을 한껏 부풀리는데, 인상적인 구절 없이 흘러가는 노랫말이나 복잡한 영어 단어의 교차는 직선적인 전달을 방해하며 특별한 감흥 제공에 실패한다. 또한 ‘Why do fuckbois hang out on the net’만큼 중독성 강한 킬링 트랙을 기대한 이들에게 그 부재는 견고한 완성도에 채우지 못한 마지막 퍼즐 한 조각처럼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럼에도 빠른 걸음걸이 템포 ‘Challenge’의 경쾌한 플로우나 아득하고 희미하게 들렸던 < Beige 0.5 >와 비교해 안정적이 된 ‘Midnight blue’의 싱잉은 그간의 다작을 토대로 키드 밀리의 강점을 충실히 재편한다. 힙합 트렌드를 읽을 수 있는 랩과 그 아래 똬리를 튼 성찰과 사색, 이를 우수한 완급조절로 피워낸 음향의 조화로 래퍼와 프로듀서가 모두 윈윈(win-win)했다. 이 둘이 함께하는 미래가 가볍게 보이지 않는 이유다.
– 수록곡 – 1. Vision 2021 (Feat. Ron) 2. Bittersweet (Feat. Ron) 3. Challenge 4. Blow 5. Citrus 6. Face & mask (Feat. Ron) 7. Intro 8. Leave my studio (Feat. 선우정아) 9. Cliché 10. Bankroll (Feat. Okasian) 11. Midnight blue (Feat. 끝없는잔향속에서우리는) 12. Outro 13. Downtowner (CD Only) 14. Interview.01 (CD Only)